A(85세) 씨는 경기도 양평에서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22세 때 직업군인과 결혼했고, 배우자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모은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자녀는 없고 배우자가 2000년에 사망한 후 홀로 생활해왔다. 노년이 외롭기는 했지만, 배우자가 남긴 부동산과 금융자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고혈압과 당뇨를 앓아오던 A 씨에게 2009년 가벼운 뇌출혈이 발생했고 이때부터 인지장애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평소 왕래도 자주 없었던 형제와 조카들이 서로 A 씨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결국 A 씨의 큰 남동생 아들인 B(63세) 씨가 자신의 집으로 A 씨를 데려갔다. 문제는 그 후 A 씨의 재산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다른 가족들, 특히 A 씨의 막내 여동생 C(78세) 씨는 2015년에 대표로 성년후견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 씨의 부동산 대부분이 B 씨와 그의 아내, 자녀들 명의로 증여가 이루어졌고, 50여억 원에 달하던 정기예금 등 금융자산도 20여억 원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가사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그 당시 A 씨는 전라남도에 위치한 요양원 8인실에서 홀로 지냈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A 씨의 가족들이 후견개시 여부와 후견인 선정에 관해 법정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중에 C 씨가 돌연 재판 신청을 취하한 것이다. 알고 보니 C 씨는 남은 금융자산 20여억 원을 자신 앞으로 빼돌리는 조건으로 B씨와 타협을 했다. 또 근거 자료를 남기기 위해 A 씨 명의의 증여계약서를 허위로 작성했으며, 효력을 인정받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똑같은 내용의, 즉 유산을 물려준다는 A 씨 명의의 유언장까지 작성했다.
C 씨와 B 씨의 이 같은 밀약을 알게 된 나머지 가족들은 A 씨의 증여계약서와 유언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한 뒤 다시 성년후견신청을 했다. 이후 2년여 동안의 공방 끝에 A 씨에 대한 성년후견이 개시된다는 재판은 확정되었지만, 증여계약서와 유언 무효 소송이 진행되던 중 A 씨가 사망했다.
재산을 두고 가족과 친척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건은 종종 일어난다. 재산을 독식하기 위해 조카 중 한 사람을 아무도 모르게 양자로 만든 경우도 있다. 상속 순서로 따지면, 직계비속(자녀, 손자 등), 직계존속(부모, 조부모 등), 배우자가 없을 경우 방계혈족(형제자매)이 순위가 된다. 만일 형제자매까지 모두 사망했다면 그 자녀, 즉 A 씨의 조카들에게 상속권이 생긴다. 법정상속분으로 보면, 조카가 15명일 경우 15분의 1씩 상속받는다. 그런데 양자가 되거나 생전증여 또는 유증 방법으로 A 씨의 재산을 독차지(유류분은 별론)할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안하게 노년을 살려면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한다. A 씨와 같은 불행을 겪지 않으려면,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고려하자.
첫째, 임의후견계약 체결이다.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믿을 만한 사람을 후견인으로 정해두고, 그 후견인에게 어떤 권한을 줄지에 대해 미리 계약을 해두는 것이다. 이 계약은 공정증서로 체결되어 법원의 후견등기부에 등기해둔다. 시간이 흘러 실제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후견인의 업무는 시작되고, 법원에서는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해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신변과 재산을 잘 돌보고 있는지 살핀다.
둘째, 유언장 작성이다. 사후에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처분할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미리 결정해두는 것이다. 유언은 유언자의 사망 시점에 효력이 발생한다. 따라서 사망 전까지는 미리 준비해둔 유언을 철회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다만 유언은 법에서 정한 형식을 따라야 한다. 민법은 자필증서, 공정증서, 비밀증서, 녹음, 구수증서(유언자가 말로 하고 증인이 받아 적어 작성한 증서)와 같은 5가지 형태의 유언을 인정한다. 사전에 관련 정보를 검색해보거나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셋째, 신탁계약 체결이다. 신탁은 신탁자(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가 수탁자(재산의 소유권을 넘겨받는 사람, 보통은 신탁회사)에게 소유권을 넘기되, 넘긴 재산을 신탁자가 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처분되도록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하면, 재산의 명의는 넘기되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산을 사용하도록 하는 체결이다. 재산(부동산이나 예금, 주식 등)을 신탁회사에 맡기면서, 신탁자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이익(임대료, 이자, 배당소득 등)은 가져가되 사후에는 신탁자가 지정한 사람이 수익자가 되도록 정해둘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유언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자녀(수익자)가 특정 학교에 입학할 것, 결혼이나 출산을 할 것, 일정 기간 직장을 가질 것 등을 수익 분배 조건으로 해둘 수도 있다.
임의후견, 유언, 신탁의 장점은 노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는다는 데 있다. 이들 제도를 활용하면 혹여 정신적 장애를 겪게 될 때에도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법률적·경제적으로 격리되거나 보호 또는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판사로 활동. 2015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한정후견개시사건을 담당했고,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는 상속재산분할사건, 이혼과 재산분할 등에 관한 가사항소사건을 담당하는 합의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상속, 후견, 가사 분야에 있어서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한 지상파 방송의 유명 앵커가 휴대폰 불법 촬영으로 방송에서 사퇴하고 검찰의 기소를 앞뒀단다. 저녁 9시 뉴스 앵커를 맡으며 잘 생긴 외모로 인기가 많았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게 된 까닭이 대체 뭘까?
그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재수가 없어 꼬리가 잡힌 것으로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 그와 유사한 많은 사소한 범죄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흐지부지 잊혀버리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그로서는 불행한 이 ‘작은 사건’ 속에, 실은 우리 사회가 가진 뿌리 깊은 병의 단서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모습은 관리하고 치장하면서 사적인 일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병통이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이념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던 때 현실이나 일상은 논할 가치도 없는 사사로운 일일 뿐이었다. 그들은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집안일은 아녀자나 머슴들의 소관이었다. 그런 전통이 아직도 남아 오늘날 가정 일이 제 값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가치관이 종종 우리의 삶을 위선적으로 만드는 심각한 결과를 빚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누추하고 비루한 일상을 감추고 살아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꾸면 문제없을 것으로 안심했다. 그러나 청문회장에서 햇빛에 드러난 명사들의 적나라한 일상은 얼마나 처참한가. 이제는 개인적인 삶을 처음부터 관리하지 않고는 사회적 리더가 될 수 없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사소한 일상이 중요해지고 감동을 주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보다 병석의 부모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더 어렵지 않은가.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 아닐까...
한 유명 앵커의 어이없는 몰락을 보면서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승승장구가 건강한 일상에 바탕을 두지 못할 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행복은 날마다 겪는 현실에서 느끼는 것이지 박제된 관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본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영철 건국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먼저 떠난 제자 N 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N 군, 그간 잘 있었나. 자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 전 자네 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먹던 때였구먼. 그리 서둘러 떠날 줄 알았으면 고급 탕수육이라도 시켜 먹을 걸 후회가 되네. 이젠 먼 세상에 있어 이 편지를 받을 수 없겠으나 위로와 후회를 대신하여 글을 써보네.
제임스 힐턴의 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제자들이 학교를 떠나도 칩스 선생에겐 앳된 제자들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제자들의 생장점은 멈추고 영원히 학창 시절의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였네. 그렇듯이 친애하는 제자 N 군 자네도 팔팔한 청년 시절 모습으로 내 기억에 살아 있네.
자네를 처음 본 것은 밀양 낙동강변 유천 소풍 때였네. 선글라스를 쓰고 풀밭에 누워 있던 모습이 마치 알랭 들롱의 현신 같았네. 우리 과에도 저런 멋진 청년이 있나 싶었지. 그 도도하고 거만하기조차 한 자네가 가장 친애하는 제자로 남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네. 그날 자네와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지. 내게 자꾸 권하던 막걸리 덕분에 경부선 열차 추돌사고를 면한 기억이 나나? 수십 명의 인명 사고가 난 바로 그 열차를 타기로 했는데 자네가 권해서 마신 술 때문에 결국 다음 열차를 타고 말았지.
“선생님 한잔 드시고 강물처럼 흘러가입시더.”
그 절묘한 표현에 빠져 한 잔 두 잔 마신 술 덕분에 결국 기차를 놓치고, 사고를 면했지.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네.
보기와는 다르게 자네는 인정도 많고 풍류를 아는 멋진 학생이었네. 넉넉지 않은 향토장학금으로 동기들,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인정을 베풀었지. 덕분에 등록금까지 날려 먹었다는 소문도 들었네. 아마 대구대 국문과 학생들 중에서 자네의 밥 한 끼, 술 한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살아 있는 산타요, 후원자였지.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고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지. 학과 행사에 빠지면 학점 제한까지 있었건만 자네는 그날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네. 그리고 평생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지.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이었네.
자네 덕분에 나는 공부하는 학자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네. 1982년 여름부터 거창 산골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지. 자네가 소개해준 거창 할머니 집에 머물며 많은 글들을 썼지. 내가 쓴 글과 책들은 대부분 고향이 그곳이네. 선생님 영양보충 해준다며 오토바이에 싣고 오던 그 까만 봉다리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네. 그 속엔 늘 소고기 몇 근이 들어 있었지. 거창에서 위천까지 수십 리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오던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네.
내가 건국대로 옮긴 후에도 매년 여름마다 거창을 찾아가곤 했네.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그럴 때마다 자네는 잊지 않고 극진히 대해주었지.
“선생님 내가 돈 벌어 별장 하나 마련하겠슴더. 그때까지 기다려주이소.”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휠체어를 탄 불구의 몸으로 사업에 정진했지. 장애인이 된 뒤에도 까만 봉다리는 계속 배달되었고.
한번은 내가 머무는 방을 훤하게 도배까지 해놓았더군. 자네의 세심한 배려 지금도 감동이네. 서울 올라갈 때는 창고에 묻어둔 양파며, 밤, 홍당무 등 귀한 농산물을 차 안에 하나 가득 실어주곤 했지. 40년간 여름마다 거창을 빠지지 않고 간 것은 결국 자네의 훈훈한 인정과 추억 때문이었네.
어느 날 한밤중에 자네 전화를 받고 나도 울었네. 우연히 MRI 사진을 찍다가 학창 시절 교통사고 때 생긴 어깨의 뼛조각이 발견된 것이었지.
그것이 신경을 짓눌러 평생 불구의 몸이 된 것이고. 그 사실을 전하며 통곡하던 자네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 그 뼛조각 하나가 자네 인생을 망쳐놓을 줄이야.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인생이 그런 건가보네. 그러다가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폐인이 되고 말았지.
사업 실패도 무슨 보증을 잘못 서서라고 들었네. 결국 사람 좋아하고 쉽게 믿는 자네의 성품 탓이었네. 사업이 망하자 자네는 주변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혼자만의 고립된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지. 그렇게 4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통과 절망의 세월, 자네는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냈네.
그리 많던 친구들, 믿었던 친구들 다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지. 그런 게 현실이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삭막한 인간관계. 그 배신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나 역시 부끄럽고 죄스럽네. 방문은 고사하고 자네가 좋아하던 책 한 권, 시디 한 장도 못 보내준 게 한스럽네.
그렇게 신병과 외로움을 초인적으로 버티다가 육십 고개에 들어서자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 불구의 몸이 된 그때부터 30여 년의 세월, 홀몸으로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의 섬에 갇힌 4년의 세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그 세월을 홀로 쓸쓸히 지키다가 먼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 부고 소식도 이미 땅속에 묻힌 지 반년이 지나 우연히 알게 됐으니 이런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나. 작년에 공원묘지를 찾았으나 끝내 무덤을 찾지 못해 소주 한잔 나누지도 못했네.
그저 자네가 묻혀 있을 만한 무덤가에서 “문식아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불러본 게 전부였네.
내 목소리 들었는가. 군사부(君師父) 일체라면 반대로 신제자(臣弟子)도 일체일 것이네. 스승보다 먼저 떠난 제자는 불효자인 셈이지. 은사인 내가 이리 살아 있는데 먼저 세상을 하직하다니 어찌 그리 무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천하의 불효막심한 제자가 됐지만 자네는 40년간 교단생활 중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였네. 자네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들고 오던 까만 봉다리, 그 모습으로 자네를 영원히 기억하겠네.
칩스 선생은 많은 제자를 세계대전에서 잃었지. 하지만 그는 기억 속에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자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믿었네. 자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죽지 않은 것이네. 내가 살아 있는 한 자네도 살아 있는 셈이지. 영면을 비네. 곧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겠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소주 한잔 합시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겠네. 안녕.
김영철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군사관학교 전임강사, 대구대학교,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우리말글학회·겨레어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건국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하루 동안 여수를 알차게 여행하고 싶다면, 오동도를 중심으로 한 해양공원 일대를 둘러보길 권한다. 동백숲이 그윽한 오동도와 스릴 넘치는 해상케이블카, 항구 정취가 가득한 종포해양공원, 여수 밤바다를 즐길 수 있는 빅오쇼와 낭만포차 등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 걷는 내내 여수의 비췻빛 바다가 펼쳐지는 이 코스를 소개한다.
걷기 코스
여수엑스포역▶ 여수엑스포박람회장▶ 여수엑스포해양공원▶ 아쿠아플라넷 여수▶ 오동도▶ 해상케이블카(지산공원- 돌산공원 왕복)▶ 하멜등대▶ 종포해양공원▶ 이순신광장▶ 여수수산시장▶ 차량 이동▶ 여수엑스포역
여수 여행의 관문 여수엑스포해양공원
여수엑스포역을 나오면 길 건너 맞은편에 여수세계박람회장이 있다. 박람회장 주 통로인 디지털갤러리를 통과해 박람회장으로 입장한다. 디지털갤러리는 터널형 둥근 천장에 초대형 LED 스크린을 설치한 공간이다. 거대한 범고래와 해양 생물들이 스크린 속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 갤러리를 지나면 여수엑스포해양공원으로 이어진다. 우주선처럼 생긴 은빛 초대형 전시관들이 둘러섰다. 2012년 박람회가 끝난 뒤 일부 전시관만 운영 중이다. 대형 나무인형 ‘연안이’가 반기는 한국주제관에서는 상설 전시가 이뤄진다. 엑스포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빅오쇼, 아쿠아플라넷 여수, 스카이타워는 건재하다. 이 시설물 옆에 스카이플라이, 범퍼카, 카트레이싱 같은 레저 시설을 추가해 엑스포해양공원으로 재개장한 것이다.
여수의 자랑인 빅오(Big-O)는 높이 47m의 커다란 O형 조형물이다. 빅오 둘레에 분수 노즐을 설치해 워터스크린을 만들고, 홀로그램과 레이저를 쏘아 3차원 입체 영상을 선보인다. 레이저 외에 화염, 분수, 안개 등 다양한 보조장치가 총동원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빅오 근처 좌석에서는 화염의 열기와 분수와 안개의 물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치 4D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빅오 안에 여수 소녀 ‘하나’가 등장해 오염되고 파괴된 바다를 되살리자는 원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쿠아리스트의 환상적인 수중 공연
빅오 옆에 있는 원통형 스카이타워는 폐시멘트 저장고를 재활용해 만든 전망대다. 높이 60여m에 달하는 전망대에 오르면 엑스포해양공원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외벽에 설치된, 세계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파이프오르간도 특별한 볼거리다. 여수엑스포역에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1일 5회 뱃고동 음색을 내며 연주한다. 낮에는 볼품이 없으나 밤에는 무지갯빛 조명을 밝히고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내며 환상적인 자태를 뽐낸다.
빅오쇼 앞을 지나 그늘막 아래로 걷다 보면 아쿠아플라넷 여수에 도착한다. 이곳의 360° 돔 수조와 초대형 메인 수조 안에 약 280여 종, 3000여 마리의 해양 생물이 살고 있다. 물고기 떼가 돔 수조를 오가며 관람객 머리 위를 지나 발밑으로 사라지는 풍경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아쿠아플라넷 여수의 관람 포인트는 각종 공연을 챙겨보는 것이다. 메인 수조에서 펼쳐지는 수중발레와 탭댄스, 마술, 물고기의 식사시간이 매우 흥미롭다. 식탐 많은 가오리들이 아쿠아리스트를 에워싸고 작은 입으로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스릴만점 여수해상케이블카와 사랑의 섬 오동도
아쿠아플라넷 여수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오동도 입구가 나온다. 오동잎을 닮았다는 오동도는 육지와 약 768m의 방파제로 연결돼 있다. 방파제를 걷거나 동백열차를 타고 갈 수 있다. 오동도에는 동백나무 약 3000여 그루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화살 재료로 사용했다는 시누대를 비롯해 약 194종의 희귀 수목이 산다.
길 양옆에 늘어선 동백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뻗어 천연 터널을 이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오동도 정상의 등대 전망대와 해안절벽 속 용굴을 들르게 된다. 여수 사람들은 오동도를 ‘사랑의 섬’이라 부른다. 연인들이 데이트 장소로 즐겨 찾기 때문이라고.
오동도에 많이 피는 동백꽃은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지녔다. 사랑 고백하려면 왠지 오동도에 와야 할 것 같다. 오동도에서 나와 여수 여행 필수 코스가 된 해상케이블카에 탑승하기로 한다. 오동도 입구에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지산공원 케이블카 탑승장에 오른다. 케이블카는 바닥이 강화유리로 된 크리스털 캐빈과 일반 캐빈 두 종류가 있다. 성인 왕복 기준 7000원 차이가 나는데 날이 좋다면 크리스털 캐빈을 추천한다. 바닥이 투명해서 거북선대교와 하멜등대, 종포해양공원이 발밑으로 지나갈 때면 오금이 저린다. 탑승시간은 편도 13분이다. 돌산공원에 도착해 여수의 푸른 바다와 해안을 만끽하고 지산공원으로 되돌아온다.
여수와 하멜의 인연
지산공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터널 안으로 진입한다. 터널을 통과해 하멜등대가 있는 종포마을로 향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10분 정도 걸으면 하멜등대에 도착한다. 항구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을 여수 사람들은 ‘쫑포’라 부른다. 종포에 하멜등대가 있는 이유는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제주에서 표류하다가 14년 동안 억류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은 제주도, 강진, 여수에서 부역하다가 1666년 여수에서 탈출에 성공, 일본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멜이 조선에 억류됐던 생활을 기록한 보고서가 바로 ‘하멜표류기’다. 이 보고서는 조선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런 인연으로 하멜 일행이 부역했던 장소가 종포와 가까워 하멜전시관을 짓고, 전시관 앞 등대는 하멜등대라 이름 붙였다.
종포마을에서 이순신광장까지는 해양공원으로 연결돼 있다. 해안산책로 길이는 700m 정도 된다. 낚시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등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미항 여수의 맛과 멋
해질녘이면 이 길에 낭만포차들이 모여들고, 거리공연이 펼쳐진다. 낭만포차는 저녁 7시부터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다. 대표 메뉴는 삼합이다. 전복, 낙지, 새우, 주꾸미 등의 해산물과 채소를 고추장 양념에 볶아 먹는다. 수많은 이가 바닷가 낭만포차에서 삼합에 ‘여수밤바다’ 소주를 마시며 낭만을 만끽한다.
낭만포차거리에서 조금 더 걸으면 이순신광장이 나온다. 광장의 랜드마크인 이순신동상과 거북선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순신동상 뒤로는 여수 유일의 국보이자 이순신 장군 유적지인 진남관이 있는데 2020년까지 보수 공사를 한단다. 광장 옆으로는 좌수영음식문화거리가 이어진다. 돌게장, 꽃게장, 서대회 등 여수 향토음식을 파는 식당이 많다. 흔한 백반을 주문해도 한 상 가득 차려진다. 미식가라면 여름 제철을 맞은 하모회와 하모샤브샤브를 먹어줘야 한다.
좌수영음식문화거리와 이웃한 수산시장은 여수 대표 시장이다. 여객선터미널과 이웃해 오가는 인파로 분주하다. 건어물 상점가를 지나면 활어회센터와 돌게장, 갓김치를 파는 상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수를 떠나기 전, 이곳에서 싱싱한 활어회도 맛보고 장도 보면 좋겠다. 갓김치와 게장은 매장에서 택배로 부쳐주니 두 손 가볍게 귀가할 수 있다.
주변 명소 & 맛집
고향민속식당
여수에 오면 한 끼는 돌게장백반을 먹는다. 세계엑스포박람회장 정문 근처에 있는 고향민속식당은 여수 도착 후나 출발 전에 들러 식사하기 좋다. 주민들이 추천하는 곳이라 믿음이 간다. 돌게장백반을 주문하면 밑반찬이 한 상 가득이다. 간장게장, 양념게장
두 종류가 나와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짜지 않은 간장게장은 밥도둑이 따로 없다. 게장은 1회 리필해준다. 여수시 동문로 129, 평일 08:00~21:30 주말 08:00~22:00.
여수동백빵
여수 특산물인 동백을 소재로 만든 빵이다. 모든 빵은 저당, 무방부제로 만든다. 동백꽃 모양의 빵은 예뻐서 먹기 아깝다. 동백화과자, 동백만주, 동백양갱 등의 메뉴가 있으며 세트를 구성해 선물상자에 담아 팔기도 한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포슬포슬한 대두앙금에 찹쌀피를 얇게 두른 동백화과자다. 여수시 중앙로 66-1, 10:00~21:00.
중앙게장백반
이순신광장 옆 좌수영음식문화거리 입구에 있는 게장백반집이다. 돌게장, 꽃게장 모두 파는데, 꽃게장이 단연 인기라고 한다. 돌게는 크기가 작아 살이 적은 게 흠이다. 이 식당의 꽃게장은 살이 꽉 찬 큰 꽃게를 사용해 흡족하다. 주방에서 꽃게 다리를 먹기 편하게 손질해준다. 게 육수로 끓인 된장찌개도 별미이고, 막걸리 식초를 넣어 요리한 서대회무침도 맛깔나다. 여수시 중앙로 72-30, 평일 07:30~22:00 주말 07:30~20:00.
걷기 Tip
여수시티투어 야경코스
여수 야경을 편하게 구경하고 싶다면 야경시티투어버스를 강력 추천한다. 야경시티투어버스는 매일 밤 운행한다. 1967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인 국가산업단지 야경과 오동도 야간분수, 거북선대교와 돌산대교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투어가 끝나면 낭만포차가 있는 종포해양공원 앞에 내려준다. 소요시간은 약 두 시간. 여수엑스포역 맞은편 도롯가에서 탑승한다. 탑승시간 19:30 요금 어른 9000원, 예약 홈페이지에 예약, 잔여석이 있으면 현장 매표 가능.
그에게 정원은 놀이터다.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들고 문을 나서면 그만의 소우주가 펼쳐진다. 오감이 천천히 깨어나면서 확장된 시간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마음속 풍경은 매일매일 꽃사태다. 이 놀이를 제대로 한번 즐겨보고 싶어 도시 탈출을 감행한 건 40대 중반 무렵. 김형극(金炯克·66) 씨는 마치 특별 초대장을 받아든 사람처럼 성큼성큼 자연 속으로 입장했다. 정원에 빠져 산 지 어느새 23년째. 그 사이 서른두 평 아파트와 맞바꾼 폐가는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로 다시 태어났다.
소확행(小確幸)이 메가트렌드가 된 세상. 그러나 실행은 쉽지 않다. 시계추 같은 일상을 탓하며 시간을 어이없이 흘려버리거나 또 다른 욕망으로 허둥대다 기회를 놓쳐버리곤 한다. 저지르듯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김형극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은퇴가 아직 먼 나이였지만 그의 결단은 신속했다. 다 쓰러져가기는 해도 감나무 다섯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안성의 한옥도 다행히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서 살 때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산으로 강으로 떠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지낼 바엔 아예 시골로 내려가 사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아이는 학원을 네 군데나 다니느라 밤 12시가 다 돼서 집에 들어오더라고요. 공부는 해야 하지만 어린 딸에게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안쓰러웠어요. 자식들 출세를 위해 모두 서울로 가던 시절 저는 과감히 시골로 내려왔죠.”
40대 중반에 감행한 도시 탈출
가족과의 의견 충돌은 없었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을 제안이었지만 아내와 딸은 잘 따라줬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텃밭은 오랫동안 가꾸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고 기와집은 비가 샐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당은 여기저기서 갖다 버린 쓰레기들로 넘쳐났다. 더구나 서초구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매일 왕복 200km나 되는 거리를 오가야 했다.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일산, 양평, 용인 등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사람하고 집은 연분이 닿아야 한다잖아요. 여러 집을 봤는데 포도 산지인 안성이 고즈넉하고 마을 사람들 인심도 좋아 보였어요. 특히 이곳에서 본 한옥이 자꾸 눈에 밟히더군요. 100년도 더 된 집이었는데 폐가와 다름없었어요. 그 집을 산 뒤 뜯어 고치고 어른 키만 하게 자란 풀 뽑아내고 정리하느라 몇 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출퇴근도 난제였죠. 지금이야 도로가 뻥뻥 잘 뚫려 있지만 그 시절은 안성에서 서울 가려면 네댓 시간은 족히 걸렸어요. 눈 내리는 겨울에는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회사를 다녔어요. 빙판길 운전이 엄두가 안 났거든요. 혹여나 시골 좋다고 내려가더니 출근시간도 제대로 못 지킨다는 소리 들을까봐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어요. 그렇게 몸은 고됐어도 꽃 심고 나무 심을 때는 마냥 좋더라고요.(웃음)”
어떤 이에게는 돈으로 꾸며댄 정원을 감상하는 것처럼 따분하고 심드렁한 일이 없다. 뜬금없이 웅장함을 자랑한다거나 아무렇게나 불쑥불쑥 화려한 색을 들이미는 곳에서는 감흥이 작동하지 않는다. 정원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한 정원을 지향한다는 김형극 씨는 2015년 경기농림진흥재단(현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경기정원문화대상’ 동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그의 정원에 대해 “소박하고 순수하다.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안 간 데가 없다. 이 사람은 정말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평가했다. 화이불치는 아니어도 검이불루의 뜻은 펼친 셈이다.
“지인이 ‘경기정원문화대상’ 공모를 알려주면서 ‘당신 정원은 틀림없이 상 받을 거다’ 하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를 해봤죠. 그때 정원 이름을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이라고 지었어요. 실제로 들꽃을 많이 심었거든요. 그런데 심사가 꽤 까다롭더라고요. 1차 심사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했고, 2차는 전문가, 3차는 전문가와 일반인이 같이 와서 꼼꼼히 둘러봤어요. 주로 제가 좋아하는 꽃들을 심고 소박하게 가꿨는데 운 좋게 상까지 받았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좋다
이 공모전을 계기로 재단에서 지원하는 일본 정원 견학 기회도 얻어 수상자들과 함께 다녀왔다. 3박 4일 머무는 동안 공통 주제 하나로 친구가 된 일행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원에서 한 발짝씩 걸어 나와 함께 멍석을 깔았다. 민간정원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기로 뜻을 모아 ‘정원문화대상수상자모임(정수모)’을 결성한 것. 그는 회장으로 추대됐다.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역할을 찾아보고 전국적으로 정원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을 보태자는 제안을 하자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각자의 정원을 좀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공유 정원’으로 확대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최근 우리 모임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꽤 알려진 모양입니다. 수상자들의 정원을 보고 싶다는 단체 견학 문의가 종종 옵니다.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또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정수모’ 회원은 14명. 두 달에 한 번씩 부부동반으로 만나 친목도 다지고 정원 관련 정보도 나눈다. 가을이 되면 각자의 정원에서 돌아가며 음악회도 여는데, 이 근사한 계획은 김 회장 머리에서 나왔다. 사실 그는 서초구청이 개장한 충남 태안 서초휴양소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위해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한 이력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사람들을 모아 정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그게 시너지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수모’ 음악회도 회원들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고 지금은 정기적인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58세에 퇴직을 했으니 올해로 벌써 8년이 됐다.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사진 찍기, 도자기 빚기, 수석 수집, 통기타 연주 등 취미와 재주가 많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간다. 그래도 매일 그를 설레게 하는 건 역시 정원이다.
“저는 모과가 달려도 첫눈 올 때까지 절대로 따지 않아요. 노랗게 익은 모과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을 꼭 봐야 하거든요. 정원은 영원한 풍경이 없어 더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계절마다 얼굴을 바꾸고 매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요. 정원에서는 눈도 꽃으로 보여요. 봄에는 꽃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새싹들을 자주 들여다봅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꽃잎에 반할 수밖에 없고요.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들이에요.”
그의 정원에는 200여 종의 꽃과 나무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그들에게 물 주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요즘 겨울 정원을 구상하느라 잔뜩 들떠 있다. 텃밭에 가식(假植)해놓은 몇몇 주인공들이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꽃과 나무들에게 배우는 것들
은퇴한 사람들에게 일과를 물어보면 아침에 일어나 김밥과 물 싸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전부라는 사람이 많다. 딱히 갈 데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의 지인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퇴직을 같이한 한 친구는 평생 취미활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어쩌다 동창들 만나 약주 한잔씩 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은퇴 후의 단조로운 일상에 대해 들려오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일찍 시골로 내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제가 지금도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면 여전히 정원에 관한 로망에 젖어 있을 겁니다. 주말마다 자연을 찾아 떠났을 테고요. 안성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하루 종일 풀이나 뽑으면서 왜 그 고생을 하냐?’고 물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은근히 저를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요. 다른 삶을 펼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이기 때문이죠. 돈이 무서운 이도 있어요. 물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경제활동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모을 줄만 알지 한번 손에 넣으면 도무지 꺼낼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결국에는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좀 쓰고 살아도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노후 준비는 50대부터 준비하는 게 맞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건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일을 먼저 찾는 것. 은퇴 후에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살더라, 저런 삶이 멋져 보이더라 하면서 흉내를 내면 얼마 못 가 한계가 오고 그 삶을 즐길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어느 날 친구 따라 밤낚시를 갔어요. 밤새 깜깜한 곳에서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웠죠. 새벽에 보니 손톱 사이로 지렁이 살이 잔뜩 끼어 있고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손을 대충 닦고 밥을 먹더라고요. 낚시하는 동안은 수염도 못 깎고 행색이 엉망이 됩니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게 다 극복이 되고 본인은 행복한 거 아닐까요?”
올해도 그의 정원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그러면 또 감 따는 핑계를 대고 지인들이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축제 같은 열기 속에 흠뻑 빠졌다 갈 것이다.
그는 날마다 정원에서 배운다. 아름다움을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이 제대로 보이고 행복을 두드려 깨운다는 사실을.
충남 아산 출신의 A(81세) 씨는 11세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홀로 상경했다. 사업가인 모 독지가 눈에 띄어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고생 끝에 독립해 제조업과 부동산 중개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지금은 큰아들에게 대표 자리를 물려준 탄탄한 중견기업과 강남 소재 빌딩 3채, 아파트 등을 가지고 있다. 부인이 몇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아들 둘, 딸 셋, 10여 명의 손자녀, 증손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A 씨는 사소한 것들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단지 기억력이 조금 떨어진 것이겠지 했는데 그로부터 1년 뒤 알츠하이머병 확진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요즘은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주위 사람들은 물론 가족도 거의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A 씨 가족의 분란은 약 6개월 전 둘째 딸이 간호를 핑계로 A 씨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둘째 딸이 재산을 제멋대로 처분하자 나머지 형제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빌딩 3채를 포함한 전 재산을 둘째 딸에게 주겠다는 A 씨의 유언장이 작성되자, 나머지 가족은 법정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A 씨는 현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고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가족들은 세 패로 나뉘어 자신이 아버지를 모셔야 하고 법률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재산을 먼저 받은 사람은 돌려놓고 유언장도 무효로 해야 한다며 싸우고 있다.
자녀들은, 그의 건강이 어떤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어떤 치료가 필요하고 어떨 때 가장 행복해하는지 관심이 없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척하지만, 상속이 이뤄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온 신경이 쏠려 있을 뿐이다.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먼 훗날의 일이거나 남의 집만의 이야기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필자가 서울가정법원에서 3여 년간 담당했던 성년후견제도 관련 사건은 약 1500여 건에 이른다. 몇백만 원의 임대아파트 보증금이 재산의 전부인 경우부터 몇조 원의 재산을 가진 대기업 총수 사례까지 다양했다. 싸우는 양상도 A 씨 가족과 거의 비슷했다. 의사, 법조인, 교수, 대기업 임원이라 해도 갈등하는 모습이 똑같은 걸 보면, 돈에 대한 욕심은 배움, 지위 고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7월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된 성년후견(成年後見)제도는 질병, 노령, 장애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 때문에 자신의 사무를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을 다른 사람(후견인)이 돕는 제도다. 정신적 문제의 원인으로는 치매나 뇌출혈 등 뇌병변이 가장 많고, 조현병 같은 정신병이나 발달장애도 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무는 재산에 관한 것도 있지만, 거주지나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 수신이나 우편 수령 등과 같은 신변에 관한 것도 있다. 정신적 문제의 정도에 따라, 혼자서는 사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중한 경우에 개시되는 ‘성년후견’과 몇몇 사무에 한해 도움을 줘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한정후견’으로 나뉘고, 특정 사무에 대해서만 지원을 해주는 ‘특정후견’도 있다. 후견을 받아야 할 사람(피후견인)에게 정신적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견인을 누구로 할지, 후견인에게 어떤 권한을 줄지에 대해 계약을 통해 미리 정해둘 수도 있는데 이를 ‘임의후견’이라고 한다.
가족들 중 피후견인과 정서적으로 가장 가깝고 피후견인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이 후견인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가족이 추천하는 사람이 후견인이 되는 게 바람직하지만, A 씨의 경우처럼 서로 후견인이 되겠다고 싸우는 경우는 변호사나 사회복지사 같은 전문가가 선임되기도 한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재산을 관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재산이 자녀들에게 독이 아닌 복이 되게 하고 A 씨 가족과 같은 진흙탕 싸움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치매 등 정신적인 어려움은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려면 보험을 들듯 임의후견 계약을 미리 체결해두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자녀들이 다투지 않도록 재산을 신탁회사에 맡겨두고, 사망한 후 자신이 정해둔 조건에 따라 재산이 사용되고 처분되도록 미리 신탁계약을 체결해놓을 수도 있다. 존엄하고 아름다운 삶의 정리를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훗날 자녀들의 분쟁을 방지하려면 현재의 정신건강 상태를 증명하는 진단서를 첨부해두는 것이 좋다)을 미리 작성해두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평생을 바친 가업이 있다면 누구에게 언제 승계할지, 과다한 세금을 어떤 방식으로 줄여야 할지, 후계자 교육이나 기업 구성원 사이의 갈등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치밀한 전략을 세워 체계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판사로 활동. 2015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한정후견개시사건을 담당했고,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는 상속재산분할사건, 이혼과 재산분할 등에 관한 가사항소사건을 담당하는 합의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상속, 후견, 가사 분야에 있어서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1+1=3.” 조직의 힘을 이야기할 때 쓰는 산술 표현이다. 조직원 개개인의 힘에 시너지 효과가 생겨야함을 의미한다. “1+1=2”가 되면 죽은 조직이다. 어떻게 해야 조직의 힘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까?
여러 요소 중에서도 리더(사장, 부서장, 팀장 등)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어떻게 직원들의 힘을 최대로 끌어내느냐가 관건이다. 대체로 리더의 방침에 순종하는 사람을 선호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직원은 내처진다. 그러나 어떤 구성원이 조직에 도움이 될 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 연구에서 부하 직원을 고를 때에 어떻게 고르느냐는 설문을 했다. 업무 역량보다 순종하는 직원을 선택하겠다는 답변이 70%로 높았는데 근래엔 50%로 감소했다. 또한 업무 역량을 중시하는 답변은 30%에서 50%로 크게 높아졌다. 이제 리더에 순종하는 것으로는 성과 달성이 어렵다고 보는 견해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위계 관념이 강해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토론 문화가 덜 발달했다. 구성원이 리더와 다른 의견을 말하기 쉽지 않다.
금세기 최고 경영자 제너럴일렉트릭사(GE)의 잭 웰치(Jack Welch) 전 회장이 성공 비결을 묻는 말에 답한 내용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가진 부하들과 활발한 토론을 통하여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마디로 부하로부터 배운다.”고 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도 그의 저서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유일함으로 경쟁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구성원들의 창의성이 활발하게 발휘돼야 조직이 살아남는 시대다. 살아남아 미래로 나가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순종형보다 리더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구성원을 섬겨야 한다.
마을 뒤로는 신록이 사태처럼 일렁거리는 큰 산. 앞쪽엔 물고기들 떼 지어 노니는 냇물. 보기 드문 길지(吉地)다. 동구엔 수백 살 나이를 자신 노송 숲이 있어 오래된 마을의 듬직한 기풍을 대변한다. 겨우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였으니 한눈에 살갑다. 마을 여기저기로 휘며 돌며 이어지는 돌담길은 야트막해 정겹다. 이 아늑한 산촌에 심히 고생을 하는 농부가 있다.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그는 특별한 준비 없이 귀농했다. 귀농을 좀은 만만하게 봤을까? 혹은, 매사 서둘러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배짱의 소유자일까?
물론 그가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니다. 내려오라! 연로한 부모님께서 먼저 사인을 보내왔더란다. 그럴 즈음 그의 건강도 좋지가 않았다. 해서, 으라차차, 가자, 고향으로 내려가자! 그렇게 결연히 부르짖으며 아내와 함께 귀향을 했던 모양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은 산촌의 포실한 경관과 공기를 일용한 양식처럼 취하며 살아온 지 어언 5년. 박병각 씨(63, 영농조합법인 알토팜 대표)의 낯빛은 들판에서 타 구릿빛이다. 몸엔 땀내가 배었으니 그의 일상적인 근로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직감할 수 있다.
도시에선 갖가지 직업을 편력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 씨는 한때 교수생활을 했다. 기업체 중견간부로도 일했다. 돈을 실컷 벌겠다고 맘먹고 통신장비 관련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지. 비록 꽃을 피우진 못했지만. 귀농 직전까진 번역 사업을 했다. 박병각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재에 밝지 못한 사람이다. 몇 번의 기회가 왔으나 어여삐 머물러주지 않았단다. 그러나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니 갖가지 노하우가 실하게 쌓였을 것이다. 빛은 빛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질주의 돛대 역할을 하는 법. 때로는 순항으로, 때로는 난항으로 건넌 세상이 그에게 응분의 기량을 증정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와 몸에 축적된 실력을 다 끌어올려 농사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아직 방문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저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은 탓일까? 농사는 제자리걸음이다.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테지. 애초 “거의 빈털터리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귀농 5년 사이에 뭐 별반 늘거나 불어난 게 없는 모양이다. 싱글벙글 낙천적인 미소가 얼굴에 피부처럼 붙어 있지만, 5년간 들판에 쏟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내심 긴장감이 들솟을 게다.
“귀농할 때 별다른 준비 없이 내려왔어요. 우선은 건강부터 챙기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그럼에도 첫해부터 농사를 지은 건 부모님께서 경작하시던 농토가 있어서였어요. 밭 2000평에다 참깨를 심었어요. 기대치만큼의 수확이 나오질 않더라고. 현재는 규모가 늘어 1만 평입니다. 콩을 주 작물로 하고, 찰수수와 레드비트도 재배합니다. 양봉도 하고요. 그러나 타산을 맞추기는 여전히 힘들어요.”
“적자를 보는 거예요?”
“당연하죠. 초보 농부의 자세로 그저 열심히 노력하지만 농사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사실, 귀농 5년 차인데도 적자를 본다면 얼른 떠나는 게 현명해요. 하지만 저에겐 희망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최선을 다해 농사를 하기에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낙관, 그런 거.”
“부진한 농사, 그건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한 사필귀정 아녜요?”
“그런 측면도 있죠.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남들에겐 준비를 철저히 해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농사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봉착하게 되더군요. 그 무엇보다 기후 조건에서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농부의 능력보다 하늘과 땅의 조력이 더 중요한 변수라는 거. 농부가 직접 유통에 나서야만 하는 구조도 벽으로 다가와요.”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
대지를 일구는 농부란 시를 쓰는 시인과 다를 바 없다. 방울방울 진땀 뿜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무심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영감을 짜내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시인처럼, 농부 역시 비와 바람을 주재하는 하늘의 협찬을 간절히 기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농부의 하늘은 더 절대적이다. 더위와 추위와 서리, 가뭄과 홍수와 태풍, 이 모든 자연의 순환과 횡포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게 농사이지 아니한가.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고 봅니다. 처음엔 몰랐으나 농사를 지으며 그걸 알았어요. 시골 사람들이 아는 게 농사뿐이라 그냥저냥 농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투철한 가치관이 아니고선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도 기후의 혼란과 변덕 앞에선 속수무책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제 겨우 5년. 정착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아마도 10년은 흘러야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끙.”
“건강은 좋아지셨고?”
“농사일이 워낙 많아서 건강이고 뭐고 돌볼 틈이 없는 것을.(웃음)”
“농림축산식품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귀농 5년 차 농가의 평균소득이 3898만 원이라고 해요. 이거 믿을 만한 소식일까? 제가 만난 귀농인들은 흔히들 고전하고 있었어요.”
“정부의 공식 통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겠죠. 그러나 가처분 소득이 아니고 매출액 기준의 산정이라 봅니다.”
“선생의 농사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예요. 만약에 말이죠, 누군가 귀농을 하려 한다면 뜯어말리시려나?”
“흠. 텃밭농사 정도가 이상적이죠.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사실 위험합니다. 전적으로 농사 하나에 생계를 걸 경우엔 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시행착오의 연속일 수 있으니.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할 일도 아녜요. 귀농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연의 방식에 부합하는 신념으로 산다면 만족을 누릴 수도 있죠.”
“자연의 방식이라는 건 순응의 태도? 있는 그대로 자족하는 거?”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귀농했지만 한 가지는 가슴에 새기고 내려왔어요. 비우자! 이제부턴 비우고 살자! 그런 마음가짐 말이죠. 도시에서 가졌던 과욕이나 비즈니스 마인드 대신 빈 마음으로 살자는 거. 한마디로, 돈벌이 목적보다는 비우려고 귀농한 겁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과 달라 내공이 필요하다. 흔히들 마음 비우기에 관심을 두지만 비울수록 마음은 허기로 보챈다. 매사 비우려는 건 어엿한 지향이지만, 진정 비우기도 전에 고프고 슬퍼 떨리는 게 삶이지 않던가. 먹고사는 일의 고역과 경쟁은 거의 항구적인 숙명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진한 농사는 이 비우기를 쉬 구현하게 하는 기묘한 견인차란 말인가? 박 씨는 농사 부진에 그다지 조바심치지 않는 것 같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굳이 채울 것도 없으며, 따라서 비우고 살고자 하는 신념을 관철하기가 오히려 용이하다는 투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치레가 없어 푸근한 농가주택
귀촌이든 귀농이든, 그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모두들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생판 낯선 객지보다는 가급적 연고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농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귀농자의 53%, 귀촌자의 37%가 고향, 또는 사소하나마 연고 있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연고 덕분에 적응과 정착이 더 수월할 거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연고지로 이주하더라도 크고 작은 애환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박 씨는 이웃들에게 그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예 밝히질 않았다. 자칫 오해와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서.
“고향이라는 단 하나의 근거를 앞세워 귀농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중요한 건 어디로 내려가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충분히,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이에요. 만약 돈벌이에 목적을 둔 귀농이라면 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죠. 일테면 선택한 작물의 재배조건, 생산한 농산물의 유통 환경 등을 심도 있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모저모 의지대로 살기 쉽지 않은 게 시골이라 보면 됩니다. 이건 제 경험에서 우러난 얘기들이에요.”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말씀?”
“바로 그거! 저는 도시가 싫었어요. 힘겨웠어요. 그렇다면 도피성 낙향일까? 그렇게 물으실지 모르지만, 기꺼이 내려왔으니 탈출이라 해두죠. 충분한 준비보다는 도시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생각이 쏠려 있었어요.”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두 가지에 놀랐어요. 하나는 수려한 마을 풍치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께서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를 처음부터 고수해왔다는 점이에요. 일반 관행농법보다 몇 곱절 더 어려울 무농약 농사에 어떻게 착안하셨죠?”
“아하. 당연하고도 간단한 이유가 있어요. 내 가족들이 먹을 음식에 농약 성분이 섞인다면? 그런 자문을 하면 답이 빤할 수밖에. 남의 가족들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작물이 병들어갈 때 약은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화학적 농약 대신 자연에서 얻어온 재료들로 만든 농약이나 퇴비를 사용해요. 공장 농약 외 대안이 없다면 이미 농사를 포기했을 겁니다.”
“괴산군 귀농귀촌인 협의회장을 맡으셨죠? 귀농귀촌 실태에 환하겠어요. 실패 사례엔 어떤 게 있죠?”
“대체로 귀농이 아닌 귀촌 케이스가 만족도가 높습니다. 실패자엔 두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덜커덕 귀농했다 망치고 돌아가는 경우, 둘째는 적막한 시골에서 우울증을 얻고 쓸쓸히 떠나는 경우.”
대책 없는 전원 판타지를 꿈꾸는 그대여, 그냥 도시에 사시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귀농귀촌의 실상이 꽤나 알려진 요즘엔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맹목적이거나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냅다 시골로 들이닥치는 우행은 생고생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니까. 문제는, 인류를 구원할 듯한 기세로 머리를 싸맨 준비와 연구를 선행하더라도 허무한 귀결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일 테지. 특히나 어려운 건 역시나 주민과의 융화 문제.
“시골의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듯 인심도 변했어요. 합리성이 결여된 시골 분들이 많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합리나 법리보다는 마을의 관습적 불문율을 중시해요.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죠. 그러나 그걸 불편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텃세를 메시지로, 우리의 규율 안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로 읽어야 해요. 이건 불변의 풍습이에요. 일단 불문율을 존중, 선선히 마을에 녹아들어간 뒤 바꿀 걸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게 순서이지 않겠어요?”
그의 거처는 오래되고 소박한 농가주택이다. 꾸밈이 없어 담백하다. 치레가 없어 푸근하다. 앞뜰과 뒤란엔 향이 번진다.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둬서다. 항아리들은 불룩한 배통을 두드리며 저희들만의 밀어를 속닥거린다. 지붕 위를 가로지르며 노래하는 가수는 박새구나.
아무런 결함이 없는 평화. 집 안팎에 그런 기운이 남실거린다. 밤이면 창으로 들이친 별들이 부부의 침실을 염탐하려나? 박 씨에 따르면 부부가 각방을 쓰는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그는 농사에 시달린 나머지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아내의 손가락 열 개에 송구스럽다. 농사엔 여자들이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다. 그는 그게 또 미안하다. 아마도 그는 다정다감으로 아내를 자주 살살 녹일 것 같다. 하지만 아니란다. 밖에서만 다정한 처신을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 최선희 씨(63)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기와는 다른 남편이에요. 도무지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아요. 양봉을 만류했으나 기어이 시작하는 식으로요. 이젠 아예 단념하고 삽니다.(웃음) 귀농 얘기 좀 할까요? 농사 경험 없이 덤벼들어 참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지요. 한마디로 아직은 답이 없어요. 그러나 이젠 도시에서 다시 살기 싫어졌어요. 시골에만 있는 맑은 공기와 순수한 자연, 손수 기른 깨끗한 먹거리들.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이미 개선된 걸 느껴요. 게다가 부부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연풍성지가 가까이에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쩌면 모든 게 축복이죠.”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그 사소한 축복들. 고달픈 일상의 굽이에서 축복을 느낀다면 그건 잘 산다는 증빙이겠지. 삶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귀농은 아찔한 모험일 수 있지만, 삶은 단 한 번 주어진 복주머니이겠고.
박병각 씨가 주는 귀농 준비 Tip
•귀촌인이야 집 사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귀농엔 고난이 많다. 사전 준비를 단단히 하자. 돈만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급자족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가치관을 확고히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활자금은 미리 비축하고 귀농하자. 아울러 극도로 지출을 자제하자. 자금 회전이 안 될 경우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봉착하기 쉬운 게 귀농이다.
•굳이 집 사지 말라. 컨테이너 하나로 시작하는 게 좋다. 농토도 사지 말라. 묵은 전답을 빌리면 된다. 비싼 농기계도 살 필요 없다. 임대하면 된다.
•반드시 부부 합의로 함께 내려오는 게 옳다. 만에 하나, 가족공동체가 깨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한때 커다란 인생의 실패를 겪으며 술독에 빠져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극단적인 순간, 거짓말처럼 시와 그림이 구원의 길을 보여줬다. 시인이자 화가인 김주대의 이야기다. 시와 그림 둘을 합친 문인화 작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이번에 봄을 맞이하여 여섯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작품 80점으로 장식된 인사동의 전시회장에서 작지만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들을 포착했다고 말하는 그의 문인화 세계를 들여다봤다.
화폭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주제로서의 그림과 그 한 켠에 섬세하게 새겨지듯 쓰여지는 시, 그것이 문인화의 세계다. 문인화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상적인 호흡을 통해 숙고의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김주대 작가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로 대표되는 한국 문인화 전통 위에서 현대적 문인화를 그리는 대표적인 작가다. 오는 5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문인화전 ‘꽃이 져도 오시라’를 여는 그는 사실 문인화가로서보다는 시인으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죽음의 순간에 찾아온 삶의 재생
1989년 ‘민중시’와 1991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하여 여섯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었던 그는 원래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문인화로 자신의 인생 후반기를 결정짓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여 전인 2012년의 일이다. 무려 20년 가까이 강사로 시작하여 운영까지 하게 된 학원 사업이 완전히 실패하면서 그야말로 ‘길에 나앉게 된’ 것이다. 마흔 중반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거친 삶의 질곡이었다. 이때 그는 두 달 동안 술만 마시며 그대로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위기는 기회를 줬다. 그가 SNS에 시를 쓰면서 농담처럼 ‘시를 팔겠다’라고 했더니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자로만 된 시를 어떻게 해야 팔 수 있을까’ 고민했고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곁들이자는 게 그 문제의 답이 되었다. 문인화가 김주대의 탄생이었다. 처음에는 서투르기만 했던 그는 자신에게 맞는 붓과 종이, 먹을 고르고 친구들로부터 동양화를 배우면서 화가 김주대를 발전시켰다.
“고양이 그림 같은 경우는 제가 틀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문경한지, 전주제지, 단구제지 등의 한지마다 다른 먹의 번짐 효과를 이용해서 그려냈죠.”
이처럼 그는 한지의 종류에 따라 다른 특징을 이용하여 그림의 리드미컬한 양태를 표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또한 현재의 그의 화풍은 전반적으로 은은한 느낌을 준다. 최대한 색을 쓰지 않으려 하는 기준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적 절치부심의 결과, 그는 지난 6년여 동안 한겨레신문, 머니투데이 등 다양한 언론 매체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수 차례의 전시회를 가지며 시대와 소통하는 깊이 있는 작가로 성장했다.
우리가 놓친 인물들, 문인화로 되살아나다
페이스북 팔로워 숫자가 1만4000여 명. 김주대의 작품 활동을 호시탐탐 눈 여겨 보는 사람들의 숫자기도 하다. 아마도 21세기는 그의 취향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그림과 시의 결합인 문인화는 ‘짤방 문화’로 대변되는 SNS 세계에 적합한 틀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문인화는 글이 함께 하기 때문에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이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그는 그야말로 생활과 삶의 순간순간을 문인화에 쏟아내고 있다. “고통스러울 때는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 감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란다. 또한 일 년에 2000만 원어치만 작품이 팔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러한 기준에 맞춰서 작품 가격을 정하기도 한다. 그의 생활과 그림이 문인화라는 풍류와 어우러져 솔직하고도 옹골찬 색을 발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80점의 문인화가 걸리는 이번 ‘꽃이 져도 오시라’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굵직한 인물화들이었다. 김주대 작가 본인의 자화상과, 그가 생각하기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세상을 받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에 대한 문인화들이 이번 전시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이번에 나온 작품들 중 그가 작업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작품들은 바로 독립운동가들의 서정과 아픔을 그린 문인화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눈빛과의 교감이 그대로 삶의 한 자락을 걸친 듯하다.
소소하지만 위대한 것들에 대한 찬가
그가 그린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어서 남아있는 자료들이 우표 사이즈만 한 사진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진을 확대하여 그를 바탕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인물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특히 이 그림들에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인물의 눈빛인데, 그 세밀한 눈동자를 구현하기 위해 김주대 작가는 조선시대 임금들의 초상인 어진의 작법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피폐한 표정에서도 저항의 빛을 놓지 않는 소녀 함귀래, 앙다문 입에서 굳은 의지가 돋보이는 소년 이범재 등 백 년 전 자신의 젊은 날을 바쳐 막막하기만 했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꿈꾸고 실행했던 이들의 모습을 오늘날에 생생히 살릴 수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 소소하지만 위대한 것들에 대한 압도감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회에서의 그의 작품 세계에는 자연스럽게 인본주의의 향취가 담겨 있다. 전시회를 열기 전 이미 열 점 정도 판매가 이뤄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세계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완연하게 피어난 따스한 봄에, 사람의 따스함이 머무르는 문인화의 세계 속을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주말 저녁,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배우가 엄청 즐기고 있구나! 한참 나이 어린 배역에게 ‘아버지’나 ‘오빠’를 연발했다. 심심하면 욕설에 머리채를 끄잡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원혁이 번호 땄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106부작의 마지막 대사도 그녀 몫이었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무던하게 녹아 있던 그녀.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귀여운(?) 치매 환자 박금병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 정재순(鄭在順·72)을 두고 하는 소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보는 순간 멈칫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나른하면서도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서 명희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박병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배우 정재순. 캐릭터 변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하나뿐인 내편’이 그녀 인생에 있어 대단한 도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배역과 관련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극중에서 치매가 그렇게 큰 소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약간 병세가 있다 하는 정도였죠. 그동안 치매 앓는 역은 안 해봤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 한 번쯤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보자! 그랬던 거죠.”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하던 대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극중 손주며느리 도란(유이 역)을 친구 ‘명희’로, 그의 아버지(최수종 역)를 ‘강기사 오빠’로 부르면 부를수록, 며느리(차화연 역)와 둘째 손주며느리(윤진이 역)에게 욕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가 극중에서 욕할 때 사람들이 참 찰지다고 그러대요? 제가 나쁜 년, 첩년 하고 말할 때요. 저도 상상 못했고 작가님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 전개를 하다 보니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자꾸 촬영 분량이 많아지더라고요.(웃음)”
말 그대로 배우 정재순의 재발견이었다. 올해로 데뷔 51년 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목과도 같은 중견배우였다. 긴 세월 각인되어온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으니 박금병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순은 딴생각 안 하고 배역을 즐겼다고 했다.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치매 환자라는 배역 설정 때문에 오만 가지를 다 해봤거든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도 해보고요. 배우로서도 찾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카타르시스도 느꼈고요. 특히 머리끄덩이를 있는 대로 낚아채잖아요.(웃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치매 증세가 나올 때 특히 나쁜 사람들에게 바른 소리도 마음껏 하고 말이죠.”
극중 박금병의 인기는 인터넷을 치면 확인된다. 정재순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드라마에서 착장한 귀걸이며 사용한 안경테, 옷 등의 브랜드를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치매이다 보니 빨간 립스틱에 화려한 색감의 옷도 입고, 짧은 점퍼에 토끼 머리띠는 물론 시니어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니크로스백도 수차례 바꿔 멨다.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후배 연기자들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면서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평생 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어요. 귀엽대요. 제가요.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요.(웃음)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순간순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다고 그녀가 박금병 같은 강한 캐릭터 연기를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KBS1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에서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새엄마 역할을 했고,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는 배우 송승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연기한 적 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 박금병이 인기나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녀는 최근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KBS2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살면서 처음 나가봤어요. 우리 집안에 예능 PD가 있는데 출연 제의가 와도 안 나간다고 했거든요. 매니저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나갔네요. 유재석 씨가 능력자더라고요.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 앉혀놓고 잘 이끌더군요. 그날 ‘해피투게더’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하더라고요.”
데뷔 51년 차, 나를 돌아보다
스타 탄생 비화에 종종 등장하는 스토리. 정재순도 친구 따라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얼떨결에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TBC
8기 공채 탤런트로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미술대학교 지원도 못하게 했는데 탤런트를 하겠다니, 부모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지원군이 정재순 옆에 있었다. “저는 그때 대학 재수를 하면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가 심해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제 남편의 부모님이 제가 탤런트 된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밀어줬다기보다는 ‘괜찮다’ 이 정도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시댁에서 바람날 여자는 안방에 앉혀놔도 막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힘과 용기를 내 방송사에 갔는데 세상에 아유…. 막상 닥쳐보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끼도 없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얼굴이 예뻐서 합격한 케이스였다.
“괜찮은 여자 탤런트가 들어왔다고 방송사에 소문은 났는데 연기를 시켜도 뭘 할 줄도 모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거든요. 야외 촬영은 너무 싫었어요. 스튜디오 촬영은 얼마든지 했고요. 사람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박금병이 같은 역할도 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연기자는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뭘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방송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죠. 51년 동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 ‘하나뿐인 내편’은 기억에 남겠죠.”
기다림이 만들어 준 또 다른 이름 화가
남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보다 오랜 시간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온 것 자체가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죠.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연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매년 꾸준하게 몇 작품씩 들어와야 하는데 들쭉날쭉했어요. 그래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부모님 반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물감을 사 모으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서 배웠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책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미술공모전이 있으면 열심히 작품을 냈습니다. 미술계 유명한 공모전에는 거의 다 출품했던 것 같아요. 1991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까지 응모했죠.”
그녀의 첫 개인전은 당대 히트작이었던 MBC 주말연속극 ‘배반의 장미’의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극중에서 제 배역은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재벌가 며느리였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였는데 ‘배반의 장미’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이 제가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극이 끝날 때쯤,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전시회 신(scene)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전시회 장면은 제 개인전 모습이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느 연기자가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겠어요.”
화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느새 그녀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저는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지만 드라마는 40~50명이 같이 어우러져서 일하잖아요. 1996년도에 네 번째 전시회를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세 작품을 소화하는 중에 전시 스케줄까지 잡혔었거든요. 그 뒤 5년간은 드라마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다시 개인전을 연건 12년 만이었죠.”
요즘은 그림 활동을 안 하다시피 하니 화가 정재순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들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해줬던 것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시니어도 시간이 많다고 무료하게 지낼 게 아니라 취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힘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든 세월 동안 그림이 있었으니까 많이 위로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드라마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도 보여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림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꾸 소홀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감도 떨어지고 말이다.
“옛날같이 체력이 안 따라줘요. 예전에는 드라마와 그림을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저는 비구상화를 그려요. 마음이 캔버스에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담아낼지 고민이 없으면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뭘 그릴까 계속해서 고민을 해도 작품이 나올까 말까예요. 누구도 함께할 수 없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굉장히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박금병이 때문에 김장도 못했다
한참을 드라마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흘러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나긋하게 깔리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작년 말에 박금병이 역 하느라고 처음으로 김장을 못했어요. 살면서 거른 적이 없거든요. 매년 수산시장에서 젓갈이며 생선이며 사서 온 정성을 다해 담갔는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별미인데 참 아쉽네. 이번에 대사도 많고 스케줄도 빡빡했거든요. 그런데 김장을 안 하니까 여기저기서 주셔서 김치가 되게 많아요. 그래도 박금병이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돼서 좋습니다.”
인터뷰 초반에는 몰랐는데 살림이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서 발랄한 목소리의 박금병이 느껴졌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으니 다시 정재순으로 돌아올 시간. 가발을 벗고 단장을 했는데 영 어색하다며 머리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할머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엄마였다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는 역은 많았는데. 거기다가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잖아요.”
매일이 새로운 연기자
제대로 연기했다는 만족감을 준 배역을 묻자 주저 없이 “이거. 박금병!”이라고 대답하는 정재순.
“저는 연기자를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로서 다른 삶을 연기할 때 충실하게 살려내려고 노력했어요. 직업 정신으로요.(웃음) 부족함도 많고 잘 모르니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로웠던 거죠.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좀 부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우선 성격 강한 박금병이랑 헤어졌으니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은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이니까 또 열심히 해야겠죠.”
앞으로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00세 시대잖아요. 시니어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치매 연기 같은 거 말고. 힘과 용기와 아름다움과 즐거운 취미활동 같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쯤 전시회를 가져볼까 해요. 전시회 열면 초대할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재순이 곧바로 향한 곳은 ‘하나뿐인 내편’의 종방연 현장이었다. 플래시 세례 속을 ‘강기사 오빠’인 최수종 팔짱을 끼고 걷는 정재순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데뷔 51년 만에 인생 배역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힘,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