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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일 KDI 교수, 평생 동안 세상과 대결하다
- “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유 교수의 상식적인 세상에서의 깨달음을 들여다봤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덤볐으니까.”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반골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확신에 찬 합리적 반골이다.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과도했죠(웃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특권층에 속했거든. 그러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공부 못하고 가난한 학생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많이 싸웠지.” 아직 유교사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안 되었던 세상에서 그는 스승과 대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단 한 사람의 멘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 속에서 체득한 겸손에 가까운 의미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고 오만해서 잘 배우지 못할 뿐이죠.”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넘쳤던 사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다.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칼같이 단정하게 하고 다녔죠. 얼핏 내비치는 걸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심도 있었고. 그리고 아주 무섭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해서 누가 촌지라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죠.” 그가 중학교 2학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학교에서 갑자기 ‘10월 유신’이라고 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야인사들의 강연을 듣고 다녔던 유 교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지시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그를 매우 심하게 체벌했다. 아마 시대에 대한 분노를 다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한 게 아닐까, 그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한다. 그 짐작을 증명해주듯,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그에게 함석헌이 쓴 를 선물했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이 책과 함께 유 교수는 차차 유신시대의 금서들과 접하게 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책은 리영희의 와 황석영의 였어요. 그리고 을 정기적으로 구독했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런 책들을 접하다 보니 이 사회의 모순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과 공부를 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죠.” 그는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 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라는,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경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유종일 교수는 기득권에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과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는 일상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고,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적도 있었죠.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때 그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등장한다. 유종일처럼 철저한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새내기 교수였던 정 전 총리는 선배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힌 유 교수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유 교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정운찬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말하는 것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죠. ‘학교에서 뭐라고 하건 지도교수로서 널 통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나 대신 한 가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학점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는 게 정 전 총리의 주문이었다. 유 교수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데 그 조언을 안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강의실에는 개강할 때 한 번, 종강할 때 한 번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시험 때가 되면 점수를 받기 위해 신경 써서 준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 전 총리의 혜안은 유 교수가 하버드대학을 가게 되는 발판이 됐다. 운동권 문제아, 하버드대학 장학생 되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제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그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정운찬 전 총리에게 자문을 했다. 그러자 정 전 총리는 하버드대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자유로우니 유 교수의 기질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토플과 GRE가 뭔지도 몰랐던 유 교수는 이 무모한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면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학생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니드 블라인드 정책(Need-blind policy)’이라는 하버드대학 입학사정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도 반골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한인 민주화운동 단체와 접촉해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대학을 떠나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해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용기와 신념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교수로서의 삶이 안온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소수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을 차별이 걱정돼서였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인 유 교수를 찾는 러브콜은 많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석 제의를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기에는 경제 공약을 총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만족할 만한 액션이 취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자 반발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 완고한 경제학 교수는 냉혹한 정치세계의 격랑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그러고 살잖아요(웃음). 옛날보다야 너그러워졌지만,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과거보다야 너그러워졌다.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던 때였어요. 그때 안식년을 받아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고 가을 학기는 미국에서 강의하게 되었죠. 그런데 미국을 가야 하는데 담배가 안 끊어지는 거예요. 미국 가서 처마 밑에서 담배 필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면 백 퍼센트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산속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었죠.” 폐부를 찌른 한마디, 인생을 바꾸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앉자마자 스님은 유종일 교수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아무리 유 교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눌리고 싶지 않았던 유 교수는 “스님, 초면에 질문을 세게 하십니다” 하며 잠시 여백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를 쳐다보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물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갈 수 없더라고. 꾸밀 수도 없고. 그래서 대답했죠.” “세상 한 번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직설적인 답변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인생을 왜 그리 어리석게 사십니까.” 유 교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치열하게 산다.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머리 갖다 박고 깨지면 되느냐.” 유 교수는 스님의 말이 자신의 폐부를 찔렀다고 말했다. 그런 문답이 오간 후 스님은 기 치료를 해줬고 유 교수는 그 후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됐다. 희한한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룻밤을 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밥을 해먹자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쯤에 물 한 모금 마신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전혀 공복을 못 느꼈습니다. 신기한 만남이었죠. 그 스님은 티베트로 가셨다고 소식만 들었습니다.” 신우암은 몸을 존중하라는 시그널 “스님이 해준 말씀 중 ‘숨을 들이마실 때 지혜를 생각하고 내쉴 때 자비를 생각하라. 들어오는 모든 것은 지혜, 나가는 것은 자비여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웃음). 스님이 제 지난 삶을 알아본 거죠. 그렇다고 지난 삶이 가치 없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중심을 잡도록 만들어준 말이죠.”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이건 아니야’ 싶으면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려가면서 싸워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오지 않고 나쁜 쪽으로도 왔다. 낙천주의자이자 긍정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 여기고 살았죠. 속에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T 촬영을 하고 나서 예후가 좋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우암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용을 찾아보니까 곧 죽겠더라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멋있게 맞이하자’ 2015년 1월 신우암 판정을 받았을 때 유종일 교수가 한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훨씬 일찍 죽음이 찾아온 건데 여기서 당당하게 멋있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두려워하거나 너무 억울해 하거나 소심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잘살았다, 잘 정리하고 가면 되겠다 싶었죠.”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유 교수의 그런 기질이 운명을 바꾼 걸까? 수술 후 회복하는 중 삶을 돌아보고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의 질이 아닌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수술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유서와 장기기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의 서약이었다.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던 경험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2년 반이 지난 지금 건강은 회복했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이 기회에 정책 제안을 하나 할게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야 한다고 봐요. 이는 의료비 절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이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치료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본인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스스로 미리 해놔야 하는데, 사실 닥치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하면 많은 관심이 생기겠죠.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얻은 삶의 평온 삶의 수라장을 거쳐 암 투병을 겪고도 여전히 일복 많은 유종일 교수에게선 긴 사이클을 거치고 나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원로학자들 중에서 김경동 선생님 등은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시죠. ‘어떻게 그렇게 유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드리니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들을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죠. 이제 좀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 편안해진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유 교수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과도하게 집착하면 굴레가 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도 유종일이라는 ‘자존감 강한’ 남자가 좋아졌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오피니언 리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 2017-08-1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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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마지막 ‘유품정리’
-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까?’에 대한 고민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내가 기르고 있는 애완동물이나 유품의 정리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무작정 버리기에는 아까울 물건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필요한 물건들이니 미리 정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맡아줄 누군가가 있다 해도 미안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를 먼저 맞이한 일본은 유품정리에 대한 문제의식도 빨랐다. 일본의 경우 유품정리가 이슈가 된 것은 고독사하는 사망자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장례를 처리하고 상속할 자녀가 없는 경우 본인의 유품을 처리하기가 곤란한 것도 문제가 됐다. 실제로 일본 정부에서는 2030년 초고령화로 인해 50세 남성 3명 중 1명은 미혼인 상태에서 사망하게 되며, 전체 노인 중 절반은 고독사하게 될 것이라는 자료를 발표했을 정도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유품정리사다. 일본 유품정리사인정협회(遺品整理士認定協会)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일본 내에서 유품정리사로 활동 중인 인원은 약 1만6000명에 달하며, 등록법인도 900여 개나 된다. 버리는 것만이 능사 아냐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품정리사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한 편. 국내에서 활동 중인 유품정리 업체 중 상당수는 고독사하거나 살해당한 시신을 수습하는 ‘특수청소업체’다. 아직까지는 고인이나 고인의 유품을 직접 처리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유족이 있거나 고인이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에는 주로 폐기물업자나 재활용업자가 유품을 처리한다. 고인이 사용하던 집기를 헐값에 사들여 사용 가능한 제품은 중고물품 업체에 판매하고 나머지 유품들은 폐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유족에게 직접 의뢰를 받기도 하지만 상조업체나 장례식장 등을 통해 일을 맡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고인 유품에 대한 이러한 처리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대표적 유품정리회사인 키퍼스의 한국법인 키퍼스코리아의 김석중 대표는 이렇게 조언한다. “국내에선 고인의 유품을 버리고 처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유족들도 유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나 유품정리의 기본은 판매를 통해 환급 가능한 유품을 골라내고, 사회적·문화적 자산에 대한 온당한 가치를 매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버리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입니다. 또 상속 등 법률적 절차에 대한 고려도 필요합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세상을 뜨기 전에 직접 자신의 유품정리를 부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대부분 다급하게 유족에 의해 의뢰를 받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 고인이 미리 부탁할 때엔 사망 후 자녀나 지인을 통해 연락이 오기도 하지만, 요양병원이나 상조회사 등을 통해 영면 소식을 알게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적극적인 사전정리가 필요 전문가들은 죽음을 앞두고 운신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 허둥지둥 정리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조금씩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두길 조언한다. 예를 들어 사진이나 서신과 같은 개인적인 추억의 물건을 기록물로 보고 남길 것인지, 아니면 미리 파기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본인 입장에선 자산이라 보기 어려운 것들도 물건에 따라 기증 등을 통해 활용방안을 찾을 수도 있다. 또 유품을 정리하는 사람이 힘들지 않도록 미리 조금씩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품을 정리할 사람을 미리 정해놓거나, 사전에 유품정리 부탁을 할 만한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놓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사후의 유품 정리는 본인이 결코 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기르던 반려동물의 처리는? 고인이 기르던 반려동물도 문제다. 반려동물의 양육이 더 이상 어려워질 때 지인들에게 분양하거나, 관련 기관에 분양을 부탁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유기견이나 유기묘로 내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 맡기는 것도 미덥지 않을 때가 있다. 비용과 함께 양육을 부탁한다 하더라도 사후에 그 약속이 잘 지켜지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관련 신탁 상품도 등장했다. 지난해 KB국민은행은 업계 최초로 KB펫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고객이 은행에 자금을 맡기고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를 지정하면, 은행이 고객이 사망한 후 반료동물의 보호나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반려동물 부양자에게 일시·분할해서 지급하는 신탁상품의 일종이다. 처음 출시됐을 땐 반려견만 해당됐지만, 최근에는 반려묘까지 그 대상을 확대했다. 가입 문턱도 높지 않다. 일시금을 맡길 경우엔 200만원 이상, 월 적립식일 경우엔 1만원 이상이면 가입이 가능하다.
- 2017-08-0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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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이돌은 내가 책임진다!” 변화하는 팬덤 문화
- 언제부턴가 TV를 틀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젊은 댄스 보컬 그룹들이 자주 보였다. 바로 10대 스타 ‘아이돌’이다. 이제 단순한 인기를 넘어 우상화되고 있는 아이돌의 팬들은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아이돌의 시초라 할 수 있는 ‘H.O.T.’부터 최근 방송을 통해 국민투표로 뽑힌 ‘Wanna One(워너원)’까지 아이돌 팬덤 문화 변천사를 들여다보자. 아이돌 1세대, 은행 앞에 줄서던 여고생들 지금은 은행 업무도 모바일로 간편하게 처리하는 시대. 그런데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은행 앞에서 줄을 섰다고? 그렇다. 1996년 현재 1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H.O.T.가 데뷔했을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 보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PC통신 시절이었다. 콘서트 티켓도 각 지역의 특정 은행에서만 판매를 했기 때문에 H.O.T.의 콘서트 소식이 들리면 여고생들은 티켓을 구하기 위해 학교도 빠진 채 새벽부터 은행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중 금수저들은 은행 거래가 많은 부모님을 통해 은밀하게 콘서트 티켓을 미리 확보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빠’들을 보기 위해선 끈기와 노력은 필수였다. 앨범 발매일이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동네 음반점도 함께 바빠졌다. 오빠들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한정 브로마이드를 준비해서 가게 문 앞에 ‘-월 –일 H.O.T. 2집 발매(브로마이드 선착순)’라는 홍보 글을 써 붙였다. 여고생들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선착순에 들기 위해 조퇴도 불사했다. 오죽하면 H.O.T.의 음반 발매일이 되면 교육청에서 조퇴 금지라는 공문을 학교마다 보낼 정도였다. 2012년에 크게 인기를 끌었던 tvN의 드라마 을 보면 여주인공 은시원(정은지 분)이 좋아하는 가수의 방송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보관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처럼 TV 다시보기가 없던 시절엔 좋아하는 가수의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선 비디오 녹화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학원 때문에 방송을 놓치는 날이면 방송을 온전히 녹화하기 위해 부모님께 부탁을 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랴. 1년에 한 번 모든 가수들이 총출동하는 대규모 드림 콘서트나 연말 시상식 때는 혹여 우리 오빠들 기죽을까봐 오빠들을 상징하는 색깔의 우비와 풍선을 들고 현장지원 사격도 불사했다. 콘서트장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풍선의 색깔이 그해 가장 인기 많은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빠순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빠순이’는 1990년 중·후반 혜성같이 등장한 1세대 아이돌을 “오빠, 오빠” 하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는 여고생들을 낮잡아 부르는 용어였다. 어른들이나 또래 남자들이 “쯧쯧, 저 빠순이들” 하며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겨 팬클럽 문화가 후퇴했냐고? 그럴 리가! 그들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꿋꿋하게 오빠들을 응원하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팬클럽 차원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으로 통 크게 기부도 하는 등 편견에 정면대응하며 건전한 문화 정착에 힘썼다. 아이돌 2세대, 아이돌 굿즈로 무장하라 1990년대를 풍미했던 H.O.T.와 젝스키스, 신화 등 굵직굵직한 그룹들의 잇따른 해체와 개인 활동으로 1세대 아이돌들이 주춤하던 시기가 지나고 2004년 드디어 2세대 아이돌의 대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신기(東方神起)가 데뷔한다. 출중한 외모와 노래 실력을 갖춘 동방신기를 필두로 빅뱅(2006), 소녀시대(2007), 카라(2007)의 데뷔로 비로소 2세대 아이돌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1세대 아이돌과 2세대 아이돌 팬 문화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그 사이 인터넷 강국으로 변모한 대한민국의 위상 덕분에 팬클럽 활동에 최적화한 환경이 아닐까! 2세대 아이돌 팬들은 주로 인터넷 쇼핑을 통해 앨범을 구매한다.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보편화되긴 했지만 앨범을 구매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초도 한정 스티커나 비공개 사진이 있기 때문에 앨범 구매를 포기할 수 없다. 간혹 1990년대처럼 줄을 서서 앨범을 구매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악수회 티켓이 포함된 앨범이 큰 서점에서 판매될 경우에만 해당한다. 만약 좋아하는 그룹의 멤버와 악수를 하고 싶다면 소속사에서 공지한 앨범 판매처에 3시간 전에 도착해서 멤버들 수만큼 앨범을 구입하고 악수회 티켓을 받으면 된다.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팬서비스다. 콘서트의 경우 소속사에서 콘서트 티켓을 예매할 수 있는 주소와 예매일을 알려주면 그날부터 팬클럽 홈페이지 게시판은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른 지역별 PC방 목록이 공유되고, 구인 사이트에는 본인 대신 좋은 좌석을 예매해줄 대리인을 구하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업데이트된다. 이외에도 ‘S대 도서관 컴퓨터가 제일 빠르다더라’, ‘통신사 근처 PC방이 제일 빠르다더라’ 등등 수많은 추측과 가설이 난무한다. 콘서트 티켓을 성공적으로 예매했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 콘서트 티켓을 얻은 사람들은 콘서트장에서 자신을 빛내줄 굿즈 구입까지 마쳐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멤버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만든 티셔츠, 야광 머리띠, 응원봉은 물론이고 콘서트장에서 땀을 닦아줄 수건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간혹 콘서트장 앞좌석에서 관람하다가 멤버들이 손을 내밀 때 자신의 수건을 받아주기라도 하면 그날은 팬질 인생 최대의 계를 탄 셈이다. ‘쌀 화환’은 또 어떻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드라마나 뮤지컬 등에 진출하면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으리으리한 쌀 화한을 보낸다. 꽃은 시들면 버려지기 때문에 10kg의 쌀 포대를 모아 화환을 만드는 것인데 그 쌀들은 전국 각지의 불우이웃 성금으로 기부된다. 이 얼마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문화란 말인가! 2세대 아이돌들은 본격적인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데뷔한 2pm의 경우 ‘왜 한국에서 안 보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현재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활동 중이다. 일본의 가장 큰 공연장인 도쿄돔을 마비시킬 정도로 뜨거운 아이돌의 한류 열풍은 아직까지 식을 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내가 뽑는다 그리고 바야흐로 2017년, 2세대 아이돌들의 해체와 각종 개인활동들로 주춤했던 가요시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엑소(EXO), 트와이스(TWICE), 에이핑크(APINK) 등 이른바 슈퍼 아이돌들의 등장으로 팬들은 벌써부터 그들을 지원사격해줄 준비를 모두 마쳤다. 각종 시상식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1등을 하기 위해 모바일과 인터넷으로 매일 투표를 하는 정성은 기본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방한 Mnet의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를 데뷔시키기 위해 팬클럽들은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휴대용 휴지에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의 얼굴을 인쇄해 나눠주거나 커피차를 빌려 커피를 나눠주며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아이돌 굿즈는 더욱 다양해졌다. 소속사에서 멤버들의 얼굴을 본떠 인형을 만들어 1차 판매하고 2차로 인형 옷, 인형 소품(침대, 베개, 가방 등)들을 판매한다. ‘그런 걸 누가 사!’ 분명 그런 생각이 들것이다. 하지만 품절되는걸 보면 ‘나만 안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팔린다. MINI INTERVIEW 허윤정(26)씨는 워너원 멤버 라이관린의 팬이다. 우연히 빠지게 된 아이돌 덕분에(?) 굿즈 제작까지 취미로 하고 있다. “예쁜 쓰레기는 예쁨으로서 그 효용가치를 다했다는 말처럼, 저는 라이관린의 예쁨을 담아낸 무언가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굿즈를 만들기 시작했죠. SNS에 판매 글을 올렸는데 싱가포르에 사는 팬이 연락을 줘서 120장을 사갔어요. 아이돌에 너무 빠지면 회의감이 올 것 같아서 요즘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에요. 이런 활동이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시너지가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요즘이에요(웃음).”
- 2017-08-0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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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손
- "야! 고추다! 고추!" 너무 좋아서 큰 소리로 이렇게 감탄사를 연발하신 아버지는 그 즉시 대문에 빠알간 고추와 길게 늘어뜨린 한지로 금줄을 매어놓으셨단다. 그 얘기를 하실 때마다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남동생이 대우그룹 사원으로 리비아로 가서 근무를 하게 됐을 때다. 딸 셋을 낳고 얻은 아들에게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던 엄마는 남동생을 배웅하고 나서 정신이 다 나가버렸다. 수원행 전철을 탄다고 탔는데 종착역에 가서 내려 보니 청량리역이더란다. 넋이 나가버린 엄마는 며칠 동안 초점 없는 눈동자에 갈피를 잡지 못하셨다. 여러 명의 딸들이 아들 하나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더운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웠던 내가 편지를 쓰게 되었고 우연히 그 편지를 보게 된 현장 사무실의 소장님이 “혹시 누나가 서둔야학을 다녔느냐?”라고 묻더란다. 그분은 바로 서둔야학 김재우 선생님이었는데 필자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고 후배들의 선생님이었다. 그때부터 그분은 만리타향에서 외로워하던 동생을 세심하게 보살펴주셨는데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동생을 좀 더 일하기 편한 관리소장 전속 운전기사로 소개해주기도 하셨단다. 당신이 먼저 귀국하게 됐을 때는 동생을 염려해 사무실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사무실 직원들의 배려가 많았단다. 그리고 한 번 끈이 닿으니까 전임자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후임자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너무 더워서 현장에서 계속 일했다면 건강상 1년을 버티기도 어려웠을 상황이었는데 동생이 3년 세월을 잘 근무하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분 덕분이었다. 엄마는 남동생 월급이 송금되어오면 “이게 어떤 돈이냐, 우리 아들이 그 더운 나라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이다” 하시며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은행에 저금했다. 그러고는 딸들이 번 돈과 엄마가 번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셨다. 엄마에게는 딸이 번 돈과 아들이 번 돈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983년 12월, 우리 가족의 오랜 숙원이었던 내 집 마련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우리 집이었다. 외할머니가 맏딸의 궁색한 살림을 걱정하면 “장모님, 걱정 마십시오. 좀 있으면 장모님이 이 문으로 들어갈까 저 문으로 들어갈까 열두 대문 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했던 아버지가 평생 못 이룬 꿈을 엄마와 자식들이 공동으로 이뤄낸 것이다. 남의 집 셋방살이, 그것도 제일 낡은 집으로만 이사를 다녔던 엄마를 커다랗고 산뜻한 양옥집에서 뵈니 부잣집 마나님같이 보였다. 천석꾼 부잣집 맏딸이었던 엄마는 더없이 만족해하셨다. 새집 기둥뿌리 하나는 김재우 선생님이 박아주신 셈이었다. 난생처음 갖게 된 우리 집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우리 가족의 공동 은인인 그분께 우리 가족 모두는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둔야학이라는 사랑의 고리는 그 먼 나라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엄마, 엉엉, 엄마.” 1983년 2월 엄마의 회갑연에서였다. 잔칫상을 차려놓은 후 맏딸인 언니가 제안했다. “얘들아 우리 '어머니의 마음' 같이 부르자.” 선창을 하던 언니를 따라서 부르던 우리 다섯 형제들은 잠시 후 더 이상 부르지 못하고 엄마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그동안 형극의 길을 걸어오신 엄마의 삶이 너무도 가슴 아파서였다. 한바탕 울고 난 우리에게 엄마 또한 젖은 눈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너희들 이 손 보고 꽤나 울 것이다.” 우리 앞에 내민 엄마의 손바닥은 갈퀴 같았고 손가락 마디는 있는 대로 다 불거져 있었다. 엄청난 일을 하느라 자연스럽게 닳아 없어졌던 엄마의 손톱은 그래서 일부러 깎을 필요가 없었고 양쪽 엄지손가락 지문도 지워져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애를 먹기도 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엄마의 손은 바로 엄마의 이력서였다.
- 2017-07-2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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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식스티 컬처
- 조용필(67), 안성기(65), 전영록(64), 윤석화(61), 김창완(63), 하춘화(62), 김해숙(62), 배철수(64), 송승환(60), 손석희(61), 장사익(68), 임성훈(67), 강석우(60), 혜은이(61), 태진아(64), 최백호(67), 양희은(65), 윤여정(69), 이수만(65)….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유행하는 코드와 아이콘이 급변하는 영화, 방송, 드라마, 대중음악, 공연, 연예기획사 등 대중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연예인과 방송인, 사업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60대라는 공통점도 있다. 60대 관련한 새로운 문화와 산업이 뜨고 있다. 과거의 60대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과 소비패턴, 활동 양태를 보이는 뉴식스티(New Sixty)를 겨냥한 다양한 문화와 산업들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중년도 노년도 아닌 나이를 잊고 사는 ‘논 에이지(Non Age)’ 대표적인 세대가 요즘 60대다. 뉴식스티로 불리는 60대는 베이비붐 세대로 1970~19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자 1990~2000년 아파트 호황기를 누리며 민주화의 정치적 격변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다. 이들은 패션에서부터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상품을 본격적으로 소비한 세대이기도 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요즘 60대는 가장 오랫동안 일했고 가장 많은 돈을 벌었으며 소비욕망이 강한 세대로 은퇴를 본격화하며 100세 수명시대에 인생 2막을 열고 있는 주역이다”라고 분석한다. 2013년 기준 우리의 기대수명은 81.8세로 요즘 60대는 평균 20년의 삶을 더 산다. 그동안 60대 하면 인생이 끝났다고 보고 퇴직 이후 새로운 시작을 하지 않았지만, 기대수명 82세 시대에선 60대가 “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며 다양한 취미와 문화생활을 시작하고 새로운 사업이나 일에 도전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세대별 가구당 평균 자산 규모는 50대가 4억2229만원으로 가장 많고 60대가 3억642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다음은 40대(3억3175만원), 30대(2억4007만원), 30세 미만(8998만원)의 순이었다. 이처럼 자산이 많은 60대는 이전과 다른 왕성한 소비 스타일을 보인다. 서울문화재단이 최근 발표한 ‘서울시민 문화향유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60대 연평균 문화예술 관람 횟수가 38.6회로 30대(37.3회), 40대(30.1회), 50대(31.6회)를 압도했고 문화예술 동호회 참여(66.2%)와 창작적 취미활동(44.6%)도 활발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은 ‘라이프 트렌드 2017’에서 “오늘날의 60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나이다. 중년도 노년도 아닌 특별 지대인 셈이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60대가 등장했다. 나이를 잊은 60대의 변신, 멋쟁이로 거듭나는 ‘뉴식스티’를 주목하라. 60대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소비 주체로 급부상한 새로운 60대의 실체가 보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60대는 인생을 즐기고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며 노인이기를 당당하게 거부하고 왕성한 소비활동과 여가생활을 하는 뉴식스티를 겨냥한 다양한 문화와 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동안 젊은 주인공과 식사하는 장면에만 모습을 보여 ‘식탁용 캐릭터’로 전락한 60대 조연 캐릭터를 등장시켰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들이 최근 들어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60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나 영화 등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60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그린 작품에서 새로운 60대의 변화된 생활과 심리를 소재로 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60대 주인공 캐릭터를 내세운 다양한 내용과 소재의 영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연극, 뮤지컬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요즘 중년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소설 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뮤지컬과 연극, 자식 세대의 결혼 인턴제, 부모 세대의 졸혼 등 변화된 가족 풍속도를 담은 KBS2 주말극 , 60대 부부가 자식을 다 결혼시킨 후 황혼 이혼 대신 한집에 살되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사는 해혼(解婚) 생활을 다룬 SBS 주말극 , 60대인 윤여정이 요리사로 나오는 tvN 예능 프로그램 , 김윤진이 40대와 60대 엄마를 오가며 연기하는 영화 등 60대 주인공을 내세운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60대를 겨냥한 대중문화 작품이 붐을 이루면서 이전에는 ‘퇴물’ 취급을 받았던 60대 연예인과 방송인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안성기, 윤여정, 김해숙, 강석우, 송승환 등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활동하고 있고 윤석화, 예수정은 젊은 연극배우들도 소화하기 힘든 모노드라마 등에서 주연으로 나서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배철수, 임성훈은 음악 프로그램과 교양 프로그램 메인 MC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손석희는 JTBC 앵커로 나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조용필, 김창완, 하춘화, 장사익, 태진아, 전영록 등 60대 가수들은 신곡을 발표하며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갖는 등 전성기 못지않은 현재진행형 가수로 활약하고 있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대중문화 산업의 선두주자인 SM엔터테인먼트를 이끄는 수장은 60대 이수만이다. 60대에도 주연을 맡으며 한국 영화계를 선도하는 안성기는 “나의 최고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이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60대 배우만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나 내용, 소재의 영화들이 많아졌다”라고 말했다. 대중문화뿐만이 아니다. 이전의 60대와 전혀 다른 소비 스타일과 여가생활을 보여주는 뉴식스티를 겨냥한 패션, 화장품, 여행, 통신 상품 등도 본격적으로 출시되며 성업 중이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초 정년퇴임한 정영재(65)씨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스킨스쿠버를 배우기 위한 여행상품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레저와 결합한 여행상품은 젊은 층만 이용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나 같은 60대도 많이 이용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뉴 식스티는 이제 새로운 대중문화와 산업의 트렌드의 진원지이자 새로운 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 2017-07-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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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소비를 활용한 가족관계 회복 방법
-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할 때가 있다. 대학입학 때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걸”, 대학졸업을 할 때는 “스펙 좀 쌓아둘걸”, 결혼을 할 때는 “돈 좀 모아둘걸”, 직장을 다닐 때는 “좀 더 성공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3년에 출간된 의 저자 브로니 웨어는 10여 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문득 자신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의미하다고 느껴 모든 생활을 접고 호주에서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수많은 이가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는 그 경험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 5가지는 ① “내 뜻대로 살걸” ② “일 좀 덜 할걸” ③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걸” ④ “내 감정에 좀 더 충실할걸” ⑤ “도전하며 살걸”이다. 5070세대도 이런 후회를 해본 적 있을 것이다. 5070세대가 젊었을 때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있을까? 일에 치여 야근이 일상이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다 커버렸고, 아내와도 너무 멀어진 것 같다. 현역에 있을 때는 나름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연락은커녕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도 많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다. 과거 직장생활할 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속병만 키우던 시간들, 하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살아온 세대가 지금의 5070세대인 듯싶어 씁쓸하다. 지금까지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지면 된다. 5070세대가 앞으로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돈·연금·봉사·기부 등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가족관계 측면에서 가치 있는 노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충전하라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1945~2013) 선생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25년간 월간 에 자전적 수필 ‘가족’을 연재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사후에 로 발간되었다. 그가 부인과 나눈 마지막 말은 “사랑해요”, “여보, 나도 사랑해”였다고 한다. 황혼이혼과 졸혼이 회자되는 세상이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최인호 선생이 세상에 던지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딴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소홀하기 쉬운 ‘가족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달 고등학교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퇴직한 한 선배가 해준 이야기다. 그동안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선배는 퇴직한 지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해 뜨기 전 눈뜨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해 뜨면 눈뜨고, 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됐다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고 격려하며 지원하던 아내도 이제는 은근히 불편해하는 눈치 같아서 걱정이란다. 선배가 조심스레 아내에게 “여보! 우리 여행이나 같이 다닐까?” 하자, 동네 스포츠센터 언니, 동생들과 함께 여행 가기로 했으니 혼자 가란다며 푸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퇴직 전에는 늘 가족과 함께 여행 가자고 하던 아내가 이제는 자기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었다며 걱정한다. TV나 신문에서 퇴직 후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내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무시하고 지나친 게 지금의 서먹함으로 이어진 것 아닌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5070세대가 배우자와 나누는 대화시간은 하루 1시간 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0대의 70%, 60대의 60%, 70대의 50%가 그 정도밖에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무원 인생이모작 교육에서 만난 어느 수강생의 이야기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말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아들이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불러볼까 하다가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이 거실에 있는 동안 나오지 않아 포기했단다. 부모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녀들과 서먹해진 걸까? 자녀교육을 시킬 때 무관심이 최고라는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으로 그동안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건 아닌지,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쉽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5070세대는 특히 은퇴한 뒤에 배우자는 물론 자녀와의 관계에서 뜻밖의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가족들에게 휘둘리거나 조급해하면 가족 파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김치가 맛있어지려면 오랜 시간 익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관계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숙고하다 보면 이 기다림의 시간도 잘 여물어갈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늘리자 건강검진 후 “검진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앞으로 살 날이 9개월 정도 남으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당황스럽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이다. 몇 년 전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라는 카피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광고가 있었다. ‘가족시간계산기’로 앞으로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주는 내용이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자신의 나이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 친구 만나는 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등을 빼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나왔다.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9개월! 참고로 필자의 경우는 약 11개월이었다. ‘가족시간계산기’는 누구나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참고1]의 ②번 기대여명은 통계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연령별 기대여명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귀찮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인 82세에서 자신의 나이를 빼고 계산하면 된다. ‘가족시간계산기’를 작성하다 보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볼 수 있다. 가치소비를 통해 가족관계 강화해보자 ‘가족시간계산’을 통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어떤 배우자, 부모가 될 것인지 액션플랜(action plan)을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시간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배우자와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데이트하기’, ‘배우자와 마주앉아 한 시간 이상 대화하기’, ‘배우자 또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본다.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와 삶을 위한 징검다리를 하나씩 옮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어도 배우자와 자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왔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치 있는 소비와 실천으로 꽉 막힌 대화의 문을 열어보자. 처음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더라도 인내심과 배려심을 갖고 접근하면 봄눈 녹듯 그동안의 소통 단절은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필자도 당장 실천하겠다.
- 2017-07-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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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내쫓아 버리지....
- 우리 집의 식사 담당은 다른 보통 집과 달리 남편이다. 이유는 필자가 10여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맞벌이로 직장을 다니던 필자가 10여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 필자가 쓰러지던 그 때는 지금처럼 TV 건강 프로그램도 많지 않아서 건강 상식이 풍부하지 않았고, 뇌졸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의 왼쪽이 힘이 없고 불편한 상태이다. 주부인 필자가 쓰러지자 우리 가정 생활은 즉시 여러 가지로 비상 사태가 되었다. 세끼 식사는 물론 각종 세금 납부나 은행 문제 처리에 대하여, 남편이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남편의 정년 퇴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러졌는데, 대학 4학년 때 서울의 mbc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해 중간에 PD로 전환해서 평생을 일했던 남편은 퇴직하자 마자 필자 대신 집안 일을 책임져야 하는 전업 주부로 직업을 바꾸어야만 했다. 발병 이후로 우리 집엔 하루 세 시간씩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밑반찬도 해주시고 여러가지 집안 일도 도와 주신다. 신앙심이 매우 깊은 아줌마는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걸 커다란 기쁨으로 여긴다고 한다. 도울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이 고맙고, 또 남을 도울 수 있으니 기쁘다고 한다. 며칠 전 도우미 아줌마가 못 오는 일요일 아침, 일찍 잠을 깬 남편이 어묵탕을 준비 했나 보다. 어묵 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필자는 아침이라 입 맛이 없어서 맛있게 먹어지지 않는데 남편은 나의 입만 바라보며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물론 자기의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인 걸 안다. 이성으로는 모처럼 남편이 애 쓰고 준비한 음식이니 맛있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대답은 ‘그냥 오뎅 맛이네요’로 나오고 말았다. 자기 요리 칭찬을 잔뜩 기대한 남편이 나의 대답을 듣더니 그 동안 쌓였던 나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으며 본격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기관장 급이라고 하면서…. 그 날 하루 내내 우리는 기분이 상해서 세 끼를 침묵 속에서 어렵게 식사를 해야 했다. 화가 많이 난 남편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월요일에 도우미 아줌마가 일찍 오셨는데, 오자마자 남편은 아줌마한테 찰싹 붙어서 어제 자기가 한 요리에 대한 신퉁치 못했던 반응을 보고하면서 필자의 배려 없음을 불평한다. 이야기를 듣던 아줌마가 “언니를 (필자보다 10년 쯤 어린 아줌마는 날 언니라고 부른다) 그냥, 내 쫒아 버리시지 그러셨어요” 하며 100% 남편 편을 들어 준다. 물론 필자를 위한 작전인 걸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안다. 남편이 어디로 내쫓을까요? 하고 묻다가 웃음 바가지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줌마의 지혜로 우리 집 부부 싸움은 쉽게 끝이 났다. 7년 가까이 우리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아줌마는 우리 부부의 다툼을 조정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 동네 교회의 장로 일을 맡고 있는데 그녀 자신도 물론 독실한 신앙인이다. 평소에도 아줌마는 우리 집의 소소한 부부 싸움의 전문 조정관이다. 많은 퇴직 부부가 그렇겠지만 별 일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우리 부부는 아들의 표현대로 ‘잘 놀다가도’ 말다툼을 자주 한다. 주로 말이 주는 상처로 다툼을 하는데 한번은 나더러 마약쟁이처럼 커피를 마셔댄다고 해서 며칠 동안 말을 안하고 지낸 적도 있었다. 물론 몸이 약한 필자를 위해서 커피를 줄이라고 하는 말인 줄 다 알지만 같은 말이라도 마약쟁이가 뭐란 말인가? 결국 남편의 사과로 다툼은 끝이 나고 말았는데 그 후로 남편이 말을 조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인다. 결국 나이들수록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다. 우리 부부의 이런 말다툼이 있을 때마다 외부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현재의 우리 상태에서 아줌마의 조정은 필수적이다. 아줌마는 적절하게 양 쪽의 편을 들어주어서 우리의 다툼을 끝나게 한다. 그녀의 그런 모든 능력은 그녀의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 부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 2017-07-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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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척간의 돈거래는 신중해야
- k씨는 직장동료다. 토목기술자로 해외공사 현장에서 크게 활약한 베테랑 엔지니어다. 당시 해외근로자의 급여는 국내근무자의 거의 두 배를 받았으니 겉으로만 봐서는 제법 돈도 모았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실토하는 말에 의하면 벌어온 돈을 아내가 거의 다 날렸다고 한다, 아내도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열사의 사막에서 고생하며 벌어오는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늘려 보겠다는 심정으로 돈놀이를 시작했다. 결국 친정집 친척 누구에게 후한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k는 귀국하면서 어느 정도 목돈이 되어있을 통장을 상상하면서 즐거운 앞날을 꿈꿨다. 하지만 깡통 통장을 바라보는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 아내와 심하게 다툰 후 아내로부터 통장관리 등 경제권을 뺏어버렸다. 그 뒤 다시 해외에 나가면서 돈 관리를 이제 친형에게 맡겼는데 형이 또 이상한 사람이어서 동생이 맡긴 돈을 다른 동생의 결혼자금이나 생활비로 다 써버렸다고 한다. 그로인해 형과의 관계도 남남처럼 서먹서먹하게 변해버리고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극도의 불신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 주위를 둘러보니 일가친척에게 돈을 빌려주고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제법 있다. 필자도 믿었던 친척들과의 돈거래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날린 아픈 과거가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집을 살 때 돈이 부족하다고 하여 빌려준 돈은 틀림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들 유학자금이나 결혼자금이 부족하다고 빌려준 돈은 십중팔구 돌아오지 않았다. 집을 살 때는 그래도 직장에 다녀서 경제력이 있는 젊은 사람이 빌려가지만 자식들을 위해 빌려갈 때의 부모는 퇴직 등 경제력이 허약한 사람들이대부분이었다. 그 돈을 사용한 자식들은 직접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입을 씻어버리고 나 몰라라 하고 능력 없는 부모는 자신이 어떻게 갚아보려고 하지 자식들한테 전가를 시키지 않으려한다. 형제나 친척들과의 돈거래에서 돌려받기가 어려운 점이 친척 간에 너무 야박한 것 같아서 서면으로 된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도 문제다. 나중에 법적인 절차를 밟으려 해도 법적인 근거자료가 불확실하다. 또 형제나 일가친척 간에는 법적 소송을 하기에는 부모님 보기가 뭣하고 핏줄이라는 점도 작용하여 구두로 독촉만 하고 처분만 기다린다. 형제나 친척 간에는 돈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이자가 겁이 나서 우선 갚으려고 하지만 은행보다는 느슨하게 독촉하는 일가친척의 돈은 천천히 갚으려는 심사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 빚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잘사는 형제가 못사는 형제를 도와준 것이라는 아전인수격으로 마음도 변해 버린다. 일본에서는 친척이나 친구가 내가 돈이 있는 줄 알고 빌려달라고 하면 은행에 함께 가서 내 돈을 이 사람에게 빌려주라고 말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은행에서 우선적으로 예금주가 지명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고 한다. 물론 은행에서는 일반 대출과 같은 법적인 절차를 완전히 밟기 때문에 나중에 은행이 못 받으면 못 받았지 예금주는 피해가 없다고 한다. 친한 사이일수록 돌려받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그냥 돈을 주면 몰라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을 한다면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도 본인 돈을 특정인 누구에게 빌려주라는 지명권을 인정하고 그 보증은 은행에서 담보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 2017-07-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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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도 더운데, 뭘 하지?” 오늘 ‘북캉스’ 떠나볼까요?!
- 지독하게 더웠던 2016년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올해도 그 끔찍한 시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무더위를 피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더위의 고통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은 의외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도 책과 함께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들이, 알고 보면 근처 한 시간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북캉스’로 하루 보낼 곳을 기웃거려볼까. *북캉스: 책을 뜻하는 영어 단어 ‘북’에 ‘바캉스’를 결합시켜 만든 신조어 책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TV, 영화 등 화려한 영상 문화와 게임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조류에 밀려 문화의 중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책이었다. 우리들에게 지금 책은 영상과 말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일상을 힐링하는 촉매로서 그 역할을 되찾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의 도서관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일상을 힐링하는 책의 공공기능적 역할을 간파한 기업들은 너도나도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 공간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이제 젊은 시절처럼 산으로 바다로 가지 않아도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났다. 여름휴가를 떠나는 대신 도서관이나 동주민센터, 백화점 북카페, 서점 등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식히는 이른바 ‘북캉스’ 문화가 시니어들에게도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책 향기 그윽한 서점과 강연과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복합공간의 도서관은 무더위를 식히는 도심 속 정자마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 순화동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길사 ‘순화동천’ 책 좀 읽었다는 시니어들에게 인문학 중심 도서들을 주로 펴낸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은 각별하다. 그 한길사가 오랜 준비 끝에 지난 4월 말에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의 문을 열었다. 한길사가 창업 초기 자리했던 서울 중구 순화동에 만들어진 순화동천은 3만여 권의 책이 즐비한 550평 규모의 공간이며 책 박물관, 갤러리, 강의실, 회의실, 서점으로 구성됐다. 한길사는 오래전부터 독자가 중심이 된 ‘책 놀이터’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순화동의 ‘순화’와 노장사상에 나오는 이상향인 ‘동천’을 더해 ‘순화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문·예술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평화를 순례하는 유토피아’가 되겠다는 의미다. 책 박물관은 근·현대출판문화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고서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또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어 음악과 미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강의실과 회의실로 사용할 수 있는 4개의 공간은 각각 ‘퍼스트아트’, ‘한나 아렌트 방’, ‘윌리엄 모리스 방’, ‘플라톤 방’으로 불린다. 전시회나 출판기념회, 8~15명이 참석하는 소규모 회의, 50~70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강연을 진행할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접수를 받는다. 아트갤러리와 한길책방은 60m에 이르는 긴 복도로 이뤄져 있다. 복도의 한쪽 벽은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이 걸린 아트갤러리로, 다른 쪽 벽은 한길사가 지난 40년 동안 펴낸 고품격 인문·예술도서가 들어찬 한길책방이다. 복도 중간에는 ‘카페뮤지엄’이 있어 커피와 함께 잠시 쉬며 책과 미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 ◇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시원한 자유, 신세계 ‘별마당 도서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코엑스 안에 초대형 도서관이 있다? 사실이다. 신세계가 지난 5월 말에 문을 연 ‘별마당 도서관’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이다. 회원카드도 따로 없다. 오래 머물러도 된다. 음료를 가지고 와도 괜찮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책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별마당 도서관은 총면적 2800㎡에 2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도서관 내부에는 13m 높이의 대형 서가 3개를 중심으로 소파형·계단형 등 총 200석의 의자와 책상을 배치했다. 또 은은한 간접조명을 설치해 개인 서재 분위기를 냈고, 곳곳에 콘센트와 USB 단자를 구비해 노트북과 휴대전화 충전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5만여 권의 장서와 600여 권의 잡지가 준비되어 있는데, 잡지 코너만 보면 국내 최대 규모다. 고객들의 도서 기증도 받고 있기에 집에 보관해둔 책을 기증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별마당 도서관은 대출은 불가능하며 열람만 가능하다. 또한 도난방지 장치가 없다. 도서관과 쇼핑몰 사이에 출입구가 따로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는 구조이지만, 도난경보기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믿는 구조다. 별마당 도서관은 문화와 휴식을 갖춘 열린 도서관을 찾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도서관이 지역 상권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시설이라고 판단해 만들어졌다. 별마당 도서관의 모델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인 일본 다케오 시의 ‘다케오 시립 도서관’이다. 다케오 시립 도서관은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열린 도서관 콘셉트로 2013년에 리뉴얼한 이후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 키덜트 겨냥한 예스24 ‘홍대던전’ 인터넷 서점들의 오프라인 서점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그동안 인터넷 서점들이 오프라인 거점을 주로 중고서점 중심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예스24는 콘셉트 서점을 기획해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 서브컬처(하위문화) 복합문화공간인 ‘홍대던전’을 열었다. 홍대던전은 청소년에서 키덜트까지를 주 고객으로 하는 라이트노벨(가벼운 느낌의 장르소설)·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 맞춤문화공간을 지향한다. 5월에 문을 연 예스24 중고서점 홍대점과 아래위층으로 연결돼 있다. ‘홍대던전’에는 누구나 무료로 라이트노벨을 읽을 수 있는 열람공간, 피규어와 퍼즐 등 캐릭터 상품과 코스프레 전문용품을 모아둔 판매공간,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메뉴를 모티브로 한 음식을 판매하는 매점 등이 마련되어 있다. ◇ 지적 세계로의 여행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현대카드는 ‘혁신’을 기업 이미지로 삼으면서 아날로그와의 적극적인 결합을 꾸준히 지향했다. 서울 도심의 네 곳에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세워진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아날로그의 대표적 콘텐츠인 책에 주목한 현대카드의 또 다른 실험이다. 공연과 문화공간 등을 통해 컬처 브랜딩의 선두주자로 각인된 현대카드에서 책을 통해 지적 브랜딩의 출발점을 잡은 것이다. 가회동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는 디자인 서적들이, 이태원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음악 관련 서적들이 있다.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책과 함께 1950년대 이후에 나온 1만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LP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LP를 통한 음악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계속 업데이트하는 중이다. 신사동 ‘쿠킹 라이브러리’는 음식 관련 서적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어 있다. 재료 카드를 사면 현장에서 요리도 가능하다고 한다. 청담동 ‘트래블 라이브러리’는 독서를 여행과 동일하다고 여기고 1만5000여 권에 달하는 여행 관련 서적들뿐만 아니라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여행을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모든 형태의 지적 활동’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하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분당구 정자동의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자리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도서관, 서점, 북카페를 결합시켜 책이 있는 공간의 장점들을 모두 경험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뒀다. 디자인과 IT에 특화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디자인 장서 1만7000여 권, IT 장서 7000여 권, 전 세계의 전문 백과사전 1300여 권, 국내외 잡지 250여 종이 준비되어 있다. IT 기업이 운영하는 도서관이라는 특색을 살리면서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비싼 디자인과 IT 분야의 책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고르기 쉽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반적인 도서관들과는 달리 ‘절대 정숙’ 문화가 아닌 대화하고 토론하는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네이버의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사서는 시니어들이 맡고 있으며 안에 위치한 카페는 발달장애인의 일터를 만드는 회사 베어베터와 함께 운영되며 지적장애나 자폐를 가진 청년들이 커피를 만든다. ◇ 도심 속 한옥 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문학도서관은 종로구에서 16번째로 만들어진 도서관이자 최초로 한옥으로 만들어진 공공 도서관이다. 지붕은 전통 방식의 수제 기와를 사용했고 담 위에 얹은 기와는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의 기와 3000여 장을 가져와 사용했다. 그야말로 전통 한옥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청운문학도서관 1층은 한옥이며 지하는 반지하식 양옥 건물이다. 1층에서는 시, 문학 창작교실, 문화예술교육, 인문학 콘서트 등이 열린다. 지하층은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만날 수 있는 자료실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이 있다. 또한 온돌식 독서공간도 마련되어 한옥 도서관이라는 콘셉트를 충실하게 살리고 있다. 물론 여름에는 에어컨을 통해시원하게 유지된다고 하니 냉방은 합리적인 현대기술을 이용했겠다. 도서관 같은 서점 인터파크 ‘북파크’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2, 3층 총 2000㎡ 공간에 자리 잡은 ‘북파크’는 북카페나 도서관처럼 이용할 수 있는 서점이다. 50여 개의 테이블과 200여 개의 의자, 앉아서 책 읽기가 가능한 계단 등이 마련돼 있다. 독서공간의 분위기도 다락방 스타일, 테라스 스타일, 응접실 스타일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고를 수 있다. 또 계단 밑이나 서가 뒤 숨은 공간에서 아늑한 분위기를 즐기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책 코너 부근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일곱 곳이나 있다. ‘보신 책은 북박스에 넣어주시면 직원이 정리한다’는 안내문구까지 있으니, 책의 구매 여부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서점이다. 북파크는 인터파크의 과학재단인 카오스재단이 2016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카오스재단의 설립 목적인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지식의 공유’ 취지에 맞춰 총 10만여 권의 보유 서적 중 절반 정도가 과학 관련 책이다. 서점 안에는 35석 규모의 다윈룸과 8석 규모의 뉴턴룸 등 모임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북파크는 이태원이나 경리단길 유명 맛집과 가깝고 공연장이 같은 건물에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여름방학이 되면 손주 손을 잡고 다녀와도 좋겠다. 이밖에도 CJ CGV와 쉐라톤워커힐 호텔도 도서관을 만들었다. 금융계에서도 KEB 하나은행 본점인 을지로 사옥에도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고 대신증권도 명동 사옥에 도서관을 열었다. 기업들이 앞다퉈 사회공헌 차원에서 도서관을 개장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과거에는 한 노인의 죽음을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에 비유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식의 총량이 매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막대하게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인생 경륜을 어설프게 드러내는 것은 자칫 뭘 모르면서 꼰대 노릇하는 걸로 비치기 십상인 세상이 됐다. 나이 듦에 따라 정신과 지식의 세계도 변모하기에 품위 있게 늙는 일은 중요하다. 문화지성인으로서의 비움과 채움이 필요한 시니어에게 도서관은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자 여행지다. 다시 찾아온 무더운 여름, 어디를 갈까 고민 말고 가까운 도서관에 놀러 가보자.
- 2017-07-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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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방생활사 전문가 허운홍’ 낭만주부 나방 엄마로 허물 벗고 빛을 보다
-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 2017-07-05 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