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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전원생활 도시서 즐기기
- 친구들과 오르는 경기 동두천 마차산은 온통 연두색 파스텔화다. 정상에서 태풍급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무 향기 가득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세먼지까지 말끔히 씻어낸 쾌적한 ‘전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은퇴 후 편리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원에서 살다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사이에 도회지로 되돌아온 이웃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전원과 현실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고독감, 교통 여건과 편의·의료 시설 부족이 큰 문제”라고 역 귀향 사연을 말했다. 장래를 생각해 전원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시니어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도시에서 전원처럼 쾌적하게 생활할 방법을 찾자. 첫째,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유’보다 편리한 ‘이용’이 대안이다. 사실 시니어가 부동산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 투자비용, 관리비, 제세 공과금 등 ‘소유비용’이면, 마음에 드는 전원을 찾아 즐기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서해안 명승지에 전세 들어, 바다낚시와 조개잡이로 얼굴을 검게 그을리면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2년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깊은 산골로 갈 예정이라고 자랑했다. 일부 명승지에서는 월 단위 임대사업도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동호인끼리 한 주일씩 교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멀리 다니기 어려우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자. 관악에서 정들어 산 지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사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전원마을‘ 이다. 집 앞과 뒤, 옆으로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다. 아이들은 전학 한 번 안 하고 학교를 마쳤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 물놀이장은 어른·아이들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누구나 산책하기도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쾌적한 전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주 배낭 메고 친구들과 찾는 북한·도봉·청계산은 우리 차지다. 전원생활! 바로 내 앞에 있다.
- 2016-05-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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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나도 올챙이 적 있었는데..
- 그날도 광화문 시내로 가기 위해 성북동 뒷길을 통해 삼청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길은 솔직히 초보운전자나 초행길인 사람에게는 좀 힘들 수 있는 코스이다. 경사가 급한 언덕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오르내리는 길도 많으며 급커브 길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렇지만 이 길을 수십 년째 다니고 있는 나에겐 참으로 편리하고 쾌적하게 달릴 수 있는 친숙한 길이다. 이 길의 장점은 신호등이 없어 논스톱으로 운전할 수 있고 매우 익숙해서 빠른 속도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보니 앞쪽의 차 두 대가 길이 훤하게 뚫렸는데도 완전히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앞에 앞의 차에는 초보 운전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눈앞에 훤히 보이는 길인데 좀 심하게 조심스러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어휴, 저런 초보운전”이란 말이 나왔다. 추월하면 되겠지만 좁은 골목길이고 구불거리는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돼 맘대로 되지 않았다. 차도 흐름을 타야 하는데 너무 느리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그 꼴로 성북동 뒷길에서부터 삼청터널 지나 경복궁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필자 머리를 때리는 생각 하나. 제 속도 오든, 느림보 속도로 오든 내려오는 시간은 5분도 차이가 나지 않는 거 아닌가? 별 차이도 안 나는 걸 초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고 화냈던 걸 생각하니 참으로 필자 자신이 부끄러웠다. 필자도 초보 시절이 분명 있었고 운전하면서 실수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운전면허를 차도 없던 1978년에 따 놓았다. 장롱면허로 잠자던 면허증은 결혼 후 남편의 중후한 까만색 승용차를 만나면서 빛을 발했다. 운전 연습을 시켜주면서 부부싸움이 가장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맘씨 좋은 남편도 연수시켜주며 화를 냈다. 너무나 운전하고 싶었던 필자는 그런 걸 감수했으나 결국 남편 아닌 전문가에게 개인레슨을 받았다. 한번은 동네 골목에서 큰길로 통하는 도로로 나가는데 차들이 많아 잔뜩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조심조심 느리게 가고 있었는데 조수석의 남편이 “앞으로 빼!”라고 소리쳤다. 웬일인가 싶어 보니 오른쪽 유리창 너머로 어떤 아저씨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남편이 앞으로 빼라니 그 말대로 앞쪽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이번엔 멈추라고 소리친다.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 남편이 한 아저씨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한쪽 발을 쭉 내밀고 서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 아저씨의 발등을 지그시 밟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 운전으로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큰 일 날 뻔 했다. 아니 근데 그 아저씨는 왜 발을 그렇게 뻗고 있다가 남의 차바퀴에 깔렸을까? 나도 내려 보니 아저씨 슬리퍼 발등 위로 바퀴 자국이 찍혔다. 차바퀴에 깔렸으니 뼈라도 부서졌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맘씨 좋게 생긴 아저씨는 무슨 운전을 그따위로 하냐는 말씀만 하고는 웃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괜찮다고 해서 약국에서 파스와 연고를 사드리고 연락처를 드렸다. 추후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하고 돌아오는 내내 어찌나 남편의 눈치를 보았던지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만 하다. 그런저런 사고가 몇 번 생기자 필자는 안전운전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초보 시절에 그런 사고도 겪었으면서 그날 앞을 좀 가로막았다고 투덜댔으니 정말 올챙이 적 생각 못 했다. 항상 과거를 돌아보고 남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갖자고 다짐했다.
- 2016-05-1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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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노인 특화형 일자리가 필요하다
- 법으로 정년을 보장한 60세까지 근무한 뒤 박수받고 정년퇴직해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앞으로 10여 년은 너끈히 더 현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그냥 해보는 큰소리가 아니고 건강관리를 원만히 한 사람은 실제도 그렇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다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서 인생이모작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액티브 시니어가 되라고 권장하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집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활동하라는 말을 안 해도 ‘100세 시대’에 60세에 퇴직하고 남은 사십 년을 ‘구둘 장군’으로 지내기는 누구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둑질 말고는 무슨 일이든 찾아보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부치지 않아도 집안 식구들 등쌀에 집안에만 있기는 어렵다. 퇴직자가 왜 계속 일을 하려고 하는가? 우선은 먹고 사는 경제력이다. 퇴직금 1억 원을 은행에 넣어봤자 월 20만 원을 손에 쥐기가 힘든 데 세금은 15.4%나 뗀다. 허드렛일로 월 100만 원을 번다면 은행에 6억~7억 원을 예금한 것과 맞먹는다. 퇴직했다고 해서 안 먹고 안 입고 살 수가 없다. 퇴직해서 근로수입은 없어져도 소비지출은 그만둘 수가 없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거나 극소수의 재테크에 성공한 재력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연히 퇴직하는 순간부터 돈 걱정하는 것이 일반 서민의 자화상이다.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자녀들 결혼마저 늦어져 함께 살고 있다면 퇴직했다 해서 보따리 싸 시골로 내려가기도 어렵다. 자연히 이런저런 돈 벌 궁리를 하느라 불면의 밤은 깊어간다. 집안에서도 가장이 놀고 있으면 분위기가 저기압이다. 공원 벤치에서 만난 김철수(가명ㆍ67) 씨는 “갈 곳이 없어도 이렇게 집을 나와야 아내도 숨을 좀 쉰다”고 한다.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거실에 턱 버티고 있으면 아내가 얼마나 답답해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빠 내일부터 출근한다.’ 라는 말이 어떤 꽃 노래보다 하고 싶은 말이고 가족들은 듣고 싶은 속삭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 토막의 급여를 주는 일자리도 마다치 않고 노인들이 줄을 선다, 문제는 적은 돈을 버는 일자리에 퇴직자들이 인생이모작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박수 보내고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퇴직했으면 그만 집에서 쉬시지 새로운 일자리 찾기에 혈안이 돼 반 토막의 급여도 고맙다고 감지덕지 일하는 노인의 모습을 사시의 눈으로 째려보는 젊은이들도 있다. 자식의 일자리를 뺏는 비윤리적 아버지로 매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고령자 취업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자리를 시니어들이 뺏어간다는 시각이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누가 차지하는가에 대한 갈등구조다. 두 번째로 동남아, 중국 등 출신 외국근로자 때문에 몇 년간 인건비가 제자리걸음 하는 상황에서 시니어까지 저임금 경쟁에 가세해 인건비 인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도 젊은이들의 눈칫밥 먹는 신세로 전락해 길게 다니지 못한다. 뭔가 100세 시대에 걸맞은 정부 정책이 있어야 한다. 우선 노동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방치하지 말고 노년의 경험이 필요한 특화한 일자리를 특화해야 한다. 요일별 근무제나 바쁜 시간대의 파트타임 등 가변성 있는 노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어린이 놀이터의 안전점검, 불량식품 단속요원도 좋다. 공원이나 우범지대의 순찰이나 청소도 노인의 특화된 일자리로 손질해서 만들어야 한다. 9시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고정된 근무 개념을 깨뜨려야 노인의 일자리가 많아진다.
- 2016-05-1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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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연극 '그리워 그리워'를 보고 떠올린 친구
- 동년기자 박미령 나이가 드니 추억이 재산이라 지갑에 남은 돈 헤아리듯 옛 생각만 뒤적인다. 특히 6월이 오면 찬란한 하늘 너머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하늘나라에 먼저 간 친구다. 그 젊은 나이에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한 달 내내 애태우다 겨우 찾은 그녀는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은 내 마음속에만 있었다. 꽤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 급작스레 가버리니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혼이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바빴다. 누군들 죽음을 예상하겠냐마는 젊은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웠다. 바람이 그 친구의 손길처럼 온몸에 스미던 날 임동진의 모노드라마 를 보았다. 무대는 갓 이사한 짐으로 스산하다. 독거노인 서진우는 추억을 꺼내듯 이삿짐을 정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임동진의 50년 연륜이 깃든 목소리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극 중으로의 몰입을 유도한다. 임신 8개월에 사고로 죽은 딸 사진에 대고 마치 살아있는 딸에게 말하듯 시시콜콜 이야기해댄다. 아내도 암으로 먼저 가니 말은 허공에 뿌려져 한마디씩 외롭게 떨어진다. 메아리도 없는 그곳에 오직 들려오는 소리는 옆집 젊은 부부가 싸우며 내는 악다구니뿐. 그는 젊은 날의 자신에게 말하듯 ‘인생은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라고 소리친다. 삶의 막바지에 깨달은 고백이다. 그때 한 점 혈육인 손녀에게서 전화가 온다. 결혼 소식이다. 한없이 기쁘다. 그녀의 결혼식에 가려고 옷가지를 준비하며 그는 모처럼 만면에 희색을 띠고 몸동작도 의욕적이다. 여기에 사위의 전화는 찬물을 끼얹는다. 결혼식에 오지 말란다. 일순 객석은 서진우와 함께 못된 사위를 요즘 젊은 세대의 얄팍한 마음 씀씀이로 감정이입하며 술렁인다. 오은희 작가는 여기에 서진우 아내의 일기로 진실을 밝히며 극을 반전시킨다. 누구의 어떤 행동인들 이유가 없겠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인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혼자 이 세상에 남았지만, 젊은 날 감쪽같은 줄 알았던 바람에 대한 벌이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속죄하는 마음과 그리움으로 애가 탄다. 아내는 사랑을 용서로 대신하고 남편은 그리움으로 속죄한다. 여기서 과연 죽은 자가 고통스러운가? 살아남은 자가 더 고통스러운가? 하는 질문이 관객들의 마음에 던져진다. 후회가 또 다른 벌은 아닐까?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소중함은 왜 늘 상대가 사라진 다음에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움은 복일까? 벌일까? 배경의 찌그러진 창은 어느 쪽으로든 조금은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닮았다. 첼로 박스의 흠집도 마음의 상처를 말하듯 무대 곁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다. 임동진의 탄탄하고 노련한 연기는 마치 동네 아저씨가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연스럽다. 아내의 목소리로만 나오는 정영숙의 마음 담은 소리는 진한 감동으로 퍼진다. 최병로의 섬세하게 바뀌는 창밖 풍경 연출은 짐짓 모노드라마의 단조로움을 깨고 극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어 좋았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지막 부분 배경이 너무 현란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너무 자주 바뀌고 끝부분의 현란함은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몰입을 방해했다. 그러나 가족관계가 옅어져 가는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연극이었다. 90분의 모노드라마가 지루하기는커녕 아쉬웠다. 극에서 빠져나오니 자연 그리운 사람들이 떠오른다. 푸른 하늘에 어른거리던 친구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다. 그녀에게 이토명 시인의 이라는 시를 보낸다. 너에게 사랑을 말할 때 목이 울컥, 하고 메이는 걸 보니 마음은 목 언저리에도 있나 보다.
- 2016-05-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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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 ◇ 입가에 미소 짓게 하는 어린 시절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아래 작은 도랑이 흐르는 포근한 동네…. 막내 오빠와 그 친구들이랑 논밭 사이를 선머슴처럼 마구 뛰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 그랬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래 눈부시던, 아름다운 경남 진주시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극히 온화하시고 자상하신 아버지와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께서는 육 남매를 두셨는데, 필자는 그중 다섯 오빠를 둔 막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공무원이신 아버지 덕분으로 필자 가족은 관사에서 생활했다. 관사에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아담한 텃밭이 있어 여러 가지 농작물을 가꾸며 필자의 정서를 포근하게 살찌워 갈 수 있었다. 그 텃밭 옆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물은 유난히도 차가워 여름날 오빠들의 뜨거운 몸을 식히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됐고, 여러 과일을 담가 식힌 뒤 먹기도 좋았다. 과일 접시를 한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여름밤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필자를 미소 짓게 한다. ◇ 교사의 꿈을 꾸기까지의 청소년기 당시 필자가 입학한 진주사범학교부속초등학교는 교복이 있었는데, 입학 당시 엄마는 손수 교복을 지어 입혀 주셨다. 감색 교복은 필자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교복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은 모습이있지만 ‘이제 나도 어엿한 학생’이란 생각에 교복 입을 때마다 행복감에 져졌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 나시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하게 됐다. 전입한 서울초등학교의 친구들은 경상도 말씨를 쓰는 필자를 신기해하며 놀렸고, 이 때문에 점점 말이 없는 아이, 폭넓은 친구들의 사귐이 없는 소심한 아이로 변해 갔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담임으로 박병직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그 선생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파악하셨고, 또 그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 위해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애써 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그분은 내가 성년이 돼 38년 가까운 세월을 교단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첫 디딤돌이 돼 주신 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의 진학은, 학업 성적이 남달리 월등하지도 못했고, 또 당시 멀미가 심해 버스 통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걸어서 등하교할 수 있는 가까운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입시가 있었는데, 그 입시에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 하나가 있다. 입시 과목은 국어, 산수였는데, 시험을 마친 필자는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아버지께 전화했다. 아버지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대뜸 산수 시험 문제 하나를 거론하시며, 답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하시기에 ‘12’라고 말씀드렸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수화기를 드신 채 직원들에게 대견한 딸이라 자랑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내 귀에 들려 왔다. 그 날 밤, 당신의 막내딸이 어려운 산수 문제 하나를 맞춘 것이 그리도 신이 나셔서 한턱내셨단다. 별로 뛰어나지도, 그리고 내세울 것도 없는 이 막내딸을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키가 제법 큰 중학생 딸을 초등학생 때와 다름없이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곧잘 여기저기 다니시기를 즐겨 하셨다. 자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대하실 때 한층 더 엄하셨다. 그것은 막내인 데다가 고명딸이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애정까지 받아 혹 남들로부터 버릇없이 키웠다는 소리를 들으실까 봐 내심 걱정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땐 정말 철부지였었기에 한때 ‘내 엄마는 혹시 계모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홀로 심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중학교 2학년 6월 필자는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토록 자상하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땐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었고, 그 충격으로 필자는 다시 말이 적은 아이가 됐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여고 시절이 시작됐다. 13년 위인 나의 큰오빠는 다섯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워 주셨다. 특히 큰올케의 뒷바라지는 나에게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셨다.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우리 가족은 서로 양보하고 사랑할 줄 아는 형제들이라는 것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육 남매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자식들을 건강하게 키우시고 올바르게 가르치시느라 그 어느 어머니보다 피땀 흘리시며 사셨던 어머니. 지금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코끝이 시큰해 온다. 나의 신앙생활도 이때 많이 성장했다. 성장한 신앙심과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하다 보니, 중학교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감사가 넘쳤고 생기가 충만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임원 활동도 하게 됐다. 특히 교단에 서서 후진 양성에 젊음을 불태우리라는 인생의 꿈을 찾으면서 구체적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고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및 교직 생활 필자는 대학 입시 예비고사는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대학 입시에서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 후기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진학한 대학은 사범대학으로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학교였다. 대학 생활은 순조로웠다. 신입생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선발돼 적극적이고 활달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교수님과 선배들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보다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나로 성장하게 하였다. 대학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뜨거운 열정으로 학과 연극제에서 두 번의 주연으로서 무대에 선 일과 학과의 전 학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행을 맡았던 것이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 학생회 후보로 출마한 일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의 가슴 어디에 그러한 열정이 숨죽이고 있다가 폭발했는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대학 4학년 때, 최선을 다해 순위고사(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꿈꾸어 오던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3월부터 교직 발령이 나 곧바로 교단에 서게 됐다 . 그 후 퇴직하기까지 아홉 개의 학교를 거치면서 약 38년이라는 짧지 않은 교직에 몸을 담았다. 돌이켜 보면, 교직 생활 중에 받은 표창(교육장, 교육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등)들은 내게 더욱 잘하라는 격려와 지지가 돼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참으로 신명 나게 교육의 현장을 즐겼다. 49세의 나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논하고, 젊은 교사들과 교육을 고민하며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던 것과 나 자신이 대학원생으로서의 열정과 낭만을 맘껏 즐겼던 2년간의 그 시간도 참 아름답고 소중했다. 그간의 많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들과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많은 일이 지금도 파노라마로 스친다. ◇ 교단을 떠난 후 ‘오늘’지난 2012년 8월, 약 38년간 교단을 지키다가 깊은 번뇌를 거쳐 명예퇴직을 결심하였다. 명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인생 후반전에 훌쩍 접어드니, 그간 바쁜 생활로 곁에 있는 사람의 눈과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이 불현듯 아쉬웠다. 먼저 남편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고,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사람과 자연을 여유롭게 만나고 싶었다. 둘째, 크리스천으로서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기도회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셋째, 세태의 변화로 평생 천직이라 생각했던 교직에 깊은 회의가 찾아들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 한계를 만났는데, 그것을 뚫고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했던가. 퇴직 후 필자는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기쁨을 느끼며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마주 앉아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 등을 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회 될 때마다 임산부와 어린 친구들에게 태교동화와 구연동화를 들려주고 있으며, 동년기자단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바삐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또한 나의 든든한 언덕이 돼 주는 후원자이자 조력자인 남편, 그리고 언제나 제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때론 조언과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딸, 사위, 아들, 며느리,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단지 세 손주가 있어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성인이 돼 가끔 만나 식사하며 차 마시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며 같이 늙어가고 있는 제자들이 곁에 있기에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필자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타적 삶을 살아갈 것을 자신에 주문해 본다.
- 2016-05-1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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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행복한 순간
- 나는 종종 과거의 시간에서부터 생각의 시작을 한다. 현재도 흐르고 그래서 과거의 시간이 되겠지만 현재의 흐름을 타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겨울 아침이면 놋 세숫대야가 안방까지 들어왔다. 엄마 품에 안겨서 세수하던 느낌과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놋대야가 움직일 때마다 나던 긴 울림이 들린다. 따뜻한 물을 대야에 부으면 흐릿한 김이 오르고 은은한 아이보리 비누냄새와 비릿한 엄마의 풍만한 젖가슴 냄새와 보송보송한 수건에서 나는 신선한 우유 같은 냄새가 엉켜있었다. 엄마는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비누질을 하며 눈을 꼬옥 감으라고 했다. 비누질을 할 때 보다 비누를 씻어낼 때 늘 따가웠다. 엄마의 손이 흥~ 코까지 풀게 하고서야 세수는 끝이 났다. 눈에 비누가 들어가서 따가운 날이면 부러 큰소리로 울었다. 그럼 엄마는 미안해하기도 하고 야단도 치셨다. 나는 엄마의 젖을 만지며 자곤 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도 엄마를 차지하지 못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늘 내가 아버지와 엄마의 가운데였는데 엄마와 나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심한 배신감에 아빠에게 화를 내곤 했다. 부엌에서는 장작 타는 냄새와 콩깍지가 타면서 내는 탁탁 소리가 났다. 가마솥 여닫는 소리, 구수하게 익어가는 밥 냄새, 물 항아리에 나무뚜껑 올리는 소리, 동그란 상에 사기그릇 놓는 소리는 부산스럽지만 맛있는 따스한 냄새였다. 안방에 붙은 부엌 위 벽장의 나무문은 가끔 어긋나게 열리기도 해서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영역이어서 함부로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열 때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곶감, 약과, 강정이 나오고 가끔은 미제 초콜릿 바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는 미제 냄새도 섞여서 났다. 저무는 봄날의 온갖 소리와 냄새들이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에 실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오는 초저녁, 생동감에 넘치던 그 시절 부드러운 물결에, 모든 것을 잊고 나를 내맡길 수만 있다면 ‘행복한 순간’, 그 시간으로 지금도 돌아간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엄마의 냄새, 놋대야의 울림이 같은 묶음으로 어른거린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어깨 펴고 걸어라. ” “ 차 조심하거라. ” 나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하다. 2016.2.21.
- 2016-05-0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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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처음으로 해본 결혼식 주례사
- 지난 달 중순 어느날에 한때 잘 알고 지내던 25년 대학후배 녀석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전화를 하였다. 반가워하며 서로 수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후배가 "선배님 저 이번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이녀석 최근들어 바뻐서인지 연락이 뜸하다가 결혼연락하기 위해 주소 물어볼려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대짜고짜로 선배님 "저희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나이 63세가 되어 주례 설 나이도 되었건만 전혀 뜻밖이라 속으로는 쾌나 당황이되고 염려가 되었으며 이미 현직에서 물러나 전문위원이나 비상임 감사으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약간 부담도되고 또한 주례서기에는 직함이 좀 약한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간만에 아끼는 후배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마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고민이 생겼다. 주례라 함은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두새람의 새로운 인생에 보탬이 될 금과옥조 같은 내용으로 주례사를 해주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런 자격이 있을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결혼하는 후배의 간절한 청탁을 기꺼이 받아 들일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사실 젊었을 때는 첫아들을 낳아서인지 친구들의 결혼식사회는 거의 도맡인 해보았지만 더더군다나 결혼식 주례는 처음이어 상당히 부담이 간 것도 사실이었다.해서 주례를 많이 본 교수인 친구에게 어찌할까 조언도 부탁하고 인터넷도 참고하였다. 주례는 대개 날씨이야기 등 인사말,신랑신부의 소개,결혼의 의미,덕담표현,맺음말 이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36년 결혼생활 영위함에 있어 대학선배이자 인생 및 결혼선배로서 신랑과 신부에게 솔직하고 진솔한 나의 경험과 체험을 전달해주면 되지 앓겠는가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었다.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세가지 정도로 압축한다면 무엇을 이야기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식때처럼 늘 초심과 배우자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역시 36년전을 되돌아보면 그당시에는 배우자에게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줄 것처럼 그녀를 위한 어떤 일도 하겠다 했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과연 그것을 얼마나 지켰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아쉽게 느끼는 것이 다름 아닌 남에 대한 배려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식구가 핵가족화되면서 집에서 옹야옹야 하면서 마마보이로 키워졌거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던 외동딸 들, 참으로 그들은 많은면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키워졌으며 학교교육 역시 자아중심적 점수중심적으로 자랐기에 남에 대한 배려는 많이 익숙치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닌 가 생각이 들어 결혼하기전의 초심처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면 부부는 서로 닮아가게 되고 늘 좋은 가정을 유지하여 지켜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남자와 여자는 본래 육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나 언어,행동 등에서 많은 점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남녀가 서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상대방을 자기 틀에 맞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상대방을 억지로 변화시킬려고 노력하거나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다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불어 잘 지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결혼이란 권리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배우자를 만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의사결정의 결과입니다. 이에따라 서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혼식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장차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의지를 표명하는 의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가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평생을 해로 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결혼자체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늘 감사하며 만족하는 마음자세가 행복의 첩경입니다. 즉 행복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두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든 청첩의 글처럼 지극히 작고 사소한 모습 하나하나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하게 애정을 키워나가며 언제나 작은 것에도 서로에게 감사히 기쁜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그속에 늘 행복은 찾아오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마음속으로 오늘 새신랑과 신부의 행운을 위해 조용히 기원합니다.
- 2016-05-0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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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社告]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 1기 발단식 “제2 인생, 신중년 이야기 우리가 써야 제 맛”
- 4월 12일 오후 2시 이투데이 본사 5층 강당에서 ‘BRAVO 동년기자단 1기 발단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명함 및 기자수첩 수여를 비롯해 윤리강령 채택, 기념사진 촬영, 기자교육, 운영위원 선출 등 뜻깊은 시간으로 채워졌다. ‘동년’이라는 이름으로 한날한시에 모인 그들의 모습을 담아봤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온라인 신청 및 서류 심사를 통해 최종 54명이 동년기자단 1기에 뽑혔다. 이들은 발단식 이후 6개월간 의 시니어 기자로 활동할 계획이다. 1944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평균 나이 54세인 이들은 수필가, 사진작가, 대학 교수, CEO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이종재 이투데이 대표이사는 환영사를 통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65~75세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다”며 “브라보 동년기자단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신중년을 위한 하나의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격려했다. 이어 진행된 기자 교육 시간에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원구원장은 “한공간, 한시간에 모인 소중한 인연”이라며 “동년(同年)’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같은 해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을 일컫기도 하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담아 이투데이 언론 고시에 합격했다는 일체감으로 활동했으면 좋겠다. 때로는 벗처럼 너나들이하며 망년지교(忘年之交)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첫날부터 샘솟는 열정, 앞으로의 활동 기대 이날 동년기자단 단장으로 선출된 강신영(64·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대표)씨는 “늦은 나이에 처음 만났지만 동년이라는 데 의미가 깊다”며 “최선을 다해 단원들을 이끌고 열심히 발로 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외에도 54세(브라보 동년기자단 평균 나이) 이하인 동년기자 10명이 1기 기자단을 이끄는 운영위원으로 선발됐다. 이들은 수시로 자율적인 회의를 통해 기자단의 발전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운영위원 명단 = 강신영, 구자형, 박혜경, 박요섭, 성미향, 양복희, 이경숙, 전용욱, 정순영, 황선범) 발단식 당일에도 이들의 열정은 뜨거웠다. 공식적인 발단식 일정을 마친 뒤 강신영 단장을 비롯한 10명의 운영위원은 한자리에 모여 전문 분야별 기자단 운영과 커뮤니케이션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의를 끝낸 후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편집부가 있는 2층을 방문해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 2016-05-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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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따로 또 같이, 그리고 따로
- 4월 12일에 열린 의 동년(同年)기자단 발단식에서 저는 환영사를 겸해 몇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년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경위와 의미를 바탕으로, 모임이나 단체의 소속원들이 중시하고 지향해야 할 것을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의 말과 지금 이 글은 ‘한가지 同에 대한 몇 가지 생각’입니다. ‘한 가지’는 띄어서 쓰면 여러 가지 중 하나라는 뜻이 되며 ‘한가지’라고 붙여 쓰면 형태와 성질 동작 따위가 같은 것, 즉 同이 됩니다. 사람은 모이면 한가지가 돼야 하지만, 저마다 한 가지로서의 구실과 역할을 하고 서로 잘 어울려야 그 한가지가 오래가고 튼튼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를 의미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동거 동기 동도(同道) 동문 동반 동복(同腹) 동사(同事) 동우 동인 동지 동창 동학, 이런 것들을 먼저 들 수 있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동연(同緣)이라 하고, 함께 붓글씨를 배우거나 공부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연(同硯)이라고 부릅니다. 나이가 같은 사람은 동갑입니다. 동령(同齡) 동치(同齒) 동년(同年)입니다. 이 중 동년에는 동갑이라는 의미 외에 같은 때 과거에 급제해 함께 방이 붙은 동방(同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의 공모에 응해 시니어 기자가 된 분들을 동년기자라고 부르는 것은 선발 절차와 방식은 예전과 다를지언정 과거를 통과한 것에 버금가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각 분야의 전문가요, 삶과 일에 관한 이야기가 풍부한 분들이니 동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나이를 잊고 벗하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동갑이 되어 활동해주기를 바라는 게 ‘동년기자단’의 작명 취지입니다.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은 이른바 동기상구(同氣相求) 동성상응(同聲相應), 마음이 맞아 서로 찾고 친하게 모이고,의견을 같이해 서로 잘 통하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급제한 동년은 모두 우수한 인재입니다. 길이 사귀어야 할 벗이면서 한편으로는 발전과 성취를 다투는 경쟁상대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동기생끼리의 경쟁이 선후배간 경쟁보다 더 치열합니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동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됐고, 신숙주는 세조의 편에 서서 새로운 왕업을 도왔습니다. 둘 다 세종 임금이 사랑하던 인재요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탠 집현전 학사였지만 삶의 행로는 판이했습니다. 동년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비와 대립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사람은 저마다 다르므로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공이곡(同工異曲), 같은 악공끼리도 곡조가 다르고, 재주가 같아도 문체에 따라 글의 빛깔과 결이 달라집니다. 동교이곡(同巧異曲)이나 동교이체(同巧異體)처럼 재주는 한가지인데 창작물은 다르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따로 또 같이’를 이야기하지만 실상 더 중요한 것은 ‘같이 또 따로’입니다. 같은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세상을 다채롭게 하고 서로 잘 어울리게 하는 조화의 요소가 됩니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을 음미해봅니다. 군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되 같지 않지만 소인은 남들과 같은데도 어울리지 못합니다. 군자는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과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어느 학자는 ‘엇비슷하다’는 우리말에 화이부동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어긋났는데 비슷하다거나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는 뜻이니 이런 말을 만들고 쓰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관용이나 포용 공존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든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 새로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 상대와의 협상에 진전이 없을 때 흔히 쓰는 구동존이(求同存異)에도 ‘엇비슷’이 들어 있습니다. 차이점을 인정하거나 뒤로 미루고, 같은 점부터 먼저 확인하고 추구하는 자세입니다. 천하편에 나오는 대동소이(大同小異)는 흔히 그게 그거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실은 ‘크게 보면 서로 같으나 작게 보면 각각 다르다’는 뜻입니다.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大同而與小同異] 이것을 小同異라 하고,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니[萬物畢同畢異] 이것을 大同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동은 기르고 키우고 소이는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소이가 모이면 또는 소이가 모여야만 대동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천하가 번영하고 화평을 이루는 인류의 이상 ‘대동사회’입니다. 조선의 선비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시에 여러 색깔의 국화를 찬탄한 작품이 있습니다. “서리를 이기는 한가지 꽃인데/세상에선 너무 나누어 품평하지/색깔로만 같다 말다 그러지 말고/우리 집 둘러싼 여러 색 국화를 보소.”[好是凌霜一樣花 世間常苦品題過 休將形色分同異 且看交開繞我家]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렇게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과 배려를 통해 조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잘 알아야 하며 학문과 견식이 넓고 높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나 문장이 뛰어난 사람을 대방가(大方家)라고 합니다. 추수(秋水)편에는 끝없는 바다를 처음 보고 놀란 황하의 신 하백(河伯)이 북해의 신 해약(海若)에게 “이제 선생의 끝없음을 보게 되니 내가 선생의 문 앞에 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대방가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한다는, 이른바 망양지탄(望洋之歎)입니다. 를 발행하는 이투데이의 주소는 대방동입니다. 대방(大方)은 큰 네모, 곧 대지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믿어왔습니다. 노자 도덕경 41장에는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게 이루어지며 큰 음은 소리가 희미하고 큰 형상, 곧 도는 형체가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족한 기자단을 대방동년(大方同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갑인 사람들의 한가지 마음과, 화이부동의 자세와, 대방가를 지향하는 노력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마음과 자세는 동년기자단을 비롯한 특정 단체나 모임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두루 중시하고 추구해야 할 보편타당한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잡지에 굳이 이 글을 써서 싣는 이유입니다.
- 2016-05-0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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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지갑 분실로 느낀 세상의 따뜻함
-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은 대부분 잃어버린 물건을 아깝게 생각하고 지금의 것보다 예전의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을 내가 직접 겪고 보니, 위 속담이 더욱 실감 나게 느껴진다. 주로 지하철로 출ㆍ퇴근하는 필자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5호선 전철을 이용해 퇴근하고 있었다. 여의도역에서 환승해 전철 안에서 잠시 스마트폰을 본 후 느낌이 이상해 윗주머니에 손을 댔더니 지갑이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소매치기를 당했나“ 등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지갑을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늦은 밤임에도 아들에게 전화했다. “00카드 분실신고는 1588-0000번으로 아빠가 직접 신고하시고 혹여 찾을 수도 있으니 지하철분실신고센터는 네이버에서 확인 후 연락하고, 기타 행정적인 사항은 아마도 내일 아침에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해요”라는 아들 답변이 돌아왔다. 필자는 아들 말대로 네이버를 검색해 지하철분실신고센터가 있는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내려 카드 분실신고를 마쳤다. 그리곤 마음을 추리고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지갑이나 잃어버릴 정도로 나이가 들었나. 만일 소매치기에게 당한 거라면 그 정도로 내가 어수룩해 보이나.’ 집에 도착해서도 내가 아끼고 아끼던 소중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자괴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가 있었다. 이튿날 무거운 몸으로 잠을 깨 아내와 아침을 먹는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어제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에 다녀가신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전화기로 흘러나왔다. “네, 제가 어제저녁에 그곳에 가서 공부하고 왔어요. 지갑을 잃어버렸는데…“라며 말끝을 흐리자, ”네, 제가 지갑을 주워서 가지고 있어요.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서 청소 일 하는 사람인데, 오늘 아침 청소하려고 교실에 들어갔더니 의자 밑에 밤색 지갑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잘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있다가 찾아가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필자는 십 년 체증이 풀리듯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다. 영등포여성인력개발센터로 향하는 동안 필자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우선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먼저 하고 지갑에 들어 있던 돈 일부를 감사 표시로 드려야지”라는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와 약속한 4층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4층 현관에 아주머니가 서 계셨는데 필자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아주머니께서는 “지갑 안을 살펴보니 명함이 있어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연락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후, 감사의 표시로 현금을 조금 드리자, 아주머니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극구 사양하셨다. 그래서 인근 영등포시장으로 가서 화장품과 사탕, 그리고 과자를 사서 드렸다. 아주머니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참 따스하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2016-04-29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