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기자 칼럼] 행복한 순간

기사입력 2016-05-09 15:36 기사수정 2016-06-22 13:02

나는 종종 과거의 시간에서부터 생각의 시작을 한다. 현재도 흐르고 그래서 과거의 시간이 되겠지만 현재의 흐름을 타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겨울 아침이면 놋 세숫대야가 안방까지 들어왔다. 엄마 품에 안겨서 세수하던 느낌과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놋대야가 움직일 때마다 나던 긴 울림이 들린다. 따뜻한 물을 대야에 부으면 흐릿한 김이 오르고 은은한 아이보리 비누냄새와 비릿한 엄마의 풍만한 젖가슴 냄새와 보송보송한 수건에서 나는 신선한 우유 같은 냄새가 엉켜있었다.

엄마는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비누질을 하며 눈을 꼬옥 감으라고 했다. 비누질을 할 때 보다 비누를 씻어낼 때 늘 따가웠다. 엄마의 손이 흥~ 코까지 풀게 하고서야 세수는 끝이 났다.

눈에 비누가 들어가서 따가운 날이면 부러 큰소리로 울었다. 그럼 엄마는 미안해하기도 하고 야단도 치셨다.

나는 엄마의 젖을 만지며 자곤 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도 엄마를 차지하지 못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늘 내가 아버지와 엄마의 가운데였는데 엄마와 나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심한 배신감에 아빠에게 화를 내곤 했다.

부엌에서는 장작 타는 냄새와 콩깍지가 타면서 내는 탁탁 소리가 났다. 가마솥 여닫는 소리, 구수하게 익어가는 밥 냄새, 물 항아리에 나무뚜껑 올리는 소리, 동그란 상에 사기그릇 놓는 소리는 부산스럽지만 맛있는 따스한 냄새였다.

안방에 붙은 부엌 위 벽장의 나무문은 가끔 어긋나게 열리기도 해서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영역이어서 함부로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열 때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곶감, 약과, 강정이 나오고 가끔은 미제 초콜릿 바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는 미제 냄새도 섞여서 났다.

저무는 봄날의 온갖 소리와 냄새들이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에 실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오는 초저녁, 생동감에 넘치던 그 시절 부드러운 물결에, 모든 것을 잊고 나를 내맡길 수만 있다면 ‘행복한 순간’, 그 시간으로 지금도 돌아간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엄마의 냄새, 놋대야의 울림이 같은 묶음으로 어른거린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어깨 펴고 걸어라. ”

“ 차 조심하거라. ”

나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하다.

201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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