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능률협회가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강연 ‘수지향(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 의 리딩멘토로 활동 중인 연세대학교 철학과 김형철(金亨哲·60) 교수를 현장에서 만났다.
그가 이 인문학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주최측의 2기 리딩멘토 활동에 대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데, 1기의 리딩멘토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었던 만큼 부담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평소 소신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응용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특히 철학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탐구를 하기 때문에 융합에 가장 적합한 학문분야입니다. 어떤 활동 뒤에 철학을 붙여 놓아도 그 의미가 통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술철학, 경영철학, 정치철학 등 가장 근본적 신념과 가치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 융합적 접근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250명의 최고경영자와 인문학의 다양한 명강사들의 강연을 매개하는 역할을 맡겨준 것에 책임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문학과 경영의 융합이 이어지라고 봅니다.”
최근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사회적 수명(정년)이 짧아지면서, 나타나고 있는 시니어의 학습에 대한 욕구상승 현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풀이했다.
“사람들은 계속 배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권력, 명예, 부를 한 손에 거머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막상 이 모든 것을 손에 넣고 나니까 그는 세상사는 것이 허무해집니다. 도사를 찾아가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한평생 배우러 왔다가 갑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께서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운다라고 하셨던 거 아닐까요? 시니어의 교육 열기를 뜨거운 것은 배우기를 계속하는 한 노화가 멈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시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서 다 같이 오늘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일일 목표로 삼는 시니어가 늘어나길 기대합 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지금, 경영과의 접목을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이에 대해 그는 경영현장에서 도움되는 지혜로 효과적으로 변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경영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순수 인문학적 강의가 어떻게 하면 경영현장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지혜로 변환될 수 있는지를 고민 합니다. 저는 경영자는 시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수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은 합리적이고, 비판적 창의성을 제공합니다. 이런 철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심리학, 사회학과 같은 광의의 인문학도 조명할 계획입니다.”
인문학 강의 특히 ‘수지향’과 같은 강의는 어떤 이들에게 적합하냐는 질문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에 목마른 시니어를 지목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인문학 고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을 희생시키고 몰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가능한 태도가 아닙니다. 평생교육은 경제적 효율성과 소득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성찰하는 삶만이 살 가치가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기억하세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자신의 좋은 답을 가진 사람만이 삶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책은 혼자 읽는 겁니다. 그러나 공부는 같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동문수학하는 것이지요. 삶의 품격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19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의 작가로 친숙한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은“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라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란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가정에서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신에 빗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어머니도 병(病)이란 암초를 피할 수 없도록 세상을 만들었다. 전주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어머니 유인숙(兪仁淑·50)씨와 그를 치료한 윤현조(尹炫朝·44) 교수의 이야기도 평범하지만 위대한 어머니의 투병과정을 그리고 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유방암은 다른 암종(癌種)에 비해서 사회적인 파장이 큰 병입니다.”
전북 전주에 자리 잡고 있는 전북지역암센터에서 만난 전북대학교병원 외과학교실 유방·갑상선외과 윤현조 교수는 유방암에 대해 조금 다른 시작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질병에 대해 설명할 때 발병 원인이나 치료방법에 국한하기 마련인데, 윤 교수는 조금 남달랐다.
“유방암이 환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 질환을 앓게 되는 환자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정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 많이 의지할 때라는 것이 문제이지요.”
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 60대 이후에 찾아오는 다른 암종들과 달리 유방암의 주된 발병 시기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사이로 일찍 찾아오는 편. 이 시기는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로 진출을 준비하는 때이며, 남편은 퇴직·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다. 자녀가 어른이 되려는 마지막 준비과정과 ‘힘을 잃어가는 남편’이라는 중요한 두 과제가 어머니의 양어깨에 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고 그 중심을 잃게 되면, 가족 전체가 한순간에 휘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윤 교수의 설명이다.
가정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회적 질환
유방암이 어려운 점은 치료 과정에서 잃게 되는 여성성과 함께 찾아오는 괴로움이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에선 ‘정팔 엄마’ 라미란이 폐경을 겪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많은 시청자의 공감을 얻은 바 있다. 유방암 치료는 여성 호르몬의 조절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치료 과정에서 반드시 이런 고통을 동반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암이라는 갑작스러운 암초에 걸려 가라앉는 고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폐경이라는 여성으로서 또 다른 감내하기 힘든 고통까지 이겨내야 한다.
윤 교수는 “암 판정을 받게 되면 현실 부정을 시작으로 분노와 수긍하는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치료 과정에서 폐경을 겪게 되면 흔히 울화라고 얘기하는 심한 감정적 변화와 함께 심한 경우 우울증까지 겪게 됩니다”라고 설명하고, “이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치료에 임하느냐에 따라 그 예후는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치료에 응할 때 전이 방지나 치료에 대한 성과가 좋은 편입니다”라고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방암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없을까? 윤 교수는 다른 암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예방법은 없지만, 건전한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육류나 지방에서 유방암의 원인이 되는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전자검사를 통해 BRCA(BRest CAncea susceptility)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난소 절제와 같은 적극적인 방법을 통한 예방방법도 있습니다. 만약 암에 가족력이 있다면 건강검진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통계를 살펴보면 건강검진을 통해 유방암이 발견되는 경우는 20% 정도에 불과합니다. 촉진을 이용한 자가검진을 통해 발견하는 경우 80%가량 되고요. 하지만 만져질 정도가 되면 이미 종양의 크기가 2cm 이상인 2기로 넘어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발견되면 늦습니다. 40세 이상이 되면 매년 초음파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평소에 골고루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윤현조 교수와 함께 만난 환자 유인숙씨는 이러한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사례다. 그녀 역시 암 판정을 받았을 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후두암으로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삼촌, 고모까지 암으로 잃은 터라 공포는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 유인숙씨는 전북지역암센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투병 후기에 “남편은 암이란 내 말을 듣고 남자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울었다”라고 썼다.
“목사인 남편과 함께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회복과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했었는데, 막상 환자가 되고 보니 그 진심과 환자의 본심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어요. 환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투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그분들을 위해 깊이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위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죠.”
유씨가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된 것은 2014년 3월의 어느 날. 여느 유방암 환자들과 비슷하게, 몸에 딱딱한 무언가가 잡혀 병원을 찾게 된다. 당연히 불안했고, 단순한 물혹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5일 만에 돌아온 것은 암이라는 판정이었다.
일부러 다인실 병실 찾아 서로 위로
암 덩어리는 2.4cm 정도 크기로 2기였다. 다행히 다른 장기로의 전이는 없는 상태, 여성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방보존술을 통해 그 덩어리를 제거했다.
“그래도 윤 교수님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같은 신앙을 갖고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고, 손을 잡아주실 때마다 받은 위안은 마치 기도 같았어요. 그래도 큰 수술은 처음이라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대학생인 첫째 아들과 둘째 딸, 9살짜리 막둥이 아들 걱정이 앞섰죠.”
수술 후 진행되는 항암치료 역시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웠다. 구토는 계속됐고, 머리도 빠졌다. 다시 머리가 나면 예쁜 머리띠를 사겠노라고 다짐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고 나서 우울증이 찾아왔다.
“수술 후에는 혼자 있는 것이 싫어 일부러 6인실 병실에서 지냈어요. 그곳에서 다른 암종 환자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유방암 선배들에게 치료에 대해 이것저것 배울 수 있었죠. 하지만 퇴원 후 집에 혼자 있게 되니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쁜 생각도 나고. 그래서 의지한 것이 노래입니다.”
주로 불렀던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 그녀가 ‘세상 노래’라고 표현하는 대중가요는 이제 다 잊었다고 했다.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던 터라 노래는 익숙했고, 힘이 돼주었다고 말했다.
유인숙씨는 후에 이 시기에 겪었던 치료 과정을 수기를 통해 이렇게 썼다.
“나보다 더 힘들고 더 아프고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약한 신체가 아닌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항암주사를 맞고 힘들었지만 잘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감사했다. 평생 가지 않던 걸음을 지금 암 환자가 되어서 다하고 있다. 암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친구가 되어 나와 함께 가고 있다.”
자연스레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극적으로 무치거나 끓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던 전라도식 식단도 간단히 삶아 담백하게 먹게 됐다. 물론 소금도 줄였다. 자동차로 가서 한꺼번에 장을 봤던 것도 이제는 자주 들러 조금씩 장을 보게 됐다. 차를 이용하는 대신 배낭을 짊어지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서 간다. 늘 엄마 몫이었던 설거지와 청소는 다 자란 아들과 딸이 나눠 맡았는데 볼멘소리 한 번 낸 적 없어 고맙다고 했다.
그런 생활의 변화와 극복 과정, 다른 환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 투병 수기를 썼다. 월간을 통해 등단하고, 본인 이름의 시집까지 출간한 경험이 있는 정식 시인이었던 만큼 글쓰기는 어렵지 않았다. 공모 마감 전날 펜을 잡고 작성한 수기가 전북지역암센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치료 과정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죠. 무엇보다 다른 환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받고 치료받으라 말하고 싶었어요. 괜히 나약하게 아프다고 하면 되레 가족들에게 짐만 될 뿐이에요. 환자 가족들에게도 24시간 옆에 붙어 어떤 수발을 들까 고민하기보다는 응원이 되는 말 한마디가 힘이 된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죠. 30분짜리 설거지 한 번보다 1분짜리 말 한마디가 환자에겐 훨씬 도움이 됩니다.”
다시 찾아온 암, 다시 시작된 치료
지난해 11월 20일에는 암 극복 수기가 최우수상을 받아 전북지역암센터에서 진행한 시상식에도 참여했다. 그녀의 수기 제목은 였다. 암을 암이라고, 그렇다고 다른 예쁜 이름으로도 붙이지 못한 고민의 결과다. 그렇게 유인숙씨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암입니다. 재발한 것 같습니다.”
의사의 이 말은 유인숙씨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지난해 12월 재발과 전이를 점검하기 위한 추적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유씨는 두 번째 암 판정을 받았다.
“OO이가 또 화가 났구나. 담담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첫 번째 암 판정 때와는 다르게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더라고요. 미국에서는 유방암 예방을 위해 유방절제술도 한다는 이민간 동생의 조언에 이번에는 절제를 선택했죠. 병원에서는 재건술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겁내지 말고 씩씩하게 치료를 받자고 맘먹었죠.”
그렇게 유 씨는 새해가 되자마자 다시 수술을 받았다. 1기였기 때문에 수술 후 추가적인 방사선 치료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1월 4일이었다.
요사이 그녀는 장성한 아들과 딸의 정성에 힘든 줄 모른다고 했다. 원래 신학을 전공했던 큰아들은 군 복무 중에 어머니의 투병을 보면서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수능에 도전해 방사선과에 합격했다. 어머니와 같은 암 환자들의 치료를 돕는 직업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합격증을 내밀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엄마를 위한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감격했습니다. 요새는 아들의 기타, 딸아이의 피아노, 여기에 막둥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요. 암은 우울해 하고 있으면 이길 수 없는 병인 것 같아요. 다른 환자분들도 꼭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OO이가 좀 화가 났구나, 달래줘야겠다. 하며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작성한 수기 마지막 문장은 가족도 의료진도 아닌 OO이에게 보내는 말이었다.
“너도 사랑한다. 따뜻함으로 너를 어루만져줄게. 성내지 말고 평안히 쉬렴.”
우리가 살면서 겪은 고난은 몇 가지나 될까? 고통으로 몸서리치던 날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고난이 아닌 인생의 한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실패와 우여곡절로 다듬어진 조각들이 모여야만 인생의 큰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高美淑·56)씨다. 그녀는 중년 이후 삶의 여정에 는 훌륭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그녀는 를 리라이팅하며 를 다시 봤다. 그전까지만 해도 는 만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만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인간이 왜 이렇게 긴 여행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가 담겨 있다는 것은 중년 이후 정독(精讀)하면서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남녀노소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그동안 생각해온 철학적 사유나 구원의 문제 등이 어우러져 있었죠. 정말 최고였어요. 아마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손오공이나 요괴 등의 캐릭터에 집중할 것 같아요. 하지만 중·장년이 읽으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대비해 굉장히 많은 인식의 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막상 이런 장편을 읽으라고 하면 중·장년은 ‘내가 책을 놓은 지 오래됐어’, ‘한동안 공부를 안 했는데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서지만 는 정말 쉽거든요. 심오하거나 고상한 것 없이 나를 아주 편안하게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 주는 책이죠.”
인생의 안전띠 ‘고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14년간 10만8000리를 걸으며 총 81가지 난(難)과 마주한다. 이들은 108 요괴와 대적하며 구법과 구원을 위해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한다. 위험천만한 고비가 많지만, 고난과 실패 없이 사는 삶이 훨씬 위험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젊어서는 성공과 에로스를 향해 달려가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앞만 보고 달려왔어. 이제 나는 뭐하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할 뿐이죠. 오히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게 다행이에요. 그러면 걸려 넘어질 테고, 더 달려가지 못하잖아요. 그게 결국 날 구하는 것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야 알아요. 젊을 때는 걸려 넘어지면 ‘나만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은 다 그래’라고 이해하죠. 그때부터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81난을 겪어야만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덜어낼 수 있다는 의 내용처럼, 인간은 자랑스러운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살면서 몇 가지 난을 겪었느냐”고 종종 묻는다. 대부분 대답을 들어보면 몇 가지 꼽지 못한다고. 그런 그녀는 그동안 몇 가지의 난을 겪었을까?
“굉장히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어요. 현대인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고루 겪으며 살았죠. 그런데 나중에 고전을 공부하면서 ‘과연 그런 것들을 안 겪는 게 더 좋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겪은 것들이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에는 그런 고난이 날 너무 무겁고 힘들게 했죠.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가 뭘 알아?’라는 식으로 주변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런 환경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둬두고 있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자발적으로 고난에 뛰어들면 구법의 여행이 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 상처가 된다는 것을요.”
결국 과거 고난은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난은 없는 셈이었다. 그녀는 고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약자가 되어 트라우마라는 착각을 핑계거리 삼는다고 지적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강하려고 온 게 아니라 생고생을 자처해서 온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을 즐기는 거죠. 갖은 고생을 해서 한고비를 넘겼을 때만큼 뿌듯한 것도 없잖아요. 고난을 통해 내가 변한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실패는 두렵지 않아요. 기꺼이 대응할 수 있죠.”
인생의 가을, 청춘으로부터의 해방
그녀는 중년을 가을이라 표현한다. 인생의 봄, 여름을 지나 겨울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만큼 삶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생기는 시기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년에는 자기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 해요. 젊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기술적인 것이나, 전문적인 것에 치중하죠. 중년이 되면, 스펙이나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단기적인 목표도 아니죠.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삶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 그것을 걸고 공부해야죠. 그런 공부 없이는 노년을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술이나 쾌락에 빠질 테고요. 그런 것을 뛰어넘으려면 진리와 접속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진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질문은 저절로 생기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회피하죠. 청춘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도망가려 해요.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라고 탄식하며 말이죠. 가을이 됐는데 봄을 모방하는 것은 가을의 정취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보면 봄이 썩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않았어요.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1위가 20대예요.”
하지만 인생의 봄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터. 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닐지 의아했다. 이러한 물음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경제력이나 명성, 능력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돌아갈 만하겠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노하우에 몸은 젊으니까요. 나는 젊은 시절의 무능한 상태가 싫었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죠.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많고 세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요. 이게 좋은 것 아닙니까? 폐경기가 되면 또 어때요. 나는 여자다울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롭잖아요. 어려서는 얼굴에 점 하나도 큰 고민거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자잘한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게 바로 청춘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죠.”
진정한 노후대책은 ‘유머’를 갖는 것
에는 81난이 나오지만, 상황이나 인물의 행동 등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 단순히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의 매력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유머를 겸비해야만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고, 세대 간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지혜롭죠.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에 유머가 없으면 바로 설교가 돼버려요. 정말 옳은 말인데 듣기가 싫은 거죠. 그게 세대 갈등의 포커스예요. 노인은 정말 못지않게 많은 고난을 겪은 분들이잖아요. 하지만 그 경험들을 이야기할 때,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해요. ‘너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노년세대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태도로 전달하면 소통의 벽이 생겨요.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대화를 못 하면 혼자 떠돌아 다녀야 하는데. 돈에 대한 설계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제시한 노후대책은 한 가지 더 있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라는 것. 그리고 오늘을 소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되고, 대부분 중·장년이 30년 뒤를 생각하며 부담을 느끼죠. 하지만 그럴수록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인식해야 해요.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억울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를 굉장히 집중해서 살 수 있어요. 앞으로 100세까지 뭘 하고 사느냐를 걱정하는 것은 내 삶을 유예시키는 것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한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또 언젠가 그날이 온다 해도 현재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고민은 도움이 되지 않죠.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오롯이 살기 위한 것이에요. 거기에만 소용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진정한 노후대책 아닐까요?”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자식과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갈등이 생길 것 같다. 하지만 배우자와 둘만 살자니 뭔가 적적한 느낌이 올 때도 있다. 손주 녀석들이 보고 싶어 전화기를 들지만, 막상 보려고 하면 귀찮아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한다.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여유로운 황혼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거기에 자녀 내외와의 갈등이 생길 것에 대한 걱정과 ‘품 안의 자식이 나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지면서 지레 겁을 먹는 것이다.
가정경영연구소의 강학중 소장은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은 해보지 않고 겁먹을 일이 아니다. ‘같이 사는 것’은 장점이 많아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같이 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부각이 돼서 그렇지, 자식과 부모의 지혜를 모은다면 세대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다.
함께 살기. 도전해보자.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동거의 목적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거 그 자체가 목적인지, 행복을 위한 선택인지 말이다. 그것이 후자라면 강 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로 합의하라
“같이 살면 어떤 갈등이 생길지 미리 예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그 예상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생각해본 후 동거를 시작하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거예요.”
사실 자식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와 같이 산다고 해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십 년 같이 산 배우자와도 가끔은 다툼이 생기는데 세대 차이가 나는 자식이나 사위·며느리는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같이 살면서 이런 갈등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가족 구성원에게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한 집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상 문제들을 미리 준비해놓는다면 갈등은 가벼운 문제가 되고, 해결은 쉬워진다.
생활비 분담과 같은 경제적인 것부터 육아와 집안일의 분담 등 예상 문제들을 생각해보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같이 살다보면 가사는 여자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합의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 요즘은 어느 한쪽의 주도나 강요에 따른 분담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 소장은 설명했다.
“구성원 모두의 대화를 통해 만든 규칙을 A4 용지 분량으로 작성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가령 ‘아침밥은 어머니가, 저녁밥은 며느리가 한다’ 등 간단한 것 말입니다. 연초에 이것을 만들었다면 분기별로 가족회의를 통해 개정해도 좋겠죠.”
강 소장은 갈등이 없어 좋은 시기인 동거 초기에 미리 어려운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해보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지금은 함께 살지만 누구나 그것을 원치 않을 때엔 서로 감정 상하지 않고 나가서 사는 것이 있다. 이것을 미리 말해둔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등이 생겨 따로 살고 싶어졌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거리를 지켜라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했으니, 양가 부모들은 ‘자식이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또 다른 출발점인 만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식과의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 소장은 우리나라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밀착 관계 탓이라고 설명했다. 자식이 성인이 됐거나, 결혼을 했으면 부모도 자식을 정서적으로 내보내고, 자식도 부모 품을 떠나 자립을 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경향이 있다는 것. 그는 ‘함께 살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심리적·정서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것을 ‘아름다운 거리’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에 실패하면 상호 의존적이 되거나, 한쪽의 영향력이 커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의 자식과 성인이 된 자식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인 자식의 행동양식이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닐 수가 있거든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부모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은 당연히 아닙니다. 자식들도 부모를 부모이기 전에 한 남자와 여성으로서 존중하는 게 당연하죠. 가끔은 부모가 자식 방에 들어오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로 그런 경우에는 자식도 부모 방에 마음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같이 살면서,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형태의 동거가 늘고 있다. 간섭이나 강요는 없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 존재한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다섯 자녀의 내외와 한 건물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건물에 살지만, 각각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다르다. 한곳에 살지만, 독립적인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같이는 살지만,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과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활권 안에서 각자가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도 자식이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부모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후 준비를 차근히 하는 것이 좋은 동거입니다.”
같이 살기? 장점이 많다
“요즘은 자식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쿨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두려워서 회피하는 것이면서 말이죠. 자식과 같이 살면, 즉 대가족이 되면 좋은 점은 많습니다.”
강 소장은 같이 살기의 가장 큰 장점 중 첫 번째가 역할 분담이라고 했다. 부모가 가진 경륜이 자식 내외와 손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의 아이들은 생활부터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과 만나 소통하는 데 있어 구사하는 어휘의 범위도 커지고, 어른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다는 것이다. 가사 분담하는 것도 힘든 일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좋다.
두 번째로는 중년에 느끼는 외로움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손주의 육아를 일부분 담당하면 자식들에게도 큰 혜택이 되겠지만, 반대로 부모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손주들에게 느끼는 생동감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줘 외로움을 달래주기 때문이다. 손주들의 학습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조작법 등이 익숙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거를 시작할 때 회의를 통해 생활비를 합리적으로 분담한다면 부모와 자식 모두 경제적인 부담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공동 경비를 모아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산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할 수 있어 가족의 화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독일에 한 소년이 있었다. 호메로스의 를 사실이라고 믿어버린 아이는 언젠가 신화 속 도시 트로이를 발견해낼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어른이 되어 러시아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손에 쥔 소년은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했고, 그리스로 건너가 고대 유물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터키 히사를르크 언덕에서 꿈에 그리던 고대도시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한다. 그가 바로 고고학계에서 잘 알려진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竹山)에서 만난 윤민용(尹民鎔·79)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는 이 슐리만의 이야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글·사진 이준호기자 jhlee@etoday.co.kr
그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산과 들을 뛰놀던 유년시절 소년 윤민용은 이 돌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지만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커서 돌들의 유래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0년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알게 됐다. 그 소년이 봤던 돌들은 통일신라 때 축성돼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죽주산성(竹州山城)의 일부였고, 그의 고향 죽산은 ‘경기도의 경주’로 불릴 만큼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그가 어릴 적 꿈에 먼 길을 돌아 도착하게 된 이유는 가난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그는 학비를 벌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고향에서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한국일보를 배달했고, 졸업할 즈음에는 죽산지국장이 되어 있었다. 그때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신문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뜨게 됐고, 그의 타고난 웅변 실력은 세상이 그를 새 꿈에 다가가도록 종용했다. 정치였다.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면서 그 꿈은 구체화되는 듯했지만, 5·16 군사정변을 만나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금배지 대신에 타워호텔의 총무부장 직함을 달았다. 롤링스톤스가 울려 퍼지던 1969년의 일이다. 타워호텔은 1961년 민간에 매각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외빈용 숙소로 사용되었던 만큼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곳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이 1972년에 시작돼 2년간 7차례 진행됐는데, 그 역사적 사건 실무의 중심에 그도 서 있었다. 그렇게 10년간 호텔리어로 생활했다. 다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화학장치주식회사에서 20년간 근무 한 뒤 정년을 앞두고서였다.
“당시 퇴직 이후 계획을 세우기 위해 고향을 자주 찾다 보니 칠장사(七長寺)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칠장사의 다양한 유물들을 호기심에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유년시절 꿈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2001년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고 해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고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화해설사로서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새로 했죠. 관련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곳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문화해설사는 단순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읊는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죠. 해설의 흥미와 사실감을 살리려고 정확한 역사 속 날짜와 시대적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뒤따라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스마트폰으로 내 해설을 확인하는 짓궂은 친구들도 있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전문가들도 만나는데, 해설을 듣고 나서 칭찬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가 문화관광해설사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두 가지다. 역사적 근거를 통해 주류 사학(史學)과 향토사학(鄕土史學)의 올바른 접점을 찾는 것과 이를 통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노력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 중 대표적인 게 조선 최고의 어사로 손꼽히는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다.
“칠장사에는 박문수가 세 번째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다가 이곳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를 드린 덕분에 장원급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설화로 전해 내려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산에서부터 안성까지 자료가 될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 천안 입장면에서 생가로 추정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수사를 하듯 박문수의 호 기은(耆隱)이 그의 고향인 천안시 북구 입장면 기로리(耆老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하고, 여러 사료 확인을 통해 그의 몽중등과시 중 마지막 구절에 있는 (대나무)피리 적(笛)으로 알려져 있던 글자가 풀피리 적(笛)이라는 사실을 밝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렇게 2년간 시간의 파편을 수집하고 확인하기를 거듭했고, 결국 어사 박문수의 장원급제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령 박(朴)씨 대종회로부터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안성시에서는 이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그가 완성한 박문수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어머니의 간청을 흘려듣기 힘들었다. 선비로서 절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세 번째 과거시험 도전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면목도 없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 도착한 칠장사 나한전에서 그는 유과를 공양하며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날 밤 박문수는 꿈속에서 부처님을 만난다. 부처님은 시험에 나올 시제 7행을 알려주면서 나머지 행은 스스로 완성해야 하며 신중하지 못하면 시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게 성균관 과장(科場)에서 박문수가 완성한 시가 몽중등과시다. 그는 이 시로 병과 진사과에 장원급제했다.
최근에 이 시구는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 칠장사로 복사본을 얻으러 오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그를 만난 당일은 2016학년도 공립 중등교사 임용고시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한전은 기도를 올리는 학부모들로 북적였다. 시의 효험 덕분인지 윤민용씨의 손주는 캐나다왕립사관학교에, 외손주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중년의 꿈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꿈은 그간 조사하고 연구한 자료와 그의 이야기를 엮어 도록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주변에 무료로 나눠주고 싶습니다”며 “사람들의 관심을 높여 역사를 소중히 하는 마음을 키우고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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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꿈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그러다 새 꿈이 현실이 되고, 천직이 되면서 어릴 적 꿈은 꿈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중년이 되고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고향을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고향의 많은 문화재들을 다시 보게 됐고, 문화재들을 통해 다시 꿈꿀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이 막연한 희망이었다면, 중년 이후 새롭게 품은 꿈은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꿈이 호기심에서 비롯됐다면, 중년의 꿈은 베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기 위해 향토 사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료를 뒤지고 현장을 오가는 것이 즐거웠지만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구체적인 색보다는 밝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굳이 색을 고르라면 태양빛과 같은 주황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꿈은 인생에 희망을 주는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늘 긍정적인 태도와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됐습니다. 잔병치레도 사라졌습니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화 을 보고 나오면서 문득 ‘이 영화의 감독은 분명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 벤 휘태커(로버트 드 니로 분)는 혼자 살면서도 자신의 집과 주변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회전식 넥타이 걸이와 잘 다려진 셔츠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걸 보는 순간 ‘아~ 이건 여자의 시각이 만들어낸 장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낸시 마이어스라는 꽤 나이(1949년생)가 있는 여자 감독이었다. 벤은 ‘바람직한 은퇴남’, 그것도 여자의 시각에서 본 바람직한 은퇴남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건 남자건 스스로를 잘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 어떻게 가꾸고 다듬을 것인가? 마음은 물론 외모에도 적잖이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내 나이에 무슨 멋인가 할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Clean up’과 ‘Dress up’, 즉 깨끗하게 잘 차려입고 멋을 내야 하는 것이다. 옷이 날개라고 하지 않는가? 특히 손자·손녀들의 경우 언제나 뛰어가서 안기고 싶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원할 것이다. 냄새가 나거나 지저분하면 뜨악해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중충한 집에서 우중충한 분위기로 지내고 있으면 자식들도 손주들도 선뜻 오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물론 논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깨끗하게 잘 차려입으라는 말은 아니다. 일하는 모습과 옷차림은 그 자체로도 보기 좋은 어른의 표본이니까. 수년 전 인터넷과 SNS상에 존경받는 노후를 위한 필수요건이라며 ‘7 Up’이 올라왔다. ‘Clean up, Dress up, Shut up, Show up, Cheer up, Pay up, Give up’이었다. 여기에다 필자는 ‘Open up, Listen up, Health up’의 ‘3 Up’을 덧붙여 ‘10 Up’을 만들어 은퇴강의 때마다 잘 써먹고 있다. 7가지도 많은 것 같은데 10가지면 너무 긴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려면 이 정도의 수고는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순서를 잘 따라가면 외우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필자가 내놓는 ‘10 Up’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Open up, Listen up, Shut up, Give up, Cheer up, Clean up, Dress up, Show up, Pay up, Health up.’ 모두 쉬운 영어인 데다 우리말로 풀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마음의 문을 열고 남의 이야기는 듣고 내 입은 닫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웃는 얼굴로 깨끗하게 차려입고 다니자. 때로는 돈도 낼 줄 알고 건강도 챙기자.’
수첩 한곳이나 휴대폰에다 ‘10 Up’을 적어놓고 가끔씩 새겨보자. 아침에 일어날 때, 누구와 만날 때는 물론 뭔가 시무룩하고 만사가 귀찮을 때도 한 번씩 들여다보자. 마치 자신에게 주문(呪文)을 거는 것처럼 연습을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서 ‘Cheer up! Show up!’만 해도 오른손이 번쩍 올라가면서 자신을 스스로 격려해 밖으로 나가게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깨끗이 차려입어야 하고(Clean up, Dress up) 지갑도 챙겨야 할 것(Pay up)이고 한 바퀴 돌고 오면 마음과 건강(Health up)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다.
오랜만에 손자·손녀들이 온다고 하면 ‘10 Up’ 중 무엇이 필요할까? 깨끗하게 차려입는 것은 기본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 손주들에게 잔소리만 늘어놓은 것은 아닐까? 그래, 이번에는 마음의 문과 귀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입은 닫기로 하자(Open up, Listen up, Shut up). 동시에 웃는 얼굴(Cheer up)로 아이들을 대하면서 주머니의 문도 열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슬쩍 용돈도 주면(Open up & Pay up) 더없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Open up’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의 문과 귀를 넘어 돈주머니를 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과 주머니의 문을 여는 어른을 싫어할 자식과 손주, 친구는 없을 것이다. 열어젖히면 닫고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먼저 문을 열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문을 열면 행복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분석이다. 좀 손해 보는 듯 사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일이 따지기보다는 웬만한 것은 이해하고 포기하고 넘어가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자식 사이에도 따지기 시작하면 피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Open up과 Give up은 서로 통하는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Give up’ 역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포기할 건 포기하는 Give up일 수도 있고 이웃에게 베풀고 살라는 뜻의 Give up일 수도 있다. 우연이겠지만 Give의 발음 ‘기브’는 한자어 ‘기부(寄附)’와 엇비슷하다. Give up을 ‘기부(寄附) 업’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보다 못한 가족이나 이웃에게 베푸는 재미에 맛들이면 여느 재미에 못지않다고 한다. 돈이 아니더라도 체력과 재능 등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Health up’은 10 Up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다. 내가 건강해야 기부도 할 수 있고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일과 취미생활도 즐길 수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이 나이 들수록 더 절실해진다고 한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면 지루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내 건강을 내가 지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문을 열고 박차고 나가자. 세상은 밖으로 나오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영화 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벤은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낸 성공한 월급쟁이로 퇴직한 후 나름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자녀들도 잘 자라서 독립했고 가끔 손자들을 보러 다니면서 요가와 화초재배를 취미로 즐기는 평범한 은퇴남이다. 하지만 3년 전 아내와 사별해서인지 잠들 때마다 뭔가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들자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면서 나선 것이 시니어 인턴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벤처럼 너그럽고 여유로운 데다 지혜와 위트도 겸비하고 잘생긴 것은 아니다. 더욱이 누구나 벤처럼 새로운 도전에 멋지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전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Give up이라고 해서 이런 도전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 관객이 400만 명에 달한 것도 벤의 그 멋진 도전을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10 Up도 많다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더 Up을 더한다면 그것은 ‘Challenge Up’이다.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도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일 테니까.
‘재능기부’는 돈이 아닌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김종욱(金鍾郁·70) CEO지식나눔 공동대표는 그러한 기부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부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굳게 자리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재능기부의 힘이란 무엇인지 들어보자.
슬쩍 지나간 그의 노트에 적힌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다 애 아니면 개다.’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유머와 재치가 많은 어른’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촌철살인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경이로움에 대한 매혹, 어린아이와 같은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만 있으면 늙지 않는다’는 새뮈얼 울먼의 시구를 평생 실천해 왔다고 말하는 김종욱 CEO지식나눔 공동대표가 그 사람이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한일은행 외국부를 시작으로 도쿄, 런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며 한빛은행 부행장,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우리투자증권 회장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2007년에 은퇴한 후 한미글로벌 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고 있는 그는 기부의 기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CEO지식나눔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수하자는 의도로 모였습니다. 모임을 열자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링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가족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후대에 계속 전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어서 CEO지식나눔을 열었다는 김 대표는 나이 든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날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기부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삶을 전달하여 더 좋은 삶을 살게끔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거부감이 있는 국내의 기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처럼 들려왔다.
기부는 저축처럼 미리 떼어놓고 해야 하는 것
“제가 처음 은행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너희들은 저축을 해야 한다. 저축할 돈을 미리 떼어놓으면 저축이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부를 해보니까 기부라는 것도 저축처럼 먼저 떼어놓고 해야 기부가 되지, 남는 걸로 기부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기부는 미리 떼어놓고 하는 것. 그것은 기부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야 가능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할 세 가지’라고 전제하며 기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설명했다.
“첫째, 누구나 살다 보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아프지만 참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운동이 되고 큰 아픔을 분산시켜 줘요. 저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나눠서 체감합니다. 둘째, 살다 보면 크게 피 흘릴 일이 생겨요. 수술을 해서 피를 흘리거나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어떻든 피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흘린 피는 못 쓰니 다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일종의 기부인 헌혈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 보세요. 신이 그걸 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내가 더 피 안 흘리게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가족의 피 흘림도 신이 막아준다고 봐요. 셋째, 살다 보면 큰돈을 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조그맣게 각 사회단체에 자동이체로 한 달에 만 원, 삼만 원 정도 소액으로 보내면 신이 보면서 ‘돈 좀 썼네. 억울하게 돈 쓸 일 막아줘야지’ 하면서 막아줄 거예요. 증명은 못하겠어(웃음). 하지만 제 믿음입니다.”
기부는 조금씩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기부란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기부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기부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기부를 하면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김 대표의 신념은 그저 무턱대고 생긴 긍정적인 생각일 뿐일까? 아니다. 김 대표의 삶이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고마움을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김 대표가 가진 기부 신념의 기반이기도 했다.
“회사는 날 해외에 보내줬으니까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부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대에 영국에 가서 본 기부의 생활화가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는 기부라고 하면 반짝하고 어떤 기간에만 할 뿐인데, 영국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죠. 거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기부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기부를 위해 쓰는 걸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부라고 표현할 것도 없이, 나누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지혜의 자산 사회에 환원
김 대표는 손주에게도 나눔의 교육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지체부자유자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주에게 돈을 줘서 그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고 한다. 받기만 하면 쓸 줄 모르기에, 주는 걸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주는 걸 안 가르치면 어른이 돼서도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원리예요. 그래서 기부가 세상을 사는 원리의 기본일 수가 있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줘서 뿌듯한 마음을 알게끔 해야 합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자식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습, 베푸는 연습, 소통하는 연습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기부를 세상을 사는 원리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사고의 기반에는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연함은 심지어 물리법칙으로서의 중력에 대한 고마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중인데 만유인력의 법칙, 그러니까 중력을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모든 것의 기본이 이 중력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들 붕 떠서 지내야 하죠. 중력만 봐도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당연시해요.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기적을 믿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매 순간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 김 대표의 강점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저는 전생도 있다고 믿어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50미터 앞에서 뛸 수 있는 사람과 50미터 뒤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나뉘거든요.”
김 대표는 그래서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빴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았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더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후배들을 가르치고자 했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무조건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조심해야지. 가끔씩 저에게도 뭔가 당첨됐다는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그거 당신이 다 가지세요’, 그러지(웃음).”
‘냉정한 긍정주의자’로서의 김 대표가 꿈꾸는 CEO지식나눔의 미래는 모양이 차차 갖춰지고 있다. 우선 새터민 교육이 있으며, 오너의 2세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비즈니스 컨설팅은 계속 추진 중이며 최근에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재능기부는 특히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진다
김 대표에게 은퇴 후의 멋진 삶에 대해 물어봤다. 생활화된 기부가 주는 저축된 힘 외에 그의 은퇴 후에 활력을 주는 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이는 74살이었다’라고 말한 게 있어요. 저는 ‘가장 행복한 나이’보다 조금 모자란 나이죠. 그런데 이제는 의무가 없고 손자는 귀여워만 하면 되니, 저도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끔씩 내게 젊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데, ‘지금 행복한데 왜 젊어져?’라고 대답하죠. 행복의 첫째는 자유예요. 를 쓴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다.’ 과거에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어려웠던 일이지만, 나이가 든 이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게 있는 법이에요.”
은퇴하면 많은 게 사라진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자유다. 나이가 만들어낸 자유와 생활 속의 기부로 축적된 힘을 김 대표는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처럼, 이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도 당당한 자유가 배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훈장 받는 일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안 돼요. 19살을 넘어 성인이 되면 100살과 똑같은 성인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누르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돈을 벌었다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든지 행동이 바뀌는 일부 사람들은 꼴불견이에요. 좋은 사람하고 함께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을 쓰는 자유보다 기부하는 자유를 가져보세요.”
김 대표는 CEO 멘토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나누고, 취업과 창업 지도를 통해 사회진출의 장애를 슬기롭게 넘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작은 일을 왜 ‘기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몹시 미안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다른 자원(resource)도 자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아닌 서로의 전문성을 모두 돈과 똑같은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CEO지식나눔에 대하여…
2010년 30명으로 출범한 (사)CEO지식나눔의 회원은 전·현직 국내 기업 임원 및 대표급 인사들이 강연을 통해 지식나눔 활동을 전개한다. 2015년 현재 75명으로 지난 5년간 대학생과 사회인 멘티를 1500여 명 지도했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630여 회 CEO 특강을 통해 연인원 6만여 명을 교육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강의 등 활동으로 모아진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대학생과 유학생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보조기구 구입에 기부했다.
회원들은 500만 원의 입회비를 내고 CEO지식나눔 모임에 가입해 모든 활동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은 법인 운영금으로 사용하며, 남으면 사회복지재단 등에 다시 기부한다. LG화학 사장을 역임한 노기호 상임대표를 필두로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민경조 前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수근 차병원그룹 고문, 김기용 前 카길한국대표 회장, 강정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금융전문대학원 원장, 박문화 前 LG전자 사장, 박종식 前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 이방주 ㈜JR투자운용 회장, 허남석 포스코ICT 상임고문 등이 나눔 활동에 참여한다.
이 외에도 박주철 前 SK글로벌 사장, 신원기 前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 윤봉태 GS칼텍스 상임고문, 이명우 동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최동수 한화그룹 고문, 최길선 현대중공업 총괄 회장 등이 주요 회원이다.
김종욱 대표는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하게 된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태인 기자
1996년 로 제27회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이순원(李舜源 · 57).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던 그였다. 아버지로 인해 겪은 유년시절의 상처와 어머니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전화 한 통 드리는 게 더 어려웠다.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다녀가라는 것.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조금 천천히 다가갈 길을 택했다. 아들 상우와 함께.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대관령 꼭대기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50리(약 20km). 차로 가면 30분이 안 걸리지만, 걸어서 가자면 네다섯 시간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그 길을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들 상우와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아내와 둘째 아들이 차를 타고 가서 먼저 아버지를 달래 드리는 동안 그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아이와 길을 걷다 보니 집에서는 하지 못했던 다양한 대화가 오갔어요.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하는 대화보다 훨씬 풍부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듯 아들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고, 내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듯 아버지도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거 아녜요. 오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들의 생각도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덕분에 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단 하루였지만 훌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날의 경험을 쓴 소설이 바로 이다. 그는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권한다.
“대부분의 가정이 엄마와는 대화가 되는데, 아버지와는 필요한 말만 하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겨야 이야기를 하는데 그마저도 남편들은 아내에게 미루게 되고요. 대화도 훈련이거든요. 자주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서먹하고 어려울 수 있겠죠. 그럴 때는 대관령 옛길처럼 함께 오래 걷는 길을 가보세요. 걱정은 말고요. 일단 길 위에 서면 대화는 자연히 이루어지니까요.”
길 위에서 배우는 인생의 희로애락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썼지만, 순서는 새롭게 짰다. 대관령 굽이의 길이에 따라 긴 굽이에는 긴 대화를, 짧은 굽이에는 짧은 대화를 풀었다. 그는 길고 짧은 굽이가 모여 긴 대관령 옛길이 이어지듯 우리네 삶도 이런저런 일들이 모여 인생을 이룬다고 했다.
“책을 보면 아들이 한 굽이를 걷다가 ‘이 굽이는 짧다’며 좋아하죠.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이번 굽이가 짧다고 해서 걸어야 할 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짧은 굽이가 있으면 긴 굽이가 있게 마련이죠. 험한 길이 있으면 편한 길도 있고요.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말예요. 또 어떤 굽이를 갈 때는 아이가 뛰어서 가보자고 하죠. 그렇게 두 굽이를 달리다가 결국 발이 미끄러져 다쳤잖아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고작 두 굽이를 빨리 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죠. 인생도 그래요. 빨리 이루고 싶은 욕심에 조급해하기보다는 멀리 보고 꾸준히 걸어가야 해요. 상우도 그런 경험을 통해 인생의 굴곡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거예요.”
상우가 대관령 옛길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의 가르침을 준 길이 있다. 중학생 시절 등굣길에 있던 오솔길이다. 핑계를 대고 학교를 가지 않으려던 때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방을 들고 먼저 오솔길을 향했다. 길 양옆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에는 주렁주렁 이슬이 맺혀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옷이 젖기라도 할까 봐 말없이 이슬방울을 툭툭 털어내며 앞장서 걸어가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낀 어머니의 사랑은 그의 인생에 큰 교훈과 원동력이 되었다. 아들 상우에게는 ‘엄마 책상’이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 책에서 아들이 “나는 엄마가 엄마 책상을 가지고 있는 게 참 좋아요”라며 “친구들 집에 가도 엄마 책상이 없는 집이 더 많아요. 아뇨, 거의 다 없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데, 그런 현실이 늘 안타까운 그다.
“여자는 결혼하면서 장롱, 냉장고, 세탁기 등 많은 것을 준비해요. 그런데 정작 책상은 생각을 안 하죠. 식탁이나 화장대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있겠지만 책상이라는 것은 자아의 성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책상은 중요하죠. 어질러진 책상이라도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좋고, 산교육이 되죠. 아내가 일본어를 독학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도전도 책상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남편이 아내에게 액세서리가 아닌 예쁜 책상을 선물해준다면 좋겠어요.”
책에 나온 아이, 그 이후
책이 나온 지도 19년이 흘러, 올해 32세인 상우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소설인지라 상우의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책에 나온 아이’다. 가정의 달이면 상우와 인터뷰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아이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염려한 그는 동반 인터뷰는 거절해왔다. 어른이 된 상우도 그때 아버지의 결정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아들은 그때 통제를 잘해주었다며, 어리지만 세상사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좋게 기억하죠. 그 이후로는 상우랑 대관령을 걸어보지는 못했어요. 대신 평상시에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죠. 나중에 군대를 제대한 둘째 아들이랑 그 길을 걸었는데, 감회가 새로웠어요. 자녀가 어른이 되면 차곡차곡 가방에 짐 싸주듯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더 폭넓고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죠. 아직은 내 품에 있을 때 다시 그 길을 아이들과 걸을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아들도 언젠가는 자기 아들과 그 길을 걸을 날이 오겠죠?”
1. 배우자에게: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이것은 그냥 걷기에 대해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사색하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안고 걷는 걸음걸이에 대한 철학과 인문학이 담겨 있다. 책도 읽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라도 배우자와 함께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것은 어떨까.
2. 자녀에게:
얘들아, 그 어떤 책보다 재미있는 책이 좋지. 삼국지는 재미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또 수많은 사람의 유형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란다. 읽다 보면 사람들이 왜 이 책을 다섯 번도 읽고 열 번도 읽는지 알게 되지.
3. 친구에게: 칼 세이건
여보게, 이 책은 참 오래전에 나온 책이야.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
참 각박하지. 하늘 한번 바라볼 틈도 없지. 그럴 때 이 책을 펼쳐보시게. 지금 자네가 고민하는 것, 그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해 주지는 못해도 그게 우리 가슴안의 참 작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하지. 나이 들수록 이 세상만 보지 말고 우주를 쳐다보자고.
연애라는 기나긴 여정을 뚫고 마침내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할 때 어떻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경우가 많다. 또 대다수의 커플이 결혼을 준비하는 시기에 가장 다툼이 잦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결혼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신한은행 WM사업부 김희경 팀장에게 들어봤다.
1. 커플매칭 이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부유층 고객은 자녀뿐 아니라 부모의 기대치도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을 다 맞추어야 합니다. 때문에 미팅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죠. 하지만 서로 호감이 있는 경우에는 양가 부모의 동의 하에 교제가 진행되기 때문에 편하게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보통은 만난 지 3개월 즈음 상대방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6개월이 되면 상견례가 이루어집니다. 대부분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까지 1년 정도 걸리는 셈이죠. 이렇게 커플 매칭을 통해 성사된 결혼이 올해 11월까지 총 34건입니다.
2. 결혼 준비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날을 잡고 혼수가 진행되는 과정에 파혼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파혼 케이스는, 여성은 프리랜서였고 남성은 외국계 기업에 근무했는데 만난 지 6개월 만에 날을 잡아 예물도 오가던 상황이었어요. 여성 측에서 남성에게 중형차를 한 대 사주겠다고 했는데, 남성 측에서는 이왕이면 외제차면 좋겠다고 해서 틀어지기 시작했죠.
그 후에도 사소한 부분에서 마찰이 있더니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쪽의 욕심이 과할 때 파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혼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만큼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우선돼야 할 것 같습니다.
3. 성혼커플의 공통된 사항은?
- 다양한 소개팅 경험으로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알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성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차고 차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야 이성에 대한 눈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눈높이가 조절돼야 결혼할 확률이 높으니 소개팅도 많이 하고, 나이에 걸맞은 연애를 꼭 해보라고 권합니다.
- 누구나 선호하는 스펙의 소유자. 희망상대 조건은 단순하다
좋은 학벌과 직업, 빼어난 외모, 어린 나이 등 누구나 선호하는 조건을 지닌 사람은 소개팅 기회도 많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원하는 조건이 까다로운 경우는 그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개팅이란 누군가 나를 위해 대가 없이 애를 써 주는 것이니만큼, 상대를 추천해 주면 불만을 갖기보다는 일단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그래야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요. 조건 때문에 만남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보다 만나서 싫으면 ‘NO’를 외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죠.
- 성혼커플 90%가 남성이 첫눈에 반해 결혼한 케이스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한 커플은 별로 없습니다. 남성이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면,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요즘 젊은이들은 대화가 통하고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많이 찾는데 첫 만남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성이라면 최소 3번은 만나본 후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 집이나 직장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유리하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자주 만날 수 있고, 자주 만나야 정이 드니까, 거리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 성혼커플 평균 연령. 남성은 32~34세, 여성은 28~29세
남녀 모두 적령기를 넘기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워집니다. 여성은 자신을 만나 줄 상대가 부족해서 만남의 기회가 줄어들고, 남성은 만남의 기회는 많아도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제일 많은 적령기에 짝을 찾아야 하는데, 남성은 30세쯤부터 시작해서 35세 전에, 여성은 28세 전후 시작해서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4. 꼼꼼 결혼 준비 150일 가이드
D-150 상견례, 결혼 날짜 택일
상견례 날짜는 2~3주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으며, 결혼 날짜는 신부 측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D-100 결혼식장 예약, 예물과 예단 상의 및 신혼 여행지 결정
결혼식장은 양가 중간 지점으로 하고, 예단은 현금으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단을 받은 후 신랑 측에서는 봉채비를 보냅니다.
D-80 ‘스드메’ 결정하기
‘스드메’란 웨딩사진(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예식과 관련된 본격적인 사항을 정리합니다.
D-60 청첩장 주문, 한복 맞추기
청첩장은 한 달 전에 발송합니다.
D-50 주례와 사회 부탁하기, 신혼여행 준비하기
주례는 신랑 신부가 함께 아는 지인이나 어른에게, 사회자는 보통 신랑의 친구에게 부탁합니다.
D-30 예단과 함 보내기. 혼수 구입
예단에는 편지와 은수저, 반상기, 이불과 같은 현물 또는 현금(신권) 중 선호하는 것으로 준비합니다. 신랑은 예단을 받은 후 신부 측에 함을 보냅니다. 함에는 예물과 혼서지, 한복, 예복 등을 넣습니다.
D-10 폐백음식 준비(2주 전에 주문),
각종 우편물 주소 변경, 드레스 가봉
D-5 주례와 사회자 연락(예식 시간 30분 전 도착 안내), 예약 사항 점검
신랑 신부를 도와 줄 도우미, 본식 사진 및 영상 촬영, 부케 및 코르사주, 연주, 축가, 메이크업 등 당일 필요한 사항을 점검합니다.
D-1 예식 당일 최종 점검
드레스, 부케, 한복, 차량, 폐백음식 등 최종 점검. 당일 신혼여행을 떠날 경우 짐과 여권을 준비하고, 컨디션 유지를 위해 휴식을 취합니다.
커플매칭 서비스가 결혼까지 관여한다?
커플매칭 서비스는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주된 업무로, 주선자의 말 한마디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교제가 시작되면 잘 만나고 있는지 중간에 알아보면서 성혼 날짜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자녀 혼사를 위해 어떠한 부분도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 도움말 김희경 팀장(신한은행 WM사업부 커플 매칭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