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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빠이 필승, 제 몸 건사합니다”
- 함께 브라운관에 울려 퍼졌던 이 말. 바로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이 라는 군인 대상 TV 프로그램 사회를 보면서 마지막에 외치던 멘트다.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긴 그는 요즘 인기 강연자로서 제2의 인생을 숨가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그의 소식을 우리는 듣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프로그램의 종영,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그의 침묵 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뽀빠이’다운 건강을 뽐내며 살고 있는 그를 만나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활동 안 하세요?” ‘뽀빠이’ 이상용과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인데, 식당 주인이 살갑게 물어왔다. 로 전국을 누비며 당대 최고의 MC로 활약했던 그를 한참 동안 TV에서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물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대답했다. “너무 많이 해요.” 그 말대로다. 그는 요즘 하루에 서너 개의 강연을 뛰고 있다. 한 달이면 쉬는 날을 빼고 대략 오륙십 건에 달한다. 기자가 그를 만난 것도 중구보훈회관의 강연이 끝난 뒤였다. 1990년대 전성기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는 다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73세의 나이에. 죽지 않으려고 한 운동 이상용이라고 하면 누구나 ‘건강’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그는 7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건강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기초 체력이 약하지. 여섯 살 때까지 누워 있었거든. 일곱 살 때 처음 걸음마를 뗐어요. 그래서 안 죽으려고, 삶의 의욕이 강했지.” 그에게 건강은 태어날 때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한 상태로 아버지를 만나러 열 달 동안 부여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만나지 못했고, 다시 부여로 돌아와 그를 낳았다. 열 달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는 12세까지 여덟 가지 병을 앓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13세에 아령 운동을 시작해 18세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 미스터 고려대, 고대 응원단장을 거쳐 ROTC 탱크 장교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는 우리가 아는 ‘뽀빠이’의 삶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 있음에 감사 그에게 70세가 넘어서도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 비법을 물어봤다. “건강? 밥 먹으면 돼. 오래 살려면 나이를 먹으면 되고. 그리고 숨쉬기 운동이 중요해. 숨쉬기 운동은 하다가 안 하면 죽어(웃음).” 슬쩍 치고 들어온 농담과 함께 그는 자신이 평생 담배, 술, 커피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을 마신다고 한다. 밤 동안 속에 쌓인 노폐물을 씻기 위해서다. “아침은 치즈, 계란, 바나나 하나씩 먹어. 소식이야. 그리고 저녁은 일찍 먹고. 최근에는 콩비지와 두부를 좋아하게 됐어. 고기는 일주일에 두 번 먹고.” 그는 인생의 마지막 승리자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인명은 제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는 날까지 사람들이 자신만 보면 즐거워지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단다. “사람들이 내 강연을 들으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헛살았다’ 하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 모든 것을 무너뜨린 억울한 누명 이상용과 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89년 4월에 처음 방송을 시작해 1997년 3월에 종영된 는 군인 위문을 예능으로 만든 신선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국민 예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 코너인 ‘그리운 어머니’는 를 상징하는 코너로 무수히 패러디되었다. 하면 “뒤에 계신 분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를 외치는 장병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의 사회자였던 이상용은 를 의미하는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공금횡령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당시 그는 사회봉사와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주력한 것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이었다. 그런데 1996년 11월 녹화 도중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쳤고 녹화가 중단됐다. 그들은 경찰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장병 어린이 기금 횡령 혐의로 이상용을 수사한다고 했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온갖 매체에서 그를 횡령범으로 몰았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출처 불명의 소문들이 퍼져나가더니 마치 진실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벤츠 S500을 탄다, 집이 40억짜리다, 만 평이나 되는 땅이 있다….’ 진실은 얼마 안 가 드러났다. 검찰에서는 조사를 착수한 지 3개월 만에 그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이용해 횡령을 일삼은 파렴치범’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제대로 된 해명 기사도 내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아무도 나한테 확인조차 하지 않았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한지.”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용은 42만원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벤츠S500을 탄다’는 괴소문과는 달리,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82억원을 쓴 그는 돈 한 푼 없었다. ‘횡령범’ 이미지가 씌워져 방송에서 활동할 수도 없었다. 먹고 살려고,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훈장을 세 개나 받았는데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고 대서특필하면 40년간 해온 일이 어떻게 돼? 나쁜 놈들이야.”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그에게 누명을 씌운 걸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당시 제안받은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권의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쾌하다는 듯 그때의 기억을 단답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이상용의 목소리에는 아직 씻지 못한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졌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도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전 재산을 털어가며 무려 567명을 치료했다. 그러나 치료받은 아이들 중 단 3명만 연락이 닿았다.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는 안 해. 다만 좀 서운한 것뿐이지. ‘고맙습니다’ 한마디만 해줘도 좋을 텐데…. 그런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못 나서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힘든 시절, 이상용에게 위로가 됐던 것은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박사가 해준 말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걱정 마라. 눈이 왔다. 쓸지 마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난다’고 말씀하셨고, 법정 스님은 ‘자루에 너를 넣고 흔든다. 많이 담으려고 그런다. 하루 종일 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땅에다 놓으면 흔들림은 없어지고 너는 많이 담기는 자루가 된다’고 말씀 주셨지. 김동길 박사는 ‘강물이 흐르다 보면 위에서 오줌 누는 놈이 있다. 그렇다고 강이 지려지지 않는다. 너는 흘러가서 큰 바닷물이 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고마운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준 말대로, 자신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단다. 그들은 이쪽에서 상관하지 않으면 스스로 죽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견뎌내면서 단단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멋지게 살다 간 놈’으로 기억되고 싶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매일 명동성당에 간다. 아침 6시면 성당에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눈비가 와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문득 그의 얼굴이 보살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가 겪은 일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세월이 새겨졌기 때문일까. “법정 스님이 ‘너는 불자다’라고 말씀하셨지. 내 얼굴이 지장보살인데, 지장보살은 베푸는 보살이라고 하시면서 절도 다니라고 하셨어. 그래서 절도 다녀(웃음).” 그는 사회를 보는 것보다 강연하러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외로울 때는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사우나, 그리고 독서를 하지. 내가 책을 좋아해.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하고.” 그의 큰딸은 쉰 살, 아들은 마흔두 살, 외손주는 열일곱 살이다. 그는 자제들이 잘 자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우직하게 한마디로 말했다. “멋지게 살다 간 놈.” 그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위해서도 한마디했다. “브라보 독자님들, 뺏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세요. 악착같이 사는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측은합니다. 돈은 쫓아가면 도망가고 외면하면 찾아옵니다. 그저 오늘을 즐기세요.”
- 2017-07-1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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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만 힘들고 어렵지 않다
- 한때는 취업전선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치고 가족들마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성당의 신부님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은 완전고용으로 취업의 어려움이나 회사에서 짤리는 고통 없이 신도들에게 복음만 전달하면 되는지 알았다. 늘 깨끗한 복장에 신도들로부터 존경받기만 하는 모습이 세파에 시달리는 보통우리의 삶과는 다른 모습이 부러웠다. 하지만 신부님들도 저마다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지학순 주교께서 교황을 알현하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부터 준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글 중에는 용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막상 교황을 뵙자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주교라는 높은 신분임에도 부족한 것이 있어서 윗분에게 하소연할 거리가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어느 신도가 자신의 지치고 힘든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주님에게 ‘’주님!‘ 하고 부르다가 주님을 바라보니 내 고통은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귓전에서 주님이 ‘너도 나처럼 지쳤구나! 너도 나처럼 힘들구나!’ 하시며 위로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아들에게 미안한 과거 생각이 난다. 지난날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취업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하는 아들 어깨도 무거웠지만 이를 바라보는 애비의 마음도 찬바람 불고 황량했다. 아들이 이제 졸업하면 백수인데 남들이 ‘당신아들 지금 뭐해?’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에만 골몰하고 막상 백수의 첫발을 내딛는 아들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미운 감정이 앞섰다. 아들은 어떡하든 졸업하기 전에 취업해 보겠다고 애를 썼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몇 군데 원서를 넣었는지 묻지도 못했지만 결국 백수로 졸업을 했다. 졸업 후에도 아들은 밤낮으로 도서관에도 다니고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조회하여 취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합격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 아들이 영영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닌지 속 좁은 애비는 불안하고 겁이 났다. 어느 날 내가 만취하여 나도 모르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아내에게 토해냈다. ‘이제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들이 이렇게 취업을 못하니 큰일이다. 남의 자식은 취직도 잘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라는 푸념을 하고 말았다. 아들이 제 방에서 귀동냥으로 애비의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들은 내게 편지를 주고 나갔다. 내용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아버지 실망시켜드려 정말 죄송해요. 지금까지 25년이나 저를 믿고 기다려 주셨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궁하다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곧 좋은 소식 드리려고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편지를 읽고 나니 나보다 몇 배나 마음고생이 심할 아들의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아들을 보듬어주지 못한 애비의 속 좁음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남들이 ‘당신 아들 아직 취업 못했어?’ 하는 소리를 들을까봐 애비는 조바심했지만 그 시간에 취업 못한 아들의 마음은 애비보다 더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몇 달 뒤에 아들은 기다리던 합격 전화를 받고 제일먼저 애비에게 전해왔다. ‘합격’이란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인가. 전화기 너머의 아들의 씩씩한 음성도 반가웠지만 나도 내 생에 최고의 순간처럼 기뻤다. 아들의 인생은 아들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늘 해 왔지만 부자간 이라는 천륜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은 성인이여서 그렇다 치더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수많은 영웅들의 고초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의 삶은 편안하고 너무 행복하다. 세상에 나만 외톨이로 뒤처져 힘들고 지쳐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용기를 내보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무수히 많다.
- 2017-07-1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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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그룹 팬이 어때서!
- 지난해 4월 어느 주말 오후, 느닷없이 필자의 주책이 시작되었다. 주말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1990년대 대중문화의 한 획을 긋고 해체된 1세대 아이돌 그룹을 다시 불러 모아 콘서트하는 과정을 방송했다. 그들이 해체된 후 16년이 지났건만 당시의 아이템(팬덤을 상징하는 색깔의 우비와 풍선)을 장착한 팬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고 가수와 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당연히 필자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시절 철없던 소녀들은 한때의 추억이 아닌 더 깊은 마음으로 가수를 응원했고 그들의 16년 전 활동에서부터 콘서트 영상까지 다 찾아 보면서 애정 어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렇게 아이돌 그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시쳇말로 ‘이모팬’이 된 것이다. 아마 최고령 팬이 아닐까 싶다. 누구한테 말하기에게는 살짝 민망할 때가 있는 걸 보니 주책임이 틀림없다. 몇 년 전 후배가 집에 보온병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말을 했다. 좋아하는 가수에게 몸에 좋은 차와 음식을 만들어 보내서란다. 명품 셔츠를 사서 보내고 자기도 같은 옷을 입고는 그와 커플룩을 입었다며 뿌듯해하곤 했다. 필자는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행동을 십분 이해한다. 필자도 그들이 바빠지거나 얼굴이 야위면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고, 그들의 노래가 좋은 성과를 내면 필자의 일처럼 기쁘고 마치 자식이 성공한 것처럼 뿌듯하다. 물론 팬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다 한다. 플레이어도 없는데 소장용으로 새 앨범을 사고, 대형 서점에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 사야 새 앨범 판매 실적에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길에서 그들의 노래가 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다 끝날 때까지 미소를 짓다가 가던 길을 간다. 이제는 웬만한 랩도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힙합, 랩이 특기라고 소개할 수 있는 시니어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새 노래 나왔다. 한번 들어봐라” 하며 홍보한다. 물론 그들이 속으로 ‘아이고 저 주책~’이란 말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필자도 처음엔 그들의 노래가사 한마디에 위로받고 눈물까지 흘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당혹스러웠으므로. 가족들은 ‘으이그 저 빠순이’ 하며 놀리기도 하지만 기꺼이 응원해준다.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빠지는 네 열정이 부럽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주책이라면 또 어떤가. 시니어는 클래식이나 트로트만 좋아해야 하나? 아이돌 음악도 엄연한 대중예술의 한 장르다. 또 그들의 음악인 K-POP은 한류의 대표 상품으로 엄청난 외화벌이의 효자 문화 콘텐츠 아닌가. 필자가 응원하는 가수도 곧 해외 진출을 한다고 한다. 그들이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서 국제적인 아이돌이 되면 좋겠다. 한류 수출의 기수가 되길 팬으로서 항상 응원하고 있다. 순수하고 긍정적인 팬심에 나이라는 변수가 왜 필요한가. 필자는 작년에 너무 가고 싶었던 콘서트엘 못 갔다. 주책 떠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가지 못했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올해 콘서트가 열리면 당당하게 가서 노래도 따라 부르고 더 적극적으로 즐겨볼 작정이다.
- 2017-07-1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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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책바가지 푼수 할머니의 후회
- 첫정이 담뿍 든 손녀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손녀가 세 살 때의 일이니 벌써 3년 전 이야기다. 그날은 며느리와 함께 아기를 위한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며느리는 아기 짐이 많아 손녀는 필자가 안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같이 탄 부부가 수군거리더니 여자가 필자에게 물었다. “아기 엄마지요?”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아닌 척하고 며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기 엄마는 여기 있네요, 저는 할머니랍니다.” 부부는 놀랍다는 듯 어쩌면 그렇게 젊어 보이느냐고 했다. “뭘요~” 했지만 필자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을 것이다. 아기 엄마로 착각할 만큼 젊어 보였다니 할머니라도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가. 이날의 이야기는 며느리도 옆에서 같이 들었기 때문에 증명이 되는 에피소드다. 그날 저녁 아들에게 자랑삼아 얘기해줬더니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그 사람들 선글라스 쓴 거 아니냐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우체국엘 갔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데 앞자리의 아주머니와 우체국 직원의 대화 내용이 들려왔다. 당시에는 금리가 자꾸 떨어져 친정엄마처럼 이자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걱정이 점점 커져만 갔다. 친정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비하면 금리가 4분의 1로 줄어든 터라 친정엄마의 예금 관리를 해주던 필자도 근심이 많았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과 앞자리의 아주머니 대화가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실례를 무릅쓰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상품이죠?” 필자를 흘깃 쳐다보더니 직원이 말했다. “손님은 해당 안 돼요.” 순간 불쾌했다. ‘앞자리의 아주머니는 고액의 예금을 묻어둔 사람이라서? 필자는 저금할 여유가 없어 보여서?’ 하며 의심했다. 그래도 높은 금리에 대한 내용이 궁금해서 다시 꿋꿋하게 물었다. “왜요? 무슨 상품인데요?” 그러자 직원이 말했다. “40세 이상만 들 수 있는 상품이에요.” 그 순간 필자는 번호표를 버리고 뒤돌아서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의 필자를 제대로 알아보고 “에구, 할머니였네” 할까봐 서둘러 우체국을 빠져나온 필자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 후 당분간은 그 우체국에 가지 않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일인데도 공연히 뭔가를 들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문제는 그로부터 얼마 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있었다. 푼수처럼 그날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해버린 것이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슨 그런 소릴 하냐며 비웃었다. 필자는 졸지에 잘난 척하는 거짓말쟁이가 돼버렸다. 억울했고 부끄러웠다. 괜히 말했다는 후회까지 밀려왔다. 평소에 겸손한 편이고 자기 자랑을 해대는 사람도 아닌데 그날의 일은 왜 굳이 친구들에게 말했을까… 어디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그 후로는 비슷한 일이 생겨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글로 쓰는 것도 푼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절대 거짓이 아니라 진짜 들었던 이야기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도 드니 정말로 주책바가지 할머니 아닌가. 순간 필자는 번호표를 버리고 뒤돌아서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2017-07-1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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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어도 여전히 미숙한 인간관계
- 지인이 잘못했을 때 그것을 알려줘 고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과거 한 박물관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쉬는 날을 동료들과 의논해서 결정했는데, 동료 중 한 분은 63세였고 직업이 강사였다.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가야 한다 해서 강의하는 날을 쉬라고 배려해줬다. 그다음 72세인 분에게 편한 날짜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자가 쉬는 날을 골라 정했다. 이분들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동안 모임도 함께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날짜를 양보해도 뿌듯하고 좋았다. 그런데 며칠 후, 72세인 분이 쉬는 날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날짜를 이리저리 검토해보았지만 마땅한 날짜가 없었다. 그러자 63세인 분에게 강의 날짜를 바꿀 수 없냐고 물었다. 당연히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분은 동료가 강의하러 가는 바로 그날 쉬고 싶어 했다. 그리고 뜻대로 안 되자 그때부터 불만을 갖더니 한 사람 강의 때문에 자신이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러 갈 때도, 전시관에서 근무 중일 때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휴일로 선택한 날짜가 되면 꼬박꼬박 챙겨 쉬었다. 한 달 내내 그분의 불평을 듣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도대체 연세가 몇인가. 포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힘들죠?” 하면서 동생 같은 동료들을 챙겨주셔야 할 입장 아닌가! 그러나 나이도 한참 많은 분이 그런 말씀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자가 쉬는 날짜 정할 때 배려해주고 양보해줬어도 고맙다는 말씀은 전혀 없었다. 참다못해 하루는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전시관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언성을 높이더니 “난 그런 사람 아녜요! 맘대로 생각해요!” 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데로 가버렸다. 필자는 순간 당황했다. 자존심을 크게 다쳤나보다 하고 그분을 따라가면서 “제 말 좀 끝까지 더 들어보시라”고 했다. 하지만 “시끄러! 말하지 말아요! 난 들을 필요 없어!” 하며 화를 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시회 끝나는 날까지 필자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나이가 72세나 되신 분이 어쩜 저렇게 여유가 없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자가 말할 때마다 바로 투명인간 만들어버리는 그분을 보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꾹꾹 참아가며 아침 출근인사와 퇴근인사를 깎듯이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투명인간’ 대접을 받고 있다. 으이구 주책이야! 속으로만 생각할걸! 그런 말을 왜 해서는! 세 치 혀 간수 못해 지인도 잃고 마음에 큰 상처만 남겼으니 필자의 잘못이 크고 후회막심이다. 그래도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절대 충고하지 말자! 그것이 지혜라면 지혜일 수 있다. 때로는 상대에게 상처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앞으로는 누가 잘못을 해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2017-07-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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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여행전문가 한비야씨의 7번째 책이다. 58년 개띠 여자이다. 그저 여행이 좋아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여행에 인생을 건 여자로 봤었다. 멀쩡하게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 대학 언론대학원에서 국제 홍보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재원이다. 여행 책이 최근 관심 있게 손에 잡히는 이유가 필자도 앞으로는 여행을 제대로 해보고자 하는 버킷리스트 때문이다. 가 본 나라도 많지만, 아직은 안 가본 나라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안 가본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가보고 싶은 나라들이 아직 즐비하다. 그러나 직접 가 보고 싶은 나라는 아니지만, 관심은 많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얻고 싶은 것이다. 지도를 보면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있다. 잘 사는 나라를 먼저 보고 싶은 것이다. 못 사는 나라는 시간과 돈을 들여가서 볼 것도 없고 불편하고 위험하다면 후회할 것 같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그런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들이 더 많다. 한비야씨의 이 책은 직접 가보기도 어렵고 위험한 나라들이다. 국제 긴급 구호 요원으로 아프리카의 말라위, 잠비아,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중동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시아의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북한을 다녀와서 쓴 글들이다. 현재 전쟁이나 내전 중이기도 하고 각종 전염병 등으로 위험한 지역들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의 만행도 참고할 만 하다. 단순한 여행으로는 다녀오기 어려운 나라들인데 긴급 구호요원으로 활동 한 덕분에 한비야씨의 생생한 현지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다. 시에라리온은 ‘사자의 산’이라는 뜻이고 평균 수명이 25세~35세로 인구 대비 난민이 절반, 신체장애자 수도 가장 많은 나라란다. 내전 중에 전 인구 5백만 명 중 1/5이 죽었단다. 이웃나라 라이베리아는 ‘자유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나라로 다이아몬드 자원 때문에 내전을 겪은 나라들이다. 반군들이 양민들의 팔다리를 잘라 장애자 수가 많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절반이 끼니 걱정을 하고 산단다. 한 달에 2만원만 있어도 먹고 살 수가 있는데 그 돈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던 오드리 헵번 같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왜 존경받는지 알 것 같다. ‘한국의 자립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불가능한 일’이라던 우리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 원조를 1990년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무려 13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아직 그 액수가 22억 달러로 은혜의 빚이 많다는 것이다. 국민 총소득의 0.06%, 일인당 한 달에 400원 정도를 원조금으로 내고 있어 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모양이다. 원조 1위국 덴마크는 국민 총소득의 0.91%, 유엔 권장이 0.7%이며, 국민총소득이 우리보다 못한 그리스도 0.17%, 포르투갈도 0.25%나 된다는 것이다. OECD 평균치도 0.23%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흔히 듣는 얘기로 우리나라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멀리 외국에 까지 원조를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런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원조를 받을 때도 원조를 주는 나라의 국민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이 운동이 활발해진다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 2017-07-0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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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치매
- “아파트 꼭대기층서부터 좀 찾아내려와 주실래요?” 퇴근 후 분리수거와 음식물봉지를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갔다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어르신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하신다. 항상 출입구에 앉아 계시던 A어르신께서 병원에 다녀오신 후 타고 가실 실버카를 조카가 가지러 간 사이 어디로 가신 것이다. 항상 눈 여겨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던 분들이라 모두 여기저기로 찾아 나섰다. 필자와 어르신 한분이 24층서부터 찾아 내려오자며 꼭대기로 올라갔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필자는 아래를 살짝 내려 본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옆은 보지도 못한 채 계단을 달리며 어르신을 찾아 내려왔다. 며칠 전 친절교육차 대강당에서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았다. 여름더위인양 폭염속의 찌는 듯 한 더위 속을 헤치고 달려가 듣노라니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강사님께서는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시며 하시는 말씀인 즉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적응이 안 되지만 몇 번 올라 다니다 보면 계단 오르면서 힘든 점이 하나하나 도망가 버린다고 하시며, 더욱 좋은 점은 계단을 밟고 오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희망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평소 운동을 싫어했던 필자는 많은 반성과 후회를 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야지 했는데 갑자기 잃어버린 어르신을 찾으며 내려오는 계단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뛰어 어르신들이랑 내려 와 2층으로 가서 보니 혼자 다니셔서 많이 힘드셨는지 피곤해 보이시는 모습으로 A어르신이 앉아 계셨다. 나이가 많은 조카께서는 혼자 계신 숙모님께 왔다 갔다 보살펴 드리려니 힘든 점이 너무 많고 요양보호사가 오전에 와서 일을 봐주어도 너무 힘들다고 입가에 거품이 일도록 토로를 하시자 옆에 계시던 어른신들께서도 치매로 인해 힘든 삶의 애환을 한마디씩 더하신다. 한 바탕 아파트가 발칵 뒤집어 지긴 했어도 여러 어르신들의 협동심과 위와 아래로 나누어 찾자며 재치 있게 어르신을 걱정하는 정겨운 모습이 ‘아직까지 우리들 이웃사랑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대한의사협회는 치매가 국민건강상의 문제를 넘어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국가 차원의 근원적인 대책마련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공약인 치매국가책임제를 적극 환영하고 치매 대책의 일환으로 치매 조기진단 및 치료, 모니터링을 더욱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치매진단 및 치료 프로토콜을 제작해 배포하고 치매 관련 연수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치매국가책임사업에 의료인이 최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의료전문가를 비롯한 민간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지속 가능한 치매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치매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까지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의사협회의 바램 또한 온 국민의 소원이라고 본다. 서로 수고와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한바탕 일어난 어르신소동을 계기로 계단이 있는 곳이면 꼭 걸어 다녀야 함을 재인식하며 운동엔 격식과 규칙이 없어 나의 몸과 소통하며 또 나를 위해 공감하는 실천을 함으로써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치매를 사랑하면서 보듬을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 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 2017-07-0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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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 여성 밴드 ‘민들레트리오’, “취미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떳떳한 가수예요”
-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목숨만 살려달라는 민들레의 간절한 외침을 하늘이 들어줘, 씨앗을 하늘 높이 날려 양지바른 언덕에 내려놓아 다시 그 삶을 잇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민들레의 꽃말은 ‘감사하는 마음’, ‘행복’이란다. ‘민들레트리오’, 그들의 밴드 이름에도 누군가와 함께 행복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의미가 있다. 민들레트리오의 멤버 이유진(56·리드기타), 이수정(56·리드보컬), 반보영(55·리듬기타)씨를 만나봤다. ‘노년반격(老年反擊)’. 꿈을 향한 뒤늦은 반항일까, 아니면 꿈을 위한 새로운 시도일까. 아마추어 시니어 뮤지션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프로젝트 ‘노년반격’이 올해 튜브앰프, 한국에자이, 부루다콘서트, 한국음악발전소,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우리마포복지관과 함께했다. 작년 ‘실버그래스’와 ‘바야흐로’를 발굴한 데 이어 올해는 여성 3인조 포크밴드인 ‘민들레트리오’를 선발했다. 이 행사를 통해 민들레트리오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 ‘외출하는 날’을 공개했고 5월에 콘서트를 열어 첫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후 민들레트리오는 꾸준히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늦은 시작이지만 괜찮아 압구정 의료기관과 함께하는 ‘해피바이러스봉사단’에서 만난 민들레트리오의 세 멤버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꿈을 향해 질주 중이다. 서로의 장점을 물어봤을 때 ‘단점이 없다는 게 장점’이라며 한목소리를 낸 이들은 공통점이 많은 친구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한 가정의 엄마다. 젊은 시절 자식에게 헌신하느라 바빴던 이들이 하나둘씩 은퇴하면서 뒤늦게 자신의 삶을 찾았다. 음악감상실과 라디오에서만 머물던 포크송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지금은 모두 환갑을 넘긴 ‘쎄시봉 친구들’. 그들이 활동했던 시절의 청년문화는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세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제 추억 속의 기타는 청바지에 통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모습이 먼저 그려져요.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고 멋있어 보여 ‘통기타 한번 배워볼까?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죠.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기타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이유진씨의 기타 연주 실력은 가수 이한철이 “여성 기타리스트 중에서 이렇게 잘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말할 만큼 수준급이다. 그의 음악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모니카, 아코디언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만능 연주가다. 민들레트리오의 리더이자 리드기타를 담당하고 있는 이유진씨는 팀원을 직접 캐스팅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정, 반보영씨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함께해야겠다고 결심했고 바로 두 멤버를 섭외했다고 한다. 메인보컬 이수정씨는 멤버 중 가장 늦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던 선생님. 퇴직 후 뭘 하면 좋을지 고민 끝에 기타를 선택했다. “어디를 가도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학창 시절엔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합창단을 선생님이 권유하실 정도였으니까요(웃음). 그 당시에는 집안 사정 등 모든 걸 생각해봤을 때 여유 있게 노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어쩔 수 없이 음악은 포기하고 공부에 몰두했어요. 후회? 후회는 없지만, 미련은 조금 남더라고요.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은퇴를 코앞에 두고 ‘나만의 시간에 뭘 하면 좋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던 순간 저도 모르게 기타가 생각나더라고요. ‘내가 노래는 자신 있으니까 내 노래를 반주할 수 있을 만큼이라도 기타를 배워보자!’ 어쩌면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작은 꿈을 이룬 거죠. 행복해요!” 팀의 막내이자 리듬기타를 담당하는 반보영씨는 20년 동안 금융업계에서 일하다 명예퇴직 후 기타를 배우며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고 있다. “당시 명예퇴직금을 정말 많이 준다고 해서 퇴직을 선택했어요. 근데 막상 일을 안 하다 보니 다른 뭔가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제일 잘했지만 포기했던 게 뭐지?’ 하고 생각해보니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났어요. 학창 시절 음악 시험은 정말 식은 죽 먹기였어요. 다른 친구들이 계이름을 못 외우거나 못 맞추는 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어요(웃음).” 반보영씨는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민들레트리오 멤버들은 “음악은 저희에게 피로회복제 같은 것이에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요. 또 남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으로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어 좋아요”라며 현재 활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드러내 보였다.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준 가족 지난 4월, 그들의 데뷔곡 ‘외출하는 날’이 공개됐다. 노년반격의 프로듀서인 가수 이한철이 작곡했고, 멤버가 함께 작사해 탄생한 곡이다. 가사는 평범한 일상에 익숙해진 삶을 살고 있지만, 예전부터 꿈꾸던 일들을 이루기 위해 다시 외출을 한다는 내용이다. 마치 민들레트리오 멤버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5월 홍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그들은 첫 라이브 무대를 선보였다. 노년반격 시즌1에서 뽑힌 ‘실버그래스’의 무대를 시작으로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를 민들레트리오가 이어갔다. “가족에게 저희들 노래를 들려준 건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관중석에 있는 가족을 보자 이상하게 울컥해지더라고요. 사실은 콘서트에 오지 말라고 했어요. 생각해보니 그게 좀 마음에 걸려 더 열심히 연습한 뒤 초대했죠.” 이수정씨에게 울컥한 이유를 물어보니 “모르겠어요. 복잡한…? 엄마의 이런 모습…?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저도 모르게 그냥 그랬던 거 같아요”라고 답했다. 가족들 생각을 하면 괜히 서러워지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잘못하거나 미안한 일 한 적 없어도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눈물이 나는 마음처럼 말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늦게 음악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밴드 활동을 한다고 했을 때 신랑은 제가 노래를 좋아하고 잘하는 걸 아니까 ‘10년을 하겠어, 얼마나 하겠어~’ 하면서 응원해주고 있어요. 단 하나 요구하는 게 있다면 제발 악기는 더 이상 사지 말래요!” 이수정씨의 말에 모두가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맞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악기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기타는 벌써 3개나 있고 피아노에 아코디언에 집이 거의 악기상 수준이 되어버렸어요(웃음).” 즐기는 삶을 위하여! 민들레트리오가 함께 호흡을 맞춘 지 올해로 4년째다. 이제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게 취미 그 이상이 되어버렸다는 이들은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우리만 행복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면 어떨까 싶어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저희 노래를 듣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기쁘더라고요. 저희를 필요로 하는 단체나 소외된 계층이 있으면 가서 즐겁게 노래하고 행복을 나누면서 지내는 게 목표예요. 가끔 ‘강원도 어디에서 무슨 축제를 한다더라! 여행 삼아 갔다가 버스킹하고 올까?’ 하고 말하곤 해요. 이번 ‘노년반격’을 계기로 저희들 곡이 하나 생겼는데 앞으로도 곡 작업을 본격화해 한 곡, 두 곡 차곡차곡 쌓아서 전국을 버스킹하며 함께 돌아다니는 게 꿈이에요. 그러다 보면 60대엔 또 다른 모습의 민들레트리오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는 시니어에게 민들레트리오 멤버들은 시니어 세대의 도전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하나쯤은 잘하는 게 있어요. 영어를 잘하면 통역, 요리를 잘하면 요리사. 전문적인 능력이 없어도 괜찮아요. 사람은 나이 들수록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하잖아요. 사람 많은 곳에서 함께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시작해보세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배운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더라고요. ‘노년반격’에 도전하면서 느낀 게, 20대가 되면 부모님이라는 울타리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잖아요? 저희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결혼하고 정신없이 살다가 다시 사회로 나온 기분. 처음으로 노래를 발표하고 콘서트도 열고 마치 사회초년생 같은 기분이었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늦은 나이에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꿈을 다시 펼쳐보는 건 어떨까?
- 2017-06-3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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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예찬
- 하짓날 새벽 곁에서 자고 있는 아내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저렇게 잔주름이 있었던가. 매일 매 시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많이 자주 본다고 자부하며 곁을 지켜왔어도 몰랐는데 갑자기 눈에 띄다니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는데 혹시나 하고 발치로 옆구리로 옮겨 가며 바라봐도 보려고 해서 그런지 역시나 보인다. 가시덤불로 막아도 지름길로 온다는 흰 머리칼이 이겼구나. 오랜 연애 끝에 문서에 도장 찍고 맏며느리로 들어와 아이 셋 낳고 지지리 고생하는 자체를 아이 키우는 즐거움으로 퉁 치며 살았던 아내. 자신들이 좋다는 배필 토하나 달지 않고 승낙 해 아직 잡음 없이 무난한 삶 갖게 해줘 며느리 사위들에게 사랑 받으며 자주 찾아오는 휴일을 기다리는 엄마. 중학생 셋 초등학생 하나인 손자 손녀들에게 늘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몸소 본이 되어주는 정신적 지주면서 절대 멘토인 스승 할머니. 두 식구 살면서 꼰대가 될 것이냐 어르신이 될 것이냐 물어보는 동반자. 친구들 연락에 순서 지켜 골고루 만나주고 함께 울어주는 듬직한 친구. 무엇하나 소홀한데 없이 묵묵히 중심 지키며 세상에 순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삶의 표본인 아내. 모든 게 부족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잠시 누가 무얼 하면 좋다는 말에 귀가 팔랑대 한눈팔려는 기미만 보이면 아이들 다 키워 보낼 때까지만 참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라며 오로지 아이들 건사하기에 올인 한 엄마. 이제 모든 걸 다 해 줬으나 단 둘이 남아 정작 기운도 없고 우리 몫은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를 못 찾은 것은 후회되지만 다시 그 일을 한다 해도 또 후회할 줄 뻔히 알아도 나는 다시 그 일을 하고 이렇게 후회하겠다는 아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키웠지 않느냐 그거면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 중 내 일은 다 한 듯하다. 내 짧은 생각에 내게 또 다른 욕망은 욕심이니 가자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는 아내. 내게는 아재나 꼰대가 아닌 어르신으로 사는 첫 걸음은 얼굴과 매무새가 정갈해야한다며 늘 양복과 넥타이를 추천한다. 시대를 리드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말수는 적게, 잔잔한 미소로 불치하문의 겸손을 갖추는 태도와 행동이 어르신일 것이란 확고한 개인소견.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경청해 주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감지해 젊은이들 보다 한참 떨어지지 않도록 공부하며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분야를 제외하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서지 말라. 아재 꼰대 어르신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니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상대가 물을 때만 대답해 주도록 하라. 주름지고 쳐진 얼굴이야 흐르는 세월에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가꿔야한다 나를 대신하는 게 내 얼굴이고 누구에게나 보여 지는 내 자신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의외로 나를 모르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니 거울 앞에서 얼굴을 자주 봐라. 한번 보고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다른데 자주 볼수록 내 자존감이 커지고 보는 시간도 짧아진다. 찡그린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밝고 맑은 얼굴을 만들자 한다. 아내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거울을 자주 보니 본인이 먼저 알 텐데 그 흔한 주사 한 방 안 맞았다. 더 자주 바라봐야겠다.
- 2017-06-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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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서 하는 일과 해야 할 일
- 풍경소리도 잠이 덜 깬 조용한 아침. 바늘 끝 하나 박을 수 없을 것 같이 꽉 찬 세상을 뚫고 넓은 대웅전을 빠져나온 독경소리처럼 일주일에 두 번 거실에 울려 퍼지는 인터넷 영어방송. 기저귀 차고 출발해 수의라는 마지막 패션 쑈로 끝내는 게 인생인데, 젊음, 결혼, 고생자체가 마냥 즐거움이었고 재미였던 아이 키우기도 끝내고 이제 단 두 식구만 남았다. 우리는 장수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누구나 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단지 무엇을 할지 모를 뿐인 때 둘만이 남겨진 지금도 뭔가 또 해 보겠다며 뛰고 또 뛰는 일상에서 찾은 게 외국어 배우기라는 아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면 네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새로운 경로를 탐색합니다. 5km 이상 직진하십시오. 800m 앞에서 유턴하십시오. 누군가 우리네 인생길도 이렇게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내가 가고자 한 길인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네비게이션 같은 인연이 우연이란 이름으로 알려주는 내 인생이 마무리 될 때 장식할 것 중 하나가 무엇인가 배우는 것이라면 그 중 하나를 영어라 생각하고 싶다는 아내. 피터팬의 작가 제임스 벨은 행복이란 내가 좋아서하는 일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내가 해야 하는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란 내 한 사람의 생각의 한계가 있으니 행복의 양이 적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나 해야 할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일에서 신나고 재미있게 일을 하면 곁에서 보는 사람도 흥미와 호기심이 생겨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까이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이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시너지 효과가 생겨 행복의 양은 무한대가 될 것이라고 해석해본다. 그러나 나이 먹고 세월이 흐르면 젊은이와 달리 확률적으로 남은 시간이 적으니 얼마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를 위해 영어 공부 하겠다는 아내. 그렇다 보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 훌훌 털고 내가 행복이라 생각한 길을 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점점 설득력이 생기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적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적군의 입장에서 나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나를 공격해 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취약점과 나의 허점을 찾아 내 허점은 보강하고 적군의 취약점을 나도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해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찾아 효과적으로 공격해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정작 영어공부하는 당사자보다 곁에서 침묵하고 도와주는 자의 고통도 만만치 않게 크다는 것을 과연 본인은 알까. 요즘처럼 청개구리 동화가 실감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 2017-06-19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