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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아(胎兒)는 천재다!
- 조산사 엄순자(68, 청주 엄조산원) 원장은 4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그간 받아낸 신생아 수가 자그마치 7000여 명에 달한다. 이 바닥에서 그녀를 능가할 고수가 드물다. 세상은 요상하게 돌아가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만연하지만, 출산만큼은 훼손될 수 없는 성역이다. 만약 자비로운 신이 존재한다면 신생아가 출현하는 순간엔 친히 출장을 나와 참견하고 싶어 할 테다. 세상에 태어나는 새 생명은 여하튼 무탈해야 하며, 사랑을 받아야 하며,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귀한 출산을 조력하는 조산사란 신성한 직업이다. 엄순자 원장이 조산사로 일하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부터다. 아기를 받는 일에 딱히 매력을 느껴 선택한 직업은 아니었다지. 간호대학을 졸업했으니 간호사로 취업하는 게 순서였으나 그녀는 조산사를 택했다. 환자들을 상대하는 간호사보다 산모들을 돕는 조산사 일이 한결 수월할 것 같아 택한 길이었다. 그게 평생의 외길이 될 줄은 몰랐더란다. 또 조산사 일에 그토록 빠르고 깊게 심취하게 될 줄도 몰랐다. 생명의 출산에 간여하며 신비감과 경이로움, 그리고 보람과 성취감으로 자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일종의 열광적인 몰입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 한동안 그녀는 산부인과 병원에 취직해 조산사 일을 했다. 경험과 실력을 키운 수련기였다. 그러다 28세에 독립해 조산원을 개업했으며 이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조산원은 청주시의 구시가지 대로변에 있다. 번듯한 4층 건물이다. 1991년에 부지를 사들여 지은 집이다. 출산율이 높았던 과거에 누린 조산원의 성업(盛業)을 증명하는 건물이다. 예전엔 조산원이 많았다. 그러나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하나둘 사라져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도 도무지 볼 수 없다. 산부인과 수의 격감과 마찬가지로 조산원의 퇴출이 가속됐던 거다. 대한조산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16개소의 조산원이 남았을 뿐이다. 엄조산원은 충청 지역에 남은 유일한 조산원이다. “산모를 가장 많이 받았던 건 1980년대였다. 한 달에 평균 40여 건, 최대 62건을 받기도 했다. 하루에 7명의 아기를 받아낸 진기록도 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줄어도 너무 줄었다. 월 2, 3건의 일이 있을 뿐이니까. 많아야 5건이더라. 그러나 이 나이에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게다가 과거와 다르게 여유시간이 충분한 덕분에 산악자전거를 즐길 수 있어 너무 좋다. 예전엔 휴일도 밤낮도 없이 24시간을 대기 상태로 지냈거든.” 분만은 ‘피와의 전쟁’ 조산원 내부를 볼까. 약간의 의료기기들이 보이는 진료실과 둥근 욕조를 설치한 수중분만실, 소파가 놓인 상담실, 그리고 여러 개의 정갈한 방으로 이루어졌다. 진료실만 아니라면 일반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색이라 편안하고 따사롭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산모들이 이곳에서 격심한 산통을 치르며 출산했을 걸 생각하자니 마치 태풍이 훑고 지난 자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애잔하다. 무참한 진통을 거쳐 마침내 기쁜 순산을 한 산모들의 눈물과 희열이 서린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내과나 외과 의사는 한 사람의 치유를 도모하지만 조산사가 돕는 건 두 생명이다. 산모와 아기, 두 생명을 동시에 조력한다는 점에서 조산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한결 엄중하다고 느낀다. 귀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베테랑 조산사는 초심자와 어떻게 다른가? “분만은 한마디로 ‘피와의 전쟁’이다. 분만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게 산모의 과도한 출혈이다. 노련한 조산사는 이 출혈을 최소화할 줄 안다. 산모의 상태를 미리 정확하게 판단하고 상황을 예측, 한 템포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출혈이 전혀 없는 출산도 가능한가? “출혈은 회음부 열상(裂傷)이나 태반이 떨어진 자리에서 야기된다. 그런데 드물게나마 분만 직후 피 한 방울 안 흘리는 산모들이 있다. 이걸 우리는 ‘자연출산의 꽃’이라 부른다. 이런 출산을 볼 때면 나는 대단한 기쁨을 느낀다. 조산사의 기량과 산모의 훌륭한 의지가 합세해 만들어내는 작품이기 때문이지.” 출혈이 심해 위급한 경우엔 어떤 조처를 하지? “완전한 자연출산을 추구하는 조산원은 산부인과 병원과 달라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지 않다. 의료 시스템에 의지하는 분만은 자연출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혈이 너무 심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수축제를 주사해 응급조치를 하거나 연계된 산부인과 병원으로 이송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돌발 상황은 없었나? “유능한 조산사는 산모의 배만 보고도 태아의 체중을 정확히 알아내거나 출산일을 오차 없이 예측한다. 이처럼 숙달된 기능을 발휘하기에 돌연한 사고가 발생할 수 없는 거다. 게다가 조산원에 오기 전에 산모들은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 등으로 충분한 사전 점검을 한다. 따라서 애초에 문제 발생의 소지가 없다. 매우 드문 경우지만, 산모나 태아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을 때엔 아예 받지 않는다.” 신조차 실수를 한다지? 가령 당신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는 없었는지, 그걸 묻는 거다. “그런 사고가 났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문을 열고 있겠나?(웃음) 전반적인 상태가 좋은 산모들이 조산원을 찾아오고, 상태가 위험해 제왕절개 등이 필요한 산모들은 산부인과로 간다. 조산원에선 사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일체의 난폭한 분만을 배제해 조산원은 산부인과와 달리 전적으로 자연출산을 한다. 그게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그네인 인간의 생태에 알맞아서다. 자연출산이란 가정에서 분만을 했던 그 옛날의 출산 관습을 본으로 삼는 방식이다. 옛적의 마을엔 아기를 잘 받는 할머니들이 하나쯤은 흔히 있었다. 고대부터 존재한 ‘산파’가 쪼르르 달려와 출산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 산부인과 병원의 출현과 활갯짓으로 풍속이 싹 바뀌었다. 대체로 1970년대부터 대부분의 산모들이 산부인과 의사의 기술과 의료 시스템에 출산을 맡기기 시작했다. 엄순자 원장은 이와 같은 풍습의 정착에 애석함을 느낀다. 자연출산으로 회귀하는 게 섭리에 맞다고 본다. “여러 나라의 조산사들이 모이는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해보면, 선진국에선 병원에서의 출산보다 자연출산을 선호하고 지원하는 경향이 뚜렷한 걸 알겠더군.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이미 오래전부터 임산부의 99%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지금도 99%가 그렇게 한다.” 산부인과 출산을 선호하는 이유는? “갖가지 의료 장비와 약물이 완비돼 더 안전하다고들 본다. 촉진제 주사나 무통 주사로, 또는 마취를 통해 한결 편한 분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거다. ‘하다 하다 안 되면 까짓 것 제왕절개로 낳지 뭐! 괜히 조산원에서 생고생할 게 뭐야?’ 다들 그런 생각을 한다. 조산원보다 저렴한 비용도 고려하는 것 같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판단은 합리적인 것 같다. 아닌가? “안전하기는 조산원도 사실상 마찬가지다. 조산원과 산부인과의 가장 다른 점은 조산원은 응급상황 외에는 약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무통 주사나 촉진제가 산모와 아기의 건강에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산원에선 흡입분만도 하지 않는다. 일체의 난폭한 분만을 배제한다. 이러한 특장이 자연출산의 미덕이며, 산모는 물론 아기의 인권과 건강한 심신을 보장하는 방법이다. 자연출산의 이러한 지향에 대한 공부와 이해, 철학이 있는 산모들이 조산원을 찾아오는 것이고.” 산모들이 심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굴욕 3종 세트’라는 게 있더라. “면도를 통한 사전 제모, 관장, 내진, 이 세 가지에 산모들은 심한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조산원에선 이것들을 하지 않는다. 분만 직전 미리 회음부를 절개해두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가장 자연스러운 출산을 구사하는 거다.” 아기가 나오자마자 번호표를 매단 바구니에 담아 신생아실로 옮기는 산부인과의 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조산원에선 산모와 신생아를 떼어놓지 않는다. 캥거루 케어라고, 분만 직후 아기를 엄마의 배 위에 밀착시켜 스스로 젖꼭지를 찾게 하고, 긴 스킨십을 하게 해준다. 이 과정에는 아빠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이와 같은 가족적 유대 맺기는 출산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되고 강화된다. 산모와 아빠가 함께 물에 들어가 출산하는 수중분만을 통해 이 유대감은 극에 달한다. 수중분만을 하는 케이스는 많지 않지만.” 요즘은 산부인과에서도 ‘자연주의 출산’을 표방한다. “일부 병원에서 그리하지만 여차하면 용이한 분만을 위해 관행적인 의료 시스템을 바로 동원하는 걸로 알고 있다. 조산원의 자연출산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통이 격하게 오더라도 호흡법으로 고통을 줄여주며, 끊임없이 기다린다. 병원에서처럼 서두르지 않는다는 거!” 그녀는 아기 낳기를 충분히 뜸들이고서야 제대로 밥이 익는 일에다 빗댄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이게 건강한 출산의 비결이란다. “산모의 안전과 건강은 물론, 이상적인 상황에서 아기가 나올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려줄 줄 알아야 건강한 출산이 가능하다. 이 기다림의 과정에서 실로 신비한 경험도 했다. 가령 역아(逆兒, 거꾸로 자리 잡은 태아)의 경우 산부인과에선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마련이지만, 나는 역아가 스스로 바른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한번은 무려 6일간 기다리자 드디어 태아가 자세를 바로잡더라. 참으로 경이로웠다.” 산모도 조산사도 꾹꾹 눌러 견디는 기다림이 있고서야 신생의 환한 아침이 온다. 아프고 서러워도 기다릴 줄 알아야 사랑이라 했던가. ‘전쟁’에 가깝다는 출산의 압박감을 기다림으로 완화해 이윽고 평화로운 지평에 도달하는 이치. 이 기다림의 묘미야말로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거 아나? 뱃속의 아기는 천재라는 거!” 정말로? “산부인과에선 산모의 골반이 좁아 아기의 머리가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엔 별수 없이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아기가 결국은 자력으로 빠져나오더라. 좁은 골반의 폭에 맞춰 아기 스스로 제 머리통을 길쭉하게 늘려 무사히 빠져나오는 거다. 그러곤 바로 머리 모양이 원상회복된다. 이게 천재가 아니고선 가능치 않은 일이라는 얘기다.(웃음)” 어떤 상황에서도 순산을 거두는 당신도 보통이 아니다.(웃음) “때로 과한 칭찬을 듣곤 했다. ‘원장님에게서 후광이 비쳤어요. 신의 손길을 느꼈어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벅차게 뛰더라. 그러나 난관을 견뎌내고 무탈한 출산을 하는 산모보다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아기 역시 위대하다.” 그녀는 자기의 조력으로 2대에 걸쳐 출산을 한 이들을 잊지 못한다. 차후 3대로 이어지는 출산을 돕고 싶다지. 한 20년은 기다려야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야생처럼 당당한 자연출산의 조력에 도가 튼 사람의 꿈이 이렇게 야무지다.
- 2021-04-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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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펀드 선택, 6가지 기준 따져보고 결정하기
- 펀드를 통해 노후준비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 연금저축펀드 설정액은 2019년 말 기준 14.5조 원으로 2014년 6.5조 원에 비해 6년 간 2배 규모 이상 크게 증가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후준비의 중요성이 커지는 데다 저금리 기조가 심화되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연금저축펀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만큼, 그에 따른 위험이 뒤따른다. 노후자금처럼 장기간 운용을 목표로 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연금펀드를 선택하는 6가지 기준에 대해 살펴보자. 자료 출처 및 도움말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김은혜 책임연구원) #1 나의 투자성향에 적합한 펀드 가장 좋은 펀드는 나에게 맞는 펀드다. 아무리 높은 수익의 펀드라도 본인의 투자성향에 맞지 않는다면, 적합한 펀드라고 할 수 없다. 투자성향이란 수익 및 투자위험에 대한 본인의 기대수준을 말한다. 높은 수익을 위해서라면 손실을 감내할 수 있는 ‘위험선호형’과 수익은 낮더라도 손실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위험회피형’ 투자자에게 맞는 연금펀드는 다르다. 투자성향은 증권사 등 금융회사 홈페이지나 지점에 방문하면, 간단한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진단결과에 따라 공격투자형, 적극투자형, 위험중립형, 안정추구형, 안정형 등으로 구분한다. 투자성향에 따라 투자 가능 펀드가 펀드위험등급에 따라 제한되므로, 나에게 맞는 펀드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 수익률이 비교지수 대비 높은 펀드 수익률은 펀드 선택 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과거수익률은 미래성과를 보장하지 않으므로 과거수익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좋은 성과를 꾸준히 거둔 펀드라면 과거수익률이 투자결정에 참고자료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펀드수익률은 최근 1개월, 3개월 반짝 수익률이 아니라, 3년 이상 수익률 추이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장기 안정적인 수익 추구가 중요한 연금펀드의 경우 더욱 그렇다. 3년 이상 연환산 수익률이 목표수익률을 넘어선다면, 펀드가 비교지수(BM,시장지수) 대비 성과가 양호한지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A, B 펀드 수익률이 10%로 같을 때, A 펀드의 비교지수 수익률이 15%, B 펀드의 비교지수 수익률이 5%라면, A 펀드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부진하고, B 펀드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3 위험수준이 동일유형 대비 낮은 펀드 수익률만큼 중요한 것이 펀드의 위험수준이다. 대표적인 위험지표는 표준편차다. 표준편차는 수익률의 변동성을 측정한 값으로, 표준편차가 작을수록 수익률의 변동성이 작고, 클수록 변동성도 크다. 단, 표준편차가 낮은 펀드가 반드시 우량 펀드라고 할 수는 없다. 변동성이 낮아지면, 기대수익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펀드에 투자할 때는 기대수익과 위험수준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위험 대비 수익 측면에서, 위험수준이 같다면 수익이 더 높은 펀드, 수익이 같다면 위험수준이 더 낮은 펀드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펀드의 표준편차는 아직 펀드투자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펀드 투자설명서, 판매사 홈페이지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일유형의 연금펀드 수익률이 비슷하다면, 표준편차가 더 낮은 펀드가 장기투자 측면에서 유리하다. #4 운용규모 50억 원 이상, 자금유입이 계속되는 펀드 펀드의 운용규모는 효과적인 자산 운용에 중요한 요소다. 운용규모가 작으면 분산투자를 충분히 실행하기 어렵고, 상대적으로 관리가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펀드 설정 후 3년이 지나도 운용규모 50억 원 미만의 소규모펀드라면, 장기투자펀드로써 운용전략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한편, 운용규모가 과도하게 큰 펀드도 경계해야 한다. 공모주, 중소형주 등 특정 대상에 투자하는 펀드는 운용규모가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펀드 고유의 색깔을 잃기 쉽다. 펀드 자금의 유입 추세도 살펴봐야 한다. 자금유입이 계속된다면 큰 문제없지만, 자금유출이 계속되는 펀드라면 투자를 재검토한다. 환매가 계속되면 펀드의 보유자산을 어쩔 수 없이 매도해야 해 수익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5 펀드매니저 교체가 잦지 않은 펀드 펀드매니저의 잦은 교체는 투자자의 입장에서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펀드매니저가 자주 교체된다는 점은 펀드 운용상의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펀드매니저가 교체되면 일반적으로 포트폴리오 교체가 뒤따라 운용전략이 이어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장기 안정적인 연금펀드 투자를 위해서는 펀드매니저 교체가 잦지 않은 펀드, 또는 펀드매니저 교체로 부터 영향을 덜 받는 펀드, 즉. 특정 매니저의 역량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명확한 운용 철학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춘 펀드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펀드매니저 교체 내역은 패당 펀드의 투자설명서 또는 금융투자협회 전자공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펀드매니저 검색을 통해 운용 이력도 살펴볼 수 있다. #6 펀드평가등급 상위 펀드(1~2등급) 펀드 투자 시 체크리스트를 직접 챙기기 어렵다면, 펀드평가사의 펀드평가등급을 참고면 된다. 국내 대표적인 펀드평가회사인 제로인, 에프앤가이드, 한국펀드평가에서는 1등급부터 5등급까지 펀드평가등급을 매기고 있다. 펀드평가등급은 펀드를 선택하는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펀드 순자산 10억 원 이상이고, 운용기간이 1년 이상인 펀드를 대상으로, 수익률과 위험수준(변동성)을 동시에 고려하여 펀드평가등급을 산정한다. 성과평가 상위 백분율을 기초로, 상위 10%에 해당하는 펀드는 최고 등급인 1등급에 별 또는 태극마크를 5개를 부여하고, 11~33%는 4개, 68~90%는 2개, 90~100%는 1개를 매긴다. 관심 있는 연금펀드의 펀드평가등급이 1~2등급이라면 상대적으로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지만, 4등급 이상이라면 투자를 재검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까지 연금펀드를 선택하는 6가지 기준에 대해 살펴봤다. 연금펀드를 선택하는 기준은 펀드 선택 시점뿐만 아니라 보유 펀드가 여전히 우량펀드인지 점검하는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다. 우량 펀드라도 운용상의 큰 변화가 있거나, 금융환경 변화에 따라 불량 펀드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후자금마련을 위해 장기투자하는 연금펀드는 선택만큼 관리가 중요하다. 연금펀드를 선택하는 기준에 따라 연금펀드를 선택하고, 최소 1년에 한 번씩 기준에 부합하는지 꾸준히 점검해 나간다면, 연금펀드만으로도 든든한 노후가 가능해질 것이다.
- 2020-11-3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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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택트 보험의 시대
- 3화 언택트 보험의 시대 보험설계사가 서류를 앞에 두고 고객을 설득하는 풍경이 앞으로 낯설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달과 전염병이라는 악재가 보험사의 영업환경을 바꾸고 있다. 코로나 19 발생으로 사람 간의 왕래가 확실히 줄었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거리가 한산하다. 거리의 사람이 줄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임대 문의가 적힌 빈 점포도 늘었다. 부동산114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상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 2분기 서울 상가의 수는 지난 분기에 비해 2만여 개가 줄었다. 왕래 감소로 인한 개인의 심리적 고립감도 문제지만, 이러한 경제적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전염병은 전반적인 경제활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면이 필요한 사업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대면 영업이 90%가 넘는 보험업도 피해갈 수 없었다. 실제로 지난 8월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격상했을 때 생명·손해보험협회는 대면 영업 자제를 회원사에 권고했다. 확진자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전반적으로 대면에 대한 불안이 가속화됐다. 고객들은 보험설계사와의 만남을 꺼렸다. 실제로 A 보험설계사는 “확실히 코로나 이전보다 고객과 만남 횟수가 부쩍 줄었다. 하지만 아예 고객을 안 만날 수는 없다. 만나지 않고 영업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보험업 특성상 고객과 보험설계사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므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으로 인한 비대면은 보험영업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장애물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다. ◆ 비대면에 주목하는 보험시장 그렇다면 보험사의 실적은 어떨까? 영업 환경의 악화와 달리 실적은 선방했다. 금융감독원이 8월에 발표한 2020년 상반기 보험사 실적자료에 따르면 생명보험사의 상반기 수입보험료는 54조 1619억 원이고, 손해보험사의 원수보험료는 47조 8135억 원이다. 생명보험사는 전년 동기와 비교했을 때 3.7% 증가했고, 손해보험사는 6.5% 증가했다. 생명보험의 경우에는 저축성 보험과 퇴직연금이 증가한 덕분이었다. 손해보험은 장기보험의 계속 보험료 유입 효과를 톡톡히 봤다. 실제로 보험업계 관계자는 “지난 기간 동안 보험사가 축적해온 네트워크와 데이터 덕분에 코로나 19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방할 수 있었다”라고 하며 상반기 호재를 분석했다. 다만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지금처럼 코로나 19 상황이 지속하고, 저금리와 저성장 기조가 이어진다면 앞으로 이런 호재를 장담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한편 소비자들은 비대면 거래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10월에 보험연구원이 발표한 ‘보험산업과 진단과 과제-소비자 중심 경영’에 따르면 대면구매를 선호하던 중·장년층도 온라인 보험 구매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졌다. 실제로 향후 온라인 보험 가입 의사와 관련된 조사에서 50대의 83.6%가 비대면 가입 방식을 선호했다. 30~40대의 선호 비중이 87%, 85%인 것과 비교하면 수치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보험사 CEO들도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 보험연구원 동향분석실에서 23개 생명보험회사와 16개 손해보험회사의 CEO(회장 및 사장)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보험사 CEO들은 주요 기회 요인으로 디지털 금융 전환 가속화(48%)와 헬스케어 등 신사업 진출 가능성 확대(25%)를 선택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응 전략으로 비대면 채널의 성장(50%)을 꼽았다. 보험사를 이끄는 경영인들이 비대면을 중심으로 하는 디지털 금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인슈어테크가 뜬다 미래 보험 시장의 대안 중 하나로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인슈어테크’다. 지난해 6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글로벌 핀테크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인슈어테크가 선정됐다. CB 인사이트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분기 기준 글로벌 핀테크 투자의 주요 분야는 인슈어테크, 자본시장, 자산관리, 디지털뱅킹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인슈어테크는 전체 투자의 2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인슈어테크는 보험(Insuranc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다.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기존 보험 산업을 혁신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식이다. 인공지능이 적용된 챗봇을 통해 고객에게 보험계약, 보험금 청구 등의 보험 업무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거나, 사물 인터넷 기술을 활용해서 고객의 건강 상태에 맞는 합리적인 보험요율 적용할 수 있다. 블록체인을 통해 보험금 청구망을 구축하고,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보험 가입현황이나 질병 발생 빈도 등과 같은 다양한 통계정보도 제공할 수 있다. 인슈어테크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CB 인사이트에 따르면 인슈어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는 2012년 3억 4700만 달러에서 2018년 39억 5300만 달러까지 증가했다. 2019년 2분기에는 28억 57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약 159% 성장했다. 미국이 이 산업을 선도하고 있지만 영국, 중국 등 다른 국가에서도 투자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알리바바와 바이두와 같은 인터넷·유통 플랫폼 회사가 보험 산업에 뛰어들어 인슈어테크 시장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슈어테크는 실생활에서 얼마나 유용할까? 대표적인 예로서 레모네이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인슈어테크 기업 ‘레모네이드(Lemonade)’의 보험금 간편 청구 서비스는 버튼 하나면 끝이다. 보험가입자가 앱의 버튼을 클릭해 챗봇을 통하여 보험금을 청구하면 보험사는 AI를 통해 보험사기를 검증한 뒤 즉시 보험금을 지급한다. 한국핀테크지원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레모네이드는 전체 보험금 청구의 25%를 3초 이내에 처리한다. 보험금을 지급받기 위해서 보험사에 전화하고, 보험금을 받기 위해서 번거롭게 서류를 준비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다만 인슈어테크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디지털 소외현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지난해 자본시장연구원에서 발표한 ‘국내외 인슈어테크 시장 현황 및 시사점’에 따르면 일본의 후코쿠생명보험은 업무에 보험료를 산정하는 인공지능 ‘왓슨 익스플로러’를 도입 후 보험 관련 민원접수 직원을 34명 정도 줄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을 100%로 가정할 경우 20대와 30대가 120% 이상인 반면 50대 이상의 경우 평균 64.3%로 20, 30대의 절반 수준이었다. 앞서 본 것처럼 중년층은 비대면 보험 거래를 선호하지만 디지털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서 인슈어테크 서비스를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슈어테크가 매력적인 기술은 맞지만, 관망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도 있다. 코로나 19로 촉발된 비대면 서비스의 활성화로 인슈어테크가 부각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보험시장이 마주한 악재의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보험연구원 관계자는 “인슈어테크는 보험시장이 나아갈 방향 중 하나인 것은 맞다. 하지만 비대면 서비스가 대면 영업을 따라잡는 것은 국내에서 아직 어려운 실정이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보험시장의 전망에 대하여 “코로나 19와 별개로 보험에 대한 수요가 낮아지고, 저금리로 인해 보험료가 상승한다면 보험시장의 전망이 밝지 않다”고 말했다.
- 2020-11-0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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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경색 '혈관 재개통 시술', 골든타임 지나도 효과적
- 골든타임이 중요한 뇌경색 치료에서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은 증상이 나타난 뒤 10일까지도 치료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 김범준 교수팀은 뇌경색 환자 중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을 받은 환자와 약물치료를 받은 환자의 신체기능장애 정도를 비교해 이 같은 연구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뇌졸중은 뇌로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히거나 뇌혈관이 터져 뇌에 손상이 오고 신체적 증상을 야기하는 질환이다. 뇌졸중은 크게 뇌경색(허혈성 뇌졸중)과 뇌출혈(출혈성 뇌졸중)로 구분하는데, 이 중 뇌경색은 혈액 및 산소공급을 받지 못한 뇌세포가 괴사하고 죽는 경우에 해당한다. 문제는 죽어 버린 뇌조직은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살릴 수가 없다.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막힌 혈관을 열어 혈류를 공급하는 게 치료의 핵심이다. 막힌 혈관을 열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으로는 정맥에 혈전 용해제를 투여해 혈전을 녹여내는 ‘정맥 내 혈전 용해술’이 있다. 하지만 이 치료법은 혈전 용해제가 혈관 속에서 작용하고 효과를 지속하는 시간이 짧아 혈전의 양이 많거나 큰 혈관이 막힌 경우 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이 동맥으로 직접 관을 삽입해 막힌 뇌혈관을 찾고, 혈전을 제거하는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이다. 급성 뇌경색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뇌경색 치료의 골든타임인 증상 발현 후 6시간 안에 혈관을 재개통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부터 최근에는 16시간 혹은 24시간 까지도 치료가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결과들이 계속돼 도출되는 상황이다. 이에 연구팀은 뇌경색 증상 발생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도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이 효과적 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워 연구를 진행했다. 우선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분당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뇌졸중 환자 8032명의 데이터를 확인했고, 증상이 발생한 뒤 16시간에서 최대 10일까지 경과된 후 내원한 대혈관 폐색 뇌경색 환자 150명(평균 연령 70.1세)을 대상으로 치료 예후를 분석했다. 연구 대상자 150명 중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을 받은 환자는 총 24명이었으며, 그 외 126명은 항응고제 및 항혈소판제제 등의 약물치료를 받았다. 치료방법에 따른 두 그룹의 예후를 확인하기 위해 신체기능장애를 평가하는 수정랭킨척도(mRS, modified Rankin Scale) 점수를 비교했다. 분석 결과, 혈관 재개통 치료 그룹에서는 54.1%, 그렇지 않은 그룹에서는 33.3%가 기능적인 독립성을 의미하는 mRS 0-2점 수준에 도달했다. 두 그룹의 기초 특성 차이를 통계적 기법으로 보정한 결과에서는 기능적 예후가 개선돼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될 확률이 혈관 재개통 치료 그룹에서 11배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에 혈관 재개통 치료를 받은 환자는 뇌출혈 발생 위험성이 4배 높아 혈관 재개통 치료의 주요 합병증인 뇌출혈에 대한 위험성을 주의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범준 교수는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은 뇌경색 치료의 골든타임이 지났더라도 10일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장애예방 즉, 치료효과가 유지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연구”라며 “증상 발생 후 많은 시간이 경과했더라도 죽지 않은 뇌조직이 남아 있을 수 있고, 이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혈전을 제거한다면 환자가 겪을 장애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만, 혈관 재개통 치료는 모든 환자에게 적용해 효과를 볼 수 있는 치료는 아니다”며 “뇌출혈과 같은 합병증을 초래할 수도 있는 만큼, 의료진은 이 치료를 통해 환자의 증상이 개선되고 회복 가능성이 높은지 신중히 고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미국 의사협회 신경학 저널(JAMA Neurology, IF 13.608) 8월 10일자에 게재됐다.
- 2020-08-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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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대한 꿈을 꾸다
- 무려 90명의 남성 합창자로 이뤄진 국내 최대의 남성 합창단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단체 이마에스트리. 그 이마에스트리의 창립자이자 음악감독이 바로 지휘자 양재무(61)다.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유학을 떠나 트렌토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귀국,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 가수로 활약했던 그는 작금의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이마에스트리를 이끌고 특별한 공연을 했다. 지난 5월 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코로나19 극복 희망 콘서트’가 그것이다. 엄중한 시국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던 공연이었다. 그를 만나 음악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나오는 와중에 코로나19의 완화를 기원하는 공연들이 조심스럽게 모색되고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방역 선도국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시대의 공연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롤 모델을 시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어버이날을 맞이해 열린 코로나19 극복 희망 콘서트 또한 그러한 기획의 일환이었다. 대한간호협회, 대한의사협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질병관리본부 등 의료진과 가족들을 무료로 초청해 열린 이날 공연에는 배우 양희경의 사회로 양재무 감독이 이끄는 남성 합창단 이마에스트리(I MAESTRI)의 바리톤 고성현, 현악 앙상블 조이 오브 스트링스 등이 무대에 올랐다. 코로나19 극복 희망 콘서트, 공연계의 롤 모델 기대 “코로나19 극복 희망 콘서트는 생활 방역으로 넘어가면서 가능해진 공연이죠. 그동안 사람을 모으기 어려워 큰 공연장에서도 취소된 공연이 많았어요. 지방의 많은 문화회관, 극장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죠. 모두가 처음 겪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을 통해 예술의전당에서 ‘이렇게 하면 된다’는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게 있었죠.” 예술가다운 굵고도 시원시원한 인상의 양재무 감독은 코로나19 극복 희망 콘서트에서 60명의 합창자들을 동원해 편곡한 오페라 가곡들과 강산에의 ‘명태’, 양희은의 ‘상록수’ 등을 들려줬다. 이마에스트리의 총 멤버는 90명. 이 정도 규모의 남성 합창단은 전 세계에서 이마에스트리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멤버들 개개의 면모도 오페라 주역 가수를 맡을 정도의 국내 최정상급 성악가들이다. 그래서 이름에 마에스트리가 붙었다. 이마에스트리는 ‘장인들’을 뜻하는 용어로 이탈리아어 ‘마에스트로’(maestro)의 복수형이다. ‘마에스트로들이 모였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의 음악으로 통하게 하고 싶다 지금 케이팝(K-POP)은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19 사태의 대처 성공 덕분에 국격도 올라간 상태. 이마에스트리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프로페셔널함과 독보적인 규모를 보면, 클래식에서도 한류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케이팝 덕분에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네임 밸류가 높아졌어요. 덕분에 저희 밸류도 함께 상승하는 중이죠. 그리고 코로나도 그래요. 유학을 갔다 온 이탈리아에서도 제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예요. 시장이 편지로 마스크와 진단 키트를 요청하더군요. 그 정도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어요. 예술의 본토인 유럽에서도 그런 영향이 있을 정도니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여러 분야에 좋은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도 좋은 콘텐츠로 유럽에 접근하면 좋을 것 같고요.” 6월 18일 예술의전당에서 정기공연을 앞두고 있는 이마에스트리가 창단 15주년을 맞이했다. 긴 시간 동안 이 독특한 단체를 지휘해 온 그에게 소회를 물어봤다. “모여서 뭔가 하다 보면 좋은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협회는 아니지만 연주회를 같이 해보자는 취지로 모였죠. 창단 멤버는 45명이었는데 사실 이렇게 많이 모이기가 힘들어요. 우선 어려운 점은 모두가 개성이 강한 분들이라는 데 있죠. 부딪치는 부분들 튜닝하고 서로 양보하고 연주의 솔로 부분을 누가 맡느냐도 많이 생각해야 했어요. 두 번째로는 경제적 어려움이에요. 연습실도 없이 개인이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하다 보니 그런 어려움이 하나하나 해결되더라고요. 워낙 없는 콘텐츠였기에, 저희가 럭키했던 거 같아요.” 적극적인 편곡이 감동을 만든다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 가수들이 남성 4부 합창을 한다는 건 언뜻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그는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합창단이라고 소개했다. 이마에스트리처럼 대규모 인원으로 할 수 있는 음악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양 감독이 편곡을 맡았다. 그런데 그렇게 대규모 남성 합창곡으로 편곡된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하자 그 자체가 차이이자 이마에스트리의 특징이 됐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청산에 살리라’는 굉장히 좋은 곡인데, 간주의 역할이 약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모차르트, 베르디 등이 사용했던 테크닉을 넣어서 편곡을 가했죠. 또 ‘비목’ 같은 경우는 이름 없는 전사자이지만 살아 있을 때는 용맹한 군인이었으리라 생각해서 ‘전선을 간다’라는 곡에서 남자 휘파람 소리를 전주에 넣어 편곡을 했어요. 어렸을 때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보며 휘파람으로 부르는 군인들의 노래가 가슴에 와 닿았는데 그게 모티프였죠. 그렇게 편곡된 ‘비목’을 들려주니 군대 갔다 온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게 되고, 아련함과 용맹함을 함께 아우르는 버라이어티한 결과가 나오더군요.” 그는 이마에스트리의 공연에 대한 대중의 만족도가 200%는 된다며 자부심을 느끼는 듯 말했다. 여러 나라에서 공연해본 결과 어느 나라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감동하는 걸 확인해서다. 슈베르트가 섰던 무대에서 ‘마왕’을 연주하다 “다녀온 해외는 열서너 곳 정도. 연주는 스물세 번 정도 했죠. 그때마다 매우 많은 걸 전달하고 왔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인의 연주력이 그렇습니다. 빈에서 슈베르트의 ‘마왕’을 세계 최초로 남성 4부 앙상블로 노래한 적이 있어요. 빈은 음악적 프라이드가 높아서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하는 게 걱정됐었죠. 그런데 어차피 넘어야 할 강이라면 넘어가자는 판단으로 하게 됐어요.” ‘마왕’은 시벨리우스가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게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던 양 감독은 남성 4부 합창으로 만들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한다. 그리고 편곡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헨델의 ‘메시아’도 성경 구성 그대로 하지 않고 헨델이 생각했던 오라토리오 구성에 맞도록 내용을 재구성했거든요. 그래서 ‘메시아’를 보면 내용이 구약과 신약을 왔다 갔다 해요. 저도 ‘마왕’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재배치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편곡을 했죠.” 결과는 성공이었다. 새롭게 편곡된 ‘마왕’에 빈의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10여 분간 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노래, 세계에 소개하고파 양 감독은 1960년생, 올해 예순한 살이다. “수염 깎으려고 거울 보면 가끔 나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그런데 나와서 일하며 시간에 쫓기다 보면 전혀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음악가들은 연습에도 자기연마에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려 있어야 해요.” 그의 열린 생각은 철저하게 개방적이란 점에 있다. 이마에스트리 멤버들 또한 전 세계에서 유학하고 온 사람들이라 다양한 언어와 장르가 소화 가능해 레퍼토리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는 노사연의 ‘만남’, 조용필의 ‘친구여’ 등이에요. 그리고 ‘꿈’. 조용필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쓸 수 있었는지…. ‘꿈’을 L.A.에서 연주했는데 ‘우리도 꿈을 갖고 왔다. 여러분도 꿈을 갖고 L.A.에 왔을 텐데 참 어렵다. 행운이 있길 바란다’라고 말하니 L.A. 교민들이 울었어요. 그들을 보며 우리도 울었죠. 조용필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그분 노래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세계화하고 싶어서예요.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면 세계어로 번역되거나 가곡화될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는 이탈리아 가곡 악보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좋은 가곡들을 공유하자는 차원에서였다. “성악가는 누구나 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제가 출판한 악보를 보면서 공부하고 있을 거예요. 경제적으론 하나도 도움이 안 되지만.(웃음) 그런데 어쩌면 저는 이렇게 돈을 못 벌까요?(웃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지금까지 부족하지는 않았어요. 흡족하진 않은데 모자라서 빚을 지거나 하진 않았으니까요.” 모두가 감동할 수 있는 공연 위해 도전 양 감독은 자신을 돌아볼 때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음악적 아이디어라고 밝혔다. ‘마왕’을 기획한 것처럼 모두가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데 자신의 강점이 있다는 그의 진단이야말로 계속해서 ‘큰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베토벤이 8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9번을 작곡할 때까지 11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죠. 그렇게 만들어진 9번 교향곡의 궁극적 메시지는 인류가 하나가 되어 환희를 부르라는 것이었죠. 그 메시지야말로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그런 걸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언젠가는 통일이 될 텐데 무엇으로 우리의 감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역시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싶죠.” 그는 야외에서 공연하다 보면 우리나라 관객이 아직 감상의 문화, 보기만 하는 문화에 갇혀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걸 다 같이 합창하는, 함께 노래하는 문화로 만들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연주자와 관객들이 함께 감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코로나 극복 음악회를 전국 단위로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 성과를 통해 세계 무대로 나갈 수도 있고요.” 평화를 위한 판문점에서의 연주, 중국과 도쿄에서의 연주, 평양에서의 음악회를 꿈꾸는 그의 비전은 아직 할 과제가 많아 보였다. 그는 그 꿈을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전진할 계획이다. “쉬어야 창의가 솟는다는 말에는 동의 못하겠어요. 머리가 안 좋으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제가 그 경우거든요.(웃음) 쉬면 안 되는 타입이에요.” 이렇게 늘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인 그이기에 나이 듦이 걱정스럽기보다 기대가 된다.
- 2020-06-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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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홍신 “미워하지 말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자”
-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의 작가, 성공적인 의정 활동을 수행한 국회의원, 그리고 감사와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김홍신의 다양한 삶의 여정은 여러 가지 명칭들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그는 무엇보다도 다시 만년필을 잡고 원고지와 마주한 작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든 외부 활동이 불가해지자 그는 멈췄던 장편소설과 수필집을 완성하기로 했다.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빨갱이’로 몰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장편소설 ‘적인종’의 집필, 그리고 ‘월간 에세이’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수필집 출간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코로나19 여파로 역경의 연속인 삶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울림을 들어봤다. 방송에서 자주 봐서 익숙한 김홍신 특유의 인자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외모는 여전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바이지만, 그의 삶은 그런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저 김홍신 인생이 순조롭다고 여기실 테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는 않죠. 모든 삶이 순조롭다면 지구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음이 있고 고통과 고뇌가 있고 실수와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죠.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신화와 역사가 될 수 없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 그는 원래 의대를 가고자 했지만 떨어지면서 재수를 해야 했다. 그때 느낀 울분과 절망은 스스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결국 재수를 해서 들어간 건국대학교 국문과. 취업도 안 되고 할 일이 없다 하여 타과 학생들이 ‘국물과’라고 부르는 학과였다. “그때 집안이 망해서 휴학까지 했죠. 그래서 데뷔도 늦었어요. 그나마 당시에 가장 권위 있던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지만 날 이끌 사람이 없었어요. 종합대학 중 문인 숫자가 가장 적은 학교가 건국대였으니까요. 내 소설이 뛰어났다면야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죠.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떨어지니 ‘다 지들끼리 해먹는다’ 싶었고…. 물론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핑계를 대야 내가 견디잖아요? 유명한 소설가들을 비판하면 비평력이 있다고 착각하던 때였죠.” 절망의 청춘을 지나 성숙해지다 그의 날선 비판 대상에는 당대의 대표 소설가였던 최인호도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불만만 가득한 야인으로 살던 시절 끝에, 마침내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식간에 인기 작가가 된 그는 이제 다른 사람 작품의 심사까지 맡게 됐다. “그때 최인호 형과 같이 심사하게 됐는데, 너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했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으려니까요. 그래서 ‘선배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라고 먼저 말했죠.” 최인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김홍신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다 털어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을 비판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나를 끌어안는 거예요. ‘내 앞에서 최인호를 비판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너무 고맙다’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을 반성하고 속죄하고자 한 김홍신이나 그런 모습을 보고 기탄없이 받아들인 최인호나 둘 다 넉넉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서로 돈을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 결국 의형제를 맺는다. “그때 인호 형이 한 얘기가 ‘지금 김홍신을 시샘하는 사람이 많다. 그걸 견뎌야 한다.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바른 걸음으로 걸으며 세상과 너무 타협하지 말라’는 거였죠.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는걸(웃음). 온갖 협박 공갈에 편할 날이 없었어요.” 우리 어딘가에 있는 의인들을 도와줘야 그의 고난은 작가 생활을 거쳐 국회의원 시절로도 이어진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한 그는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계속 주변과 싸워야 했다. 15대 국회에서는 ‘이틀만 근무하는 5월에 한 달 치 세비를 받는 건 혈세 남용이라며 세비거부 운동을 벌여 동료 의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2003년에는 당 지도부에 의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강제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치권에서 배척받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진심이 닿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5, 16대 연속 의정 활동 1위 국회의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증거였다. 그는 정치에 대해 싸울 때는 침묵하지 않고 자신만의 할 말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몰아내고 영웅이 될 만한 사람들을 쳐냈어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라고 진단했다. 자기가 역사에 남고 존경받으려면 남을 칠 수밖에 없다는데, 그건 상대를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받음을 잊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은 일궜는데 기쁨을 잃었어요. 배고픔은 해결했는데 배아픔은 해결 못하고 있죠.” 그래서 그는 시대를 이끄는 현자와 의인들은 시대가 만들어주고 옹호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구석구석에 계십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끝까지 진실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 우리 사회 곳곳에 계세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대구의사협회장의 호소문에 응답하는 의사들의 모습도 그런 것이었다고 봐요.” 굴곡 많은 시련을 어떻게 견뎌왔나 얘기가 자연스럽게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로 들어가게 될 시점이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은 끝나기는커녕 미국과 유럽 등지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 거대한 역병의 파도에 쓸려 심신이 고달프고 막막하며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처럼 굴곡진 삶에서 김홍신은 누구보다도 그런 상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히 지옥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시기는 소설 ‘대발해’를 쓸 때였다. 시작은 법륜 스님의 권고였다. “국회의원, 장관 열 번 하는 것보다 발해 역사를 알리는 게 할일 아닙니까”라는 말에 동의하며 시작된 ‘대발해’ 집필은 2004년 말부터 3년간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며 피폐하게 살게 만들었다. 그때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점도 그를 힘들게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치아와 눈, 허리에 문제가 생겼죠. 불면증도 생겼어요. 자다가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 메모해놓고 잠을 자야 했으니까요.” 소설은 마침내 2007년 여름에 발표됐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요로결석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스카프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연이 있어요. 소설을 쓰면서 밖을 안 나가다 보니 햇볕 알레르기가 생겨서, 햇볕에 노출되면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더군요. 얼굴은 약을 바르면 됐는데 목은 치료가 안 돼서 스카프를 두르게 된 거죠. 그리고 지금도 가끔 손에 마비가 와요. 원고지 만이천 장을 썼으니까요. 교정만 7개월을 봤고요.” 우리는 역경을 거치면 반드시 더 강해지는 민족 김홍신은 ‘대발해’를 발표한 후 7년 동안 소설을 못 썼다. 소설 집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려고만 하면 또 아프다 쓰러지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발해’로 소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끝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소설을 못 쓰겠다’는 두려움이 집필에 대한 부담감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다 그동안 사회비판소설, 역사소설을 주로 썼으니 사랑 이야기를 쓰면 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쓴 게 ‘단 한 번의 사랑’이었죠. 그 이후에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쓸 수 있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적인종’을 집필할 수 있게 된 거죠.” 소설을 쓰다 죽을 뻔한 경험을 치른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108배를 하며 세상, 민족, 평화, 북한 동포, 인도 불가촉천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자신이 기도한다고 세상이 변할까마는, ‘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와 같은 희망의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품앗이 정신이 대단한 민족이에요. 대구만 봐도 모여드는 의사, 간호사, 봉사자들 보세요. 대구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이 달빛동맹으로 교류하는 걸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보려고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걸 보면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토록 남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안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 반드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DNA가 있잖아요.” 나를 존중하고 세상을 존중하라 그는 잘 늙으려면 스스로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존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 공기, 풀, 햇빛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과 세상을 위해 깨달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고 말한다. 이는 김홍신 자신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사랑 못할지언정 그에 대한 미움은 없어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면 내 전생의 어머니였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하면 내가 편안해져요.” 그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적 사연이 있다. 과거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를 잡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재작년에 사망했다. 그는 그의 부고 소식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해서 노트에 붙여놓고 그 옆에 그와 자신의 사연을 썼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방향을 향해 108배를 했다. 생전에, 그는 김홍신에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김홍신은 그런 그를 보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문이 있었다. ‘내가 과연 그를 용서한 걸까?’ 그래서 108배를 해보며 계속 되물었다. 답은, 용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의 평화를 만드는 마음의 다짐 “지금 제가 찬 시계는 흔들어줘야 가는 오토매틱 시계예요. 이틀 가만 놔두면 죽어요. 이 시계처럼 인생도 자꾸 흔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남한테는 ‘흔들어주세요’라고 말해놓고 자신이 안 하면 안 되겠죠.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흔들어야 해요. 명상과 기도, 고맙다는 감사 등이 그 방법들이에요.” 그는 요즘 모두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진달래, 홍매화도 스승이다. 자신을 기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운 사람이 생겼다고 쳐요. ‘에휴…’ 하다가도 ‘내가 미워하면 안 되지. 잊어버리자’ 하며 다잡습니다. 그리고 저녁기도할 때 ‘내가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반성합니다. 그러면 내가 편해져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제 스승인 거죠.” 물론 무조건 다 그의 말처럼 살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계속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깨달음과 평화가 있음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김홍신이란 이름을 부를 때 기뻤으면 좋겠어요. 아주 기쁘진 않더라도, 싫지 않고 밉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려고 하니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그걸 해내는 게 기쁨이 될 수 있는 거죠.” 마음 한쪽이 아련히 아팠다. 그렇지만 그와 이야기하면서 지금 ‘장총찬’이 절실한 이 시대에 김홍신이라는 문인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무릎을 탁 치며 늙음과 낡음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축복이 스며들었다.
- 2020-04-0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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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드 웨지 최초로 개발한 ‘진 사라젠’
- 날씨가 화창한 날에 백사 벙커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해변에라도 온 기분이 든다. 물론 보고만 있을 때 얘기다. 일단 그 안에 빠지면? 낭만은 단숨에 사라진다. 모래 색이 하얀지 검은지 감상할 새가 어디 있으랴! 벙커 탈출이라는 숙제가 눈앞에 있는데. 아주 옛날부터 벙커를 이렇게 멋지게 만든 건 아니다. 벙커가 골프장 디자인 중 핵심이 된 것은 불과 몇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고? 과거에는 벙커가 지금처럼 멋지게 꾸미는 대상이 절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럼 벙커는 뭐였냐고? 코스 내 쓰레기장 비슷한 곳이었다. 옛날엔 벙커에 온갖 잡동사니를 다 쓸어 넣었다. 퍼팅 그린에 있던 낙엽도 당연히 벙커로 밀어 넣어 치웠다. 코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꽁초나 담뱃갑을 버리기도 했다. 간식으로 통조림을 먹고 빈 깡통을 던져 넣기도 하고. 신사와 숙녀가 하는 스포츠가 골프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신사 숙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대한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양이다. 그 시절 그러니까 벙커가 쓰레기통이나 다름없었던 시절, 벙커에 빠지는 건 악몽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참고문제 하나 나간다. 벙커 속 낙엽이나 나뭇가지는 치울 수 있을까? ‘치울 수 있다’가 정답이다. 2019년 1월부터 적용한 새 골프 규칙에 따라 가능하게 됐다. 그 전에는? 치울 수 없었다. 그러니 벙커 속으로 볼이 들어가 낙엽이나 나뭇가지 등에 닿으면 어쩔 수 없이 그냥 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벙커가 악몽이었던 이유는 또 있다. 지금 같은 ‘웨지’가 없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다른 클럽보다 짧고 클럽 페이스가 누운(하늘을 더 많이 보는) 클럽은 있었다. 그런데 지금과는 달랐다. 뭐가 달랐냐고? 바로 웨지 바닥에 바운스가 없었다. 바운스가 뭐냐고? 웨지 밑바닥을 보면 엉덩이처럼 통통한 부분이 바운스다. 바운스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안다면 중상급 골퍼다. 바운스가 있으면 클럽이 땅속에 박히지 않는다. 내리 찍어도 적당히 땅이나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가 튕겨 나온다. 그 덕분에 벙커에서 모래를 튕겨낼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웨지에 바운스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냐고? 웨지 날(리딩 에지)로 모래를 아주 적당히 잘 쳐야만 했다. 조금만 뒤를 치면 벙커 탈출에 실패했다. 볼 뒤를 바싹 치려고 하다가 볼부터 맞히면? 홈런이 났다. 그때는 어땠겠는가? 아예 벙커에 넣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는가? 큰 승부는 도저히 벙커를 피하지 못하게 세팅하곤 했을 텐데. 그 시절 지독하게도 벙커샷을 못하는 골퍼가 한 명 있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출중했다. 그의 이름은 진 사라젠(Gene Sarazen). 165㎝에 불과한 단신이었는데도 파워만큼은 대단했다. 그런데 벙커샷은 신기하게 잘 못했다. 그런 그가 벙커샷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샷 자체도 연구했지만 클럽 연구를 더 많이 한 것이다. 웨지 헤드를 이렇게 갈아도 보고 저렇게 붙여도 보고. 그러다가 사라젠은 놀라운 발견을 했다. 바로 웨지 헤드 밑바닥에 쇠붙이를 통통하게 붙이면 벙커샷이 훨씬 쉬워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랬다. 바운스를 최초로 착안한 사람은 바로 그다. 사라젠은 바운스를 붙인 웨지로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벙커에 빠져도 다른 선수처럼 탈출하려고 급급해하지 않았다. 이따금 홀에 가까이 붙이는 벙커샷까지 선보이며 몇 개 대회에서는 우승도 했다. 물론 정글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던 그였으니 ‘바운스 발명’은 비밀에 부쳤고. 그런데 언론이 관심을 갖고 추적한 끝에 그의 벙커샷 비밀을 밝혀냈다. 그러곤 어떻게 됐냐고? 골프용품 업체가 그와 계약을 맺고 바운스를 단 웨지를 판매했다. 그 웨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다른 업체들이 바운스 연구를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 웨지가 널리 퍼진 것이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젠. 그는 어릴 적부터 골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목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일을 돕기를 더 바랐다. 꾀가 많았던 사라젠은 페렴으로 몸이 아팠을 때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의사 처방을 핑계 삼아 틈만 나면 골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는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생의 약점을 두 가지나 극복했다. 그중 하나는 작은 체구였다. 힘이 부족했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장타자가 됐다. 다른 하나는 지독하게도 못하던 벙커샷이었다. 그러나 지혜와 연구로 그 약점도 극복했다. 그러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챔피언까지 됐다. 메이저 대회 일곱 차례 우승. 그리고 지금까지 단 다섯 명밖에 위업을 이루지 못한 커리어 그랜드 슬램(메이저 대회 4개를 한 번씩 다 우승하는 대기록)까지. 이 기록 때문에 미국 PGA 투어에서 39승을 올린 게 오히려 묻힐 정도다. 불가능은 없다. 더 위대한 골퍼가 되기 위해 이름까지 사라젠 제국에서 따와 ‘사라젠’으로 지은 그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1902년에 태어난 그는 너무 아쉽게도 내가 골프가 뭔지도 모르던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 2020-03-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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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건강 두 마리 토끼 ‘숲’에서 잡자
-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알아보려 한다. 이번 호에는 ‘산림’ 분야를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산림복지진흥원, 한국분재조합 최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면서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자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숲을 찾는 도시인이 많아졌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숲해설가, 산림치유지도사 등에 대한 수요가 늘며 관련 자격증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특히 깨끗한 자연을 벗 삼아 유년 시절을 보낸 중장년의 경우 산림 분야에서 제2직업을 찾아 종사하기를 희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싱그러운 숲에서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PART1. 국가전문자격 ‘숲’과 관련해 가장 익히 들어본 자격이 바로 ‘숲해설가’일 것이다. 숲해설가를 비롯해 유아숲지도사, 숲길등산지도사 등을 ‘산림교육전문가’라고 하는데, 이는 국가전문자격으로 관련 양성기관에서 일정 시간 산림교육 전문 과정을 이수해야 취득이 가능하다. 산림교육전문가 양성기관은 전국적으로 숲해설가 31곳, 유아숲지도사 15곳, 숲길등산지도사 7곳으로 산림청 또는 한국산림복지진흥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육기간은 양성기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숲해설가 4~5개월, 유아숲지도사 5~6개월, 숲길등산지도사 2~3개월 정도 소요된다. 대부분 산림교육전문가 취득자가 그다음 단계로 준비하는 자격증이 바로 ‘산림치유지도사’다. 산림치유지도사는 앞서 숲해설가, 유아숲지도사, 숲길체험지도사 자격증을 딴 후 해당 분야에서 3년 이상 종사한 경력이 있거나, 의료·보건·간호·산림 관련학과 학위를 보유해야 한다. 더불어 산림치유지도사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이수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시험 평균 합격률이 1급 33.3%, 2급 53.6%인 것을 감안하면 쉬운 도전은 아니다. 산림교육전문가와 산림치유지도사의 연령별 취득 현황을 살펴보면 중장년 세대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모든 자격에서 50대 취득자 수가 가장 많았고, 60대 역시 타 연령대보다 취득자가 많은 편이다. 관련 종사자들은 “산림치유지도사의 경우 평가시험이 만만치 않은데도 중장년층의 학구열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며 “산림교육전문가 취득 후 실무 경험을 쌓았다면 도전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6월 28일부터 산림보호법 개정으로 나무의사가 병든 나무를 진단하고 농약을 처방하거나 치료하는 ‘나무의사 제도’가 시행됐다. 그동안 비전문가가 부적절한 농약으로 병든 나무를 치료하는 사례가 잦아 나무는 물론 사람의 안전까지 위협받았다. 이번 제도 도입으로 본인 소유의 수목을 직접 진료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무의사나 수목치료기술자가 있는 나무병원을 통해서만 수목진료가 가능해졌다. 이에 국가전문자격인 ‘나무의사’와 ‘수목치료기술자’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나무의사의 경우 올해 3월 제1회 나무의사 자격시험을 시행했는데, 시험이 까다롭고 난이도가 꽤 높다는 반응이다. 시험도 어렵지만 수목진료 관련 전공 이력 등 자격기준을 충족하고, 지정된 양성기관에서 150시간 이상의 교육을 이수하는 등 요건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나무병원을 직접 차리거나 취업하려는 계획이 아니라면, 별도의 요건 없이 양성기관 교육 이수를 통해 취득 가능한 수목치료기술자 자격을 준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PART2. 국가기술자격 일반적인 국가기술자격과 마찬가지로 ‘산림기능사→산림산업기사→산림기사→산림기술사’ 등의 순서를 거치게 된다. 상위 자격으로 갈수록 석사, 박사 등 전문 전공자와 종사자들이 주로 응시하기 때문에 관련 학위나 경험이 없다면 취득 과정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따라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목표를 갖고 산림 분야의 국가기술자격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먼저 산림기능사 과정부터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산림기능사의 경우, 자격증 취득 후 관련 실무에 종사한 연수에 따라 산업기사(1년 이상), 기사(3년 이상), 기술사(7년 이상)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산림기능사 연령대별 시험 합격 현황에서 50대와 60대 이상의 합격자 수가 높게 나타났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50~60대의 시험 합격률은 60%대를 웃도는 수준으로, 합격 인원이 많다고 해서 시험 자체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진로와 적성, 직무에 대해 꼼꼼히 검토한 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PART3. 국가공인 민간자격 ‘수목보호기술자’는 나무의사의 처방에 따라 수목의 병충해 방제, 상처 치료, 영양제 살포 등을 수행한다. 2001년 첫 자격검정시험 시행 후 지난해까지 총 476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한국수목보호협회 홈페이지 기준). ‘분재관리사’ 역시 국가공인 민간자격에 속한다. 2017년 기준 취득자의 77.8%가 50대 이상으로 나타나는 등 중장년 선호도가 높은 자격증이다.
- 2019-06-1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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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치 진단 장비 큐레이, 치과의사들에게 관심
- 아이오바이오가 지난 5월 10일부터 3일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41차 아시아‧태평양치과의사연맹 총회, 제54차 대한치과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 제16차 서울국제치과기자재전시회에 참가해 행사장을 찾은 치과 업계 관계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이오바이오는 이번 2019 APDC·SIDEX를 통해 신제품 ‘큐레이캠 프로(Qraycam Pro)’를 최초 공개했다. 큐레이캠 프로는 지난 3월 광학식 치아우식 진단장치로 2등급 의료기기 허가를 받은 진단 장비다. 이 신제품은 기존 장비보다 고해상 이미지를 자랑하며 경량화까지 이뤄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오바이오는 행사를 통해 검사, 평가, 진단, 치료, 관리로 구분되는 5단계 진료시스템을 강조했다. 전반적 치아 상태를 진단하는 스크리닝과 치아 이상 발견 시 정밀검사를 진행하는 평가가 전문화된 시스템이 정착할 때 진료의 전반적인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 아이오바이오는 5단계 진료시스템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제품이 포함된 큐레이 패키지 상품도 행사를 통해 공개했다. 아이오바이오 윤홍철 대표는 “새로 출시된 큐레이캠 프로와 5단계 진료시스템에 대한 치과의사들의 높은 관심을 실감했다”며 “구강건강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큐레이 기술의 보급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2019-05-1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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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류’ 기인 예술가의 미치광이 같은 예술혼
- 간혹 그의 목소리는 흡사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거친 자욱을 남기며 내려오는 듯했다. 스스로 일류를 넘은 ‘특류’라고 말하는 국내 최고의 전각(篆刻) 작가 진공재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에 쏠린 감정을 타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 근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날선 도끼가 서려 있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과 부패하지 않는 태도로 평생을 살아오며 실력과 배짱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진짜 예술가, ‘58년 개띠’ 세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진공재(陳空齎)를 만나 그의 거친 예술가 삶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차고 넘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고독하고 단호하다. 국내 최고 전각 장인으로 평가받는 진공재 작가를 만나니 흔히 광기의 예술가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서편제’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방랑하던 소리꾼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원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죠. 열네 살까지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머니와 함께였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진공재 작가는 어머니가 사망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날이었다. “다른 집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 집은 내가 불을 피워야 연기가 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집을 떠나보자 하고 1974년에 자전거 팔아 3400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각박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시절이었던가. 1974년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하에서 파낸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밥벌이로 시작한 도장 파기 소년 진공재는 인쇄소, 중국집,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가 경기도 안양에서 도장을 파기 시작한 것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새기는 걸 좋아했죠. 학교에선 서기 일도 했었고. 그런데 길에서 도장을 파다 보니 밥벌이는 되는데, 밥만 먹어선 충족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서예를 배웠죠. 독학자습이었어요. 그렇게 서예를 하다 보니 그림이 나오더군요.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씨가 되듯이….”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와 화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시절이 1980년대였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부은, 군부독재 시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눈을 뜬 거죠.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20대 후반이었는데, 사실 대학생도 아니고 학생운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서 도장 파서 먹고사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데모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력만으로 오른 최고의 자리 아이는 198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 일도 안 됐는데 감기, 모세기관지염, 폐렴, 장염까지 온 거예요. 아이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하실에서 살았거든요. 의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짐 챙겨서 전라도로 내려갔죠.” 그는 서예 솜씨 덕분에 전북 도청 고용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병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예술가 기질, 방랑가 기질이 다시 돋았다. “공무원이 내가 갈 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따리 싸서 다시 도장을 파기로 했죠. 1990년에 전주를 떠나 인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서예학원을 개원했는데 3개월 하고 망했어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갔어요.” 처음 도장을 파기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91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 길에서 그는 전각과 서예, 동양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석도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다 썩었잖아요. 서예계도 마찬가지였죠. 문중끼리 다 해먹고….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게 최고상을 준 분이었어요. 성철 스님과 함께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셨죠. 201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제가 담배를 끊었어요.” 전각(篆刻)은 심각(心刻) 예술이다 당시 서예계의 부정부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그는 서예계 인사들이 비리로 구속되고 난리가 나자 소위 ‘혁명’을 하러 협회로 들어간다. 한국청년서예가협회 대표였던 그는 “다 나와라,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자” 하고 외쳤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렸죠. 전부 스승과 제자로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못된 거라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 마치고 나오려 했는데 어떤 분이 ‘네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 그대로 나오면 안 된다, 도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협회에 들어갔죠.” 이때가 그의 공적인 삶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는 중국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채근담’ 1만6600여 자를 새기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도 서예협회 경기도지부장, 서예협회본부 이사, 한국전각학회 감사를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화려한 간판들이 과연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성정이 짐작이 된다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003년 3월 29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먹은 빈 껍데기야. 그런데 벼슬하면 뭐 해먹었다고 똑같이 욕먹고…. ‘여기를 떠나자’ 싶어서 맡고 있던 직위들을 한날한시에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가기로 하고 보따리 싸서 지리산으로 갔죠.” 그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떠났다. 방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끝없는 방랑벽, 다시 떠나다 평생 39번을 이사했다. 지금도 그는 임대사무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정적으로 뭔가 쌓이는 것도 없고 붙잡는 사람도 없고 술맛도 떨어지면 떠나게 되는 거죠.” 어느 곳에서는 202호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본 건물주가 야반도주한 스님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마흔아홉 개인데 ‘202호 스님’도 그중 하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스님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지. 어차피 전기세 받을 때만 볼 테니.” 2005년에는 그의 방랑벽이 해외로도 뻗어나갈 기회가 왔다. 정부에서 독일을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그 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아 행사 일환으로 전각 시연을 보여주고 싶으니 그에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어디를 못 가겠냐, 대신 거기서 작품을 팔 수 있으면 가겠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인데 보름 동안 거기 가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받아주더군요.” 독일은 그에게 좋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작업물을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독일 녹색당 당수도 있었고, 독일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였다.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멋지게 산다 평생을 강렬하게 살아온 그도 이제 환갑이 됐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그가 느끼는 바가 궁금했다. “내 종교는 세 개예요.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까진 새옹지마교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다. 서른 살에서 예순 살까진 천지조화은혜교였죠. 천지가 사람을 절대 굶기지는 않더라. 밥은 주더라. 그리고 예순 살 이후는 안빈낙도교나 믿을까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나이 들어도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요.” 흔히 예순 살이 넘으면 사주팔자도 없다고 한다. 다시 한 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 열네 살까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 일흔네 살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봤다. “앞으로 14년은 황금기예요. 그 이후로는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자신으로 사는 거죠.” 그는 최근 딸 덕분에 아내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갔다 왔다. 거기서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봤다. 자연 속에서, 안나푸르나의 굽이진 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손녀인 하리다.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제부터 오직 전각만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는 인사동에서 자신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총정리해서 집대성하는 전시를 열 계획이다.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 그가 현재 머무르는 곳은 의왕시 청계산 자락. 작업실 이름은 비니루(扉泥陋)다. 사립문 비(扉), 진흙 니(泥), 더러울 루(陋) 자를 쓴다. 한자 음 그대로 비닐하우스로 된 공간이다. 2년여 전 경상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된 ‘심상서화각의향연’이라는 돌판새김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만들고 그동안 28% 이자를 내고 있었던 캐피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싹 갚고 나니 3000만 원이 남았다고 한다. 그 돈을 전부 이 작업실을 만드는 데 썼다. “나는 평생 석도필묵(石刀筆墨)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에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밥을 먹고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어요. 대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에 있었다고 봐요. 나는 삶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예요.”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로… 멀고도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온 그가 삶류 작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밥벌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류라지만 나는 특류다. 자만심 있는 삶류다”라고 말하는 그는 홀로 이뤄낸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그가 평생 안고 있는 석도륜 스승의 말씀이 있다.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눈을 사랑하기로 해놓고 따뜻하길 바란다면 눈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품고 있을 만큼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는 그대로 여겨지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섰기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공재 작가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진공재와 그의 작품들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다시 한 살이 된 그가 스스로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앞으로의 14년. 어떤 작품들로 자신을 말하게 될지 기대가 크다.
- 2019-03-04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