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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어머니를 속여 죄송합니다”
-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 2015-06-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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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준생, 네 맘 안다] 3. 달라진 취업 트렌드와 자식에게 주는 조언
- 경영학을 전공한 지방대생의 한탄이 이어진다.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2년 넘게 100번이 넘는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면접을 본 것은 5번 이하였고, 최종 면접에서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요즘 기업들이 인문계 학과를 선호하지 않으며 지방대생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한다. 50명을 뽑는 대기업 경쟁률이 400 : 1이라고 한다. 생각을 바꾸라고 했다. 400 : 1이 아닌 1만9950명의 탈락과 50명의 합격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기업의 채용 프로세스는 크게 4단계로 이루어진다. 서류전형, 인·적성 검사, 면접, 신체검사이다. 서류전형은 원하는 기업에 주어진 기일 안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한다. 많은 기업들이 스펙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입사지원서를 통해 지원자가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고, 무슨 경험을 했으며, 자신의 기업의 인재상이나 핵심가치에 부합되는가를 확인한다. 인·적성 검사는 지원과 동시에 실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그러나 S그룹처럼 자신들이 개발한 검사지를 통해 별도 일시를 정해 인·적성 검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통상, 서류전형과 인·적성 검사를 통해 최종합격자의 5배수 정도를 면접대상자로 선정한다. 앞 기업의 경우, 2만 명이 지원하여 1만9950명이 이 과정에서 떨어진다. 면접은 1:1면접, PT면접, 집단토론, 최종 임원진 면접으로 이루어지고, 합격자에 한해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이를 통과한 사람이 최종합격하게 된다. 50명 안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다. ◇성장 시대인 1980년대와 저성장 시대인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1950~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 말과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비율은 결코 40%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대학에 입학하는 비율은 90% 수준이다. 1970~1980년대는 성장 시대였다. 지금은 저성장 시대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자신이 입사하고 싶은 회사를 골라 가던 행복했던 시절은 지났다. 기업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시대이다. 요즘 채용 트렌드를 보면 크게 6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이다. 스펙을 안 본다고 하지만, SKY, 포항공대, KAIST출신은 여러 회사에 합격한다. 그러나 수도권 대학의 학생들도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고 있으며, 지방대생은 100번 넘게 떨어졌다는 하소연을 한다. 둘째, 이공계 특정학과 편중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화학, 기계, 전기, 전자, 건축 등 일부 이공계 학과는 독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공계와 인문계 비중이 1970~1980년대에는 인문계가 더 높거나 50 : 50의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이공계와 인문계 비중이 80~90 : 20~10 수준에 있다. 인문계가 선호하는 지원 부서까지도 이공계가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인문계 비경영과의 경우, 고민의 정도는 심해진다. 셋째, 인턴제도의 확대이다. 회사가 면접을 통해 입사 지원자를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을 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인성이 안 좋은 직원이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크다 보니,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입사 여부를 판단하는 인턴제도를 선호한다. 과거에는 특별한 일이 없이 인턴 제도를 운영했다면, 요즘은 도전과제를 부여하고 다각적 측면에서 함께 할 사람인가를 평가한다. 넷째, 면접의 강화이다. 1980년대에는 일반적인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직무보다는 회사에 대한 질문이 많았고, 입사지원자 입장에서는 그 회사와 하고 싶은 직무에 대해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입사한 사람들은 PC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인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의 지식으로 면접에 임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동아리를 만들어 개인면접, PT면접, 집단토론에 임하는 예상 질문을 만들어 완벽하게 외운다. 어느 지원자는 예상 문제 100개를 선정하여 답안을 작성하고 외우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모의 면접도 수차례 실시했고, 같은 회사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등의 많은 노력들을 한다. 면접을 하다 보면, ‘내가 면접관이 아니고 지원자였다면, 나는 100%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요즘 지원자는 면접에 대한 엄청난 준비를 하고 온다. 다섯째, 경력사원 채용의 확대이다. 내 후배는 내가 채용하여 내가 키운다는 순혈주의 생각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정 기간 회사와 직무를 경험하여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들을 회사가 선호한다. 저성장이고 치열한 경쟁 하에서 백지 상태인 신입사원을 채용하여 2~3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입장이다. 여섯째, 직무 중심의 채용으로 심화되고 있다. 1970~1980년대에 대학에서 배운 전공의 깊이는 법대 출신이 법전을 빨리 찾는 수준으로, 회사에 와서 대부분 새롭게 업무를 배웠다. 회사가 필요로 하면 그곳에 배치 받아 일했다. 지금은 직무 중심의 채용이 늘고 있다. 이 직무를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과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 기준이 아니면 지원 자체가 안 되게 하는 곳도 있다. 산학협동 등을 통해 특정학과 출신들을 ‘선확보’ 개념으로 뽑는 곳도 있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일정 수준의 사전 지식을 대학에서 습득해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입사했다 할지라도 신입사원 입문과정, 수습기간이라는 혹독하고 타이트한 심사기간을 설정하여 적응하지 못하는 사원은 걸러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선택한 요즘 젊은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들ㆍ딸들에게 무엇을 조언할 것인가? 취업이 어렵다. 그렇지만 취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많은 기업들이 취업공고를 하고 신입사원들을 채용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너의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어깨는 무겁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자녀들에게 3가지 조언을 해주길 바란다. 첫째, 먼저 자신이 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확실하게 선정해 놓으라고 조언해야 한다. 3박 4일의 중국 여행을 위해 한 달을 준비하면서, 인생 3분의 1 이상의 영향을 미치는 기업과 직무의 선택을 임박해서 결정한다. 심한 경우에는, 아무 회사나 지원한다. 회사 홈페이지 보고, 저장해 놓은 입사지원서를 수정해 전송하고는 떨어졌다고 힘들어 한다. 자신이 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사전에 정했다면, 3~4학년 때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그 회사에서 하고, 그 회사를 방문해 충분한 지식과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야 한다. 둘째, 절박하고 악착같아야 한다. 자녀들이 노력한다는 것은 알지만, 절박하게 노력하는가, 악착같이 준비하는가를 물어 봐라. 발레리나 강수진 씨는 매일 15시간 이상 연습을 하며, “내가 이 정도가 됐다고 생각할 때, 내 예술 인생은 끝이다.”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한 지원자는 클리어 파일에 그 회사의 자료를 100매 이상 준비해 완벽하게 외웠다고 한다. 1주일에 한 번 이상 그 회사와 원하는 직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것으로 했다고 한다. 내가 지원한 회사가 내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회사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조언해야 한다. 셋째, 실패를 통해 인생을 배우며 긍정적 사고를 습관화하라는 조언이다.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슬프고 아쉽고 힘들겠지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인생을 길고 멀리 보라며 어깨를 두드려 줘라. '내 후배는 내가 채용하여 내가 키운다'는 순혈주의 생각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정 기간 회사와 직무를 경험시켜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들을 회사가 선호한다.
- 2015-06-0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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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6]손주교육, 거창한 훈육 따로 없다…그저 사랑이 최고
- “손자 자랑은 돈 내고 해야 한다는데…. 허허허허! 이제 그만합시다. 줄 돈도 없는데!” 윤경로(尹慶老·68) 전 한성대 총장은 인터뷰 내내 웃음기 담은 답변을 내놨다.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수십 년간 역사학자로 활동해온 그는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던 문창극 총리후보 지명 당시 “잘못된 역사에 하나님을 망령되게 불러내고 있다”며 날을 세웠을 정도로 ‘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은 손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영락없는 (외)손자바보 할아버지였다. 더없이 따스하게 들려준 우리 시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법.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조부모들이 ‘손주 바보’가 된다고 하는데 왜그럴까요? “우리 세대만 해도 세상 살기가 바쁘고 어려워 자식사랑의 여유가 별반 없었지요. 우리 앞세대는 대가족시대였으니 또 그랬고. 아무튼 요사이 조부모들이 ‘손주 바보’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정신없이 살다보니 자식 사랑할 여유가 없었는데 손자녀를 보니 얼마나 반갑고 좋겠어요. 더욱이 요즘은 자녀들의 결혼이 늦어지고 자녀도 한둘만 낳는 세상이니 손자녀를 더욱 기다리게 되고 그래서 손자녀가 생기면 자녀보다 더 사랑스럽고 기쁜 것이지요. 내 주위에도 40이 다 된 자녀를 아직 결혼시키지 못한 친구들도 적지 않은데, 자녀들이 결혼도 해주고 손자, 손녀를 낳아주면 고맙고 반가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자연 ‘손주 바보’가 되는 거지요. 손자녀들을 돌볼 때 더 친근하고 현명해져 이해심이 풍부해지더군요. 그래서인지 자식보다 손주들에게 특별한 믿음을 끌어낼 수 있고 보다 더 의미있는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시대의 조부모의 역할은 뭐라고 보시나요?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잘 자라려면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할아버지의 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시중에 회자되고 있어요. 그만큼 요사이 젊은 부모 세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자연 손자녀를 키우는 데 조부모의 역할이 옛날보다 중요해진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보면 저는 할아버지로서 능력도 자격도 별반 없는 축에 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력적으로 손자, 손녀를 지원해줄 형편이 못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조부모의 역할이 꼭 물질적 지원과 후원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재정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더라도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해줄 역할은 많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마음의 멘토’라고나 할까. 저는 제 손자녀들이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고 푸근한 ‘따뜻한 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면 해요.” 조부모로서 특별한 마음가짐이 있나요? “과거에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도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뽑으면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역정을 내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손자녀 사랑은 낳은 부모보다도 조부모의 사랑이 더 크고 넓지요. 요사이 손자녀 가운데 조부모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아이들이 있을까요? 어릴 때 안아주고 키워주고 커지면 용돈도 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엄마 아빠한테 야단맞을 때는 역성 들어주고 그러다보니 버릇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손자녀에 대한 조부모의 사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손자녀에 대한 마음가짐은 너무 과하지 않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이….” 손자녀를 키우는 자녀의 교육방식이나 양육방법에 못마땅한 것은 없나요? “요사이 젊은 부부는 아이들을 하나나 둘 정도 낳아 키우잖아요. 내 마음 같아서는 낳을 수 있는 대로 많이 낳아서 키웠으면 좋겠는데, 옛날과 달리 아이들 키우기가 워낙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으니 많이 낳으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요. 이렇게 한둘만 키우다 보니 자기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말문만 열리면 유아원 등 여러 곳으로 보내 공부를 시키는 세상이 되었는데 참 안타깝지요. 이건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니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어린나이 때부터 경쟁사회로 내몰리는 것이 참 안쓰럽습니다. 저는 2녀 1남을 다 시집 장가보내 외손자 둘, 외손녀 하나를 보았는데 친손자는 아직 보지를 못했지요. 옛 어르신들은 외손자 친손자를 구별했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그런 것 없지요. 옛날에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으나 지금은 그런 의식이 별반 없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두 딸은 손자녀를 잘 키우는 것 같아 걱정이나 불만 같은 것은 없어요. 오히려 고맙다고나 할까. 매우 만족합니다.” 교육자로서 남다른 손자녀 교육철학은? “글쎄요. 평생을 교육현장에서 보냈지만 손자녀에 대한 교육철학을 따로 구상한 적은 없어요. 굳이 한마디 한다면 우리 옛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실제로 아이들의 지능과 성품과 품성은 만 3세 안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고요. 그리고 아이들은 ‘본대로 따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아기일 때 어떻게 키우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방법은 역시 사랑이지요. 부모와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가 커서 남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다고 해요. 저는 우리 손자녀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과 더 크게 나누며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크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다’라는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실천하는 손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손주 자랑 좀 해주신다면 “저는 손자녀들을 보면 말하기보다 껴안고 뽀뽀하기를 좋아해요. 허허허!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하지요. 애들이 싫어하는 것을 모르고 자기 좋은 대로만 한다고 핀잔을 자주 받곤 해요. 그러나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그저 몸과 마음으로 손자녀들을 사랑한다는 뜻을 표할 뿐이죠. 이제 아이들이 좀 더 커지면 내가 평생 공부한 역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어요. 마침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 손자(김도윤·대도초등학교)가 역사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읽었고 세계역사 책과 도 다 읽어서 나보다도 아는 게 더 많아요. 지금 마음 같아서는 훌륭한 역사학자가 됐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두고 봐야겠지요.” 금쪽같은 손자녀를 보며 걱정과 염려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우리 손자녀 대에는 우리나라가 더 안전해지고 행복지수가 지금보다 더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걱정이에요. 우리 사회가 전보다 물질적으로는 많이 좋아졌지만 정신적인 면과 사회안전망 면에서 허점이 너무 많아요. 세금을 좀 더 내더라도 안정되고 편안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남북 문제도 어서 속히 풀리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사회안전망이 구축되었으면 합니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경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사학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한성대학교 총장 제9회 독립기념관 학술상 수상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현)한성대학교 인문대학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 현)도산학회 회장 현)‘3·1혁명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
- 2015-06-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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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4년생 말띠들의 거침없는 질주,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 산문집 , 동화집 등이 있다.
- 2015-06-0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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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4]DO 대화법 VS Do Not 대화법
- 누구나 자녀에서 부모로, 다시 조부모가 되어 가는 과정을 밟는다. 삶의 종반부에서 맞닥뜨리는 조부모 단계는 인생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다. 실제 60대 부부와 아들 내외가 손녀 ‘애지’를 중심으로 즐거운 이야기, 우울한 대화를 나누는 소소한 일상을 그려봤다. 손녀 애지의 여덟살 생일 아침 아들 내외 집에 갔다. 손녀 선물 사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애지를 위해 책가방 란도셀을 62만원 주고 샀다. 제 에미가 잘 기른 덕에 초등학교 1학년치고는 영어 실력은 좀 된다며 은근히 딸 자랑을 한다. 며늘아이의 맘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식자랑 한 번 못하고 일만 했는데. 국제시장 덕수마냥. 허허허. 제 자식 이쁘다면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만 손주는 참말로 이쁘다.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해피버스데이 투 유…나도 애지 사랑한데이.” 내 얼굴을 손녀가 만지고 부비고 뽀뽀를 하니 세상이 다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애지 키가 또 컸네. 할머니 키보다 더 크겠네. 에미 네가 참 수고한다.” 아내는 며느리를 먼저 칭찬한다. “네 동생 보고 싶지 않니?” 하며 둘째 낳을 생각 않는 아들만 서운한 듯 바라본다. “다 큰 자식 뭐라 한다고 듣기는 하겠어요?” 아내가 며늘아이 안 들리게 한마디 한다. “제놈두 아마 세월이 가면 늠름한 자식놈 앞세워 목욕도 가고 산에도 가고 운동도 하며 아들놈과 호연지기를 맘껏 펼쳐보고 싶을 텐데.” 아들놈은 아들을 낳으라는 압력을 못 알아들은 척 인상을 찌푸린다. 손녀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내 아이들을 키울 때 나는 어땠는지 생각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솔직히 아내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만 하고 아이들과 대화로 해결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것을 내 고집대로 결정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손자녀가 태어나 걷고 젖니가 빠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걸 보면서 내 아이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되살아나 꿈틀거린다.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똑같은 사건을 아이들이 나와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놀라웠고,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나 나의 이면을 알게 된 적도 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는 기억에 없는데…….”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이 든 부모가 장성한 자녀들과 소통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이 들어 생기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거리감은 당연하다. “그래 이제 와서 내가 간섭한다고 한들 아버지 말을 듣겠니?” 장성한 자녀에 대해 10%만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부모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말을 거는 것이다. “요즘도 야근이냐? 종친회 모임이 이번 주에 있는데, 같이 갈 수 있니?” 아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붙여본다. “바빠요, 아버지는 제가 싫어하는 종친회를 왜 가자고 하는지? 거기 가면 싸우고 선산이 어쩌고…….” 아무리 친구처럼 지내도 부모는 자녀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어릴 적 키울 때처럼 자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고 한다면 오히려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자녀는 불효자식이 되고 말 것이다. “할아버지, 왜 아빠랑 싸워?” “응, 괜찮아. 싸우는 게 아니고. 할아버지랑 아빠랑 의견을 나누시는 거야.” 며늘아이가 내 눈치를 보며 위로하듯 손녀에게 응대한다. 세대를 잇고 과거를 이해하게 만든 소중한 존재는 바로 손주다. 손주가 없었다면 서툰 부모로만 남았을 것이다. 사실 내 배가 좀 나왔다.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웃겼던지 손녀가 내 배를 두들긴다. 아프지만 손녀가 나를 좋아해줘서 흐뭇하다. 내 친구 손녀는 할아버지한테서 냄새가 난다며 얼굴도 못 만지게 한다는데. 혼자라서 지 멋대로 하는 손녀가 때로는 짠하다. 할머니 등을 때리고 가슴을 치는 일들이 생긴다. “할머니는 이것도 몰라?” 흔히 엄마들은 할머니가 아이 버릇을 망친다고 걱정하지만, 아이 버릇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엄마 아빠다. 손녀가 할머니에게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 엄마가 아이에게 잘못을 알도록 호되게 꾸짖는다. “에미야, 애지가 요즘 투정이 부쩍 늘었어.” 이렇게 살짝 말하고 슬그머니 화장실로 자리를 피해준다.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아이가 조부모와 깊은 가족애를 나누기 힘들다.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에게 화부터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같은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아이가 관계 형성에 부담을 갖고 피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손녀에 대한 일은 부모보다 앞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조부모는 앞서가는 자리가 아니라 따르는 자리에 있어야 좋다. “애지 낳느라 고생이 많았다. 오늘은 애지 생일이지만 네가 축하 받아야 한다.” 며늘아이에게 가방 선물을 건넸다. 살짝 수줍어하며 “아버님, 뭘 이런 걸 다…….” 며늘 아이가 내 마음을 좀 알아주니 고맙다. “하나만 더 낳아다오” 하고 말하려다 꾹 참았다. 아들, 딸 키우던 내 젊은 날엔 ‘먹고살기에 급급해 일만 하다 여유가 없었다’는 변명으로 무책임함을 덮어버린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주들에게만은 후회 없는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 내 인생 후반전은 손녀 녀석으로 너그럽고 풍요롭게 성숙해져가고 있다. 만화 보며 사춘기 손녀 마음 읽기 손자랑 가계도(족보) 써 보기 손자에게 신문 읽는 재미 알려주기 손자랑 야구(운동) 연습해보기 손자랑 서점 가서 책 보기 손자랑 창덕궁 관람하기 손자녀와 자원봉사 활동하기 손자 운동회 가서 늠름한 모습 눈에 담기 손자 학교 앞에 가서 군것질하기 손자녀랑 천체관측 데뷔하기 손자녀와 산에 가기 할아버지 할머니 인터뷰해보기 손자녀랑 1박 2일 캠핑 가기 손자녀의 부모가 좋아하는 일 해보기 손자녀와 커플룩 입어보기
- 2015-06-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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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1] 조부모의 손자녀 사랑, 왜 아들딸보다 손자손녀가 더 사랑스러울까?
- 손자와 손녀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들인가! ‘손자 손’(孫)은 ‘아들 자’(子) + ‘이을 계’(系)를 하고 있다. 손자는 아들의 계대를 이을 사람이란 뜻이니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손주만 보면 웃음꽃이 절로 핀다. 삶의 종반부에서 맞닥뜨리는 조부모 단계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다. 손자녀로 인해 가족 사랑의 기반이 되고 자녀와의 관계도 개선이 된다. 손자녀 사랑이 자녀 사랑보다 더 밀도나 농도가 강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조부모의 역할과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탐색해본다. 자녀가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중년기나 노년기에 조부모가 된다. 조부모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새로운 가족역할로서 황혼의 부부생활에 큰 기쁨으로 느껴진다. 많은 조부모들은 손자녀를 보고 싶어 하고 자주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손자녀와 함께 놀기를 좋아한다. 서구에서도 조부모는 손자녀에게 자비롭고 동정심 많은 천사로 인식될 정도로 조부모와 손자녀 관계는 특별하다. 심지어 자녀들보다 손자녀를 더 사랑하고 더 귀여워하며 더 소중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 생활하느라고 너무 바빠 자녀들과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나 일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여 자녀의 소중함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바쁜 삶을 영위하면서 자녀 양육기를 보낸다. 그러나 부부가 조부모가 될 무렵에 이르면 인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므로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이제 더 이상 새롭게 성취할 일도, 더 이상 중요한 일도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바쁜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일도 어렵게 될 때, 손자녀들은 조부모들에게 축복인 동시에 유일한 미래로 지각되기 때문에 자녀보다는 손자녀들이 훨씬 더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손자녀를 위해 조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다양하다. 그들은 부모가 용납하지 않는 손자녀의 행동이나 특성을 수용해 주고 바쁜 부모가 해 줄 수 없는 보살핌을 제공하며 가치와 윤리 및 도덕을 손자녀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부모의 일이나 역할은 조부모의 특성이나 상황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조부모와 손자녀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면 아무리 손자녀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할지라도 조부모와 손자녀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러한 유형의 조부모들은 원거리형으로 분류되고 생일이나 입학식 혹은 졸업식 같이 특별한 날에만 손자녀를 만난다. 조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형은 손자녀의 친구로서 자주 만나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친구형 조부모이다. 이 유형의 조부모들은 자녀 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난 것을 가장 행복해하기 때문에 손자녀 양육에 관한 한 무간섭의 원칙을 고수한다. 이와는 달리 취업한 딸이나 며느리를 대신하여 대리부모 역할을 수행하는 소위 몰입형 조부모도 많이 있다. 특히 자녀가 이혼하거나 경제적,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은 어쩔 수 없는 대안이 된다. 조부모들은 손자녀 양육을 통해 삶의 목적감을 회복하고 가정 내에서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자기가치감과 만족감 혹은 보상감 같은 긍정적 경험도 할 수 있다. 물론 조부모 역할은 배우자가 생존해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더 많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글 장휘숙(章輝淑) 충남대 명예교수 이화여대 대학원 졸.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美 미시간주립대 객원교수, 한국발달심리학회 회장 등 역임
- 2015-05-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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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 명지대 바둑학과는 처음부터 독립된 학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체육학과 내의 바둑지도학 전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립된 학과나 다름없었으며 곧바로 바둑학과로 독립하였다. 이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에 대해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바둑계에서도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과연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현 교수는 신입생 선발요강과 학과과정을 정하고 신입생을 뽑아 학생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교수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들을 별 무리 없이 잘 처리해나가 교수라는 별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필자는 가능한 한 외국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고 이를 위해 외국유학생의 장학금 상한선이 등록금의 70%이던 것을 100%로 상향조정하도록 했다. 2001년에는 과 주도로 명지대학교에서 제1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제2회 대회는 2년 후 해외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둑학회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2003년 4월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동년 6월에는 한국바둑학회가 창립되어 필자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마침 그 해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궁전), 예카테리나 궁전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기념으로 제47회 유럽바둑대회가 7월 19일부터 8월 1일까지 그곳에서 열렸다. 한국바둑학회는 제 2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그곳에서 7월 26~27일 양일간 개최하였다. 필자는 한국바둑학회 회장 자격으로 집사람과 함께 참가했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바둑대회가 진행되던 약 2주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그 근교는 물론 모스크바까지 샅샅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귀국길에 우리 일행은 바둑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하여 바둑클럽이 있는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그들과 교류전을 가지는 한편 관광도 즐기는 바둑관광여행을 했다. 먼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하이델베르크와 낭만가도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 인터라켄과 융프라우를 관광한 후 다시 독일의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스트리아의 빈과 잘츠부르크, 체코의 프라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갔다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우리 일행은 이상기온으로 인한 더위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파리에서는 룩셈부르크를 거쳐 로렐라이를 구경하고 라인크루즈를 타기도 하며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귀국길에 올랐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때 말단 공무원을 하시면서 노상 일본사람들과 다투시는 바람에 진급을 하지 못하고 만년 주사노릇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바둑에 열심이셨던 이유는 다른 다툼에서는 편파적으로 일본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라도 바둑의 승부에는 깨끗이 승복하기 때문에 바둑으로 일본사람들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조남철 국수의 자서전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여하튼 할아버지의 기력은 5급(현 아마 초단) 정도로 당시에는 군(郡)에서 1, 2위를 다투는 고수였다고 한다. 바둑을 두실 때에는 할머니께서 밥상을 차려놓고 아무리 부르셔도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국을 몇 번씩 다시 덥히다가 하도 화가 나셔서 빗자루로 대야 밑바닥을 두드리며 불이야! 하고 소리치자 바둑판만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고 나오시는 바람에 손발을 다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께서도 바둑이 당시로는 무척 세셔서 3급(현 아마 3단) 정도였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두 점 치수로 종종 바둑을 두시는 바람에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과는 상당히 친밀한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8년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필자를 데리고 나가시면서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시는 분은 조남철 국수이지만 장국원이라는 분도 만만치 않다는 것, 세계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시는 분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계신 오청원(우 칭위엔)이라는 분으로 살아 있는 기성으로 존경받고 계시다는 등, 국내외 바둑계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도착한 곳은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시던 명동의 송원기원이었다. 그곳에서 조 국수를 비롯하여 몇몇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 후 바둑을 구경하며 담소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오셔서 바둑에 대한 기초를 설명해 주셨다. 마침 당시 학교에서도 공책에 바둑판을 그리고 ○, Ⅹ로 바둑을 두는 것이 유행이어서 이때부터 바둑이 늘기 시작해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7급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한일대학생 바둑대회 대표로 활약했고 최근까지도 각종 대회에서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강1급 최훈 군을 비롯하여 과 정원 40명 중 약 10명 가까이가 1, 2급의 강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대학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때쯤은 필자도 약한 1급 정도는 되었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중에서도 4명 정도가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실력도 비슷했다. 이들과 자주 만나 바둑을 둔 덕분에 기력이 점점 더 늘게 되어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은 보통 1급(현 아마 5단)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80년에 열린 제1회 대한토목학회 바둑대회 A조에서 준우승, 그 다음해에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우승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전국 토목공학과 교수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 2015-05-0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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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돌아오라 7080
-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
- 2015-04-0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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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한국전쟁의 악몽을 딛고선 ‘호랑이들’
- 그날 동네 꼬맹이들은 죄 동구 밖 팽나무 숲 그늘에 모였다. 스무 명은 족히 될 성싶었다. 읍에서 나왔다는 아저씨 둘이 아이들을 줄지어 앉혔다. 자 자, 꼬맹이들은 앞쪽에 앉고 큰 놈들은 뒤쪽에 앉아, 알았지? 이 더운 날 흰 와이셔츠에 양복저고리까지 걸친 걸 보면 아저씨들은 분명 읍내의 큰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분명했다. 글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그 더운 여름날 팽나무 숲의 기억 전에도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라는 아저씨들 따라 찬송가 몇 구절을 부르고 나면 공책과 연필, 운 좋으면 초콜릿까지 얻어 걸릴 수 있었다. 땅바닥에 퍼질고 앉은 아이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저씨들을 보고 있는 사이 한 아저씨가 먼저 왜 이리 덥지? 하면서 천천히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얼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아저씨의 어깨를 한 바퀴 두르고 겨드랑이 아래로 내려온 건 벨트. 가죽 벨트에 달린 권총집이며 거기 삐죽이 고개를 내민 빛나는 권총 손잡이까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다른 아저씨도 저고리를 벗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다. 권총이었다! 만화나 영화에서만 봤던 권총의 실물을 내 동네에서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볼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미군 열차에 돌멩이 던진 놈, 누구야?” 두 아저씨가 우리들 앞에 굳건히 다리를 벌리고 섰다. 좀 전 같이 웃음 띤 얼굴이 아니었다. 노여움을 가득 묻힌 낯빛, 무서운 눈초리... 금방이라도 빵빵, 우리를 향해 총을 쏠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쥔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요란한 매미소리도 귓전에 들리지 않았다. 한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나온 아저씨들이다. 우리가 왜 너희를 여기 불러 모았는지 알겠지?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모조리 경찰서로 끌고 갈 것이다. 알겠어? 응, 그저께 저녁 여기 동네 앞을 통과하는 미군 열차에 돌멩이 집어 던진 놈, 누구야? 돌 던진 놈 있지, 어느 놈이야?”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옆 자리 경렬이가 바르르 몸을 떨었고 내 앞의 용수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곧추세웠다. 쟁쟁한 적막이 흐르는 사이 다른 아저씨가 말했다. “허, 요놈들 봐라. 말을 않겠다 이거지?” 그가 가볍게 오른손을 옮겨 제 권총집을 쓰다듬는 순간이었다. “얘가 그랬어요! 얘가 돌 던졌어요!” 누군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뒤쪽이었다. 아이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등하교 때마다 곧잘 우리에게 제 책보자기를 떠맡기던 민호였다. 그가 온몸을 떨면서 제 옆의 경수를 가리켰다. “넌 안 그랬니? 너도 했잖아! 얘, 얘도 돌 던졌어요. 나만 아니에요!” 튕기듯 일어난 경수는 민호뿐만 아니라 제 앞뒤 애들까지 한꺼번에 짚었다. 그게 신호였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 발광하듯 제 동무들을 고발하기. 마침내 내 단짝 경렬이 나보다 먼저 나를 가리켰고 나 또한 약간이라도 늦으면 죽을세라 앞의 용수를 지적했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이내 팽나무 숲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치며 자란 세대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산골 마을 앞에는 경부선 철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해질 무렵이면 미군들을 잔뜩 태운 군용열차가 마을 앞을 통과했다. 열차가 오기 전부터 철둑 이편저편에 서 있던 마을 아이들은 열차가 다가오기 무섭게 두 팔을 흔들어대며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쳐댔다. 그러다보면 실제로 열차에서 초콜릿이며 오렌지가 던져지기 일쑤였고 때로는 뚜껑을 따지 않은 C레이션이 통째로 얻어 걸리는 횡재를 할 때도 있었다. 그 무렵 난생 처음 본 일회용 종이컵, 플라스틱 스푼 등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열차를 탄 미군들의 숫자며 그들이 던져주는 ‘물건’의 양이 눈이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동네 아이들은 예사로 기차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감자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미군들 또한 감자로 응수해 오자 급기야 돌멩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형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들은 누구 하나 동무를 찾는 법 없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골목을 달음박질하는 아이들의 소리조차 한 달 넘게 사라졌다. 아이들보다 닭이 더 많았던 교실 많은 또래의 아이들이 통학 열차를 타고 대구를 내왕하며 중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폐광이 있는 산 아래의 농림학교에 다녔다. 비인가 중학 과정의 이 학교의 교실엔 아이들 숫자보다 닭들이 더 많았다. 아이들은 영어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추 모종내기, 깻잎 따기, 염소 키우기, 하천 부지 개간에 동원됐으며 따로 닭들을 책임진 나는 틈날 때마다 사료를 주고 닭똥을 치웠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계란을 싣고 자갈 많은 신작로를 달렸다. 볕 좋은 날이면 유치환 시집이며 봔 루운의 같은 책을 들고는 닭들을 피해 폐광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일제 때 코발트를 캐냈다는 이곳엔 고대의 성전 같은 건조물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고 그 아래에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캄캄한 갱들이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더러 애들과 함께 관솔불을 켜서 갱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인체의 해골이며 뼈다귀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보도연맹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뒤 내가 고향을 떠난 뒤에 알았다. 명색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입을 것이 마땅찮았으며 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양은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간장에 비벼 먹는 꿈을 꾼 날에도 나는 계란을 싣고 읍내에 갔으며 구판장에 그것을 넘긴 뒤에는 또 하릴없이 4학년 때 짝꿍이었던 수리조합장 딸이 살고 있는 기와집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호롱불 켜진 대밭 아래 초가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 맞춰 역으로 가면 통학열차에서 내리는 교복 입은 그 아이를 먼 데서라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내겐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무작정 상경해 고생 끝 대학 입학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쥔 뒤 나는 무작정 서울로 가는 밤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날 내 옆자리에 앉았던 못된 아줌마를 지금도 잊지 않는다. 점심 저녁을 건너 뛴 아이가 혼자 꼬르륵 소리를 내며 옆에 앉아 있는데도 그녀는 삶은 계란 네 개를 차례차례 혼자 다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용산역에 내린 나는 멀리 인왕산만 바라보며 독립문까지 타박타박 걸어 형님의 셋방을 찾아 들었다. 형들 덕에 서울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의 행운이었다. 간신히 교복을 걸치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녔지만 아직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공부와 무관하게 대학 진학을 할 만한 집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더러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문학을 해보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등록금 적은 국립대학 역사학과를 지망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곤 낭인 생활을 했다. 입시학원에 가는 대신 2본 동시상영의 싸구려 영화관을 전전했으며 노모의 성화에 못 이겨 두 차례 공무원 시험을 보기도 했다. 다음해 간신히 대학에 적을 올려놓고는 가정교사, 무허가 학원 선생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대학은 학기 중에도 수시로 교문을 닫았기에 출석일수를 걱정할 일은 드물었다. 간혹 선배들에게 끌려가서 통일, 노동, 매판자본 등등의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거창한 담론들이 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지하 유인물을 펴낸 주모자로 오인 받아 성북경찰서 취조실에서 하룻밤을 자는 때에는 까닭 없이 그 어린 날 팽나무 숲의 광경이 생생히 살아났다. 더 이상 형사들이며 권총조차 무섭지 아니한데 수치심이 온몸을 감싸왔다. 갈래머리를 한 뽀얀 피부의 조합장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마흔넷에 청상이 되어서도 아들 아홉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해 가을, 종로 3가의 한 찻집에서 그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런데 딴 애들 몰래 지우개를 쥐어주던 그녀의 손길 하나까지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대학 강단 떠난 후 소설에 새삼 감사 몹시 소설이란 걸 쓰고 싶었던 것이 그 즈음이었던 듯싶다. 정한숙 선생 담당의 ‘소설창작실습’의 과제를 닷새 만에 완성했다. 바닷가 결핵환자 요양소가 이야기의 주 무대로 돼 있지만 거기엔 내 고향의 코발트 광산은 물론 동구 밖 팽나무 숲과 조합장 딸아이까지 다 들어가 있었다. 생전 처음 단편소설의 분량을 채운 그 소설이 그해 겨울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올해가 내 정년이다. 8월 말일자로 나는 34년간 몸담았던 대학의 교단을 떠나는 것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50대 초 중반에 직장을 떠난 것에 비하면 나는 ‘참 길게도 해먹은’ 셈이다. 쥐뿔의 학위도 없는 내가 일찌감치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다 문학 덕이었다. 스무 해 넘게 문학 강의만 해 오던 내가 정년 10년을 남겨 놓고는 중국을 비롯한 외국 학생들만을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수업했으며 그 인연으로 중국 백주(배갈)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갖게 되었다. 백주 관련 책을 내고 바깥으로 백주 강의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두 나라 관계 인사들과 함께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렇듯 중국을 새롭게 만난 것도 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된다. 퇴직 후에도 나는 서울 집에만 머물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계룡산 줄기 끝에 앉은 농가 한 채를 빌려 일주일에 사나흘을 거기서 지내기로 한다. 텃밭을 가꾸고 소설을 쓰고 또 좀 더 깊이 중국을 공부하면서 내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부끄럽고 고단했던 내 어린 날의 시간들이 내 인생의 남은 세월에서도 각성과 용기의 원천이 돼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최 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 저서: 창작집 ‘식구들의 세월’ ‘손님’ 등. 장편소설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산문집 ‘시가 있는 간이역’,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 2015-03-0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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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학년에 대하여
- 학생들은 3월에 한 학년씩 올라가거나 상급학교에 입학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9월학기제를 도입하자는 논의와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봄의 들머리인 3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열리고 교원을 비롯한 직장인들이 정년퇴직하는 2월을 보낸 다음에 맞는 달 아닙니까? 학년은 1년간의 학습과정 단위이며 수업하는 과목의 정도에 따라 1년을 단위로 구분한 학교교육의 단계입니다. 학년은 이렇게 단계의 개념인데, 학업을 쌓아온 햇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학력(學歷)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에게 재산이란 인생에서 겪은 체험의 양”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살면서 배운 양, 공부한 양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학생들이 매년 한 학년 올라가듯 인생이라는 교실에서도 그렇게 차근차근 학년이 올라가 성취가 쌓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데, 학교에서와 달리 인생이라는 교실엔 낙제나 유급은 있지만 추월과 월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큰 어려움입니다. 수직 상승하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돌고 돌면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차장일 때 부장이 될 공부, 부사장일 때 사장이 될 공부, 교감일 때는 교장이 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학교 공부든 직장 공부든 인생 공부든 공부는 한결같고 근면하게 해야 합니다. 공부는 배우는 일과 생각하는 일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배우고 생각하며 생각하고 배우는 과정이 적절한 순환구조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에서 망과 태는 늘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 걸까?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것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터득하기 위해서, 자연과 우주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이를 통해 인격을 도야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일 테지요. 그래서 교과서로 배우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공부에는 의지하고 기댈 만한 교과서가 없고 늘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선생님도 없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공부입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문정희 시인의 작품 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사물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글을 많이 읽고 모든 사물로부터 배우다 보면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과 뉘우침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삶이란 어쩌면 후회투성이인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시인·작가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는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되풀이할 수 있다면/ 열여섯 살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입니다. 케스트너는 열여섯 살에 뭘 했던가? 그 시에 의하면 예쁜 꽃을 따서 책갈피에 끼워 말렸고, 학교로 가는 도중 빨강대문 파랑대문 앞에서 친구를 불렀고, 밤의 창가에 서서 별들을 헤아려봤고, 거짓말을 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토라져서 닷새 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고, 밤늦은 공원에서 키스하고 싶어 할 때 얼굴을 돌리는 볼이 빨간 소녀와 산책을 했고, 문을 닫으려는 상점에 들어가 소녀와 나를 위해 2마르크 50페니히로 똑같은 가락지 두 개를 샀고, 곡마단 구경이 하고 싶어 엄마를 졸랐고, 처음 만져본 여자의 가슴이 너무 부드러워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게 오로지 케스트너만의 기억일까요? 정도 차는 있지만 우리 모두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에리히 케스트너는 이라는 시에서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고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문입니다. 1,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고통과 나치의 혹심한 탄압을 겪었으니 그렇게 말할 만합니다. 고통이 없었던 열여섯 살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삶에는 월반과 추월이 없는 것처럼 음악의 도돌이표나 윷놀이 판의 ‘백(back)도’와 같은 과거 회귀 타임머신이 없습니다. 제자리에 머물거나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신문사의 편집국장과 주필까지 거친 분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내가 지금 사회부장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모르던 것,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밝게 보이고 사려와 분별도 나아져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석했던 다른 후배들은 ‘언제까지 혼자 다 해먹으려고?’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선배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지요. 후배들에게 교과서나 교복을 물려줄 때처럼 깨끗하고 깔끔하게 쓰고 넘겨주어야 좋습니다. 제대로 올바른 공부를 하고 그 공부를 충실하게 전수해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 ‘박학이상설지(博學而詳說之) 장이반설약야(將以反說約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가 널리 배워서 상세하게 풀이하는 것은 (학식을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장차 되돌아가 요점을 알아듣게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중국 속담에 “사독서 독사서 독서사(死讀書 讀死書 讀書死)”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단 세 글자로 만들어 낸 이 속담의 뜻은 “맹목적으로 공부하면서 쓸모없는 책을 읽으면 그런 공부 하나마나”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공부를 하랬더니 개잡이를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몇 학년 몇 반입니까? 63세는 6학년 3반, 75세는 7학년 5반이라고 부릅니다. 학교의 학년은 올라갈수록 졸업과 새로운 출발로 이어지지만 인생의 학년은 올라갈수록 생의 마감과 작별로 귀결되니 나이가 드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아질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후배들이 본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선배입니다. 어떻게, 유급 없이 한 학년 올라갈 준비가 끝났나요?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이사장,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 2015-03-05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