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6월] 만약,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기사입력 2016-05-12 17:32 기사수정 2016-06-22 12:50

▲봄에 양지바른 곳에 고개숙인 모습으로 피어 있는 할미꽃을 보면 돌아오지 못할 먼 길 떠난 자식을 행여나 하는 헛된 마음으로 평생을 기다리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김진옥 동년기자
▲봄에 양지바른 곳에 고개숙인 모습으로 피어 있는 할미꽃을 보면 돌아오지 못할 먼 길 떠난 자식을 행여나 하는 헛된 마음으로 평생을 기다리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김진옥 동년기자
필자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안방 한편 하얀 창호지를 바른 창살 한 부분에 한 뼘 정도의 작은 유리 조각을 덧대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앞에 앉아 계셨던 모습이다. 할머니의 쇠약한 손에는 항상 갈색의 묵주가 들려 있었고 시선은 우물이 있는 마당과 함께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을 향해 있었다. 한옥이라 대문이 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나면 종종 낮잠을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시곤 했다.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마음에 ‘왜 우리 할머니는 나와 놀아주지도 않고 저렇게 앉아만 계신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언젠가는 엄마 앞에서 “외할머니 미워!” 했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두어 해 전이라 어렸을 때인데도 많이 섭섭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는 아들 1명과 딸 넷을 두셨는데 한 명뿐인 아들을 비롯해 첫째 딸과 셋째 딸의 남편인 사위 두 명까지 전쟁 통에 잃으셨다고 들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딸만 남은 집안에 막내딸이었다. 그 시대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일을 돕다가 결혼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나의 어머니는 막내라고 모 여전까지 보내셨다고 한다.

내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나 외가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두 이모님이 자주 오래 묵다 가시곤 했다. 그 가운데 큰이모는 유복자 아들과 함께 오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살아남은 네 딸 가운데 그중 형편이 좋았고 또 손 아래 제부인 내 아버지께서 마음 편하게 계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혼자되신 이모들을 위해 방 하나를 따로 비워두기도 하셨다.

그 시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가장 큰 슬픔으로 치는 세상이었을 텐데 내 외할머니의 심정은 분명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큰 슬픔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시고 당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신 채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슬픔에 겨워 세상 모든 것이 즐겁지 않으셨을 수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더군다나 딸이 줄줄이 넷이나 있는 집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잃으셨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이제 생각해 보니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어린것이 뭘 알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핑계를 댄다.

필자에게 6월에 대한 기억은 외할머니의 슬픔과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이종사촌 형제들의 쓸쓸한 모습이다. 또 아들이 없는 처가를 위해 늘 마음 쓰시며 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6월을 맞아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만약,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내 외할머니의 슬픔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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