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전 교직에 있을 때부터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었어요.”
현재 다양한 기관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이상용(李相庸·64) 씨는 평생 초등학교 교단에서 활동해온 교사 출신. 40여 년간을 넘게 학교에서 근무하다 2015년 8월 정년퇴직했다.
원래 영어를 전공한 데다, 학교 내에서 교감과 교장 등 중책을 맡으면서 다양한 다문화가정을 경험했다. 자연스레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퇴직 전부터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실습에 참여해 한국어교원 자격증 2급을 따놨죠. 아무래도 평생을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해온 터라 유리한 부분이 있었어요.”
퇴직 후 20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어 강사로 데뷔했다. 법무부에서 시행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영주권을 원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이 많았다.
“지난해 말까지 총 6기 교육에 참여했어요. 평생 만나온 어린 학생들과 달리 나이도 많고 사용하는 모국어도 제각각이었지만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다들 절실함도 있었고요. 교육 후에는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도, 과목도, 장소도 달랐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근무시간에 쫓기는 외국인 근로자의 수업 참여를 위해 고용주를 전화로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맺게 된 사제관계는 4개월 교육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메신저를 통해 한국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지도하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온라인 교육기업 세이글로벌을 통해 전 세계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한국어 강습 실력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아, 강사 중에서도 수강신청이 많은 편에 속한다. 이 씨는 걱정과 달리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어에 대한 지식 전달만큼이나 수업에서 올바른 우리 문화를 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무래도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해외에서 인기 있는 다양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그들에게는 한국어 강사가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는 유일한 창구가 되는 것이죠. 이를 통해서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동화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한국어 강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베테랑 입장에서, 이제 시작하는 한국어 강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을까. 이 씨는 한국어로 말하고 싶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국어 수업이라고 해서 다른 수업과 원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많이 하도록 입을 열어주는 것이에요. 일방적으로 끌고 나가지 말고 학생 스스로 말하는 것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물론 강사 경력이 짧다면 그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자긍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단순한 언어교육 이상의 효과가 있어요. 그만큼 정확한 정보가 전해지도록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요즘 TV 속은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의 전성시대다. 한국어를 잘하면 나라를 대표해 발언권을 얻거나 친구까지 초청해 한국을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인이 늘면서 달라진 풍속도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어 강사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족의 증가도 이러한 수요 폭발을 유발했다. 한국어 강사는 언어와 함께 문화를 전한다는 면에서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 학생들과의 교류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어 강사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외국인의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 추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험을 주관하는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은 지난 1월, TOPIK의 응시자가 1회부터 지난해 11월 제55회까지 212만168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20년 만에 무려 108배나 늘어난 것이다.
한국어 강사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자격제도인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자격취득 현황을 보면 2007년 790명이었던 심사 신청자는 2016년 6304명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698% 증가한 셈이다.
강사의 시작은 한국어교원 자격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려면 한국어교원 자격은 필수로 꼽힌다. 문화체육부장관이 부여하는 한국어 교육에 관한 자격제도로 심사와 발급 등의 실무적인 부분은 국립국어원이 맡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한국어교원에 대해 “국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교원은 1, 2, 3급으로 나뉜다. 2급은 학위과정으로 한국어학을 전공하거나 관련 과목을 이수한 사람에게 부여되며, 3급은 양성과정으로 학위가 없어도 100시간의 이론과 20시간의 실습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때문에 학위와 자격증이 동시에 필요하거나 학사학위 소지자의 경우는 비교적 쉽게 2급 지원이 가능하다.
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16과목(48학점)을 이수해 학위를 받으면 별도의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보지 않고 한국어교원 2급 신청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자격 취득까지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학위가 없는 경우에도 사이버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학위 취득과 함께 한국어교원에 도전할 수 있지만 3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단점이다. 사이버대학 한국어학과의 경우 시간과 비용 면에서 불리한 대신 졸업장, 학위와 함께 독서논술지도사나 다문화사회전문가 등 관련 자격에도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급은 조금 더 간단하다. 학위가 없는 사람도 12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하기 때문에 경험자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교육비에도 차이가 있다. 시중 교육기관에서 3급 과정을 위한 교육비는 총 50만~90만 원 선. 이에 반해 2급 획득을 위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의 비용은 일반적으로 과목당 15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모든 과목을 수료하려면 250만~450만 원가량 든다.
3급은 자격 취득 5년 후 경력 1200시간이 지나면 2급으로 승급 가능하며, 2급은 다시 5년 후 경력 2000시간이 지나면 1급으로 승급할 수 있다. 교육기관을 고르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자격 과정을 관장하는 국립국어원의 한국어교원 홈페이지(kteacher.korean.go.kr)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대학부설기관이나 학점은행제, 양성과정 등 기관 성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공인된 교육기관을 찾을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도 수요 많아
한국어교원 자격을 획득하면 활동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생각보다 많다. 국내외에 설치된 대학 한국어학당 같은 부설기관이 대표적.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을 위한 정부기관 한국유학종합시스템(www.studyinkorea.go.kr)에 등록된 대학부설 한국어 교육원 수는 192개에 달한다. 또 사설 한국어학원도 한국어 강사로 일할 수 있는 주요 기관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화상교육이 발달하면서 이를 전문으로 한 교육기관도 증가하는 추세다.
이외에도 최근 급증한 다문화가족을 위해 설치되고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다. 각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대부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민이나 자녀를 위한 한국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이민자통합센터,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기관 등에서도 각각의 설립 목적에 따라 국내에서 거주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강사에 대한 수요가 있다.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주요 기관들은 강사를 선발할 때 경력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경험삼아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거나 경력을 쌓고 싶다면 무료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에 자원봉사를 신청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에 있는 대표적 무료 한국어 교육기관은 서울글로벌센터, 한국이주노동자복지회,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가 꼽힌다.
해외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방법은 있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가 대표적이다. 코이카에서는 해외봉사단을 통해 한국어 강사를 세계 여러 곳에 파견하고 있다. 50세 이상의 시니어 단원의 파견도 진행 중이다. 코이카의 해외봉사단 중 한국어 강사 부문은 인기가 매우 높아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한국어 강사 선발이 가장 많은 기관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세종학당재단이 꼽힌다. 세종학당재단은 한국어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을 지난해 8월 기준으로 전 세계 54개국에서 171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어 수요가 늘면서 세종학당도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해 국감에서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세종학당재단의 한국어교원 파견 인원은 2013년 24명에서 2017년 110명으로 매년 증가해왔다.
이밖에도 일부 대학이 해외에 설립한 한국어 학당이나 해외에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선교기관 등도 한국어 강사의 수요가 있는 곳으로 꼽힌다.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문화교류를 위해 한국어 강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일본의 JET프로그램(The Japan Exchange and Teaching Programme: 어학 지도 등을 행하는 외국 청년 유치 사업)이 대표적이다. 일본 정부는 매년 각 국가에서 국제 교류를 위한 인원을 선발하고 있는데, 선발된 한국어 강사는 각 학교의 외국어 수업 보조나 특별활동, 지역 교류활동 등을 돕게 된다.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갖춰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은 ‘외국어 능력’이다. 아무래도 교육 대상이 한국어가 서툰 학생이라 다른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 그래서 일부 기관에서는 자격증 유무, 경력시간과 함께 영어, 중국어, 일본어 회화 능력을 선발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국내외 한국어 강사 구인 정보를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홈페이지의 구인정보 게시판을 활용하면 된다.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그렇다면 실제 시니어 한국어 강사의 취업 시장 상황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만만치 않다. 수요는 계속 늘고 있지만 청년층의 유입도 점점 많아지면서 취업 시장이 좁은 문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원 자격을 취득 후 활동 중인 중년의 한 한국어 강사는 “한국어 강사를 찾는 교육기관 중 나이제한을 두는 곳도 적지 않고, 학위 소지자나 경력자를 중심으로 뽑기 때문에 양질의 일자리는 시니어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수입 대신 보람을 우선시하고 눈높이를 낮추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진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외에 있는 한국어 교육기관의 경우는 청년층 선호 현상이 뚜렷하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시니어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체력이나 질환 등에 대한 염려가 있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해야 하는 교육기관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젊은 강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국어 강사에 대한 인적 수요는 해외에서의 한국어 인기, 온라인 교육 시스템의 대중화로 인해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세이글로벌 조연정 대표는 “한국어에 대한 인기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이글로벌은 2014년 용산노인복지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와의 봉사활동 교류가 계기가 돼 설립된 스타트업 기업으로서 한국어 학습을 원하는 전 세계 외국인들과 한국어 강사를 온라인으로 매칭시키는 사업을 지난해 4월 부터 시작했다. 서울시 50플러스 서부캠퍼스와 함께 한국어튜터되기 과정 수업을 운영 중이며, 수료생 중 일부를 선발해 한국어 강사로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조 대표는 “10대에서 60대까지 수업을 희망하는 학생층도 넓어지고, 한국 문화에 대한 단순한 애정에서 취업을 위한 것까지 배우고자 하는 목적도 다양해지고 있어 한국어 교육시장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많고 은퇴 후 시간 활용이 쉬운 시니어에게 한국어 강사는 적합한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치즈 시장은 어디일까? 와인이나 참치 등 다양한 식품을 소비해내는 세계 시장의 블랙홀 중국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주인공은 한국이다. 우리나라 치즈 시장은 2011년부터 6년간 56%가 성장했다. 한국인의 입맛이 치즈에 길들여지는 상황에서 시니어의 두 번째 직업으로 치즈 공방은 어떨까? 전문가들은 “은퇴자의 새로운 직업으로 적당하다”고 입을 모은다. 귀농과 결합한 생활 설계가 가능하고, 소자본으로도 시작해 볼 수 있다. 농촌 토착민들과 경쟁해야 할 가능성도 낮다. 굳이 시골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치즈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60년대.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가 임실 사람들에게 자급자족할 수단을 만들어주기 위해 산양 두 마리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프랜차이즈 피자 식당이 대중화하면서 치즈 소비는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한국 낙농가들이 치즈를 제조하기 시작한 계기는 1998년 7월이다. 국립순천대학교에서 낙농가를 대상으로 한 유제품 제조 교육을 최초로 시작한 것이 시초가 돼 생산이 본격화됐다.
국내에서 개인이 유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직접 젖소를 키워 생산한 원유로 유제품을 만드는 목장유가공장과 원유를 외부에서 공급받아 제조해 유통하는 소규모 유가공장 그리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가내수공업형 치즈 공방이 있다. 목장유가공장과 소규모 유가공장은 식품위생법에 따라 식품제조가공업에 속하지만, 치즈 공방은 즉석제조판매가공업으로 분류 신고 대상이다.
큰 욕심내다간 ‘낭패’
여러 가지 형태 중 은퇴자들이 교육을 받고 유제품을 만들어 수입을 낼 수 있는 형태로 전문가들은 가내수공업형 치즈 공방을 꼽는다.
국내에서 최초로 목장유가공 교육을 실시해온 배인휴 국립순천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 교수는 낙농업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무리해 사업화하기에는 넘어야 할 기술적, 제도적 장벽이 높다고 설명한다.
“국내에선 완전히 정착된 산업 분야가 아니어서 도전해볼 만합니다. 유제품으로 식품제조가공업을 하기 위해선 고도의 유가공 기술뿐만 아니라 위생을 위한 시설도 갖춰야 하고, 까다로운 해썹(HACCP) 인증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수준이라면 치즈 공방으로도 충분해요. 큰돈 바라지 않고 친척이나 자녀, 손주에게 건강한 먹거리 나눠주며 할 수 있는 사업을 원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거예요.”
만약 유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원유를 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 국내 낙농가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남아서 문제가 될 지경이지만, 관련법상 살균 상태에서만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관련 시설을 갖춘 목장을 찾아야 한다. 국내 원유의 품질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어서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에 적당하다. 목장의 수배가 마땅치 않다면 대형 유가공 회사의 저온살균유나 유기농시유를 구입해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제조시설을 갖추는 데도 큰돈이 필요하지는 않다. 3중 재킷 솥의 일종인 치즈 배트(vat)와 발효탱크, 숙성고, 냉장고에 상온을 유지할 냉·난방장치 정도면 가능하다. 10평 내외의 공간에서 이런 장비를 갖추려면 약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위치는 공간 확보만 가능하면 도심에서도 가능하다. 관련법상 시설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만 지키기 까다로운 수준은 아니다. 몇 가지 절차만 따르면 백화점 설치도 가능하다. 만약 규모를 키워 식품제조가공업 수준으로 확장하려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경고한다. 관련 규정이 까다로워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은 낙농업계의 숙원사업이 됐을 정도다. 가공 기준과 성분 검사도 매달 받아야 하고, 품목별로 자가품질검사도 필요하다. 각종 농장일지도 철저하게 작성해야 한다. 해썹 인증을 받으려면 지켜야 할 규정이 더욱 많아진다. 관련 규정이 대기업형 유가공 공장을 기준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생산 인원이 일정 규모가 되지 않으면 교육 이수 규정을 지키기도 어렵다고 낙농가들은 말한다.
국립축산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국내 목장형 유가공 사업을 통해 낙농가는 총 103여 개소로, 유제품 제조와 판매를 하고 있는 목장은 목장 42개소, 낙농체험목장은 13개소, 유제품 판매와 낙농체험목장을 겸한 곳은 48개소로 추정된다.
신선치즈로 틈새 노려야
치즈는 크게 가공치즈와 자연치즈로 나뉘고 자연치즈는 신선치즈와 숙성치즈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먹는 슬라이스 치즈는 가공치즈에 속하고, 피자 위에 뿌려지는 슈레드(shred) 치즈나 리코타 치즈같이 만들어 바로 먹는 것을 신선치즈, 15일부터 3개월 이상 숙성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것이 숙성치즈에 해당한다.
국내 치즈 시장을 살펴보면 피자용 치즈로 사용되는 모차렐라가 60%로 압도적이다. 이어 가공치즈가 35% 정도이고 신선치즈나 숙성치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내외에 불과하다. 국내 치즈 자급률, 즉 국산 치즈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4년 기준 4.5%에 불과하다.
시니어들이 치즈 공방을 통해 창업에 도전한다면 신선치즈가 적당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배 교수는 “신선치즈는 냉동 상태로 수입되기 때문에 신선하게 만들어 판매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이 고급화·서구화하고 있어 향후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와인이나 빵처럼 치즈와 어울리는 식품과 함께 판매하면 상품성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인 되려면 3년 이상 시행착오 겪어야
국내에서 유가공 관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충남대학교 동물자원연구센터에서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목장형유가공 과정과 경북대구낙농농협이 진행하는 목장형유가공 교육과정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서울에서 진행하는 교육과정으로는 한국낙농유가공기술원이 건국대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유가공기술 기초과정이 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순천대학교의 경우 지난해 교육과정이 폐지됐다.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에코드림치즈연구소가 운영 예정에 있다. 교육비는 대부분 60시간 교육과정 기준 75만 원 내외이며 일부 교육과정은 우유자조금에 의한 낙농가 대상 비용 일부가 지원되고 있다.
해외 교육기관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도 있다. 한때 김정은의 입맛을 위해 북한 공무원의 입학신청에 퇴짜를 놓은 프랑스의 국립유가공기술학교(ENIL)도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다. 캐나다의 구엘프대학교(University of Guelph)의 치즈 제조 단기 교육과정도 유명하다. 치즈는 인류사에서 역사가 오래된 식품인 만큼 유럽과 아메리카 등지에도 다양한 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물론 교육 한 번으로 유제품 장인이 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교육 후 생산하는 유제품이 일정한 수준 이상 오르려면 3년 이상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숙성과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험과 감(感)이 필요하다. 실제로 각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같은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서 수강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론만큼이나 실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치즈에 미쳐 뉴질랜드에서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직접 제조한 치즈를 와인과 함께 판매하고 있는 이태원 치즈플로의 조장현 셰프는 치즈를 너무 쉽게 생각하면 낭패를 보기 쉽다고 경고한다.
“치즈 분야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또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르려면 오랜 기간 공부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고요.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큰 숙제입니다.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많은 분이 도전하신다면 시장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종활(終活, 슈카쓰)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준비 활동을 뜻하는 일본 사회의 신조어다. 보통 일본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공채 시기에 맞춰 취직활동(就職活動)에 노력하는 것을 슈카쓰(就活)라고 줄여 부르는 것에 빗댄 것. 발음까지 같다. 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기업 면접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처럼 죽음이 머지않은 시니어도 그만큼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종활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일본에서 종활이란 단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유명 매체인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서 이에 관한 연재가 진행되면서 일본인들 입에서 종활이란 단어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유력 출판사가 선정하는 ‘신조어·유행어 대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대중화가 됐다.
일본에서의 종활은 단순한 장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미리 내 삶을 정리하는 대표적 아이콘인 ‘엔딩노트’의 작성에서부터, 이달 국내에서도 시범사업이 마무리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도 연관이 있는 연명의료 혹은 존엄사에 대한 논의도 포함된다.
일본 사회에서 종활은 다양한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묻힐 묘지 동기들과 온천여행을 통해 친분을 쌓는 서비스 등 고령화 사회를 등에 업고 이와 관련된 사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장례식 찾아줄 지인 없어”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종활을 준비하는 일본인들에게 걱정 중 하나는 비용이다. 일본은 절에 고인을 모시고 친척이나 직장동료, 지인 등 손님을 맞이하는 장례 형태가 일반적인데, 이럴 경우 우리 돈으로 2000만~3000만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물론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일본도 우리처럼 조의금 문화가 있는데, 보통 1만 엔(10만 원) 전후의 금액을 전달한다.
문제는 장례식을 찾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고인의 사망 시점에는 직장과 같은 인적 교류가 이미 단절된 상태인 경우가 많기 때문. 부를 사람도 많지 않고, 부르고 싶어도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실적으로 찾아줄 사람이 없다면 장례비용이 유족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 또 상조회사의 높은 상품가격에 대한 불만도 장례에 대한 시선 변화에 불을 지폈다.
이로 인해 가족들끼리만 장례를 치르는 ‘가족장’ 등 소규모 장례식을 선택하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화장만 하면 우리 돈으로 200만 원 내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장례식은 500만 원 이하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런 소규모, 저비용 상품을 내놓는 상조회사가 늘면서 가격이 점점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죽기 전 지인들과 이별하는 ‘생전장’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의 생전장(生前葬)도 종활의 새로운 방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사실 일본 사회에서 생전장은 최근에 생긴 문화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만담가나 군인이, 현대에는 연예인 등이 죽기 전 지인을 만나는 마지막 기회로 활용하는 행사를 가져왔는데 이를 생전장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활동의 종료를 알리는 수단인 셈이다. 죽은 자가 없는 장례식인 만큼 자서전 출판기념회나 파티 등의 형태를 띤다.
지난해 10월 21일에는 프로레슬러 김일과의 대결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전직 프로레슬러이자 사업가인 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猪木)가 자신이 선수로 활약했던 료고쿠 경기장(両国国技館)에서 생전장을 치렀다.
이런 행사는 ‘유명인’의 행사로만 인식됐지만 종활이 대중화되면서 생전장의 대상도 일반인들에게 확대되고 있다. 지인들을 불러놓고 사진이나 기록 등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그간의 신세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식이다. 선물을 전달하기도 하고, 노래방 기계를 놓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생전장의 장점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행사의 형식을 정할 수 있고, 본인의 뜻과 전언을 직접 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형식이 자유롭다 보니 비용면에서도 유리하다. 다만 일본 내에서도 완전히 대중화된 문화는 아니어서 낯설어하는 지인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주장, 애완동물 종활 서비스도 등장
최근 종활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서비스 중 하나는 바로 우주장(宇宙葬) 서비스다. 미국과 일본 회사가 준비하고 있는 일종의 상조상품으로 상업용 로켓을 이용해 고인을 화장한 골분을 대기권 밖까지 이동시켜주는 방식이다.
화장한 유해 모두를 하늘 위로 올리는 것은 아니다. 가로·세로·높이가 모두 1cm 정도의 작은 캡슐에 유골의 일부를 담는다. 무게로 따지면 1g 남짓 된다. 다른 신청자들과 함께 로켓에 실려 발사된 후 대기권 밖에 도달하면, 위성궤도에 캡슐이 뿌려진다. 캡슐은 궤도를 따라 지구 주변을 돌게 되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중력에 이끌려 대기권으로 추락해 재로 변한다. 우주 쓰레기처럼 대기권 밖을 떠돌거나 위성 등 다른 시설에 방해가 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비록 유골의 형태이지만 삶의 마지막에 우주와 지구 전체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는 로맨틱한 내용이 마케팅 포인트다. 이런 우주장 서비스를 받으려면 1인당 28만5000엔, 우리 돈으로 약 300만 원 정도 비용을 내야 한다.
애완동물을 위한 종활 서비스도 있다. 이동식 화장 차량을 통해 애완동물을 화장할 수 있고, 장례 서비스도 지원된다. 사람 장례식 못지않다.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납골당도 준비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인의 이러한 종활 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종활 따위 그만두세요(終活なんておやめなさい)’의 저자이자 불교 학자인 히로 사치야(ひろさちや)가 대표적이다. 60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하며 일본 불교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종활은 사후를 위한 불필요한 준비에 불과하며 지금 즐거운 인생을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하면서 “상속 등 사후에 벌어질 일들 역시 남아 있는 유족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 “다단계 피라미드에 불과하다. 처음 가입한 사람에게는 고수익을 보장해주지만 가입자가 줄면 파산하는 것과 같다.” 그레고리 맨키프 하버드대 경영대학 교수가 국민연금을 두고 한 말이다. 향후 고령화로 연금 수급자가 증가하면, 머지않아 국민연금 기금이 바닥날 수 있다는 우려는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연금 고갈론’ 외에도 쥐꼬리만 한 연금이 나온다 해서 ‘용돈연금’이라 불리기도 한다.
# 강남아줌마들은 국민연금으로 노후 재테크를 한다? 지난 10월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최저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 가입자의 배우자 소득수준별 현황’에 따르면 최저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 가입자 중 배우자가 월 400만원 이상인 가입자가 4만9382명으로 45.1%에 달했다. 저소득 취약 계층보다 강남아줌마로 불리는 고소득층이 노후 준비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선호함을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극과 극의 평가가 잇따른다. 국민연금이 오랫동안 온갖 불신에 휩싸여 있음에도, ‘돈’에 밝은 강남아줌마들이 각별히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돈연금?’ 실제 얼마나 받나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올 8월 기준 국민연금 노령연금 수급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36만4600원이다. 국민연금이 ‘용돈연금’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연금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약 17년에 불과하고, 실질 소득대체율은 약 24%에 머물렀다.
국민연금 노령연금은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부해야 연금으로 수령 가능하며, 가입기간이 길수록 연금액이 불어난다. 10~19년 가입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39만5840원, 20년 이상 가입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89만2190원으로 집계됐다.
기존 60세 이후였던 국민연금의 수급 연령은 2013년부터 4년을 주기로 한 살씩 단계적으로 늦춰지고 있다. 1969년 이후 출생자는 65세부터 수령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향후 수급 연령이 더 늦춰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연금액도 1988년 도입 당시 소득 대비 70%를 내걸었지만 현재는 40%로 조정돼 2060년까지 기금이 버틸 수 있도록 연장된 상태다.
국민연금은 국가가 최종적으로 지급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지급된다. 현재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제도를 실시하는 전 세계 170여 개국 중 연금 지급을 중단한 사례는 단 한 곳도 없다.
송승용 희망재무설계 이사는 “고령화에 따라 향후 국민연금의 수령 시기가 늦춰진다거나 소득대체율이 낮춰질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 연금을 받는 어르신 세대는 물론 20~30대 젊은 세대라 해도 평균수명 이상으로 살 경우 낸 돈보다 많이 돌려받을 수 있다”며 “물가 상승에 따라 매년 연금액을 올려줄 뿐 아니라 노후를 위한 최소한의 ‘강제 저축’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앞당겨 받으면 손해일까
중소기업 부장인 정인호(50)씨는 은퇴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씨는 “50세를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부르는데, 현실에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벼랑 끝 나이인 것 같다”며 “퇴직하면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라고 했다.
국내의 경우 평균 은퇴 연령이 여성 직장인은 47.3세, 남성 직장인은 55세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현실적으로 50대 전후로 퇴직한다고 보면 길게는 20년 넘게 무소득 기간을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연금 개시 전에 은퇴해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령연금 수급시기 5년 전부터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단 이때 소득이 없거나 소득이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소득액(2016년도 기준 약 210만원)보다 낮아야 신청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은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하면 연금액이 감액된다는 사실이다. 연금 받는 시기를 1년 앞당길 때마다 연금 수령액이 6%씩 줄어든다. 5년 빨리 받으면 30%나 줄어든다. 예를 들어 만 61세부터 노령연금을 월 100만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5년 앞서 56세부터 연금을 받으면 월 수령액이 70만원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기노령연금 수령은 무조건 손해일까.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조기노령연금 신규 수급자는 2013년 8만4956명에서 지난해 3만6164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안정적인 소득 확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가입자가 죽을 때까지 받는 연금이기 때문에, 수령을 늦췄다가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오히려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가입자가 사망했을 때 유족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은 가입기간에 따라 기본 연금액의 40~60%(+가족 부양액) 수준이다.
만일 조기노령연금을 받지 않더라도 은퇴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민연금은 만 60세까지 의무가입이다. 퇴직하면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전환되는데, 소득이 없을 때는 납입 유예가 가능하다. 단 향후 받을 연금액은 유예된 기간만큼 줄어든다. 국민연금 예상 연금액은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www.nps.or.kr)에서 ‘내 연금 알아보기’를 통해 조회할 수 있다.
부부 가입자, 배우자 먼저 사망할 경우
맞벌이를 하다가 은퇴한 김영모(56)씨 부부는 국민연금의 유족연금 논란이 일 때마다 억울한 기분이 든다. 김씨는 “부부가 각자 국민연금 보험료를 20년 이상 냈는데, 예기치 않게 배우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두 사람 몫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는 게 억울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한 사람에게 2개 이상의 급여 수급권이 생길 경우 하나만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배우자가 사망하면 유족연금이나 본인의 노령연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중복급여의 조정’이라고 한다.
예컨대 국민연금 부부 가입자 중 남편이 먼저 사망했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배우자는 남편이 남긴 유족연금이 본인의 노령연금보다 많을 경우, 유족연금(최대 기본 연금액의 60%+부양가족연금액)만 받을 수 있다. 본인의 노령연금을 계속 지급받겠다고 선택하면, 본인의 노령연금액에 유족연금액의 30%만 추가로 받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부부가 함께 생존해서 연금을 받을 때보다 30~40% 감액이 되는 구조다.
이에 반해 공무원연금은 중복급여 조정 대상이 아니다. 유족연금과 노령연금을 동시에 수령할 수 있다. 국민연금 부부 가입자의 반발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국민연금 부부 수급자는 2010년 10만8674쌍에서 2012년 17만7857쌍, 2014년 21만4456쌍, 2015년 21만5102쌍으로 급증하다가 지난해 25만 쌍을 돌파했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사람이 맞나 싶다. 기억 속 그는 리듬을 타는 정도의 율동과 함께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불렀다. 옆집 오빠면 딱 좋을 것 같았던 그가 오십이 넘어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중후한 매력을 내심 기대했지만 흥폭발은 기본이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막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0년대 중반 ‘볼리비아發 염소 창법’으로 아이돌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임병수(林炳秀·57)를 만났다. 보다 더한 실제 상황 정글생활 달인 이야기도 있으니 기대하시라!
시대를 대표하던 아이콘, 다시 돌아오다
198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 사랑’,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등으로 소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수 임병수. 그는 요즘 말로 강제 소환됐다는 표현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잊혔던 그의 노래가 톱스타의 입을 타고 방송 전파를 탄 것. 제2의 전성기로 갈 기회가 찾아왔다.
“참 그게 운명인 것 같아요. (SBS)에서 배우 김수현씨가 제 노래 ‘약속’을 불렀어요. 그리고 (tvN)에서는 덕선이(혜리 분)와 동룡이(이동휘 분)가 ‘아이스크림 사랑’을 불렀어요. 이게 뭐지? 제 노래와 이름이 다시 나오니까요. 그때쯤 제 새 노래가 나오면 괜찮겠다고 생각은 했죠.”
밝은 웃음으로 마주한 임병수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임병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선하고 특별했다. 타고난 음색에 볼리비아 교포 출신이라는 이국적 색채를 덧입히니 궁금증을 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임병수가 딱 아이돌 스타였다.
“확 뜰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죠. 가수 될 거라는 생각도,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큰 무대에 한 번 서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한 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무명가수들한테 항상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아버지, 막내아들을 가수로 만들다
임병수가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고국에서 가수가 된 데에는 아버지의 강력한 추진력이 뒤따랐다.
“우리 아버지의 행복이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막내, 노래 잘하네요’라고 하면 아주 좋아하시고요. 저도 음악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했던 뮤지컬 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었거든요. 아버지는 그냥 제가 TV에 나오고 사람들이 손뼉 쳐주는 것까지만 생각하시고 한국으로 저를 보내신 것 같아요.”
뉴욕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임병수에게 아버지는 LA에 사는 지인이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가수가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권유였다. 임병수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들어왔고 임병수는 한 시대를 제대로 풍미한 가수가 됐다. 대단한 의지라기보다는 운명처럼 빨려 들어갔다. 딱 3년, 임병수의 쇼 타임. 조금은 짧았지만 말이다. 화려한 시간도 잠시.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변했다.
“84년, 85년, 86년에 제일 반짝거렸던 거죠. 그러니까 1집, 2집, 3집.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난 어지러워요’로 활동했어요. 바쁘고 스케줄도 너무 많았는데 3년이 애매하게 그냥 지나갔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은 했죠.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문득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살짝 그런 생각도 했어요. 괴로웠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움 정도였어요.”
그래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계속 노래를 해야 하나? 그만둘까?
“내 기타랑 모든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 등등 음악이랑 관계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지나간 거 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태워본 적은 없어요. 상상만 해봤죠(웃음).”
혹 생각처럼 모든 것을 태웠더라면 다시 사 모으기에 바빴을 거라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인기 스타였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 인기가 떨어지면 순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물론 몇 년은 이게 뭐지 했지만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음반을 발표했고 본업인 가수로서의 삶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결혼도 했고, 장성한 딸이 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접하며 살았다고. 지난 7월에는 ‘이름’이라는 신곡을 발표해 활발하게 팬들과 만나고 있다.
“10년 만에 신곡을 냈어요. 나름대로 많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트로트의 색깔이 있는 노래예요. 그런데 정통 트로트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그 맛이 안 나요. 트로트 같기는 한데 ‘어, 임병수가 부르니까 그냥 발라든데?’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이와 인기를 좇아서 색깔을 바꾼 것 아니냐는 말들이 들리지만, 임병수의 생각은 다르다.
“10명보다는 100명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진짜 나만의 색깔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신곡도 부르고 제 히트곡도 부르려고요. 그리고 저는 또 라틴 음악으로 메들리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노래는 제가 부르는 게 훨씬 나을 거니까요(웃음).”
불모지 볼리비아를 개척하다
문득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많은 나라 중에 왜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는지 궁금해졌다. 외국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볼리비아에서 날아온 청년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 부자려니 지레짐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부모님이 모두 황해도 분들이셨어요. 우리 아버지 생각에 대한민국은 좁으니까 좀 넓은 나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이민 신청을 했는데 볼리비아에서 먼저 연락이 왔대요. 그때는 볼리비아가 한국보다 더 잘살았어요. 제가 다섯 살이던 1965년도에 볼리비아로 떠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 3녀, 12명의 가족이 모두요.”
한국에서 떠날 때만 해도 부모님이 목욕탕과 생선 냉동 창고를 운영해 집안은 넉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북 출신으로 전쟁을 겪은 부모님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떠난 임병수의 집안은 한국에서 볼리비아로 간 첫 이민 가족.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는 조상으로 불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볼리비아로 이민을 가면 임병수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
“전쟁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모험을 좋아하셨어요. 말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볼리비아에 가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쉰다섯이셨어요. 당시 500달러 정도를 가지고 가셨답니다.”
이민 떠난 그곳은 말 그대로 정글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볼리비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글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산속으로 들어가 제재소를 했어요. 카라나비라는 지역이었어요. 한 5~6년은 산에서 살았어요. 화장실도 없고, 신발도 없었어요. 집도 그냥 원두막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벽도 없었고요. 뱀도 지나가고 개미도 지나가고 각종 생명체가 주변을 지나다녔어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는데 열 살 무렵까지 있었어요.”
맨발로 다니는 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린 임병수에게 선물로 신발을 안겼지만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잘사는 교포 출신일 줄만 알았는데 타잔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타잔한테 신발 한 번 줘봐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신발을 신고 나가도 학교에서는 벗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올 때쯤 다시 신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혼날까봐요. 지금도 불편해요(웃음).”
(SBS)이 우스워 보이지 않냐며 넌지시 물었다.
“웃기죠(웃음). 냇가에 다이너마이트 하나 던져 터뜨려서 물고기는 그냥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됐어요. 새도 잡아서 불에다 구워 먹고요. 에이, 저는 5년 동안 정글에서 살았잖아요. 가끔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신기한 듯 바라봐요. 방송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주위에 카메라 있고 사람들도 있고 일단 조명도 있잖아요.”
정글 삶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었다. 키가 큰 아보카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따먹던 일, 뱀이 몸 주위를 지나간 사건, 개미 밥으로 개구리를 던져준 일 등 상상할 수 없는 정글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펼쳐졌다. 이야기할 때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몸으로 표현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하여튼 좋았어요.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너무 어렸다는 거죠. 우리 형들은 재밌었다고 해요. 즐긴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사람이 사람 만나는 거요. 밤에 산길 가고 있는데 빨간 불빛이 보여요. 얼마나 무서워요. 담배 피우면서 일(?)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나 에서 섭외가 온다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가면 본능적으로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할 것도 같아요. 그때는 벌레 같은 거 손으로 막 잡고 그랬는데 이제는 무섭거든요(웃음).”
프로레슬링 선수들 의상실을 열다
5년이 흘러 12명의 대가족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떠났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는 바로 프로레슬링. 이곳에서 임병수의 가족은 레슬링 선수의 옷을 만드는 의상실을 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레슬링 선수들이 니트 옷감으로 된 선수복을 입어요. 우리 누나들이 옷을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선수들이 옷을 맞추러 많이 왔어요.”
정글에서 내려와 도시로 이주했으나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이런 거 보면 누나들 울겠다. 왜냐면 누나들이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의상실이 잘되니까 아버지가 여덟째 형을 독일로 보내서 섬유 기계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섬유 관련 사업에 필요한 것인데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계였어요.”
정글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없었고 방도 작아서 잠을 잘 때면 식구들이 몸을 바짝 붙이고 칼잠을 자야 했다. 누나들은 재단이 끝나면 탁상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매달려 열심히 사업을 일궜다. 가업이 생긴 것이다. 임병수의 집에서 만들어진 원단은 인접 국가인 아르헨티나, 칠레로 팔려나갔다.
“볼리비아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침 그러다 볼리비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가적인 제압도 있고 탄압받는 느낌?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니까 외국 사람들을 반기지 않게 됐죠. 지금은 가업은 다 접고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일 하고 살아요. 저만 지금 한국에 있고요. 큰형님 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누나들은 가끔 보고 싶은 정도다. 이젠 가족이 다 떨어져 살기 때문에 다 같이 모이는 일은 더 기대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부모님 금혼식 때 10형제들이 모두 모였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사진을 찍는 데 한 시간 걸렸다니까요. 사진을 찍으려 하면 한 명이 화장실 가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누가 또 잠깐 넥타이를 고쳐 매고 그래서요.”
어렸을 때 정글에서 살았던 추억 때문일까? 기회가 되면 볼리비아 나무를 수입해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대신 조카가 추진하고 있는 커피 사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저는 되게 밝게 보이잖아요. 나쁜 것은 옆으로 밀어놓고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해요. 내가 여기 혼자 있어도 잘 버텨온 힘이에요. 이런저런 고민이 있어도 결국은 늘 음악 생각뿐이에요. 10곡, 15곡 발표할 필요 없잖아요. 한 곡 내고 노래 부르고 다시 또 만들면 되죠. 음악은 계속할 거니까요.”
그의 노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평생이 나그네 인생이다. 예전에 수줍었던 모습에 힘이 들어가고 더 밝아진 이유는 마음 깊이 숨겨놓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노래를 향한 열정 때문이다.
“소동파는 황주에서 매달 아주 적은 생활비를 받았기 때문에 식솔들의 의식주는 예전에 해두었던 저축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는 매달 초 저축했던 돈 가운데 4000~5000개의 동전을 꺼내서 한 꿰미에 150개씩 나눈 뒤, 집 대들보에 걸어놓고는 매일 한 줄씩 풀어서 사용하였다. 가능하면 하루의 지출을 한 줄의 동전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만약 그날 저녁에 몇 개의 동전이 남으면 단지에 넣고, 그다음 날에는 다른 동전 줄을 풀어서 사용했다. 한 달이 지나면 단지의 동전을 정산해서 손님들이 올 때 접대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스야후이, )
요즘 개인형 퇴직연금(Individual Retire ment Pension, 이하 IRP)이 금융계의 핫이슈다. 지난 4월 퇴직연금법인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7월 26일부터 소득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IRP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노후 빈곤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공적연금의 보장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공적연금 보장수준을 높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 간 부조에 의존하는 공적연금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인구학자인 서울대 조영태 교수는 저서 에서 “사회적 미래는 정해져 있을지언정 개인의 미래는 매 순간의 판단과 선택과 노력으로 ‘정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사학연금을 받게 될 20년 뒤에는 인구구조상 사학연금 급여가 반 토막 날 가능성이 크다며 별도의 노후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무리 사회적 미래가 암울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해도 개인의 미래는 ‘하기 나름’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44세에 좌천된 소동파가 철저하고 체계적인 절약과 황무지를 개간해 몸소 농사를 지으며 고난을 헤쳐 나갔듯이(전원시를 많이 쓴 중국의 고대 문인들 중 장기간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은 도연명과 소동파 둘뿐이다), 현재의 삶이 고달프다고 욜로(YOLO)만 부르짖다간 언덕 너머에 광활하게 펼쳐진 대초원 같은 후반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외면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우를 최소화하고 우리의 인생을 만개시키는 데 IRP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저출산·고령화시대 자조노력연금의 대명사로 우뚝 설 IRP를 남이 아니라 내 잔칫상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철저히 파보고 스마트하게 이용해야 한다.
IRP란 무엇인가?
원래 IRP는 근로자가 직장을 옮기거나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급여를 은퇴할 때까지 계속 축적해나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전문용어로는 통산장치(portability)라고도 부른다. 애초에 IRP는 퇴직(일시)금을 수령한 퇴직 근로자와 퇴직연금제도에 가입한 재직 근로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번에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7월 26일부터는 자영업자, 근속기간 1년 미만 근로자와 1주 소정근로시간(所定勤勞時間)이 15시간 미만인 단시간 근로자 등의 퇴직급여제도 미설정 근로자, 퇴직금제도 적용 재직 근로자, 공무원·군인·사립학교교직원·별정우체국직원 등 직역연금제도 가입자들도 가입할 수 있도록 IRP의 문호가 활짝 열린 것이다. 사실상 모든 취업자가 IRP에 가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2017년 6월 말 현재, IRP 가입 건수는 226만 6000건이고, 적립금액은 13조6928억원에 달한다. 적립금액 기준으로 2016년 성장률은 14.1%로 다소 주춤했지만 2015년과 2014년에는 각각 44.3%와 24.8%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올해는 가입 대상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이전 수준의 성장률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IRP의 높은 성장률과 자조노력연금 대명사의 역할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IRP에 해당하는 IRA(Individual Retirement Account)가 이미 2010년에 DC(확정기여)형을 추월해 퇴직급여제도 중 가장 큰 적립금 규모를 자랑한다. 2017년 3월 말 미국 IRA의 적립금 규모는 8조2000억 달러에 달한다. 일본에서는 IRP를 iDeCo라고 부르는데, 2017년 6월 말 가입자 수는 54만9943명에 불과하지만, 최근 자영업자는 물론 학생·전업주부·공무원·회사원 등 20세 이상 60세 미만 국민이면 누구나 IRP에 가입할 수 있도록 문호가 대폭 확대되었다. 명실상부 전 국민적 노후준비수단으로 격상된 것이다. 바야흐로 IRP가 글로벌 대세로 부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결국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지금 당장 살림이 쪼들리는 사람들에게도 노후는 중요하다. 일일 생활비를 아껴 단지에 모아놨다 손님 접대비로 사용했다는 소동파처럼 돈이 부족한 사람들도 나름의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IRP에 가입하면 의외의 효과를 볼 수도 있다. 바로 압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민사집행법에서는 급여채권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압류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상 퇴직연금채권은 전액 압류금지채권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2014년 1월 23일) 이후 퇴직연금은 급여압류 대상채권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IRP는 퇴직연금의 한 종류다.
IRP에는 어떤 혜택이 있나?
IRP의 가장 큰 혜택은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금융상품에 가입하면 발생한 이자(배당 포함)에 대해 15.4%의 이자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IRP에 가입하면 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나중에 연금으로 받을 때 3.3~5.5%의 연금소득세만 내면 된다. 이자소득세만큼 적립액이 늘어나고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IRP에는 연금저축과 합산하여 연간 1800만원까지 납입할 수 있다. 보통 세액공제 한도액인 700만원까지 납입을 권유받거나 그렇게 납입하는 가입자가 많은데, 세액공제액을 초과하는 1100만원을 잘 활용하면 의외의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 1100만원은 세액공제 혜택을 받지는 못하지만 소득세를 절감할 수 있고, 중도해지나 연금을 받을 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요즘 보기 힘든 비과세 상품인 셈이다. 자금 사정에 여유가 있는 분들은 IRP 납입 최고한도액을 적극 활용하면 노후가 든든해질 것이다. 참고로 연금소득세율은 연령별로 다른데 연금소득자가 70세 미만인 경우는 5.5%, 70~79세는 4.4%, 80세 이상은 3.3%다. 단, 연금소득자가 70세 미만이더라도 종신연금을 신청하면 4.4%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IRP의 두 번째 혜택은 연금저축과 합산해 연간 7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IRP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연금저축에 가입하면 400만원까지만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연금저축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IRP에 가입하면 7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근로자 등 급여소득자의 세액공제율은 연간 총급여가 5500만원 이하인 사람은 16.5%를, 이를 초과하는 사람은 13.2%를 적용받는다. 자영업자 등 종합소득세를 적용받는 사람들의 세액공제율은 4000만원을 기준으로 그 이하는 16.5%, 초과하는 사람은 13.2%다. 연간 700만원을 납입할 경우 연말정산 때 16.5%를 적용받는 사람은 115만5000원을, 13.2%를 적용받는 사람은 92만4000원을 돌려받는다([표1] 참조). 쏠쏠하지 않은가?
IRP에 대한 세제혜택은 또 있다. 바로 퇴직금을 IRP 계좌에 넣어두고 운용하다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퇴직소득세를 30%나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연금수급 자격에 대해선 [표2] 참조). 많은 사람이 퇴직할 때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간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게 되면 퇴직금 규모와 근속기간에 따라 0~28.6%의 퇴직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실제로 받는 퇴직금이 생각보다 적은 이유다. 그러나 퇴직금을 IRP 계좌로 이체한 뒤 연금으로 받게 되면 퇴직소득세율의 70%만 연금소득세로 납부하면 된다. 퇴직소득세 대비 연금소득세가 30% 절감되도록 소득세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했다 하더라도 60일이 경과되지 않았다면 이미 납부한 퇴직소득세를 돌려받을 수 있다. 금융기관을 방문해 IRP 계좌를 개설한 뒤 수령한 퇴직금을 이체하면 퇴직한 회사에서 원천징수해둔 퇴직소득세를 IRP 계좌에 입금시켜주기 때문이다. 만일 퇴직금 중 일부를 사용했다면 남은 금액만 IRP 계좌에 입금해도 입금비율에 맞춰 퇴직소득세를 돌려받을 수 있다.
IRP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세액공제한도를 초과해 납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액공제한도 초과분에 대해서는 이자소득세를 면제받는 혜택이 있을 뿐 아니라 다음 해에 세액공제를 신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연간 총급여가 5500만원을 넘는 근로자가 2017년에 1000만원을 납입했다면 당해 연도에 700만원에 대한 세액공제를 받고, 2018년도에 300만원을 이월신청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보너스를 받을 경우에 활용하기 좋은 방법이다.
IRP에 가입할 때는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바로 중도에 해지할 경우 이미 세제혜택을 받은 납입금액은 물론 운용수익까지 16.5%의 기타소득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망, 해외 이주 등 세법상 부득이한 인출 사유에 해당되는 경우 인출액에 대해 세율이 낮은 연금소득세(3.3~5.5%)가 적용된다. 사유 발생일 이후부터 6개월 이내에 증빙서류를 갖춰 금융회사에 신청하면 된다. 한편 IRP에 가입해 55세 이후 연금으로 수령할 때 연금수령한도를 초과해 수령하는 경우 한도초과금액에 대해 16.5%의 기타소득세가 부과된다. 연금수령한도는 연금개시 신청일 당시의 적립금을 ‘11-연금수령연차’로 나눈 뒤 1.2를 곱해 계산된다. 예를 들어 연금개시 신청일 현재 IRP 적립금 평가액이 5000만원이면 첫해 연금수령한도는 ‘5000만원/(11-1)×1.2=600만원’이 된다.
IRP 가입과 적립금 운용은 어떻게?
절세상품이 줄어들고 있는 요즘 절세덩어리인 IRP는 매우 매력적이다. IRP 가입절차는 의외로 간단하다. 신분증과 [표3]과 같은 필요서류를 준비해 금융기관을 방문하면 그만이다. 일부 금융기관에서는 공인인증서만 있으면 온라인으로도 가입할 수 있으니 업무시간 중 금융기관을 방문하기 힘든 사람들은 이를 활용하면 된다. 계좌를 개설할 때는 0원으로도 가능하다. 계좌를 개설했으면 그다음은 계좌에 들어갈 적립금을 어떻게 운용할지 결정해야 한다. [표4]에서 보는 것처럼 IRP 가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도 있고, 선택할 수 없는 상품도 있다.
특히 투자형 상품을 선택할 때는 수익률과 리스크를 잘 따져야 한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현재의 수익률이 미래의 수익률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수익률만 보고 펀드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현재의 수익률과 함께 수익률 추이, 벤치마크 대비 수익률 수준, 펀드운용 시스템, 자산배분, 수수료 수준 등을 잘 따져보고 선택해야 한다. 금융기관별 수수료율과 장기(5년/8년) 연평균 수익률은 노동부 퇴직연금 홈페이지에 공시되어 있다.
만약 이미 가입한 펀드의 수익률이 최근 나빠졌다면 다른 펀드로 갈아타자. 이를 위해선 최소한 3개월에 한 번씩은 수익률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
손성동(孫盛東)한국연금연구소 대표
-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한국연금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 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치매는 우리에게도 현실이 됐다. 문재인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실현하기 위해 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사례를 곁에 두고 있다. 바로 일본이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를 모셨던 A씨는 지난 2012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서울 종로의 상가 건물 소유주였던 어머니에게 A씨의 삼촌 B씨가 접근해, 사후에 재산을 모두 자신이 맡는다는 위임장과 유언장을 받아낸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법원의 상속재산처분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아냈지만, B씨는 법원의 결정 직전에 건물을 급히 팔아버렸다.
결국 소송을 벌인 끝에 2015년 법원은 치매로 법률적 의미와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들을 배제하고 동생에게 모든 재산의 관리 처분 권한을 준 위임장은 무효라며, 건물을 산 매수인에게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말소하라고 판결했다.
유언자 의사 정상 여부 판정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 민법에선 금치산 또는 한정치산 선고, 성년후견 심판 등의 제도로 법률 행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모든 성인은 기본적으로 의사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과 같은 법률 행위와 관련해 치매 같은 질환으로 인해 의사능력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주장하는 자가 입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람에게도 현실적인 고민이 될 수 있다. 치매가 없거나 사소한 건망증이 나타나는 초기 치매의 경우 일상생활에는 장애가 없지만 병력이 법적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언을 남겨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다.
일본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메디컬리서치라는 회사는 최근 ‘의사능력감정(意思能力鑑定)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유언 작성 전 작성자의 뇌 대사 기능을 아밀로이드 PET-CT 등의 장비를 이용한 진단과 정신과 전문의의 면담을 통해 의사능력의 유무를 감정하는 서비스다.
회사 측은 “일본은 치매환자 1300만 명 시대가 도래했고, 치매로 인한 상속 분쟁이 2014년 1만2577건에 달했다”며 “치매환자라도 유언장을 작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의사능력감정을 통해 의사능력이 인정되면 분쟁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분쟁이 발생한 이후에야 의사능력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종합병원 신경과 전문의는 “법원에서 법적 분쟁으로 인해 소견서 작성을 요청받는 일이 왕왕 있다”며 “의학적으로 의사능력을 감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법적으로 첨예한 경우 소견서 작성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정앤파트너스의 의사 출신 성용배 변호사는 “국내에서도 유언장 작성자가 자발적으로 인지능력과 관련한 진료나 감정을 받고, 진료기록, 소견서 등 그 근거를 남기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이는 의사능력의 존부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문제제기의 소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환자 편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치매환자를 위한 일본 최초의 원격진료 서비스도 얼마 전 시작됐다. 준텐도(順天堂)대학교병원은 지난 7월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위한 원격진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는 IBM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운영되며, 환자나 보호자는 아이패드를 통해 병원과 치료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병원 측은 “환자의 내원에 필요한 신체적,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가족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환자를 돕는 간병인을 통한 정보도 의사가 참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멀리 떨어져 있는 환자에게 효율적인 진료 서비스 제공과 함께 지역 병원과의 연계도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또 병원 측은 원격진료가 활성화돼 자료가 축적되면 치매환자의 빅데이터 분석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96년 서울대학교병원이 원격치매센터를 설립해 일찌감치 원격진료 서비스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 이어 정부의 원격진료 시범사업을 통해 수년간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지자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돼왔다. 그러나 원격진료를 ‘정보통신기술 활용의료’로 명칭을 바꾸고 대상도 축소해, 보건복지부가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 선택은 누가 봐도 모험이었다. 준공무원급으로 평가받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한 가장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 더 빨리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한다. 경상북도 청송에서 만난 신왕준(申旺俊·53)씨의 이야기다.
신왕준씨가 고향인 청송 ‘부곡마을’로 돌아온 것은 2015년 3월. 선산이 있는 고향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상경한 후 청송은 그에게 명절 때 가끔 찾아오는 곳일 뿐이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결심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죠. 이웃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부터 자연에서 사는 법, 작물을 키워내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느닷없는 귀촌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다니던 산림조합중앙회의 직원 대상 명예퇴직 신청이 계기가 됐다. 막연히 인생 후반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선산을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명색이 산림경영팀장이었으니까.
“가족과 상의 없이 명퇴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당시 아내는 펄쩍 뛰었지만, 지금은 제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어요. 아내도 자신의 삶이 있고, 저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리가 안 잡힌 상태라서 주말부부처럼 지내고 있지만 함께 살 시기를 앞당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자연 속의 삶,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웃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서울에선 중년에 속했지만,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60대 후반인 마을에서 그는 젊디젊은 청년이자 막내였다.
“동네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한두 분 뵙기도 힘들어요. 아침에 눈뜨면 마을회관에 들러 일찍부터 나와 계신 할머니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밭일을 돕기도 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혀나가자 동네 주민 자녀들이 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연락이 안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절 찾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이곳 구성원이 됐어요.”
서울에선 산림경영 분야의 전문가 대접을 받던 그였지만 산은 ‘초짜’를 알아봤다. 명예퇴직 후 1년간 다시 전문 분야 수업을 들으며 귀촌을 준비했지만, 결국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다르더군요. 새로 배우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또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었죠. 올 초 가뭄이 심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준비한 것은 조금씩 성과를 냈다. 그가 제안한 산림복합경영단지 조성사업은 산림소득 사업공모에 뽑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밭이 아닌 산속에 자리 잡은 최초의 상업용 산나물 주말농장 청송 뫼살이 농장을 시작했다. 5평짜리 텃밭 90개를 분양해 일반인들도 쉽게 곰취나 잔대, 미역취 같은 산나물을 심고 수확할 수 있도록 한 농장이다. 수확된 산나물은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농사도 사업도 천천히 흐른다
서울에서 살던 그가 자연으로 들어온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제가 이 산의 대표이자 의사결정권자니까요.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면 스트레스받을 일은 많지 않아요. 신선한 새벽 숲의 공기를 마시고,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길을 산책하는 일은 정말 즐겁죠. 딱히 일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숲으로 출근하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아직은 작은 농장에 불과하지만 이제 그의 꿈은 기지개를 펴고 있다. 먼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운 뒤 하나하나 진행 중이다. 산속에 전기를 들이는 일도 3년에 걸쳐 진행했다. 산농사는 초기 투자가 많고 수확을 하려면 2~3년 걸리기 때문이다.
“7만4000평 규모의 산에서 활용하는 땅은 5000평이 안 돼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단순히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숲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요즘 주목받는 야외활동인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만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외 스포츠)이나 라디엔티어링(rad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 대신 라디오를 지참하고 정해진 주파수에서 방송되는 안내에 따라 정해진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임) 같은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오셔서 맘껏 즐겨주세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