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
폴란드 남부에 자리한 크라쿠프는 옛 폴란드의 수도다. 17세기 바르샤바로 천도하기 전까지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바르샤바는 세계대전 때 완전 파괴되어 온 도시를 새로 복원했지만 크라쿠프는 옛 유적지가 고스란히 남은 고도다. 구시가지는 세계유산 등재가 시작된 첫해(1978)에 지정되었다. 매력이 폴폴 넘치는 그곳엔 동양적인 것들도 남아
2011년의 일이다.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기나긴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고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풍속인물화대전’에서 공개하는 조선시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미인도
공자(BC551~BC479)는 ‘논어’ 양화편(陽貨篇) 26장에서 “마흔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더 볼 것이 없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고 설파한다. 스스로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으니 마흔 살을 인격이 형성되는 때로 본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도 “태어날 때는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
필자가 어린 시절 10살까지 살았던 곳이 대전이다. 수많은 날을 살아오면서도 그 10살 때까지의 추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내 머릿속에 깊이 간직되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 날들을 잊지 못하고 필자는 대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
전에는 친가 외가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 이모가 대전에 살고 계셨지만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돌아가
운명을 말하는 이상용(李尚龍·48)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기도 한 ‘운명’을 새삼 되새겼다. 평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둔하듯 기거하며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는 드로잉, 판화, 벼루, 조약돌, 바큇살, 의자, 상여 등 독특한 오브제들을 사용하며 남들과 다른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다. 한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 얼마나 대단하기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그려냈을까? 한국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 여성 작가의 전시회는 이렇듯 가벼운 궁금증으로 문을 두드리게 한다. 전시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듯 초기작을 접하고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감상하니 점점 그 이름이 각인된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
필자는 서울에서 55년 넘게 살고 있지만, 고향은 대전이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대전에 살았던 기간은 어린 시절 10년 정도인데 그런데도 대전의 곳곳을 잘 알고 있고 대전에 대한 향수로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는 서울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생이 되었을 때까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각 한 달간을 꼭 대전으로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