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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경북 예천군 풍양면 시골에 사는 전용숙씨 부부
- 글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귀촌을 하자고, 시골의 자연 속에서 노후의 안락을 삼삼하게 구가하자고, 흔히 남편 쪽에서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발칙한 발상이라 규탄당하기 십상이다. 아내에 의해서 말이다. 무릇 여자란 명민하게 머리를 쓰는 버릇이 있는 종족이다. 감관이 발달한 이 고등한 생물체는 도시의 아파트라는 쾌적한 온실과 결별하고 시골이라는 야생으로 이주하는 ‘거사’에 따라붙을 온갖 불편과 고생을 미리 훤히 내다본다. 일테면, 시골엔 손쉽게 쇼핑을 즐길 마트나 백화점이 없으며, 우아한 사교를 즐길 문화공간도 열악하고, 자칫 고독을 벗 삼아야 할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 풀이나 해충에게 시달릴 일이 정말이지 몸서리치게 싫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대뜸 반기를 들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귀촌을 선창한 남편은 머리칼을 득득 쥐어뜯으며 부르짖는다. “아아, 괴롭고 괴롭도다. 마누라는 어쩌면 그토록 나와 취향과 이상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무슨 잔인한 운명의 농간이란 말이냐!” 소나기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비감에 젖어 속으로 악을 쓰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불운을 타박하며 귀촌의 꿈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귀촌생활에의 도도한 로망과 세찬 영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편들의 경우엔, 불굴의 의지를 발동해 아내를 기차게 구워삶을 정교한 방책을 새삼 모색한다. 당나귀처럼 드센 고집으로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한, 자못 그럴싸한 유인책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청사진을 개발할 경우, 그는 비로소 성공을 거둔다. 나는 지금 경북 예천 풍양면의 시골마을에 있는, 정진성(69)씨 내외가 사는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정씨의 귀촌은 순탄한 과정을 밟았다. 상당수의 귀촌 부부들이 난해하고도 예리한 충돌과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귀촌에 이르지만, 그는 아내의 갈채와 자비에 힘입어 쾌조의 시발을 했다는 게 아닌가. 부부가 의기투합한 귀촌 서울에서 살았던 정씨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색적인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걸 알아차렸다. 서울을 냅다 걷어차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초저녁별처럼 영롱하게 들솟았던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들끓고, 소음과 미세먼지가 난무하고, 계산과 꿍꿍이가 창궐하는 대도시, 그 머리 아픈 정글을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이 심상치 않은 기분은 점점 자라 확고한 신념으로 비약했다. 이후 그는 드디어 아내에게 귀촌을 제안했다. 아내 전용숙(64)씨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선선히 동의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진성씨는 귀촌을 둘러싼 아내와의 논쟁이나 힘겨루기를 일거에 면제받은 셈이다. 그렇게 단숨에 의기투합해서 부부가 시골에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 아내 전용숙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통은 여자들이 귀촌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시골로 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어요. 남편이나 저나 서울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제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을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요. 귀촌을 하면 실컷 꽃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어요.” “꽃의 그 무엇을 매우 좋아하죠?” “음.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이나 향기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같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피어난다는 게 참 좋아요. 크거나 작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든 초목마다 제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우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남편께서 귀촌을 발상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생활이 주는 피로감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남편은 토목 기술자로 평생 공사 현장에서 뛰었어요. 대림산업 부장으로 재직했던 1996년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로 토목 현장을 누빈 사람이었죠. IMF 직후엔 심각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엔지니어에겐 정년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이 가능하죠. 그러나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신에 공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비즈니스상의 술자리가 잦아 더 이상 일을 계속하다간 몸부터 무너질 거라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즈음 귀촌을 착상했는데, 다행히 남편의 고향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10년째 비어 있는 집이 있어 결정과 실행이 빨랐어요. 그러고 보면 저희는 귀촌이자 귀향을 한 경우라 봐야겠죠.” “예수조차 고향에선 배척당했다고 해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쏠렸을 이웃들의 각별한 관심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텃세랄까, 그런 거 말이죠? 처음 그런 문제에 염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워낙 인심 좋고, 반듯한 풍속이 정착된 시골이라서 오히려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융화가 쉬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우리 마을의 노인회장이에요.” 전용숙씨 내외가 사는 집의 풍색은 소탈하다. 시부모님들이 살았던 당시의 구색을 가급적 그대로 놓아두거나 살려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약간의 손질과 약간의 단장을 했을 뿐이다. 인간이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집이라는 사물 역시 결국은 자연으로 귀환하는 법이니 굳이 거창한 인위를 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햇볕이 물살처럼 찰랑이며 들이쳐 화단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 이미 만족스럽고, 대기의 입자를 흔들며 불어오는 솔바람, 강바람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유리창이 있기에 더욱 흡족하다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시골살이 3년을 통해 배우거나 얻은 것 중에 최상의 것은 무욕(無慾)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라지. 시골생활이 부여하는 절호의 기회들 집 뒤편으로는 제법 너른 텃밭이 딸려 있다. 12월의 텃밭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하지만 온기라 할 만한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서울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키워 자연과 땅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웠던 전씨에게 시골 텃밭은 숫제 낙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녀는 갖가지 작물을 심어 기른다. 풀을 뽑아내는 일이 고역스럽다기보다는 미안스러워 내심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보낸다. 텃밭이니 가혹할 정도의 노동은 필요치 않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기에 소출에 욕심을 낼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비지땀을 흘려 공을 들이는 건 작물들이 갓 태어난 손주나 노랑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애틋한 생명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텃밭 농사를 서정적으로 즐긴다. 도시의 여자들이 찜질방에서 즐기듯이, 찻집에 둘러앉아 애먼 남편들의 흉을 푸짐하게 늘어놓으며 수다를 즐기듯이, 그녀는 텃밭에서 유유하게 노닌다. 텃밭보다 더 오래, 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꽃밭에서 구현한다. 그녀는 해마다 30여 종의 화초를 가꾼다. 꽃철이면 울안에도 울밖에도 온통 꽃이다. 경북대 농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꽃은 만고에 친애할 만한 동무다. 유심한 눈길로 꽃을 바라봐 꽃과 바람이, 꽃잎과 햇살이 어떻게 속삭이는지를 재빨리 간파한다. 폭풍에 찢긴 꽃대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 만개한 꽃들의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에 기쁨을 담뿍 담는다. 그렇기에 시골의 나날은 태반이 꽃날이렷다. 이런 자각을 할 때면, 그녀는 서둘러 일찌감치 귀촌을 하지 않은 것을 살짝 아쉬워한다. “서울에 살 때 실내원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실내조경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화센터 원예 강좌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어요. 꽃을 즐기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원예치료사 자격증도 있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치료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일상 안에 꽃 사랑이 들어와 있을 경우, 한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 같아요.” “꽃을 너무 편애하는 건 아네요? 사람도 꽃 아닌가(웃음)?” “맞아요. 사람과 꽃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시골에 살며 더 실감해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요즘의 시골 인심도 도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보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래요. 뭐든 나누고 돕는 풍속이 여전하거든요. 귀촌한 뒤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죠? 그건 시골의 바탕에 깔린 나눔의 정서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라 봐요. 무조건 나누고 베풀어야 해요. 그런 처신이 손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득을 얻는 현명함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시골생활이란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절호의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가 저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상은 이웃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 바로 그런 것이에요. 나만을 중심에 놓는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남들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건 참 잘 사는 인생이지 않겠어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평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할 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망둥이는 자주 길길이 날뛰어 소란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마음의 동향을 주시해서 단속할 수 있는 기회를 시시때때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게 귀촌생활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시골생활을 무난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의 스케일을 확대해야 한다. 마을 전체를 나의 집으로, 마을 사람 전부를 내 가족으로 바라보는 광폭의 마음, 그리고 소소한 풀꽃에까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까지 가세한다면 귀촌의 나날들은 안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시골에 살며 저는 많은 걸 얻었어요. 서울에 살 때엔 부부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기 내려온 뒤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렇다 해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미스터리이지만, 남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기할 건 딱 포기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서울에서 지출했던 생활비의 절반쯤이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매력적이죠. 천성이 게으른 사람들에겐 오직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갖가지 노동도 운동이나 춤처럼 즐길 줄 아는 힘이 생겼고요,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어요. 남모를 애환? 숨기고 싶은 고민? 그런 게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사실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인 존재잖아요? 마음에 소용돌이가 칠 때면 강변을 산책해 속을 비워냅니다. 우리 마을의 멋진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함께 걸어보실래요(웃음)?” 전씨 내외가 앞장서 강변으로 향한다. 첼로의 저음처럼 깊어가는 12월의 강변 오솔길. 강가에 늘어선, 잎 떨군 나무들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모습으로 비쳐서. 사람이 어떻게 저 겨울 나목의 허심(虛心)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마는, 가급적 비우고 또 비우라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전용숙씨가 누리는 소박한 시골생활의 즐거운 지향도 비우기에 있다는 것이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1-0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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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광필 50플러스인생학교 학장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내 안의 따뜻한 본성이 깨어나요"
- ‘50년의 무뎌진 칼날을 다시 세우는 시간’, ‘꼰대를 졸업하는 것이 목표였던 수업’, ‘남편을 후배로 만들고 싶은 학교’. 서울50플러스 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졸업생들의 반응이다. 겉치레로 끝나는 은퇴 수업이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교육의 현장, 그곳의 중심에 정광필(鄭光弼·60) 학장이 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닌 같이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정 학장의 인생 배움터를 찾아갔다. 2015년 SBS 다큐멘터리 에서 소위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길을 인도했던 그가 이번엔 베이비붐 세대의 인생 2모작을 위한 교육자로 나섰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르치는 학생들이 10대에서 50대 이상으로 바뀌었다는 것. 국내 최초의 도심형 대안학교인 ‘이우’의 초대·2대 교장으로도 지냈던 그는 여전히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참교육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 때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때 주안점을 둔 것이 ‘어떻게 아이들 스스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였어요. 고민하던 끝에 희곡 을 가지고 교육연극을 해보기로 했죠. 연극교육이 아닌, 연극을 매개로 한 교육연극이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운명을 거역하고 여러 고난에 직면하는 내용인데, 결국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찾아가는 게 목적이었죠. 다행히 결과가 좋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본 어른들이 ‘이거 우리도 한번 해보면 정말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중·장년기야말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내 운명이 뭔가를 고민하는 때잖아요. 그들에게도 이러한 교육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판단했죠. 그때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50플러스인생학교입니다.” 지난 인생에서 뺄 것, 앞으로 인생에서 더할 것 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육을 하지만 책상에 앉아 하는 수업은 극히 일부다. 그보다는 워크숍 형태의 활동이 주를 이룬다. 인생학교에 참여한 이들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느끼고 변화해나가길 바라는 의미에서다. “이들에겐 강의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동안 살아온 삶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죠. 새로운 걸 배우는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끄집어내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동안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직장이나 가정을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 와 보니 막연해져버렸잖아요. 그렇지만 이미 오십 넘게 살았으면 사람이 잘 안 바뀌거든요. 속에서는 고민이 많지만 드러내기 어렵고, 그런 미묘한 차이를 뛰어넘는 게 강의 하나 듣는다고 해결되지는 않죠. 길게 호흡하면서 깊이 있는 교육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단기적인 자극보다는 내재해 있는 열정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교육은 총 10주 동안 이루어진다. 학교라는 틀 안에서 학장이라 하면 권위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러한 인식부터 타파하고자 했다. 불필요한 구색 맞춤식 교육이나 의전을 없애고 알맹이 중심으로 가자는 게 그의 방침이다.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던 벽을 허물고 다가가니 학생들도 서서히 자신의 교육활동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의를 들으러 온 수강생이 아니라 당사자 입장이 돼야 해요.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이끌음보다 자신이 중심이 돼서 수업에 참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수업이 내 것이 되고, 내 학교가 되고, 그러다 보면 정말 내가 뭔가를 풀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죠. 그 느낌을 가져야 즐거운 변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중·장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대부분 강의 중심이잖아요. 명강사가 와서 멋진 이야기를 하고 가요. 그러면 일단 느낌이 좋죠. 느낌은 좋은데 그래 그럼 그다음엔? 이런 문제가 남잖아요. 느낌만 주고 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삶을 바꿔 갈 수 있는 과정이 뒤따라야죠.” 인생학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커뮤니티 활동’을 제안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이를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성함으로써 아이디어와 힘을 얻고, 이를 토대로 실질적인 활동이 이어지게끔 지원하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교육에 열정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입학 서류에 함께 제출했던 ‘마음 준비서’가 큰 역할을 했다. “정원이 60명인데 선착순으로 뽑지 않아요. 그 대신 두 가지 질문을 하죠. 첫째, 지난 삶에서 뺄 것은 무엇인가. 둘째, 앞으로의 삶에서 더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각각 A4용지 반 페이지씩 쓰게 하는데 이 과정에 부담을 느껴서 포기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덜컥하는 거죠. 그러나 이 질문은 입학할 때뿐만 아니라 졸업하면서도, 그 이후에도 인생에서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해요. 이걸 ‘마음 준비서’라고 하는데 이 한 장을 쓰고 나면 교육에 참여하는 결의가 달라집니다. 내가 이곳을 통해서 뭘 얻고자 한다는 게 더 분명해지는 거죠. 어떤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마치 소비자처럼 짜인 프로그램을 듣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게 아니라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발견해나가는 게 중요해요.” 우리가 달라져야 우리 사회가 달라진다 마음 준비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인생학교에서의 수업은 결코 시간 때우기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만큼 밀도 높은 수업으로 차곡차곡 배움의 보람을 채우는 학생들이다. 혹여나 새로운 교육 방식에 불만을 품거나 힘들어하는 이는 없을지 궁금했다. “이러한 교육시설과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한 분들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분들이죠. 거기에 마음 준비서까지 쓴 덕에 의욕이 더 생겨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니 큰 어려움은 없어요. 오히려 이런 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분들이 염려스러운 거죠. 그런 분들에게 말로는 설득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보다는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들이 자신의 변화된 삶을 보여줄 때, 그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넘어서 한 발을 내딛게 되겠죠. 이런 현상이 널리 퍼지면 좋겠지만, 처음 가는 길인 만큼 늘리는 데 연연해하기보다는 제대로 확실히 다져나가야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 같아요. 그래야 진심이 전파되고 그렇게 스스로 변화하고자 인생학교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겠죠.” 정 학장은 인생학교 졸업생들이 또래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를 비롯한 베이비붐 세대의 에너지가 아직 여실히 남아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한 우리 중·장년층은 많은 걸 가진 세대예요. 능력적으로도 그렇고, 그동안 살아온 경험도 풍부하고, 경제력도 있는 편이고, 건강도 좋고. 게다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우리 사회를 여기까지 끌어왔고, 세상을 한번 바꿔본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어요. 오히려 내 능력은 이만큼 있는데 세상은 날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을 느끼기도 하죠. 그런 분들이 뭔가를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어느 세대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얻은 바가 많을 거 아녜요. 이제는 어깨에 힘을 좀 빼고 그동안 누린 혜택을 사회에 나누고 힘을 보태야죠.” 중·장년층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형태의 활동으로 인생학교에서는 연극이나 독립영화를 만드는 청년을 돕는 커뮤니티가 생겨났다고 한다. 정 학장은 이러한 세대 간 교류를 통한 긍정적 영향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친구들은 아이디어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네트워크나 능력이 부족하잖아요. 중·장년 세대는 그런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란 말예요. 여기서 도와준다는 개념은 전적으로 책임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도와주는 위치에 서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렵죠. 그러나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호흡을 길게 가다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서 젊은 친구들과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살다 보면 점점 보람이 쌓일 거예요. 인생학교도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형성해내는 주체를 만들고, 그들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도울수록 덜어지는 상처, 더해지는 온기 그는 중·장년 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철저히 돕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는 정 학장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충고다. “인생학교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여러분이 이 학교의 중심이고 주인이다. 당사자가 돼야 한다, 나는 그저 도울 뿐이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관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도 여전히 늘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가르치려 드는 행동’이에요. 교육자로서 자꾸 뭔가 멋진 말을 하려고 하고, 당위를 내세우고…. 그걸 한마디로 꼰대라고 하죠. 나는 꼰대처럼 보이고 싶지 않고 그걸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늘 실천해왔지만 여전히 그런 행동이 남아 있어요. 그들이 그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잘해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손을 보려고 한다는 거죠. 철저히 돕는 위치에 서려고 늘 신경을 쓰는 데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가르치는 것이 아닌 돕는다는 말을 자주 강조하는 정 학장은 인생학교의 학생들을 ‘학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보다는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인생의 ‘동료’라는 표현이 더 좋다고.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동료들을 돕고, 동료들과 함께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그에게 ‘도움’이라는 행위가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돕는다는 거는 내가 남을 돕는 건데 사실은 도움을 받는 상대보다 내가 더 큰 걸 얻어가는 것 같아요. 남을 도울 땐 뭐랄까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자극하는 듯해요. 우리 세대를 보면 세상이 불쾌하고 화가 치밀고 그러면서도 상처받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거든요. 그런 분들이 누군가를 돕다 보면 순수한 마음이 되살아나고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풀리면서 굉장히 여유로워져요. 그러면서 자존감도 올라가고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죠. 그런 변화를 느낄수록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사회도 점점 따뜻해져요. 그래야 좀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 50플러스인생학교 신청 및 문의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sb.50campus.or.kr 02-372-5050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 다가오는 3월 봄 학기를 개강한다(중부캠퍼스도 개강 예정). 신청하는 커리큘럼에 따라 수강료가 다르다.
- 2017-01-0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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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방학 이야기] 추억의 장소는 사라져도 그리움은 남는다
- 필자는 지금도 명동을 좋아한다. 젊었을 때 필자의 메카는 명동이었다. 명동은 대학 시절 학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는 종로와 광화문이 좋아서 많이 쏘다녔다. 6명의 친구가 모여 만든 클럽 ‘디지 걸’이라는 모임도 있었다. ‘dizzy’는 어지럽다, 아찔하다는 뜻인데 깜찍한 친구들이 ‘우리는 아찔하게 멋진 애들’이라는 의미로 의견을 모아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긴 해도 즐거웠던 시절이다. 광화문에는 학생들에게 유명한 제과점이 있었다. 2층 벽이 낙서와 사인으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었던 제과점이었다. 우리도 그 벽 한쪽에 6명의 이름과 ‘디지 걸’이라는 사인을 해놓았다. 그 6명의 ‘디지 걸’은 다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궁금하고 보고 싶다. 나는 음악 듣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때는 규모가 큰 다방들이 많았는데 신청곡을 적어 DJ 박스에 넣으면 그 음악을 틀어주곤 했다. 그럴 때 나지막하고 약간 느끼한 목소리의 DJ가 “어디에서 오신 누구의 신청곡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우리들 이름을 불러주면 그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지금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금란다방도 즐겨 찾았던 곳이다. 종로통의 쎄시봉, 디세네, 르네상스, 종로에서 무교동 쪽에 있던 DJ 이종환의 쉘부르도 자주 갔다. 명동으로 가는 길 골목에 있는 로방도 운치 있었다. 지금도 명동에 들어서면 분위기 있던 ‘목신의 오후’에서의 차 한 잔이 그립다. 명동 예술극장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 예술극장이 금융 건물로 바뀌는 바람에 허전하고 아쉬웠는데 다행히 얼마 전 예술극장으로 다시 돌아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명동 제일의 번화가인 명동 사거리 코너에는 잊지 못할 추억의 청자다방이 있었다. 예술극장 건너편에 있던 이 다방은 규모가 엄청 커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 넓은 공간에 마련된 좌석들이 보였고 2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역시 넓은 공간이 있었다. 필자는 친구들과 주로 이곳에서 만났는데 늘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청자다방이 생기기 전 이곳은 ‘시라노’라는 미니백화점이었다. 3, 4층의 건물에서 중저가의 물건을 팔던 이 백화점은 당시에도 유명했던 음악가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씨의 어머니가 경영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청자다방은 명동 안쪽의 심지다방과 더불어 큰 다방의 대명사였다. 한껏 겉멋이 들어 있던 우리 친구들은 사보이호텔 골목 안쪽에 있는 ‘화이어 버드’라는 곳에서 커피 값보다 두 배는 비싼 ‘슬로우 진’, ‘스쿠르 드라이버’, ‘카카오’ 등 달콤한 음료들을 사 마시고 다녔다. 어지간히 폼생폼사 잘난 척을 하고 다닌 것 같다. 명동 또 다른 골목의 2층에 있던 ‘이사벨라’라는 다방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가팔랐던 ‘엔젤’도 지금은 모두 없어져 그리운 곳이다. 미도파백화점 옆 건물에 있던 ‘포시즌’도 생각난다. 그곳에 가수 정미조씨가 나와 ‘개여울’과 팝송을 라이브로 감미롭게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정미조씨를 보고 예쁘다고 해서 한판 싸움을 벌였던 남자 친구도 생각난다. 음악은 모든 장르를 좋아했다. ‘딥 퍼플’, ‘산타나’, ‘소니 앤 쉐어’ 등의 노래를 즐겼고 ‘스모크 온 더 워터’ 같은 곡은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 이런 팝송이나 샹송, 칸초네 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클래식을 들으러 음악 감상실에서 엄청 많은 시간을 보냈다. 클래식 감상실은 종로의 르네상스가 유명했다. 내가 자주 갔던 곳은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있던 ‘필하모니’라는 클래식 전용 음악 감상실이었다. 다른 다방과 달리 대화를 할 수 없고 조용히 음악 감상만 해야 했다. 음료수를 들고 감상실 안으로 들어가면 극장처럼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고 무대 쪽엔 음악명이 쓰인 보면대가 놓여 있었다.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이곳에 몰려와 클래식 음악에 빠져 있곤 했다. 필자도 조용히 앉아 우유나 콜라를 마시며 잘 알지도 못하지만 열심히 클래식 음악을 감상했다. 요즘도 한 달에 몇 번씩은 그냥 명동에 나간다. 여전히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거리의 풍경도 바뀌고 추억의 장소도 없어졌지만 명동에 대한 필자의 그리움은 여전하다.
- 2017-01-0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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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브라보 기획] 시니어 세대, 우리의 소망은요~!
- 2017년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다. 어수선하고 복잡했던 일들이 올해는 꼭 정리되고 치유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니어 세대의 마음은 어떨까? 새해를 여는 시니어들의 마음도 한번 열어보았다. 취재협조 강남시니어플라자 은막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서임철(서대문구 홍은동·76) 저는 시니어 배우입니다. 서울노인영화제에 제가 출연한 작품이 출품된 적도 있어요. 연극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데 활동이 좀 더 활기찼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단원이 열일곱 명인데 올해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각 지역 노인대학이나 단체를 방문해 공연 봉사를 하고 싶어요. 노인 연기자를 위해 정부 차원의 문화 관련 분야 지원이 늘었으면 해요. 제가 노후에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연기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인 소망은 영화 주인공을 꼭 한번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디션도 열심히 보고 있어요. 난타 여왕을 꿈꾼다! 윤상민(강남구 개포동·66) 작년 8월부터 난타를 시작했어요. 10월에는 재능기부 공연도 했고요. 아직 미흡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전문 공연자만큼 난타를 잘하고 싶어요. 왕성하게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일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완벽하게 잘하고 싶어서 올해는 더 열중해서 공부를 해볼 생각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바랍니다. 2017년 나는 댄싱퀸 문혜경(강남구 청담동·69) 젊을 때는 운동도 많이 했는데 10년 정도 안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한 4~5년 전부터 많이 아팠어요. 혈압, 신장, 부정맥 이런 걸로요. 아프면서 버킷리스트를 한번 써야겠다 생각했죠. 그중에 무용을 좀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선 라인댄스를 배웠어요.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됐는데 너무 좋아요. 올해는 차밍댄스도 하고 고전무용에도 도전할 겁니다. 줌바댄스도 할 거예요. 신나는 음악에 다양한 스텝과 세련된 춤 동작이 멋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춤을 추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 대상에 도전한다! 남궁유선 (강남구 방배동·69) 즐겁고 재밌게 사는 것이 소망 아닐까요? 더 늙기 전에 예쁜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시니어 워킹을 배우고 있어요. 어렸을 때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어요. 사는 것에 급급했고 아이들 키우느라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어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열심히 나를 위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요. 제 꿈은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입상하면 좋겠어요. 올해 도전하려고 합니다. 딸? 결혼하면 안 되겠니? 구신자(관악구 삼성동·70) 제가 허리가 많이 아픈데 치료 꾸준히 받고 더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딸이 올드미스예요. 마흔셋인데 시집을 안 가요. 시집 좀 갔으면 해요. 그런데 딸은 이대로가 좋다고 하네요. 굳이 등 떠밀고 싶지는 않아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면 말입니다. 제가 강남 시니어 모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014년부터 TV, 신문, 잡지에 많이 나왔어요.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데 욕심이라면 일인자는 아니더라도 내 이름 석 자가 알려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글 쓰는 남자 기대해요! 송영섭 (경기도 용인시 영덕동·72) 우선 풍전등화 같은 우리나라가 빨리 안정을 되찾고 바람직한 지도자도 뽑고 평화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통일의 여건을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외교통일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30여 년 했어요. 국제정치나 남북통일에 관한 책도 내고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올해는 수필 같은 부드러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유머와 관련한 책을 두어 번 낸 적은 있어요. 또 제가 한국검도협회 고문으로 있는데, 기 수련에 관련한 책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거 다 떠나서 순수한 삶의 철학이 담긴 수필을 쓰고 싶습니다. 화려한 외출은 이제부터다! 한명희(강남구 역삼동·62) 연극을 시작한 지는 몇 개월 안 됐어요. 그래도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전에는 주부였어요. 그러다가 환갑이 지나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울해하고 있을 때 친구가 연극을 권하더군요. 연극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완전 초보자인데 주연이셨던 분이 안 나오시면서 얼떨결에 주인공이 됐습니다. 지금 연기에 푹 빠져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시인으로 등단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비전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가족들이 제가 하는 활동을 인정해줬으면 해요. 우선 가족한테 칭찬을 듣고 싶어요. 제2인생에서 다시 청춘인데 제가 집에만 있으면 되겠어요?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보니 화려한 외출이었어요.첫 공연 때 가족을 초대할 겁니다. 장한 나를 보여주고 잘했다는 소리를 꼭 들을 거예요. 발길 닫는 대로 떠나는 해가 됐으면… 이주현(중랑구 중화동·72) 남편 병간호를 14년 동안 하면서 저도 허리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소리 지르고 두들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춤이랑 사물놀이를 배우고 있어요. 힐링도 되고 자세 교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제가 자세가 좀 엉거주춤하거든요.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무용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면 자세를 다시 잡아요. 올해는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요. 남편을 챙겨야 했고 저도 아팠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못 다녔어요. 국내 여행도 많이 못해봤는데, 더 늦기 전에 제주 올레길을 걸어볼까 합니다. 혹시 여유가 생기면 유럽 여행도 꿈꿔 보려고요. 그러나 꿈으로 끝날 거 같아요. 허리가 아파서 비행기를 오래 못 타거든요.
- 2016-12-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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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규의 心冶데이트] 고독한 애주가 장은숙의 눈물, "70대가 되어도 최강 동안 소리를 듣고 싶다"
- 1957년생 장은숙은 1977년에 데뷔해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고독했기에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것. 시집 한 번 안 간 그녀는 요즘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이 편하고 재밌단다. 올해로 60세인 장은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최강 동안을 자랑하며 ‘함께 춤을 추어요’와 ‘당신의 첫사랑’ 등 여전히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몇 년 전 (KBS 1TV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무대에 오랜만에 나타난 장은숙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젊었을 때 보았던 장은숙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련되어졌고 농후한 맛까지 더해져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섹시해져서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나이가 60인데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강 동안(童顔)이었다. 그때 TV를 보면서 장은숙의 미모와 목소리에 푹 빠져 팬이 되어버렸다. 그 후 유튜브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와 마주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한량 이봉규는 정말 행운아다. 인터뷰를 마친 후 내가 내린 그녀의 최강 동안 비법은 고독이다. 그녀는 결혼한 적이 한 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봤다. “남들은 결혼을 세 번씩도 하는데 난 이게 뭐냐?”고 페인트 모션(feint motion)까지 쓴다. 그런 엉성한 페인트 모션에 넘어갈 한량 이봉규가 아닌 걸 금방 눈치 챘는지,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이 편하고 재밌다”고 자기 진단을 내린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과 살지 않는 바에야 혼자 사는 것이 편할 수 있다. 하기 싫은 것을 파트너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러다 보면 툭하면 싸우게 되고 스트레스는 가중된다. 그런 일상이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버리면 어느새 늙어버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데 장은숙은 철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다. “싫은 사람은 아무리 비즈니스로 연결되어 있어도 만나지 않는다”는 고집불통적인 자기애(自己愛)가 최강 동안의 비법이 된 것이다. 고독하기에 자기만 사랑했고 그러다 보니 고독을 즐기는 선순환이 오늘의 장은숙을 만들었다. 물론 나름대로 젊어지려고 발버둥치는 노력도 병행했다. 15년째 경락 마사지를 받고 있고 운동은 늘 일상이다. 이런 노력도 결국 자기애의 일환이다. “70대가 되어도 최강 동안 소리를 듣고 싶다”는 그녀의 욕심은 무죄다. “더 이상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는 다 팽개치고 화장도 안 하고 산에 파묻혀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라. 얼마나 자기애가 강한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고독을 즐기기로서니 나이 60인데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봤다는 그녀의 말이 믿기 어려워 파고들었다. “가끔 섹스하고 싶은 충동이 없냐?”는 이봉규의 도발에 그녀는 “솔직히 운동하고 일하는데 열정을 쏟다 보면 피곤해서 그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고 답변한다. 그러나 오히려 섹스 생각이 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운동과 일로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운동과 일은 그녀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에너지 발산법이기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녀는 20대부터 요즘 유행하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을 좋아했다. 지금도 집에서 혼술을 즐긴다. 어떨 때는 혼자 단골 바(bar)에서 새벽 두시까지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술 마시는 모임도 피곤해서 차단하고 혼자 마신다. “모임에 나가 말 상대하기도 피곤해서 싫고 차라리 편하게 집에서 마시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그녀의 진단을 백퍼센트 이해한다. 한량인 나도 혼자 집에서 TV 보면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지금은 띠동갑 마누라와 신혼생활에 푹 빠져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제대로 막걸리를 즐기고 있지만). 고독을 즐기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을 밥 먹듯 하는 그녀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대화가 통하는 멋진 남자와 한잔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공연이 끝나고 혼자 집에서 술 마시면 뭔가 허전함을 느낀단다. 오늘은 나와 ‘그루브’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진토닉을 마시고 있다. 이미 1차로 주꾸미에 막걸리를 마신 후라서 취기가 슬슬 오르는지 “혼자 술 마시면 슬플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남산에서 혼자 술 먹고 걸어서 집에 가는데 눈물이 났다”고 회상하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고독에 지칠 때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피아노 반주에 장은숙이 노래를 뽑아댔다.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가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걸쭉한 허스키 보이스에 서구적인 마스크가 김정호의 노래를 지워버린다. 내친김에 앙코르, 삼코르, 사코르를 막 받는다. 토니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카펜터스의 ‘This Masquerade’를 재즈풍으로 너무나도 멋지게 불러젖힌다. 그녀가 아직 독신으로 살고 있는 것은 몇 번의 찬스를 놓쳤던 이유도 작용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과 친척 동생까지 키우고 뒷바라지하느라 젊었을 때는 마음의 여유조차 누릴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함께 춤을 추어요’와 ‘당신의 첫사랑’ 등 잇따른 히트로 스타가 되었을 때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고, 37세 때부터 시작된 일본 생활은 엄격하고 혹독했기에 연애가 여의치 않았다. 매일 6시 반에 기상해서 학교에서 일본어 배우고 노래와 춤까지 연습하느라 마치 군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찬스를 놓친 것은 일본 가기 전에 잠깐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면서부터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에 또 다른 사랑을 찾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혹독한 일본에서의 연습생 시절, 한국에 있던 그 남자는 장은숙과 연락도 잘 안 되고 이상한 헛소문(“아쿠자에 잡혀갔다”)까지 돌자 그녀를 잊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달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 뒤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지만 음양의 조화가 안 맞아 연애를 못했다.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면 그가 도망가고, 나에게 달려드는 남자는 내가 싫고, 남자에게 애교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이라 연애가 잘 성사되지 않았다”고 애써 핑계를 댄다. 이토록 매력 있는 여성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애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무엇보다 고독했기에 오히려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녀는 1977년 동양방송(TBC)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최초의 오디션프로그램인 에서 연말까지 승승장구한 끝에 우수상을 받고 데뷔했다. 이때 처음 받은 참가번호가 행운의 숫자인 ‘7번’이었는데 월말 결선에서도 7번을 받았고, 연말 결선에서도 7번을 받았다. 하늘이 그녀를 미리 점지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국악을 배운 그녀는 가끔 절에 들어가서 연습을 하곤 했다. 연말에 우수상을 타고 나서도 득음을 위해 화곡동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2년간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래서인지 끈적끈적한 허스키 보이스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1981년에는 코미디언 이주일과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도 했다. 톱스타로서 승승장구하던 장은숙에게 해외 진출의 기회가 온 것은 1995년. 그녀는 일본 토라스레코드 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장수(Chang Suu)’라는 예명으로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계은숙이 일본에서 한참 활동한 후여서 같은 이름의 은숙이라는 본명 대신 일본 기획사에서 지어준 ‘장수’라는 예명을 사용했다(2009년부터는 본명 장은숙으로 다시 바꿨다). 그녀는 데뷔 첫해 일본 유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2000년 발표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방송 및 각종 차트에서 12주 이상 1위를 차지하며 총 25만 장의, 당시로서는 상당한 앨범 판매 기록도 세웠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음반은 21장인데 이 중 14곡이나 유선방송(리퀘스트 차트) 1위에 올랐다. 지금은 2003년에 설립한 연예기획사 ‘오피스 장수’의 대표로서 후배 양성도 하고 있다. 요즘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국에서의 활동 비중을 점차 늘려나갈 예정이다. 나는 그녀의 노래 중 ‘당신의 첫사랑’을 가장 좋아한다. 예전에는 이 노래 가사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불렀는데 지금은 감정이 달라 다른 분위기로 노래한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스무살 시절, 다섯 살 연상의 연대생 오빠와 신촌에서 막걸리 마시던 추억이 떠오른단다. 최강 동안이니만큼 이제는 다섯 살 이상 연하의 멋진 남자와 첫사랑 같은 싱그러운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 그런 날이 빨리 와서 ‘고독한 최강 동안’에서 ‘고독한’이라는 형용사를 빼고 다른 형용사가 붙기를 기대해본다.
- 2016-12-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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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즐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연주회
- 엄마의 지식수준을 높이 평가했는지 필자의 아들이 클래식 피아노 연주회 티켓을 주었다. 뮤지컬도 아니고 연극도 아닌 연주회, 그것도 피아노 연주회라니 속으로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언젠가 몇 번 참석했던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졸린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음악 애호가께는 매우 죄송하지만, 무식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고맙다며 받아 든 초청장 가격을 보고는 안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에 18만원이다. 비싼 표이니 훌륭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 속물근성이 있는 것 같아 멋쩍은 웃음이 난다. 그래도 누구에게 섣불리 같이 가자는 말을 못한 건 장소가 잠실 롯데콘서트 홀이라 우리 집에선 좀 멀고 시간도 밤 8시라서였다. 피아노 전공자에게는 특별하고 좋은 공연이겠지만 유명 뮤지컬도 아닌데 같이 갔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미안할 것 같아서 필자는 그냥 혼자 가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안심되었던 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 그리 생소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젊어서 한때 잘난척하는 치기로 알지도 못하는 클래식을 듣겠다며 명동의 클래식 음악감상실 필하모니에 열심히 드나든 적이 있다. 그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감상해 보았고 전주로 무게감 있게 펼쳐지는 음색에 매력을 느꼈었는데 그 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인 마릴린 먼로의 ‘7년 만의 외출’이라는 영화를 보고 매우 반가웠고 놀랐다. ‘7년 만의 외출’에서 너무나 매혹적인 자태의 마릴린 먼로가 이 음악에 맞춰 걸어 들어오는 장면을 본 것이다. 피아노곡 자체보다 섹시한 마릴린 먼로 때문에 더 인상 깊게 느낀 연주곡이어서 조금 부끄럽다.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진가가 최고조로 나타난 장르는 협주곡을 포함한 피아노 음악이다. 이 곡은 당시 28세 라흐마니노프의 삶의 단면이 투영되어 있는데 작곡가로 겪었던 좌절, 그로 인한 실의와 고뇌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분투의 과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 한다. 1897년에 초연한 교향곡 1번이 악평을 들어 작곡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고 이때 개인적인 불행도 겹쳐 우울증에 빠졌다는데, 그때 최면술사 니콜라이 달 박사의 도움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전보다 더 뛰어난 새로운 협주곡을 쓰게 되어 이렇게 완성된 협주곡 2번은 달 박사에게 헌정되었다. 첫 악장은 마치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묵직한 피아노 독주로 시작된다. 낮고 어두운 화음과 깊숙한 베이스음이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의 정서와 작곡가의 감성이 아름답게 채색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를 있게 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곡이다. 이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탄생했지만 2번보다는 덜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이 연주되었다. 연주자로는 2007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와 2016년 클리블랜드 콩쿠르 우승자인 ‘니키타 문도얀츠’가 연주했다. 귀에 익은 연주가 흐를 때 피아노 선율보다도 마릴린 먼로가 떠올라서 우습긴 했지만 참으로 듣기 좋은 연주였다. 클래식에 무지해서 지루할까 봐 걱정했던 건 기우여서 다행이다. 연주회가 끝났는데도 마음은 아직도 격정적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음을 느꼈다. 아무라도 한사람 같이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된다. 필자가 이렇게 느꼈으니 다른 사람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차가운 밤바람이 뜨거워진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필자의 마음을 달랜 멋진 피아노 연주회였다.
- 2016-12-2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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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스키장
- 한 때 겨울의 꽃이라는 스키에 열광한 적이 있다. 가까운 곳은 양지스키장부터 천마산, 베어스타운으로 갔고 좀 멀리로는 강원도의 아주 예뻐서 인상적이었던 알프스스키장과 용평스키장을 다녔다. 백설의 슬로프를 멋진 11자 포즈로 스키 폴 대를 짚어가며 질주해 내려오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만 그건 잘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나는 A자형으로 간신히 타는 수준으로 시작했다. 나는 참 용감한 편이었나보다. 특별한 강습도 받지 않고 처음부터 무식하게 리프트를 타고 중급자 코스로 올라갔다. 남편과 아들의 도움으로 벌벌 떨면서도 슬로프를 다 내려왔을 때의 그 기분이 생생하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들 중간 슬로프쯤에 있는 간이 쉼터에서 커피와 스낵을 즐길 때도 나는 열심히 이, 삼십 분 씩 줄을 서서 리프트를 기다렸다가 올라가서는 5 분 만에 미끄러져 내려와 또 줄을 서길 반복하며 정말 열심히 탔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멋지게 활강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활기찬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고 나도 저렇게 탈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었다. 스키장 가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몸이 스키에 적응 돼가는 느낌이 들었다. A자로 스키를 벌리고 타는 것에서 약간 다리를 붙일 수 있었으며 언제인가는 모굴 이라고 하는 울퉁불퉁한 눈길도 리듬 있게 즐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또 재미있는 건 처음부터 스키를 식구대로 준비하고 스키복도 갖추었다는 점이다. 미국에 사는 시누이 가족이 방학이라 한국에 왔다. 큰집 작은집이랑 시누이 가족 모두 용평으로 스키 여행을 가기로 했다. 다들 모였을 때 시누이가 어쩌면 하나같이 스키복을 차려입었냐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외국에서는 청바지 차림으로 타는 게 보통이라면서. 세련된 시누이 눈으로 볼 때 울긋불긋 차려입은 우리가 좀 우습게 보인 듯했다. 이제 좀 리듬 있게 탈 수 있겠다고 즐거워하던 어느 날 사고를 당했다. 스키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내 무릎 위로 어떤 아가씨가 엉덩이로 누르며 덧 넘어진 것이다. 순간 나는 찌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냥 느낌인데 그런 소리가 난 것처럼 생각된 것 같다. 미안해요, 하고 그 아가씨는 내려가 버렸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구조 요원이 와서 인대가 늘어 난 것 같다며 나를 들것에 눕게 하고 모포로 얼굴까지 덮어주며 스키를 타고 나를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워서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모포를 살짝 내리고 옆의 풍경을 보았는데 너무 재밌고 신났다. 참 철없었던 시절이다. 그 후 두 달 동안 깁스를 해야 했지만, 스키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겨울철만 되면 스키를 즐겼는데 아이가 성인이 되니 자기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스키장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지금도 집 구석에 스키가 장식품처럼 세워져 있다. 안탄지 오래 되었지만, 추억을 생각하니 버릴 수가 없어서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다시 스키를 타라면 못 탈 것 같다. 이 나이에 넘어져서 어디 한군데 부러지기라도 하면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 슬프다. 겨울이면 하얀 눈밭에서 멋지게 스키나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냥 나도 한 때 다 해 보았다고 만족을 하며 외면하련다.
- 2016-12-2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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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들의 ‘한 달’ 별장 만들기 좋은 도시들①
- 이유 없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곳에는 으레 세계적인 부호나 유명한 배우들이 별장을 짓고 살지만 그 도시가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반 여행자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그 도시에서 한 달 정도만 살면 별장과 다를 바 없다. 이번 호부터 아름답고 특별한 별장을 꿈꾸는 시니어들을 위해 유럽의 멋진 도시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한다. 글․사진 이신화( 저자, www.sinhwada.com) 고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소도시 얼마 전 “폴란드에서 사는 것은 어때?”라고 필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지인이 있다. 평생 ‘일이 내 삶의 전부’라며 살아온 그도 ‘딴 나라’에서 살 생각은 가끔 하나보다. 처음에는 “영국이 좋을 것 같아” 했다가 “미얀마, 라오스는 어때?”라며 급선회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폴란드를 묻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는 아닌 것 같아. 체코의 남모라비아 쪽이 더 나아”라고 답변했더니 귓등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던 그가 TV의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야 활짝 웃었다. 술 좋아하는 그는 체코 모라비아 지방의 인심 좋은 포도 축제에 홀딱 반한 것이다. 지인이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어떠리. 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의 질 차이는 엄청나게 크니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인이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가 결정됐을 때 필자가 나서주면 될 일이다. 지인이 홀딱 반한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추천하고 싶은 도시는 ‘텔츠(Telc)’다. 필자에게 “체코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텔츠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의 느낌은 비슷하기 마련이다. 체코의 대표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도 자신의 책 에서 “우리나라에서 텔츠보다 아름다운 광장을 가진 도시는 없다”고 적었다. 체코 관광청도 “텔츠는 예술가들과 몽상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랑스럽고 연약한 분위기를 내는 도시다”라고 소개한다. 텔츠는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매력이 있는 도시다. 특히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대도시 프라하보다 물가가 50% 싼 모라비아 지역 모라비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텔츠는 프라하에서 150km, 브르노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관광객이 90%나 되는 복잡한 대도시 ‘프라하’를 벗어나 모라비아의 가장 큰 도시 ‘브르노’에 도착했을 때 체감하는 것은 ‘물가’다. 과장 없이 50% 정도 물가가 싸다. 쉽게 예를 들면 커피 값이나 와인 한 잔 값이 1유로를 조금 웃돈다. 브르노를 떠나 텔츠 역에 도착해 10여 분 정도 걸어 호르니브라나 문을 들어서면 올드 타운의 자하리야슈(Zacharias) 광장이다. 광장 주변에는 엇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텔츠는 12세기에 로마네스크 교회의 은신처로 언덕 위(해발 522m)의 늪지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목조 가옥이었으나 1530년에 큰 화재가 났고 당시의 시장이었던 자하리야슈 폰 노이하우스의 통치 아래 대대적인 재건축에 들어갔다. 가옥들은 르네상스식 석조물로 바뀌었고 타운을 에워싼 성벽과 인공 연못도 요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또 한 번 화재가 일어났는데 그때도 같은 방식으로 재건축을 했다. 시장이 사망한 뒤 이 도시는 더 이상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덕분에 텔츠는 유서 깊은 마을(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될 수 있었다. 텔츠에는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85개의 구조물이 있다. 바로크, 로코코 건물이 길게 이어진 유네스코 도시 광장 옆으로는 긴 회랑처럼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건축물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한 몸이지만 제각각 모양새와 색깔을 달리한다. 건물의 정면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분홍색, 하늘색, 노란색, 흰색 등으로 칠해져 있다. 뷔르게하우스(Burgerhaus Nr.15)는 다른 집과 달리 건물에 장식물이 달려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또 한 곳은 미하일 베커 시장의 집인 61호 저택이다. 미하엘 베커는 빵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훗날 텔츠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의 집은 즈그라피토(sgraffi to) 장식으로 1555년에 개축했다. 즈그라피토는 텔츠 성에서 일하던 조각가가 개발한 공법으로 ‘긁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석회 반죽을 이용한 작품이나 도자기 제작에 많이 응용된다. 이외 59호, 520호, 522호 저택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광장에는 페스트 종식 기념탑인 성모 마리아의 기둥이 있다. 조각가 다비드 리파트에 의해 1718년에 제작된, 이른바 구름 형식의 바로크 탑. 마리아의 탑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6각형 못이 있다. 13세기에 로마네스크로 건립된 후 15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개조됐다는 성령성당도 있다. 영화 등 로케이션 현장 ‘텔츠 성’과 종탑 광장 북쪽으로 가면 텔츠 성과 정원이 있다. 고딕 양식의 성은 여느 지역과 달리 소박하다. 14세기, 자하리아슈에 의해 지어진 이 성에서는 즈그라피토 장식의 벽면과 홀 내의 격자무늬 천장,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1945년까지 리히텐슈타인 포드슈타트슈키 백작이 살았던 이 성이 몰수되자 백작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현재 성의 예배당에는 자하리아슈와 그의 아내, 여러 성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때때로 음악회가 개최되는 텔츠 성은 영화 촬영지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성 살인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바토리(Bathory, 2008)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성 뒤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성 야곱성당의 종탑(60m)이 있다. 종탑은 멋진 ‘뷰포인트’다. 종탑에 오르면 바로크 양식의 쌍 탑이 두드러진 건물이 눈길을 끈다. 1651~1669년에 제수이트회가 세운 예수회 성당과 대학으로 텔츠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텔츠의 백미는 올드타운을 양 안으로 감싸 안고 있는 울리츠키와 슈테프니츠키 인공 연못. 도시를 복원하면서 만들어진 ‘물의 요새’는 텔츠를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연못 속으로 유영하는 텔츠의 가옥들을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Travel Data 교통 정보 프라하 플로렌츠 역에서 매일 2회(13:55, 16:15) 직행버스가 운행된다. 총 2시간 40분 소요. 브루노를 기점으로 찾으면 편하다. 브루노에서는 기차와 버스가 운행된다. 버스는 완행버스처럼 여러 마을에 정차하므로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여행 포인트 텔츠는 작지만 의외로 즐길 거리가 많아 오래 머물러도 심심하지 않다. 텔츠 성에서는 각종 이벤트가 펼쳐진다. 다양한 레저도 즐길 수 있다. 정원이나 숲길을 따라 트레킹, 하이킹도 할 수 있다.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산악 바이크, 보트놀이를 할 수 있고 낚시도 가능하다. 골프장도 세 곳(www.siskuvmlyn.cz, www.czgolf.cz, www.czgolf.cz/golf-resort-telc)이나 있다. 기타 정보 메인 광장 주변에 호텔은 물론 펜션 등 숙박업소들이 있다. 직접 만든 수제 와인이 유명하다. 토굴 형태의 와이너리도 방문할 수 있다. 인포메이션 직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주변 여행지 브루노, 올로모우츠를 비롯해서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의 여행이 쉽다. 알폰스 뮤샤(Alfons Mucha, 1860~1939)의 개막식에서 만난, 체코 문화원에 있는 미하엘라는 미쿨로브스키를 적극 추천한다. 이곳은 알폰스가 오스트리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다 발길을 멈춘 도시다. 브루노에서 슬로바키아로 가는 길목에는 포도밭이 많다. 가을 수확 시기에 맞춰 가면 금상첨화다. 텔츠 안내 사이트http://www.telc.eu/, http://www.discoverczech.com/telc/index.php4
- 2016-12-2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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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기자 겸 사진작가 ‘조이스 리’, 용감무쌍한 길 위의 여자
- 파워 블로거이자 미국의 미술 잡지 기자인 조이스 리(Joyce Lee·70)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는 블로그(‘커피 좋아하세요’)를 시작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미국 곳곳의 자연을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블로거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60세에 본격적인 기자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직은 패션 디자이너. 대체 그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한 제스처와 자그마한 몸, 진한 눈 화장, 쭈뼛쭈뼛 서 있는 머리, 영혼을 빨아들이는 목소리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디언 추장 같으면서 천진스런 어린왕자를 보는 듯했다. “내가 좀 말이 많아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웃음). 그냥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조이스 리와의 인터뷰는 꼭 숨바꼭질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전사의 옷자락을 잡고 마냥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멈추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Art&Culture 매거진 기자로 세 번의 사진 전시회를 가진 조이스 리는 오래전 명동에서 ‘이동희 부틱’을 운영했던 디자이너였다. 나름대로 자리 잡은 전문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른두 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막 조기유학 붐이 불었죠. 그때 남편의 형님이 미국에서 살았고, 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처음에는 나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작용을 하기 마련인가보다. 딸의 친구 어머니가 딸에게 충고를 했단다. “그분이 ‘네 엄마가 오든지, 네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바른말을 한 거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 문제인데, 가게 문 닫고 달려갔어요. 저는 재단사 자격증이 있었던 덕분에 영주권을 얻는 것은 쉬웠죠. 그래서 미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이스 리 부부와 딸은 비장한 각오로 견디며 버텼다. 60세에 시작한 기자로서의 삶 그녀는 2008년 기자로 입사했다. 그때 나이가 미국 나이로 60세였으니 좀 놀랍다. “어느 날 남편의 신장이 멈췄어요.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면서 남편은 직장을 관두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둘이 벌어도 융자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작은 아파트로 옮겨서 살았죠. 그리고 힘든 시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이 블로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음 블로그의 우수 블로거가 400명이었던 시절에 그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성공적인 블로그 운영을 했다. 하루에 2000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의 글을 눈여겨보던 사장이 그녀를 사진기자로 캐스팅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던 안의섭의 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그 네 컷짜리 만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다 다뤘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이 여자의 글도 실어보자는 게 잡지사 사장의 의도였다는군요. 그런데 그 의도보다 내가 좀 더 잘했다고 해요(웃음). 하긴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생활을 위해 손톱도 안 기를 정도였거든요.”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기자가 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써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다. “제 첫 번째 라는 책이 나온 게 2012년이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들고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50이 되고 갱년기가 와서 인생이 너무 슬픈데 선생은 60부터 이걸 하셨다니 놀라워요. 제가 60이 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는데, 10년을 더 노력하면 무엇인들 안 되겠습니까’라고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신심리학 박사인 김효숙 교수는 조이스 리의 사진을 수천 장 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찍은 사진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자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이스 리 사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주말에 홀로 미국 대륙의 수천 마일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된다.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뜨거운 용트림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견딤의 실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얼마 안 걸린다. 20만 번의 셔터 누름, 결국 고장 난 카메라 “닷새 동안 3000마일이 넘는 먼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네 시간 정도 잔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작업을 시작해 정오까지 마치고 시장을 다녀왔어요.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챔피언이 될 거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아내가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며 쉬엄쉬엄 여행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그녀가 사진을 배운 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는데 어찌나 어려운지. 봄여름 학기와 가을겨울 학기 중 네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포토샵을 무료로 가르친다더라고요. 그게 욕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죠. 대상포진이 두 번이나 올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카메라 셔터 수명은 대략 15만 번 누르면 고장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조이스 리의 카메라는 5년 정도 사용하면서 20만 번을 찍었고 결국 셔터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셔터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던 그녀의 집중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가 싫어하는 게 왜곡이에요. 그래서 어안렌즈는 아예 구매를 안 했어요. 줌도 잘 안 써요. 그런데 작가라는 이름을 안 쓰는 이유는 아직 카메라를 못 다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좋으면 찍거든요. 그러니 작가라고 말하지 못하죠.” 그녀는 글쓰기에도 욕심을 부린다. “현재 집필중인데, 2년 후에 소설을 발표할 거예요. 제가 미국 서부의 내셔널 공원을 다 가봤는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랜드 티톤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엘크 떼 수백 마리를 아침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엘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남성성을 좋아해요. 그리고 버펄로, 울창한 숲, 거대한 연못과 그리즐리, 스네이크 리버도 있죠. 그곳에 가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소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서정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인터넷 소설이 될 거예요.” 나의 전생은 ‘인디언’ 역마살을 타고난 여자, 조이스 리는 어느덧 9년차 기자가 됐다. 인터뷰 후 얼마 있다가 잡지가 나오는데 이번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디언 문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는 아니지만 본래 그 땅의 주인공들인 인디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부터 인디언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3~4년 후에는 기자의 눈으로 만난 인디언들 얘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원래 미국의 인디언들은 거의 서부에 있었다고 한다. 동부에는 체로키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유럽인을 가장 먼저 만나 백인 중심 인텔리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서부에는 아직 야생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인디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남다르다. 심지어 과거에 열렸던 조이스 리의 사진전 이름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이었다고 주장한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있거든요. 그리고 언덕에서 붉은 계곡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마음으로 통하는 데자뷔를 느껴요. 그것은 굉장한 희열이에요.”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에는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누구라도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손주 시후의 일기를 쓰는 여전사 할머니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조이스 리의 딸은 지니프러덕션 L.A.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손주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진짜 못해요. ‘0점’만 받아와요. 그래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굉장히 좋아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를 요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요.” 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손주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이다. 독특한 관점이다. “네가 이렇게 자랐다,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상상인 거죠. 제 딸이 사춘기에 방황을 했어요. 저는 딸이 형제가 없어서 그렇게 방황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요. 손주가 엄마랑 비밀이 있겠지만 저랑도 비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항상 밝다. ‘빵점 맞으면 어때. 그리고 설마 영어를 못하겠어? 긍정적 시각으로 미래를 보라 이거야.’ 손주 시후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그녀만의 특별 도구다. “손주의 자랑이라면 유머가 풍부한 편이에요. 지금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해졌잖아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손자의 개구쟁이 짓을 절대로 야단 안 쳐요.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손주가 어렸을 때 밥을 먹다가 먹던 것들을 컵에다 붓고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행위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은 “저걸 왜 내버려둬” 하면서 경악했지만 그녀는 “지금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거다, 2년만 지나면 안 한다”라고 말했단다. 그녀는 손주가 촉감을 익히는 중이니 내버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주 시후에게는 언제라도 미소를 지어주는 할머니다.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시니어와 젊은이의 삶은 다르지 않다 이미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조이스 리는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네 나이가 몇이냐?’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해서 얻는 건 경멸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인류의 한 부족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앞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어요.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주되 절대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본능처럼 여겨온 삶의 철학, 느낌과 경험을 축적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이스 리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간절함을 미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 by 조이스 리 몬순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가 거의 바위로 이어져 있는 계곡 때문에 물이 그대로 강물이 되어 내달린다. 이 물의 힘이 수수만년 이어지면서 협곡이 생기고 겹겹의 층 사이를 깎아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산타페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도비(Adobe)식 흙집으로, 해발 2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도록 지어졌다.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두꺼운 벽이 외부의 온도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모래언덕 데스밸리. 여름 5월부터 9월까지는 날씨가 섭씨 50-60도를 웃돌므로 피하고 가을 한철 또는 이른 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척박한 사막의 땅에도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동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 2016-12-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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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은퇴교육 열정 전도사 윤만호 EY한영 회계법인 부회장
-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브라보’는 ‘잘한다’, ‘좋다’, ‘신난다’ 등의 갈채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다. ‘성공적으로 2막을 살고 있는’ 우리 사회 시니어들로부터 ‘인생 2막 설계의 지혜와 조언’을 들어보고자 한다.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타이어를 새로 바꿔 끼운다는 의미다. 단지 1막의 재현에 불과한 리플레이(replay)도 아니고, 1막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맨땅에서 헤딩하는 리셋(reset)도 아닌, 새로운 재생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은퇴라는 용어를 은퇴시키고’ 멋진 2막의 르네상스를 설계하기 위해 ‘이어야 할 것과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본지를 통해 살아온 길의 여정에 담긴 ‘온기’뿐 아니라 살아갈 길의 이정표를 세우는 데 필요한 ‘용기’를 얻길 기대한다. 윤만호 언스트앤영 어드바이저리 부회장(62)은 한국산업은행 부행장, 산은금융지주 사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 ‘경제·금융 전문가’로 살아왔다. 이런 전문가로서의 이력을 넘어 주목되는 점은 열성적 은퇴교육 전도사라는 점. 그는 2011년 금융권 퇴직자들을 재교육, 창업자들에게 금융·입지권 조사 등 컨설팅을 해주는 사회공헌자 프로그램인 ‘시니어 브리지 센터’를 만드는 등 일찍이 퇴직자 재교육에 앞장서왔다. 최근까지도 서울시 50+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은퇴자들을 위한 제도적 교육과 일자리를 지원해왔다. 그가 설파하는 신(新)퇴직 또는 은퇴혁명 패러다임의 핵심은 ‘당하는 퇴직을 준비하는 퇴직으로 바꾸라’이다. 과거와 오늘날의 은퇴 의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50이 넘도록 사회생활을 하면 웬만큼 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즘은, 생애주기가 바뀌면서 앞으로는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고령화 사회에서의 퇴직은 마지막 골라인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지요. 이제 일은 평생 하는 것입니다. 은퇴란 말을 은퇴시켜야 합니다. 평생 현역이 될 각오를 다져야지요.” 평생 현역은 오늘날 은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인생의 반환점으로 보람찬 2막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고령화가 진행된 우리 사회에서는 80세부터를 본격적 노후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50~60대에 은퇴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80세까지 평생 현역으로 일하기 위한 키워드는 3가지입니다. 일, 배움, 나눔이지요. 책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사람도 더 만나고, 일을 통해 경험과 경륜을 더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급변할수록 ‘과거의 경험, 인연, 경력’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하면서 배우고 나누는 삶이 인생 2막의 패러다임입니다.” 영화 을 보면 대기업 부사장이 벤처기업의 인턴이 되어 젊은 여사장의 시중을 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갑에서 을로의 갑작스런 전락’이 2막 부적응의 이유가 될 것 같은데요. “대부분의 시니어들이 퇴직 후 피부로 느끼는 것이 갑(甲)에서 을(乙)로의 입장 변화이지요. 이 변화를 약자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기여한다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시각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퇴직 후 자신을 대하는 세태 변화에 위축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잘나갈 때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고 일정이 빡빡했는데, 퇴직하거나 작은 데로 옮기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일정도 텅텅 빈다면서 우울해합니다. 이럴 때는 인심을 탓하기보다 ‘그동안은’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느라 선택당했는데 이제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해 만날 수 있으니 좋다’라고 시각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을(乙)적 사고야말로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 2막은 성공 마인드보다는 성숙-섬김마인드로 임해야 합니다.” 윤 부회장의 말을 들으니 시니어가 멀리 해야 할 한자로 단단할 ‘고(固)’ 자가 떠올랐다. 고(古)의 울타리[口]에 갇혀 고착돼 있으면 고루해진다는 의미가 떠올라서다. 인생 2막이 힘든 것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꼰대적 사고를 그쳐야 퇴직을 종착역이 아닌 간이역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보통 사람들이 퇴직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재정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먼저 현역에서의 퇴직 준비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현역, 퇴직 통틀어 지켜야 할 것은 ‘버는 범위 내에서 써야 한다’는 재정 원칙입니다. 현역 활동 때 현재의 수입을 모두 가처분소득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평생 내가 쓸 돈이 얼마나 되는지, 60세 이후 100세까지는 무슨 돈으로 살 것인지 꼼꼼히 계산해보십시오. 버는 것의 30%는 무조건 개인연금을 부어야 합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외에 개인연금을 들어 노후에 ‘3층 연금’의 단단한 방어벽을 준비해놔야 합니다. 특히 요즘은 저금리시대 아닙니까. 10억원을 버는 것도 힘들지만,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매달 100만원씩 나오게 하는 현금흐름을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비도 과잉투자해선 곤란합니다. 노후를 잘 대비해놔야 자식 앞에 부모가 바로 서고 자식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미 퇴직한 분들은 지금이라도 대비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요? “있는 범위 내에서 써야 한다는 원칙은 퇴직자도 같습니다. 막연히 불안해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나의 어셋’은 어떻게 되는지 점검하고 이에 따라 할 일을 리디자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퇴직 후 가능한 일자리 형태는 사회공헌형, 봉사형, 생계형, 전문가형 등이 있습니다. 어느 형태가 되든 평생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이때 연금을 들어놨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퇴직 후부터는 버는 것보다 나눔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저는 flowing-흘려보내기란 말을 좋아합니다. 퇴직 후에는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지금까지 나에게 위탁된 것을 잘 이용하고 남에게도 흘려보낸다’는 나눔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인생 1막과 2막, 그 분수령을 전후해 삶의 정비사항, 중점사항도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요? “삶이 변하면 사람도 바뀌어야지요. 1막에선 급한 것에 휘둘려 살았다면 2막에선 정말 중요한 것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성찰하고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사는 대로 생각’했다면 2막부터는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성찰해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증진시킬 것은 증진시키고, 회복시킬 것은 회복시키는 등 삶의 우선순위를 재편, 재조정해야지요. 다시 말해 돈, 시간, 몸을 우선순위에 따라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윤 부회장은 구체적 성찰 및 재정비의 대상을 관계, 시간, 재무, 건강(정신-육체), 웰다잉의 순서로 꼽았다. 그리고 이 5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의 리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하버드대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하버드대학 학생 268명의 인생을 72년간 종단연구하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엇인지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으며, 65세에 잘살고 있는 사람의 93%는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많은 가장들이 ‘처자식 먹여살리느라’ 바쁘게 일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막상 퇴직하고 나자 ‘찬밥 신세’라며 서러움을 호소하기도 하는데요. 윤 부회장께선 가족관계 경영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월화수목금금 일해야 하는 산업화 시대에 공직자로 살았으니 집사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갖진 못했습니다.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나가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요. 하지만 ‘온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갖고 대화를 나누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명절 때면 온 가족이 모여 ‘가위바위보게임’을 하는 등 소소한 재미 디자인을 했지요. 매년 가족사진도 찍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가족들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슴에 따뜻한 가족 램프를 걸어두며 사는 것, 그것 이상 삶의 성공,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선친은 고(故) 윤재건 전 제주체신청장이다. 윤 부회장은 “우편제도가 열악했던 시절, 지방이든 해외든 출장을 가면 ‘부인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자상한 관심’을 담은 엽서부터 보내는 아버지를 보며 알게 모르게 가족사랑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함을 배운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일, 재물도 그렇지만 가족관계 역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며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부친상을 당하셨는데요. “(눈시울이 붉어지며) 아버님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간암 선고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답니다. 소천 전 일주일간 오 남매를 불러 각각 독대 면담을 하며 당부의 말씀을 일일이 남기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지키고 계획한 대로 산 삶이었다는 점에서 웰리빙, 웰다잉의 표본이셨다고나 할까요. 선친께서는 늘 ‘요행을 기대하지 마라, 노력으로 거둔 보람만이 참된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끝없이 사랑을 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는데 제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된 말씀이랍니다.” 선친이 그에게 남겨준 가보 제1호는 17세 때부터 61세 노년기까지 44년간 고이 모아온 우표책 한 질이다.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에서 한길을 걸어온 소신과 자부심의 표상을 아들에게 담아 물려준 것이다. 그 역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우표 수집을 이어가고 있다. 윤 부회장은 지난 1997년 부친의 고희 때 만든 가족 문집 를 가져와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문집에는 부부-부모자녀-손주 간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글, 사진 등 3대 가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팔순이 될 때 이 같은 가족 문집이 더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회의실 8층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여의도공원의 늦가을 경치가 아름다웠다. 같은 낙엽이지만 ‘추풍낙엽’의 조락의 의미로도, ‘만산홍엽’의 서정적 의미로도 묘사된다. 이는 퇴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은 지금 미래의 계획 아래 ‘추일서정’의 퇴직을 준비하는가, 계획 없는 미래에 손 놓고 ‘추풍낙엽’의 조락을 당하고 있는가. >>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 2016-11-30 0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