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트로 열풍, 주인은 누구십니까?
- 어딘가 처박아뒀던 먼지 쌓인 앨범 속 장면이 총천연색 화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 같다. 통바지에 브랜드 이름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풋풋한 젊은이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먹거리가 편의점 한편에 자리 잡았다. 돌고 돈다는 유행은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그 시대를 대변해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유행과 흡사하지만 뭔가 새롭다. ‘복고(復古)’라는 말 대신 ‘레트로(retro·복고)’란 용어로 바꿔 부른 지도 오래다. 친숙한 듯 아닌 듯 우리 시대 레트로 열풍. 뭔가 달라진 옷[衣], 먹거리[食] 그리고 생활공간 [宙]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패션계는 한마디로 힙트로·뉴트로·영트로 “맨 처음 옷을 이렇게 입을 때 복고 패션이라기보다는 유행하는 와이드 팬츠(통바지)나 데님재킷 정도를 따라서 사서 입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요즘 입는 옷을 아빠가 보시더니 본인이 어릴 때 입었던 옷이랑 똑같다고 예전에 입으셨던 것을 주셨어요. 진짜 요즘 유행하는 거랑 너무 비슷해요. 그런데 1990년대 패션이랑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요! 예전에는 통나무처럼 바지가 컸다면, 지금은 슬림하고 길어 보이게 입는 추세랄까요?” 은평문화재단에서 시민연극 연습이 한창인 한규열(21) 군은 요즘 스타일대로 깔맞춤(?)을 하고 다닌다. 통이 살짝 큰 바지에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바지는 허리춤까지 올려 단정하게 허리띠를 두르고 티셔츠는 바지 안에 넣어 입는다. 가끔은 티셔츠 앞부분만 바지 안에 넣은 뒤 살짝 옷을 밖으로 잡아당겨 느낌을 살린다. 말해놓고 보니 1990년대에 즐기던 스타일 아닌가. 19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 보기에 그저 신기한 젊은이 패션이 아닐 수 없다. 예전과 엇비슷한 모습에 웃음이 나지만 정작 선뜻 선택하지는 않는다. 패션계야말로 작년 초부터 시작된 레트로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분야다. 특히 1990년대 유행했던 패션이 1980년대에서 2000년 초반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혹은 1995년 이후 태어난 ‘Z세대’에게 사랑받고 있다. 부모 세대가 20대에 향유했던 패션을 지금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활용하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다 보니 레트로 패션을 의미하는 다양한 신조어도 탄생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코듀로이, 체크 그리고 호피 폐기처분한 줄 알았더니 전설의 코듀로이가 레트로 바람을 타고 돌아왔다. 일명 ‘골덴’으로 불리는 코듀로이가 포근한 느낌과 함께 내구성이 뛰어나 최고의 한파가 예고된 올겨울 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코듀로이는 물론 벨벳과 스웨이드, 트위드(두꺼운 실로 직조해 무게감이 느껴지는 원단), 플란넬(부드럽고 가벼운 모직원단) 등 편안한 캐주얼 분위기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원단도 이번 겨울을 대표하는 소재다. LF의 김현진, 김은정 디자인 실장은 남녀 인기 색상과 관련해 “뚜렷한 구분 없이 밤색과 빨강, 노랑 계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강렬하고 도발적인 빨간색 계통을 의외의 인기 색상으로 꼽았다. 남성의 경우 붉은 계열에 벨트가 있는 트렌치코트처럼 레드로 포인트를 준 스타일이 인기를 끌 전망이다. 여성의 경우 레트로 여파로 ‘웨스턴 스타일’이 뜰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 복장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1980년대에도 큰 인기였다. 술 장식 조끼, 부츠컷 청바지 등이 대표 아이템으로 사랑받을 전망이다. 올겨울 남성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체크무늬다. 체크는 유행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늘 인기가 있지만 이번 시즌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클래식한 느낌의 체크부터 다채로운 컬러가 섞인 개성 있는 체크까지 다양하다. 패션 포인트로 체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옷 전체를 체크로 맞춘 슈트 패션도 곧 거리에서 볼 수 있을 예정. 여성 패션은 더욱더 과감하고 재미있는 무늬가 거리를 수놓을 전망이다. 특히 호피무늬의 인기가 눈에 띈다. 인터넷 쇼핑몰 ‘11번가’ 분석에 따르면 호피 패션이 올 하반기 패션 트렌드를 대표하는 패턴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최근 11번가 사이트 내 ‘호피’ 아이템 검색 횟수는 무려 15배 이상 급증했다. 11번가 하원지 MD는 “예전에는 다소 과한 패션으로 여겨졌던 호피무늬 패션이 요즘에는 한층 밝은 색상의 패턴이나 실크, 시폰 소재에 더해지면서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며 “호피무늬는 스카프나 가방, 구두 등 한 가지 아이템만으로도 강렬한 포인트를 줄 수 있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레트로를 입다 숏패딩과 빅로고 재등판 평창동계올림픽 영향으로 발목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을 감싸는 롱패딩이 지난겨울 유행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허리에서 마무리되는 짧은 점퍼가 대세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의 ‘레트로 두두느 다운 다운재킷’이 옛 인기 상품 소환 패션 중 하나다. 1980년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다운재킷 ‘듀벳’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제작한 의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덕다운 점퍼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강렬한 색감의 짧은 기장의 점퍼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스톰, 겟유스트, 닉스, 잠뱅이 등 데님 브랜드가 성장하면서 세련된 느낌의 무채색 구스다운 점퍼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퇴물 취급받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구스다운 점퍼가 20년 만에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되어 숏패딩으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대놓고 “나는 누구요!”라고 말하듯 브랜드 이름이 제품에 크게 박힌 이른바 빅로고 패션도 레트로 바람을 타고 있다. 브랜드 이름을 옷이나 가방, 모자 등에 크게 새기거나 예전에 비해 사이즈가 적당히 작아진 것이 특징이다. 199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랑받았던 스포츠 브랜드 휠라(FILA)도 옛 느낌을 살려 빅로고 패션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다. 굳이 빅로고를 새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명품 브랜드도 빅로고 패션 대열에 합류해 레트로 열풍에 동참하고 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레트로를 먹다 곁에 있었지만 레트로였다! 패션을 넘어 옛 먹거리에 대한 향수 또한 레트로 열풍으로 번졌다. 인기의 일등공신은 단연 2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이다. 시청자들은 매회 쏟아진 음료, 초콜릿, 과자 등을 보면서 옛 감성을 느끼고 맛에 대한 기억도 제대로 자극받았다. 드라마 방영 당시 ‘저거 한번 다시 먹어보고 싶다’ 했던 것들이 실제로 상품 출시로 이어져 레트로 호황을 반짝 누린 바 있다. 추억 속 먹거리가 슈퍼와 편의점에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74년 첫 출시돼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빙그레의 ‘바나나맛우유’가 드라마 인기와 함께 ‘1988에디션’으로 등장했다. 추억의 빙그레 로고와 서체가 부착된 것만으로도 너도나도 열광했다. 인기에 구애받지 않던 스테디셀러인 바나나맛우유가 다시 사랑을 받고 회자된 계기였다. 갈배사이다 그리고 따봉! 해태htd의 ‘갈아만든 배(이하 갈배)’의 경우 숙취 해소 효과가 입증되면서 눈에 띄는 레트로 전략 상품이 됐다. ‘갈배’가 숙취에 좋다는 입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2015년 ‘호주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실험을 통해 ‘갈배’가 두통 완화에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갈배’는 작년 말 숙취해소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올 3월에는 탄산이 추가된 ‘갈배 사이다’로 재탄생했다. 진일보하는 레트로 상품의 전형이 1996년 등장한 ‘갈아만든 배’라 할 수 있다. 롯데칠성음료 사상 최고로 인정받는 광고가 있다. 오렌지를 따는 브라질 농장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따봉(Esta bom)’이라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던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다. 델몬트라는 이름보다 따봉이 강렬했던 나머지 1989년 따봉주스가 출시되기도 했다. CU편의점에 등장한 롯데의 ‘따봉 제주감귤’이다. 복고 느낌에 친근감이 더해져 자꾸 손이 가는 음료다. CU 상품기획 관계자는 “복고가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1980~90년대 감성을 즐기는 젊은 세대와 어릴 적 향수에 젖어 있는 40~50대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10월에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선샤인’(tvN)에 등장한 ‘불란셔 제빵소’의 빵은 파리바게트 PPL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아울러 ‘#불란셔제빵’과 관련한 ㅍ단순 검색만 SNS상에서 4000건이 훨씬 넘었다. 레트로를 살다 옛날옛적풍 요즘 냉장고 1980년대 안방에 모셨던 190ℓ 냉장고를 1990년대에 500ℓ 냉장고로 바꿨을 때 진짜 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900ℓ 양문형 냉장고도 부족하다. 전자레인지 또한 오븐기능을 비롯해 눌러야 할 버튼이 너무 많다. 갈수록 대형화되고 복잡해지는 가전제품 시장에도 레트로 바람이 불고 있다. 대우전자가 선보인 레트로 디자인 ‘더 클래식’ 시리즈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가전제품의 초기 모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1인 가구의 증가와 욜로, 미니멀리즘을 삶의 주제로 받아들이는 세대에게 ‘가치소비’에 대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작지만 고급스러움은 유지하고 유행에도 뒤지지 않는 스타일로 틈새시장에서 주목받는 상품으로 떠오른 것이다. 더 클래식 시리즈는 120ℓ, 80ℓ급 소형 인테리어 냉장고다. 크림화이트, 민트그린 두 가지 색상으로 라운드형 도어와 프레임을 통해 ‘레트로’ 느낌을 살렸다. 동급 대비 약 30% 비싼 가격에도 독보적 디자인으로 올해 월평균 판매량 1500대 이상을 유지하며 레트로의 인기를 증명했다. 전자레인지 또한 크림화이트 색상에 은색 손잡이와 조그 다이얼, 라운드형 디스플레이로 소비자의 마음을 녹였다. 레트로를 표방한 ‘더 클래식’ 시리즈 대우전자 관계자는 “경기불황에도 자기만족과 개념 소비를 원하는 이들이 급증하면서 레트로 디자인 미니 가전들이 인기”라며 “레트로 디자인에 프리미엄 기능을 추가한 제품개발을 주도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시대보다 옛 감성 공유 큰 가구에서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 매일 사용하는 리빙 제품들은 질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야 하고 실용성까지 겸비해야 하기에 꽤 까다로운 선택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앤티크’란 이름으로 레트로 감성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매번 대세 상품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구점에는 도시적인 느낌의 가죽소파 등이 즐비했다. 최근에는 레트로 인기 덕에 따뜻한 감성의 패브릭과 나뭇결이 적절히 살아 조화된 가구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창고에 쌓여 찾기 힘들었던 레트로 가구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유행은 유행이다. 인테리어 전문 브랜드 ‘까사미아’의 쇼핑몰 사이트도 요 몇 년 사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감성의 리빙 상품으로 대체됐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의 헤링본 패턴을 이용한 침대 시트와 카펫 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북유럽 등지에서 전해져온 스타일이다. 나라마다 복고 스타일이 다르지만 유독 가구나 인테리어에서 북유럽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오래된 스타일이 레트로 기본이 됐다. 이는 나무가 많은 북유럽 일대에서 유명 가구 디자이너가 등장해 다양한 스타일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양질의 원목이 수입되고 있어 적당한 가격에 레트로 감성을 즐길 수 있다. 레트로 가구 하면 ‘북유럽 스타일’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꼭 이 스타일만이 레트로라 할 수는 없다. 만약 한국의 레트로 가구가 인기였다면 고가의 자개장, 저가의 비키니장, 실용적인 철제가구,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등나무 가구가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레트로 유행에서 있어 가구만큼은 20년 전의 한국 스타일이 소환되지 않았다. 패션이나 음료, 가전 등에서 이전 세대 제품들이 다시 불려나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까사미아 개발 팀장은 “골동품 느낌보다는 앤티크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잃지 않는 디자인이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레트로 놀이가 쉬웠어요! 옷만큼이나 패션에 민감한 주방식기도 레트로 열풍이다. 물방울무늬와 나뭇가지 형태의 접시 등 1980년대 후반 우리네 식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이 다시 등장했다. 까사미아는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웅장함과 섬세한 패턴을 담아낸 ‘알함브라 양식기’ 6종을 내놓았다. 제품별로 화이트, 진한 남색, 연한 하늘색이 고급스러운 무늬와 함께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중고시장도 부쩍 바쁜 눈치다. 각 가정 찬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법한 디자인의 컵과 식기 등이 중고시장에서 인기다. SNS상에는 ‘할머니 찬장에서 찾은 컵’이라며 사진이 올라오기도 한다.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은 레트로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에 대해, 앞에서도 언급했듯 “핵심 축에는 20대 밀레니얼 세대가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처음부터 경험치에 대한 소비욕구가 굉장히 커서 흔하고 비싼 물건보다 희소한 물건을 갈망했다. 기업도 업계 불황 혹은 새로운 답을 찾지 못할 때 증명된 과거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레트로를 활용해왔는데 잠재적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 소비욕구와 맞물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2018-11-02 11:48
-
- 레트로에는 추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 LP플레이어, 검정 교복, 불량 식품, 필름 카메라, 만화 잡지 등 ‘레트로(retro)’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문화적 소품이나 콘텐츠를 지칭한다. 예능과 다큐는 물론 영화, 드라마에서도 이런 소품이나 콘텐츠를 마치 레트로의 본질적인 것인 양 부각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지엽적이다. 그것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인 코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사치일 수도 있겠다. 레트로가 제대로 복권(復權)된 것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복고는 온갖 비난과 폄하를 당해왔다. 특히 고성장기에는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한때 레트로는 단순 복고로 여겨져 세 가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런 시선을 밟고 나가야 레트로의 본질에 닿을 것이다. 우선 문화 지체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복고는 취향과 선택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다고 진단되었다. 복고 소재를 다루는 문화 콘텐츠의 경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답습하고 우려먹기 식으로 제작한다고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현실 도피로 보는 시선이었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거로 퇴행한다는 비판이었다. 이 때문에 정신병리학적 측면의 진단이 내려지기도 했다. 미래 전망이 불투명할 때 매번 복고 열풍이 일어난다는 규정이었다. 마지막은 복고를 일시적 트렌드로 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복고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묻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복고는 항구적이다. 다만 시기와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 1970~80년대 문화가 1990년대로 이동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줬다. 얼마 안 있으면 2000년대가 레트로의 시공간으로 등장할 것이다. 레트로에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본질적인 맥락은 복고풍에 있다. 즉 복고 스타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레트로가 단순히 옛날에 사용하거나 즐겼던 대상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에 쓰던 물건이나 즐기던 문화 활동이 다시 등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똑같은 음악이나 옷, 가구가 아닌 과거의 스타일을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옛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차별화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젊은 세대에 레트로는 재발견의 대상이다. 필름 카메라와 현상 사진은 새롭게 재발견되어 개인 취향이 된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는 단순히 옛날에 쓰던 물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디지털의 장점을 결합시켜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준다. 궁궐이나 한옥마을에서 입는 한복도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젊은 세대가 입는 한복은 기성세대가 입던 한복보다 더 화려하고 블링블링하다. 중년 세대에게 레트로는 추억이다. 그것도 아름답고 애틋함을 자아내게 만드는 황금 같은 기억들을 담고 있다. 친숙한 것들은 인지심리학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지 않아도 되어 뇌의 활동이 거의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레트로는 자기진화를 하는 경향이 있다. 중년 이후의 세대가 복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청춘기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도 젊게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과거의 시간을 데려와 현재의 시간과 융합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라도 추억과 향수의 대상은 재창조되어야 한다. 젊은 세대의 재발견과 중년 세대의 추억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뉴트로(new-tro)다. 이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향유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과거 스타일로 보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져 기성 세대에게는 익숙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이러한 뉴트로 제품은 새 것이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빈티지한 느낌을 하나의 스타일로 가전제품, 가구, 포장지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이 그 예라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유행, 즉 뉴트로 트렌드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물품이나 콘텐츠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뭔가 보편적 가치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누구라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뉴트로’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리메이크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일반 생활용품에만 적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나 음악작품의 리메이크는 과거의 콘텐츠를 새로운 감각에 맞게 재창작하는 것이다. 이때 레트로는 새로운 창조의 수원지 역할을 한다. 세대 교감과 통합의 매개 역할도 한다. ‘불후의 명곡’이나 ‘히든 싱어’에 나오는 노래들은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작품으로 자리매김됐다. 이것들은 더 이상 낡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유행의 시작이다. 중년 세대만이 친숙하게 생각할 것 같은 복고는 레트로를 통해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레트로는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경험의 문을 열어준다. 또한 가벼운 트렌드가 아닌 깊이와 품격을 지닌 고급문화를 알게 해준다. 신구 세대의 만남이 레트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 간의 문화적 갈등은 줄고 미래지향적 흐름이 존재하게 된다. 레트로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콘텐츠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분명 젊은 세대의 감각과 융합 기술이 있기에 가능하다. 다만, 한국의 레트로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창조되지 않는 면이 있다. 대중매체와 대기업이 대형 마케팅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레트로의 창조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유명 장소, 유행 콘텐츠를 따라 하거나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레트로 스타일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레트로의 생명력이 세대 간을 가로질러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다.
- 2018-10-29 10:01
-
- 탈개인화 시대 지나고 개성시대 오다
-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까까머리를 강요당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른바 ‘탈개인화 시대’였다. 성장이 필요했던 시절 국부 통치 하를 살던 사람들은 가시적 통제를 받아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탈개인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군중 혹은 집단 속에서 때때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이 현상이 탈개인화다. 멋 부릴 수 없던 앞머리 1cm 수렁 고등학교 때는 ‘스포츠머리’라고 하여 앞머리 1cm가량 기르는 것이 허용됐다.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규율부가 하는 일이 머리 단속. 고학년이 되면 규율부와 친해져서 허용치를 약간 웃돌기도 했으나 그래 봤자 까까머리였다. 교련 선생이 불시 단속이라도 나서면 규정 위반한 학생의 머리 한가운데에 시원하게 바리캉(헤어클리퍼)으로 만든 고속도로(?)가 나는 참사가 빚어지곤 했다. 그 한풀이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장발이 유행했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은 미니스커트와 함께 장발도 경범죄로 단속했다. 고등학교 시절 사대부고 여학생과 잠시 만난 적이 있다. 사대부고 학생은 긴 머리에 멋진 베레모까지 써서 세련의 극치를 달렸다. 짧은 머리 때문인지 나는 도무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교복을 벗어 던지고 사복을 입어도 짧은 머리 때문인지 ‘미성년자’라고 이마에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짧아도 너무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기운 빠졌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는 물론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못 가는 곳이 많았다. 장발 단속, 또 까까머리, 그리고 유니폼 시절 성년이 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군대에 입대하고 나니 또다시 까까머리가 됐다. 군복까지 입으니 힘을 못 썼다. 민간인과 군인이 같이 걸어가면 ‘사람 한 명과 군인 한 명이 간다’고 했다. 군인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 것이다. 가슴 뛰는 외출 때면 군복을 다려 입고 구두도 광을 있는 대로 내서 멋을 내고 나갔지만, 군인은 군인일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군인에게는 머물지 않았다. 군대야말로 탈개인화 현상을 강요해야 하는 집단이었다. ‘조국 수호’라는 대 명제 아래 명령에 복종한다. 적과 대치했을 때 탈개인화가 안 되어 있으면 목숨 걸고 적과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건설회사에 다닐 때는 늘 청색 점퍼를 입었다. 회사에서 무상 지급해주는 유니폼이었지만 편했다. 건설 현장이 어디나 그렇듯이 해 뜨면 일하고 해가 져도 불 켜놓고 일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오직 일에만 몰두하라는 분위기였다. 예비군복을 입었을 때가 가장 편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정체감은 잠시 잊게 되고 만취에 무단 방뇨 정도의 웬만한 일탈은 사회적으로도 인정해주던 시절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유니폼을 입는 것은 탈개인화 현상의 대표적인 통제 수단이었다. 탈개인화와 멀어진 현재의 삶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유니폼으로 탈개인화를 강요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정체성을 유지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던 것, 학교에서 하지 말라던 것 다 무시하고 대중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면 거리낄 것이 없다. 모두 그런 사람들만 모이다 보니 개성이 너무 강해 의견 통합이 어렵다는 문제점에 봉착할 때가 있다. 모임 후 음식점 하나를 골라도 서로 입맛과 취향이 달라 음식점 하나 결정도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탈개인화 현상을 겪어 보지 않은 또래 여성은 의견 일치가 더 어렵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중·고교 학생의 교복과 두발 자유화를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시대의 요구사항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솔하는 교사들은 골머리 꽤 아플 것이다. 지나고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고 보니 통솔하는 입장에서 탈개인화가 일정 부분 좋은 부분이 있었구나 싶다.
- 2018-10-12 10:41
-
- '장수상회'로 기나긴 연휴 나기
- 애초 부모님이 북쪽에 고향을 두고 계셨던 까닭으로 명절이 되어도 어디 갈 곳이 없다. 그저 관성처럼 TV를 통해 남들 귀성행렬을 바라보며 설이나 추석이 되었거니 느끼며 살았다.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지만 올 추석은 유달리 썰렁했다. 유난했던 세계적 자연재해와 경제 침체로 흥이 날 리 없기도 하다. 게다가 명절 연휴만 되면 고향보다 해외로 나가는 유행이 거리를 더욱 한산하게 만들었다. 늘 그래왔듯이 긴 시간 집에만 있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일단 신문에서 추석 연휴 TV채널 일정표부터 챙긴다. 형광펜으로 볼만한 프로그램에 색을 입힌다. 추석이면 늘 나오는 외국인 노래자랑은 식상하기에 주로 영화를 챙겨본다.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있다면 홍콩 배우 성룡이 주연한 영화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예술영화보다는 액션 대작이 추석 안방극장을 차지했다. 취향은 잘 안 맞지만, 공짜인데 어쩌랴. 우선 외국영화에 눈길이 가서 ‘셜록 홈스 시리즈’ 등 몇 편을 골라 본다. 류승완 감독의 2017년 작품 ‘군함도’ 등 소위 블록버스터 몇 편도 관람 대상이었다. 영화 개봉 당시 큰 관심이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영화를 보다보니 연휴 절반이 휙 지나갔다. 연휴 3일 째 되던 날 모처럼 소박한 작품을 보게 됐다. 바로 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보려다 놓쳐 아깝다 싶던 작품이다. 노인 중심 영화는 흥행되기 어려워 영화로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흥미를 끌었던 작품이다. 게다가 tvN의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에 등장했던 두 배우가 나와서 관심 또한 높았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가 올 연휴 하이라이트가 됐다. 영화는 홀로 사는 성격 괴팍한 노인 김성칠(박근형)과 이웃에 이사 온 예쁜 꽃가게 주인 할머니 임금님(윤여정)의 알콩달콩 로맨스로 진행된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이들의 연애를 응원한다. 거칠고 한 성질 하는 영감은 장수상회 점원으로 일하는데 아무리 사고를 쳐도 해고되지 않는다. 또한 이 동네를 재개발하려 하는데 이 영감의 반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이들의 연애는 노인의 기억력 장애로 어려움에 처한다. 이쯤 되면 그렇고 그런 노년의 로맨스에 얽힌 이야기로 치부될 법하다. 그러나 서서히 지루해지려는 그 순간 놀라운 반전이 있다. 알고 보니 이 둘은 원래 부부 사이이고 노인은 장수상회의 주인이었다. 다만 노인의 치매 증상으로 아내와 가족을 알아보지 못 하고 아내가 췌장암 말기에 다다르자 따로 살게 된 것이다. 노인이 비밀 일기장을 통해 자신의 치매증상에 대해 인지하고 다가올 위험에 고뇌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결국 시간이 흘러 어느덧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 처하고 만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갈 때 젊은 시절 불러주었던 노래를 기억해낸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문득 인간의 존재 양식이 단지 기억력이라는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졌음에 놀란다. 이 영화는 치매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기보다 그것이 악화한 후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병으로서의 치매가 아닌 기억이 지닌 존재가치를 부각했다. 올 추석의 기억도 추억의 책갈피에 소중히 간직해본다.
- 2018-10-04 15:46
-
- 가수 이자연, ‘찰랑찰랑’ 가사처럼 남편과 노래에 젖어 산다
- 이자연은 최근 여성 최초로 대한가수협회장에 당선되었다. 호칭을 회장님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자연의 대표곡 ‘찰랑찰랑’을 부를 때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을 떠올리면 회장님보다는 찰랑찰랑대는 맛깔스러운 가수가 훨씬 더 어울린다. 대외적인 그녀의 나이는 63년생이지만 사실은 58년 개띠. 이봉규와 갑장이어서 더 말이 많았다. 그녀가 데뷔할 당시 여자 연예인들은 대부분 나이를 내려 발표하곤 했다. 무명 시절 부산에서 설운도와 함께 같은 밤무대 업소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동갑이라 대기실에서 자연스럽게 이자연이 설운도에게 “야 너 이리 와봐!” 하면 사람들이 놀랬다고 한다. 외모로 보면 설운도가 대충 열 살은 많아 보이는데 반말로 ‘야자’를 트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때 장면이 떠오르는지 이자연이 깔깔대며 웃는다. 이자연은 경북 구미 출신. 스무 살 때부터 부산에서 프로가수로 노래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 이미 음반이 나왔을 정도로 이자연은 타고난 가수다.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 에서 노래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일본 공연을 갔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길옥윤을 만난다. 이자연이 타고난 가수임을 한눈에 알아본 길옥윤과 함께 전국 투어를 시작하면서 그녀 이름은 대중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훈아 선배를 만나 ‘당신의 의미’로 데뷔하는 행운도 거머쥔다. 그 후 ‘서울 나그네’, ‘사나이 눈물’ 등의 곡들이 잇따라 히트를 치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 나갔다. 당시 나훈아로부터 곡을 받고 작곡해준 값으로 2000원을 줬더니 나훈아가 식당 종업원에게 “야~ 담배나 사와라! 나머진 팁이고~”라고 말하면서 퉁쳤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나훈아는 이자연에게 은인이자 훌륭한 선생님이다. 보잘것없는 신인에게 그렇게 호의를 베풀다니….” 그때 상황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가의 선견지명일 것이다. 길옥윤, 나훈아, 남진과의 특별한 인연 길옥윤이나 나훈아 같은 대중음악계의 대가들이 볼 때 이자연은 될성부른 나무였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나훈아 씨 가끔 만나나?” 하고 물었더니 “그 오빠는 숨어서 지내기 때문에 요즘은 못 만나고 있다. 예전부터 워낙 숨어 지내는 분이다. 남진 오빠랑은 정반대 스타일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자연은 남진과의 인연도 나훈아만큼 각별하다고 말한다. 남진 추천으로 2006년 대한가수협회 이사로 이름을 올렸는데 그게 큰 경력이 되었고, 이번에도 남진이 이자연을 회장으로 또 추천해줘서 당선이 됐다. “나훈아, 남진, 이자연이 삼 남매야? 뭐야? 두 오빠들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하는 거야? 나훈아는 나를 데뷔시키고 남진은 나를 가수협회장 시키고….” 오늘의 이자연을 만들어준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한다. 그녀는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하고 친하다는 사실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이자연이 대단한 것은 노래도 노래이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노력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수활동에 전념하느라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워 늦은 나이에 도전, 2011학년도 건국대학교 수시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지원 합격했다. 내친김에 그 후로도 공부를 계속해서 동대학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올해 가을학기에는 건국대 예술문화대학 초빙교수로 위촉되기도 했다. 만학도의 꿈을 이루더니 교수도 되고 여성 최초로 대한가수협회장도 되고 이자연의 인생은 갈수록 멋지게 펼쳐진다. 우리 남편은 ‘껌딱지’ “우리나라 가요역사를 잘 알리고 싶다. 우리 가요를 지키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 일본에서 5년간 활동했는데 엔카에 대한 인기와 엔카를 지키려는 일본 대중문화계의 노력을 보면서 부러웠다. 선후배 간에 철저하게 위계질서도 있지만 서로 밀어주고 키워주고 존경하고 따르는 문화가 부러웠다”고 토로한다. “지금 대중가요계가 질서도 없다는 비판을 받아도 싸다”고 자조 섞인 하소연도 늘어놓았다. “예전에는 레코드 회사에서 엄선해서 데뷔를 시켰는데 지금은 아무나 음반 내고 가수라며 공연을 다닌다. 대중가요계가 싸구려가 되어버렸다”고 한숨을 쉰다.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지니까 이자연은 노련하게 갑자기 족보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산이씨(韓山李氏)인데 가수 이동준, 이태원, 이용복 등이 할아버지뻘이다. 가수 이선희는 더 높아서 대모님인데 보통 때는 이선희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다가 종친회에 가면 내가 깍듯이 ‘대모님’이라 불러준다”며 화제를 돌리는 내공이 수준급이다. 나도 질세라 급히 화제를 돌리면서 남편에 관해 물어봤다. 이자연은 1996년에 결혼해서 남편과 별 탈 없이 살고 있다. 두 살 연상인 남편은 건설업에 종사하면서 모텔도 소유하고 있는 재력가다. 이자연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여덟 살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섭섭해서 “부부 전선에는 이상이 없나? 요즘 하도 ‘졸혼’이 유행이라서…” 하고 은근슬쩍 떠보았다.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우리 남편은 ‘껌딱지’다. 틈만 나면 내 옆에 딱 붙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일을 존중해줘서 지방공연 등 가수활동을 하는 것에 관해 불평이 없고 오히려 좋아한다. 남진 오빠랑도 잘 아는 사이라서 ‘어떤 때는 남진 오빠가 나에게 전화 안 하고 신랑에게 전화를 할 정도’다”라고 말하는 걸 보니 남편의 외조가 오늘의 이자연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노래가 내 자식” 자식이 없어서 오히려 부부애가 더 끈끈하고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이자연은 “노래가 내 자식”이라며 “아직까지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다. 입양까지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가수활동이 바빠 아이를 입양하면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집에 가두고 살림만 시키려 했던 경향이 있는데 나는 아무리 백마를 탄 왕자라 해도 노래하지 말라 하면 못 산다”고 딱 부러지게 말한다. 그래서 결혼 전에 뭇 남자들로부터 대시를 받은 적이 많지만 전부 거절하고 지금의 남편을 선택했다. 남편은 그녀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게다가 “나는 밥도 할 줄도 모르는데 우리 남편은 미식가라서 내가 밥하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니 이만한 천생연분도 없다. 그녀는 “나는 가수가 천직이고 다시 태어나도 또 가수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할 줄도 모르고 아예 하고 싶지도 않다”고 단호하게 자신을 정의한다. 어떤 분야이든 자기 일에 미치도록 집중해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자연처럼 일생을 노래에만 집중하며 산 사람도 드물다. 나 이봉규만 해도 직업을 여러 차례 바꿨고 취미도 다양하고 아직도 와이프가 차려주는 밥상이 제일 좋다. 오늘은 왠지 이자연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다. 이래야 성공을 하는구나! 또 배운다. “이룰 거 다 이뤘는데 앞으로 꿈이 있는가?”라고 묻자 “좋은 노래로 사랑받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가수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천생 가수의 모범 답안이다.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최고로 일 잘하는 회장으로 남고 싶다. 어려운 가수들의 복지에 힘쓰고 선후배 가수들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이자연의 눈과 목에 힘이 들어간다. 포부가 당차고 왠지 신뢰가 간다. 이 여자가 뭔 일을 해낼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수라는 직업이 최고다. 행복한 직업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는 축복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걸 보니 이자연이 인생을 잘 산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숨도 안 쉬고 “남진, 나훈아”를 외친다. 뼛속 깊이 가수이면서 의리까지 갖췄다. 석사까지 받은 사람이기에 대중문화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알고 있겠지만 곧바로 두 사람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러고는 덧붙여 “이미자 선배님도 존경한다.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나?” 하며 가수로서 너무 부럽다고 말한다. 동갑내기 이자연을 인터뷰하고 나서 거울을 보며 이봉규에게 자문해봤다. “나는 누굴 존경하나? 누구를 부러워하나? 어떤 것에 미치도록 집중해본 적이 있나? 앞으로는 무엇에 미쳐야 하나? 누가 나의 은인인가?” 찰랑~찰랑~대는 이자연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 2018-09-25 07:53
-
- 千佛千塔 이야기⑤ 영주 부석사(浮石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다섯 번째는 영주 부석사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있는 천년고찰 부석사는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에게 불도를 닦던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하고 돌아와, 5년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 잡아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현재의 규모는 아니었으며 초가나 토굴을 짓고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의상의 제자 신림 이후 국가지원 등으로 크게 중흥하여 대사찰의 건립이 이루어졌는데,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을 그려 벽화로 걸어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칼을 뽑아 내리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우측에 위치한 선묘각은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를 도왔던 선묘 낭자의 초상을 봉안한 건물이다. 창건설화를 계승한 융합적 신앙을 보여주는데, 설화의 주인공을 모신 전각을 유지하며 받드는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다. 부석사는 석등(국보 제17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 5점의 국보와 보물 6점을 갖춘 유서 깊은 절집이며, 아미타신앙의 성지이다.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부석사 일주문에는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있으며 범종루에는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절 입구에는 소백산과 태백산 설명이 장황하게 쓰여 있다. 결론은 태백산 지역의 마지막 부분이 소백산 지역에 편입되어 있으나 착오 없기 바란다는 말이니, 부석사가 소백산 국립공원이 아닌 태백산 국립공원 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부석사는 태백산 국립공원과 소백산 국립공원 사이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소백산이 더 가깝지만 지형상 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그 뒤편 선달산으로 이어지면서 태백산 줄기에 속한다. 그래서 (소백산이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라는 것이다. 일주문 안쪽에 당간지주가 서 있는 것이 의아하다. 1980년 전후 사천왕문과 일주문을 새로 세웠으며 그전까지는 지금의 사천왕문 자리가 일주문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래야 일주문 밖에 당간지주를 세우는 논리에 맞는다. 아마 사찰의 영역을 키우고 싶었나 보다. 매표소부터 일주문, 당간지주, 천왕문까지 험난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오르막 지형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천왕문부터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까지는 3개의 큰 석축을 올라야 하며, 이 석축들은 다시 작은 경계로 나누어져 불교의 구품만다라를 상징한다고 한다. 즉, 구품만다라의 맨 위에는 극락을 상징하는 안양루와 극락을 주재하는 아마타부처님을 모신 무량수전이 위치한 매우 이상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는 최순우 선생의 답사기는 지금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구(名句)가 되었다. 천왕문을 들어서서 범종루를 오르기 전 잠시 평탄해지는 지형의 왼쪽에는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석탑들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인근 옛 절터에서 옮겨왔다는 이건비(移建碑)와 함께 세워져 있다. 삼층석탑 위로는 날아갈 듯 솟아있는 2층 건물 범종각이 보이는데 정면에 마주 보이는 면이 건물의 측면으로 팔작지붕의 합각이 방문객을 향해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1층은 누하진입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서는 구조이며 2층 누각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다. 범종각은 1층으로 누하진입하여 2층 누마루 중앙 아래로 계단을 올라가게 된다. 그 정면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면은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안양루와 무량수전으로 안양루(安養樓)의 안양(安養)은 극락을 의미한다. 구품만다라를 올라 극락에 도달하는 마지막 과정을 상징한다. 안양루에 올라서면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이며 이곳에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무량수불, 아미타여래를 모셨다. 이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이며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석등이 또한 국보 제17호이다. 부석사가 보유한 국보 5점 중 이곳에만 석 점이 모여 있는데, 무심코 뒤돌아보면 멀리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자락들이 이어지는 풍광의 멋스러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무량수전 어느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바라보았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석등 하나 있을 뿐, 별다른 치장이나 장엄을 위한 설치물 하나 없다. 그러나 석등은 높이가 3m쯤 되어 마주 서도 우러러 보아야 하며 석등 앞 배례석과 함께 말없이 무겁게 다가오니 과연 국보급 석등답다. 1919년 일제강점기 때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무량수전에서 석등까지 땅 밑으로 석룡(石龍)이 묻혀 있었으며 허리가 잘렸다고 한다. 그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묘 낭자의 전설이 기억나 사뭇 아쉽기만 하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눈앞으로 다가온다. 뛰어난 경관이지만 지금은 안양루 2층에 올라갈 수 없어 아쉽다. 안양루와 마주 보는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국보 건물이다. 비록 봉정사 극락전에 최고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어차피 건물의 중수 기록이 앞선다는 것일 뿐 창건 일자가 밝혀진 것은 아니기에 무량수전의 비중이 덜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강릉의 객사문 다음으로 심한 배흘림기둥을 갖추었으며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등을 적용한 뛰어난 건축물로 고대 불전 형식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 왔다가 부석사에 들렀을 때 썼다고 한다. 무량수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을 모셨는데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 동향(東向)하도록 앉힌 점이 특이하며 이는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의 주인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소조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이며 손 모양(수인)은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아미타불이 맞나 의심이 들지만 원융 국사 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불상을 수리하면서 그리 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절집을 답사하노라면 ‘실내 촬영금지’에 난감할 때가 많은데 부석사 무량수전은 특히 더 심한 편이다. 심지어 촬영금지 글씨가 안 보이냐고 힐난하거나 감히 부처님을 사진 찍을 수 있냐고 하니, 불상과 부처를 구분하지 못하고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싶어 답답했다. 아무튼 무량수전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동편 언덕 위에 삼층석탑이 하나 보인다. 금당 앞에 석탑은 당연한데 이 탑은 동쪽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아마타불이 서편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니 그 정면에 탑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다 보았나 하는데 석등 위로 산길이 이어진다. 갑자기 속세를 벗어난 듯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가보니 조사당(祖師堂)이 나타난다.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개창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로 의상대사를 기리는 전각이다. 신라 교종 화엄종 본찰에서 선종의 구산선문이 개창조를 섬기듯 하는 것이 조금은 낯설어 보이지만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면서 화엄종도 이를 따라간 것이 아닌가 싶다. 조사당의 왼쪽에는 자인당과 응진전, 단하각 등이 있으며 자인당에 모신 석불 3기 중 좌우 비로자나불은 보물 제220호, 가운데 아미타불은 보물 제1636호이다. 1칸짜리 단하각은 지신(地神)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여기까지 둘러본 후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부석사 오른쪽 산길로 접어드니 그 너머에 원융국사비(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가 있었다. 고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된 그는 1053년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워주었다. 원융국사비를 둘러보고 지장전 앞으로 오니 아까 올라갈 때는 범종각에서 비껴간 각도로 보이던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이쪽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이다. ‘아’ 하는 가벼운 감탄으로 바라보는데 문득 안양루 공포와 공포 사이 빈 공간에 앉아계신 부처님이 보인다. 현현불이다.
- 2018-09-19 10:19
-
- 세계 속에 빛나는 한국전통문화의 미래
- ‘문화유산’이란 인류가 창조한 유·무형의 역사적인 조형물과 자연적인 문명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에 관심을 두고, 세계 속에서 빛나는 것들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퇴직 후 향토문화해설사와 전통문화지도사로 활동하며 그동안 노트에 끼적여둔 ‘우리 문화’에 대한 것 몇 가지를 공유해본다. 택견과 아리랑 ‘택견’은 201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참으로 자랑스럽다. 유쾌한 몸짓으로 발을 움직이며 마치 무용처럼 리듬감을 지닌 동작은 보는 사람에게도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다음해인 2012년, ‘아리랑’ 역시 유네스코의 같은 목록에 등재되는 영광을 안았다. 어릴 적 붉은 댕기를 휘날리는 누님들을 따라 아리랑을 부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하였다. 그때가 메아리처럼 마냥 그리워진다. 누님들은 내가 노래 가사를 틀리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목청 높여 크게 부르도록 연습시켰기에, 아리랑은 그 누구보다 익숙하다. 아리랑은 1392년 7월 28일 고려가 망하고 왕조교체기에 만들어진 비밀결사의 참요(어떤 정치적 징후들을 암시하는 민요)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서-니믄/십 리도 몬가서 발병난다.’ 단순히 민요나 유행가가 아니고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충신의 생사의 대서사시라고도 한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혼과 민요의 정수가 되었다. 4행에 압축한 5000년의 민족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아리랑 고개는 추상적이며, 아리랑(阿里郞)은 여성을 뜻한다. ‘아리랑 쓰리랑’ 비밀결사의 내용이 숨겨져 있다한다. 김장과 농악, 그리고 제주 해녀 ‘김장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처음에 ‘김치’로 등재하려 했으나 상업적인 불합리성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장 문화는 가족, 이웃, 마을, 민족 간 정과 공동체 의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채택됐다. 이제 한국 전통음식도 세계 음식 문화 대열에서 영양가 높은 고급 음식으로 당당히 소개해도 손색없을 것이다. ‘농악’은 2014년 우리나라에서 17번째로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장구, 북, 꽹과리, 징 등 타악 합주에 상모돌리기 같은 춤과 흥겨운 연극요소가 있어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특유의 흥겨운 분위기는 전 세계인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2015년에는 우리나라에 등재된 무형유산이 많아 단독 등재 자격이 없다고 전해졌었다. 2016년에는 ‘제주 해녀’가 등재 심사될 예정이라 하여 주목받았으며, 계속되어가는 중이다. 이렇듯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의 멋과 향을 잘 알아야만 다른 문화까지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잘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앞으로는 학문, 예술 등의 문화 향상의 과정에서 산출된 재화인 유형과 무형의 문화재를 넘어서, 무형문화유산에 관해서도 익히며 해설의 폭을 넓혀가고자 한다. 이는 우리 문화의 세계화와 존귀함을 깨닫는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나라'라는 말을 익히 들어왔다. 택견, 아리랑, 김장, 농악 등 우리 고유의 문화가 세계에 감동을 선사하며 문화선진국으로 우뚝 서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 2018-08-24 17:17
-
- 외국어 배우기, 아기 옹알이하듯 차근차근
-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는 버킷리스트. 그러나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애써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도 어떻게 이뤄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주제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을 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앞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4위를 차지한 ‘외국어 배우기’에 대해 알아봤다. 도움말 박현영 수퍼맘북스·지니앤토비 대표 학생, 직장인 시절 외국어는 시험이나 취직을 위한 통과 의례였을 것이다. 그러나 입시와 취업 경쟁에서 벗어난 중장년의 경우, 취미 또는 도전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가 많다. 외국어 교육 전문가 박현영 수퍼맘북스·지니앤토비 대표는 “시니어가 젊은 시절 외국어를 배울 때는 주로 문법 위주였다. 때문에 중년 이후에는 생활 영어를 취미 삼아 하거나, 해외여행을 위한 실용 회화를 공부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또는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준비하거나 학창 시절 배우지 못한 것에 한을 느끼시는 분들도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고 설명한다. 배우고 싶은 이유가 다양한 만큼, 그 실천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저마다 수준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어려움을 느끼고 있을 영어 초보자들을 위한 조언을 담아봤다. 독학보다는 맨투맨 회화가 효과적 박 대표는 “시대가 바뀌면서 인터넷 강의나 스마트폰 앱 등 외국어를 배우는 방법도 다양해졌지만, 아무래도 시니어는 아날로그 세대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대로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외국어를 배우기 전 스마트폰 앱 사용에 능숙해져야 하고, 컴퓨터나 휴대폰 화면을 오래 보면 눈과 몸이 쉽게 피로해져 시니어에게는 무리가 있다는 것. 아울러 문법보다는 회화를 목표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아 소싯적 달달 외우듯 독학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박 대표가 적극 추천하는 것은 주민센터나 복지관 등 시니어만을 대상으로 한 강좌다. 일반 학원 강좌는 입시생이나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진도도 빠르고 공부량도 버거울 뿐더러 다른 학생과 수준 차이가 나면 위축되기도 한다. 반면 주민센터나 복지관 수업 등의 경우 가격도 저렴하고, 시니어의 패턴에 맞춰 수업 스케줄과 목표를 잡아 차근차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 외국어 초급 딱지 떼기 단계 [step1] 필수단어 100개 익히기 아이들이 처음 말을 배울 때 그림 카드에 적힌 이미지를 보고 단어를 말하듯,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100개를 그림과 함께 익혀보자. 이때 발음이나 스펠링 등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음식, 가족, 동물 등등 장르별 6~7개 정도 단어이면 충분하다. 먼저 100개의 단어가 친숙해졌다면 수준에 따라 200개, 300개까지 늘려간다. 너무 쉽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쉬운 것부터 즐겁게, 꾸준히 그리고 익숙해지는 것을 외국어 배움의 목표로 여겨야 한다. step2] 필수표현 50개 익히기 박 대표는 다수의 외국어 관련 서적을 집필한 경험으로 볼 때 ‘안녕’, ‘고맙습니다’, ‘잘 가요’ 등 유용한 필수 표현은 50개 남짓으로 정리된다고 말한다. 앞서 기초 단어를 익히듯 글자나 발음보다는 표현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에 중점을 두고 공부한다. 한두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라면, 막상 써야 하는 순간에 잘 생각나지 않는다. ‘thank you’, ‘sorry’처럼 굳이 머리로 생각해내지 않고도 곧바로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step3] 글자 익히기 아이들이 먼저 ‘엄마’라고 말하고, 나중에 ‘엄마’라는 글자를 배우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입에서 익숙해진 단어와 표현을 글로 배웠을 때 더 재미있고 가속도가 붙는다. 영어라면 알파벳, 일어라면 히라가나 등을 익히는 게 이번 단계의 목표다. 앞서 두 단계가 없이 바로 글자 쓰는 법을 배우면 철자와 단어의 뜻을 한꺼번에 익혀야 한다. 먼저 단어와 표현이 익숙해지면,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글자를 익힐 때도 효율적이다. step4] 문장의 뼈대 익히기 마지막 단계는 문장의 패턴을 외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I want it’(나는 그것을 원한다), ‘I want coffee’(나는 커피를 원한다), ‘I want love’(나는 사랑을 원한다) 등 ‘I want ~’(나는 ~를 원한다)라는 기본적인 패턴을 외우고 그동안 외운 단어를 접목하는 단계다. 반복해서 응용하고 그것이 익숙해지면 말로 문장을 내뱉는 힘을 키울 수 있다. 여기까지가 초보자가 목표로 할 수 있는 단계이고, 약 1년 정도 시간을 두면 좋다. 영어가 아니라면? 일본어에 도전! 대부분 외국어를 배운다 하면 1순위로 영어를 떠올린다. 이미 영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라면 또 다른 언어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중장년의 학창 시절에 남자는 독일어, 여자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익히는 것도 좋겠지만, 40~50년 전 이후로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면 새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언어는 익힌 뒤 자주 활용해야 입에 붙고 수준이 올라가는데, 아무래도 독일이나 프랑스 등은 여행하거나 언어를 접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이에 박 대표는 비교적 활용도가 높은 일본어나 중국어를 추천한다. 특히 일본어의 경우 발음이나 어순, 문법 등이 비슷해 공부하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고. 물론 일본어를 포함한 다른 외국어 역시 말부터 익히고 글로 쓰는 과정을 따를 것을 권한다. [Tip] 소리의 바다에 빠져라 외국어에 익숙해지려면 자주 그 나라 언어를 소리로 접하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팝송을 듣거나 미국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며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팝송의 경우 시적인 표현이나 슬랭(slang: 비속어, 은어)이 많고, 드라마와 영화 대사는 줄임말이나 유행어 등이 많아 초·중급 단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영어 동요를 불러보면 좋다. 따라 부르기도 쉽고, 거의 직역으로 뜻이 전달돼 노래를 통해 단어와 표현을 익히기에도 효과적이다. 어린 손주와 놀아주며 함께 영어 동요를 익혀보는 건 어떨까?
- 2018-08-20 14:31
-
- 인생은 ‘용도변경’ 무조건 다 쓰고 가자!-변용도 동년기자
-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1990년대 후반 IMF를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평범했노라’ 회상하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넥타이를 매던 손놀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어느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아버지 중 변용도 동년기자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용도폐기’ 인생을 딛고 잇따른 ‘용도변경’ 요구에도 능숙 능란 살아온 인생. 세월 역경을 딛고 여유로운 귀촌생활에 도시생활 잘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땅콩집에 산다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변용도 동년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 부부와 마음이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 두 가구가 같이 사는 이른바 ‘땅콩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텃밭을 일궈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를 따먹고 집 주위 논밭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는 우렁이 알과 관련한 기사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온라인에 게재하며 귀촌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참새에게 모이도 가끔 준다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리는 귀촌생활이라니. 마침 8월호 커버스토리가 귀농·귀촌 이야기라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햇빛 잘 드는 텃밭에서는 상추, 오이, 가지, 파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집 안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 이흥열 씨가 집에서 딴 부추로 만들었다며 부추전을 부쳐 내오신다. “논에 가면 우렁이도 있고 오리도 봅니다. 가을이면 밤도 많이 떨어져요. 사실 이곳에는 안사람 때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대신 아내가 제 매니저 역할을 종종 해줍니다. 지방 강의가 있을 때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주변 역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마중도 나오고 말이죠.” ‘좌절할 시간에 뭐든 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들이며 밭이며 마음 참 편안하게 해주는 곳에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닐까? 현재 변용도 동년기자의 직업은 전문강사다. 여가 설계와 생애 재설계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등을 또래 시니어에게 가르친다. “정년퇴임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이라든지 봉사활동, 학습 이런 것들에 관해 강연합니다.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요. 다행히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잘 호응해주셔서 강의시간이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다. SBS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리포터로 시니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시니어 자격으로 노크할 수 있는 매체란 매체는 두루 섭렵했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저서도 출간했고 육십 넘어서부터는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극무대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미투 운동을 ‘춘향전’에 접목한 창극 ‘어화둥둥 아.우.성’에서 변사또 역으로 출연합니다. 50플러스영등포센터에 있는 연극 소모임 작품인데 저는 회원은 아니고 이름이 특이해서 뽑혔대요. 이래봬도 제가 고등학교 때와 군 시절에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7월 30일 공연이고 10월에도 서울시청에서 공연한다는군요.” 말 그대로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는 이가 바로 변용도 동년기자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마흔일곱 살에 회사 그만뒀거든요. 쌍용화재 영남권 본부장이었는데 IMF 앞두고 하루아침에 해임됐습니다.”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보험 상품을 최초로 개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보험, 골프보험 등 특색 있는 보험에서부터 가정종합보험, 해양시추보험 등을 개발했다. 텃새 심한 제주도권 본부장으로 지낼 때 만났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변용도 동년기자가 제주에 떴다 하면 만나기를 청한다.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청학동 산골에서 나고 자라다 대학교를 다녀야해서 서울로 왔고 졸업한 뒤로 회사에만 있었으니 제가 뭘 어떻게 했겠어요. 회사 나와서 처음으로 한 사업이 만화방이었습니다. 화정 L마트 옆에서 한 3년 했어요. 요즘 만화방이 유행이던데, 예전에 집에서 만화 보던 식대로 드러누워서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잘됐어요. 처제에게 인수하고 부대찌개 집을 한 1년 했습니다. 술도 팔다 보니 늦게 끝났습니다. 안사람 고생이 심했죠.” 힘에 부쳐 부대찌개 가게를 팔았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곳이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생활정보지 회사 건물. 보직은 조경관리사였다. “고양, 일산 이쪽에서 생활정보지가 상당히 잘됐습니다. 그 회사 건물에서 조경관리사를 뽑더라고요. 말이 좋아 조경관리사지 쓰레기도 치우고 허드렛일 다 했죠. 그때 월급이 40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가끔 강의할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던 양반이 대비전 마당쇠 했다’ 그래요.” 나무 좀 가꾸다 쓰레기 치우고, 단풍 치우고, 잔디도 깎았다.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기회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한창 정육식당 바람이 불 때였어요. 생활정보지 회사가 500평 정도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정육식당 하면 딱 좋겠다 생각하고 회사에 건의를 했더니 그럼 저더러 점장을 하라더군요. 마당 쓸다가 대형 식당 점장이 된 거죠. 처음엔 젊은 사람 시키라면서 못하겠다고 고사했는데 그동안 제 얘기를 들었는지 믿고 맡기더라고요.” 마음에 안 차도 열심히 덤벼들었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IMF 때는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도 해봤다. 정치인의 주례가 잠시 금지됐던 시절에는 예식장 전속 주례사도 했다. “여하튼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했든 못했든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 기회가 되면 그냥 한번 도전해보자고요. 규모가 작건 소소하건 해보면 뭐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안 해본 일이 거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파고드는 근성은 타고난 것 같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두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요. 건강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한 명은 산에 갔다가, 한 명은 차를 몰고 가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간 거야. 술도 안 먹고 건강관리도 잘했어요. 다른 친구는 100억대 자산가였고요.” 죽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허망하게 갈 수도 있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권유로 ‘촌놈의 세상보기’라는 문패를 달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마침 있어 글 쓸 때마다 사진과 같이 올렸어요. 좀 더 잘 찍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두 친구가 죽고 난 뒤에 사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죠.” 점점 사진에 취미가 붙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일산동구청에서 하는 무료 사진교실이 있다기에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사진도 배웠다. “때마침 첫째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겠다며 사두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아이가 그 사업을 접으면서 카메라를 저에게 줬습니다.” 2010년 7월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공모전에 당선됐다. 스물여덟 번 도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시니어 기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고 블로그에서도 덤덤하게 인생 표현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케이블TV 출연 뒤 KBS ‘아침마당’에 은퇴준비 전문강사 중 사진 분야 강사로 출연하며 인생에 큰 계기를 맞이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삶에 귀감이 되는 전문강사가 된 것이다. “육십이 돼서 사진을 배우기 전까지는 먹고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사진기를 들고 나갑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사진 찍어주는 봉사도 하고요.” 물론 변용도 동년기자의 사진 실력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도 빛을 발한다. 온라인에 게재하는 기사에 적절한 사진은 기본이고 다른 동년기자 취재에도 사진기자로 참여한다. “2017년 1월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에 장영희 동년기자가 취재했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물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 3층은 개인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최근 ‘한 달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써낸 자서전에서 자신을 청학빛그림학교 교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죠. 영상도 배우고 싶고, 책도 3년에 한 권은 내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말이죠. 사진이 빛그림이잖아요.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이기도 하고요. 제 사진 전시회 제목도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였습니다. 저희 집 3층도 좋은 전시 공간이니 야외전시도 할 수 있겠죠. 두세 명은 이곳에서 충분히 합숙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에 주변을 돌변서 산책도 하고요.” 훗날 때가 되면 아내 이흥열 씨와 함께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의 규모를 땅콩하우스로 줄인 것도 훗날 여행을 하면서 살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도 찍지만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도 하니 찾아가는 사진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람하고도 오랫동안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때문에 못 가요. 아직은 챙겨줘야 하니까.” 집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이불 깔고 사는 반려견 헨리 때문에 아직은 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산 지 19년, 앞도 잘 못 보고 귀가 나빠져 잘 듣지도 못해 재롱도 부리지 않지만 가족이기에 늘 마음이 쓰인다. ‘용도변경’ 그리고 ‘다쓰가’ 인터뷰를 마치고 변용도 동년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용어인 ‘용도변경’과 ‘다쓰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째 사자성어가 용도변경입니다. 후반생을 바쁘고 즐겁게 살자고 만든 말입니다. 60세에 제 삶을 용도변경했습니다. 사진이 그 출발점이었고요. 취미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 강사로 방송인으로 사진강사로 저술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사진작가로 나름의 브랜드도 만들었고요. 포토스토리텔러, 제가 만든 세계 유일한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다쓰가’는 ‘다 쓰고 가자!’를 세 글자로 줄인 말입니다. 은혜를 되갚고 경험과 지혜, 재물을 다 쓰고 가는 것을 후반생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뭔가 물어보려 연락했던 오늘도, 여전히 바삐 살고 있는 변용도 동년기자.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떠나 걷고 있다. 너무도 이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스민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8-13 08:47
-
- 보따리마다 정겨운 인심이 가득 '한국의 장터'
- 대형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요즘. 빠르고 편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장을 보는 맛’은 좀 떨어진다. 덤도 주고, 떨이도 하고, 옥신각신 흥정도 하면서 정이 쌓이는 건 장터만의 매력일 테다. 사진만 봐도 따뜻한 인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한국의 장터’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한국의 장터’ 정영신 저 자료 제공 눈빛 전국 오일장을 한 권에 저자 정영신은 1987년부터 시골 장터를 기록해온 사진가이며 소설가다. 그동안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 장터’, ‘정영신의 장터’와 저서 ‘시골 장터 이야기’ 등을 통해 직접 발로 뛰며 포착한 우리 장터의 모습을 공개했다. 특히 ‘한국의 장터’에는 전국 오일장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470여 페이지에 묵직하게 담겨 있다. 총 9개 도로 구분하고, 다시 군으로 분류해 정리한 전국 대표 오일장 82곳을 소개한다. 430여 장으로 만나는 시골 장터 풍경 경기도부터 제주도에 이르는 전국 오일장의 생생한 모습을 다양한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430여 장에 이르는 사진이 모두 흑백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컬러 사진보다 오히려 시골 장터 특유의 투박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듯하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국밥, 날개를 퍼덕이는 장닭, 반들반들 기름기가 도는 부침개,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손짓 등 생동감 넘치는 장터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상인들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다 저자는 단순히 장터 정보와 사진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인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담아냈다. 포천 적성장 무말랭이 할머니, 충남 금산장 붕어빵 아저씨, 음성 무극장 뻥튀기 할아버지 등 장터 상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그들의 애환을 들려준다. 고단한 일상을 살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잃지 않고 삶의 터전을 일궈가는 그들의 사연을 읽고 나면, 사진 속 상인들의 표정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물게 된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훈훈해지는 마음이 어느새 우리의 발걸음을 장터로 옮겨놓는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 01 장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2012년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의 사진은 6년 전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진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유행이 달라지며 사람들의 차림새만 조금 달라졌을 뿐, 사진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분위기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때를 맞춰 오일장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몇몇 곳은 현재 장이 열리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확인 후 방문하도록 하자. plus 02 ‘전통시장 통통’ 웹사이트를 이용하면 전국 오일장을 비롯한 전통시장을 찾아볼 수 있다. 시장 이름은 물론 지역별 또는 특정 품목명으로도 검색 가능하다. 점포수를 토대로 한 시장의 규모, 주소, 주요 취급 품목, 주차장·화장실 등 편의시설, 온누리상품권 가맹 여부 등을 알려준다. 이 밖에 외국인과 함께 가볼 만한 ‘글로벌 명품시장’, 상품·교육·문화를 동시에 소비 가능한 ‘지역선도 시장’, 관광·예술을 접목한 ‘문화관광형 시장’ 등 특성화 시장도 소개한다. plus 03 일부 지역 관광지 할인, 온누리상품권(5000원권) 제공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팔도장터관광열차’를 이용해보자. 올해에는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는 전통시장 20곳을 선정해 11월까지 총 65회 운영할 예정이다. 휴가철인 8월에는 3~4일 강릉중앙시장·강릉문화재야행, 11일 단양구경시장·고수동물, 26일 대전중앙시장·영동포도축제 일정이 마련돼 있다. 예약은 코레일관광개발 홈페이지와 콜센터, 스마트폰 앱을 통해 가능하다.
- 2018-08-13 0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