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방송 중 필자가 즐겨보는 것이 마라톤이다. 남들은 2시간이나 왼발 오른발 바꾸어가며 내딛는 너무나 단순한 활동사진을 두 시간씩이나 보고 있다고 도저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마라톤은 메치기도 없고 숨 막히는 기교도 없다.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마라톤 평야 42.195km를 달려온 병사는 ‘이겼다’는 말을 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할 정도로 힘든 운동이다. 마라톤 선수들도 100m를 18초에 주파하는 속력으로도 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먼 거리다.
필자는 마라톤 시합에 100번이나 참가했다. 참가비를 내고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대회장에서 와서 내 기록으로는 무려 4시간을 주로에서 달려야 풀코스를 완주 한다. 달리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평균 4만원의 참가비까지 내면서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달리면서 후회도 많이 했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완주메달을 받으면 고생의 순간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해 냈다는 성취감에 다음 출전할 대회를 눈으로 찾았다.
세계 일류 선수들은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에서 연습하고 식이요법도 철저히 한다. 주로에서도 두뇌싸움이 치열하다. 바람막이 선수를 앞에 세우고 달리면 좋지만 호락호락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 오버페이스도 안되지만 치고나가는 타이밍이 늦어도 소용없다. 한번 뒤로 처지면 다시 선두에 서기가 어렵다. 뒤에서 추격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커지면서 숨소리를 귓전에 흘리고 나를 제치고 지나갈 때 내 발은 점점 더 무거워 진다.
마라톤의 고통과 희열을 몸으로 체험해 알기에 중계방송을 통해 대리 고통과 대리 만족을 한다. 달리는 선수들의 숨소리가 화면으로 들린다. 뒤로 처지는 선수들의 절망감을 읽는다. 마라톤이야 말로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지막 골인 10m를 남겨두고 1초차로 2등에게 선두를 뺐기는 선수의 심정은 어떠할까 당해본 사람만 안다.
2016년 브라질의 리우 올림픽의 금메달은 케냐의 킵초게가 2시간 08분 44초로 차지했다. 2위 에티오피아의 릴레사와는 1분 10초나 앞선 기록으로 완벽하게 우승했다. 킵초게는 전문가들이 이미 우승을 예견한 좋은 기록 보유자다 오히려 2위 릴레사가 강력한 우승 후보자를 제치고 올라섰다고 다소 의외의 표정이다. 다만 릴레사가 골인지점에서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했다하여 메달 박탈 소식도 들리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록은 너무나 초라하다. 1위를 한 삼성전자 손명준은 완주자 140명중 131위로 2시간36분 21초로 들어왔다. 2위인 심종섭은 138위 2시간 42분 42초이다. 우리나라 여자선수 최고기록인 2시간 26분 12초에도 한참이나 뒤지고 일반 아마추어도 이정도 기록 보유자는 많다. 반면 이번 대회 동양인으로 최고기록은 일본의 사토루가 2시간13분 57초로 전체의 16위이며 북한의 박철이 2시간 15분 27초로 27위에 랭크되었다. 여기에 비해도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다. 전반적으로 선수들의 기록이 저조한 것은 비가 오는 날씨 영향으로 판단한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마라톤 강국이다. 1936년 베르린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당시 세계기록으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고 3위에 남승룡 선수가 차지했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은메달리스트 이봉주 등 걸출한 선수들이 많다. 달리기가 우리 몸의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하니 국민 스포츠로 마라톤 저변을 확대하여 재능 있는 마라톤 스타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드물디드문 ‘90대 철학 교수’이자 글로써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 100세를 바라보며 만든 책 (덴스토리 펴냄)를 출간한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겪은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펼쳐놨다. 결코 흔치 않은 100년 동안의 시간을 경험한 노교수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자.
한 시절 젊은이들은 1960년대 등과 같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김 교수의 수필을 읽던 청년들이 어느덧 50, 60대가 됐지만 지금도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다.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가에서 가장 ‘묵직한’ 저자다. 90살을 넘어 100살에 가까워진 김 교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그 이름을 다시금 각인시키더니 와 의 두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름으로써 스스로 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 를 내놨다.
90대에 다시 맞이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즐거움
“를 작년에 내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놨던 와 를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죠. 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처음에는 출간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 책을 꺼내 주면서 꼭 내라고 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사람들이 예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감싸니 예수가 어떤 화두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책이 바로 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책이 나왔을 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지금 읽히기 시작하니 교회 안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호응이 있고 반응이 좋아요. 젊었을 때 써서 지금보다 문장도 좋고. 내가 봐도 훌륭해(웃음).”
김 교수는 백 살이 가까운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쓴다. 타자기는 안 쓰고 스마트폰도 안 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라는 계간지에 1년에 200자 원고지 400장을 쓰는 게 있어요. 그런데 3개월 후에 쓰는 걸 반복하는 것보다는 원고를 미리 써놓는 게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쓴 거죠. 그게 좀 무리가 됐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 써요(웃음). 할 때 하자 싶어서 한 일인데, 그렇게 무리했던 게 나은 거 같아요.”
가족이 떠나니 집이 비고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비었다
“우리 어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을 담담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분은 더 오래 사는 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직계 중에 먼저 돌아가신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그보다 늦게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먼저 갈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가면 되고, 네 처가 가게 되면 집이 빌 텐데 집이 비면 어떡하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그러니 정말 집이 빈 거예요. 외국 여행하고 돌아올 때 오고 싶지 않고 공항에 내려도 ‘빈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와 아내가 집이었어요.”
를 보면 김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 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김태길 교수는 2009년, 안병욱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집 식구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거 같은데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떠나고 5년쯤 지나고 나니 친구들이 가기 시작하는데 둘이 비슷한 때 가더라고. 세상이 비는 거 같았어요. 남들은 잘 몰라요, 나는 그걸 왜 느끼느냐 하면 친구다운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었죠. 독일의 괴테가 임종할 때 의식이 흐려져서 환상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는 걸 보더니 저거 쉴러의 편지인데 날아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해요,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한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고.”
그는 자신도 ‘이젠 인생 마감을 어떻게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한 거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내가 있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저한텐 남는 것이지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
나이 들어서 행복을 맛본다는 건 쉽지 않다. 김 교수는 나이 들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원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거든요. 그가 윤리학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인데 윤리학에서 하는 말이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어서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행복을 내게 주고 행복이란 그렇게 나눠서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만드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죠. 윤리학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을 내놓은 셈이에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 들면서 행복도 커지는 거죠.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게 인생인 겁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그 인격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인격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본다고 설명했다.
“인격이란 나에게 있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 대해선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실과 사랑이에요. 성실한 사람은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있고, 성실보다 더 귀한 인격은 자신에게 있어선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철학자가 된다
김 교수의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가장 성실하게 산 사람을 공자로 봤다고 한다. 공자는 성실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공자가 한계로 느낀 걸 종교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는 성실에 경건이 더해진 철학을 만들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성실만 갖고 있으면 종교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면 달그림자가 안 뜹니다. 그런데 조용해지면 달그림자, 별 그림자를 볼 수 있죠. 경건하다는 건 이성이 작용을 멈췄을 때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가 조용해졌을 때 별 그림자가 뜨는 것 같은 상태죠. 그때 종교가 오게 됩니다.”
김 교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보면 좋을 거예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제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나 보고 4년 동안 대학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현상을 잘 알죠. 인상은 남아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알지만 이상하죠? 난 대학 다닐 때 강의 들었던 것, 읽었던 책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강의 듣는 것, 책을 읽는 것 다 문제의식이 그릇이 되어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졸업하면 평범해집니다. 반면 일류 대학이 아니더라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김 교수의 아우라는 긍정적이다. 불안한 요인이 섞여 있지 않다. 아흔을 넘어 백세로 가는 이에게 그러한 긍정의 힘은 놀랍고 희귀한 사례다. 그에게도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게 있을까?
“93세 때 밤에 자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정리하면 뭐가 될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잤어요. 메모는 세 문장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철학자로서의 나는 진리를 추구했고 사회적으로는 겨레들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우리 시대는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를 겪어야 했으니. 못해서 아쉽겠다는 건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좀 더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가끔씩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젊었을 때 낭만이 있었느냐, 연애는 했느냐, 연애 결혼했느냐 중매 결혼했느냐 같은 걸 묻는데 속으론 ‘그건 왜 물어봐. 관심 밖이야’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마음 써줬는데 고마운 사람이다.’
“를 쓰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홀가분해요. 아쉽냐고요? 그런 건 생각 안 나요. 이 책 한 권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쓸 거니까.”
지혜가 묻어나오는 그의 저서에는 ‘성실’을 표현해내는 인격이 반짝인다. 그래서 김 교수의 책은 그리울 수밖에 없다.
>> 김형석 교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기를 거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성장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로, 인촌 김성수 선생은 멘토로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20년간 투병 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 연희동 주택에서 10여 년째 홀로 살고 있다. 4녀 2남의 자녀들에게도 “나를 위해 마음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며 고독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삶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이번 달부터 새롭게 진행하는 ‘이봉규의 心冶데이트’는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공인들을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며 편하게 만나 은밀한 속내를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꾸밈없고 날카로운 ‘돌직구’를 던져 차마 예상치 못했던 야들야들한 답변을 끌어내는 사심이 묻어나는 ‘술술토크’를 열었습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윤영미(57) 아나운서와는 방송을 같이 한 적도 여러 번 있고 방송국 대기실에서 자주 마주치고 대화도 많이 나눴기에 편한 상대임에도 가 마련한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의 인터뷰를 위한 만남은 설랬다. 그녀는 1962년생으로 여자로서 밝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당당하다. 오죽하면 ‘여자 김구라’로 불린다고 스스로 털어 놓는다. 요즘 아무리 김구라가 인기가 좋다고는 하지만 ‘여자 김구라’로 불리고 싶을까? 일반적인 여성 방송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변태거나 ‘또라이’는 절대 아니고 지나치게 발랄하고 순수하고 다소 엉뚱스러운 여인이다.
윤영미 아나운서와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닭갈비집에서 만났다. 그녀는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춘천에서 1년간 기숙사 생활(성심여자대학교 국문과)을 했고 춘천 MBC에서 다년간 공채 아나운서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닭갈비를 좋아할 것으로 믿고 필자가 그리로 정했다. “닭갈비집으로 인터뷰 장소를 잡는 이봉규의 센스에 깜짝 놀랐다”고 말하면서 “역시 이봉규는 한량!”이라고 평가한다.
한량인 내가 타이밍을 놓칠 리가 없다. 바로 분위기를 업~ 시키려 둘은 막걸리 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그녀의 주량은 상당히 센 편이다. 맥주는 싱거워서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서 소맥을 즐긴다고 허풍쟁이 남자들처럼 주량 자랑이다. 술 먹다가 취해서 화장실 갔다가 자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매거나 필름이 끊긴 적도 여러 번 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대학 시절 명동의 유명한 나이트클럽인 ‘마이하우스’를 휩쓸었단다. 낮 2시부터 디스코텍을 다닐 정도로 세칭 ‘날라리’였다고 허풍을 떤다. “맥주는 5000cc까지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필자는 맥주를 따로 더 시켰다.
그녀가 막걸리보다는 맥주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혹시 막걸리를 먹어서 매우 취하면 인터뷰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도 살짝 작용했기에 필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그녀에게는 맥주를 권했다. 술병이 한 병 두 병 비워 지고 취기가 서서히 올랐기에 과감한 질문을 던졌다.
“가끔 바람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까?”라는 돌발 질문에 “멋진 뇌색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보면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는 못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정신적인 바람을 피우고는 싶지만 몸을 섞는 육체적 바람은 찜찜하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하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이혼 생각도 여러 번 했었지만 막상 이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고 한다. “막상 이혼을 하고 나면 다른 남자와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다시 말해 대안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취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그렇지 결혼 20년차 이상 대부분의 중년 여성들은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하고 몇십 년이 지났고 아이들도 다 컸고 갱년기에 심리적인 흔들림도 생기기 마련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남에게는 남편밖에 모르는 현모양처로 이혼 생각은 전혀 해 본 적도 없다고 내숭을 떠는 여성들이 속으로는 곪아 터질 대로 터져서 남모르게 골프코치나 수영코치하고 바람피우거나 산악회에 가입해서 헌팅을 위해 이산저산 떠돌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번쯤 일탈은 설렐 것 같아요, 삶의 동기 부여도 될 것 같기도 하구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함을 느끼는 그녀의 표정은 실제로는 제대로 일탈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일탈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아쉬움을 그녀는 시인 문정희의 어록으로 대신한다. “죽으면 썩을 몸을 칭칭 감고 다녔다.” 이 말을 듣고 금방 이해가 갔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그녀는 문정희 시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문정희의 ‘남편’이라는 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을 낭독한다.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 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구절이 그녀의 마음과 똑같아서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일탈을 꿈꾸다가도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먼 남자인 남편의 존재 때문에 삭이고 사는 것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 배운다.
35세에 만난 남편 황능준씨는 지난 20년의 결혼생활 동안 사업 실패, 전업주부 생활, 목회자로의 전향 등 때문에 아내 윤영미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한 방송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과거 남의 말만 듣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며 본의 아니게 아내를 ‘생계형 방송인’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남편하고 살면서 속도 하도 많이 썩어서 지긋지긋할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또 다른 방송에서는 “저는 속아서 결혼한 것 같다. 울분이 항상 쌓여 있어서 돌덩이(가슴에)가 있는 기분이다”라고 토로하면서 “결혼 전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호강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3년 정도 살았다. 당시 얼마 되지 않던 내 아나운서 월급으로만 먹고 살았다”고 하니 요즘의 그녀가 얼마나 씩씩해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웬수’ 같은 남편이지만 시인 문정희의 ‘남편’에 나오는 구절처럼 여기고 새기면서 살고 있을 것 같다. 놀랍게도 그녀의 첫 섹스 파트너는 35세 때 지금의 ‘웬수’ 같은 남편이었다. 그러니 그럴 법도 하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2차로 장소를 옮기자는 필자의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바로 옆에 필자가 자주 가는 라이브 바 ‘그루브’에선 스스럼없이 대화가 더 깊숙하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첫 키스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 같이 초등학교 때 홍천 계곡에서 환상처럼 이루어졌다고 한다. 상대는 당시 홍천초등학교 전교회장. 40여 년이 훌쩍 지나갔어도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멍하다고 말한다. “첫 키스 상대인 그때 그 사람이 그립습니까?”라고 묻자 “지나간 사랑은 기억일 뿐”이고 “여자는 한 남자를 두 번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윤영미 어록이 쏟아진다. 풋고추 같은 사랑이었고 가슴 아픈 첫 사랑은 따로 있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그녀의 대학 시절 강원대학교 건축과에 다니던 테리우스 같은 꽃미남을 ‘꼬시기’ 위해 그녀는 적극적으로 행동했었다. 성심여대에 다니던 윤영미는 강원대 앞 카페에서 우연히 본 테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강원대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혹시나 도서관에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교회 친구가 테리우스와 강원대 같은 과(건축학)의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영화 의 ‘윤영미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그와 사귀게 되었는데 으레 첫사랑이 그렇듯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스토리는 마치 영화와도 같았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중년이 된 나이에 그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딱 봐도 행색이 안 좋아 보일 정도로 예전의 꽃미남 테리우스는 온데간데없어서 슬펐다고 한다. 아련히 애틋했던 첫사랑은 그렇게 완전히 그녀의 맘속에서 비로소 지워지고 말았다.
그 후 웬수 같은 남편은 그녀에게는 중년의 테리우스같이 멋져 보였을 것 같다. 실제 그녀의 남편 황능준씨는 훈남의 외모를 자랑한다. 그녀는 남편의 첫인상이 ‘푸른 초장’ 같았다고 회고한다. 속을 전혀 썩일 것 같지 않고 순수한 남자일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살아 보니 속도 많이 썩었고 산전수전 겪다 보니 지금은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런대로 봐 줄 만하다고 은근 자랑이다.
그녀는 “남편이란 존재는 처음에는 연인이고 그 다음은 웬수처럼 느껴지다가 세월이 가면서 친구가 되어간다.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는 아마 인생의 간호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고 정의한다. 남편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인터뷰를 시작할 때와 인터뷰가 끝나 갈 무렵과는 사뭇 다르다. 솔직하고 쿨~한 윤영미의 복잡한 마음일까? 아니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느끼는 것이 남편이란 존재일까?
한량인 이봉규는 아직 더 여인들의 심리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윤영미는 멋들어지게 노래를 뽑았다. “삶의 후회는 없고,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금방 포기한다”는 그녀의 가치관이 노래에 묻어 나온다.
펜션 문화가 넘쳐흐른다. 구석구석 경치가 좋다는 곳에는 멋들어진 유럽풍의 집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예약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사람들의 바캉스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물론 한강변에 텐트를 치는 캠핑 족들을 비롯하여 산과 들로 캠핑 문화도 변화를 거듭한다. 젊은 사람들의 앞서가는 생각들이 선진국 문화를 창출한다. 답답한 아파트 생활 속에서 탈피하여, 모처럼 온 가족이 야외에서 바베큐를 구어 가며 오손 도 손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삶의 여유처럼 보인다.
필자는 이번 휴가를 맞이하여 양평의 한 멋진 펜션에서 또 하나의 문화생활을 맛보았다. 그것들은 삶의 또 다른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새로운 휴식처 그 자체였다. 사실 늘 시간이 많으니 휴가라 할 것도 없었지만 가족들의 시간들이 안 맞으니 대충 그렇게 때우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2시, 거리는 차들의 전쟁이었다. 막히는 거리를 뚫고 북한강을 거슬러 양평으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향해 산길로 들어섰다. 산꼭대기 쪽에 다 와서야 예약을 한 '힐 펜션'이 나왔다. 삼면이 모두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무들이 울창했다. 강가 쪽은 모두가 예약이 끝나서 그곳도 겨우 잡았다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산꼭대기에도 몇 채의 펜션들이 더 있었다. 안내원이 미리 준비한 곳으로 안내를 했다. 이층의 한가운데 집이었다. 총 아홉 채의 고급스러운 펜션이 있었다. 실내로 따라 들어갔다. 겉모습보다 많이 달라 필자는 깜짝 놀랐다. 복 층 구조로 되어있는 실내가 미국의 스튜디오를 그대로 연출해내고 있었다.
1층에는 부엌과 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잠을 잘 수 있는 침실이 있다. 침실의 바로 앞에는 미국식 스파인 4인용 자쿠지가 보글보글 물 소리를 내며 준비되어있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부엌 바로 옆으로 자그마한 수영장이 파랗게 보인다. 가족용 수영장이 아담하게 물을 퐁퐁 뿜어내며 순환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찌는 무더위에 우선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물이 너무 차가워 소름이 끼쳤다. 몇 번을 휘저어대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따뜻한 자쿠지 물속에 몸을 담갔다. 세차게 따뜻한 물을 쏟아내어 마사지를 해주는 스파의 물줄기가 온몸을 나근나근하게 덥혀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이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안내원은 시뻘건 숯불을 가져다주었다. 미리 준비해 간 고기로 바베큐를 하면서 온 가족은 모처럼 미국적인 생활을 다시 맛보고 있었다. 바로 수영장 옆에 숯불 그릴이 준비되어있었다. 한국의 모든 것들이 선진국의 문화를 앞서가며 그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즐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 한번 수영장과 필자가 좋아하는 자쿠지 스파를 흠뻑 즐겼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 아까워서 후회 없이 실컷 '1박2일'을 즐기고 싶었다. 필자 가족은 깨끗하게 뒤 정리를 하고 대 만족감으로 고급스러운 펜션을 나섰다.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다.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운 카페가 즐비하다. 각양각색의 음식점과 멋들어진 펜션의 모습으로 길거리에는 젊음의 활기가 넘친다.
양평의 북한강 주변에는 마치 유럽의 궁전 같은 웅장한 집들도 많이 있었다. 과연 모든 곳들이 1년 내내 성업이 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한 계절의 휴가 문화에도 이제 찬바람이 불어온다. 잘 지어진 럭셔리한 펜션들이 곧 썰렁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1년 내내 여유로운 휴가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몰려왔다..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마음을 괴롭힌다. 어쩌면 그것들이 삶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나이를 먹고 세월을 품어보니 더 이상 못 견딜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약’이라는 명언도 있는가 보다.
한해 두 해 살다 보니, 어른들의 옛 말씀들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지나고 나서야 경험을 해보니 이제야 터득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나약해지기 때문인가 보다. 젊은 날의 고집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고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실감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속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복잡 미묘하다. 적어도 필자의 젊은 날에는 아주 심했다. 더구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거의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숨을 쉬고 뒤돌아보니, ‘왜 그때는 그렇게도 몰랐을까?’ 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연연해서 상처받고 아파하며 밤을 꼬박 지새운 날도 있었다. 그 상처가 너무 깊어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로 방황한 때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은 아픈 과정 속에서 성숙되고, 또 그것을 감당해내며 넉넉해진다는 것을 그때는 차마 몰랐었다.
그렇게 곧 죽을 것만 같던 엄청난 일들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사람들과 뒤섞여 수없이 관계를 맺고,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던 고통의 시간들도 잠시 멈추어 한발 돌아보면, 굳이 화해하지 못할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인간이고 사람 냄새이다.
사람이 태어나 쉽게 죽고 살기도 하는데, 죽음에 비하면 무언들 못하랴 싶기도 하다. 사실상 ‘용서’란 단어는 엄숙히 말하면 자기와의 싸움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어느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화’라는 용광로의 불길 속에 자기를 던져놓으므로 해서 용서를 못하는 것만 같다.
아무리 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꺼지기 마련이다. 결국 시간 속에 자신만이 재가되어 힘없이 벗어나오게 되고, 한때 시뻘겋게 타올랐던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적어도 본인의 양심은 그 사실을 안다. 치솟았던 ‘화’라는 것들도 언젠가는 열기가 식어 가슴에 흩어지고 만다. 남는 것은 후회의 마음뿐이다.
오히려 스스로가 자신의 화를 감당치 못해, 용서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결론의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찌 화를 내지도 말고 살라는 말인가? 얼마든지 ‘화’라는 것은 자유롭게 끓어 날 수도 있고, 특별히 마음이 여린 사람은 깊은 아픔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루빨리 그 불길에서 벗어 나는 일, 그 길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반성하고 그리고 남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베푸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다. 단순하게 마음만 먹으면 아주 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까짓 것 마음먹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놈의 여유로운 마음먹기가 무척 힘이 드는 것뿐이다. 결국 자아 성숙이 덜 익은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모든 것들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위대한 사실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식과의 관계도 남편 또는 이웃들의 친분도, 그 모든 것들도 다, 자신으로부터 온다. 모든것들은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으로부터 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쉽게 가라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신만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힘겨운 이 세상을 살면서 애써서라도 주변을 향한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필자도 마음에 잔잔하게 용서의 꽃을 피워 평화로움을 만들어 내고 싶다. 그 꽃은 특별한 권리가 아닌 평범한 사랑의 꽃으로, 사람 냄새 훈훈하게 피어나는 예쁜 꽃이었으면 어떨까 싶다.
또 돌아보고 후회하는 사람의 꽃이라면, 이왕이면 가슴 따뜻한 ‘용서의 꽃’으로 피어나면 좋겠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당신은 잘 자고 계십니까?
세상의 나이 든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나이 들어서 너무 많이 자는 사람들이 있다. 100세 가까운 원로 철학자는 반농담으로 말하길 그런 사람들은 ‘웰다잉’ 연습을 하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한 부류는 유난히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져서 잠자리에 들어도 이리저리 뒤척이게 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매일 수만 가지 감정에 휩싸여 살아간다. 그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날 잠자리에 누워 후회를 많이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때 왜그랬을까’ ‘조금만 참아 볼걸’ ‘다 생각해서 말한건데 왜 이해를 못했지’ 등등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감정관리에 미숙해 노여움이 시시때때로 드러나는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행복한 노후를 위한 것들, 자녀 결혼 문제, 세금을 줄이려면 상속을 해야 할지 증여를 해야 할지, 어디서 살 것인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건강 문제, 손주 돌보기, 은퇴 전과 은퇴 후의 삶 등등 고민거리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러나 고민한다 한들 해결되지는 않는다. 물론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노파심, 노여움이 잠재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신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는데 이것이 수면에 영향을 미친다. 나이에 따라 잠이 드는 시각, 잠에서 깨는 시각, 잠의 깊이와 잠이 지속되는 시간, 또 수면의 질과 수면 패턴도 모두 변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잠은 정신과 신체에 회복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 감정 변화의 내용과 그 이유를 이해한다면 정서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고 모를 때보다는 잠을 더 깊고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다’고 알고 있지만 나이가 들면 수면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그만큼 수면의 질도 떨어지게 된다. 젊을 때는 깊은 수면이 많고, 잠들기 시작해서 깊은 수면으로 이행되는 시간도 짧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서서히 깊은 잠은 줄어들고, 얕은 수면 단계를 오가며 잠이 드는 깊이가 얕아진다.
특히 감정의 변화가 많은 날에는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밤중에 몇 번이고 잠이 깨는 ‘중도 각성’과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지는 ‘새벽 각성’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면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는 느낌도 없고 몸의 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유형별로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불면증 사람들은 강박적으로 잠 걱정을 많이 하며, 우울을 호소하기도 한다. 또 만성적인 불안이나 분노표출 장애도 있다.
사실 깊은 잠을 못 자는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정서가 안정되면 잠을 잘 자는 경우가 많다. 잠을 못 이루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거나 낮잠을 자서 발생하는 게 상당수다. 건강에 필수적인 수면시간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크게 감소하지 않으며, 시니어들도 젊은이들과 같은 양의 수면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달콤한 숙면을 위해 감정을 다스려야
내가 아는 지인은 잠을 잘 자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자는 편이다. 특히 낮잠을 잘 잔다. 아무 때나 피곤해지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드는 것이다. 그렇게 잠들면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자곤 한다. 이러한 그의 습성은 나이 들어서 생긴 게 아니라 젊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도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안전벨트를 매는 즉시 잠에 빠져 들었다. 요즘도 버스를 타면 그런 일이 자주 벌어져서 잠든 사이에 내려야 할 정거장을 여럿 지나치는 바람에 곤란해진다고도 한다. 흔히 낮잠을 많이 자면 밤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낮잠을 자도 밤 11시면 반드시 잠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잠은 직업적인 것과 다소 관련이 있다. 그에게 있어 잠은 글쓰기라는 정신노동이 주를 이루는 생활의 성격상 피로를 푸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그래서 피로가 쌓이지 않게끔 시시때때로 잠이 드는 일이 필요하다.
억지로 자는 건 의사들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잠을 못 이루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선 넓은 범주에서의 균형관리를 필요로 한다. 90대의 지인은 “50대 즈음부터 자신의 건강의 문제를 발견하여 잘 관리하면 80대까지 문제없이 살 수 있으리라”고 밝혔다. “행복을 갖기 위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서, 심리적 안정이다. 정서관리만 잘해도 생활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어쩌면 불면은 그 무엇보다도 감정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정서가 메마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그만큼 행복한 인생이 좋은 잠으로 시작되듯 잠은 정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숙면의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잠에서 오는 행복’을 위한 그 첫 번째는 감정관리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불면은 그 무엇보다도 감정관리가 잘 되지 않다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발생하고 거기서부터 만들어진 문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감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감정을 느끼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친 두려움은 누그러뜨리고 걱정을 미래를 위해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불안을 극복하도록 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나이에 이에 대한 관리를 잘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충동적으로 감정이 다가온다면 잠 못 드는 고통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니어들에게 민감한 정서는 잠을 방해한다. 감정에 얽매이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잘 읽어 ‘별 헤는 밤’을 마주하지 않아야 한다.
숙면을 위한 첫 번째 조건, 감정을 잘 다스려 달콤한 빗장을 함께 열어 보자.
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미국사회 한 번 믿어보자 안 믿고 살려니 안전불안증 생기겠다 ” 마음먹으니 사회란 한 구석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는 거로 이해가 되었다, 그 후로는 격주로 전화하면서도 서로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