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이다. 좋은 것들을 보고, 맛보고, 즐기기에도 인생은 모자라다. 잭 니콜슨(Jack Nicholson)과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이 주연한 영화 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 이라고.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모험심을 끌어 모아 생에서 가장 설레는 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떨까?
여행자들은 누구나 가봤고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숙박시설들을 원하지 않는다.
에어비앤비(www.airbnb.co.kr)는 일반인들이 자신의 주거지 중 남는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숙박 예약 사이트이다. 여유 공간을 빌려 쓴다는 개념이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에어비앤비 서비스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 시간을 서로 함께하면서 새로운 여행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여행객들은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즉 집주인과 함께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집과 같은 느낌과 함께 새로운 추억도 덤으로 얻어 간다.
에어비앤비가 2016년 꼭 가봐야 할 특별한 공간과 사용자들의 후기를 소개한다. 세계 곳곳의 기발한 숙소에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는 에어비앤비의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특별한 공간’은 발리의 대나무로 지어진 별장, 멕시코 무헤레스섬의 조개 하우스, 아이슬란드 간헐천 옆의 산장, 캘리포니아 사막 한가운데의 모던하우스다.
멕시코 무헤레스섬 황홀한 조개 하우스
“이 황홀한 건축물에서 정말 즐거운 경험을 했다.
집주인 라켈은 매우 친절했고 이곳에 머물고 난 후 멕시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마리
‘카리브해의 낙원’ 칸쿤(Cancun)에서 조금 떨어진 무헤레스섬(Isla Mujeres)에 자리 잡고 있다. 1994년 건축가인 집주인 에두아르도(Eduardo)는 해변의 반짝이는 조개껍질로부터 영감을 받아 조개 형상의 집을 짓게 되었다. 외부인 출입을 제한하는 주택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칸쿤보다 깨끗하고 조용한 해변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원한다면 숙소에 딸린 개인용 수영장을 이용해도 좋다. 에두아르도와 그의 아내 라켈(Raquel)이 옆집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손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해변으로는 골프 카트를 타고 이동할 수 있으며, 미화 35달러로 하루 동안 빌릴 수 있다.
발리 우붓 대나무 별장
“내가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숙소 중 가장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서 아내와 결혼기념일을 보냈는데 별장이 너무 편안해서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숙소에서만 하루를 보냈다. 정말 사진에서 보는 만큼 멋진 집이었다.”
- 네이선 에어비앤비 공동창업자
에어비앤비 공동창업자 네이선 블레차르지크가 자신이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숙소 중 최고라고 극찬한 곳. 발리 중부 내륙에 자리한 ‘예술가 마을’ 우붓과 가까운 열대림 속에 지어진 별장 건물이다. 4층 높이의 별장은 건물 구조부터 가구까지 모두 대나무로만 지어졌으며 발리에서 가장 긴 아융(Ayung)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뛰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숙소 곳곳에 에어컨과 제습기를 두어 촉촉한 열대기후에도 쾌적하게 지낼 수 있고 실내 와이파이와 TV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원한다면 현지의 발리인 요리사를 초청해 특별한 만찬을 즐길 수 있다.
아이슬란드 라가바튼 대자연 속의 산장
“정말 사랑스러운 산장이다.
북적이는 인파를 떠나 뜨거운 욕조에 몸을 녹이며 오랫동안 노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오드리
뾰족한 피라미드 모양이 재미있는 이 산장은 아이슬란드 남쪽에 자리한 라가바튼(Laugarvatn) 강가 작은 마을에 있다. 수 세기 전 용암이 굳어 형성된 넓은 용암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흔히 볼 수 없었던 나무와 이끼, 식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최대 6명까지 수용 가능한 산장의 뒷마당에는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놀이터까지 있어 가족 여행에도 좋다. 차량으로 10분 거리에는 간헐천이 있고, 도보 2분 거리에는 골프 코스와 승마장이 있어 숙박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아름다운 사막 한가운데의 모던하우스
“멋진 집이다. 마치 다른 행성에서 머무는 듯했다.
집주인 린다(Linda)도 친절했고, 우리가 기대했던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제이미
이곳은 최근 LA타임스가 선정한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의 가장 멋진 집” 순위에 이름을 올리며 아름다운 집으로 인정받은 곳이다. 친환경 건축 자재를 사용한 것도 의미가 있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머무르기 딱 좋은 곳이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창 앞에 펼쳐지는 사막풍경을 가슴에 담아 봐도 좋다. 매일 아침 산지 과일로 짜낸 신선한 주스가 숙소로 배달된다.
에어비앤비에 대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008년 설립된 에어비앤비(Airbnb)는 전 세계에 독특한 숙소를 가진 사람들과 숙박할 곳을 찾는 사람들을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연결해 주는 신뢰할 수 있는 커뮤니티 장터다. 아파트를 하룻밤, 성을 일주일, 별장을 한 달 빌리고 싶을 때 에어비앤비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사용자들이 특별한 여행 경험을 각자 예산에 맞게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장터가 되고 있다. 현재 190개 국가 3만4000개 이상 도시의 여행자 숙소 정보를 사용자 맞춤형으로 제공하고 있다. 회원수의 지속적인 증가로 회원들이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자신의 남는 공간을 가장 쉽게 홍보할 수 있는 사용자 커뮤니티가 되고 있다. 문의 press-kr@airbnb.com
현대자동차 ‘포니(Pony)’가 1975년 12월 첫선을 보인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국산 고유 모델 포니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내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소형차 중심으로 바꾸고 마이카 시대를 열었으며, 단순한 자동차를 넘어 한국 공업화의 상징이 됐다. 많은 국민들에게 ‘생애 첫 차’로 추억되는 포니를 더듬어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요즘은 자동차가 일상생활의 필수품처럼 여겨지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동네 도로에 자가용 자동차가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던 때였다. 자동차가 많아지게 된 계기는 국산자동차 ‘포니’ 출시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마이카’를 갖는 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포니가 잘 팔려나갈수록 자동차산업 발전의 기반이 단단해졌다. 또한 자동차산업은 원조경제를 막 벗어난 걸음마 단계의 한국 산업이 보다 고도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회사 망합니다’ 직원들도 말린 무모한 도전
자동차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작용한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도 연간 5만 대 이상을 생산하지 못하면 채산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후진국 자동차업체들로서는 해외 유명 모델을 그대로 도입해 일단 채산성을 맞추는 전략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은 곧바로 고유모델을 개발하는 공격적 전략을 택했다.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동차 관련 기술은 ‘백지상태’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라고는 미군이 버리고 간 지프차량을 뜯어 만든 ‘시발(始發)차’ 정도였다. 자동차는 2만여 개 부품이 들어가는 ‘기계공업의 꽃’으로 불리지만 국내 기술력으로는 부품 한 개도 제대로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대차 기술자들조차도 ‘자칫 회사가 망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계획’이라며 정세영 전 회장을 말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달리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만은 개발 계획을 흔쾌히 승낙했다. 현대는 처음부터 국내시장은 물론 세계시장을 겨냥해 무모할 정도의 투자를 감행했다. 정부의 자동차 육성 계획보다 오히려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伊·日서 코피 쏟으며 공부, 전쟁처럼 치른 개발·생산
맨땅에서 자동차를 만들어야 했다. 막상 시작하긴 했지만 부품을 도면으로 그리는 방법조차 몰랐다. 더구나 당시 한국에는 도면을 줘도 만들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정세영 회장은 자동차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 날아간 이탈리아에서 36세의 젊은 디자이너를 만났다. 오늘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그의 감각을 알아본 정 회장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미화 120만 달러에 고유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다.
자동차의 기본 골격이 되는 엔진, 트랜스미션, 프레임 등을 포함한 플랫폼이 필요했다. 자체 개발은 불가능했다. 현대자동차는 플랫폼을 구하기 위해 GM사와 포드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거절당했다. 다행히도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이전 협약을 체결했다. 미쓰비시 구보 도미오(久保富夫) 회장 가족 중 한국인 혈통을 활용해 정주영 회장이 수완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현대차는 이탈리아와 일본에 각각 연수팀을 보내 설계도면 제작과 엔진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불과 몇 개월 내에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연수팀은 매일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했다.
생산현장은 흡사 전쟁터였다고 한다. 생산근로자들은 아침 8시에 출근해 다음 날 밤 10시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틀 밤을 새우는 ‘이철’, 사흘 밤을 새우는 ‘삼철’ 등의 단어도 이때 생겨났다. 첫 고유모델 생산은 온 나라의 관심을 끌었다. 차 이름은 전 국민 대상 공모를 통해 정했다. 공모에는 태양, 새마을, 아리랑 등 6만 장에 가까운 엽서가 접수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폐허에서 세계 8번째 고유모델 車 생산국으로
포니가 첫선을 보인 곳은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제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였다. 현대자동차와 대한민국의 세계 자동차시장 데뷔였다. 포니에 대한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가 여덟 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출품했다는 점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포니신화’의 시작이었다.
1975년 12월 생산설비 완공과 함께 포니 차량 양산이 시작됐다. 이듬해 2월부터는 시판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첫해인 1976년에는 1만726대, 1977년에는 2만4000여 대가 팔렸다. 외국차 일색이었던 서울 시내 도로를 오렌지색, 하늘색, 녹색의 포니가 대신 채워갔다.
염원이었던 해외 수출도 시작됐다. 첫해 1019대였던 수출 물량은 1977년 4523대, 1978년 1만2195대 등으로 급신장한 뒤 1982년에는 30만 대를 돌파했다. 1986부터는 미국시장에 입성, 첫해 16만8800대, 이듬해에는 26만여 대의 판매 성적을 올렸다. 대성공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군용차로 차를 만들던 한국이 미국 시장에 고유의 차량을 수출하게 된 극적인 장면이다.
마흔살 포니가 대한민국에 남긴 것은
지난 7월 미래창조과학부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광복 이후 과학기술 성과 70선’ 선호도 조사를 한 바 있다. 포니는 기계소재 분야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으며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포니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포니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문가들은 포니가 국내 자동차산업의 자립과 경제도약의 발판이 돼 줬으며 국민의 자긍심도 높였다고 평가한다. 포니와 함께 본격적으로 출발한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지난해 기준 세계 자동차생산 5위, 수출 9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강, 합금, 플라스틱, 유리가공 등 수많은 산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자동차산업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수출주도형 경제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바라보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글 황경춘 전 외신기자클럽 회장
하모니카는 서민들에게도 친숙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배우기 쉽고, 그러면서도 오묘한 트레몰로(tremolo)음을 내어 음악 애호가를 매혹합니다. 게다가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요즘의 노인들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한때 침체했던 우리나라 하모니카 동호 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습니다.
하모니카의 기원과 확산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하모니카가 언제 어떻게 발명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었으나, 현재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1827년 독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부시만(Christian Friedrich Ludwig Buschmann)이 하모니카의 원형을 발명했다는 설입니다. 베를린에 사는 오르간 직공의 아들이었던 부시만은 이보다 6년 전 16세일 때, ‘오라(AURA)’라는 오르간 조율용(調律用)으로 철제 리드(reed)를 붙인 퉁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모니카 발명의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모니카는 꾸준히 개발돼 현재 1500여 종의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모델은 1200개 이상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작업은 약 50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품 중 많은 부분이 이렇게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모니카에는 복음(複音), 단음(單音), 중음(重音)의 세 종류가 있으나 복음이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부시만이 하모니카를 발명한 뒤 몇 차례의 모델 개발을 거쳐, 하모니카의 상업생산을 시작한 것은 독일의 호너(Hohner)사입니다. 전 세계로 판로를 확대한 호너사는 지금도 하모니카 생산의 중심에 있습니다. 1857년 창립된 호너사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 트로싱엔(Trossingen)에 있는 군소 하모니카 공장을 흡수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부품 제작의 분업화를 실시함에 따라 한때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하모니카 제작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창업자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hner)는 캐나다로 이민한 4촌 형을 통하여 6개의 하모니카를 1862년에 처음으로 북미대륙에 수출하였습니다. 이때 하모니카 한 대의 수출가격은 단 1달러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수출된 이후 번창
미국에 소개된 하모니카는 특히 흑인들이 즐겨 부르는 블루스, 재즈, 포크 뮤직 등의 연주에 좋은 반응을 얻어 크게 유행하고, 독특한 모델도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뉴저지주 유니온에 두 개의 하모니카 제조공장까지 설립되어 번창하였습니다.
이렇게 대중화된 미국의 하모니카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모니카의 리드에 필요한 특수 합금이 군수품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된 데다 하모니카 제작에 긴요한 자재를 적국인 독일이 수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모니카가 군인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자 미국 정부는 하모니카 제작에 필요한 특수 제강을 하모니카 공장에 계속 배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시라서 자재가 부족해지자 미국은 플라스틱 리드(plastic reed)를 발명하여 이를 하모니카에 사용하였습니다. 이 플라스틱 리드는 미묘한 음질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 하모니카 산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대중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미국 음악계에서 하모니카가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 음악연맹이 1948년에 하모니카를 ‘합법적 악기’로 인정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에 하모니카 연주 음반은 극소수였고 주로 흑인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하모니카 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백인을 위한 음반도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하모니카 연주자 래리 애들러(Larry Adler)가 처음으로 저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위해 쓴 곡을 하모니카로 연주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모니카는 역시 ‘완구 악기(toy instrumen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
19세기 말엽에 이 하모니카가 일본에도 수입되었는데, 그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1896년 8월에 발간된 월간지에 ‘손풍금 독학’이라는 기사가 있고 하모니카 판매 광고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어느 완구 도매상이 독일 호너사의 불량품을 수입하여 완구로 팔아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제 하모니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통치가 시작된 후, 이 하모니카가 일본으로부터 흘러들어 1928년에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하모니카 밴드가 결성되고, 1935년에는 역시 평양에 YMCA 밴드가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의 기억에 당시 라디오에서 가끔 하모니카 연주가 방송되었지만, 이것이 우리 동포의 연주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 온 우리 하모니카 활동이 광복 후인 1952년 고려하모니카연구단이 결성되고 1957년 대한하모니카협회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이었던 조응천 박사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 협회는 곧 문공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협회 외에도 한국하모니카연맹, 오케스트라 하모니카 교육센터, 한국하모니카아카데미 등 여러 단체와 수많은 동호회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페스티벌’을 유치하고, 올해 8월에도 ‘국제 하모니카 페스티벌(International Harmonica Festival)’을 주최하는 등 국제 교류도 활발합니다. 그리고 노인회나 의료기관의 환자 재활에도 하모니카 동호인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하모니카 제작사는 45년의 역사를 가진 미화악기사가 유일합니다. 이 회사는 2008년부터 자체 브랜드의 하모니카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데, 회사 측은 국내외에서 평판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브라질에도 하모니카 애호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 생산은 독일, 일본 및 중국이 주요 생산국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산에 노동력의 비중이 큰 만큼, 일본도 국내에서는 교육용으로만 생산하고 중국에서 주문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 4학년 때 털장갑 대신 산 악기
올해 92세인 저와 하모니카와의 인연은 열두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됐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취미나 소양이 있는 어린이는 아니었으나 가끔 라디오에서 듣는 하모니카 연주가 어린 저를 홀렸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를 원한다고 사줄 가정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제게 털장갑을 사라고 30전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큰돈이었는데 문득 이 돈으로 평소에 원했던 하모니카를 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제가 찾은 곳은 장갑 가게가 아닌 악기점이었습니다. 지금 확실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장갑 살 돈으로 연습용 새 하모니카를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5전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장갑을 사오지 않은 저의 꼼수는 금방 탈이 났습니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크게 야단을 치기는 하셨지만, 하모니카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간단한 동요나 아리랑 같은 쉬운 노래는 독학으로 하모니카로 불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으로 부모 밑을 떠나 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랜 것이 이 하모니카였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외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 등 당시에 배웠던 곡들을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음악 소양이 없어 정식 악보는 읽지 못하는 처지지만 하모니카로는 동요, 유행가 등을 즐겨 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일제 하모니카는 광복의 혼란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1950년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 피난 수도 부산에서 미국인 동료에게 부탁해 구입한 일제 하모니카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모니카는 들숨과 뱉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 리드(reed)가 교대로 배열되어 있어 나이 많은 분이 연주하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는 단순하고 편리한 악기입니다. 노인들의 폐활량을 증강시키는 데 효과가 크다고 하니 늦다고 생각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도전해볼 만한 간단한 악기입니다.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한 지금, 남도 쪽은 벌써 여기저기 봄 꽃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청마년 시작이 엊그제인데 벌써 3월이다. 식민지배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3월은 특별하다. 최근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군국주의와 우경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또한 역사를 세탁하며 미화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어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처럼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삼일절을 앞둔 22일 근현대 우리민족의 수난과 고통으로 상징되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찾았다. 식민지지배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숨결이 살아 흐르는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이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일제가 만든 시설로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1923년 5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변경된 후 1945년 해방까지 국권을 되찾고자 노력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고, 처형되었다. 이곳이 삼일절을 맞아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3,000명의 애국 시민과 학생들이 한꺼번에 이곳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관순열사는 지하 여자 독방에서 악형에 시달린 끝에 순국했다. 해방 이후에는, 1987년까지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된 서울구치소로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역설적으로 ‘독립’과 ‘민주’정신을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장소이다.
서대문형무소는 20여개의 건물과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빨간색 벽돌 건물과 담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100여년도 넘은 건물들이지만 오래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넓었고 억울한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서려 있어서 인지 다소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형무소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관 (보안과청사)과 중앙사가 나타난다. 서대문 형무소의 전시관 1층은 형무소의 정보검색과 형무소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전시관 2층은 민족 저항실로 독립운동가들의 수감자료와 함께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이 전시되어 있다.
사형장 한 가운데 전시된 사형수들의 사진중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지하 전시실은 일제장점기 보안과청사의 지하 취조실로 생존 독립가의 육성 증언을 통해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보고 경험 할 수 있다.
옥사는 11옥사와 12옥사 그리고 여옥사가 각각의 건물로 되어 있다. 11옥사와 12옥사는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1920년대 감옥건물 원형이다. 11옥사는 관람객들이 직접 감방 안에 들어가 수감 체험을 할 수 있다. 여 옥사는 유관순열사를 비롯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한 곳으로 1979년 철거 2011년 복원 되었다.
현장 학습을 나온 초등학생 등을 비롯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를 찾아 관심있게 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국민유공자유족회 등 50여개 시민단체는 서대문형무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을 발족하고 적극 추진하고 있다.
◇포천·부산 등 비서울권 행복주택 건설 ‘탄력’
목동 등 행복주택 시범지구 사업이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힌 가운데 포천과 부산 등 비서울권의 행복주택 건설 추진에 탄력이 붙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포천시가 군내면 구읍 지구의 포천 미니복합타운에 행복주택 300가구, 신북면 가채지구에 358가구 등 약 700가구를 건설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8일 밝혔다.
국토부는 또 최근 부산시도 행복주택 건설을 제안함에 따라 부산진구 좌천동 부산진역 역사개발 2부지, 해운대구 우동 해운대역 역사 주차장 등 행복주택 후보지 6곳을 현장방문했다. 부산시는 이들 2곳을 포함해 부산진구 개금동 차량기지창과 동래구 낙민동 동래역사 주변 유휴지, 서구 아미4지구 등 6곳에 행복주택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도 광주광역시와 인천, 의왕시도 행복주택 유치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 관계자는 “입지 적정성, 행복주택 취지도 등을 판단해 다음 주쯤 행복주택 후보지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현대로템, 호주 구리광산 플랜트 용역계약 체결
현대건설과 현대로템이 나란히 호주 광산 탐사·개발 전문업체인 렉스 미네랄즈에서 발주한 호주 남부 아델레이드시 인근 힐사이드(Hillside) 구리광산 정광 생산 플랜트 공사에 대한 초기 용역계약(ECI)을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본사에서 체결했다.
ECI(Early Contractor Involvement)는 호주 등지에서 시행되는 입찰방식의 한 단계로 본 공사 계약 전 입찰업체가 공사 수행방안 및 공정계획 수립, 시공비 확정, 사전 설계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이다.
이날 진행된 용역계약 체결식에는 발주처 호주 렉스 미네랄즈의 마크 패리(Mark Parry) 사장, 영국 엔지니어링업체 AMEC사의 그렉 해이즈(Greg Hayes) 이사, 현대건설 정수현 사장, 현대로템 김종한 전무 등 발주처 및 업체 관계자, 그리고 주한(駐韓) 호주, 영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번 초기 용역 수행에는 현대건설과 현대로템, 영국 AMEC사가 공동으로 참여하며 호주 힐사이드 구리광산 정광 생산 플랜트에 대한 수행전략과 세부 공정계획 수립, 시공비 확정, 사전 설계 등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용역 금액은 미화 약 400만달러(한화 약 43억원) 규모다.
◇현대엠코, 위례신도시 ‘엠코타운 센트로엘’ 내달 분양
현대엠코가 다음달 위례신도시 A3-6a블록에 '엠코타운 센트로엘' 673가구를 분양한다고 8일 밝혔다.
엠코타운 센트로엘은 지상 13~26층, 11개동 규모 전용면적 95㎡ 161가구, 98㎡ 512가구로 구성된다. 전용 100㎡ 이상 대형 아파트 공급이 주를 이뤘던 위례신도시에서 희소성이 높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전 가구 남향 배치로 일조권을 극대화했다. 100% 지하주차장으로 설계, 대지면적의 약 40%를 조경공간으로 꾸며 공원형 아파트로 꾸민다. 또 입주후 1년간 '종로학평 온라인 교육서비스'를 무상 지원할 예정이다.
견본주택은 복정역 1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입주는 2016년 6월 예정이다. 문의 02-400-9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