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세탁소는 오후 7시까지 꼬빡 12시간 영업한다. 전 지역 어느 곳에서나 거의 똑같다. 드디어 이민생활 3년 만에 국제적 해변도시 산타모니카에 작은 클리너(세탁소)를 갖게 되었다. 필자의 가족은 커다란 꿈이라도 잡은 듯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것은 첫 번째 아메리칸드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 세탁소 옆에는 이란 마켓과 침대 파는
대학원 시절 3총사가 있었다. A는 국무총리의 장남이었고 B는 국내 굴지 제약회사 사장의 장남이었다. 필자는 조그만 사업을 하는 보통 아버지를 둔 처지여서 격차가 컸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지지직 전기가 통하여 거의 매일 당구 치러 다녔다.
셋이 당구 치러 가면 진 사람이 게임비와 술값을 내는 내기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셋은 진 사람이 게임비와 술값을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는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스탠더드(표준)라고 무조건 믿지 말아야 한다. 즉 병원에 가면 의사가 처방을 환자에 따라 달리 처방을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 나라의 경제상황을 알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 경제를 살려야지 세계적인 IMF의 표준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 현실에 꼭 어울리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항시 생각하라는
항일 의병장 최익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74세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잡혀 일본 쓰시마(對馬島)에 끌려갔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조선조 말에 고위직의 벼슬을 하면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등에 반대하고 끊임없는 상소로 결국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주인공이다.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단발령에도 반대했다. 강직한 성격에 눈부신 투쟁성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
필자는 남편과 한 달에 한 번 실갱이하는 날이 있다. 바로 머리 깎는 날이다.
남편은 그날이 오면 지루하게 앉아 있을 접이 식 조그만 의자, 싹싹 갈아 보관한 날렵한 가위, 미국에서 사온 100V짜리 전기 바리 깡, 주섬주섬 주어 모은 각양각색 못 생긴 빗들, 한국의 220V에 끼우려면 다운 트렌스까지 좁아 터진 목욕탕 변기뚜껑 위에 늘어놓는다. 총 출동
국가 경제에서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는 분야가 제조업이다. 그런데 최근 조선업의 구조조정 등 제조업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에 인천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은 지난 8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 쉐라톤인천호텔에서 아침포럼으로 '기로에 선 한국의 제조업'이란 주제로 산업연구원 주현 부원장의 강연회를 열었다.
주 부원장은 “한국이 2015년 GDP 규
조선인들 중 두 번째 해외 나들이를 한 사람은 1888년 미국에 공사로 파견된 박정양(朴定陽, 1841~1905.11) 일행이다. 사절단의 ‘일원’이며 가이드로 수행한 인물이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 한국어 이름 안련(安連)이다. 알렌은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개항조약을 맺은 후 1884년 조선에 온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이다
5월의 마지막 주말에 친구와 월미공원을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동인천역에서 만난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지사 발걸음을 하였으니 동인천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그리고 월미공원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하였다.
동인천역전은 50여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50여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