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물 설명서]
2030세대는 모든 게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며칠 전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한다.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세대 차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20대 자녀, 혹은 회사의 막내 직원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시니어를 위해 알다가도 모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최신 문화를 파헤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소개한다.
‘휴가’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산책 삼아 울긋불긋 단풍진 숲속을 거닐거나 서재에서 여유롭게 책 읽는 시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뙤약볕 아래에서의 골프 라운딩, 땀 흘리며 오르는 등산길을 그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스포츠케이션’을 떠난 MZ세대다.
쉴 때도 운동할래요
스포츠케이션은 스포츠(Sports)에 휴가(Vacation)를 더한 신조어다. 휴가지에서 운동이나 액티비티 활동을 즐기는 경우는 과거에도 많았지만 스포츠케이션에 포함되지 않는다. 스포츠케이션은 휴가보다 운동을 우선시하며, 운동을 위해 휴가지와 숙소를 선택하고 일정, 예산까지 모두 운동에 맞춰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순한 휴식보다 액티비티나 스포츠를 위한 휴가를 즐기는 MZ세대가 늘고 있다. 여가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이 지난 6월 MZ세대 47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휴가지에서 ‘액티비티에 참여하겠다’고 답한 이는 무려 72.4%에 달했다. 또한 응답자의 28.8%가 휴가 계획을 세울 때 ‘액티비티 등 즐길거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답했다.
스포츠케이션이 급부상한 배경에는 팬데믹이 있다. 해외여행을 갈 수 없고, 여럿이 모이기 어려워서다. 실제로도 골프와 헬스, 등산, 자전거 타기 등 혼자나 적은 인문이 즐기는 스포츠 종목이 인기다.
여기에 MZ세대만의 특징이 더해져 스포츠케이션이 탄생했다. 건강과 자기관리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세대적 특성이 휴가와 맞닿은 것. 이들은 무기력해지기 쉬운 코로나 시국에도 자신만의 운동 습관을 만들고 공유하는 ‘오하운’(오늘 하루 운동의 줄임말), 이른 아침 일어나 운동하는 ‘미라클 모닝’을 유행시킨 주역이다.
호텔업계는 ‘호트’(호텔+트레이닝의 신조어)로 화답했다. 호텔 투숙객은 요가, PT, 필라테스, 농구, 카트 라이딩 등의 운동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올여름 호캉스를 다녀온 A씨(26)는 “휴가 기간에 매일 호텔 내 헬스장을 이용했는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MZ세대의 휴가를 책임지다
골프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시간과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MZ세대가 상대적으로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적은 운동인 골프로 눈을 돌린 것이다. 오상엽 KB경영연구소연구원은 “4050세대의 전유물이던 골프 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표현했다.
이들은 시니어의 고급 사교장이나 다름없던 골프장을 ‘핫플’(핫 플레이스)로 만들었다. 사업이나 친목 도모를 위해 골프를 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MZ세대는 건강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운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골프웨어와 아이템으로도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며 즐긴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또한 골프장에서의 일상뿐 아니라 휴가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나 유튜브 브이로그로 공유 한다. 실제로 ‘#골린이’ 해시태그는 인스타그램에만 9월 기준 53만7000건이 등록됐다.
골린이(골프+어린이의 신조어)들은 골프 여행을 휴가 방식으로 선택했다. 운동하면서 멋진 풍경을 즐기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지킬 수 있어서다. 인천 영종도, 남해, 거제도 등 골프장이 전국 각지에 분포돼 있어 휴가지의 선택 폭이 넓은 점도 매력적이다. 이동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스크린 골프 펜션’까지 등장 했다. 이승찬 아체로 빌라&골프 대표는 “장년층 고객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다양한 연령층의 고객이 펜션을 찾고 있다”며 “1997년생 고객이 친구들과 방문하거나, 젊은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고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호텔들도 자체 스크린 골프 시설 이용권이나 골프용품 등을 제공하는 패키지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 다른 5060세대 전유물인 등산에도 스포츠케이션 바람이 불고 있다. MZ세대 등산객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롯데백화점 올해 상반기 아웃도어 상품 매출에서 2030세대 고객의 매출 신장률이 31%를 기록했다. 인스타그램에 ‘#등린이’ 해시태그가 23만7000개나 등록됐다는 사실 또한 인기를 입증한다.
등린이(등산+어린이의 신조어)들은 주말과 휴가철을 가리지 않고 산에 오른다. 산악회 대신 등산 크루나 등산클럽을 꾸리고 게임하듯 ‘명산 100 챌린지’에 참여해 배지를 모은다. 등산 후 기록을 인증하고 공유하는 것은 물론, SNS 해시태그나 등산 커뮤니티를 통해 직접 다녀온 등산 코스, 주변 맛집 등에 대한 정보를 자유롭게 주고받기도 한다. 비닐봉투를 챙겨 쓰레기를 줍는 ‘클린 산행’으로 건강, 휴식, 환경까지 챙기는 ‘일석삼조’ 효과도 누린다. 등산 콘텐츠 크리에이터 조초록은 “거들떠도 안 보던 산을 올여름엔 10번이나 갔다”며 “MZ세대에게 등산은 체력도 기르고 ‘인생샷’을 건질 수 있어 매력적인 취미”라고 말했다.
스포츠케이션은 ‘요즘 젊은 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장년층 건강관리에서 운동의 중요성은 말하기도 입 아픈 수준이다. 재밌게 건강관리를 하고 싶거나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마냥 누워 있기 질린다면, 올가을 등린이 아들, 골린이 딸과 함께 스포츠케이션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
호암미술관 큐레이터 출신의 미학자로 어언 30년째 미학을 탐미 중인 최광진(60) 교수. 현재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틈틈이 미학 방송을 진행하는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부터는 책을 통해 한국의 미의식을 소개해왔는데, 최근엔 한국의 소박미를 조명하는 신간 ‘기교 너머의 아름다움’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의 미의식인 신명, 해학, 소박, 평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2018년부터 미의식 시리즈 도서를 기획했다. 최근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한국의 소박미를 집중 조명한 ‘기교 너머의 아름다움’이 출간됐다.
“시작은 2015년부터였다. 한국의 미학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고, 오죽하면 열 군데 이상의 출판사에 연락을 했는데 응답이 없더라. 우연히 미학을 전공한 출판사 대표와 연이 닿아 겨우 책을 냈다. 비인기 장르였지만 의외로 그 책이 잘 팔렸다. 그것을 발판 삼아 시리즈를 기획했다. 우리가 가진 고유한 미의 DNA를 추적한 결과 한국의 미의식을 신명, 해학, 소박, 평온으로 추릴 수 있었다. 이번 책은 건축, 공예, 문인화 등을 통해 본 소박미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소박미는 과연 무엇이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소박미는 기교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배산임수는 산과 강의 자연스러운 조화이며, 우리의 도자기는 자연스러운 비대칭을 그대로 살린다. 문인화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자연과 함께 공명하고자 했던 화백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그림이다. 이렇듯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기교가 아닌 본질을 추구했던 선조의 정신이 바로 ‘소박미’다. 소박미는 혐오와 갈등, 그리고 전염병 창궐로 인해 어지러운 현시점에 필요한 통합 백신일지도 모른다. 소박미 기저에 깔린 본질에 대한 성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미의식 독립운동
원래 건축학도였지만 중퇴 후 오랜 방황 끝에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 입학했다.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체질과 맞지 않았다. 형제들이 모두 음악 계통에 있어서 음악을 하려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인데, 공연이 끝난 후에 몰려오는 공허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반면 그림은 오랫동안 남는 축적의 예술이라 흥미로워 보였다. 다만 순수미술을 할 정도로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공대생이 될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성격이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편이었다. 마침 비평과 큐레이팅을 배울 수 있는 학과가 생겼다기에 잘 맞을 것 같아 지원해서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이병철 회장의 호를 따서 만든 호암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다.
“삼성은 문화적인 힘이 있는 곳이다.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모두 안목이 뛰어나고 예술에 대한 열정이 컸다. 실제로 저녁마다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새벽까지 예술 공부를 하셨다. 공부 후엔 모두 택시를 태워서 보내셨다고 하더라. 이건희 회장의 집에 우연히 간 적이 있는데 각종 영화와 다큐멘터리 비디오가 무척 많았다. 기업 대표로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상상력의 토대가 예술 공부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술의 본령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바탕을 쌓는 것. 비단 경영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정신이다.”
큐레이터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모두가 말렸지만, 그는 “안락함에 젖은 노예로 살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미지연구소’였다.
“미학 공부로 축적한 콘텐츠를 잘 가공해서 대중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이미지연구소를 창립하고 아카데미를 통해 미학의 관점과 지식을 공유했다. 30명 정도가 꾸준히 찾아오셨는데, 어떤 분은 15년 동안 내 강좌를 들으셨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은 유튜브로 비대면 강의를 하는데, 현장 강의만큼 생생한 소통은 힘들다. 다만 더 다양한 분들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서구 문명으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의 고유한 미의식을 되찾는 독립운동이라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유튜브 촬영을 하는 스튜디오가 독립운동 거점이다.(웃음)”
미학으로 세우는 대안학교
그는 “노후를 위해서도 미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소박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은퇴 이후 공허함에 시달리는 중년이 많다. 노후 준비를 위해 지갑을 메우려고 했을 뿐, 정신적인 토대를 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미의식이다. 고유한 미의식은 존재의 가치를 설명하는 ‘정체성’과도 같다. 아름다움을 지향할수록 우리의 정신은 더욱 성장한다. 특히 우리 민족이 지향했던 소박미가 필요하다. 소박미의 정수(精髓)는 본질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노후 준비다. 미학 공부는 개인의 미의식을 개발하기 위한 첫 단추다.”
끝으로 미학자로서의 계획을 말했다.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 넘어가는 전환기가 왔다. 미의식은 갈등과 대립을 봉합하는 통합의 지혜다. 미(美)를 추구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적으로 변한다. 이 험난한 시대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심는 미학이란 종자가 필요하다. 앞으로 미학을 바탕으로 한 대안학교를 유튜브에 만드는 것이 꿈이다. 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잘 가꾸기 위한 지혜들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한 10년치 정도의 계획이 있는데, 앞으로도 성실히 움직이면서 하나둘씩 해보고 싶다.”
그의 삶은 소박미를 닮았다. 본질을 성찰하듯 자신에 대한 탐구를 끊임없이 했다. 안락한 노예가 아니라 능동적인 영혼이 되기를 원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때론 외로웠다. 소속된 직장이 없어서 대출이 안 될 만큼 힘든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미학을 연구하고, 그 미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는 알아주는 이는 적지만 고유한 가치를 지닌 미학의 특별함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의 특별함이 앞으로도 빛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마친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뒷방 늙은이’를 거부하는 시니어들이 있다. 젊은 층 못지않게 인터넷과 스마트폰 활용에 익숙하고, 자신을 위한 소비에도 적극적이다. 이들이 ‘덕질’에 뛰어들며 새로운 ‘엄마·삼촌 팬’ 문화를 만들고 있다. 시작은 MZ세대와 비슷했지만 남다른 재력과 소비력으로 차원이 다른 덕질을 보여주는 ‘오팔 세대’를 들여다봤다.
요즘 어른들은 뭔가 다르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 남은 인생을 수용하는, 그저 나이 들어버린 존재가 아니다. ‘노(NO)노(老)’를 외치며 활발한 사회활동과 네트워킹으로 정체성을 찾고 젊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한다. 이들은 바로 오팔 세대다.
오팔(OPAL, Old People with Active Lives) 세대는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1958년 개띠 ‘58’과 발음이 같고, 은퇴 이후에도 삶을 즐기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5060세대의 다채로운 행보가 다양한 색을 담고 있는 보석 ‘오팔'과 닮았다는 의미다.
“너네만 덕질하니? 엄마도 삼촌도 한다”
최근 오팔 세대 사이에서 ‘덕질’이 화제다. 젊은 세대의 전유물 같았던 덕질이 전 세대로 퍼지고 있다. 덕질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해 그와 관련된 것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분야는 연예인, 게임, 만화, 음식, 반려동물 등 매우 다양하다.
오팔 세대의 덕질은 MZ세대 못지않다. ‘내 가수’가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은 무조건 본방 사수다. 관련 기사도 부지런히 확인한다. 음원 결제도 서슴지 않는다. 신한카드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연령대별 음악·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 증가율은 20~40대가 71%인 데 비해 5060세대는 101%로 크게 늘었다.
오팔 세대는 MZ세대 덕질의 필수인 ‘스밍 총공, ‘조공’, ‘기부 서포트’, ‘굿즈 구매’ 같은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스밍 총공은 좋아하는 가수의 음원 순위를 올리고자 특정 시간에 일제히 해당 곡을 듣는 것을 말한다. 조공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행위다. 기부 서포트는 스타와 팬덤 이름으로 기부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굿즈는 사진과 DVD, 각종 소품 등 연예인이나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상품이다.
“이것이 어른의 덕질이다”
바야흐로 트로트 르네상스다. 2019년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미스트롯’ 흥행을 계기로 그동안 ‘고리타분한 음악’으로 치부돼 비주류로 밀려났던 트로트가 오팔 세대 덕에 가요계에서 다시 급부상했다. 그 중심에는 미스트롯 우승자 송가인이 있다. 그의 팬클럽 ‘어게인’은 오팔 세대만의 팬 문화를 만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어른의 덕질’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이들은 MZ세대 팬들과는 다르다. 팬카페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드러내며 댓글을 단다. 온라인에서 처음 만났지만 익명성 뒤로 숨지 않고 서로 예의를 지키고 싶어서다. 송가인이 한참 어린 딸이나 손녀뻘이라도 ‘가인 님’, ‘가인 씨’라고 부른다. 말도 잘 놓지 않는다. 송가인의 SNS에는 “송가인 님 덕에 힘을 얻고 있어요”와 같은 존칭 문장이 주를 이루는 반면, 아이돌 SNS에서는 “언니 보고 벽 부수다가 우리 집 원룸 됐어”, “오빠는 경마장 가지 마. 말이 안 나오니까”와 같은 요즘 유행하는 ‘주접 댓글’을 볼 수 있다.
남다른 조공 문화도 눈에 띈다. ‘건강이 최고’라 생각하는 오팔 세대 팬들은 송가인에게 홍삼, 참치회, 산낙지 같은 건강식품을 박스째로 선물한다. 브랜드 의류나 액세서리보다는 몸을 챙겨주려는 마음이 돋보인다.
미스트롯 흥행을 디딤돌 삼아 2020년 출격한 ‘미스터트롯’은 ‘엄마 부대’라는 새로운 광풍을 일으켰다. 임영웅의 팬클럽 ‘영웅시대’는 6월 16일 임영웅의 생일을 기념하며 ‘착한 덕질’의 표본을 보여줬다. 전국적으로 선풍기 100대 기부, 취약아동 생계비 지원, 저소득 어르신 무릎인공관절 수술 지원 등 릴레이 나눔 캠페인을 이어갔다. 또 서울부터 부산까지 팬클럽·지역연합이 모여 전국 곳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에 릴레이 광고를 진행했다. 전국의 영웅시대가 서울 지하철역 생일 전광판 광고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기도 했다.
구매 대란 만든 삼촌 팬
오팔 세대는 ‘뒷방 늙은이’를 거부한다.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즐긴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소비에 아낌이 없다. 덕질도 이런 활동 중 하나다. 오팔 세대는 소비 력이 남다르다. 최근 브레이브걸스에 빠진 ‘삼촌 팬’들이 이를 제대로 보여준다. 해체를 앞두던 브레이브걸스(민영, 유정, 은지, 유나)가 올해 초 역주행을 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보통 역주행은 반짝인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인기를 계속 이어가며 대세로 떠올랐고, 광고계에서도 블루칩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브레이브걸스의 잠재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삼촌 팬의 활약이 컸다. 통 큰 팬 일화도 끝없이 나온다. 한 팬은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캐릭터 꼬부기를 닮아 ‘꼬북좌’라는 별명을 가진 유정의 꼬북칩 광고 계약을 기원하며, 과자회사 주식을 3000만 원어치 매수했다.
주방용품 브랜드 해피콜은 브레이브걸스를 내세운 마케팅을 시도해 ‘쁘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해피콜에 따르면, 프로모션을 시작한 5월 24일부터 일주일간 자체 온라인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400% 늘었다. 해피콜 자체는 물론, 주방용품 시장 전체로도 기록적인 수치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반응이다.
브레이브걸스 삼촌 팬들은 일단 제품을 구매하고 본다. 멤버가 사용하는 제품은 일단 산 뒤 해당 업체에 ‘여성만 쓸 수 있는 거냐’고 나중에 문의하는 식이다. 이처럼 브레이브걸스가 광고하는 상품은 삼촌 팬 덕에 매출이 2~4배 이상 늘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덕질의 순기능
덕질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분석도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발표한 ‘트로트 열풍으로 보는 오팔 세대의 부상과 팬덤 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오팔 세대에게 덕질은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찾고 위안을 얻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오팔 세대는 덕질을 시작하고 인생이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지난 4월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임영웅의 ‘찐팬’ 68세 홍경옥 씨가 소개됐다. 그의 방에는 응원봉과 포스터, 그립 톡, 머그잔, 가방, 우산 등 임영웅 굿즈가 300개 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생활용품 굿즈도 임영웅 얼굴에 작은 상처라도 날까 전혀 쓰지 않고 모셔두고 있다.
홍 씨가 이토록 임영웅에게 빠져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힘든 시절을 보내며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던 때, 임영웅의 사연과 노래가 큰 위로로 다가와서다. 홍 씨의 남편은 임영웅이 아내의 웃음을 되찾아준 고마운 존재라고 밝혔다.
덕질은 세대 간 격차를 좁혀주기도 한다. 엄마의 늦은 덕질을 본 자녀들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지만, 점차 부모의 취미 생활을 응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27세 정소라 씨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제는 콘서트 티케팅을 도와드리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탓에 미뤄졌던 미스터트롯 콘서트가 또 취소됐다. 기다린 지 1년이 넘었다. 예약 대기까지 걸어놓으며 부모님께 공연을 보여드리려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렇듯 많은 자녀가 부모의 취미 생활에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의 팬카페에서는 부모를 대신해 티케팅과 스밍을 하고 있다는 자녀들의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팔 세대도 공연 티케팅 같은 적극적인 덕질로 자녀 세대와 더욱 가까워질 지름길을 찾고 있다. 자녀들이 아이돌에 빠지거나 그들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현상을 이제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임영웅 팬클럽 영웅시대의 ‘좋은날’ 회원은 유튜브 채널 ‘니나노 텔레비전’에서 “처음 하는 덕질이라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딸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더니 처음에는 딸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딸이 음원 다운로드와 사이트 가입 등을 도와주면서 엄마 마음을 알게 됐다며 이해해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팔 세대가 뒤흔든 팬덤 경제
오팔 세대는 새로운 덕질 문화를 만들며 팬덤 경제를 활성화하고 있다. 황선경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코로나19로 오팔 세대의 온라인 소비가 급증하는 등 디지털에 상당히 익숙한 세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베이비부머를 필두로 하는 오팔 세대의 거대한 규모와 높은 소비력 덕에 은퇴 후 라이프스타일에 주목한 상품이나 서비스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며 “이들의 문화나 행태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팔 세대 덕질의 주요 동기는 ‘젊음’과 ‘향수’, 두 가지 키워드로 꼽을 수 있다. 젊게 살고 싶은 욕구가 소비와 여가 활동의 주요 동기가 돼 MZ세대의 전유물이던 덕질을 모방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경제 성장기 동안 억제됐던 문화 향유 욕구가 은퇴 이후 불이 붙으며 과거의 문화, 가치, 감성을 담은 콘텐츠를 구매하는 경향이 있다. 유통업계는 이런 트렌드에 주목해 친필 사인 양주잔, 실크 스카프, 돋보기 목걸이등 오팔 세대 맞춤 굿즈를 출시하고 있다.
강좌와 학습, 여가 활동이 확산되고 삶의 단계 변화에 따른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교류의 장으로 동호회를 비롯한 커뮤니티도 활성화되고 있다. 초고속 성장을 이끈 세대로서 배워야 산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오팔 세대는 팬덤 문화에도 빠르게 정착했다. 서툴렀던 스마트폰 사용이나 온라인 세상에서 서로 도우며 디지털 기반 덕질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모습이다.
새로운 덕질 문화를 만들고 있는 오팔 세대가 MZ세대를 넘어설 신소비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팬덤의 경제적 파급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은퇴 후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젊고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어 주 소비층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오팔 세대. 이들이 만드는 팬덤 경제가 시니어 비즈니스 시장에서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죽음은 떠나는 이의 생애 마지막 과제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이가 견뎌야 할 무게이기도 하다.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은 몸의 반쪽을 떼어낸 듯한 슬픔을 초래한다. 사랑하는 남편 또는 아내의 부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천상재회’의 가사처럼 꿈에서도 그리워하며 울어야 할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화자처럼 점잖이 보내주어야 할까. 정답은 없다. 그저 장마처럼 퍼붓던 슬픔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반려자의 몫까지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것밖에.
“아내가 죽었는데 괴롭거나 속상하지가 않습니다.” 한순간에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자가 있다. 홀로 살아남아 병원에 도착한 그는 불과 10분 전 아내를 잃었음에도 평온한 얼굴로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는다. 그러나 자판기는 삐걱대며 말을 듣지 않고, 돈을 잃은 그는 집에 돌아가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쓴다. 고장 난 자판기로 인해 불편을 겪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아내가 죽었는데 왜 눈물 한 방울조차 나지 않는 것인지, 아내의 환영이 수시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알 수 없는 마음을 토해낸다.
상실을 다룬 영화 ‘데몰리션’은 아내와 사별 후 감정이 고장 나버린 남자가 한 통의 편지를 계기로 자판기 회사 직원 캐런을 만나 자신의 진짜 내면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의 상황을 굴곡 없이 보여주다 마침내 ‘슬픔’을 느낄 때 마무리된다. 그에게 슬픔은 극복해야 할 시련이 아닌, 새 삶을 위해 마주 봐야 하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슬픔의 모양은 같지 않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준다. 모든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특히 배우자와 사별한 이들은 극한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느낀다. 때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는 ‘상심증후군’을 앓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의 심리학자 토머스 홈스와 리처드 라히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가까운 친구의 죽음(36점),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63점), 이혼(73점)보다도 배우자 사망(100점)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가장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준석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연구원은 “사별 경험은 대개 충격과 마비, 그리움과 분노 등을 거쳐 심한 무기력과 우울감을 초래한다”며 “특히 시니어의 사별은 생애 주기 마지막 단계에서 겪는 이별이라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무력감과 공포가 더욱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별자가 같은 단계를 밟아나가며 동일한 감정 변화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이가 있는 반면, ‘데몰리션’의 주인공처럼 공허한 감정이 먼저 고개를 내미는 경우도 있다.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은 “지난달 코로나19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센터를 찾아왔다.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죽음에 어리둥절하고 무감각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사별 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아니다. 눈물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어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억울하고 섭섭한 것도 당연하다. 모두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라며 “다만 2개월 정도 지나도 일상생활이 어렵다면 우울증이 나타날 수 있으니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그래도 계속되는 삶을 위해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전 생활로 돌아가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사별 경험자들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특히 어려워한다. 집 안 곳곳, 생활 면면에 배우자의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센터장은 “사별 전의 일상으로 80% 정도 돌려놓는 것이 중요하지만, 회복이 어렵다면 시공간을 재배치해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시공간의 재배치’란 생활과 환경을 사별 전과 다르게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리모델링, 이사 등으로 공간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다. 단 지나치게 먼 곳으로 떠날 경우 낯선 환경에 더 큰 외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평소 잘 알던 동네나 근거리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은퇴 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니어라면 일주일 단위로 계획을 세워 루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때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등 주 2회 정도 규칙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좋다.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경우 주변인의 반응으로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속감에서 비롯된 안정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떠난 이의 몫까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양 연구원은 “우리의 삶이 상실과 사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별 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따금 삶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찾아온다. 그것이 삶의 신비다”라고 말했다.
도움받을 수 있는 기관과 모임
서울어르신상담센터 ▶ 사별로 인한 상실, 우울감 등 생활 속 문제를 겪고 있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무료 상담을 진행한다. 내방 상담, 전화 상담, 온라인 상담 등 방식이 다양하다. 온라인 홈페이지 ‘상담신청예약’ 게시판에 상담 유형을 선택 후 글을 남기면 담당자의 회신을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 ‘마음건강 테스트’를 통해 가벼운 자가진단도 가능하다.
건강가정지원센터 ▶ 전국 207개의 지역 센터를 운영하며, 생애주기에 따라 발생하는 가족 내 다양한 문제와 갈등, 심리적 외상 등에 대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거주 중인 시·도와 지역구를 선택하면 지역센터 사이트로 이동한다. 해당 홈페이지 ‘사이버상담’ 게시판에 글을 남기면 답변을 받을 수 있다.
인터넷 사별 카페 ▶ 사별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다. 전문가와의 상담도 좋지만, 인터넷 사별 카페 회원들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아픔을 공유하는 것도 슬픔을 덜어내는 방법 중 하나다.
집은 거주의 목적도 있지만, 투자 상품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흔히 투자를 위한 부동산을 수익형 부동산이라 부른다. 정부의 고강도 대책과 저성장, 저금리 기조와 맞물려 주목받고 있는 대표적 수익형 부동산인 오피스 빌딩을 포함해 여러 가지 상업용 부동산에 대해 살펴본다.
도움 및 참고 신영리서치센터, KB경영연구소, 부동산114
한국의 자산가들은 수익형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 KB경영연구소에 따르면 한국 부자의 80%는 거주 외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자산 규모가 클수록 비중이 증가했다. 30억 원 이상 자산가의 13.6%는 오피스 빌딩을 보유 중인데, 30억 원 미만 자산가들(3.4%)과 비교해서 비중이 훨씬 높았다. KB경영연구소 관계자는 “여유자금이 많을수록 자산 포트폴리오로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거주 외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상업용 부동산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부동산 정보 플랫폼 ‘부동산플래닛’이 발표한 ‘2020년 전국 부동산 유형별 거래 특성’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상업·업무용 부동산(상가와 사무실 포함) 매매 거래량은 약 8만1000건으로 2019년과 비교해 8.1% 증가했다. 특히 상가와 사무실은 5.8% 증가에 그쳤지만, 상업·업무용 빌딩은 13.8%나 늘었다. 상업·업무용 빌딩 거래량이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도로, 전국 총 거래량의 23.3%를 차지했다.
오피스 빌딩은 아파텔로 변신 중
상업용 부동산의 대표주자 격인 오피스 빌딩은 코로나19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회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서울·분당) 오피스 빌딩의 연간 누적 거래 금액은 13조 원에 달했다. 종전 최대 거래 규모인 2019년의 12조3000억 원을 넘어섰다. 연면적을 기준으로 1만 평 이상의 대형 오피스 거래 건수가 2020년에 21건으로 최근 5년간의 거래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오피스 빌딩을 매입 후 오피스텔이나 임대주택 등 다른 용도로 전환하는 사례가 생겼다. 이른바 ‘컨버전(Conversion) 트렌드’로 불리며 작년 상반기 강남 권역에서 주로 발생했고, 하반기에는 도심 권역과 여의도 권역 및 서울 기타 권역으로 확대됐다. 신영리서치센터 관계자는 “지난 몇 년 사이 공유 오피스가 주목을 받았는데, 코로나19 이후 노후한 오피스 빌딩을 상대적으로 수익이 괜찮은 오피스텔이나 임대주택 같은 상품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꾸준히 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른바 ‘아파텔’이라 불리는 중대형 오피스텔은 매매 가격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85㎡ 이상의 중대형 오피스텔은 작년 9월부터 상승세를 유지 중이다. 반면 40㎡ 이하는 같은 기간에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2월의 경우 85㎡ 이상은 0.54% 올랐지만, 40㎡ 이하는 0.09% 떨어졌다. 같은 기간 수도권 지역은 교통 접근성이 좋거나 정주 여건이 양호한 지역에서 꾸준한 수요가 생긴 덕분에 전월 대비 0.09% 상승했다.
아파텔의 장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이다. 실제로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2021년 2월 오피스텔 가격 동향 조사’에 따르면 전국 오피스텔의 소득 수익률이 오피스나 중대형 상가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지난해 10월부터 전국 오피스텔의 소득 수익률이 4.7%대에 머물며 다른 상업용 부동산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올렸다. 부동산114 관계자는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와 더불어 오피스텔을 통해 임대 수익을 버는 분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비교적 낮은 진입장벽이다. 오피스텔은 집값의 최대 7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아파트보다 분양가도 상대적으로 낮다. 또 주택으로 분류되지 않아 1순위 청약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지난해 8월 12일 이후 취득한 주거용 오피스텔은 다른 주택을 취득할 때 취득세법상 주택 수에 포함되므로 다주택자면 세금 부담이 클 수도 있다. 부동산 관계자는 “오피스텔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면서 조정지역 내 주거용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매도 시 주택 수 산정에 포함되므로 꼼꼼히 따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이 드라마는 가상의 공간인 주상복합아파트 ‘헤라팰리스’의 펜트하우스를 둘러싼 갈등과 욕망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펜트하우스는 어떨까? 어떤 사람이 거주하고, 부동산으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최근 영국의 억만장자이자 가전 브랜드 ‘다이슨’의 창립자 제임스 다이슨 회장은 싱가포르의 펜트하우스를 6200만 싱가포르달러(약 520억 원)에 매각했다. 이 펜트하우스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64층 건물의 꼭대기 3개 층으로 약 1950㎡ 넓이에 4개의 침실과 개인 야외 수영장을 비롯한 카바나, 와인 저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고급 펜트하우스는 한국 자산가들 사이에서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고가의 펜트하우스를 구매할 수 있는 ‘부자’가 증가한 덕분이다. KB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0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 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한국 부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약 25만 명이던 한국의 부자는 5년 사이 약 35만 명으로 10만 명이나 증가했다. 이와 더불어 부동산 자산은 비중이 꾸준히 오르고 있다. 2016년 51.4%였던 부동산 자산의 비중은 2020년 56.6%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금융 자산은 43.6%에서 38.6%로 하락했다.
다른 요인은 바로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늘어난 홈루덴스가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홈루덴스는 밖에서 활동하지 않고 실내에서 여가활동을 보내는 이들을 일컫는다. 집을 비우던 낮에도 전염병의 여파로 가족끼리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경우가 생겼고, 이는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다. 실제로 지난해 전용면적 85㎡ 초과 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약 270대1에 육박했다. 다른 면적의 경쟁률이 두 자릿수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큰 수치다. 부동산 관계자는 “중대형 아파트 수요가 늘면서 기본적으로 큰 면적을 자랑하는 펜트하우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청약 치열…1순위는 사생활 보호
실제로 펜트하우스는 청약에서 소수의 세대만 모집하지만 경쟁률은 치열하다. 흥미로운 건 강남이나 한남동처럼 전통적인 부촌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난해 청약 접수를 진행한 세종시 한림풀에버는 가장 높은 청약 경쟁률이 펜트하우스에서 나왔다. 136㎡형으로 두 가구를 뽑는데 686명이 청약에 접수해 경쟁률은 무려 343대1이었다. 속초디오션자이의 전용면적 131㎡ A타입 펜트하우스도 114대1까지 경쟁률이 치솟았다. 당시 355가구 모집(특별공급 제외) 전체 평균 청약 경쟁률은 17대1이었다. 이에 대해 부동산114 관계자는 “펜트하우스가 지방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서울보다 좋은 조망권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는 사람의 면면은 화려하다. 기업인, 국회의원, 연예인 등 유명한 자산가들이 거주한다. 실제로 개그맨 주병진은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등장해 거주하는 상암동 카이저팰리스 펜트하우스를 공개하기도 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로덴하우스 웨스트빌리지 펜트하우스를 판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들이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서울시 고급아파트 주거선택요인 중요도 분석’에 따르면 나인원 한남 입주 대상자를 중심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이유 1순위는 ‘사생활 보호’였다. 입지 환경에 해당하는 자연환경과 부동산으로서 미래 가치는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실제로 부동산 관계자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자산가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라고 말하며 “고액 자산가일수록 사생활 보호를 위해 타인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주택을 선호하는 편이다”라고 밝혔다.
인기 있는 럭셔리 펜트하우스
▲ 나인원 한남
전통적인 부촌인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다. 입지 조건을 보면 남산을 뒤에 두고 한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에 해당하는 길지다. 사생활 보호도 철저하다. 층마다 단독 엘리베이터가 있으며, 아파트 주 출입구부터 주차장, 동 출입구, 현관에 이르는 4단계 보안 체계가 작동 중이다. 세계적인 조경 디자이너 사사키 요우지가 조성한 산책로가 있고, 국내 최대 규모의 클럽하우스도 단지 내에 위치한다. 복층과 펜트하우스 가구는 별도의 지정 차고와 전용 창고도 있다.
▲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성수동에 위치해 한강은 물론 서울숲, 남산을 볼 수 있다. 대림산업은 조망 프리미엄을 더하기 위해 특화설계를 적용했다. 모든 가구에서 서울숲이나 한강 조망이 가능하도록 층별 가구 수를 3가구, 9층 이하는 4가구로 조정하고 T자로 건물을 배치했다. 각 세대 내부에는 창문 중간 프레임을 없앤 아트 프레임과 넓게 펼쳐지는 270도 파노라마 뷰가 적용돼 거실, 주방, 욕실 등 집 안 곳곳에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 에테르노 청담
스페인 건축 거장 라파엘 모네오가 설계에 참여했으며, 청담동에 위치한다. 모네오는 1996년에 건축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다. 지하 4층부터 지상 20층까지로 29세대만 거주할 수 있다. 대지 면적에 비해 세대 수가 적기 때문에 희소성이 높고, 올림픽대로와 오솔길공원이 가까워 막힘없는 한강 뷰를 제공한다. 내부 층고가 높아서 공간감과 개방감이 뛰어나다.
화려한 인생 2막을 위해 어디로든 달려가고 싶지만, 올해도 바깥 활동은 여의치 않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엔 얼마든지 집 안에서 자기계발과 교육을 통한 재도약이 가능하다. 즉 뉴노멀 시대에는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활용 능력이 노후 삶의 관건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로 주춤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힘차게 한 해 시동을 걸어보자.
도움말 이진서 인생다모작연구소장·서울시50플러스재단 앙코르전직지원 전문강사
[step 1] 현재 나의 상태 점검하기
새해를 앞두고 퇴직했다면 이런저런 계획이 많았을 것이다. 현실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려면 현재 자기 상태에 대한 점검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장년워크넷’ 홈페이지에서는 생애설계 자가진단과 관련한 서비스를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물론 온라인을 통해서다. 10분 내외로 간단한 테스트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경력개발 지향 유형과 경력행동 유형에 관한 정보와 맞춤형 경력 준비 가이드라인을 제공받을 수 있다.
생애경력설계 자가진단 방법
➊장년워크넷 접속
➋전체 메뉴 중 ‘자가진단 서비스’ 클릭
➌화면 중앙 ‘자가진단하기’ 클릭 후 테스트 진행
➍결과 확인 및 이메일 발송
Tip+ 사이트 내 ‘생애경력설계서비스’ 메뉴에서는 중장년을 위한 온라인 동영상 교육도 진행한다.
[step 2]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기
포스트 코로나 시대, 리부트를 위한 시니어의 자세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이진서 인생다모작연구소장은 “나이가 들수록 태도나 마음가짐을 바꾸기 쉽지 않지만, 이제 변화는 생존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을 예로 들며, 시니어 역시 이에 적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컴퓨터 활용이나 스마트폰 조작 등 선택의 문제로 여기고 미뤄온 일들을 지금이라도 익히고 체득해야 도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침 지난해 정부에서 ‘디지털 뉴딜’ 정책을 발표해 디지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프로그램 등도 활기를 띨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성공적인 인생다모작에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평생학습포털에서 디지털 활용 능력 키우기
➊서울특별시 평생학습포털 접속 및 로그인
➋‘온라인학습’ 메뉴 클릭
➌‘정보/컴퓨터’ 메뉴 클릭
➍원하는 강좌 클릭 후 ‘수강신청’하기
Tip+ 디지털 관련 강좌 외 인문, 어학, 교양, 자격증 등 다양한 커리큘럼도 제공한다.
[step 3] 웹 세상에 항시 플러그인하기
시니어의 생애설계는 일자리, 재무, 건강, 관계, 여가, 사회봉사, 자기계발 등 7대 영역으로 구분해 이뤄진다. 중요한 건 어느 영역이든 시니어 스스로 고립된 상태에 놓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오프라인을 통한 만남의 창구가 줄어든 만큼, 온라인으로 정보의 플러그를 꽂아두고 많은 사람과 소통하길” 권했다. 가령 구직활동을 할 때도 취업포털사이트만 찾기보다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에서 다양한 정보를 섭렵하고, 내게 알맞은 정보를 선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관심 있는 사이트를 즐겨찾기 해두고 동향 파악과 정보 수집을 위해 자주 들러보는 것도 자기계발에 도움이 된다.
Tip+ 만약 일자리에 관심이 있다면 전 연령대를 망라하는 취업포털사이트보다 나이 제한에 비교적 관대한 구직 정보가 담긴 정부 일자리 관련 사이트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좋다.
[step 4] 온라인 텃밭에 씨앗 뿌려두기
개인 유튜브나 블로그, SNS 등을 통해 정보 수집과 더불어 자기 브랜드를 강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은퇴 후 전문성을 살려 강사를 꿈꾸는 이가 많은데, 초반엔 이력서를 아무리 내도 찾는 곳이 없을 수 있다. 이때 재능기부나 소액의 강의라도 시작하며 경험을 쌓는 동시에 SNS를 통해 자신을 어필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효과적이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강의나 개인 콘텐츠를 올려 수익 창출까지 꾀한다면 금상첨화다. 물론 그 수준까지 내다보려면 디지털 세상에 더 익숙해져야 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지금부터 차근히 나만의 콘텐츠를 쌓아간다면, 몇 년 뒤 온라인 텃밭에 뿌린 씨앗을 거둘 날이 찾아올 것이다.
온라인 클래스로 SNS 브랜드 강화하기
➊클래스101 접속 및 로그인
➋검색창에 SNS 키워드 입력하기 예)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➌강좌 리스트에서 원하는 커리큘럼 꼼꼼히 살펴보기
➍강좌 선택 후 클래스 신청하기(유료)
Tip+ 단순히 강의를 듣는 것 외에 각 분야 크리에이터들의 클래스 소개를 보며 어떤 방식으로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고 홍보, 판매하는지 흐름을 살피는 용도로도 활용해보자.
기대수명 증가로 노후준비의 필요성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청 ‘2019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주가 은퇴하지 않은 가구 중 노후준비가 ‘잘 된 가구‘는 8.6%에 불과하다. 즉 ‘노후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가구’가 절반 이상(55.7%)인 셈이다. 은퇴 후 부부의 월평균 최소생활비는 200만 원이 필요한데 국민연금 20년 이상 가입자 연금액은 92만 원으로 최소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수명연장 추세를 감안하면 국민연금 외에도 주택연금, 인컴형 금융상품, 근로소득 등으로 은퇴 후 소득원을 다양화 할 필요가 있겠다.
자료 출처 및 도움말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하철규 수석연구원)
60세 이상 고령자의 생활비 마련 방법으로 ‘본인 및 배우자 부담‘은 10명 중 7명으로 증가하는 반면, ‘자녀 및 친척 지원’ (17.7%)은 감소하고 있다. 자녀 세대의 부모 부양 의식이 점차 약화되고 있어, 자녀에게 노후를 기댈 수 없다. 가구주 연령대별 가구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은 60세 이상(77.2%)이 가장 높고, 다음으로 50대(68.5%), 40대(66.6%), 30대(61.0%)의 순이다. 고령자는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가장 높으며, 부동산 이외 자산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은퇴 후 소득이 부족한 장년층이 자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택을 활용해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자녀 도움을 받지 않고 당당히 노후를 보낼 수 있고, 자녀들도 매달 생활비를 부모에게 드리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장점에도 주택연금에 가입 할까 말까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집을 자녀에게 물려줘야 할 상속재산으로 여기는 인식 때문이다.
주택연금, 평생 거주·평생 지급
주택연금은 집은 있지만 소득이 부족한 고령자가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본인 집에서 이사 걱정 없이 평생 거주하면서 평생 연금을 받는 상품이다. 부부 중 1명이 만 55세 이상이고, 주택 가격이 9억 원 이하면 가입할 수 있고, 다주택자는 보유 주택의 합산 가격이 9억 원 이하면 가입할 수 있다. 현재 주택연금 가입자의 평균 연령은 72세이며, 평균 주택가격은 3억 원, 평균 월지급금은 102만 원이다. 주택연금 가입주택 가격 상한을 시가 9억 원에서 공시가격 9억 원으로 상향하는 주택금융공사법 개정안이 11월 국회 본 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12월부터 공시가격 9억 원 이하(시가 12억~13억 원 수준) 주택과 주거용 오피스텔 보유자도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시가 9억 원 이상 주택연금지급액은 9억 원 기준(60세, 월 187만 원)으로 제한된다.
주택연금 가입자 4년 연속 1만 명 넘어
주택연금 연간 가입자 수는 2016년 ‘내집연금 3종 세트’가 출시되면서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어선 이후, 4년 연속 1만 명 이상 가입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 주택연금 가입자 수는 7만 6,58명에 달한다. 주택연금은 가입 당시 연령이 높을수록, 주택가격이 비쌀수록 월지급금이 증가한다. 월지급금은 부부 중 나이가 적은 사람을 기준으로 산정한다. 예를 들어, 시가 5억 원 집을 담보로 가입할 경우 60세인 사람이 가입하면 매달 104만 원의 연금을 받지만, 75세인 사람이 가입하면 매달 191만 원으로 연금액이 증가한다. 또한, 70세인 사람이 시가 3억 원 집을 담보로 가입하면 매달 92만 원의 연금을 받지만, 시가 9억 원 집을 담보로 가입하면 매달 272만 원의 연금을 받는다. 1억 5000만 원 미만의 1주택 보유자는 ‘우대형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어 최대 20% 더 많은 연금을 받는다.
주택연금 활용 팁 7가지
집은 있지만 소득이 부족한 장년층이 주택을 활용해 현금 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주택연금 활용 팁을 살펴보겠다.
첫째, 주택연금 지급방식은 ‘종신지급방식’과 ‘확정기간방식’이 있다. 국민연금 수령금액이 많지 않고 활용할 다른 자산이 없는 사람은 ‘종신지급방식’이 안정적인 노후 생활과 장수 리스크 대비에 유리하다. 부부 모두 국민연금에 가입했고 퇴직연금 및 개인연금 등이 준비됐다면 ‘확정기간방식’이 은퇴 초기에 좀 더 금전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다.
둘째, 주택연금은 가입 후 집값이 상승하더라도 기존 가입자 월지급금은 변동 없이 가입 당시 정해진 금액을 받는다. 따라서 집값 상승요인이 있다면 주택연금 가입을 늦추는 것이 유리하고, 집값 하락요인이 있다면 빨리 가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다만, 주택가격이 급등해 가격 상한(공시가격 9억 원)을 초과하면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셋째, 주택연금 이용자가 1년 이상 계속 담보주택에 거주하지 않는 경우 주택연금 지급이 종료된다. 다만, 주택연금 가입자가 치료나 요양을 위해 요양시설에 입원하거나 자녀의 봉양을 받기 위해 다른 주택에 장기간 머무는 등 불가피한 사유가 발생할 때는 실거주를 하지 않아도 계속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가입 주택 전부를 빌려줄 수 있어 주택연금을 받으면서 임대소득까지 얻게 된다.
넷째, 주택연금 이용 중 이사로 거주지를 이전하는 경우 담보주택을 변경하면 주택연금을 계속 수령 가능하다. 다만, 이사하려는 주택의 가격 차이에 따라 월지급금이 달라지거나 정산해야 할 수도 있다.
다섯째, 은퇴 초기에 많은 돈이 필요한 경우 주택연금 지급 유형으로 ‘전후후박형’을 선택하면 10년간 월지급금을 많이 받고, 11년째부터 초반 월지급금의 70%만 지급받게 된다.
여섯째, 최근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크게 오르자 더 많은 연금을 받기 위해 주택연금을 중도해지 하는 사람이 있다. 주택연금은 중도해지 할 수 있지만 중도해지 하면 받은 연금액과 이자를 한꺼번에 반환해야 할 뿐 아니라 주택가격의 1~1.5%인 보증료도 돌려받지 못한다. 또한 3년간 주택연금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곱째, 주택연금 가입 후 금리가 오르더라도 기존가입자 월지급금은 변동 없이 가입 당시 정해진 금액을 평생 보장 받는다. 다만, 주택연금은 일종의 주택담보대출이므로 금리가 낮을수록 가입자에게 유리한 상품이다. 대출금리가 높으면 내야 할 이자가 많아지는데, 해당 이자는 가입자가 직접 현금으로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매달 주택연금 대출 잔액에 가산 되는 구조다.
이전까지 환경이 선택사항이었다면, 지금부터는 필수다. 환경보호는 더 이상 소수가 주장하는 가치가 아니다. 이제는 기업을 경영하는 일도, 식품을 고르는 일도, 집을 짓는 일에도 모두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변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지구의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 지난해 9월 세계기상기구(WM O)가 발표한 ‘2015~2019 전 지구 기후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이 지구 역사상 가장 덥고, 이산화탄소 농도도 가장 높은 기간이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이산화탄소는 이전 5년보다 20% 이상 증가했다. 페테리 탈라스(Petteri Taalas) WMO 사무총장은 보고서에서 심각한 기후 위기를 지적하며 ‘탄소 중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슈 중 하나인 탄소 중립은 배출한 온실가스만큼 대기 중 온실가스를 제거해 순 배출량이 0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 기업이 탄소 중립을 목표로 했다면 기업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한 만큼 나무를 심거나, 탄소를 줄이는 기술과 관련된 투자를 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유럽연합은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제시한 ‘그린딜’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10년 동안 1조 유로를 투자할 예정이다.
우리 정부도 ‘2050 장기 저탄소 발전 전략’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가와 국민 의견을 수렴해 연말쯤에 발표할 예정이다. 철강·석유화학·시멘트·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업계 관련자 및 각종 전문가와의 토론회를 활발히 개최하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탄소 중립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석탄과 같은 산업에서 탄소 배출이 없는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을 통한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 정부도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정책 수립을 위해 치열한 논의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새로운 투자 기준, ESG
탄소 중립은 ESG 투자에도 영향을 주었다. ESG 투자는 기업의 환경보호, 사회적 책임, 투명한 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소를 고려한 투자다. 올해 초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은 ‘기후변화’와 ‘지속가능성’을 투자 포트폴리오의 최우선 순위로 삼겠다고 밝혔다. 덧붙여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기업 경영에서 환경이 이제는 필수로 고려해야 할 투자 기준이 된 것이다.
ESG 투자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 6월 금융투자협회가 발표한 ‘글로벌 ESG 투자 및 정책 동향’에 따르면, 전 세계 ESG 투자 규모는 2012년 13조3000억 달러에서 2018년 30조6830억 달러로 3배 정도 증가했다. 미국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는 향후 20년간 ESG 펀드에 20조 달러의 신규 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렇다면 ESG 투자가 활성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수익률’이다. 지난 2월 우리금융경영연구소가 발표한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ESG 투자 사례와 시사점’에 따르면, ESG 펀드는 ‘코로나19’라는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글로벌 투자 리서치 회사 모닝스타(Morning Star)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도 1분기에 유럽 전체 펀드 시장에서 1480억 유로가 이탈했지만, ESG 펀드에는 약 300억 유로가 유입되었다. 같은 기간 미국 ESG ETF에도 115억 달러가 들어왔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ESG가 중요해질 것이다. 환경오염 발생으로 인한 손해배상이나 임직원의 도덕적 리스크 같은 문제가 터지면 바로 불매운동이 일어난다. ESG 관리 여부가 기업의 성패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떠오르는 비거 노믹스
‘ESG’가 투자시장의 먹거리라면, ‘비건’은 식품시장의 먹거리다. 최근에는 ‘비거 노믹스’(Veganomics)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채식주의자(Vegan)와 경제(Economics)의 합성어로, 채식주의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제를 뜻한다. 채식을 비롯해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전반적인 산업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시장이 바로 대체육 식품시장이다.
대체육은 진짜 고기처럼 만든 인공 고기로서, 향후 떠오르는 유망 식품 분야 중 하나다. 미국 시장조사 전문기관 얼라이드마켓리서치(Allied Market Research)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 세계 대체 육류시장 규모는 41억 달러로, 2026년까지 81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체육 시장은 ‘비욘드미트’(Beyondmeat)와 ‘임파서블푸드’(Impossiblefood)가 이끌고 있다. 임파서블푸드는 2011년 설립된 푸드테크* 회사다. 두 회사는 코로나19 상황에도 건재함을 보여줬다. 지난 5월 비욘드미트는 1분기 매출이 지난해보다 141%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는 같은 기간 새롭게 입점한 유통 점포만 777개에 달한다.
이들 기업이 코로나19에도 끄떡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국에서 일어난 육류 대란 때문이다. 육가공 공장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대부분 문을 닫거나 부분적으로 운영됐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대체육이 하나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대체육의 선호가 단순한 현상에 그치지 않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대체육 시장은 꾸준하게 성장세를 보였다.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이다. 현대의 밀집 사육, 도축 시스템이 전염병 확산에 일조한다는 분석과 함께, 영양뿐만 아니라 맛까지 더해진 대체육은 혁신적인 상품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미래에는 대체육 식품이 하나의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푸드테크(Food-tech): 식품(Food)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다. 식품 및 관련 산업에 4차 산업기술 등을 적용해 이전보다 발전한 형태의 산업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술.
해외 사례로 본 제로 에너지
제로 에너지 건축 시대도 성큼 다가왔다. 탄소 배출이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르자 제로 에너지 건축의 필요성도 함께 제기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건물 부문이 전 세계 에너지 사용량 중 36%로 집계됐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9%로 나타났다. 결국 건물이 탄소 배출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셈이다.
필요성과 더불어 시장성도 갖춰졌다. 제로 에너지 건축물의 세계 산업시장은 2017년 기준 420조 원, 2024년은 1560조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필요성과 함께 시장성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한국환경건축연구원 박진서 실장은 “전 세계적으로 탄소 배출권 문제가 부각되고, 제로에너지건축물 인증이 더 강화되면 앞으로 제로 에너지 건축물 시장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제로 에너지 건축은 단열과 공기 유출을 최대한 막아서 에너지 사용을 줄이거나, 태양광과 같은 재생에너지 설비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에너지 제로화 기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바깥 온도의 변화가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 적은 에너지로 실내 환경을 유지하게 하는 패시브,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지만 높은 성능으로 운전할 수 있거나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액티브가 있다. 예를 들면 패시브에는 고성능 창문, 액티브에는 고효율 LED 조명이 있다. 마지막으로 태양광 발전과 같이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신재생 기술이 있다. 오른쪽 박스 내용은 이러한 기술들을 적용한 해외의 제로 에너지 건축물 사례다.
해외의 제로 에너지 건축물
베딩톤 제로 에너지 단지(Beddington Zero Energy Development)
2002년 런던에 위치한 오수처리시설 부지를 친환경 주택 단지로 조성한 것이 베딩톤 제로 에너지 타운이다. 알록달록한 닭 벼슬 모양의 환풍기가 유명하다. 이 환풍기를 통해 실내 환기와 건물 내부의 온도를 조절한다. 모든 주거용 공간은 남향으로 배치하고, 3중 유리를 설치해 태양에너지 이용을 극대화한다. 낭비되는 에너지도 없다. 주택의 지붕 위에는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다. 빗물과 오수의 정화수는 화장실과 옥상정원 관리에 활용한다. 주민은 자가 차량 운전을 최소화하고 전기차를 이용한다.
불릿센터(Bullitt Center)
2012년에 준공한 미국 시애틀의 불릿센터는 ‘살아 있는 건물’로 불린다. 환경자선단체인 불릿재단이 건축한 건물이다. 시애틀의 다른 고층빌딩보다 에너지 효율이 약 80% 정도 높다. 지붕에 있는 575개의 태양광 패널은 1년 동안 건물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곳은 화장실이 특이하다. 일반 화장실은 배설물이 정화조에 차면 오수관으로 배출된다. 반면 이곳의 화장실 배설물은 시설 내 설치된 장치로 퇴비화 작업을 거친 후 원예용 퇴비로 만들어진다.
펄 리버 타워(Pearl River Tower)
2013년 중국에 준공된 펄 리버 타워는 건물 내부에 풍력 발전기가 있다. 71층 규모이며 높이는 303m다. 중국의 담배회사 CNTC(China National Tobacco Corporation) 본사 건물이다. 건물 전면을 관통하는 개구부가 남쪽과 북쪽에 각각 4개씩 있는데, 건물로 불어오는 남풍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다. 이 전기는 건물의 공조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쓰인다. 창문은 자연 환기를 위해 이중 유리벽으로 만들었고, 태양광 패널로 생산한 전기는 냉난방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