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도 안전한 집, 고령자 주택 개조 ‘집수리’ 넘어야

기사입력 2024-09-25 08:51 기사수정 2024-09-25 08:51

이용민 대표, “내 몸처럼 내 집도 건강검진하세요”

20년 동안 수많은 고령자 주택 개조 가이드와 매뉴얼을 만들었지만, 연구는 여전히 이론에만 멈춰 있었다. 오랜 시간 고령자 주거 환경에 대해 연구하던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가 노인·장애인 주택 개조 영역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이용민 대표는 2021년 ‘필요하지만 하는 사람이 없으니 직접 해야겠다’ 마음먹고 내집연구소를 창업했다. 과천도시공사 ‘고령친화 주택개조 프로젝트’, 분당서울대병원 ‘퇴원환자 주거환경개선사업-집으로’ 프로젝트, 인천도시공사 ‘iH형 고령친화 맞춤형 집수리 사업’ 진단·계획 수립 용역, 국민건강보험공단 ‘수급자 특성을 고려한 재가환경 개선 급여모형 개발 연구’, 경기주택도시공사 ‘주택개조사업 공사 매뉴얼 작성 용역’, 강남종합사회복지관 ‘고령친화 하우스 컨설팅 용역’ 등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만큼 다양한 현장으로 나갔다. 수없이 연구하고 작성했던 매뉴얼과 가이드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적용해나가는 과정이었다.

“내집연구소에서는 어르신들이 집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행위를 관찰하고, 상황과 예산에 맞춰 집을 안전하게 고쳐드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주거 환경 개선은 신축과 기존 주택 개조로 나뉘는데, 그중 살던 집을 고치는 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에요. 어떻게 안전한 집을 만들지 연구하고 매뉴얼을 만드는 게 제 일이었는데, 아무도 현장에서 적용하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집 안에서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고령자에게 내 집에서의 안전은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직접 해보자고 마음먹은 이유입니다.”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사진=오병돈 프리랜서)

내 몸처럼 내 집도 ‘건강검진’

창업 당시는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때다. 게다가 건국대학교 산업기술연구원에서 학술연구 교수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수시로 밤을 새우고, 맞춤형 주택 진단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고령자 주택 개조’는 건축도 아니고 복지도 아니어서 산업적으로 분류조차 되지 않는 영역이다. ‘집수리’ 정도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포기해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오랜 시간 연구한 내용이 사회에서 적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생각했단다.

“창업 초기에 시행착오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자신에게 맞게 집을 안전하게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못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보를 드리면 많은 분이 개조에 나설 거라 생각해, 내 집 상황을 진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안전을 위해 집을 바꾼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데다 ‘나는 환자가 아니고 건강하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결국 현장에서 얻은 데이터를 시각화해서 필요성을 알리고 설득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특히 개인에게 맞춘 집수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관련 사업을 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시공사에 예산을 주고 사업을 하면서도 ‘어디를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에 대한 진단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이용민 대표는 노후 주택 수리 사업의 일환으로 단순 집수리가 아니라 고령자에 맞춘 노화 대응 사업을 해보자고 인천도시공사에 제안했다. 첫해 사업 시행 후 어르신들의 자립도가 높아지고 호응이 좋아, 사례를 늘려가며 4년째 함께하고 있다.

“여러 가구를 돌아다니다 보니, 90대 고령자도 많아졌고 치매 환자도 늘었다는 걸 피부로 느껴요. 치매의 경우 망상이 있는 분은 창문을 다 가려놓거나 위험한 물건이 집 안 곳곳에 놓여 있는 등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 있는 분들도 많아요. 하지만 국내에서는 치매와 주거 환경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어요. 앞으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한 영역이죠.”

이 대표는 살던 집에서 늙어가고자 하는 고령자의 수요가 늘고 있고, 재택 진료나 통합 돌봄 시스템이 집을 중심으로 설계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주거 환경 안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이 커질 거라 본다. 이 대표가 내 몸처럼 내 집도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알리는 이유다.

“많은 분이 체험해보지 않아 편리함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거창하지 않더라도 직접 안전용품을 경험해보고 내가 사는 집을 어떻게 바꿔야겠다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플랫폼이 생겼으면 해요. 저희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분야가 더 커지면서 다양한 협업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이용민 대표는 자체 개발한 진단 프로그램으로 어르신들이 앞으로 변화할 집을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도록 현장에서 안내하고, 진단 후 보고서도 발행해 보낸다.(사진=내집연구소 제공)
▲이용민 대표는 자체 개발한 진단 프로그램으로 어르신들이 앞으로 변화할 집을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도록 현장에서 안내하고, 진단 후 보고서도 발행해 보낸다.(사진=내집연구소 제공)

태동하는 주택 안전 개조 시장

“나는 괜찮다.” 지자체 사업으로 취약계층 고령자의 주택을 방문했을 때도, 50대 자녀의 의뢰로 부모님의 주택을 방문했을 때도 어김없이 듣는 말이다. 문턱이 없는 환경, 앉았다 일어설 때 보조하는 안전 손잡이, 목욕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욕실 의자 등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안전용품은 ‘환자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이 많았다. 하지만 이 대표는 “예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용변, 목욕, 외출, 식사, 취침이에요. 이 과정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것이 위험한지 요소를 관찰하고 솔루션을 찾아내죠. 또 어떤 질병이 있는지, 낙상사고나 안전사고 경험이 있는지도 파악합니다. 100곳의 집을 방문하면 100개의 솔루션이 나와요. 같은 공간이어도 생활 패턴이 다르고, 주택은 굉장히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집마다 구조도 다르죠.”

대부분의 어르신은 ‘생활공간이 변했을 때 적응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한다. 그래서 이 대표는 현장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모아 개조 후의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여러 가지 대안을 찾아 진단 결과를 제안한다. 개인 의뢰의 경우 초반에는 진단은 받더라도 실제 개조까지 이어지지 않는 사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안전한 주거 환경의 필요성을 느끼는 고객들이 많아 적극적인 환경 개선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었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다. 국내에 고령자 맞춤형 안전용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장기요양보험으로 구매할 수 있는 돌봄용품이 대부분이다. 안전 손잡이의 필요성을 느끼는 고령자라도 디자인을 보고 설치하고 싶지 않다는 사례가 나오는 이유다. 우리보다 큰 시장이 형성된 일본에는 다양한 제품이 많고,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디자인의 용품도 많다. 다만 가격대가 높을 수밖에 없어 이 대표는 국내에도 용품이 다양해지길 바란다.

“일본은 장기요양보험 내에서 1년에 200만 원의 주택 개조 비용이 지원돼요. 우리나라는 현재 시범사업 중인 부분이죠. 또 케어 매니저라는 전문가가 있어서 주택 개조 이유서를 굉장히 자세하게 작성하고 급여 이용 방법까지 설계해주거든요. 우리는 아직 이런 과정을 통합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고, 상담에서 시공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생태계조차 없는 상태예요.”

연구를 통해 주거 환경 안전에 대해 공간별로 자가진단을 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도 만들어보았지만, 현장을 다녀보니 스스로 이를 판단하고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결국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올해부터 강서50플러스센터와 함께 ‘시니어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진단 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이용민 내집연구소 대표(사진=오병돈 프리랜서)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고령자에게 안전한 주거 환경이란 결국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립은 고령자의 일상에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이용민 대표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를 묻자 ‘스스로 욕조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어르신의 사례’를 꼽았다. 성인용 보행기를 사용하는 분인데,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욕조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국내에는 제품이 없어 일본에서 욕조 거치형 벤치 의자와 욕조용 안전 손잡이를 가져와 설치해드렸다. 그저 혼자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도와드린 것뿐이지만, 어르신이 무척 기뻐하시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단다.

자립에 중점을 두고 주택 환경을 보면 생각해볼 지점이 꽤 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는 여닫이문이 기본이지만,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보행 보조기구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미닫이문이 더 편리하다. 주방 시설도 고령자의 키에 따라 높이를 조절하는 것이 좋다. 또한 개수대 아래 하부장을 이용하려면 앉았다 일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고령자는 이를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보조용구 설치도 좋지만 레일을 달아 모듈식 서랍을 설치하는 것도 고령자 맞춤형 주거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정리 수납을 배웠어요. 어르신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무언가를 설치하는 것보다 비우는 게 더 중요하더라고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주택은 상하부장을 수납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는데, 수납장의 위치는 60~120cm 높이가 가장 사용하기 편해요. 너무 높으면 어르신들 손이 닿지 않고 너무 낮으면 쭈그려 앉아야 해요. 특히 수납이 중요한 고령자가 거주할 주택이라면 이런 수납공간부터 고민해봐야 하는 거죠.”

우리나라 노인 가구 주택 개조 매뉴얼은 2007년 마련됐다. 2005년 12월에 제정된 노인 가구 주택 개조 기준에 따른 것이다. 이 대표는 이 기준이 20년 전에 멈춰 있다고 말한다. 또 보통의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최저 주거 기준도 고령자에게는 맞지 않는 상황이다. 복지주택이 이런 기준을 따르다 보니 최소한의 공간으로 주택이 공급된다. 보행 보조용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동이 불편하고, 수납공간이 넉넉지 않아 집의 대부분을 물건이 차지하게 된다.

또한 법적으로 설치해야 할 의무가 있는 보조용구들이 사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비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달리기도 한다. 정작 거주하는 고령자가 사용하기 어려워 방치된다. 현관의 안전성을 위한 벽 부착형 의자가 형식적으로만 설치돼 결국 고령자가 철거를 원했던 사례도 있다. 이 대표는 “이제는 주거 환경에 설치된 보조용구들이 고령자의 편의를 얼마나 높이는지, 정말 안전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지 실태를 파악하는 연구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이 대표는 고령자 주거 환경 개선 시장의 개척자로서 앞으로도 묵묵히 나아갈 예정이다.

“저는 아직 고령자 주거 환경에 대한 논의와 시스템이 결실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정책이 변화했거나 시장이 커지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과도기에 들어섰고 시장이 태동하고 있다고 느껴 앞으로 변화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쉽게 자신의 집을 진단하고 안전하게 바꾸는 문화가 형성되도록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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