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교 동기동창들이 동창회를 창립한 것은 졸업한 지 13년째 되는 1975년 3월이다. 당시 L동문이 사장으로 있던 시내 S호텔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동창회는 첫 번째 행사로 바로 다음 달인 1975년 4월에 역시 같은 S호텔에서 제1회 동창회 바둑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후배인 프로기사 홍종현 4단(당시)에게 지도를 부탁하였으나 선약을 이유로 김동명 4단(당시)이 대신 왔다. 당시 기력이 4급(현 아마 2단) 정도였던 L사장은 바둑에 한창 심취하여 동문 강자 중의 한 명인 인하대 L교수와 4점을 놓고 자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4점을 놓고도 쩔쩔매는 그 L교수가 김 사범에게 오히려 2점을 놓고도 지는 것을 보자, 프로바둑계를 잘 모르던 L사장은 김 사범을 한국바둑계의 대단한 고수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S호텔의 지도사범으로 위촉하고 호텔의 과장급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과장급이라고는 하나 그 액수가 프로기사들 중 최고였던 조훈현 국수의 수입에 버금갈 정도여서 많은 기사들이 부러워하였다고 하니 당시 프로기사들의 수입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덕택에 필자를 비롯한 동문 바둑애호가들은 틈만 나면 S호텔에 들러 김 사범의 지도를 받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1974년에 시작된 한국기원 기사파동이 계속되던 때라 갈 곳이 마땅치 않던 다른 프로기사들도 S호텔에 자주 들렀다. L사장은 이들에게도 다과를 제공하고 밥을 자주 사는 등 대접을 잘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지도를 받을 수가 있어 필자의 경우 양상국 4단(당시), 장두진 2단(당시) 등에게도 종종 지도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 L사장이 언제부터인가 바둑 두기를 꺼려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기사파동이 끝나고 한국기원으로 복귀한 기사들이 고맙다고 L사장에게 실제 실력보다 몇 단 높은 아마단증을 증정한 것이었다. 그 단증을 벽에 걸어놓고 옛날 치수대로 두자니 단증을 볼 낯이 없고 단증대로 두자니 판이 짜이질 않아 그랬던 것이다.
제2회 대회는 다음해인 1976년 2월, 제3회 대회는 같은 해 9월에 열렸다. 1977년에는 S동문이 초동극장 옆에 초동기원을 개원하여 제4회 대회는 그해 7월 자연스럽게 초동기원에서 열렸다.
그때 그 기원에는 김좌기 3단(당시)이 지도사범으로 있어서 필자는 틈만 나면 기원에 들러 처음에는 4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3점으로 지도를 받았다. 그 덕분인지 한 해를 건너뛰고 1979년 5월에 열린 제5회 대회 때는 필자가 A조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 후 3년을 건너뛴 1982년에 명동에서 C백화점을 운영하던 K동문이 백화점 내에 동창회사무실을 제공하면서 그 기념으로 제6회 대회가 열렸으나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2년 11월에 기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에 모이기로 했는데, 이 전통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모이는 장소는 처음에는 선릉역 부근의 H 바둑살롱이었으나 1993년 10월, Y동문이 신사동(新沙洞) 부근에 회돌이라는 기원을 개원하면서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기원이 2001년 문을 닫자 진양상가에서 화원을 하던 P동문이 2002년 초 화원 인근에 진양기원을 개원하였으나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후에는 지하철 서초역 부근에 있던 한일기원에서 모였다. 당시 한일기원에 지도사범으로 나오던 김수영 7단은 인사를 하면서 필자가 한국바둑학회 회장이라고 밝히자 한국바둑계를 강력히 비판하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국기원을 개혁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곤 하였다.
필자와는 동갑내기인 그가 암으로 너무 일찍 타계한 것은 한국바둑계로서도 상당한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2008년 11월, 전에 초동기원을 하던 S동문이 다시 양재역 부근에 청석기원을 열어 우리 기우회는 지금까지 이 기원에서 모이고 있다.
필자는 딸 없이 아들만 넷으로, 바둑을 가르칠 기회를 찾다가 1982년경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동시장 부근에 한국기원 영동지원이 개원되어 김좌기 사범이 지원장으로 왔기에 아들들을 데리고 그곳에 다녔다. 그러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큰아들만은 약간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이나마 지속적으로 바둑을 두어 현재 기원 7~8급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 아들(필자의 손자)에게도 꾸준히 바둑을 가르치더니 최근에는 바둑학원까지 보내 중학교에 들어간 올해 중에는 제 애비를 추월하여 아마 유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필자가 바둑학과 설립을 추진 중이던 1996년 추석 때는 한국기원 사무국장 정동식 5단과 TV에서 3점으로 기념 순장바둑을 두어 비겼는데, 해설을 맡았던 권경언 6단이 명절 때 화국(和局)은 길조(吉兆)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바둑학과 교수로 내정된 정수현 8단(당시)과 함께 신라호텔에 가서 필자가 왕 팬인 유창혁 9단의 제1회 삼성화재배 최종 결승국을 관전하였다. 이 바둑은 중반까지 흑을 잡은 유창혁 9단이 필승의 국세였으나 후반에 터무니없는 실착이 나와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에게 1집 반 역전패를 당한 것을 필자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해했다.
그래서 해설을 맡았던 조훈현 국수, 중앙일보 박치문 바둑전문위원, 그리고 필자보다 더한 애기가중 한 명인 S대의 K교수 등과 함께 신라호텔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포커를 하며 화풀이 겸 뒤풀이를 했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조 국수는 그 후 명지학원 바둑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초빙하여 필자가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내가 2003년에 낸 에세이집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모여 살 수 있나요?” 많은 분들은 궁금증을 가집니다. 자녀 네 가족과 우리 내외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 봅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분도 있고 부러워하면서 묻는 이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분은 당장 그 비결을 알려 달라고도 합니다. 나는 이런 급한 질문을 받으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달리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단 몇 마디 말로 설명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 이근후(李根厚·이화여대 명예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는 핵가족도 모자라 일인 가정으로 살아가는 인구도 참 많아졌습니다. 교과서적인 가족의 개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학 교과서에 실린 가족의 개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확대가족이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핵가족이란 개념입니다.
확대가족은 농경사회에서 경험했던 가족구조입니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삽니다. 핵가족이란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생긴 가족형태입니다. 가족 이동이 손쉽도록 기능적인 가족이 부부와 미성년 자녀들로 구성하는 가족형태입니다.
13가족 함께 한 지붕아래 산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핵가족 형태를 취합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곧바로 분가하여 자신의 핵가족을 이룹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이런 고전적인 가족 정의를 설명할 수 없는 가족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회적 추세로 보아 우리 집은 13가족이 한 지붕아래 함께 산다고 하면 당연히 궁금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2남2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니 모두 5가구 손자녀 합해 13명입니다. 함께 돈을 모아 빌라 형태의 집을 지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여 그런 발상을 해서 내가 동참한 것입니다.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입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습니다. 1년 여의 의논과 1년 여의 설계를 거쳐 함께 모여 삽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다는 말은 자녀들의 요구와 우리 부부의 사정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당시 현실적인 요구는 자녀들이 모두 전세를 살고 있어서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갖지 못했습니다. 손자녀들이 어렸는데 그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진 터라 육아에 손이 모자랐습니다. 우리 부부는 은퇴를 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여유가 있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
이런 상황에서 모였으니 우리 가족은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하면서 신혼 6개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분가를 시키면 남남이 될 것 같아서 서로 양해를 하고 6개월의 소통기간에 합의했습니다. 새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며느리나 사위도 우리 부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부부도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의 진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이전 자라던 친가에서 하던 습관대로 행동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우리 부부도 새 식구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던 습관대로 했습니다. 서로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6개월의 학습동거 끝에 분가시켰습니다.
6개월 학습동거 끝의 분가 이후
이런 사정을 거쳐 서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아무리 필요에 의한 재집결이긴 하지만 의논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필요에 의한 재집결의 아이디어는 큰며느리가 제안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의논하기를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타계하게 되면 남은 부모를 모시기로 했답니다. 자녀가 넷인데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모시면 어떨까라고 형제들 간에 의논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자면 한 집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아이디어를 내가 정년퇴임하는 시점을 맞추어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모여 어떻게 하면 필요성을 극대화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부부간에 생각을 맞추어 살아가기도 힘든데 이런 대가족이 모여 살자면 의견이 다른 점도 많고 서로 부딪쳐 속상하는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적응할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의논 끝에 찾아 낸 핵심적인 요체는 이렇습니다.
“우리들은 각 가정이 고유한 가치관과 종교관을 갖고 간섭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서로 같음은 나누면서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서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모여 사는 동안 우리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 노력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한 하나는 가족 간의 거리입니다. 함께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과 거리는 매우 가깝습니다. 가까운 만큼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정서적 거리도 중요합니다. 너무 가까워도 갈등으로 꼬이고 너무 멀어도 남남입니다. 얼마만한 정서적 거리가 필요할까요.
고슴도치를 생각했습니다. 서로 꽉 껴안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너무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면 가족정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낱말이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입니다. 이런 정서적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준은 결국 독립성의 유지와 간섭의 배제였습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 인정해
3세대 가운데 우리 부부가 그 약속을 지키기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가하여 나름 가족을 형성했다고 해도 부모 눈엔 역시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이 위태한 아이(?)로 보는 시각은 머리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정서적으로 느끼기에 부족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습관이 변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간섭을 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어린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습득한 방법으로 가족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늘 이런 문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노력은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걱정했던 것만큼 우리 부부의 손길이 없어도 잘 지냅니다. 되돌아 보면 기우입니다. 우리 부부의 간섭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자녀들의 창의성이 넓어집니다.
자녀들도 제가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이나 가족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크게 패가망신할 삶이 아니라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꼭 부모가 살았던 방법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삶이 모델입니다. 집 구조상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지만 법적으로 각기 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니 공동경비만 갹출해서 유지보수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독립이 보장된 셈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고 산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혜택을 받은 층은 당연히 우리 부부입니다. 다음이 손자녀들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자녀들은 샌드위치 신세입니다. 위로 부모를 모시랴 아래로 자녀들을 키우랴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자녀들의 독립성을 유지시키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 그 자체 때문에 불편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공동체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나?
이제 손자녀들도 자라 우리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습니다. 처음 모여 살기로 했을 때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언제까지 유지해 나갈 것인가.
손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 의논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10년이 지나 보니 그런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집에서 꿈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일꾼으로 자랄 것을 소원합니다.” 이 약속은 다섯 가지 약속 가운데 마지막 약속입니다.
이제 손자녀들이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면 그들이 함께 살았던 가족공동체 경험을 살려 또 다른 창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상호 존중하는 독립성과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는 미래의 가족들에게도 가치 있는 기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근후 명예교수는
1935년생인 이근후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 40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 게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전부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현재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 디스크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네 명의 손자 손녀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쓰도록 해준다며 가족들의 인연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걸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실감한다고 했다.
먼저, 한자를 이용한 측자(測字) 파자(破字) 수수께끼부터 풀어봅시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한자로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답은 壬子(임자)입니다. 壬을 파자하면 千一이 됩니다. 子는 한밤중[夜]인데 1001일 동안 밤에 이야기하면 곧 千一夜話(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가 되지요. 톨스토이의 ‘부활’은 復活이 아니라 甦(소)라고 쓰면 더 재미있습니다. 한 글자에 갱생(更生)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잠이 깨다, 다시 살아나다, 이런 뜻이 있는 글자입니다.
이번엔 거꾸로 물어, 四季如春(사계여춘)이 무슨 말일까요? 1년은 네 계절[四季]로 되어 있고 봄은 새싹이 푸르게[靑] 자라는 계절인데 늘 봄과 같다니 얼마나 좋을까? 사계여춘은 청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늘봄이라고 아호를 지은 분도 있던데, 그만큼 청춘은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청춘이라면 생각나는 게 소설가 우보(牛步) 민태원(閔泰瑗·1894~1935)의 ‘청춘예찬’입니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던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한 헌사였습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우보는 청춘이 갖춰야 할 것은 끓는 피와도 같은 열정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고은은 이 글을 읽었을 때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듣고, 그 어떤 바윗덩이도 굴리며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힘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류의 중요한 문화유산은 청춘의 열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청춘과 사랑 자체를 주제로 한 것들이 많습니다. 청춘에 대한 생각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청춘은 아름다워라’, 이 제목에 다 들어 있습니다. 청춘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아리고 아쉬운 것입니다. 청춘이라는 말을 들으면 joyful이라는 영어단어가 늘 생각납니다. ‘기뻐하는, 즐거움을 주는’ 이런 뜻인데 젊음의 낭만과 장난, 유희, 용서될 수 있는 실수라는 의미도 함께 갖춘 말처럼 느껴집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 중 세 번째 곡은 ‘청춘에 대하여’(Von der Jugend)입니다. 말러가 ‘편안하고 명랑하게’ 부르라고 한 이 곡은 어느 한가로운 날 작은 연못 한가운데 있는 정자에서 잡담하는 젊은이들을 묘사한 시를 가볍고 산뜻한 악상으로 들려줍니다. 늘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고 ‘어느 갠 날 아침 갑자기’ 온몸을 바칠 만한 사랑이 올 것 같은 예감과 충동 속에 약동하는 청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청춘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거나 생명을 잃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단가 ‘사철가’를 봅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이 노래는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늙어진 계수나무 그 끄트머리에다 대란 매달아놓고, 무법도식하는 놈과 부모 불효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앉아 한잔 더 묵소, 덜 묵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라고 끝납니다.
청춘은 다시 오기 어려우니 즐겁게 마시며 놀아야 할 시기입니다.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리는 게 청춘이라니 그대로 있을 수 없지요. 중국에는 무슨 무슨 춘이라는 술이 많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마신 술을 꼽아보면 대춘(大春) 석동춘(石東春) 부영춘(富永春) 약하춘(若下春) 죽엽춘(竹葉春) 이화춘(梨花春) 등 많기도 합니다. 이 술을 마시면 젊어진다, 젊음이 유지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청춘을 버린다는 뜻인 포청춘(?靑春)은 역설적으로 청춘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술의 대명사입니다. 고산 윤선도는 “산골에 갇힌 뒤부터/길고 긴 한낮이 늘 지겹구나/포춘을 무슨 수로 이어갈까/근매의 옛 다짐이 부끄럽네”[自我囚山後 常嫌白日遲 抛春何計繼 勤買愧前期]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여기 나온 포춘이 곧 포청춘입니다. 勤買는 부지런히 술을 사서 마신다는 뜻으로 당송 팔대가 중 하나인 한유(韓愈)의 시 ‘감춘’(感春)에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석양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는 노래대로 다시 못 올 청춘을 술로 배웅하며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라고 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었던 것, 그러나 이제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젊음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모르지는 않지만 어쨌든 청춘과의 작별은 아쉽고 슬픈 일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귀양살이의 여덟 가지 흥취’[遷居八趣]라는 시에서 “실버들 천 가지 만 가지/가지마다 모두 청춘/그 가지들 봄비에 젖으면/가지가지 사람 괴롭게 하네”[楊柳千萬絲 絲絲得靑春 絲絲霑好雨 絲絲惱殺人]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여덟 가지 흥취 중 맨 마지막 ‘버들을 찾는 것’[隨柳]인데, 반복되는 말 絲絲(사사)에 청청한 버드나무와 자신을 비교하는 다산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 ‘병원’에는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가 만난 그 의사가 그런지 몰라도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이의 병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 병을 겪었고, 어떤 형태로든 이기고 살아 오늘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들이야말로 나이든 이들의 병을 모릅니다.
나는 1973년 신문사 입사시험을 칠 때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연년세세화상사 세세연년인부동)을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 사람은 매년 달라져 가는구나’라고 풀었습니다. 해석문제는 풀었지만 그 문제를 낸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했습니다.
청춘은 세대 간 이해와 공감의 바탕이며 원천입니다. 자신의 청춘은 물론 남의 청춘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입니다. 아울러 지금 청춘들의 처지와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춘이 힘겹지 않은 적은 어느 시대에도 없었지만 요즘 청춘은 특히 가엾기 그지없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겠습니까?
1910년 5월 29일에 태어나 2007년 5월 25일에 타계한 금아(琴兒) 피천득선생은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썼습니다. 왜 하필 스물한 살일까? 사랑의 고통 때문에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가서 모래밭에 몇 자 써놓은 뒤 죽지 않고 돌아온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금아는 ‘밝고 맑고 순결한 5월은 지금 가고 있다’고 썼지만, 나는 ‘밝고 맑고 순결한 청춘의 달 5월이 왔다’라고 글을 맺겠습니다.
‘근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시킨은 운문소설 에서 젊은 시절에 젊었던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늙은 시절에 늙은 사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젊은 나이에 젊은 것이며 늙은 나이에 늙은 것인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이와 삶의 단계에 대해서는 공자의 말이 유명합니다. 공자는 40이 불혹(不惑), 50이 지천명(知天命), 60이 이순(耳順), 70이 종심(從心)이라고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없게 되고, 쉰이 되면 천명을 알며, 예순이 되면 생각하는 게 원만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일흔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사람들도 과연 그럴까요? 불혹이 아니라 다혹(多惑)이라고 해야 할 만큼 요즘의 마흔은 분별이 모자라고, 천명을 알기는커녕 천명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볼 만큼 요즘의 쉰은 여전히 역동적입니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사람들은 “마흔이 되면 매지근하고 쉰이 되면 쉬지근하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예순 일흔에 대해서는 그런 말도 없을 정도였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듯이 일흔을 넘기는 것은 대단한 장수로 치부돼왔습니다.
지금은 생활환경이 나아지고 의료와 복지의 발달로 인해 평균수명이 늘어나 원래 나이에서 20%를 깎은 게 실제 나이라는 말도 합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 50세는 노년의 청춘이라고 말하는 장수시대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50이 불혹, 60이 지천명이라고 해야 할 판입니다. 나이의 Norm(표준)과 틀이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칠순을 넘기면 신선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 말한 분도 있습니다. 서른은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이립(而立)의 나이이지만 요즘 서른에 결혼하거나 취직해 삶의 기반을 닦는 젊은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통적인 나이의 규범에 따라 삶과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루소는 에서 10세에는 과자, 20세엔 연인, 30세엔 쾌락, 40세엔 야심, 50세엔 탐욕을 좇는 게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60세 이후엔 뭘 추구하나요? 벤저민 프랭클린은 에서 20세에 중요한 것은 의지, 30세에 중요한 것은 기지, 40세에 중요한 것은 판단이라고 했는데, 50세 이후에는 뭐가 중요할까요?
영국 시인 에드워드 영(1683~1765)은 “나이 마흔에도 바보인 사람은 정말 바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40, 50이 되도록 이름이 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20세에 용모 수려하지 않고 30세에 건장하지 않고 40세에 부자가 안 되고 50세에 현명하지 않으면 평생 수려 건장 부자 현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사람(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 )도 있습니다. 83세까지 장수하면서 다방면으로 큰 업적을 남긴 괴테는 “무언가 큰일을 성취하려 한다면 나이를 먹어도 청년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자꾸 초조해집니다. 귀한 생을 받아 이 세상에 왔으니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떠나고 싶은데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오래 살아야만 이름을 남기는 건 아닐 것입니다.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겨우 24세로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탄생 2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천재들 중 요절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삶을 완성하고 갔습니다. 44세로 사망한 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20세에 취했고, 30세에 파멸했고, 40세에 죽었다.’고 노트에 썼습니다.
천재들은 예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릴케의 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후에 가서는 아마 10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인 것이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진보하는 존재일까요? 판단력이 여물면 상상력은 시들어갑니다.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충실을 뜻하는 춘화추실(春華秋實)이라는 말이 있지만 봄의 꽃과 가을의 열매를 동시에 즐길 수는 없습니다. 영화 에서는 라라의 약혼자이자 러시아혁명 주체인 스트렐리니코프가 악덕 변호사 코마로프스키에게 “인간은 연령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코라로프스키가 나이가 들면 관대해진다고 대답하자 스트렐리니코프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해지는 것”이라고 면박을 줍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해지고 꽉 막힌 외고집 벽창호가 된다면 그런 나이와 삶은 많고 길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대개 좋은 것,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 합니다. 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 인물 므두셀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므두셀라 증후군’은 지나간 일 중 좋았던 기억들만 남겨 청춘을 ‘좋았던 시절’로 치부해 버리는 성향을 뜻합니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자신의 가장 좋은 샷만 기억하거나 가장 좋았던 점수를 평소 실력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착각과 교만을 경계하면서 겸손과 배려의 나이를 쌓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92세로 타계한 핀란드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는 83세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최근에야 지상에서 내가 존재하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정원의 나무는 아주 작았고,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제 나무는 내 머리 위에서 나부끼면서 ‘당신은 곧 떠나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머물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기 때에는 앞으로 넘어지지만 철이 들면 뒤로 넘어진다고 합니다. 앞으로 넘어졌다가 똑바로 섰다가 뒤로 넘어지는 게 사람의 일생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이는 남이 알려줘야 자기 나이를 알지만 노년에 이른 사람은 힘겹도록 스스로 자기 나이를 압니다. 설날이 들어 있는 2월은 나이와 늙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되도록이면 똑바로 서서 의미 있는 삶을 완성해 가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여성 시인 메이 스웬슨(May Swenson 1913~1989)의 ‘어떻게 늙을까’(How to be old)라는 시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젊기는 쉽지. 모두 젊어, 처음엔. 늙기는 쉽지 않아. 세월이 걸리지. 젊음은 주어지는 것, 늙음은 이루어지는 것, 늙기 위해선 세월에 섞을 마법을 만들어 내야 돼.’
그 마법을 찾아야 합니다.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이사장
세상의 풍속도에 따라 인사법도 점점 짧아져만 가는 것일까?
저의 어릴적 인사법은 시도 때도 없이 “밥 무어십니껴?”(밥 먹었습니까?)로 일관된 인사법이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의식주 중에서도 먹는 것, 먹거리의 중요성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은 틀림없다.
로스토우가 말한 경제발전도 첫 단계인 전통적 사회에서 선행조건단계를 거쳐 도약단계로 나아감은 각 단계별 핵심요소를 얼마나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발전속도가 빨리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 끝난 제18대 대선을 통해서 극명하게 나타난 문제가 바로 세대간 갈등국면이다. 지역갈등- 이념갈등의 벽을 넘어 세대간의 충돌은 위험수위까지 치닫고 있다. 양보와 타협은 아랑곳 않고 소지역, 소집단 이기주의에 편승한 새로운 문화충돌의 양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영국에서 일어난 'Angry young man'이 젊은이들의 욕구분출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여성시대, 무상보육, 안전한 사회, 행복한 대한민국의 캐치프레이즈도 복지 포퓰리즘을 내새운 한낱 빈 공약에 지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창밖을 내다보며 행복한 100세 인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워낙 많은 미래학자나 전문도서, 교수진들의 입을 빌어 웰빙이니 건강이니 연금이니 등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물론 다 맞는 말이고 나름대로의 일리도 있다. 얼마전 신바람 건강법으로 TV와 라디오 등의 매스컴을 통한 이 시대의 건강 대명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박사분이 고인이 되었다.
뉴스를 접한 저와 우리 집사람은 약간의 충격과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세상만사 밤새 안녕’이란 말도 있지만 허-허-허- 너털웃음으로 다가온 그분이 타계했다니...
그래서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자기 인생의 실제 나이에서 100세까지 장수한다고 가정하면 50세가 반환점이 될 것이다. 실제 나이와 잔여 수명을 합쳐 100세가 되는 공식을 적용해 보자는 얘기다. 다시말하면 실제 나이 56세 되는 사람은 44세의 잔여수명이, 45세는 55세의 잔여수명이 남게 된다.
그래서 잔여수명의 나이에 맞는 사고와 행동의 프레임을 제안하고 싶다. 앞서 말한 56세는 44세의 사고력으로 인생을 살 것이며, 45세는 55세의 인생관을 갖자는 의미이다.
실제 나이 56세가 44세의 보다 젊은 사고의 틀로 무장한다면 얼마나 활기차고 보람된 인생이 될 것이며, 45세는 55세의 보다 원숙한 중년 인생에 걸맞는 소양과 식견으로 무장한다면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매년 이 공식을 대입해 보자. 그러면 실제나이 70세 노인은 실버가 아닌 30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변모될 것이고, 거꾸로 35세의 성년은 65세의 품격있는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갑자기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날 그날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준비하고 실행하여 인생의 금자탑을 쌓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공식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가 한말을 상기해 보자.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이는 습관의 중요성과 함께 인생을 사는 올바른 자세를 설명한 명언중 하나다.
결국 70세 젊은이로 살든, 30대 늙은이로 살든 각자의 인생은 생각과 행동, 습관의 바탕에서 이뤄짐은 당연하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 인생길은 곳곳에 도사린 암초와 고난의 벽을 넘어 순간 순간의 짧은 환희와 성공을 지나가는 고단한 길이지만, 꿈과 희망을 안고 열정을 에너지를 발산하는 자에게는 늘 새로운 길임과 동시에 아름다운 도전의 길이다.
100세 인생,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당신의 길이기에 또한 나의 길이기에 아침단상을 통해 가감없이 적어 봤습니다. 오늘도 지금 이 시간 소중한 하루~ 님의 앞길에 항상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당신이 있기에~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시니어 기자 최재영(kthigh11@naver.com)
△OCJP 국제공인자격 △RABQSA ISO9001 △27001 국제 심사원 △KBS n 리포터△정부3.0 맞춤형서비스 △생활공감정책모니터 용인시 대표 △서울시 인터넷시민감시단 △한국소비자포험 화이트슈머 △금융감독원소비자리포터('금소리') △한국가스안전공사 경영공시모니터 △분수네신문사 칼럼리스트 △직업 특강 & 컨설턴트 △IT 및 보안전문가
빨간색 옷을 입고 장난감 같은 발통이 4개에 무게 100kg, 키는1m인 예쁜 애마를 갖고 있어 나는 행복하다.
이 애마는 나 외엔 아무도 태우지 않고 시장, 은행, 병원, 학교, 봉사활동 등 바깥나들이를 할 때마다 충성스럽게 모시고 다니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랴. 이 애마는 나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5년이 지났다.
몇 년 전, 무릎관절이 아파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어 구입하려 하자 남편은 택시를 타고 다니라며 만류했지만 택시를 타려해도 큰길까지 가야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요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리 불편한 사람용이라 하여 천시하지만 내게 도움이 된다면 남의 이목이 무슨 상관이랴 싶어 용기를 내어 현금160만원에 구입하고 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좁은 시장안도 요리조리 다니면서 30k무게정도는 의자 앞 발판에 싣고 2,3km 되는 집까지 와 주니 참으로 즐겁고 고맙다.
남편의 병간호부터 타계하는 날까지 큰집 살림살이를 하노라 나들이인들 오죽 많은가. 거기에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고 허리협착시술을 했으니 빈 몸으로도 걷기 힘든데 무거운 짐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울울한 기분일 때 그런 나를 항상 현관 앞에서 대령하고 있다가 주인이 가자는 대로 고분고분 나긋나긋 불평 없이 충성을 다한 일등 공신이다. 그런 애마에게 큰 상이라도 주고 싶다. 집에 돌아오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수고했다. 고맙다’ 하며 이불을 덮어주고 쉬라고 한다.
먹을 것이라곤 전기 줄을 콘센트에 꽂고 애마 머리 쪽에 붙어있는 동전만한 입에다 코드를 물리고 4시간정도 있으면 만족하여 10km 이상은 달린다. 음식 값은 한 달 내내 사용해도 택시 한 번 타는 값도 못된다. 운전도 간단하여 오른쪽은 전진, 왼쪽은 후진, 금지손가락 하나로 조종하면 된다. 장애자나 노약자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이렇게 좋은 전동차를 만들어준 분들에게도 늘 감사한다.
처음 왔을 때는 피부가 열여섯 소녀처럼 윤이 나고 예뻤지만 나의 운전 미숙으로 외모에 상처도 입고 몰골이 추하여져서 철 따라 예쁜 옷을 입히고 하얀 시트로 모자도 씌웠다. 주인처럼 다리가 닳아서 두 번이나 바꿔주고, 지난해는 심장인 배터리도 교체했다. 주인이나 애마나 다 같이 늙어가는 몸이어서 항상 조심한 탓에 5년 동안 별 사고는 없었다. 그런데 전주시 남노송동 우리 동네 길은 좁은 2차선 도로인데 신호등 없이 통과하려는 얌체 차들과 길가에 주차한 차들 때문에 사람은 곡예를 하다시피 걷는 거리다.
며칠 전 좁은 길에 질주하는 차가 무서워 긴 골목길을 이용하다 사고를 냈다.
골목 끝에서 공사하는 걸 모르고 들어갔다가 후진, 전진을 몇 번 반복하다 긴장했는지 전진을 한다는 게 후진을 세게 눌렀다. 순간 담벼락에 쾅 부딪히면서 주인을 길바닥으로 사정없이 동댕이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말을 잘 듣던 애마도 주인이 정신이 어리어리해 잠깐 실수를 하니 가차 없이 혼을 냈다. 어처구니없이 당한 나는 한참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겨우 일어나 보니 크게 다치진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애마는 탈이 없었는지 나를 태우고 집으로 왔지만, 나는 갑작스런 충격에 놀라서 며칠이 지나도 가슴이 울렁거리며 어지럽고 안정이 안 되고 온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사람은 상대방이 약간 실수를 해도 양해를 하고 넘어가지만,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계란 것은 한 치라도 어기면 용서나 여유가 없이 무섭게 화를 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사랑하는 애마야! 나에게 큰 교훈을 주어서 고맙다. 앞으론 더욱 조심할게!”
매일 들리는 교통사고 소식에도 우린 불감증이 걸려있다. 내가 당하고 보니 차조심이 아니라 내 자신을 조심해야겠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차도 내가 조종을 잘못하면 그가 내 생명마저 앗아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겠다. 이젠 차 없이는 못산다며 걸어서 10분 내의 거리도 차를 몰고나오니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시내의 비싼 땅 주차장이나 인도에는 낮잠을 자는 자동차들로 가득하다. 자동차에 밀려 사람들은 변두리 산 밑으로 닭장 같은 집을 지어 나가 살면서 자꾸 차만 늘린다. 몇 년 뒤엔 어찌될지 염려스럽다.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켜 자동차의 노예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글쓴이 (79세)
전북 전주시 완산구 마당재길 14-26 (남노송동 141-8)
국내 최초 여성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인 고(故) 홍은원 영화감독의 딸이자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했던 이희재 문헌정보학과 교수의 유족이 숙명여대에 3억원을 기부했다.
숙명여대는 지난해 9월 타계한 이 명예교수의 유족이 발전기금 3억원과 홍 감독의 작품 저작권 수입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전달했다고 14일 밝혔다.
이 명예교수의 동생 이인재 MBC 국장은 지난 10일 숙명여대에서 열린 발전기금 전달식에서 황선혜 총장에게 기부금을 전달하며 “생전 고인의 평생 소원이던 문헌학 연구의 발전과 후학양성을 위해 소중히 사용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기부금은 고인의 제자인 문헌정보학과 학생들을 위한 전공 강의실 건립과 장학기금 조성에 쓰일 예정이다.
유족 측은 또 이 교수의 어머니인 홍 감독이 작사한 영화 ‘백치 아다다’의 주제곡 등 일부 곡들의 저작권 수입료도 학교 측에 귀속해 홍은원 영상자료관의 운영 및 DB관리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희재 교수는 합동통신사 기자와 청주대 도서관학과 교수를 거쳐 1983년부터 숙명여대에 재직했다. 2003년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훈장 슈발리에를 수여받았으며 2012년엔 교육부장관상을 받았다.
또 국립중앙도서관 자문위원을 역임(2008~2012년)한 그는 숙명여대 재직 당시 1억6000만원이 넘는 발전기금을 기탁하는 등 평소 숙명여대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