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자를 이용한 측자(測字) 파자(破字) 수수께끼부터 풀어봅시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한자로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답은 壬子(임자)입니다. 壬을 파자하면 千一이 됩니다. 子는 한밤중[夜]인데 1001일 동안 밤에 이야기하면 곧 千一夜話(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가 되지요. 톨스토이의 ‘부활’은 復活이 아니라 甦(소)라고 쓰면 더 재미있습니다. 한 글자에 갱생(更生)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잠이 깨다, 다시 살아나다, 이런 뜻이 있는 글자입니다.
이번엔 거꾸로 물어, 四季如春(사계여춘)이 무슨 말일까요? 1년은 네 계절[四季]로 되어 있고 봄은 새싹이 푸르게[靑] 자라는 계절인데 늘 봄과 같다니 얼마나 좋을까? 사계여춘은 청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늘봄이라고 아호를 지은 분도 있던데, 그만큼 청춘은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청춘이라면 생각나는 게 소설가 우보(牛步) 민태원(閔泰瑗·1894~1935)의 ‘청춘예찬’입니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던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한 헌사였습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우보는 청춘이 갖춰야 할 것은 끓는 피와도 같은 열정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고은은 이 글을 읽었을 때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듣고, 그 어떤 바윗덩이도 굴리며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힘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류의 중요한 문화유산은 청춘의 열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청춘과 사랑 자체를 주제로 한 것들이 많습니다. 청춘에 대한 생각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청춘은 아름다워라’, 이 제목에 다 들어 있습니다. 청춘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아리고 아쉬운 것입니다. 청춘이라는 말을 들으면 joyful이라는 영어단어가 늘 생각납니다. ‘기뻐하는, 즐거움을 주는’ 이런 뜻인데 젊음의 낭만과 장난, 유희, 용서될 수 있는 실수라는 의미도 함께 갖춘 말처럼 느껴집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 중 세 번째 곡은 ‘청춘에 대하여’(Von der Jugend)입니다. 말러가 ‘편안하고 명랑하게’ 부르라고 한 이 곡은 어느 한가로운 날 작은 연못 한가운데 있는 정자에서 잡담하는 젊은이들을 묘사한 시를 가볍고 산뜻한 악상으로 들려줍니다. 늘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고 ‘어느 갠 날 아침 갑자기’ 온몸을 바칠 만한 사랑이 올 것 같은 예감과 충동 속에 약동하는 청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청춘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거나 생명을 잃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단가 ‘사철가’를 봅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이 노래는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늙어진 계수나무 그 끄트머리에다 대란 매달아놓고, 무법도식하는 놈과 부모 불효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앉아 한잔 더 묵소, 덜 묵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라고 끝납니다.
청춘은 다시 오기 어려우니 즐겁게 마시며 놀아야 할 시기입니다.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리는 게 청춘이라니 그대로 있을 수 없지요. 중국에는 무슨 무슨 춘이라는 술이 많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마신 술을 꼽아보면 대춘(大春) 석동춘(石東春) 부영춘(富永春) 약하춘(若下春) 죽엽춘(竹葉春) 이화춘(梨花春) 등 많기도 합니다. 이 술을 마시면 젊어진다, 젊음이 유지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청춘을 버린다는 뜻인 포청춘(?靑春)은 역설적으로 청춘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술의 대명사입니다. 고산 윤선도는 “산골에 갇힌 뒤부터/길고 긴 한낮이 늘 지겹구나/포춘을 무슨 수로 이어갈까/근매의 옛 다짐이 부끄럽네”[自我囚山後 常嫌白日遲 抛春何計繼 勤買愧前期]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여기 나온 포춘이 곧 포청춘입니다. 勤買는 부지런히 술을 사서 마신다는 뜻으로 당송 팔대가 중 하나인 한유(韓愈)의 시 ‘감춘’(感春)에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석양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는 노래대로 다시 못 올 청춘을 술로 배웅하며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라고 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었던 것, 그러나 이제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젊음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모르지는 않지만 어쨌든 청춘과의 작별은 아쉽고 슬픈 일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귀양살이의 여덟 가지 흥취’[遷居八趣]라는 시에서 “실버들 천 가지 만 가지/가지마다 모두 청춘/그 가지들 봄비에 젖으면/가지가지 사람 괴롭게 하네”[楊柳千萬絲 絲絲得靑春 絲絲霑好雨 絲絲惱殺人]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여덟 가지 흥취 중 맨 마지막 ‘버들을 찾는 것’[隨柳]인데, 반복되는 말 絲絲(사사)에 청청한 버드나무와 자신을 비교하는 다산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 ‘병원’에는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가 만난 그 의사가 그런지 몰라도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이의 병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 병을 겪었고, 어떤 형태로든 이기고 살아 오늘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들이야말로 나이든 이들의 병을 모릅니다.
나는 1973년 신문사 입사시험을 칠 때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연년세세화상사 세세연년인부동)을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 사람은 매년 달라져 가는구나’라고 풀었습니다. 해석문제는 풀었지만 그 문제를 낸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했습니다.
청춘은 세대 간 이해와 공감의 바탕이며 원천입니다. 자신의 청춘은 물론 남의 청춘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입니다. 아울러 지금 청춘들의 처지와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춘이 힘겹지 않은 적은 어느 시대에도 없었지만 요즘 청춘은 특히 가엾기 그지없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겠습니까?
1910년 5월 29일에 태어나 2007년 5월 25일에 타계한 금아(琴兒) 피천득선생은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썼습니다. 왜 하필 스물한 살일까? 사랑의 고통 때문에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가서 모래밭에 몇 자 써놓은 뒤 죽지 않고 돌아온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금아는 ‘밝고 맑고 순결한 5월은 지금 가고 있다’고 썼지만, 나는 ‘밝고 맑고 순결한 청춘의 달 5월이 왔다’라고 글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