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아이를 키우는 할머니, 임산부, 한부모가정 아이, 독거노인 등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복합 공간 ‘마더센터’를 운영한다. 고립되기 쉬운 주민들을 위한 공용 공간을 마련해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고, 서로 품앗이 육아를 실천한다. 국내에도 독일을 참고한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독일 마더센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전반적인 시설 관리 및 운영, 각종 프로그램 진행은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봉사로 이뤄진다. 봉사자들은 ‘누구나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재능과 장점을 센터에 기여하려 한다. 노인이 아이에게 옛 노래를 기타로 연주해주거나, 은퇴한 간호사가 의료 정보를 공유한다. 손주를 키우는 할아버지, 미혼모 등 센터를 찾은 다양한 양육자들은 공용 공간에 모여 서로 육아 정보를 나누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국내에도 독일 마더센터를 참고해 우리 사회에 맞게 변모한 ‘한국형 마더센터’들이 있다. 바로 서울 관악구 행복마을 마더센터,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다.
한국 사회에 발맞춘 마더센터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는 2013년 여성단체 춘천여성회에 의해 설립됐다. 육아에 대한 고민과 정보를 나누는 ‘소통의 장’이다. 양육자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사도 여러 차례 진행했다. 최근에는 ‘우리봄내동동’ 사업을 통해 마을의 아이와 어른이 한데 어울려 더욱 끈끈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생활 기반을 공유하는 주민들의 필요와 욕구, 역량을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아이를 둔 엄마들로 시작된 모임이지만 아빠, 할머니, 주변 이웃으로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행복마을 마더센터는 2017년 개소했다. 박명희 행복마을마더센터협동조합 이사장에 따르면 과거 신림동은 서울 지역 중 비교적 집값이 저렴해 신혼부부나 사회 초년생이 많이 거주했다. 높은 인구 밀집도에 비해 아이를 위한 문화 공간이 부족하다는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비영리단체 회원들이 힘을 모았다.
카페 시설 운영을 중심으로, 시에서 지원하는 마을공동체 사업이나 공동육아지원 사업 등에 지원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카페에는 아이들을 위한 책, 트램펄린 시설, 주민들이 기부한 장난감과 놀이기구가 비치돼 있다. 요일별로 열리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은 아이들은 기본, 양육자라면 대부분 1만 원 이하의 가격으로 수강할 수 있다. 아이를 동반한 어른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가족들은 아이 성장 발달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을 주고받기도 한다.
모두가 함께하는 열린 공간
마더센터는 일반 키즈카페나 실내 놀이터와는 다르다. 우선 민간 시설보다 가격이 저렴하다. 더불어 센터를 찾은 양육자들이 단순히 공간과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한다. ‘내 아이’와 ‘우리 엄마’가 시설을 이용하는 형태가 아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요리한 음식을 나눠 먹고, 손뼉 치며 등을 맞대는 등 체조를 한다. 구성원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자연스레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한다.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수업 이후에도 마더센터에서 운영하는 네이버 밴드, 다음 카페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서로 고충을 나누고 육아 물품을 무료로 나눈다. 실제로 마더센터는 아이와 양육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다만 한국형 마더센터를 어떻게 모델화하고 자리 잡아갈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 마더센터가 꾸준히 회자됐지만 그 이상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박명희 이사장은 “한국도 육아종합지원센터를 비롯해 각 지자체가 저출산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관련 기관을 운영하고 있어, 독일이 훨씬 선진화돼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며 “대신 한국은 서로 다른 기관이 각개전투하는 느낌이 있어 민·관의 협력 형태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가족관계 변화, 인식 개선도 필요해
우리나라는 나이에 맞춰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 간다. 보육 시설과 교육 과정이 마련돼 있어도 부모의 경제 활동으로 인해 돌봄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은 6시지만, 엄마 아빠가 초과근무를 하느라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없는 경우가 그 예다. 비용이 부담스러워 다른 민간 시설에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보통 그 공백을 조부모가 메운다. 기관과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내 아이는 우리 가족이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육아 부담이 가중된다면 조부모로 주 양육자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는 전문가도 있다. 게다가 현대 사회로 올수록 혼인과 혈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는 점점 옛말이 됐다. 입양 가정, 재혼 가정, 조손 가정, 한부모가정 등 기준이 모호해졌다.
이선미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 이사장은 “과거에는 여성에게 육아 책임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엄마들을 중심으로 단체를 만들었지만, 요즘은 가족의 형태가 많이 다양해졌다”며 “독일과 같이 마더센터에 오는 사람들의 범위를 엄마로만 한정해놓고 있진 않으니 부담 없이 찾아오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어 “마더센터에서 ‘내 가족’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제2의 가족’을 만나 지역사회의 화합을 이룰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 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4부작 |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
본지는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출산 고령화 시대 황혼육아 문제 해법 제시를 위한 특별 기획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를 4개월에 걸쳐 연재로 발행합니다. 제1부 '서베이로 본 황혼육아 현주소', 제2부 'K-황혼육아 정책 어디까지 왔나?', 제3부 '독일ㆍ영국 황혼육아 선진 사례', 제4부 '금빛 황혼육아로 가는 길' 순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해당 기사는 오프라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온라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조부모의 양육은 ‘비공식 돌봄’의 일환으로 거론된다. 보육시설처럼 공식적인 돌봄이 아니기에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가족 차원의 보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조부모에게 용돈을 주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황혼육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증대되며 이러한 보상책 역시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현지 취재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부모 육아 참여의 주된 이유와 목적은 ‘자녀의 유급 노동 참여’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맞벌이 부부에 대한 정책이나 여성의 일·가정 양립을 위한 지원책 등은 직·간접적으로 황혼육아와 연관성을 지닌다. 가령 최근 서울시에서 발표한 ‘조부모 돌봄수당 지급 계획안’ 역시 ‘엄마아빠 행복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에 대해 긍정적 반응이 많았지만, 한편으론 ‘조부모 돌봄수당보다는 시설 투자, 육아휴직 개선 등의 방법으로 부부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대상이 조부모일 뿐, 이 역시 일하는 부모를 위한 지원책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부모나 아이를 위한 혜택일지라도, 조부모의 노고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 마련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보육시설 확대에도 조부모 도움은 여전히
독일연방인구연구소와 독일경제연구소의 프로젝트 보고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묻다’에 따르면, 최근 20여 년간 독일에서 보육시설 증대에도 조부모의 육아 정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해당 조사에서 독일 미취학 아동 10명 중 9명은 보육시설에 다니지만 그중 절반가량은 조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정황에도 독일 역시 조부모를 대상으로 한 수당 정책은 따로 없다.
대신 일하는 조부모가 부모의 육아휴직을 대신 쓸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는 굉장히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 사용 가능하다. 부모(조부모의 자녀) 중 한 명이 미성년자이거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훈련 중에 있는 경우(견습생)와 더불어 ‘부모 모두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신청할 수 있다. 또한 조부모의 경우 유급 노동 활동을 하고 있어야 하며, 손주와 같은 집에 사는 상태라야 한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해당 정책을 잘 모르거나 조건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구 조건이 까다롭다기보다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최근 여성의 출산 연령이 높아지고, 대부분 가정이 조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최근 조사에서 독일 미성년 손주의 7%만이 조부모와 동거)을 감안하면 해당 정책을 쓸 수 있는 가정은 극소수다.
독일 연방 및 주정부 가족정책을 연구·지원하는 ‘라벤스버거 베를라그’ 재단 요하네스 하우엔슈타인 이사는 “돌봄 정책 마련을 위한 기존 연구들을 살펴보면, 부모와 어린이집 이외에 조부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며 “현재의 정책들은 보육시설 및 서비스 확대 또는 부모를 위한 수당 편성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맞벌이 부부의 경우 보육시설 확대와 무관하게 조부모의 도움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가족경제의 관점에서 조부모의 비공식 돌봄 환경을 인지한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손주 픽업 교통비 세금 감면 가능해
핵가족이 만연한 독일 사회에서 대체로 가까운 지역에 사는 조부모의 지원이 많긴 하지만, 장거리 황혼육아를 소화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조부모는 오며 가며 들이는 교통비를 암묵적으로 자신의 노후 자금에서 충당할 것이다. 독일은 편도 지하철 요금이 4000~5000원 정도로 한국의 3배가 넘는다. 교통비 역시 쌓이면 적지 않은 노후 자금 리스크로 작용한다. 독일 뉘른베르크 재무법원 판결에 따르면, 조부모의 교통비를 부모(조부모의 자녀)가 상환하면 이 금액은 연말정산 시 특별 비용에 대한 세금 공제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최대 연간 4000유로(약 562만 원)를 청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부모와 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날짜를 명시한 일정한 보육 계약에 서명해야 한다. 이때 손주의 나이는 14세 미만이어야 하며, 교통비 상환은 현금이 아닌 은행 송금을 원칙으로 한다.
손주 보고 연금 올리고, 윈윈 황혼육아
영국 국민연금 수령 연령은 66세다. 2016년 4월을 기점으로, 이전까지는 30년 이상 국민보험(NI)에 가입했다면 주당 141.85파운드(약 23만 원)의 연금을 받았다. 이후 새로운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보험 가입 기간이 35년으로 늘어났다. 수령액은 주당 185.15파운드(약 31만 원)다.
만약 직장 생활 대신 손주를 돌봄으로써 연금 기여 기간을 늘릴 수 있다면? 이러한 아이디어는 영국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국민연금 수령 연령 이전에 12세 미만의 자녀를 돌보는 조부모라면, 황혼육아 기간을 ‘연금 크레디트’로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전화나 영상을 통해 손주를 돌본 경우까지 인정했다. 보험 그룹 로열 런던(Royal London)이 입수한 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 1만 5000명의 조부모가 이러한 제도의 혜택을 누렸다.
이에 대해 이성희 영국 더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사실 이 제도는 정부가 지원금을 추가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차일드 베네핏을 연금 크레디트로 전환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으로 예를 든다면 아동수당을 조부모수당으로 전환하는 격이다. 이 교수는 “가족 내에서 누구에게 혜택을 돌릴 것이냐의 문제다. 이 또한 나라가 아닌 가정에 부담을 지운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으로 부정 수급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주목한다. 정책적으로 수당을 지급하려면 엄격한 모니터링과 증빙이 필요한데, 추가 혜택이 아닌 셈이라 굳이 속임수를 쓰며 신청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영국 조부모 육아휴직
영국 정부 조사에 따르면 약 200만 명의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휴가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2015)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는 “조부모가 유연하게 근무하도록 육아휴직 공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추진하려던 바에 따르면 조부모는 18주의 무급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해당 안은 점차 무산되고 말았다. 다만 영국 정부의 ‘가족 및 피부양자를 위한 휴가’ 제도에 따라 조부모는 손주가 아프거나, 어린이집 휴원으로 돌봄 공백 등이 생겼을 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 외에도 영국 사회는 조부모의 유급 휴가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특히 기업에서도 사내 복지책으로 내놓는 등 황혼육아의 고충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가령 시니어 대상 여행·보험 전문 기업인 사가(Saga)는 50세 이상 조부모 직원들의 손주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일주일의 유급 휴가를 제공하며, 직장 어린이집 이용을 장려한다. 이 교수는 “과거에 정책적으로 논의되었던 점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조부모 육아휴직을 환영하고 인정하는 분위기 덕분에, 영국에서는 차후 실제 정책으로 도입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내다봤다.
| 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4부작 |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
본지는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출산 고령화 시대 황혼육아 문제 해법 제시를 위한 특별 기획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를 4개월에 걸쳐 연재로 발행합니다. 제1부 '서베이로 본 황혼육아 현주소', 제2부 'K-황혼육아 정책 어디까지 왔나?', 제3부 '독일ㆍ영국 황혼육아 선진 사례', 제4부 '금빛 황혼육아로 가는 길' 순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해당 기사는 오프라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온라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보육시설의 단위나 지원책은 나라마다 다르다. 공통점은 공보육만으로는 맞벌이 부부의 일·가정 양립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독박육아를 하든, 어린이집을 보내든, 시터를 이용하든, 결국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 또한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하나의 육아 돌봄 퍼즐을 맞추기 위해, 저마다 빈 조각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와 무관하게 조부모는 유연하게 빈틈을 메워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과 더불어 독일 및 영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럽 조부모 육아 단편들을 살펴봤다.
현지 취재=독일 뮌헨·베를린, 영국 런던
런던 킹스칼리지 노인학 연구소(이하 노인학 연구소)가 발표한 ‘유럽 집중조부모 보육의 국가적 차이’에 대한 논문에 따르면, 유럽 11개국 할머니의 58%와 할아버지의 49%는 16세 미만 손주를 한 명 이상 돌본다. 논문 제목의 ‘집중조부모’(Intensive Grandparental Childcare)란 거의 매일 또는 일주일에 최소 15시간 이상 손주 한 명 이상을 돌본 조부모를 뜻한다. 평균적으로 주 3회 이상, 하루 평균 7시간 가까이 황혼육아에 가담하는 한국 조부모(본지 통계자료) 역시 집중조부모에 해당한다.
최근 독일경제연구소가 조부모를 대상으로 진행한 리포트에 따르면, 6세 미만의 독일 어린이 중 약 50%가 주당 8시간가량 조부모의 돌봄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영국의 경우 50세 이상 조부모 10명 중 9명(89%)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손주를 돌봤으며, 절반 이상이 일주일에 3일 이상 황혼육아에 참여하고 있었다(Age UK 통계자료). 한국과 비교할 때 육아의 양이나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영국 조부모 역시 ‘맞벌이 자녀’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 조부모는 본인의 독립된 삶을 유지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고, 자율적으로 시간을 운용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황혼육아에 대한 긍정적 효과에도 기여했다. 영국·독일 조부모들의 상황과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사례를 유형별로 담아봤다.
맞벌이 지원형
“맞벌이 딸 도우려 시작한 황혼육아, 이젠 내 일상의 활력소”
평일 오후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헬레나 씨는 오전에는 손주를 보기 위해 딸의 집으로 향한다. 맞벌이 딸네 부부를 돕기 위함이다. 이들 부부는 유연근무를 통해 육아 공백을 최소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시간가량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비싼 비용을 감당하며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려던 차, 할머니 헬레나 씨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녀는 무료한 일상을 손주와 함께 보내며 가족을 도울 수 있어, 황혼육아와 함께하는 노후에 만족을 표한다. - 60대 헬레나 씨(가명)
노인학 연구소 ELSA(English Longitudinal Study of Aging) 연구 데이터에 따르면, 영국 조부모의 64%가 자녀(손주의 부모)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황혼육아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복수응답). 절반이 넘는 조부모가 자신의 젊음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 응답하기도 했다. 아울러 4명 중 1명은 가족의 재정 상태를 돕기 위해, 5명 중 1명은 가족 돌봄을 선호(양육시설이나 시터 등 외부 조력자에 비해)하기 때문에 손주를 직접 돌보고 있었다. 한편 자녀가 손주 양육을 부탁했을 때 거절하기 어렵다는 반응은 20% 정도로, 대체로 자신의 삶과 의지에 따라 황혼육아를 결정하는 모습이다.
여가 지향형
“케어보다는 즐거움을 나누는 황혼육아”
세무사 출신인 캐롤라인 씨는 은퇴 후 수령하는 풍족한 연금으로 여행을 즐긴다. 그녀에겐 두 살, 다섯 살 손주들이 있는데 종종 자녀로부터 육아를 부탁받는다. 순전히 자신의 기쁨을 위해 황혼육아를 선택했다는 캐롤라인 씨는 손주와 함께하며 단순히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등의 보육에 그치기보다는 함께 여가를 즐기고 추억을 만들고자 한다. 그녀는 자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종종 자신의 여행 스케줄에 손주들을 참여시키며 긍정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 70세 캐롤라인 씨
노인학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 조부모의 경우 손주와의 시간을 대체로 여가로 즐겼다(80%). 조부모와의 여가 활동 경험은 손주의 인지력과 상상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아울러 조부모가 매일 보육 위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와 비교해, 간헐적으로 색다른 경험을 제공했을 때 손주들은 여가 지향적인 이미지로 조부모를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손주들은 조부모를 친구 또는 관대한 존재로 여겨, 장차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면서 조언자나 롤모델로 조부모를 찾게 된다.
물질 지원형
“직접 보육 아닌 금전적 방식이라도 황혼육아에 동참하고 싶다”
바그너 씨는 손주들을 만날 때면 꼬박꼬박 용돈을 주고 생일이 아니더라도 장난감이나 교구 등을 선물로 사가는 편이다. 노후 자금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은 그는 손주들을 위한 지출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얻는다고 표현한다. - 70세 바그너 씨(가명)
바이에른주는 독일 전 지역에서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특히 많은 곳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자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며 유급 노동 활동에 적극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때문에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반면, 손주와의 만남이 어렵다. 물질적 지원으로나마 손주 육아에 기여하고자 하는 조부모가 많은 이유다.
Dr.Says
“코로나로 중단된 황혼육아, 삶의 활력 잃은 英 조부모”
- UCL 역학 및 공중보건 연구소 조르지오 디 게사 박사
팬데믹 시기, 영국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력했다. 이로 인해 조부모의 손주 돌봄이 불가능해지면서 맞벌이 부부가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여성 단체 ‘프레그넌트 덴 스크류드’의 조사 결과 46%의 여성이 코로나 시기에 직장을 잃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이유로 공보육시설의 폐쇄와 더불어 비공식 돌봄 조력자였던 조부모의 육아 부재를 꼽았다. 한편 고충을 겪은 건 맞벌이 부부만이 아니었다. UCL(Uiniversity College London)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동안 손주 돌보기를 중단한 조부모는 계속 황혼육아에 참여한 이들에 비해 우울 증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손주를 돌보지 못한 조부모의 3분의 1 이상(34.3%)이 슬픔을 느끼거나 불면증을 호소하는 등 높은 수준의 우울 증상을 보고했다. 아울러 일상의 질 또한 떨어졌다고 응답했다. 이는 영국 조부모들이 그동안 손주 돌보는 과정을 통해 느꼈던 정서적 만족과 스스로에 대한 유용성, 유능함이 결여되며 일어난 현상으로 읽힌다. 이렇듯 조부모의 육아 참여는 그들의 삶에도 가치와 애착을 제공하며, 이로써 정신 건강 및 세대 관계 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율적 선택형
“선택적 도움은 가능하다. 그러나 늘 손주 돌봄을 위해 대기하진 않는다”
활동적인 삶을 사는 노이만 씨는 10대 손주 셋을 간헐적으로 돌본다. 노이만 씨 부인이 음식을 만들면 그는 차를 몰고 손주의 집으로 가 함께 식사를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돕거나 학원 등에 데려다준다. 물론 이러한 돌봄은 노이만 씨가 허락하는 날에만 선택적으로 가능하다. 그는 조부모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독립적인 삶 또한 중요하기에 무조건적인 희생은 거부하는 편이다. - 83세 노이만 씨
독일청소년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독일 황혼육아 당사자들은 조부모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율성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수치상으로는 93.3%의 조부모가 자율적으로 손주 돌봄에 가담하고 있다고 답했다. 최근 본지 조사에서 한국 조부모의 72.2%가 비자발적으로 황혼육아를 시작했다고 반응한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다.
독일청소년연구소 알렉산드라 랑마이어 박사는 “조사를 통해 살펴본 결과 독일 조부모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경험하는 자율성과 이에 대한 기쁨은 높게 나타났다. 조부모의 82%는 자신의 역할을 즐기는 동시에 노후에 제약을 느끼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응답했다. 한편 조부모로서의 기쁨이 거의 없다고 말한 비율은 4%에 불과했다”며 “아이 돌봄을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의 자기 결정권과 상호 존중은 가족관계 성공에 기여한다.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며 황혼육아에 가담했을 때 조부모와 손주 관계의 질 역시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독일 조부모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황혼육아 스케줄을 컨트롤할 수 있길 원한다. 이들은 비자발적인 의무나 책임보다는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스스로를 필요한 존재라 느끼며 자긍심을 채운다. 이러한 과정은 노후 정신 건강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일자리 우선형 & 장거리 케어형
“일 때문에 손주 못 봐 속상해. 장거리 황혼육아 하는 남편조차 부러워”
남편 슈나이더 씨는 은퇴 후 정해진 요일마다 딸의 자녀를 양육한다. 딸의 집까지는 100km 정도 거리로, 기차로 두 시간 걸린다. 그는 자녀 부부가 귀가할 때까지 유치원과 학교에서 돌아온 손주들을 보살피다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아내는 이러한 고된 스케줄마저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럽다고 말한다. 그녀는 현재 풀타임으로 근무 중이라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60대 슈나이더 부부
최근 독일경제연구소 연구 조사에 따르면, 독일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조부모의 육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조부모의 고용 상태’와 ‘거주지 간 거리’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실제 현지 취재에서 만난 몇몇 조부모들은 “노후 자금을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손주를 볼 여력이 없다”, “자녀가 너무 멀리 살아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독일경제연구소 마라 바르슈케트 연구원은 “한 국가 안에서도 지역마다 황혼육아에 대한 빈도나 형태는 상이하다”며 “특히 독일은 동독과 서독의 차이도 극명하다. 동독은 서독에 비해 노인과 여성 등 모든 계층에서 전반적인 고용률이 높다. 때문에 맞벌이 부부 입장에서 조부모의 손길이 필요하지만, 조부모 역시 고용 상태인 경우가 많아 직접적인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같은 조사에서 손주의 집까지 거리가 10분 내외인 사람들 중 32%는 정기적인 육아에 참여하고 있었다. 거주지 간 거리가 황혼육아 빈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테다. 주목할 점은 3시간 이상 거리에 떨어져 사는 경우에도 약 8%의 조부모가 정기적으로 손주를 돌본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라도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 경우라면 자녀 입장에서 다행스럽지만, 일반적인 사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뮌헨시 등 몇몇 지역에서는 마더센터 등을 매개로 독거노인과 맞벌이 가정의 아이를 연결하는 등 대안적 조부모 도움을 제공하는 방식을 독려하기도 한다.
Dr.Says
“황혼육아는 육아의 우선책도 차선책도 아니다”
- 독일경제연구소 마라 바르슈케트 연구원
보육시설의 효용성이 높은 국가의 경우 조부모 돌봄에 덜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럼에도 현대사회에서 황혼육아는 필수 요소로 기능한다. 최근 독일 정부 산하 연방인구연구소와 2년여간 조부모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황혼육아는 육아의 보완재 역할로 바라봐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단일 공보육을 이용하는 경우에 비해 조부모 돌봄을 병행하는 경우 워킹맘의 업무 효율성이 크게 나타난다. 아울러 부모 세대는 조부모의 도움을 받을 때 자신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만족도가 올라간다고 보고했다. 다만 이러한 황혼육아의 장점을 누리기 위해 노후의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몇몇 부모의 경우 조부모의 육아 참여를 당연시 여기거나, 당사자의 의견과는 별개로 도움을 강요한다. 그러나 아이 돌봄의 우선 책임은 어디까지나 (아이의) ‘부모’에게 있다. 그 다음 차선책은 국가와 사회가 마련한 보육시설과 서비스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부모의 참여는 이러한 기본 토대가 마련된 뒤에 큰 부담 없이 더해지는 ‘보완책’으로 작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모는 조부모의 웰빙을 고려한 자율성을 존중하고, 조부모 또한 주체적으로 황혼육아를 결정하고 자신의 노후를 슬기롭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 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4부작 |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
본지는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출산 고령화 시대 황혼육아 문제 해법 제시를 위한 특별 기획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를 4개월에 걸쳐 연재로 발행합니다. 제1부 '서베이로 본 황혼육아 현주소', 제2부 'K-황혼육아 정책 어디까지 왔나?', 제3부 '독일ㆍ영국 황혼육아 선진 사례', 제4부 '금빛 황혼육아로 가는 길' 순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해당 기사는 오프라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온라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유니버설 디자인 하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화장실·보행길을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에도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다.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철학 때문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전문가인 구유리 홍익대학교 서비스 디자인학과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서비스 디자인’이란 서비스 제공자와 사용자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해 총체적인 과정과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서비스 디자인의 주요 대상이 장애인·노약자 등 사회적 약자라고 한다면, 이는 유니버설 디자인이 될 수 있다.
구 교수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디자인 철학을 새롭게 깨우쳤다. 디자인이란 미적·상업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구 교수의 디자인 철학은 자연스럽게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연결됐다.
“저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학문이 아닌 철학으로 접근했어요. 그리고 그 철학에 접근하는 저의 스킬이 서비스 디자인이란 거죠. 제가 유니버설 디자인을 그냥 학문으로 접근했다면 형식적으로 생각했을 것 같아요. 유니버설 디자인의 원칙을 지키는 정답의 디자인, 전형적인 타입의 디자인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사용자를 관찰하고 니즈에 맞게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제가 관심을 갖고 많이 만난 사용자가 유니버설 디자인에서 메이저 대상으로 바라보는 장애인과 노약자였던 거죠.”
유니버설 디자인을 말하다
구유리 교수는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하나 보여줬다. 담장 너머의 축구 경기를 보려고 하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경기를 보기 힘든 상황.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담장을 낮추는 방법도 있지만, 더 나아가 아예 담을 없애고 펜스를 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구유리 교수는 “유니버설 디자인은 형평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누군가는 노인에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노인이 겪는 불편함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다. 노인 입장에서 볼 때 형평성과 평등은 배려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니버설 디자인에 편견을 갖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 느끼기에는 손해 보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심미적인 아름다움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구 교수는 “굉장히 좁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개념에서 시작했지만, 사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애가 없다 하더라도 길을 잘 못 찾는 사람도 있고, 정보 습득이 느린 사람도 있죠. 노인이 되면 그런 요소가 많아지고 눈에 두드러지는 거고요. 그래서 노인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다 보면 모두가 편리하고 포용성 넓은 디자인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니버설 디자인이 요즘에는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 편한 디자인으로 바뀌고 있고, 정의도 이용자 중심의 디자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구유리 교수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념 자체를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장애 시설뿐만 아니라 작은 변화도 유니버설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구 교수가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2020’에서 본상을 수상한 ‘스트레스프리 지하철을 위한 서비스 경험 디자인’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구유리 교수는 시민들이 겪는 지하철 스트레스를 조사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솔루션을 적용했다. 2·4·5호선이 모여 있어 복잡한 역사 내에 환승 구간 천장, 바닥, 벽면에 각 노선별 컬러로 화살표를 그렸다. 또한 혼잡 구간임을 알리는 스크린 도어 그림, 개찰구 근처의 ‘카드를 준비하라’는 메시지 등을 직관적으로 디자인해 시민들의 편의를 높였다. 실제로 디자인 적용 이후 시민들이 헤매는 시간이 65%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구유리 교수는 최근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과 함께 두경부암 환자를 위한 도움 책을 만들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구 교수는 두경부암 환자들과 의사들을 직접 만나 통증, 수술 과정, 재활 과정까지 파악한 후 책을 만들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활용하고 글을 줄였다. 또한 다양한 색으로 각 파트를 분리하고 집중도를 높였다.
“두경부암 환자는 노인이 많은데, 수술을 하면 말을 하기 힘들어지니까 의사소통이 더욱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의사와 환자가 의사소통이 필요한 부분을 시각화해서 만들었죠. 유니버설 디자인 원칙 중에서도 노인분들에게는 직관적인 이해, 정보의 접근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적용했습니다. 이처럼 유니버설 디자인은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스마트 도시를 꿈꾸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은 비용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해 건물이나 시설을 만들려면 복잡한 계획 수립 과정을 거쳐야 하고, 공사 기간은 두 배로 길어진다. 구유리 교수는 “처음 도시계획을 할 때부터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면 비용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면서 “우리나라는 현재 무장애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전환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유리 교수는 완성형 도시의 형태인 ‘스마트 시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스마트 시티 시대가 열리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형의 유니버설 디자인이 중요해진다고 짚었다. 구 교수는 “디자이너에게는 어떤 서비스를 설계할 것이냐가 제2의 과제가 된다”고 덧붙였다.
“장애인이나 휠체어를 탄 분들은 보통 이동성의 제약이 많죠. 그런데 단순히 턱이 없어진다고 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스스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안전한 경로는 무엇인지, 그리고 만남의 장소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어야 하죠. 이렇게 무형의 서비스를 통해 유니버설 디자인에 접근하는 시도가 늘어날 거예요. 건축, 환경, 인프라, 서비스 등 모든 부분에 유니버설 디자인의 철학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유리 교수는 지난해 국립재활원의 의뢰를 받아 미래 도시의 노인과 장애인의 삶을 설계한 바 있다. 구 교수는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노인 4명의 캐릭터를 만들어 각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설계, 디자인했다. 많은 대상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니즈를 반영했는데, 현재의 기술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시나리오가 제시됐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스마트 글라스가 필요하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었죠. 스마트 글라스는 AR(증강현실) 기술을 적용한 것인데, 길 안내도 해주고 위험한 상황도 감지해 알려주죠. 혼자서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도 알려주고요. 기술자분들이 보기에는 이미 기술이 나와 있으니 대단한 얘기가 아닐 거예요. 그런데 사용자는 뭐가 있는지,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니즈 파악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구유리 교수는 디자이너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다. 그는 기술과 정책을 이어주는 동시에 그것들이 실현되고 상용화될 수 있도록 한다. 구 교수는 “완성도가 낮지 않고 설득이 가능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 콘셉트만 존재한 채 정책화되지 않거나 공감받지 못하는 디자인은 사용자의 삶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서 “사회 서비스 정책과 사용자의 삶의 경험이 최대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최근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고 정책적인 지원도 확산되고 있죠. 이 기회에 유니버설 디자인이 단순히 무장애 디자인이 아니라 사용자의 니즈와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다양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그 개념이 확산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유니버설 디자인의 철학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하나예요. 그래야 우리 사회가 매우 포용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자생의료재단과 현대해상화재보험이 저소득층 아동들의 척추 건강을 위한 사회공헌기금 전달식을 9일 개최했다. 서울 강남구 자생한방병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행사에서 현대해상화재보험은 저소득층 아동들의 척추·관절 건강관리를 위한 사회공헌기금 5000만 원을 자생의료재단에 기탁했다.
전달된 사회공헌기금은 자생의료재단이 추진 중인 ‘아동척추건강지킴이 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아동척추 건강지킴이 사업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동들을 위해 척추 건강 운동 프로그램과 직업 체험 프로그램, 의료지원을 병행하는 사회공헌활동으로 지난 201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생의료재단은 이번 사회공헌기금 전달이 의료기관과 보험사가 협력해 진행된 사회공헌활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신민식 자생의료재단 사회공헌위원장은 “환자 권익 보호를 위해 시작된 양 기관의 협력이 발전적인 결과로 이어져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이번 전달식이 좋은 선례가 되도록 현대해상화재보험의 사회공헌기금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유용하게 사용해 관련 업계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5월 자생한방병원과 현대해상화재보험은 교통사고 악용 보험범죄 근절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정기 협의체를 운영하는 등 협력 체제를 유지 중이다. 이를 통해 양 기관은 교통사고 보험범죄에 따른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 감축과 환자 권익 보호에 힘쓰고 있다.
고령소비자 금융피해 방지를 위한 전략과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시니어금융소비자보호 포럼”이 11월 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포럼은 고령 금융 소비자의 금융 피해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과 대응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와 금융과행복네트워크가 주관하고 윤영덕ㆍ민병덕 국회의원실이 주최했다.
지난 9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는 18%에 달한다. 2025년에는 고령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사회의 고령화로 인해 금융을 이용하는 고령층의 비중이 자연히 늘고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금융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디지털에 취약한 고령층의 금융 피해는 계속해서 늘고 있다.
2021년 60대 이상의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은 약 612억 원, 피해 건수는 1만 2천 건에 달한다. 이는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의 약 41%에 해당한다. 2022년 상반기 피해 건수도 8600여 건을 넘어가며 전체의 약 57%를 차지하고 있다.
윤덕홍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은 “초고령 사회로 들어가기 전 노인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노인 금융 피해와 관련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도 구체적인 자료와 정책이 없는 상황”이라면서 “여러 기관이 힘을 모아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번 포럼이 선진국형 노인 금융 피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은경 금융감독원 부원장은 "금융 사기뿐 아니라 고령층에 대한 경제적 학대, 금융 착취, 금융상품 불완전 판매 등 다양한 유형의 금융 피해 위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면서 "고령층을 보호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맞춤형 교육을 강화하는 등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금융감독원은 고령층 보호제도 현황 실태조사와 법령 개정 방향에 관한 업계 의견 수렴, 고령자 친화적 모바일 금융 앱 구성 지침 마련, 고령층 맞춤형 교재 동영상 콘텐츠 제작 및 현장 교육 등으로 고령 금융 소비자 보호를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전적 예방 가장 중요한 ‘금융 착취’
금융 착취가 일어나는 이유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노인 부양 부담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되면 인지 능력이 저하되고, 금융 자산 비중은 늘지만 스스로 자산을 관리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디지털 정보 격차가 커지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이 많아지면서 노인 학대가 늘어나고 있다.
노인의 경제적 착취나 학대 피해가 일어날 경우 사회적 추가 지출은 연간 약 6750억 원(영국의 연구 결과)에 달한다. 게다가 금융착취는 회복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으므로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따라서 금융 착취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국가별로 다르다. 부모의 역할에 대한 사회 관점, 부모 재산에 대한 자녀 권리 인식 등이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금융 착취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아직 금융 착취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이에 자신이 금융 착취를 당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포럼에서 “고령자 금융 착취 예방 전략과 실행 방안” 주제 발표를 맡은 정운영 금융과행복네트워크 의장은 금융 착취 예방을 강조하며 시스템 구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의장은 “노인의 경제적 학대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을 때, 이 내용을 바탕으로 금융권에 어떤 지침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노인 피해의 상당 부분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금융 착취 자체에 대한 실태 조사는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금융 착취의 범위와 개념을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잘 정의해서 법과 행정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착취는 간호인이나 시설 관계자 등에 의해 많이 발생할 것 같지만, 우리나라는 7~80%가 배우자나 자녀에 의해 발생한다. 기초생활수급 지원금이나 연금을 대신 관리해준다며 통장과 도장을 가져가 동의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주택을 자산으로써 활용할 수 없도록 제지하는 등의 사례도 있다.
하지만 부모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다는 인식, 부모의 재산이 곧 자녀의 재산이라는 생각이 강해 실질적 신고는 많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실제 금융 착취에 관한 조사나 통계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고령자 금융 착취를 민형사상의 문제로 취급하며, 별도의 규제를 만들었다. 자율적이긴 하지만 금융 관계자에게 적용되는 강제적 신고 의무 등을 제안하는 가이드라인도 있다.
정 의장은 “경제적 학대, 금융 착취는 앞으로 우리 삶을 얼마나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와 연결되는 부분”이라며 “금융 착취를 당하면 절망감과 우울감에 빠져 일상으로의 회복이 몹시 어렵고, 이를 돌보기 위한 사회적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예방이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금융기관에서의 적극적인 신고 의무 등을 반영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률 간의 연계가 잘 돼야 금융 착취 대응 체계가 잘 이뤄진다”면서 “무엇보다 현황을 파악하고 연구하는 지원 강화, 금융 착취 예방을 위한 상담이나 교육 센터 마련 등의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신고제와 같은 방법으로는 금융 착취의 조기 발견이 어려운 만큼, 적극적으로 금융 당국에서 표준화된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협력하며, 고령자 스스로도 이를 방지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국가들의 공통 과제 '고령자 금융 피해 예방'
우리나라는 2020년 금융 당국이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 외에도 ‘고령 금융소비자보호를 위한 금융소비자 보호법(이하 금소법) 개정안’ 등 여러 법안이 진행중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고령 금융 소비자의 피해에 관한 현황이나 실태 조사 등이 이뤄지고 있지 않아 법을 만드는데 있어 기준이나 범위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고령화를 겪고 있는 글로벌 국가의 공통적인 과제다. 미국이나 영국 등의 나라도 고령 소비자의 금융 피해에 관련해 법이나 가이드라인 등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미국은 2011년부터 금융 관련 범죄 중 고령층에 대한 금융 착취 의심 활동을 보고하도록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꽤 오랜 시간 관련 제도를 순차적으로 수립해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금융 사기의 경우는 대응에 관한 명확한 제도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금융 사기를 방지할 수 있는 기술을 활용한 고령 친화 서비스 제공, 이에 대한 임직원 교육, 의심 거래 발생 시 관련 당국으로의 보고 권고 등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영국의 경우 고령자 금융 착취 관련 금융 기관의 신고 의무는 없다. 나이로 구분하기보다는 인지 능력, 건강 상태 등의 취약성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고령층에 국한한 것은 아니지만, 금융 학대와 금융 지급 수단을 이용한 금융 억제를 예방하기 위해 대형 금융사 중심으로 자율 규제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포럼에서 “고령자 금융피해 유형 및 피해방지를 위한 쟁점과 대응방안” 발표를 맡은 이규복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여러 국가에서 마련되고 있는 제도의 핵심 쟁점을 여섯 가지로 꼽았다.
▲금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심 금융 거래를 보고하도록 할 것인가 ▲보고를 넘어 관련 기관에 신고하도록 할 것인가 ▲당사자나 관련인에게 이 내용을 통지하도록 할 것인가 ▲국민의 동의가 없더라도 자산 보호 조치를 위하기 위한 이체 지연 등의 권한을 줄 것인가 ▲이런 일을 해야 할 금융기관 직원에게 면책권을 줄 것인가 ▲의무를 다하지 않은 기관에 과태료 등의 제재 수단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다.
이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경우 금융 착취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아직까지는 금융기관이 이를 통제할 권한을 가질 경우 분쟁의 소지가 많다”면서 “고령 피해자의 경우 대면 거래에서 파악되는 경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금융기관 직원에게 부여될 면책이 굉장히 중요한 이슈이며, 면책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관련 기관이나 피해자에게 이뤄지는 통지, 이체 지연이라는 권한, 직원 면책 부분이 하나의 패키지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며 “다만 이를 자유 형식으로 할 것인지, 강제적으로 진행할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가족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신고 의무를 적용하는 것은 새로운 측면일 수 있다”면서도 우리나라는 아직 피해 고령층을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지 살펴볼 만큼의 연구가 되어있지 않아 법제화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따라서 법으로 보호할 영역이 금융회사를 통한 거래만을 포함할 것인지, 금융 피해에 금융 학대나 금융 사기까지도 포함할 것인지, 법을 개별적으로 만들 것인지 금소법 개정안에 포함할 것인지 등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 많다고 당부했다.
영국의 경우 금융 학대와 금융 사기를 구분해서 접근하고 있으며, 미국은 금융 사기에 대해서는 보호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연구위원은 “피해 사례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피해 현황을 식별하는 작업을 우선할지, 광범위한 기준으로 법제화를 먼저 한 뒤 자료를 모을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면서 “다양한 내용을 다각도로 고민해 고령층의 금융 피해를 효율적으로 억제해나갈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일상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유니버설 디자인은 사회적 약자, 그중에서도 특히 고령자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까. 김진유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교수와 함께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금천구 G밸리, 동작구 스페이스 살림 일대를 탐방해봤다.
김진유 교수는 도시계획 전문가로서 유니버설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김 교수는 “요즘 세계적으로 지향하는 도시계획 방향은 인클루시브(Inclusive) 시티, 즉 포용 도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포용 도시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소득, 신체, 지식 등과 상관없이 도시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줘야 한다는 것이다”라면서 “포용 도시가 되면 장애인, 임산부, 노인 등 사회적 약자한테만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혜택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김진유 교수는 그 예로 저상버스를 언급했다. 장애인을 위해 저상버스가 도입됐지만, 실제로 장애인이 이용하는 비율은 0.1%라고 한다. 이용률 99.9%를 차지하는 비장애인은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저상버스를 선호한다. 김 교수는 “그래서 유니버설 디자인이 도입되면 우리 모두가 혜택을 보는 것”이라며 “우리가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설계하고 포용적인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니버설 디자인 중 특히 노인을 위한 디자인은 무엇일까. 김진유 교수는 “노인은 많이 걷거나 계단이 많으면 힘들어한다”면서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같이 대중교통을 바로 이용할 수 있게 조정하거나 설계하는 것을 유니버설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노인분들은 손에 힘이 없지 않나. 적은 힘으로도 열리는 문이나 자동문이 좋다. 또한 영어로만 된 간판은 노인분들이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큰 글씨의 한글 중심 간판을 추천한다. 더 좋은 것은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심벌형 간판이다”라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의 ‘M’은 멀리서도 보이는데, 이와 같은 심벌형 간판이나 안내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유니버설 디자인은 왜 확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김진유 교수는 “아무래도 건축비나 운영비가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라고 짚었다. 김 교수는 “그런데 가정을 해보자. 돈을 아껴 건물을 지었는데, 노인이나 장애인이 그곳 시설을 이용하다가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되면 사회적으로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했다.
이어 “이게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인 비용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도입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플러스가 될 수 있다”면서 “지자체에서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등의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G밸리 2·3단지
곡선형 도로
“보행로 사이에 있는 도로길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만들었죠. 이것을 트래픽 카밍(Traffic Calming)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구조물에 의한 교통 통제라는 뜻인데, 도로를 곡선으로 만들면 아무래도 차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사고가 줄어들죠. 그리고 차도와 인도를 잇는 돌을 연석이라고 하는데, 연석의 턱이 없고 보행로와 높이가 같죠. 노인분들의 보행이 편하실 겁니다.”
고원식 횡단보도
“방지턱처럼 높이를 높여서 만든 횡단보도를 고원식 횡단보도라고 합니다. 횡단보도를 높이면서 연석과 수평을 이루었죠. 보통의 횡단보도는 노인분들이 이용하려면 계단을 내려가듯 아래로 내려갔다가 건너서는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해요. 다리가 아픈 노인분들에게는 힘든 과정이죠. 그런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유니버설 디자인입니다.”
턱 없는 출입문
“출입문에 턱이 없어야 휠체어를 탄 노약자분들의 이용이 편해지죠. G밸리 내의 건물은 모두 턱이 없네요. 특히 지반을 높여 길과 출입문이 수평을 이루게 해둔 곳도 있네요.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많은 휴식 공간
“길 중간중간 의자가 많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네요. 노인분들한테는 걷다가도 앉아 있을 공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곳에 있는 손잡이 의자는 앉고 일어설 때 의지할 게 필요한 노인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스페이스 살림
대중교통, 건물과의 연결성
“도시계획에서는 내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외부와의 연결도 매우 중요해요. 스페이스 살림은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죠. 이런 것은 노약자분들이 이용하시기에 굉장히 유용해요.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경우 옆 건물로 가려면 내려갔다 올라가는 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 불편함이 많이 줄어든 거죠. 그리고 여기는 길이 직각으로 되어 있어서 방향성이 명확한 것도 장점이에요. 길이 사선이나 미로처럼 되어 있으면 노약자분들이 길을 잃기 쉽거든요.”
노약자 위한 손잡이
“건물 전체에 출입문 턱을 없애서 노약자분들의 보행이 편하도록 했네요. 더불어 출입문에 있는 손잡이 봉을 보면 매우 긴데요. 이 역시 유니버설 디자인입니다. 보통의 짧은 손잡이와 달리 이렇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길게 만든 이유는 키가 작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도 봉을 쉽게 잡도록 한 거예요. 같은 이유로 보행길과 계단에 핸드 레일을 낮은 위치에 설치해놓았죠. 무엇보다 노인분들은 경사가 있는 길에서 낙상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데 레일을 잡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어요.”
경사도 낮은 길
“요즘은 계단 옆에 휠체어를 타고도 이동이 쉽게 경사로를 마련해두죠. 휠체어가 이동하려면 경사도가 완만한 것이 좋아요. 일반적으로는 경사도가 매우 가파른 곳이 많은데, 이곳은 세심한 배려를 기울인 것을 알 수 있죠.”
동반 화장실
“스페이스 살림에는 남녀 화장실 외에 동반 화장실이 따로 있네요. 장애인분이나 어르신 같은 경우 화장실에서 혼자 일을 보기가 힘들어요. 옷을 내려준다든지, 뒤처리를 해주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동반 화장실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은 노약자분들을 많이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벌 안내판
“유니버설 디자인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나 외국인, 눈이 어두운 사람도 시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책, 지하철 모양 같은 심벌로 간판을 하거나, 화살표로 방향을 알려주면 글을 몰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유니버설 디자인은 색깔도 중요해요. 색깔로 구분해놓으면 길을 찾기가 더 쉬워집니다.”
장애인 주차장
“주차장에서 장애인 주차 구역이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네요. 차에서 내려 바로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거예요. 제가 계속 강조하듯이 이동 거리를 줄인 거죠. 여기도 마찬가지로 턱이 없고 문을 열어두어 휠체어를 타고도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했습니다.”
김진유 교수 경기대학교 스마트시티공학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다.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년간 국내외 주택과 부동산 정책, 도시계획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전세’, ‘주거복지, 갈 길을 묻다(공저)’, ‘미래를 바꾸는 도시계획(공저)’ 등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 혹은 배우가 한국 땅을 밟기 위해서는 성우 배한성(78)의 목소리를 거쳐야 했다. 가제트나 맥가이버, 콜롬보 외에도 영화 ‘아마데우스’(1985)의 모차르트, ‘대부’ 3부작의 주연 배우 알 파치노, 배우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레드포드, 성룡 등. 1966년 동양방송(TBC) 2기 공채 성우로 데뷔한 그는 목소리로 시대를 제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에서 듣던 것과 똑같다고요? 그러면 출연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름 석 자만으로 생김새를 떠올리고, 대표적인 대사까지 읊을 수 있는 성우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목소리가 곧 명함인 성우 중 배한성은 독보적이다. 가제트, 맥가이버, 형사 콜롬보. 세대에 따라 기억하는 목소리는 다르지만 모두 배한성 성우가 소화해 새롭게 탄생시킨 배역들이다. 성우로 활약한 시간만 어언 56년이지만, 그는 추억 속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여전히 재치 있고 엉뚱했다.
‘타고난 배우’의 철학
그가 애니메이션과 외화 판을 호령하던 시절에는 제작사 측에서 직접 성우들을 만나곤 했다. 성우의 연기와 원작의 결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성공적으로 더빙 작업을 거쳐 방영할 수 있었다. 제작사가 특히 신경 쓰는 작품은 감독이 직접 찾아와 성우의 연기를 듣고 판단하기도 했다. 외국인 감독이 까탈스럽게 구는 경우가 많아 더빙 자체를 포기하는 성우도 더러 있었다. 애니메이션 ‘컴퓨터 형사 가제트’(1987)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그는 나름대로 연구한 코맹맹이 목소리의 가제트를 감독 앞에서 선보였다. 결과는 불합격. ‘가제트 형사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당신과 가제트 형사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통역사한테 잘 전해달라고 부탁하고서 감독에게 말했어요. ‘프랑스 말은 한국어와 어감이 다르다. 프랑스어의 뭉실뭉실한 어감만을 살리기 위해 부드러운 말씨로 연기한다면 가제트라는 인물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요. 감독이 잠자코 듣더니 연기를 다시 해보라고 하더군요. 준비해온 연기를 다시 하니까 그제야 ‘당신의 연기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라면서 OK 사인을 줬어요. 그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감독이 한마디 하더군요. ‘You are born to be an actor.’(당신은 타고난 배우군요.)”
감독의 지시, 원작에 구현된 인물만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에 따라 연기할 줄도 알아야 함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이었으며 영화배우를 꿈꿨던 그로서는 칭찬이 남다르게 느껴졌을 터. 더불어 애니메이션이 국민적 인기를 얻으면서 세대를 불문하고 만능 로봇팔을 꺼내던 가제트의 목소리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최애’(가장 애정하는) 인물은 동양방송(TBC)에서 방영한 ‘야망의 계절’(1978)과 ‘태양의 계절’(1979)의 주인공 루디 조다쉬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떠올리는 작품이나 인물은 아니다.
고개를 갸웃할 수 있으나 그로서는 명분이 충분하다. 데뷔 후 장편 영화 시리즈의 주연을 처음 맡은 작품으로,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기 때문. 게다가 소설가 강유일의 한줄평은 신인 성우의 심금을 울렸다. ‘보통의 외국 영화들은 더빙 성우가 외국 배우의 덕을 보는데, ‘야망의 계절’과 ‘태양의 계절’은 피터 스트라우스(루디 조다쉬 역)가 배한성의 더빙 덕을 봤다.’ 그 뒤로도 몇십 년째 성우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이상 가슴 뛰고 뿌듯한 평가를 받아본 적은 없단다. 수많은 배역 중 루디 조다쉬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음성에 뿌듯함이 묻어났다.
어수룩한 코맹맹이 형사(드라마 ‘형사 콜롬보’)부터 기괴한 웃음소리의 천재 음악가(영화 ‘아마데우스’), 가업을 멀리하려다 결국 비정한 대부가 되어버리는 남자(영화 ‘대부’), 무저항 독립운동으로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는 간디(영화 ‘간디’)까지. 이외에도 특별히 애정하는 배역 하나를 꼽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작품을 소화해냈다. 그는 이 모든 역할을 다 다르게 연기해냈다고 자부한다. 당연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임하는 성우는 흔치 않다. 그런 그를 보며 친구들은 ‘배한성은 예나 지금이나 배극성이다. 아직도 극성을 떤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란다.
“가제트는 가제트대로,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베토벤은 또 베토벤대로 다르게 연기를 해야 해요. 배우는 같아도 다른 영화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면 그에 맞게 새로운 목소리를 내야 하고요. 모니터링을 하고 계속 연구해야 하니 사실 나 스스로는 좀 고단했지요. 하지만 이만큼 다양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잖아요. 더빙이 단순한 녹음이 아니라 대중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면 책임감을 갖고 임할 수밖에 없지요.”
‘배극성’의 더러운 대본과 골동품
흥미와 목표를 향한 ‘극성’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돈이 없어도 담치기를 해서 초등학생 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57)를 세 번이나 봤을 정도다. 장래 희망을 영화배우에서 성우로 수정한 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성우 시험을 봤다. 고졸자 이상만 응시할 수 있어 육촌 형 졸업장까지 빌렸다고.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기 그지없는 행동인데, 당시의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채 시험장에 들어섰다. 불합격 통지서를 받는 바람에 크게 실망했지만, 성우를 향한 열정을 해치기엔 역부족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어요. 당시엔 데모도 많고 거리에 대자보나 성명서가 많이 붙어 있었는데, 지나가다 벽보에서 ‘목소리 성’(聲) 자만 봐도 성우 생각이 나서 미친놈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지요. 아직도 후배들에게 ‘성우 일을 하려면 이 정도로 미쳐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저 말고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뛸 정도로 미쳐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네요.”
그가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성우라는 일 자체에 미쳐서 살았던 성우 배한성을 대변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영화 더빙을 앞두면 영화 원본 테이프와 대본을 미리 받아와 눈이 빠지도록 봤다. 인물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잡아내 대본에 적어두기 위함이다. 어찌나 메모를 많이 했던지 방송가에선 배한성의 대본이 더럽기로 유명할 정도였다.
당시 번역 작가가 적은 외화 대본에는 대사만 적혀 있을 뿐, 주인공이 어떤 표정으로 무슨 행동을 하며 대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반면 그의 연기에는 주인공이 애인을 기다리며 동동거리는 발끝, 고민할 때마다 입맛 다시는 습관 같은 작은 요소들이 녹아 있다. 지저분한 대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국인 배우 속에 한국인이 들어앉은 것 같다’는 호평을 듣는 비결이다.
그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데에는 취미도 한몫 거든다. 고미술품, 고가구나 올드카를 수집하면서 빚어진 미적 감각이 연기의 디테일을 살리는 데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노년에 친구로 두면 좋은 직업인 중 하나로 골동품 수집가를 꼽습니다. 미적 감각이 살아나니 삶이 풍부해져서 지루하지 않고 좋다는 거죠. 저 역시 오래전부터 골동품에 관심을 갖고 수집한 덕에 연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급스러운 배역, 고급 배우의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심미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둘 다 중년 남성이라도 동네 아저씨나 한 나라의 수상 혹은 왕족을 연기할 때는 분명 다르게 표현해야 하지 않겠어요?”
즐거운 빚을 갚기 위하여
요즘 그는 일주일에 두어 번 녹음을 한다. 그 외에 들어오는 제안은 최대한 후배들에게 넘기는 편이다. 이제는 나이가 있고, 한창 활동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스케줄이 적으니 한가하게 사는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외부 강연도 쉬지 않고 나가고, 건강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틈틈이 책을 읽는다.
기존에 하던 경영 공부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일시 정지된 상태다.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지만 이제 그는 새로운 걸 벌이는 대신 벌여놓은 것을 잘 정리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그중 하나는 ‘우리말 더빙 법제화’다. 한국성우협회의 이연희 이사장이 물꼬를 튼 것인데, 인터뷰한 당일 저녁에도 송도영, 송도순 등 유명 원로 성우와 관련 미팅 일정이 잡혀 있을 만큼 활발히 논의 중이다. 성우들 주머니만 채우겠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요즘은 영화를 수입해도 제작비를 줄이려고 번역 자막만 달아요. 자막 작업이 성우를 고용해서 더빙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드니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눈으로 보는 대신 귀로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시각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노화로 인해 시력이 나빠졌을 수도 있지요. 시각장애인에 노인 인구까지 합치면 그 수가 천만 명은 된다고 해요. 그래서 영상 콘텐츠를 만들 때는 더빙도 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기 위해 대한노인협회나 시각장애인연합회와 논의하고 있습니다. 성우로서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방법이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는 ‘언해피’한 시대를 살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선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성우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혜택을 누린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의 전성기는 라디오 드라마와 TV 외화 시리즈가 일반인이 누릴 수 있는 오락거리의 전부였던 시절과 겹친다. 남다른 노력과 재능이 없었다면 지금의 스타 성우 배한성도 없었겠지만, 오디오 콘텐츠가 수많은 오락거리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 오늘날에 비하면 좋은 시절을 누린 것도 맞다. 후배들의 앞날과 성우라는 직업의 미래를 위해, 그는 마음에 진 ‘즐거운 빚’을 갚고 있다.
배한성 성우는 예나 지금이나 지루하게 멍때리는 시간이 아깝고, 틈날 때마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한다. 외부 강연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은 바를 알려주기도 한다. 역시나 메모해뒀던 글귀를 자주 활용하는데, 노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老인도, no인도 아닌 know인이 되겠다’는 문구를 꼭 인용한다. 그러면서 나이가 든다고 해서 머리나 몸을 편하게 두지 말고 계속 공부하며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의 생애 내내 그러했듯, 솔선수범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다짐이자 조언이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한 제자가 ‘이제는 나이를 먹었으니 쉬엄쉬엄 사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데 결승점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천천히 가거나 멈추면 되겠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젊을 때처럼 신기록을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생산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매사 고민하고 공부하며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 아닐까요?”
유니버설 디자인은 우리 일상 곳곳에 녹아 있다. K-커피로 불리며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믹스커피가 그 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믹스커피를 흘리지 않고 뜯으려면 가위가 필요했다. 이제는 이지컷(Easy Cut) 선을 따라 뜯기만 하면 된다. 손가락 힘이 없어도, 가위가 없어도 누구든 쉽게 뜯을 수 있다. 그저 뜯기만해도 하루가 달달하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성별, 연령, 국적, 신체 조건, 장애 유무 등의 차이가 상관없도록 설계한 디자인이다. 다른 사람의 배려나 도움 없이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인의 체력, 이동 능력, 인지 능력 등을 고려해 반영한다. 다양성을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의미다.
접근성 높이는 유니버설 디자인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다문화가정으로 육아 주체가 다양해진 점을 꼽을 수 있다.
최근 공공기관에는 육아편의공간에 대한 민원이 증가하고 있다. 남자화장실 내에 기저귀 교환대가 없어 불편하다거나 수유실에 남자가 들어갈 수 없어 아빠가 주 양육자인 경우 이용이 어렵고, 엄마도 필요할 때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불편하다는 등의 민원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는 인구에서 가장 많은 구성원 혹은 건장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디자인한 것들이 많다. 경제성장 시대에 빠르게 많이 공급하기 위한 표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대수명 연장으로 고령 인구가 늘었고, 다문화가정도 많아졌다. 사회 구성원이 다양해지면서 ‘사람’을 중심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최령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장은 “유니버설 디자인의 목표는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보다 안전하고 편리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통 우리는 ‘약자’라는 개념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 때문에 ‘약자‘도’ 편리하게’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양성의 영역으로 생각한다. 최 센터장은 “우리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면서 “결국 사회적 비용을 크게 낮추는 역할을 하는 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고령화를 겪고 있는 많은 나라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도입은 필연적이다. 공공기관은 모든 국민의 접근성을 높일 의무가 있다. 공공시설이나 서비스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앞장서서 적용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공공기관의 모든 웹사이트에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념을 담고 있는 웹접근성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 일본은 2018년 ‘유니버설 사회 실현을 위한 시책의 종합적 일체적인 추진법’을 제정했다. 모든 국민이 장애 유무나 나이에 관계없이 기본적 인권을 향유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법에 담았다. 우리나라는 2022년 1월 유니버설 디자인 기본 법안이 처음 발의되었고,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행정안전부에서는 공공청사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도록, 로널드 메이스 교수가 처음 만든 개념을 기반으로 한 ‘유니버설 디자인 7가지 원칙’을 안내하고 있다.
△누구든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접근과 사용이 가능한 크기와 공간을 확보한다 △적은 신체 활동으로도 사용 가능하도록 한다 △오작동에 대한 대응을 통해 안전한 사용을 유도한다 △사용자의 환경에 맞는 유연성을 확보한다 △쉽고 이해 가능한 간결한 사용법을 마련한다 △사용자의 상황에 관계없이 알기 쉬운 정보를 제공한다는 원칙은 유니버설 디자인이 필요한 사회 곳곳에 적용할 수 있다.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필요한 디자인
이 디자인을 통해 불편함을 가장 많이 해소할 수 있는 이들은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우리나라는 2025년 인구의 20%가 65세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고령자의 낙상 사고를 예방하고, 이동성을 높인다. 이동이 편리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활동하게 되니 건강해지고,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서적 문제에도 도움이 된다. 살던 동네에서 친구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살아온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이들의 바람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계단 난간에 설치된 안전바가 스테인리스일 경우 한여름에는 뜨거워 손을 델 수도 있다. 한겨울 영하 1℃ 이하 날씨에 얼어붙은 안전바를 급하게 잡으면 위험을 유발할 수도 있다. 노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바 겉부분을 목재나 플라스틱으로 마감하도록 권장한다.
노화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는 고령자들은 샤워실과 세면실이 투명 유리로 분리된 화장실에서 유리벽을 구분하지 못한다. 화장실에서 잦은 부딪힘으로 멍이 생기고 낙상 사고가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경우 거울과 유리벽 테두리를 액자처럼 표현하거나, 바닥과 벽면의 색을 다르게 구분하거나, 세면대와 변기 같은 위생기기 색상을 다르게 하는 등 컬러 유니버설 디자인(CUD)을 적용하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인도와 도로 사이의 턱 높이도 안전과 직결된다. 휠체어 이용자, 유아차 이용자, 보행보조기 이용자 등 바퀴 달린 이동수단을 사용하는 이들의 사고 원인이 되곤 한다. 자동차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려고 인도와 도로의 높낮이 차이를 줄인 기울어진 인도 역시 보행자가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구조다. 도로의 횡단보도를 높인 고원식 횡단보도는 이런 안전 문제를 고려해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한 사례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및 이동수단이 장애물 없이 지나갈 수 있고, 도로에서는 방지턱 역할을 해 횡단보도 앞에서 차량이 속도를 줄이는 효과도 낼 수 있다. 요양원이나 실버타운에서도 공간과 공간 사이 바닥의 턱을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향후 무인 로봇이 돌아다닐 미래를 생각할 때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20년 정도 유니버설 디자인 도입이 늦다”며 “어떤 식으로 디자인해야 할지 방법도 필요성도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고령 사회에서 가장 많은 유니버설 디자인 수혜자는 고령자분들이기 때문에,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다”면서 “앞으로 직접 느낀 불편함을 창의적인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니어 전문가가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책은 누군가에게 부족했던 영감을 주고, 뜻밖의 인연이 닿게끔 돕기도 한다. 삼성전자 재직 시절부터 퇴직 후 지금까지 희귀 광물을 수집해온 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도 마찬가지다. 책을 통해 고인 생각을 정리하고, 지구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초석을 다듬었다. 또한 직접 펴낸 책 ‘광물, 그 호기심의 문을 열다’로 독자들과 만나며 수집과 연구에 대한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약 150평 규모의 민자연사연구소에는 다양한 빛과 보기 드문 기하학적 형태의 희귀 광물이 전시돼 있다. 이 남다른 3000여 점의 ‘돌덩이’들은 이지섭 소장이 40년 넘는 시간 동안 직접 모은 소중한 예술품이다. 멕시코, 케냐, 페루, 콩고, 모로코 등 원산지도 다양하다. 2010년 개장 이후 광물자원공사 임직원, 고려대학교 지구과학 전공학부 대학원생, 국립과학관 관계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LED 빛을 받고 있는 그의 수집품들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남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이 소장은 삼성전자에 36년간 몸담으며 대한민국 기업의 신화를 함께 쓴 인물이다. 흑백 TV를 만들던 때부터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겪었다. “삼성전자에서 새로 개발한 전자레인지의 품질 관리를 위해 미팅을 다녔습니다. 기획과 설계, 개발만 기업이 진행하고 협력업체가 생산하는 방식이긴 했지만,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한 제품이었어요. 좋은 품질 덕에 세계적 기업들의 수요가 높아 수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저는 해외 출장이 잦았죠. 그러던 중 1981년 우연히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들렀는데, 살면서 보지 못했던 희귀 원석과 광물이 가득하더군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돌 부자’가 된 삼성맨
금속공학을 전공했기에 원석과 광물을 책으로는 자주 봐왔던 그였다. 하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돌들을 직접 보니 완전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가난하던 어릴 적 냇가에서 반짝이는 돌을 주워 모으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길로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나와 인근 기념품점에서 60달러를 주고 ‘쌍둥이 눈사람’ 모양의 마노(석영과 옥수가 혼합된 보석)를 샀다. 그 후로도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짬이 날 때마다 광물 시장이나 광산 인근 지방에서 표본을 구했다. 가벼운 산책길에서도 작은 돌, 바위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원석 수집에 사용했어요. 적지 않은 비용 탓에 아내와 마찰도 있었죠. 하지만 제가 퇴근 후 집에서 원석을 보고 미소 짓는 걸 보더니 아내도 이해해주더라고요. 지금은 아내와 자녀들도 원석 수집을 돕고 있어요. 수집품 중 일부는 아내와 가족들이 사서 선물로 준 것입니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더 심도 깊은 취미활동을 위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물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 전국 방방곡곡의 각종 소모임이나 연구 단체를 꾸준히 찾았고, 관련 서적을 수십 권 독파했다. 광물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직접 표현해보기 위해 그림도 배웠다. 민자연사연구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모든 전시물에 대한 역사와 과학적인 유래를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기 위함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자연과학에 대한 투자나 관심이 부족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자연과학은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의 안내 책자에는 건축에 사용된 재료에 대한 설명이 면밀히 적혀 있습니다. 웬만한 과학 교과서보다 훌륭하더군요. 내부의 예술품들을 보기 전 외관의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광물은 그 무엇보다 인간의 역사와 생활에 밀접한 대상이거든요.”
미국 혹은 유럽처럼 대중이 지구과학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설명이다. “우선 접근성을 높여 사람들이 다양한 광물을 접할 수 있도록 250개의 표본을 모두 모았어요. 아름다운 원석을 보면 ‘신기한 빛깔과 결정 모양은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걸까?’ 궁금해하고,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도 늘어날 테니까요.”
‘격물치지’ 위한 광물 이야기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으로 젊은 시절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가로 알려졌지만, 광물학 연구에도 상당히 힘썼다. 지질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소설이나 영화로 널리 알려진 ‘폼페이 최후의 날’ 들끓던 베수비오 화산을 네 번이나 등반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소장 역시 어릴 적부터 동네의 유명한 ‘알고잽이’였다. 뭐든 알고 싶어 한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보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본 다음 날이면 그것을 줍겠다며 아침 일찍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그와 괴테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다름 아닌 호기심과 그에 따른 행동력이었다.
이 소장은 제대로 된 환경만 만들어주면 한국에도 괴테가 많이 탄생할 것이라 힘줘 말했다. “꿈은 박물관에서 자랍니다.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수집의 세계로 뛰어든 저처럼 말이죠. 학생들의 질문에 시달린 지구과학 선생님이나 꼬마 광물 박사의 성화에 연구소로 오는 부모님들을 보면 내심 뿌듯하기도 해요. 광물을 눈에 담으면서 설명을 듣는 것은 사진으로만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것이 계기가 되든 간에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확실해요.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지만, 길가의 흔한 돌에도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신비가 켜켜이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생각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책
by 이지섭
돌의 사전 (야하기 치하루 저)
“긴 세월 돌과 인류는 항상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이 돌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이 책은 광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견됐는지, 어떤 성분으로 이뤄졌는지, 또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돌이 만들어지고 순환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어요. 특히 리엘가, 쿤자이트와 같이 연관성을 유추하기 어려운 돌 이름에 얽힌 신화와 전설은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너무 학술적이지 않아 광물과 원석, 보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지구 이야기 (로버트 M. 헤이즌 저)
“카네기연구소 산하 지구물리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시각으로 우리 행성이 수없이 반복해온 일들을 설명합니다. 원자 수준의 변화들이 어떻게 지구 구조의 극적인 전환들로 번역되는지 생생하게 그려낸 거죠. 사실 무수히 많은 돌은 인류 이전, 지구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됐어요. 빅뱅 이후 원시 광물의 탄생, 태양과 지구의 형성 등 총체적인 우주의 역사를 이해하면 오늘날 광물의 가치가 더 특별하게 다가올 겁니다.”
광물, 그 호기심의 문을 열다 (이지섭 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쉽게 광물을 접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쓴 책이에요. 시중에 나온 책은 대부분 저자의 소장품 도록이 주된 내용이거나, 깊이 있는 전문 서적이었거든요.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죠. 광물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게끔 여행에서 만난 광물들, 그에 관련한 경험담을 많이 풀어냈어요.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재밌잖아요.”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
“광물 하나에만 집중하기보다, 관련된 다른 현상을 함께 바라보며 복합적인 시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괴테인데요. ‘이탈리아 기행’은 그가 1786년 9월부터 1788년 6월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지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엮은 책입니다. 괴테는 자연환경, 사회, 그리고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어요. 특히 식물학, 기상학, 지질학, 광물학, 색채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연결성을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설정하며 세심한 관찰 기록을 남겼죠.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서 겉으로만 알던 지식을 직접 보았을 때의 진실한 기쁨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