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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병진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보유자
- “자신을 비운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이듯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됩니다.” 50여 년 ‘외길 인생’에 값하는 사유의 언어로 ‘전통 짜맞춤’을 설명하는 소병진(蘇秉辰·68) 씨. 1960년대 중반, 가난 때문에 학교 공부도 포기한 그는 열다섯 살에 가구공방에 들어가 ‘농방쟁이’ 목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맥이 끊긴 조선시대의 가구 전주장을 재현해내고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작업대 위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과였다. 전북 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6월 4일까지 열렸던 2018한옥박람회에서 ‘전통예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가 잡힌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속 시간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출품한 가구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그가 나타났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잠을 잤다고 털어놨을 때 아직 건강한 그의 시절이 반가웠다. “좀 더 일찍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에서 펄펄 날고 있는 선수처럼 보였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 건강한 거 같아요. 가구를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서로 끼워 맞추는 게 짜맞춤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를 써야 하니까 치매 예방에 좋지, 온몸을 움직여야 하니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시간도 잘 가지, 정서적으로도 좋지, 성취감도 있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요.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전통문화는 미래산업의 최후 승부처’라고 했잖아요. 곧 시니어에게 짜맞춤이 최고의 직업이 되지 않을까 전망해봅니다.” 실제로 완주에 있는 그의 교육관에는 퇴직자들이 꽤 온다. 대부분 취미로 배우지만 제2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청년들도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부가가치를 내다보고 적극 지원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통 짜맞춤 기법은 총 45가지인데 지금은 5가지밖에 안 가르쳐요. 돈 내고 그걸 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교육생들에게 손 연마(수공구 연마)만 시키면 지루해합니다. 빨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6개월이면 사방탁자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기술자가 되려면 눈을 감고도 나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음매를 딱딱 때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맞춤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구를 배울 때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면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공부할 젊은이들이 과연 있을까요. 정부가 전통문화를 짊어질 이수자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소목장 기술 ‘농방쟁이’. 과거에는 가구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가 소목장이 된 인연은 5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매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직업을 잃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다섯 살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젓갈장사 등을 하며 7남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슨 기술이든 배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채 8촌 형을 따라 들어간 곳이 ‘전주 중앙가구’ 목공부 소목반. 그곳에서 운명처럼 전통 소목 기술자 이해민 명장을 만나 사사한다. 어린 소병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알 정도로 눈썰미가 남달랐다. 남들은 10년 넘게 배우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통달했다. 이 똘똘한 소년을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어느날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유명 목수 유춘봉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유춘봉 선생님은 서울에서 일하던 최고 기술자였지요. 전주 중앙가구에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모셔왔는데 그렇게 인연이 된 거죠. 내게 넓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은인입니다.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갔더니 ‘자네 인사성도 좋고 성실하고 솜씨도 참 좋네. 여기 놔두기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돈 벌고 싶은가, 기술 배우고 싶은가? 내가 만약 동일가구 보내주면 갈랑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동일가구는 아무나 들어가는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더 큰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유춘봉 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였다. 그는 일본으로 가구를 납품하는 수출반에서 일하게 됐다. 최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려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보며 그는 가슴이 뛰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기술, 특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가 조선시대 가구 전주장을 복원해낼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다 “전주장을 처음 본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할 때였어요. 휴일이면 인사동엘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 있는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자그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가구였어요. ‘전주태극이층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길래 직원에게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전주 지방에서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가구라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조상들이 쓰던 가구라고?’ 귀가 번쩍 뜨였죠.” 그때부터 전주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월급을 타면 죽은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사서 고향집에 쌓아 뒀고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가구를 통해 형태와 장석문양도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어렵게 구한 전주장을 분해해서 제작 기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는 마침내 전통가구 전주장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주장 앞면에 들어가는 문양과 장석 하나까지 정통 그대로 살려냈어요.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도록 처리했고, 가구 보존을 위해 마무리는 동백기름으로 칠했지요. 전주장은 지방에서만 쓰이던 가구가 아니에요. 한때는 하사품으로 이용될 만큼 명성이 있었던, 조선시대 가구의 백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어요. 2004년 전승공예대전에 ‘전주버선장’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내가 결국 해냈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꼈지요.” 그 후 소병진은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2014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선정이 됐다.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세월이 가져다준 보상이었다. 한때 부도를 맞아 ‘그만 살자, 격포에 가서 죽어버리자’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왔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이 3대를 잇는 기술이라고 했다. 스승의 선대 기술까지 배웠으므로 100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전주장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목장(전주장) 등재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 좋은 나무만 보면 아직도 설레는 사람 짜맞춤 가구에 사용되는 목재는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보통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쓰인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좋은 나무만 보면 탐이 나고 설렌다고 말한다. “나무를 들여오면 눈과 비바람과 햇볕을 맞히고 건조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기까지 20여 년이 걸려요. 지금 내 나이가 곧 70인데 20년 뒤면 90입니다. ‘내가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미쳤지!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좋은 나무만 보면 ‘얼마여?’ 하고 물어요. 이게 바로 정신 같아요. 여기 쟁여놓은 나무들, 누가 10억 준다 해도 안 팔아요.(웃음)” 그의 교육관에는 귀한 목재들이 가득하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무를 구하고 제자는 그 나무를 쓰며 스승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은 비움과 받아들임을 반복하며 상대를 꽉 안은 채 열릴 것이다. 순환의 사랑이 100년의 기술만큼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 2018-06-2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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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00년 답사① 세계유산 조선왕릉
- 세계유산(世界遺産) 이집트 최남단 아스완 지역, 수단공화국과의 국경지대에 고대 이집트 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건설한 아부심벨 신전이 있다. 입구에 20m 높이의 거대한 석상 4개가 앉아있는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신전은 1817년에 발굴되었는데 아부심벨은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이집트 소년의 이름이다. 1960년대 초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이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구하자는 세계적인 여론이 일어나 유네스코가 모금 운동을 펼치고 미국이 발 벗고 나서서 신전을 살리기로 하였다. 거대한 신전을 1만6000여 조각을 낸 후 70m 위쪽으로 옮겨 성공적으로 재건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협약을 체결하고 인류가 범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할 유산의 등재를 추진하니 이것을 세계유산(世界遺産)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세계유산은 인류무형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이 추가되어 유네스코 등재유산이라 부르는데 2018년 6월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2점, 인류무형문화유산 19점, 세계기록유산 16점을 보유하고 있다. 시행 초기에는 홍보를 위하여 웬만하면 거부 없이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세계유산 등재 여부와 등재 건수에 따라 그 나라에는 영광이자 관광 홍보에 엄청난 효과가 있어 신청이 쇄도하고 있으며 심사와 등재가 매우 까다로워진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9번째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2009년 6월 27일, 우리나라에서 9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610년 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승하한 날이었다. 이성계는 1408년 5월 24일(음력) 승하하였는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6월 27일이니 초대 임금이 세상을 떠난 날 그 후손들로 이어진 조선 임금과 왕비들이 묻힌 조선왕릉이 세계의 보물로 지정이 된 것이다. 조선왕릉은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고유한 조형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풍수이론에 대한 고유한 해석과 적용은 물론 왕릉 조성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기록한 풍부한 기록문화와 함께 600년을 이어온 무형적인 문화전통인 왕릉제례를 지금도 계승하는 점 등을 고려하여 당당히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42기의 조선왕릉이 있으나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일괄 등재되었으며 대부분 수도권 주변에 있어 비교적 쉽게 답사할 수 있어 지금부터 조선왕릉 답사를 시작하려 한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모두를 답사함으로써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만나봄으로써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 온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상, 문화와 예술의 깊이를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은 물론 조선왕조의 27대 왕과 그들의 왕비, 그리고 후궁들과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가 될 것이다. 또한 역대 세자와 세자빈은 물론 대군과 공주, 군(君)과 옹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왕실가족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영욕(榮辱)의 세월을 보낸 공신들이나 역신들, 심지어 민초(民草)라 불리며 이름 없이 살았던 백성들의 이야기도 엮어보려 한다. 답사기는 연대별, 시간대별로 이어가는 편년체를 택하여 우리가 늘 외워대던 '태정태세문단세...' 순서로 진행할 예정이며 처음에는 조선왕실의 뿌리를 찾아보고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알아보는 과정이 선행될 것이다.
- 2018-06-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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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묵칼레에서 고대 로마식 온천욕 즐기기
- 로마인들의 휴양지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목욕을 좋아해 자연 용출장이 있는 곳에 휴양지를 만들었다. 목욕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김없이 볼거리, 즐길거리도 만들었다. 연극이나 스포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과 원형 경기장도 만들었다. 로마인들의 대표적인 휴양지 중 한 곳은 터키의 파묵칼레다.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부서진 유적 위에 만들어진 온천 수영장에서의 물놀이는 클레오파트라도 부럽지 않다. 거대한 흰 석회암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 터키 여행을 할 때 파묵칼레(Pamukkale)를 여행 코스에 넣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묵칼레에 대한 홍보 영상물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곳에서 발산되는 매력을 저버릴 수 없다. 터키 여행 10일 정도 지날 즈음 파묵칼레로 간다. 고국에서 여행 온 후배들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날짜를 정하고, 같은 숙소를 따로 예약하면 된다. 후배들보다 좀 더 일찍 여행을 왔기에 여유 부리며 터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대부분의 터키 여행자들은 카파도키아에서 안탈리아로 이동해 파묵칼레로 이동하지만 카시~페티예~달얀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무계획 여행은 이래서 좋다. 달얀에서 파묵칼레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12배나 영토가 큰 터키이기에 긴 이동거리도 당연지사처럼 생각하게 된다. 달얀에서 승합차처럼 작은 돌무시를 타고 페티예로 나와 오토가르(터미널)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버스표를 구입한다. 분명히 파묵칼레로 가는 표를 구입했는데 데니즐리(Denizli)가 종점이다. 돌무시로 바꿔 타고 10km를 더 가야 파묵칼레다. 통일성 없는 터키의 교통법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35℃ 온천수가 변화시킨 석회암 덩어리 파묵칼레는 아주 작은 동네다.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거대한 ‘설산’처럼 보이는 석회암 덩어리가 불쑥 솟아 있다. 편안한 차림으로 마을의 석회암 언덕으로 오른다. 사방팔방 온통 흰빛이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온천수가 빚어낸 석회암 덩어리를 빗대어 붙인 지명. 석회 성분을 다량 함유한 35℃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은 것이다. 석회암 언덕은 보기와 달리 미끄럽지 않다. 따뜻한 물이 흐르고 용액의 흐름을 보여주는 ‘층리’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 석회 언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그 색이 변한다. 녹은 석회암이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다랑이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서멀 풀(thermal pools)의 물줄기는 청옥빛이다. 종유석 등은 없지만 딱 석회동굴이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다. 서멀 풀은 198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입욕은 불가하고 맨발로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한여름에는 수영복 입은 여행자들이 부지기수다. 석회 언덕 정상에 오르면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부서진 문화 유적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고 박물관도 있다. 이곳은 고대 페르가몬(Pergamon) 왕국이 기원이다. 기원전 130년경, 로마인들이 정복해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했다. 고대 로마의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파묵칼레’라는 지명은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가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해 복원했다.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최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원형 극장은 현재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또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는 아폴로신전이 세워져 있고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도 있다.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 뚜껑이 열려 있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 석관들은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곳 또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에서 물놀이 흩어진 문화 유적지와 박물관을 관람하고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으로 들어간다.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엔 나무들을 심어 그리스, 로마식으로 만들었다. 간이 탈의실도 있고 식당도 있다. 물 온도는 35℃로 생각보다 높다. 물속에는 그리스, 로마시대 때의 대리석 기둥이 그대로 잠겨 있어 발밑이 평평하지 않다. 얕은 곳도 있지만 키를 훌쩍 넘는 곳도 있다. 이 온천수는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 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 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와 물을 가져갔는데, 이 물은 양모를 씻고 염색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어쨌든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있던 온천장에서 즐기는 온천욕. 수심이 깊은 곳에서 수영도 하고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물도 먹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 놀고 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클레오파트라도 방문했다고 하니 아무리 바빠도 온천욕은 필히 해야 한다. 파묵칼레는 사실 이게 전부다. 단 이틀 동안 후배들과 함께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헤어지는 날, 후배는 싸갖고 온 햇반과 깻잎을 건네준다. “선배. 정말 힘들고 외로울 때 이거 먹어. 그러면 아픔이 싹 가신대.” 아끼고 아껴뒀다가 힘들었을 때 꺼내 먹으면서 파묵칼레의 기억을 어찌 떠올리지 않았겠는가? 여행이란 단지 풍치만 보는 게 절대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파묵칼레는 그래서 더 좋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직항이 있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까지 항공으로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는 10시간가량 걸린다. 데니즐리 터미널에서 파묵칼레행 미니버스가 운행된다. 이스탄불 ~ 카파도키아 ~ 안탈리아 ~ 파묵칼레 순으로 대부분 여행 코스를 짠다. 음식 정보 파묵칼레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제법 있다. 숙박 정보 파묵칼레 마을은 크지 않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가격은 조식을 포함해 2~3만 원대다. 대부분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날씨 정보 터키는 지중해성 기후다. 생각보다 햇살이 따갑다. 4월부터 기온이 풀리고 곧 뜨거워진다. 봄옷을 준비하면 된다. 아침과 저녁은 일교차가 크므로 겉옷을 하나 준비하는 게 좋다. 물가와 화폐 정보 터키 화폐는 터키 리라(Turk Lirasi)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파묵칼레 인근에는 또 다른 온천 명승지가 있다. 제2의 파묵칼레로 불리는 카클르크(카크리크) 동굴은 최근에 발견된 종유동굴인데, 광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파묵칼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여행사를 통해 표를 구입해야 한다. 여행사가 두어 곳 있는데 가격 차이가 크다.
- 2018-05-3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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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건강을 담보하는 산책길
- 현직에 있을 때는 주말에 아내와 가끔 산을 오르며 심신의 피로를 풀곤 했다. 정년퇴직 후엔 수도권에서 생활하면서 가까운 친·인척이나 친구들이 오면 환담을 하며 산책을 했다. 그중 3~4시간 코스로 ‘100세 건강이 저절로 담보되는 세 길’을 추천하고 싶다. 그 길은 북한산 둘레길(1~21구간 중 선택), 한강변과 한강변 다리를 따라 걷는 길, 수원 화성 성곽길이다. 북한산 둘레길 북한산과 도봉산 주위를 빙 돌아 이어지는 72.8km 길이다. 기존의 샛길을 다듬고 연결해 21개 코스로 나눈 뒤 테마를 구성한 길로 2011년 6월 30일 개통되었다. 한 구간이 짧게는 1.5km에 45분 코스, 길게는 6.8km에 3시간 30분 코스로 다양하다. 두세 코스를 묶거나 단일 코스를 선택해 걸을 수 있다. 아내는 몇 달 걸려 북한산 둘레길을 완주했다. 6구간 평창마을길, 11구간 효자길, 12구간 충의길, 17구간 다락원길, 18구간 도봉옛길, 21구간 우이령길을 걸을 때 필자도 동행했는데 북한산 둘레길을 다 돌고 나니, 북한산과 도봉산, 그리고 둘레길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많은 사람의 일상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강변과 한강변 다리를 따라 걷는 길 2008년 뇌수술을 마치고 요양할 때 건강 회복 여부를 테스트하기 위해 아내랑 잠실대교 근방에서 성산대교까지 걸어봤다. 한강변은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북쪽 한강변 쪽으로 걷다 보면 큰 다리를 16개 정도 지나는데 거리가 22km쯤 된다. 쉬엄쉬엄 걸으면 대략 6시간이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도 되고 마라톤을 즐길 수도 있다. 물론 거리와 시간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고 서쪽에서 동쪽,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입과 방향도 개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필자는 친구들이나 친·인척이 오면 가볍게 식사를 한 후 이 길들을 함께 걷곤 한다. 수원 화성 성곽길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둘레 6km에 화성행궁까지 약 7.5km 걷는 코스로 대략 2시간 정도 걸린다. 매교역에서 수원천을 거쳐 남수문, 봉화대, 창룡문, 화홍문, 장안문, 화서문, 서장대, 화서문, 화성행궁까지 도는 데는 약 11km에 4시간가량 소요된다.
- 2018-04-1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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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전체가 ‘가우디’ 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
-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가 보면 안다. 많은 한국인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매력이 넘치는 바르셀로나는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도 큰 인기다.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비우티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또 몬주익 언덕에는 마라톤 선수 황영조 기념탑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우승을 안겨줬던 도시. 낯선 나라에서 한글을 보면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인 대성당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자치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는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어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특히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은 탁월한 명소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는 건축 문외한의 눈길도 저절로 이끈다. 특히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뜻은 ‘성 가족’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요셉을 뜻한다. 이 성당의 원 설계자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 성 요셉 축일(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으나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로 중도 하차했고 이듬해부터 가우디(당시 31세)가 맡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까지, 총 12년간을 오로지 이 성당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성당을 완공도 하기 전, 그는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할 당시 이 성당은 ‘예수 탄생’ 파사드, 종탑 한 개, 네 개의 탑, 지하 납골당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가우디 사후 100년(2026년)이 되는 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당은 천천히 자라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을 운명을 지녔다”는 생전 가우디의 말이 이뤄질 것 같다. 입장료가 비싸지만 매표소는 늘 장사진을 친다. 매표 요금은 완공을 위한 기부금 형태로 쓰인다. 바르셀로나를 빛내는 건축가 가우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400여 개의 회오리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가우디의 유해는 지하 박물관에 있다. 1869년(17세), 가우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이미 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터전을 옮겨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고향과는 달리 큰 도회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 시절, 많은 자극과 동기를 받는다. 1874년(22세),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창조성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 그는 늘 말이 없고 허름한 차림새에 이상한 실험들을 일삼았기에 평생 괴짜라는 꼬리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귀족적이면서 천박한, 댄디(dandy)이자 방랑자, 박식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기지가 넘치지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가우디를 천재라고 칭찬했다. 사후 30년 뒤인, 1960년대부터 그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빛내고 있다. 카사 밀라에서 구엘 공원까지 바르셀로나에는 성 가족성당 말고도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로 꼽히는 카사 밀라가 있다. 산을 주제로 디자인하고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건축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곡선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또 바다를 주제로 디자인한 카사 바트요(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는 도자기 타일과 유리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구엘 공원(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다. 가우디와 구엘 백작의 합작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은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펠라다 지역 땅을 매입한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해서 그리스의 팔라소스 산과 같은 신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원 부지가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땅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단지를 위해 무려 14년(1900~1914)이나 매진했지만 결국 자금난 등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 친화적 건축물,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한 공원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바지에 구엘 공원이 있다. 초콜릿을 닮은 듯한 돌기둥,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 석굴, 계단 위에 타일로 만들어진 도롱뇽, 기념품 파는 건물 등 가우디만의 색깔이 분명한 건축물이 오롯이 모여 있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만든 도리아식 기둥도 눈길을 끈다. 녹색 식물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시내가 조망되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가세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단 과거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해 유료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 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 포인트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직항이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13~14시간. 현지 교통 바르셀로나는 규모가 커서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 제일 편리하다. 도심이 복잡하므로 1일권을 사서 무제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음식정보 보케리아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구입해 즉석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근처의 레스토랑을 이용하자. 흥정으로 절반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숙박정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호텔 가격은 1박당 50만 원 이상. 아파트, 한인 민박,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숙박은 1박당 10만 원 정도. 화폐 유로화 통용. 날씨 바르셀로나의 4월 평균 최저기온은 8.5℃, 평균 최고기온은 17.6℃로 서울의 4월 중순 기온과 비슷하다. 예측 없이 비가 내릴 수 있으니 비옷과 우산은 꼭 챙겨서 외출하자. 시니어 여행 포인트 바르셀로나는 서둘러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도시다.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 도시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기장 근처로 내려오면 차도 옆으로 황영조 동상이 있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미로 미술관을 만난다.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근처 소도시 여행은 꼭 해야 한다. 몬세라트 성지와 타라고나를 적극 권한다. 누드 비치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체스(Sitges) 해변을 찾으면 된다.
- 2018-04-0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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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머 씨처럼 걸어도 좋은 곳
- 얼마 전 자연생태가 잘 보전된 습지를 돌아보고 왔다. 다녀온 후 내내 우리 인간들이 움직이기만 해도 자연환경에 피해를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무분별하게 파헤치는 것을 하루빨리 멈추고 녹지를 살려야만 야생 동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하고 온 날이었다. 전북 고창엘 가면 운곡습지가 있다. 이곳은 농민들이 논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시골마을이었는데 1980년대에 영광원자력 발전소가 생기면서 냉각용수 공급을 위해 9개 마을 주민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운곡저수지를 건설했고 그 후 40년 가까이 사람들의 접근 없이 방치되었다. 이때 생태계가 스스로 복원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2011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이 되었고 2013년에는 고창군 행정구역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이 되었다. 운곡습지에 들기 전에 고인돌 분포지역을 만난다. 산아래 벌판에 군집을 이룬 각종 형식의 고인돌이 1600여 개다. 그중에 422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계속 연결되는 오베이골 탐방로를 따라 운곡습지를 향해 출발한다. 외부의 생태교란 외래종 식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발 털이개에 발을 털고 들어가면서 문득 마음이 경건해 지기까지 한다. 이제부터 자연 그대로 비포장도로다. 그리고 숲에 들면서 수변을 관찰할 수 있는 데크가 길게 나타나는데 환경을 덜 훼손하려고 좁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습지관리센터까지 4.6Km의 데크를 걸어가면서 운곡 습지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남한의 DMZ라 불릴 정도로 멸종위기의 수달이나 삵, 구렁이, 담비와 같은 864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가을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숲소리가 운치 있다. 철따라 가시연꽃이나 구절초와 노랗고 자줏빛의 꽃들과 새소리 물소리를 만날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숲길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움조차 들 정도로 밀림을 방불케 한다. 밀림 영화 속 한 장면이 튀어나올듯한 풍경이다. 65만 평에 달하는 산지형 습지에 도무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뒤엉킨 나무와 풀들이 제멋대로 자연스럽다. 저 앞에 좀머 씨처럼 끝없이 혼자서 걸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도 있다. 길 옆으로 시원스러운 저수지 위로 새들의 군무를 볼 수도 있다. 탐조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자연 그대로의 산세 덕분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걷는데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다. 요즘 걷기 코스로 흔히 올레길이나 둘레길을 찾아간다. 이렇게 태고의 숲처럼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길을 걸어본다면 감동이 달라질 것이다. 밀림 속에 파묻혀 힐링을 체험하는 순간이 된다. 마음을 나눌 사람과 두런두런 걸어도 좋고 좀머 씨처럼 혼자서 걷고 또 걸어도 좋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 2018-03-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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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한옥마을 탐방기
- 필자는 어릴 때 한옥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대문 앞에 있던 한 그루 대추나무 때문에 대추나무집이라 불렸던 아현동 집과 반듯한 서까래가 아름다웠던 돈암동 집 등 한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늘 넘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북촌 탐방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차분한 날씨. 이런 날은 여행이나 산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안국역 3번 출구로 갔다. 필자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첫 번째로 도착했는데 약속 시간이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필자 앞에서 외국인 여자 한 사람이 큰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끙끙대고 있어서 서툰 영어이지만 방향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can I help you?"라고 말을 걸었다. 여자는 매우 기뻐하며 동대문 마켓을 가려 한다고 했다. ‘역시 한국에 여행 왔으면 동대문시장은 가봐야지’ 하는 마음에 미소가 일었다. 교통편보다는 걸어가고 싶다 해서 방향을 알려주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더니 두바이에서 왔다고 한다. 필자는 여자 혼자 그 먼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찾아준 것이 고마운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를 방문해줘서 감사하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오늘따라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필자의 영어 실력은 기초 회화를 할 정도임). 그녀는 옥토퍼스(octopus) 푸드를 먹었는데 무척 스파이시(spicy)했다는 말을 했는데 아마도 매운 낙지볶음을 먹었나보다 했다. 그래서 필자는 추천하고 싶은 다양한 한식이 있다며 몇 가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한국이 참 아름답다며 가방을 뒤적여 봉지를 꺼내더니 다 식은 국화빵을 두 개 필자에게 건넸다. 그 마음이 예뻐서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감사하다며 떠나는 그녀를 보며 필자로 인해 우리나라가 친절한 나라로 인식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문화해설사와 일행 8명이 도착해서 북촌 탐방이 시작되었다. 필자는 돈암동에서 30여 년을 살았기 때문에 북촌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북촌에 8경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 그중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한옥마을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곳은 왕가 사람들이나 권문세가, 양반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1경에서 8경까지 탐방을 하기로 했다. 1경은 창덕궁 담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담 옆을 끼고 왼쪽으로 가면 북촌 문화센터가 있다. 이 집은 조선시대에 재무관을 지낸 양반집을 창덕궁 연경당을 모델로 복원해 사람들에게 북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우수상’을 받은 곳이라 한다.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사랑방도 개방해놓았고 정자에도 앉아볼 수 있게 해놓았다. 우리 일행도 툇마루에 앉아 인증사진을 찍었다. 2경은 원서동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가옥에서 시작되었다. 참으로 아담하고 예쁜 정취가 느껴지는 한옥이었다. 그러나 한때 친일파였다는 일로 폐가가 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어 사람들에게 개방되었고 서화전도 열리고 있다 한다. 이곳에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세 명의 친구의 글, 그림,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한삼우란 각자의 분야에서 민족계몽과 근대화를 이끈 춘곡 고희동, 육당 최남선, 위창 오세창 세 분을 말한다.
- 2018-02-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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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약 먹는 기분처럼 흥이 돋는다
- 1976년 여름밤, 진하해수욕장에서의 남녀 신입사원들을 위한 캠프파이어는 현란했다. 어둠 속에서 익명성이 확보된 100여 명의 격렬한 댄스파티는 젊음의 발산 그 자체였다. 그중 열정적이고 현란하게 춤을 추어대는 한 여직원의 실루엣이 너무 멋있어 끝까지 따라가서 얼굴을 확인해보니 순박하고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익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실감했다. 그리고 이어진 장기자랑에서는 흥이 오른 젊은이들이 끼를 경쟁적으로 선보여 필자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필자도 용기를 내어 국통과 식기를 악기로 삼아 중모리 12박을 치며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목청껏 불러댔다. 개성적인 민요가락에 빠진 남녀 신입사원들의 호응으로 심사위원들은 1등상을 줬고 부상으로 큰 밥솥을 탔다. 어깨너머로 배운 민요와 북장단 필자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훨씬 전인 1954년 혹은 55년경으로 기억된다. 밤이면 외양간이 딸린 우리 집 사랑방으로 아버지 친구분들이 몰려오곤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기였는데, 환담을 나누면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말라붙은 정서를 되살리는 수단으로 북장단과 민요와 창을 배우셨다. 국악 선생님 한 분을 초청하여 우리 집에 모시면서 밤이면 민요와 북장단을 상당 시간 배우셨는데 나는 어깨너머로 익혔다. ‘궁궁딱 궁또드락 똑딱 궁궁딱 궁궁궁’, 소위 중모리 12박 장단은 밤마다 배워도 어르신들은 많이 틀리셨는데 필자는 어렵지 않게 익히고 반복하곤 했다. 1000회에 가깝게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우리 한민족! 민중의 삶이 피폐하고 삶의 뿌리가 흔들릴 때마다 건전한 일상을 회복하고 즐거운 정서를 고양하기 위해 민요를 만들고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리랑만 해도 같은 3박 세마치장단에 300종류가 넘게 만들어져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요가 되었고 2012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 것이리라. 우리 가락의 멋과 흥 대형 조선소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봄가을이면 대형 선박을 발주한 여러 나라의 해운회사들이 선박 건조 현장에 파견한 감독 혹은 검사원들을 야유회에 초청하여 한국의 산하와 문화유산을 보여주곤 했다. 동해안을 따라 울산에서 감포항으로 야유회를 가던 때 한국 민요의 장점과 특징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었다. 서양음악은 4분의 3박, 4분의 4박, 8분의 6박 등이 주종을 이루는데 한국의 민요는 훨씬 창의적이고 다양하게 민족의 정한(情恨)을 표현함을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이 많이 부르는 아리랑만 해도 지역마다 달라 그 종류가 3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아리랑의 뜻이 무엇이냐는 외국 선주 감독들의 질문에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가락’ 혹은 ‘고난을 삭이고 승화시키는 가락’이라고 말해줬다.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직장이 있던 동해안 쪽 울산에서 천리길을 차로 달려 서해안 쪽 고향 영광 집에 도착하니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와 계셨다. 이내 부친과 두 분이 북장단에 민요를 교대로 부르기 시작하셨다. 민요장단을 익힐 좋은 기회여서 부친과 담임선생님이 민요를 부르실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모리와 중중모리 장단을 쳐드렸다. 북이 자꾸 발에서 빠져나가려고 해, 장단을 치며 북을 끌어안으려 애를 쓰니 두 분 모두 웃으시며 즐거워하셨다. 그 후 영화 가 나와 장님이 된 누이가 민요를 부르고 남동생이 북장단을 치며 서로 회포를 푸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민요와 가락을 익힐 기회를 더 엿보게 했다. 정년퇴직 후 달려간 민요교실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가까운 신당5동 주민센터에서 민요·장구를 가르치는 것을 알고 바로 등록했다. 남자보다 여자 회원이 대부분이어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일주일에 두 번, 2시간씩 민요와 장구를 익히기 시작했다. 노랫가락, 굿거리장단, 세마치장단 등 여러 박자들의 민요 7곡씩을 조합해 교본을 만들어 매번 반복해가니 익히기 좋았다. 2년 정도 하니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요를 부르며 장구를 동시에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모리 12박에 맞춰 부르는 금강산타령 등은 소리를 올리고 내리고 감고 꺾는 내용들이 악보에 없어 따라 하기 힘들었고 가사 또한 많은 분량이라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장구 치는 것은 북장단 익힌 경험이 도움이 되어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수요일과 금요일 2시간씩 민요·장구 배우는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다. 민요·장구 모임도 결성해볼 테다 경기도 용인으로 생활의 터를 옮겨 얼마 지나지 않아 집 가까운 곳에 노인복지관이 들어섰다. 약 60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민요·장구가 포함되어 있어 기뻤다.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장점들이 다름을 새삼 느꼈다. 빠른 자진(잦은)모리장단의 경복궁타령과 잦은 뱃노래는 매우 흥겨웠고 굿거리장단 4박에 실린 창부타령의 가사들은 민족의 애환을 다양하게 담고 표출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60개 프로그램 단체공연을 할 때 10여 명이 무대에 나가 배운 민요들을 부르며 흥을 돋우어줬다. 청중석에서 나와 어깨춤을 추는 관중도 있어 민요의 힘과 전파력을 느낄 수 있었다. 민요·장구도 좋은 취미로 익히고 만들려면 역시 지속성과 성실성이 필요하다. 집 가까운 노인복지관에서 경제논리로 폐강이 된 후 집에서 좀 멀지만 다른 지역의 주민센터를 찾았다. 이곳에선 금요일 초급반과 월요일 중급반으로 2시간씩 운영되어 좋았고 선생님은 또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었다. 특히 굿거리장단의 다양성을 익히도록 매번 반복하여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힘껏 쳐대면 일주일의 피로가 풀리며 심신 건강을 위한 보약을 먹은 기분이 된다. 1996년 부친을 위한 칠순잔치 때 국악인을 불러 부친과 고향 친구분들을 즐겁게 해드렸다. 내년 필자의 칠순 날이 오면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불러 노래와 한민족의 영원한 고향노래인 민요들을 같이 불러볼까? 이를 위해 작년 말에 어떤 모임에서 불렀던 중모리장단의 ‘한오백년’ 과 처가 마을에 가서 담 쌓는 봉사를 하면서 목청 돋워 불렀던 ‘창부타령’을 즐겁게 다듬어 가보자! 그리고 전 직장동료들 취미모임인 산악회, 역사문화탐방회, 바둑회, 독서문학회에 이어 민요장구회 결성도 건의해보자.
- 2017-11-1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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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조형 예술품 ‘세계평화의 문’
- 어느 날 저녁, 독일 친구와 자동차로 송파 지역 올림픽대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와~우, 와~우”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고 했다. 주변엔 빌딩도 없고 캄캄하기만 했다. 친구는 자동차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금 탄성을 질렀다. 그곳엔 대형 조각 예술품이 마치 깊은 산 한가운데서 환하게 조명을 받은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올림픽공원 입구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World Peace Gate)’이었다. 1970년대에 해외 생활을 하다 귀국해 ‘삼일빌딩’을 처음 봤을 때의 일이다. 어느 건축가의 작품인지 궁금해 알아보니 건축가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의 것이었다. 일반적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특이한 모양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바로 그분. 그런데 그 명성에 비해 ‘프랑스 대사관’에 대한 대중적 평판은 마치 상여(喪輿)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꽤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더욱더 선생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국내 건축가 1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1941년 일본 요코하마공고(橫浜高工) 건축과를 졸업한 후,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1952년 프랑스 파리로 옮겨 1956년까지 세계적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연구소에서 일했다. 귀국한 뒤에는 홍익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로드아일랜드 건축대학에서 교직을 맡으며 왕성한 건축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선생의 경력에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르 코르뷔지에’다. 프랑스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하는 르 코르뷔지에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은 훗날 거의 예외 없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국립서양미술관 건물이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1955년에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프랑스 동부의 롱샹(Ronchamp) 성당이다. 대형 조각 예술품과도 같은 성당 건물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밑그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중업 선생의 작품에서 스승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삼일로 빌딩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가로 함께 참여한 뉴욕의 유엔본부 빌딩과 유전인자를 공유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제자 김중업과 스승 르 코르뷔지에의 아름다운 연결 고리라고나 할까. 1986년 아시아 올림픽 대회 개최 즈음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은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이고, 서양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정취가 뿜어 나온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門’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세계평화의 문’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 예술성과 과감한 크기에서 발산하는 독보적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런 예술작품이 우리 생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필자는 자랑스럽고 한편으론 행복하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사랑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세계인의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 2017-11-1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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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와 조선 왕릉
- 종묘는 종로 3가역과 5가역 근처에 있다. 초등학교 때 단체로 갔던 기억이 있고 그 후로는 가보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혼백을 모신 곳이라 하여 조심스럽기도 해서 왠지 발길이 가지 않던 곳이다. 그러나 몇 해 전 종묘 앞 쪽에 광장과 공원을 마련하고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가볼만 한 곳이 되었다. 입장료 1,000원인데 경로 우대는 무료이다. 안내서는 무료로 주지만, 자세한 설명이 잇는 소책자는 500원에 사야 한다. 아무 때나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제로 입장시켜 시간이 안 맞으면 번거롭다. 대부분 한 시간 간격이다. 일단 들어가면 해설사가 붙고 50분 동안 경비들이 지킨다. 그래서 정문까지 갔다가 돌아선 적이 몇 번 있다. 종묘는 종로에 있는 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종로는 쇠북 종(鐘)이고, 종묘의 종(宗)은 마루 종이라 하여 산마루처럼 꼭대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곳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혼백은 남아 있다는 유교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무로 만든 신주가 혼백이 머무는 곳이라는 것이다. ‘혼비백산’은 혼백에서 나온 말로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랐을 때 쓰는 말이다. 종묘는 정전이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길이가 101m에 달하는 가장 긴 한식 건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5명의 왕을 모시려 했으나 조선 왕조가 500년간 이어지면서 왕과 왕비들도 늘어나자 옆으로 계속 이어 지었다고 한다. 모두 정전에 모시지 못해 비중이 좀 떨어지는 왕들은 옆 건물인 영녕전에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오면 학창 시절에 배웠던 조선 왕들의 순서와 여기 모신 왕들의 순서가 다르다. 원래 조선 건국을 개성에서 하고 한양으로 옮겨 왔을 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정전은 국보, 영녕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 제례는 무형 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는 분위기가 다른 왕릉과 다르다. 일단 잘 가꾼 나무가 많아 공원 같은 분위기인 것은 비슷하지만, 정전 앞에 이르면 단조로운 긴 건물과 넓은 공간에 분위기가 차분하다. 그래서 ‘멍 때리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정전 앞에 서 있으면 생각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정말 묘한 차분함이 느껴진다.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으며 북한에 2기를 제외하고 40기가 대한민국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묘에 간 날 마침 서오릉에 갈 일이 있었다. 왕실도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직계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종묘에서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를 하고 가니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강남에 있는 선정릉, 학창 시절 소풍 가던 동구릉, 양재꽃시장 쪽에서 성남 가는 길에 있는 헌인릉, 여주의 영릉과 명릉, 영월의 장릉, 군대 생활하던 곳과 가까웠던 파주의 공순영릉까지는 가 봤다. 서울에 가까이 있는데도 못 가본 정릉이나 태릉 등 아직 안 가본 곳이 꽤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남양주 사릉, 홍릉, 유릉, 광릉 등 이름도 생소하거나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 못 갔다. 교통이 불편하기도 하고 가 봐야 비슷비슷하니 안 갔을 것이다.
- 2017-11-15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