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은 울산 동구 해안가에 있다. 오랜 세월 파도에 침식된 기암괴석의 자태는 과연 ‘대왕’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 대왕암과 함께 동해의 세찬 바람을 잘 버텨내고 있는 소나무 숲이 만드는 경관은 신비롭다. 그래서 건축 관련 일이나 강의가 있어 울산에 가면 시간을 쪼개서 그곳을 찾는다.
대왕암이 있는 동구는 접근성이 좋지 않다. 울산시를 경유하는 열차노선은 시의 서쪽 외곽으로 지나간다. 양산 통도사에서 멀지 않아 역사의 이름도 울산(통도사)역이다. 울산엔 도시철도가 없다. 울산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택시나 리무진을 이용해야 한다. 특히 대왕암이 있는 동구는 출퇴근이 아닌 시간대에도 리무진으로 한 시간이 더 걸린다. 울산역은 시의 서쪽 끝이고 대왕암은 동쪽 끝이다. 서울에서 울산까지 KTX 소요시간이 두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접근성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접근성이 좋지 않은 탓에 대왕암 공원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평소에도 관광객이 적다. 이것은 오히려 자연 보존에 유리한 면도 있다. 공원 입구 주차장에서 약 1km 거리에 있는 대왕암으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는 해송이 빽빽하다. 그 해송을 배경으로 고목 동백나무가 죽 늘어서 있다. 봄에 유난히 붉은 동백꽃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대왕암에 이른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해송 사이로 난 산책로를 지나 해안가에 조성된 오솔길로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대왕암으로 갈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울산 동구 퇴직자 지원센터에서 강의의뢰가 왔다.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인생 재설계 과정 중 주거부문 특강이었다. 강의 장소가 마침 대왕암이 있는 동구라서 더 설레었다. 특강 시간이 아침 시간에 잡혀있기도 했지만 새벽에 대왕암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싶어서 그 전날 저녁에 울산에 갔다. 자고 나니 밤새 비가 내린 모양인데 새벽에 숙소를 나설 때는 빗줄기가 강했다.
대왕암 공원의 운무와 소나무 군락이 연출하는 환상적인 경관은 신비롭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해안 곳곳에 숨어있던 절경이 자태를 드러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바다운무에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해안 오솔길을 한 바퀴 돌아 대왕암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강의 시간에 늦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충분히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비도 내리고 택시를 호출하는 것도 불안해서 공원 입구로 나왔다.
그런데 택시호출에 문제가 생겼다. 대왕암 공원 인근에서 호출에 응하는 택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원에 인적도 없고 들어오는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큰길까지 걸어 나가면서 계속 택시를 호출했다. 그렇게 40분가량 걸어 나오다가 운 좋게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땀도 닦고 택시 운전사에게 울산의 열악한 교통 상황에 대해 한참 하소연했다.
그러다 창밖을 보니 왼편으로 바다가 보였다. 목적지가 대왕암 공원에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분명 오른쪽에 바다가 보여야 했다. 목적지를 잘못 가고 있는 거 아니냐 했더니 같은 이름의 호텔이 울산에 두 군데 있다는 거였다. 내가 가야 할 호텔의 반대편에 있는 동명의 호텔로 가고 있었다. 위험한 빗길을 뚫고 속도를 내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택시를 구경할 수 없었다.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에 종사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 대부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므로 대중교통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 겨우 강의 시간에 맞추긴 했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고 새벽부터 여행 기분 내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
5월에 계속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갔다. 예정에 전혀 없던 춘천행이었다. 사실은 이날 여럿이 모여 야외운동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에 세찬 비가 내리자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2주 전에 한 약속이라 아쉬웠다. 그렇다고 날씨 탓만 하며 그냥 집에 있기에는 새벽부터 서두른 시간이 아까웠다. 다른 계획이라도 세워야 했다.
일단 운동 도구를 빼놓고 카메라와 가방을 들고 나섰다. 걸으며 순간 생각난 곳이 바로 김유정을 만날 수 있는 실레마을이다. 그곳은 몇 번 가봤기에 두렵지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어디를 가든 그곳을 빠짐없이 살펴보려면 여럿보다는 혼자가 훨씬 도움이 된다. 그전에 두 번이나 갔지만, 일행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깊이 있게 반복해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경춘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대중교통으로는 처음이었지만, 안내판이 잘 되어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에서 목적지까지 도보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 12월 1일 김유정역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한국철도 역사상 최초로 사람 이름을 사용한 역이다. 걸어가며 보니 전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보이는 모든 곳이 김유정에 관한 지역이었다. 상점이나 식당이나 온통 김유정 작품의 제목을 따서 점순네 닭갈비, 중화요리 만무방, 봄봄 닭갈비, 카페 산골나그네 등이다. 마치 마을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느낌이라 새로웠다.
비록 날씨는 언짢았지만, 그가 나고 자란 생가와 ‘김유정기념전시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천재작가의 안타까운 생애와 작품에 관한 것에 대해 샅샅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여러 작품의 산실이었던 실레마을로 향했다.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걷는 기분을 아마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봄봄’의 점순이가 된 듯 설레기도 하면서도 김유정의 허망한 생을 생각하면 슬퍼졌다. 한국 문학사에 토속적인 언어와 자신의 고향을 바탕으로 길지 않았던 작품 활동 기간에 금쪽보다 더 귀한 작품들을 남긴 그를 떠올리며 마음이 벅차오른 날이었다.
김유정, 실레마을 곳곳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다
실레마을, 김유정 작가의 고향이며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들이 허구가 아닌 실제했다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봄봄’의 점순 아버지 봉필영감이 마을 가운데 잣나무 숲에서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주인공 나(머슴)와 점순이의 혼인 약속은 지키지 않으며 일만 부려먹던 봉필영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백꽃’의 배경은 금병산자락 아래 잣나무 숲 뒤쪽이다. 기념관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세운 ‘금병의숙’ 터가 있다. 움막을 짓고 마을 아이들에게 열정을 다해 야학을 가르친 곳이었다. 그 옆에는 김유정이 심은 느티나무가 지금도 있다. 마을지도를 보니 유정이 술을 마시던 주막 한들의 팔미천에는 ‘산골나그네’(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두었던 물레방앗간 자리가 있다.
이와 같이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 12편이 실레마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점순이,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 등 인물들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레마을이다. 29세 짧은 생 동안 자신의 고향을 통틀어 작품 속에 등장시킨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참 행복한 실레마을이다.
김유정은 1936년 잡지 ‘조광’ 5월호에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를 기고했다. 글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서울시는 전철·버스·택시 대중교통요금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전철무임이 퍼주기 복지라며 여느 때처럼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어르신은 전철무임은커녕 오히려 요금폭탄을 맞고 있다. 국가는 2배로 전철무임을 보상해 국민혈세를 낭비하고, 어르신은 버스요금을 일반인보다 2배로 부담한다. 문제는 전철·버스요금 환승할인제를 도입하면서 어르신의 교통요금에 환승할인을 적용하지 않는 교통당국의 ‘정책오판’에서 비롯됐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대중교통은 전철·버스요금 환승할인을 시행하면서 국민복지의 꽃을 피웠다. 서울시민이 전철과 버스를 1구간 1회 환승할 경우를 보자. 전철에서 버스로 환승하면 전철 1250원, 버스 ‘0’이 찍히고, 버스에서 전철로 바꿔 타면 버스 1200원, 전철 50원이었다. 전철요금 638원, 버스요금 612원 식으로 환승할인한 1250원이 교통요금 총액이었다. 행복했던 어르신의 어제다.
65세가 되면 전철무임 ‘어르신교통카드’를 발급받는다. 교통요금이 절반 수준으로 당연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전철요금은 ‘0’으로 버스요금은 1200원으로 찍혔다. 교통요금청구서를 받아서 자세히 살폈다. 교통요금 총액이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버스요금이 과거보다 2배 수준이었다. 전철요금만큼 버스요금으로 자리만 바꿨다. ‘전철무임 하나마나’다. 어르신들의 서글픈 오늘이다.
청구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612원이었던 버스요금이 일반인 승차 때보다 588원 더 많은 1200원 청구됐다. 전철무임보상액 1250원을 합하면 2450원이다. 교통요금이 일반인 2배다. 전철무임은커녕 요금폭탄이다. 어르신 교통요금을 절반 수준으로 감액한다고 했던 계획은 흔적도 없다. 밤잠을 설쳤다. ‘이게 국민복지냐?’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전철요금이 궁금해 교통당국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2011년부터 7년간 일반인의 전철요금 638원보다 2배 많은 1250원을 국가예산으로 철도사업자에게 6510여 억 원 보상했다. 전철요금을 일반인처럼 638원꼴로 계산했다면 절반 수준인 3200여 억 원의 혈세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나라가 노인복지예산을 엉뚱한 곳에 ‘퍼주기’ 하는 현장이다. 이런 속도 모르고 시민은 ‘노인 전철무임 폐지하자’고 한다. ‘우리 전철 공짜 아냐’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슬픔을 참을 수 없다.
노인복지법은 어르신의 전철 전액무임을 규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근거도 없는 1200원을 버스요금이라며 먼저 징수한다. 달랑 50원 4%가 실질적 무임이다. 교통당국의 주장대로 전철·버스요금을 각각 1250원, 1200원으로 인정해보자. 현행 교통요금 1250원에서 전철 요금을 먼저 공제해야 100% 전철무임이 된다. 버스요금을 한 푼이라도 징수하면 노인복지법 위반이다. 자가당착이다. 어르신의 버스요금을 1200원이라 주장할 수 없는 이유다.
국가가 10년이 넘도록 어르신들을 차별하고 있다. 현행 불법 어르신 교통요금제를 폐지하고, 일반인과 동일한 전철·버스 환승할인을 적용하면 모든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된다.
교통요금 인상하기 전에 이 문제를 한시바삐 개선해야 한다.
탁 트인 전망과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무의바다누리길’ 걷기는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코스로 환영받고 있다. 인천시 중구에 위치해 서울에서 접근성이 좋고 대중교통 이용이 용이하며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시니어에게는 무리가 되지 않는 길이어서 더욱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된다. 공항철도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열차와 서울역~인천공항역을 논스톱으로 운행하는 1인 좌석제의 직통열차가 있다. 공항철도를 이용해 인천공항역에 도착하면 용유역까지 운행하는 자기부상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자기부상열차는 인천공항역~용유역을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15분 간격으로 무료로 운행하는 열차다. 승용차로 갈 경우에는 배에 승용차를 실을 수 있어 무의도 광명항까지 곧장 갈 수 있다.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무의도행 뱃삯은 성인 1인 왕복 기준 3800원이다. 승용차 승선요금은 한 대당 2만 원이이다.
잠진도에서 배를 타면 무의도까지 약 5분 정도 걸린다. 배 주변으로 날아드는 갈매기 떼에 새우깡을 던져주다 보면 어느새 무의도에 도착한다. 배 도착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는 마을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언덕길을 15분 정도 달리면 소무의도가 바라보이는 광명항에 닿는다. 소무의도 옛 이름은 ‘떼무리섬’. 무의도에서 따로 떨어져나간 작은 섬이란 뜻이다.
소무의도는 면적 1.22㎢, 해안선 길이 2.5㎞의 섬으로 대무의도와 함께 무의도(舞衣島)라 불린다. 과거에 어부들이 짙은 안개를 뚫고 근처를 지나가다 이 섬을 바라보면, 섬이 마치 말 탄 장군이 옷깃을 휘날리면서 달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선녀가 춤추는 모습 같기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무의도가 ‘떼무리섬’으로 불린 것은 조선 말기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기록되어 있다.
소무의도 여행은 무의도와 연결된 414m의 ‘소무의 인도교’ 앞에서 시작된다. 이곳이 2.5km, 1시간 코스의 둘레길 ‘무의바다누리길’ 출발점이다. 둘레길은 총 8개 구간으로 나눠 소무의도 8경을 스토리텔링화해놓았다.
섬에 들어서면 동편마을 쪽으로 갈 것을 추천한다. 바로 앞 가파른 계단길을 하산 코스로 잡아 전망을 즐기며 내려오는 것이 좋다. 작은 섬이지만 둘레길을 따라 마을길, 숲길, 벼랑길, 밭길, 해변길, 깔딱고개길 등 다양한 길들이 있다. 이 길들을 걸으면 스치는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번잡한 상념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특히 몽여해변길에서 동촌마을과 등을 맞대고 있는 서촌마을 앞 작은 해변이 정겹다.
몽여해변길은 쌍여로 나가는 길목이라는 뜻의 목여가 변해 몽여라 불렸다 한다. 쌍여란 물밑에 있는 두 개의 바윗돌이라는 의미의 순수 우리말로 바닷물이 빠지면 두 개의 바윗돌이 드러난다 한다. 또 안개가 낀 날 섬으로 쳐들어오던 왜구들이 거구의 장군으로 착각해 도망을 치게 했다는 장군바위가 명물이다. 전복을 따던 옛날 해녀들이 휴식을 취하던 섬이라 해서 해녀섬(해리도)이라고 불리는 작은 섬은 소무의도 남쪽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바다를 조망하며 계단길과 숲길을 걸어 섬에서 가장 높은 안산전망대 하도정에 오르면 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반겨준다. 쉬엄쉬엄 올라 산과 바다를 둘러볼 수 있는 무의바다누리길 트레킹은 시니어가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약소국이라 강대국에 당하기만 했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알게 해준 영화이다. 역사적으로 한때는 강성했으나 수없이 인근 외국 군대에 수난을 당한 비극적인 민족이 아르메니아인들이다. 지금 터키와 인접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과 이웃한 소국이다. 1992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해발 1,800m에 위치해 있고 인구 360만 명의 소국이다. 이 영화는 그 당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160만 명이 희생된 1915년을 배경으로 한다.
테리 조지 감독 작품이다. 주연으로 미국인 사진기자 역에 크리스찬 베일, 아르메니아 출신 의대생 미카엘 역에 오스카 아이삭, 매혹적인 아르메니아 여인 아나 역에 샬롯 르 본이 출연했다.
터키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대대로 약재상을 하는 집안의 미카엘은 좀 더 체계적인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유학을 결심한다. 유학 경비는 약혼녀의 지참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3년 예정으로 유학을 떠난 미카엘은 콘스탄티노플의 친척집에서 기거한다. 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하며 부를 꽤 축적한 당숙이었다. 이 집에 자녀들의 무용 교사로 와 있는 아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아나도 통신사 기자로 일하는 미국인 약혼자크리스가 있다. 당시 상황이 매우 급박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아나와 미카엘은 사랑에 빠지며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각자 약혼자가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 된다. 이 영화의 제목 ‘프로미스’의 의미로 보인다.
터키 정부는 우선 미카엘의 당숙을 체포하고, 그를 구하러 간 미카엘도 끌려가서 철도 공사에 강제로 투입되어 중노동에 시달린다. 공사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미카엘은 천신만고 끝에 고향집으로 향하지만, 터키군의 무차별 학살에 경악한다. 겨우 살아남은 여동생과 어머니를 데리고 산속으로 숨어들고, 터키군의 집요한 추적이 계속된다. 크리스는 터키군에 잡혀 스파이로 처형될 위기에 처하는데, 미국대사관의 개입으로 풀려난다. 그 배경에는 이들의 터키 친구 장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총살당한다. 크리스와 아나는 아르메니아인들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민행렬에 참여한다. 여기서 다시 미카엘을 만나고 크리스도 상봉한다. 터키군이 난민들을 몰아 붙이자 해변으로 도망치고, 프랑스 해군이 함정을 이끌고 와서 이들을 구명한다. 이집트 난민수용소로 보내는 것이다. 이때 4천 명을 구명했다. 1950년 10만 명의 피난민과 10만 명의 군인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킨 우리나라 흥남 철수작전이 연상되는 일이다.
터키에는 지금도 약 3천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나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쿠르드족의 절반이 터키에 살고 있다. 쿠르드족은 한때는 IS를 퇴치하기 위해 공을 세웠으나 터키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터키군의 공격을 받고 있고 대학살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도 후세인 정권은 쿠르드족이 이란 편을 들 것을 우려하여 쿠르드족 대학살을 집행했다. 이 정도 인구를 가진 민족이 역사상 한 번도 독립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독립투쟁과 대학살은 중동의 불씨로 계속 문제를 일으킬 전망이다.
힘없는 약소민족은 늘 이웃나라에 수난을 당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한다. 약소국의 수난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나가야 할지 깨닫게 한다. 같은 약소국으로서 동병상린의 공감을 주는 영화이다.
어르신도 버스·전철·버스 환승 때 전철하차부터 30분 내 버스를 탑승하면 버스요금이 환승할인 되도록 이끌었다. 버스요금 2중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우리나라 대중교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노인복지법 시행으로 어르신의 전철요금은 무료가 되었다. 문제는 전철·버스요금 환승할인제가 도입되면서 발생하였다. 환승할인이 일반인교통카드는 되는데 어르신교통카드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발견한 때가 2016년 8월이었다. 전철무임이라는 어르신교통카드를 사용해도 일반인교통카드를 사용할 때와 비교하여 요금이 줄지 않았음을 알고부터다. 어르신교통카드에 찍히는 전철요금 ‘0’이라는 착시에 전철무임커녕 오히려 요금폭탄을 맞고 있음을 몰랐다.
교통요금 환승할인 전에는 전철 1250원, 버스 1200원 합계 2450원이었다. 환승할인제가 도입되어 일반인은 49.0% 1200원이 할인되어 1250원만 부담한다. 전철·버스요금을 기본요금으로 거리비례계산하면 전철 638원, 버스 612원 꼴이다. 하지만 어르신의 교통요금은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환승할인이 되지 않는다. 일반인보다 96.0% 1200원 더 많은 2450원을 부담한다. 전철요금은 국가가 무임보상하고 버스요금은 어르신이 부담한다. 국무조정실을 비롯한 십여 정부부처, 지자체, 위원회, 철도사업자 등에게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시정을 꾸준히 요구하였다.
전철·버스 환승할인 크게 보아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전철·버스 1회 환승과 버스·전철·버스 번갈아 타는 2회 환승이다. 이번에 해결한 2회 환승의 경우 어르신의 교통요금은 앞 버스하차 후 30분 이내에 다음 버스를 타야 버스요금이 환승할인 되었다. 현장의 버스 정류장 이동, 전철탑승, 버스 대기시간 등을 살폈다. 이 시간 내 전철을 이용하고 환승할인 받기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버스요금 환승할인 실행을 위하여 자주 의견을 제시하고 전화를 하였다.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교통정책 담당자들을 만나서 이해를 구했다.
일반인과 같이 전철하차 후 30분 이내 다음 버스를 탑승하면 환승할인이 적용되도록 요구하여 이를 시정하였다. 1월 17일 서울시 교통정책 담당 공무원과 전철·버스를 동행 탑승하여 현장 확인하였다. 전철과 전철, 버스와 버스끼리는 교통요금 환승할인이 원활하였으나, 무임 전철과 유료 버스 사이에는 교통요금 거리비례계산 기능이 없다. 전철무임커녕 어르신이 일반인보다 교통요금을 더 부담하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개선이 필요한 풀어야할 숙제다.
일반인 교통카드는 전철과 버스요금을 이미 구분하여 관리하고 있다. 어르신이 전철을 이용할 때 요금을 ‘0’으로 처리하지 않고 일반인과 똑 같이 전액 합산한다. 대중교통 이용 후 일반인처럼 환승할인을 적용한다. 어르신에게 결제청구 때 총액에서 전철요금을 ‘청구할인’만 하면 모든 문재가 한방에 해결된다. 버스요금은 유료가 되고 전철요금만 무임이다. 전철만 이용자에 대한 역차별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막대한 전철무임카드 발급비용도 필요하지 않다.
올해 설날은 2월 16일 금요일로 주말을 포함해 나흘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지난해 추석 황금연휴처럼 쉬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30년 전만 해도 음력설에 이러한 연휴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89년,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설날’로 개명하며 동시에 이틀의 연휴가 더해졌으니 말이다. 한편 당시 3일 동안 쉴 수 있었던 신정연휴가 2일로 단축되며 설날연휴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 점차 늘어났고, 연휴를 여유롭게 즐기러 고궁과 테마파크 등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설날 귀성 열차표 대란
1994년 설날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에 탑승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 당시만 해도 설날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면 수개월 전부터 추운 날씨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해 철도청은 승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예매제도 개선책으로 컴퓨터 추첨 방식 도입을 추진하는 등 귀성 열차표 예매 묘안을 찾기 위해 대규모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에 시찰 나온 서울시장
1986년 설날(당시 민속절) 당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풍경. 새벽부터 귀성객으로 붐빈 터미널에 염보현 서울시장이 방문해 시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해 교통부는 귀성인파 총 200만 명 중 고속버스를 이용한 승객을 45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한복 입고 고궁나들이
1989년 첫 설날연휴가 시행되던 해, 일찍 세배를 마치고 귀경한 시민들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과 덕수궁 등 고궁나들이를 즐겼다. 또 가볍게 극장가, 어린이대공원, 대학로 등을 찾거나 스키장, 온천 등에서 여유를 보내는 이도 많았다. 당시 포근한 날씨와 긴 연휴 덕분에 거리에는 색동옷 차림의 아이들과 한복을 입은 어른들이 여느 해보다 많았다.
흥겨운 민속놀이
1990년대 초 설날을 맞아 가족이 함께 한복을 입고 널뛰기를 즐기는 모습. 당시 설날연휴 동안 서울 시내 고궁에서는 풍물과 남사당놀이 등 민속예술과 널뛰기, 투호, 윷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1988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테마파크 서울랜드와 1989년 개장한 롯데월드 등에서 열리는 놀이마당과 풍물패 공연 등을 보러 가는 것도 인기였다.
우리가 김구 선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고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것 정도의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이승만 정권과 뜻이 안 맞아 역사적으로 묻힌 부분도 많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김구 선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해줬다. 그러나 영화 제목만으로는 ‘대장 김창수’라 하여 민란의 대장 정도로 알고 봤다. 영화의 끝 부분에 가서야 김창수가 나중에 개명하여 김구 선생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제야 영화가 다소 밋밋했던 것들이 이해된다.
김구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이 영화의 배경은 1896년이니 김구 선생이 20살 때부터 시작된다.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맨 손으로 때려죽이고 체포된다. 인천 감옥소에 수감된 동안 남 다른 행동은 더 힘든 나날이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았는데 죄가 되지 않는다고 버틴 것이다. 결국 친일 내각의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지만, 글을 배운 것이 있어 거기서 간수들에게 인정받는다. 여러 가지 행정 민원도 처리해주고 하여 같은 죄수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는 특혜를 누린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을 떠 올리게 한다. 당시 문맹률이 높아 계몽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소설 ‘상록수’ 등에서 국민 계몽 부분이 자주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형수이기 때문에 결국 사형 집행 날짜가 잡힌다. 떳떳하게 죽으라며 어머니가 보낸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형장에 선다. 그러나 그때 고종 황제가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죄수들이 집단으로 황실에 사면 요청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사형 직전에 살아난 러시아 문호 토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살아났으나 사형수만 면했을 뿐이지 감옥소 신세는 마찬가지이다. 경인 철도 공사에 투입되어 더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다. 김창수는 탈옥을 결심하고 결국 탈옥에 성공한다. 한편으로는 감옥소장이 경인 철도 공사에 죄수들을 투입해 임금을 가로 챈 것을 보여주는 장부를 황실에 보내 감옥소장의 비리를 고발한다. 이 부분도 쇼생크 탈출과 비슷하다. 영화는 여기까지만 나온다. 그 뒤는 나레이션으로 김창수가 김구 선생이며 한일합방 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 되었고 해방 후 귀국했다가 암살당한 것까지 설명해 준다. 차라리 상해 임시정부 시절을 포함하여 귀국 후 암살당한 것까지 시나리오를 연결했으면 역사 영화로서 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당시 일본이 거의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대세가 기울었으니 고관들의 생각도 일본에 나라 팔아먹을 궁리만 할 때이다. 감옥소장도 비리를 저지르고도 일본인들의 배경을 믿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백성들이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알고 있어야 했는데 철 따라 농사나 짓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문맹률이 높으니 글부터 깨우치는 국민 계몽이 필요한 때였던 것 같다.
이원태 감독 작품으로 김창수 역에 조진웅, 감옥소장 역에 송승헌이 나온다. 김구 선생 영화라 해서 평점이 8.7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영화적 요소는 다소 미흡한 편이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