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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민해경의 평범한 매력
- 지금은 흔히 쓰이는 말인 ‘섹시 디바’. 그 말에 어울리는 가수로 민해경(본명 백미경·56)을 꼽으면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사랑은 이제 그만’, ‘미니스커트’ 등의 히트곡은 민해경 특유의 이국적인 인상과 더불어 한국 대중가요계의 이단아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독보적인 섹시함과 고혹적인 보이스, 시원한 가창력 등은 한국 가요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탤런트였다. 최근 소극장에서 열린 ‘대학로 릴레이 콘서트’를 통해 관객들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한 그녀를 만났다. 민해경이라는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인상들이 있다. 열정, 섹시한 눈빛, 파격, 허스키한 목소리, 카리스마 등등…. 그 인상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해경은 쎄다’. 그런데 과연 무대 뒤의 그녀 또한 정말로 그토록 ‘쎈’ 사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사람마다 사람을 보는 시선은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떤 연예인이든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릴 순 없으니 느끼는 대로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해요. 하지만 사람의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리라 믿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 민해경 올해가 데뷔 40주년. 민해경은 지난 시간을 ‘만만치 않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메여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나 추억에 집착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과거가 있어 자신이 있는 것이 맞지만 현재에 더 많이 집중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미래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뭔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사는 삶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이미 그런 삶을 너무나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게 마음의 평화잖아요. 돈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것도 아니고요.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노래를 하든 안 하든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평화로워요. 돈이 없어도 평화로운 사람들이 있듯이. 생계 때문에 노래를 해야 했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견뎌온 삶이잖아요.”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 과거와 미래는 현재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철저한 현재형 인간이다. 남편과 딸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민해경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녀가 실제로는 현재형 인간이라는 데서 깨져버린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차가운 도시 여자 같고 자유로울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정작 그녀는 저녁 여덟 시 반에 잠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집에서의 삶을 철저하게 즐기는 소위 ‘집순이’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할 일이 그렇게 많냐고. “많죠. 일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고 하루 동안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요. TV는 거의 안 보고 대신 영화를 많이 보죠. 이런 패턴이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내며 가족만을 기다리는 생활. 외롭지 않을까? “전 외로움을 잘 못 느껴요. 혼자 있어도 집안일 하느라 너무 바빠요. 완전 잘 놀아요.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면 이상하다고 하는데 혼자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집에 들어올 사람만 잘 들어오면 되고요. 바로 남편이랑 딸이죠.(웃음) 그 외에는 제가 사람에게 원래 관심이 없어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사모님처럼 자기에 관한 일 빼고 모든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내가 관심 가진다고 그 사람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바쁘고.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얘기나 뒷담화를 싫어해요. 좀 무심하죠.” 집에서 혼자 놀기를 즐기는 원조 디바라니,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색하거나 꾸며진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신에게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은근한 매력이었다. ‘독함’이 아닌 ‘일관성’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녀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전의 민해경 같지 않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충실히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스스로를 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 자신은 과거와 똑같은데 과거에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가 사람들과 좀 더 소통을 하고 있고 그런 저를 사람들이 알아주게 된 거라고 봐요.” 그동안 사람들은 민해경에 대해 단절된 모습만 보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가족은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쎄고 건방지고 교류 없고…. 제가 많이 들은 얘기들이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여자, 지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이 제 내면에 있긴 하겠죠. 그게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고요.” 진정 하고 싶은 꿈은 뒤로 하고 내키지 않는 노래로 가정을 지켜야 했던 삶. 그러면서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는 연예계에서 정상에 올라 10여 년 동안 거듭 그 자리를 지켜냈다. 언뜻 생각만 해도 쉽지 않은 일, 그게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독함’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받는 오해들은 그 독함을 위한 일관성에서 비롯된 바가 아닐까 싶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개의치 않아요. 제 욕을 해도 제게 들리지만 않게 하면 돼요.(웃음)” 노래는 곧 나 자신 지난 3월 민해경은 새로운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을 치렀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서 쉽지는 않았던 공연 준비였다. 그러나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그랬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 되는 상황을 빨리 접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내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거의 하루 만에 제가 연출을 다 했죠. 아무래도 대중가수가 히트곡만 들려주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죠.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관객들은 민해경이란 가수가 보여줄 수 있는 멋이나 맛, 카리스마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어린 시절까지 아우르는 자신의 인생을 무대에서 풀어내는 것이었다. 가수는 무대로 말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저는 그대로 꾸밈없이 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다는 보여줄 수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울고 감동받았다고 말씀을 주셨어요. 저 여자가 쎄 보여도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구나 느끼신 거겠죠. 무대에서는 그게 다 보인대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좋아해서 고마웠어요.” 다소 빤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지점에서 그녀에게 노래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많이 들은 질문이에요. 돈이다, 생명이다 얘기 많이 하잖아요. 얼마 전에 생각해봤는데, ‘노래는 나와 같구나. 그래서 그 노래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는 곧 저예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숙성된 느낌으로 부르게 돼요. 한 번 부를 때보다는 열 번, 열 번 부를 때보다는 백 번 부를 때가 점점 나와 같아지는 느낌이죠.” 위로가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점점 자신과 노래가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민해경이 지금 가수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궁금했다. “저는 본분이 가수여서 계속 머릿속에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것을 해야지, 그걸 해야지’ 하지는 않아요. 그런 시기는 지났으니까요.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주어졌을 때 그걸 잃지 않고 잘 유지하고 싶은 거죠. 그게 베테랑이라고 봐요.” 그녀는 최근 신곡 ‘We Love You’를 발표했다. ‘바람 바람 바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후 녹색지대의 앨범을 제작한, 성공한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김범룡이 작곡한 노래다. “처음 노래는 원래 작곡가 본인이 부르려고 했던 남자 노래였어요. 그런데 제가 받아서 잘 풀어나가게 됐죠. 순수하게 제가 선택해서 가사를 만든 노래인데, 제 마음이 이 노래의 가사와 같아요. 비유법도 은유법도 없는 순수한 가사로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노래로 만들고 싶었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여느 평범한 여자처럼 그녀도 남편을 만난 것을 정말 잘한 일로 꼽았고 딸을 낳아 키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은 항상 마지막 관문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너무 감사해요. 지금 결혼한 지 22년이 됐는데, 그 전에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뒤돌아볼 수 없었던 것을 결혼 후에 조금씩 알게 됐어요.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일 또한 돈을 주고 할 수 없는 경험이죠.” 열정, 화려함, 사랑… 장미 같은 그녀 삶에 더없이 만족하는 사람. 민해경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만족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가수로서의 삶이다. 수십 년을 최고의 가수로 살았던 사람이 가수가 어렵다는 말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무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무대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고 하는데, 안 돼요. 그래서 힘든 거죠. 무대는 서면 설수록 어려워요. 지금 더 많이 느껴요. 옛날엔 못 느꼈죠. 완벽한 무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안 그래요.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즐기지 못하는 거 같아요. 물론 막상 무대에 서면 괜찮지만 서기 전까지의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 그것은 그녀가 가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무대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그녀가 더욱 진화하는 모습을 좀 더 오래도록 확인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무대를 즐기게 된 가수로서의 민해경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 모습은 장미’, 민해경의 노래처럼 역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 모습은 장미 같았다.
- 2018-05-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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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딩숲 강남에서 오롯이 음식 전통 지켜온 ‘원주추어탕’
- 1981년. 어렵게 마련한 임대료를 손에 쥐고 며칠 영동(지금의 강남)을 헤맨 김옥란(80) 씨의 마음은 다급했다.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달만 참으면 평생 먹고산다”고 호언장담하던 점쟁이 말도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몫이 좋은 가게 터는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복덕방에서 추천해준 곳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몇 년의 고생과 실패로 날이 선 직감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강남 빌딩숲 속 명물이 된 교보타워사거리 ‘원주추어탕’의 시작이었다. 원주추어탕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막내아들 이남수(49) 사장은 지금 자리에서의 개업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첫 3년은 가족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미아리에 첫 번째 가게를 차렸지만 가게 자리를 고르는 일도, 식당을 운영하는 일도, 모두 처음이었던 이들 가족에게 손님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때문에 강남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온 가족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왔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게 문을 급하게 열었는데 식탁 바닥에 입 닦은 휴지와 나무젓가락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첫날부터 손님이 밀려들어 부모님이 그것들을 치울 겨를이 없었던 거죠. 미아리에서 가게를 차렸을 때 3년간 그렇게 많은 손님을 대해본 적 없었어요. 그날 부모님은 꽤 지쳐 보였어요.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날부터 손님은 점점 더 늘어났어요.” 원주식 추어탕 서울에 보급한 원조 원주에서 온 이 가족의 가업이 식당이 된 사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전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많은 가족의 선택처럼 이들도 가난을 피하기 위해 1977년 서울행을 결정했다. 아직도 매일같이 출근해 재료를 살피고, 맛을 확인하는 김옥란 씨는 원주추어탕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네 앞집 아저씨가 미꾸라지 잡는 데 선수였어. 양재기 한가득 잡아온 날이면 고추장을 휘휘 풀어 야채와 함께 끓여 동네잔치를 벌였거든. 미꾸라지도 잘 잡고 음식도 맛있으니 주변에서 식당을 해봐라 했는데, 차리고 나서 꽤 잘됐어. 손님이 많은 날이면 가끔 나도 가서 돕곤 했는데, 한 손님이 서울에서도 해봐라 하는 얘기에 내가 차려봐야겠다 싶었어. 식당 주인도 돕겠다 하고. 그래서 미아리에 자릴 잡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엉뚱한 데 식당을 냈으니 잘될 리 없었지.” 당시 이웃이었던 원주의 추어탕 집은 현재까지도 성업 중이다. 물론 서울의 원주추어탕과의 교류도 여전해서 이남수 사장은 그곳을 아직까지 ‘큰집’이라고 부른다. “미아리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 추어탕 한 그릇에 1200원이었어. 처음엔 재래식 요리법을 고집해서 식탁 앞에서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냄비에 넣었는데, 손님 옷에 국물이 튀고 난리도 아니었지. 3년간 고군분투하다 안 되고 빚낸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원주로 내려가야겠다 싶었는데, 이대로 내려가기엔 그간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어. 그러다 그 시기에 영동에 가게들이 들어선다는 얘기에 거기서 다시 시작해보자 했던 거지.” 강남 개발 광풍 속에서 지켜온 전통 모자는 가게가 자리 잡았던 1981년 강남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1976년 준공된, 길 건너 제일생명 건물은 당시 그 지역이 ‘제일생명 사거리’로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했고, 그 옆에는 영흥자동차학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영동시장까지는 목재상, 골재상 등 건축과 관련한 각종 장비와 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강남은 정부 주도 개발의 핵심에 있었고, 그 시기는 강남의 개발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제 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워졌다. 위용을 자랑하던 제일생명 빌딩이 철거되고 2003년 교보타워가 들어섰으니 다른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고집스레 당시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원주추어탕이 운영 중인 건물이다. 197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돌아보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강남 제비’의 제비집도 여전히 처마 밑에 그대로다. 그중 모자가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는 여전히 현역으로 가게 앞을 지키고 있는 간판이다. ‘원조 고유의 음식’이라고 씌어 있는 간판은 이 사장의 선대가 직접 다듬어 제작한 것이다. 지금 위치에 자리 잡고 나서 2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식당은 잘 운영됐다. 당시 건물에 4개의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하나씩 인수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다. 그런데 한창 장사가 잘될 무렵 건물주가 부도가 나 건물이 은행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결국 무리를 해서 건물을 샀고, 원래 1층이었던 건물은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누구도 못 말린 재료 고집 이남수 사장이 경영을 맡게 된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원래 볼링선수였던 그는 서울시 대표로도 활약했고 실업팀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머니 김옥란 씨에게는 배부른 직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게로 와 도와달라고 했지. 식당일이 워낙 힘드니까. 처음엔 대를 이어 식당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손님도 늘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의지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아들 셋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성남시 서현동에 ‘원주추어탕’을 차리면서 독립했고, 둘째는 인근에서 번듯한 주점을 차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막내인 이 사장이 원주추어탕을 이어받게 됐다. 어머니 김 씨는 이 사장이 가게에 합류했을 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고 기억했다. “의욕이 넘쳤어. 나는 그동안 잘해왔으니까 잘해온 방식을 고수하고 싶은데, 자꾸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는 거야. 처음엔 불안해서 혼내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는데, 지내다 보니 제대로 된 의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래서 지금은 뭘 하자고 하면 잘 듣는 편이야.” 새로운 시도를 한 메뉴 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메기불고기. 한 가지 메뉴로 사랑받는 맛집이 메뉴를 추가한다는 것은 꽤 부담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의 고집으로 탄생한 메기불고기는 이제 대표 메뉴가 됐다. 이 사장의 또 다른 고집은 추어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미꾸라지와 고추장에 관한 것. 특히 손님에게 좋은 미꾸라지를 내놓는 일은 그의 평생 숙제 중 하나다. “원래 미꾸리로 불리는 토종 미꾸라지를 썼어요. 몸통이 동그란 모양이라 동글이라고도 불리는데 성장 속도가 느려 양식에 적합하지 않아요. 또 자연산은 당연히 수급이 어렵죠. 그러다 보니 넙죽이라 불리는 중국산 미꾸라지가 대세가 됐죠.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그걸 쓰지만, 지금 동글이 양식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성공해서 더 맛있는 추어탕을 손님에게 내놓는 것이 꿈이에요.” 구할 길이 없어 자연산 미꾸라지를 1년 내내 재료로 쓸 수는 없지만 소량이라도 매수가 가능한 매년 7월과 8월에는 자연산을 확보해 특별 메뉴로 내놓는다. 단골들은 절대 놓치지 않는 연례행사다. “다른 지역 추어탕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고추장 역시 제가 신경 쓰는 재료예요. 3~4년에 한 번씩 담그던 고추장을 이젠 매년 만들고 있어요. 많이 만들어놔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제가 욕심을 부려요(요즘 손님용으로 사용 중인 고추장은 16년이나 묵은 것이다). 고추장 담글 때 어머니는 쉬셔도 된다 할 정도로 이제는 자신 있어요. 간장은 씨간장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있어요. 고객들 입맛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간장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를 해보는 거죠.” 자리를 잘 잡아서 맛집이 되고 노포(老鋪)가 될 수 있었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강남은 수많은 식당이 생겼다 사라지는 중심 상권의 대표 지역이다. 원주추어탕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맛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미꾸라지가 난임부부에게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포장해가는 고객도 늘었다. 난임시술로 유명한 주변 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 퍼진 속설 탓인지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실제로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간증과 함께 감사인사를 전하는 부부가 찾아오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3대로 이어진 ‘고유의 음식’ 이 사장에게는 최근 가슴 벅찬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올해 아들이 원주추어탕 3대 사장이 되겠다며 식품공학과를 선택해 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에게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제게는 그런 뜻을 내비친 적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동생하고 아이들끼리는 자주 이야기했던 모양이에요. 식당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죠. 어릴 때부터 식당에 자주 와 일을 돕곤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요즘엔 셰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고, 또 대견하기도 해서 반대하진 않았습니다.” 입학원서 내는 날 할머니와 아버지, 아들 3대는 특별한 사진을 찍었다. 장소는 학교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식당에 내건 ‘원조 고유의 음식’ 간판 앞에서였다. 이 사장은 이 사진을 계산대 앞 잘 보이는 곳에 세워뒀다. “아이가 대를 이어준다고 하니 저도 꿈이 생겼어요. 좋은 식당 주인을 만들기 위해 제가 알아놓은 주변 식품기업, 제조시설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요. 본인은 힘들겠지만.(웃음) 저희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 이 식당을 만드셨고, 제가 물려받은 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손님을 위해서만 해왔어요. 하지만 아이가 이 식당을 3대째 운영하게 될 땐 사회를 위한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주변과 세상을 보살필 수 있는 원주추어탕이 되길 바랍니다.”
- 2018-05-0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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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바위에서 다시 태어나다
-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필자가 자란 곳은 경남 진해다. 요즘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과거 진해시에서 마산시, 창원시와 함께 창원시로 합병되어 진해구가 되었다. 군복무를 해군이나 해병대에서 하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진해는 군항도시이자 아주 오래된 계획도시, 그리고 벚꽃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이른 봄만 되면 필자는 진해의 시루바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표고 653m, 봉우리 높이 10m, 둘레 50m의 크기로 우뚝 솟은 시루바위는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그 바위가 있는 웅산의 이름을 따라 웅산암(곰메바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루봉은 옆의 천자봉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천자봉은 중국의 천자 진나라 황제가 장생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잠시 쉬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근대에는 명성황후가 세자를 책봉하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웅산신당’을 두어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빌었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외지인들은 가끔 시루봉(바위)과 천자봉을 혼동해 부르기도 한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 어느 봄날이었다. 혼자 산에 올라 시루바위를 보고는 10m 위가 한없이 궁금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니 길도 험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절벽뿐이어서 바위를 잡고 조심조심 기울기가 약 110도 정도 되는 비탈진 암반을 올라갔다. 젊은 혈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지 맑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가 보인다 할 정도로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이어서 혹시 대마도가 보이나 둘러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었다. 잠시 진해만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내려가려고 하니 올라올 때와는 길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인적이 드물어 소리쳐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고 요즘처럼 핸드폰 같은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순간 “아! 여기서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왕 굶어 죽게 되었으니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 올라오던 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더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자 하면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경사진 곳이라 위에서 보니 밑의 바위는 안 보이고 하늘 위에 그냥 솟아 있는 것 같은 느낌밖에 들지 않아 현기증이 일었다. 포기하려다가 다시 탈출을 위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솟은 바위를 양손으로 잡고 발을 내리니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잘못해서 양손에 힘이 빠지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경사진 곳을 딛고 올라왔으니 철봉하듯 몸을 움직이면 발이 바위 어디엔가 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더니 예상대로 발이 바위 끝에 닿았다. 바위를 오를 때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내려왔다. 그때 필자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진해 시루바위 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해병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웅산. 해군이나 해병으로 입대하면 최소 한 번쯤은 오르는 산이다. 웅산의 시루바위 그리고 그 옆에 웅장한 모습의 천자봉이 있는 진해는 나를 키워준 자랑스러운 고향이다. 초등학교 교가가 생각난다. “ 높이 솟은 천자봉 병풍을 삼아 굽이치는 푸른 물결 앞에 맑았네. (중략) 문화의 밝은 빛을 갈고 닦아서 누리를 비취어줄 등불이 되자.”
- 2018-05-0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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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를 풍미한 복싱 챔피언 ‘짱구’ 장정구
- 5년 동안 15번의 방어전을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챔피언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장정구(張正九·56). 사각 링 위에 올라서면 그는 한 마리의 야수로 변했다. 상대가 주먹을 맞고 쓰러지면 장내는 “장정구! 장정구!” 그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체육관 입관비로 1500원을 겨우 냈던 그가 대전료로 7000만 원을 받는 복싱 스타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0년대 복싱 인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십니더. 그때만큼의 인기를 되찾긴 힘들 거라 봅니더. 그래서 기분이 좀 그렇십니더.” 강렬한 사투리 뒤로 오늘날의 복싱을 생각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야구선수의 연봉이 2000만 원이었던 시절, 장정구의 대전료는 한 경기당 7000만 원, 방어전 후반에는 1억 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그 액수만 봐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당시의 복싱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복싱 중계가 있는 날이면 길거리는 한산했다. 대신 TV가 있는 전파상과 다방에는 경기 중계방송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린 시절의 장정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TV 앞에 서서 주먹을 뻗으며 복싱선수를 흉내 내던 그는 그렇게 복싱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나의 은인, 심영자 사모님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별명 ‘짱구’는 그의 이름 ‘정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생긴 호칭이었다. 천방지축이었던 그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이 또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싸움이라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그가 복싱에 흥미를 느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열두 살 짱구는 어머님께 조르고 졸라 1500원을 얻어 부산 극동체육관에 입문했다. 그는 “나에겐 공부가 아니라 복싱이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열네 살 때에는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데뷔해 부산 아마추어 최고 선수권 모스키토급 준우승, 부산 신인선수권 동급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꼬맹이치고는 제법이었다. 하루는 체육관에 ‘소매치기 복서’로 불리던 故 김성준 선수가 방문했다. 스파링 상대를 찾던 도중 장정구가 파트너로 지목됐고 이 사건은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하는 데 물꼬를 틀어준 계기가 됐다. “당시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님의 부인인 심영자 사모님이 김성준 선수를 후원하고 계셨어요. 그날 사모님의 오빠인 심준섭 씨가 구경하러 오셨는데 스파링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추천을 한 거죠. ‘부산에 짱구라는 놈이 있는데 눈여겨봐라’ 하고 말이죠.” 이후 문덕만 내외는 장정구의 두 주먹을 믿었고 그가 복싱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자택으로 불러들여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정구는 마치 친아들처럼 자신을 돌봐준 그녀를 ‘어머니’,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스무 살 장정구, 정상에 오르다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한 뒤 드디어 첫 번째 타이틀전이 잡혔다. 상대는 8차 방어를 기록했던 파나마의 일라리오 사파다(Hilario Zapata). 쉽지 않은 상대였다. 경기를 12라운드까지 끌고 갔지만 결과는 판정패. 프로 데뷔 2년 만에 처음으로 당한 패배이자 18전 18승 무패 행진이 깨진 날이기도 했다. 분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날의 패배가 이후 15차 방어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전에는 시합 올라가기 전에 대충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싸웠거든요. 근데 한 번 지고 나서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거죠. 지고 난 이후론 상대방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했어요.” 운이 좋게도 사파다와의 재대결이 성사됐다. 1983년 3월 26일 대전 충무체육관은 4000명이 넘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마치 그가 이길 것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심이 장정구에게 다가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3라운드 만에 KO승이었다. “챔피언이 되던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우연히 위를 올려다봤는데 뿌옇게 보이는 게 마치 꿈결 같았어요.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는데 귀는 윙윙거리고, 당시에는 실감이 잘 안 났어요.(웃음)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세월 참 빠르죠.” 열다섯 번을 지켜낸 챔피언 벨트 타이틀 방어전만 15차까지 치른 그다. 분명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터. 챔피언이 되던 순간이 최고였다면 최악의 상황은 언제였을까. 그는 일본 도카시키 가쓰오(渡嘉敷勝男)와의 4차 방어전을 꼽았다. 이 경기는 복싱 팬들이 꼽은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포항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기온이 35℃까지 올라간 날이었어요. 게다가 몸무게는 14kg이나 뺐지, 날씨는 너무 덥지, 상대는 쓰러지지도 않지… 경기 후반엔 냅다 도망가고 싶었죠.” 1라운드부터 수십 번의 주먹이 오고 갔다. 1라운드 종료 직전엔 다운을 얻어냈지만 도카시키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맞으면 맞을수록 지독하게 더 달라붙었다. 경기 후반엔 때리다 지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정도였다. “정말 징그러운 선수였어요. 마음 같아선 주저앉고 싶었는데 하필 광복절이 지난 지 3일밖에 안 된 날이었거든요. 일본인하고 겨룰 때는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하잖아요.(웃음) 이렇게 포기하면 국민한테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온힘을 다해 싸웠죠. 이기고 나서 엎드려 우는데 탈진돼서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힘을 쏟고 나면 그는 항상 혈뇨를 봤다. 경기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경기 전까지 이어지는 체중 관리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고통이 가장 컸죠. 특히 갈증과의 싸움. 물을 한 모금만 마셔도 체중이 변하니깐요. 공부할 때 여자를 돌같이 보라고 하잖아요. 복싱선수들은 물을 돌같이 봐야 합니다.” 일명 ‘김밥 세 조각’ 사건이 있다. 그가 스파링을 준비하고 있는데 트레이너가 먹고 있는 김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결국 사정사정해서 세 조각을 얻었다. 스파링이 끝나면 먹으려고 고이 모셔놨는데 김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였다. 범인(?)은 체육관 동료. 동료고 뭐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불같이 성질을 내고 그대로 체육관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김밥 세 조각이 뭐라고… 그런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죠. 못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김밥 세 조각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 아니었을까요?(웃음)” 체중과의 싸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내복에 땀복을 입고 뛰어야 했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뛰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또 비 오는 날이라고 운동을 쉴 순 없잖아요. 그럼 반포터미널로 가는 거예요. 그곳 지하에서 뛰는데 먼지가 엄청나단 말이에요. 집에 와서 가래를 뱉으면 시커맸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운동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짠합니다.” 은퇴 그리고 복귀 16차 방어전을 앞두고 장정구는 챔피언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챔피언 벨트를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각종 개인사가 겹치면서 복싱을 계속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싱을 그만두니 경제적인 문제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1989년 다시 링으로 복귀한 장정구. 그러나 움베르토 곤살레스(Humberto Gonzalez)와의 재기 전에서 판정패를 당하고 1990년과 1991년 연달아 패배하며 42전 38승 4패의 전적에 3패의 오점을 보태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선 KO패를 당하며 사실상 복서생활을 마감했다. “복싱선수에게 가장 창피한 일은 지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복귀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복싱뿐이었으니깐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복싱밖에 몰랐어요. 장정구에게 복싱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현재 그는 ‘장정구복싱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운동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말하지만 점점 뒤안길로 밀려나는 듯한 복싱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시합 때 찍은 사진, 시상식 때 찍은 사진, 그 수만 해도 엄청나거든요. 그런 자료들을 모아서 1980년대 복싱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장정구 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물론 입장료는 받아야죠. 비싸진 않을 거예요. 대신 모든 수익은 불우이웃에게 쓰이는 걸로.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꽤 괜찮은 계획 아닌가요?”
- 2018-05-0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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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잡자” 日에서 부는 로즈마린산 열풍
- 2월 26일 일본에서는 재미있는 행사가 하나 열렸다. ‘제1회 로즈마리산 연구회’가 그것. 오카야마대학교, 오사카대학교 등 일본의 여러 대학 학자들이 모인 이 행사의 목적은 단 하나, 로즈마린산의 효과를 알리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로즈마린산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 물질의 치매 예방효과 때문이다. 그만큼 치매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단카이 세대가 75세 이상의 후기 고령자가 되는 2025년에는 ‘치매 사회’에 돌입하게 되며, 이때 치매 환자는 최대 730만 명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로즈마린산이 과학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8년. 이탈리아 과학자가 이 성분을 허브 식물인 로즈마리에서 발견해 로즈마린산(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즈마린산은 발견 이후에 건강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기능들이 밝혀지면서 많은 연구자의 주목을 받았다. 로즈마린산은 폴리페놀의 일종. 폴리페놀은 식물에서 발견되는 페놀 화합물로 노화 방지나 혈관 건강에 도움을 주는 대표적 항산화물질로 손꼽힌다. 로즈마린산 역시 대표적인 항산화물질 중 하나로, 로즈마리뿐만 아니라 스피어민트, 레몬 밤, 페퍼민트, 타임, 바질 등과 같은 허브 식물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 로즈마린산의 효과는 다양하다. 뇌의 신경전달물질 생성에 영향을 줘 우울감이나 불안을 완화해주고, 알레르기 질환을 개선하는 효과도 있다. 또 항균작용도 있어 식품의 부패를 방지할 때 활용되기도 한다. 인슐린 감수성에 변화를 줘 당뇨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과거 유럽인들이 페스트 전염을 막거나 액운을 쫓기 위해 로즈마리를 부적이나 울타리 재료로 사용한 것이 괜한 수고는 아니었던 것이다. 치매 치료제와 유사한 효능 실제로 국내에 발표된 다양한 학술자료를 봐도 급성전골수성백혈병부터 중금속에 고사한 청각세포를 살리는 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상지대 연구팀은 로즈마린산이 대장염 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중 일본에서 로즈마린산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치매 예방효과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치매 중 가장 대표적인 질환으로 꼽히는 알츠하이머병과 루이소체 치매는 뇌의 아세틸콜린을 생성하는 세포의 저하로 인해 발생한다. 때문에 현대의학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세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 에스테라제의 작용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3년 최초의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등록된 타크린부터 1996년에 허가를 받은 아리셉트 역시 아세틸콜린 분해 억제제의 한 종류다. 문제는 이러한 치료제들의 심각한 부작용에 있다. 최초 치료제 타크린은 간에 대한 부작용 때문에 거의 쓰이지 않고 있고, 다른 약제 역시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에서 흔한 깻잎에 ‘가득’ 부작용 부담이 적은 자연 성분인 로즈마린산 역시 아세틸콜린의 분해를 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일본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실제로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온라인 쇼핑몰인 라쿠텐이나 아마존에서 로즈마린산을 검색하면 다양한 건강식품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조기(소엽)에도 로즈마린산 성분이 많은 것이 발견되면서 차조기 관련 식품도 많고, 항산화 작용에 초점을 맞춘 로즈마린산 성분의 화장품도 다양한 종류가 출시되어 있다. 국내에선 최근 여성 연예인과 다이어트 클리닉을 중심으로 새로운 다이어트 방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레몬밤 속 로즈마린산 성분의 지방분해 기능이 주목의 이유였다. 하지만 건강에 좋다며 향도 익숙하지 않은 외래 품종의 허브를 무작정 먹기엔 무리가 있다. 로즈마린산을 쉽게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식물이 있다. 바로 들깻잎이다. 농업진흥청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들깨의 마른 잎에는 1g당 76mg의 로즈마린산이 들어 있다. 이는 로즈마리(11mg/g)보다 약 7배나 많은 수치다. 농업진흥청은 이러한 들깻잎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들샘’ 같은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 2018-04-0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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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두면 쓸모 있는 걷기 꿀 Tip①
- 걷기가 일상의 행위를 넘어 여행이 되려면 나름의 계획성과 준비가 필요하다. 유유자적 도보 여행가를 꿈꾸며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전 알아두면 쏠쏠한 걷기 정보를 담아봤다. ◇웹사이트로 걷기 코스 찾기 두루누비 www.durunubi.kr 걷기와 더불어 자전거 길까지 교통, 숙박, 음식, 문화 등 관련 정보를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다. 길 이름으로 검색하거나 지도에 표시된 아이콘을 클릭해 지역에 따라 코스 찾기가 가능하다. 코스에 대한 소개 글과 사진, 지도, 거리, 시간, 난이도, 편의시설 등에 대한 기본 정보와 전문가 평점까지 골고루 담았다. ‘여행일정 짜기’, ‘이달의 추천 길’ 등을 이용하면 더욱 수월하게 도보여행 계획을 짤 수 있다. 서울두드림길 gil.seoul.go.kr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강·지천길 등 서울의 도보 코스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둘레길 8개 코스의 지도와 거리, 소요시간을 비롯해 난이도, 진입로 교통정보, 주변 볼거리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해당 자료는 그림 파일로 다운로드 및 출력 가능하다. 한양도성길의 경우 서울두드림길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도메인(seoulcitywall.seoul.go.kr)을 직접 입력해 접속하면 된다. 강화나들길 www.nadeulgil.org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강화나들길은 총 20개 코스로 연결돼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려시대 왕릉 등 유적지와 함께 저어새, 두루미 등 천연기념물 철새가 서식하는 자연환경까지 경험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거리, 소요시간, 난이도, 주변 볼거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걷기 모임 일정과 더불어 ‘나들길지기’의 연락처와 콜버스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강릉바우길 www.baugil.org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 400km의 코스다. 산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대부분이라 경사가 높지 않아 초보 여행자들에게 부담이 덜한 편이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교통정보, 준비물을 비롯해 길마다 히스토리를 담은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jirisantrail.kr 지리산둘레길은 전북, 전남, 경남을 아우르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길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총 22개 구간으로 나뉜 코스의 지도, 거리, 예상시간, 난이도뿐만 아니라 해발고도까지 볼 수 있다. 더불어 주요 경유지와 안내센터 전화번호, 민박 정보, 마을회관 전화번호 등을 제공한다. 해파랑길 haeparang.org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 장거리 도보여행 길이다. 고성 구간, 울진 구간, 포항 구간 등 크게 10개 구간으로 나뉜 50개의 코스가 있다. 사이트에서는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 난이도를 비롯해 지역별 대표 연락처와 전 구간 교통편 확인이 가능하다. 제주올레길 www.jejuolle.org 제주올레길 18코스 정보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사이트다. 각종 안내소, 화장실, 숙소, 식당, 볼거리, 즐길거리와 시간대별 날씨와 미세먼지, 오존 상태, 휠체어 가능구간 정보도 제공한다. 걷기 또는 제주 여행 관련 행사, 축제, 프로그램 소개와 제주 소식,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는 조언까지 알차게 담겨 있다. ◇기분 좋은 걷기 매너 01 오르막길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에게 길 먼저 양보하기 02 추월할 때는 앞사람에게 양해 구하기 03 시끄러운 음악이나 요란한 행동 삼가기 04 지정된 노선을 이용하고 안전수칙 지키기 05 걷기 중 음주, 흡연하지 않기 06 야생동물에게 먹이 주지 않기 07 쓰레기 되가져오기 08 여럿이 걸으며 길 막지 않기 09 주변 농작물과 열매는 눈으로만 바라보기 10 공공시설물 깨끗하게 사용하기 11 도로변이나 좁은 길 지날 때는 한 줄로 걷기 12 지역 문화 및 지역민 존중하기 13 위험 구간 발견하면 제보하기 14 이정표나 길 표식 훼손하지 않기 15 길가에 핀 꽃과 나뭇가지 꺾지 않기 ◇2018 주요 걷기대회 일정 △4/21~22 제12회 한국 100km 걷기대회 4/26~29 IML 총회 및 스웨덴국제걷기대회 △5/12 제5회 고양누리길 전국걷기축제 △5/18~27 재미대한걷기연맹 2018 미국그랜드캐니언 걷기 △6/2~3 제18회 일본 SUN-IN 미래걷기대회 △7/17~20 제102회 네덜란드 나이메헨 국제걷기대회 △9/15~16 제2회 낙동강 세븐 스테이지 걷기대회 △10/13 제9회 군산 66km 새만금걷기대회 10/20~21 △제11회 울산 태화강전국걷기대회 △제8회 부산 갈맷길국제걷기대회 △제4회 영주 소백힐링전국걷기대회 △10/27~28 제24회 원주국제걷기대회 △11/2~5 제41회 일본 히가시마쓰야마 국제걷기대회 △11/10~11 제6회 일본 SUN-IN 100km 걷기대회 △11/17~18 제10회 인도네시아 족자 국제걷기대회 △12/1 2018 워커인의 밤
- 2018-04-04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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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장혜진, 남자로 다시 태어나 야성적인 목소리의 가수가 되고픈 천생 가수
- TV조선 프로그램 ‘강적들’에서 나와 같이 방송했던 이준석이 독립야구연맹 총재로 취임하던 날 행사장에서 가수 장혜진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조만간 인터뷰합시다!” 하고 대시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며 그녀의 노래에 심취했던 한량 이봉규가 동물적으로 반응했던 것. 우물쭈물하는 장혜진을 보더니 내 옆에 있던 김성경 아나운서가 “인터뷰 해, 언니~ 나도 했어!”라고 거들어주는 바람에 운 좋게 다시 만났다. 장혜진은 인터뷰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노래에만 빠져 있을 뿐 모르는 사람과는 말 섞기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금세 간파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량 이봉규 특유의 느물느물 전법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면 인터뷰는 무미건조(無味乾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공손한 자세로 노래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다행히 대화가 술술 풀렸다. 장혜진은 겉으로는 야리야리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한 자기 철학을 가진,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첫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까칠할 것 같고 깍쟁이처럼 보였는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허당’이면서 따뜻한 여인의 성정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중첩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장혜진을 대가수로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완벽하게 감정을 이입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그녀에게 다중적인 성격이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이 열창했던 곡 ‘술이야’를 들었을 때 한량 이봉규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가 매일 술에 젖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순정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사의 마지막 소절 “정말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저물어가는 오늘도 난 술이야~”를 들을 때마다 1년에 360일 술을 마시는 주당 이봉규는 영락없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장혜진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술이야’를 부르면서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내뿜을 수 있나?”라고 따져 물었더니, “그만큼 힘들고 괴로워서 술에 맨날 젖어서 산다고 감정 이입했다”고 말하면서 몰입이 안 되면 노래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술은 체질적으로 안 맞아 마실 줄 모르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감정처럼 몰입할 수는 있다는 장혜진의 설명이 알듯 모를 듯했다. 체조 선수가 가수가 된 사연 그녀의 이력이 의외로 다채로웠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다. 원래는 체조 선수였지만 부상을 당해 선수생활을 접고, MBC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유명 가수들의 백코러스를 담당했는데 좀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당시 이수만이 경영하던 종로3가의 ‘SM 카페’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차 한 잔 시켜놓고 해외 유명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를 분석했다. 동작 하나하나, 의상, 조명, 창법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느라 온종일 뮤직 카페에 있어도 즐거웠다. 본인이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구입해서 의상디자인까지 하면서 “어떡하면 여성 코러스로서 가장 섹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그때부터 천생 가수의 기질이 나타났던 셈이다. 그 시절 그녀의 오랜 친구였던 강승호가 그룹 ‘소방차’의 막내 매니저로 일할 때 방송국에서 예능 PD에게 발로 차이고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장혜진은 강승호에게 “이렇게 막내 매니저로 살지 말고, 네가 제작자로 나서라. 일단 내가 너의 가수가 돼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나를 발판 삼아 인기 있는 가수들을 많이 키워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호는 일주일 만에 아시아레코드에서 계약을 따내고 신곡을 들고 장혜진을 찾아와 녹음하자고 들이댔다. 이 앨범에 바로 1991년 장혜진을 가요계에 데뷔시킨 ‘꿈속에선 언제나’라는 타이틀곡이 들어 있다. 그녀의 조언대로 강승호는 장혜진을 1호 가수로 내세워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운영을 시작해 김종서, 박상민, 박완규, 캔 등의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강승호가 한술 더 떠 장혜진에게 결혼하자며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강승호의 집념에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남편 강승호는 전형적인 0형 혈액형 성격으로 다혈질이고 저돌적이다. 장혜진을 데뷔시킬 때도 그랬고 결혼을 승낙받을 때도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결혼을 망설이던 장혜진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갖지 말고 친구처럼 이 사람과 살아봐도 괜찮겠다. 남자 뭐 별거 있어?”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 앨범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편해지기도 해서 28세 때 강승호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들이고 면사포를 썼다. 권태기,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른다 인터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장혜진도 이봉규를 경계하는 마음이 슬쩍 느슨해진 듯 보였다. 그 틈을 타 “결혼생활 26년이 되었으면 그동안 권태기도 많았겠다. 그리고 나이도 갱년기를 겪을 시기니까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고 찔러봤다. 그녀는 담담하게 “권태기나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하고 반문한다. 내친김에 “부부싸움하면 누가 이기나?” 하고 물고 늘어졌다. “남편이 이긴다. 나는 눈물부터 나와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곧바로 받아치는 것으로 봐서 이들 부부관계의 권력 서열이 대충 짐작됐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점수로 물었더니 “80점”이라고 답한다. 곧바로 가수생활 만족도를 물었더니 “100점이 넘는다”고 대답하면서 표정이 확 바뀐다.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평생 노래와 함께 살고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장혜진의 해석, 천생 가수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봉규도 평소에 가수가 최고 직업이라고 생각해왔고 “다시 태어나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빤한 답변이 예상되지만 똑같은 질문을 장혜진에게 했더니 “다시 태어나면 야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록 밴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이클 볼튼이나 레드 제플린처럼 야생의 목소리를 선호해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 그래서일까? 장혜진의 목소리에서도 뭔가 끈적끈적하고 야생성이 느껴진다. 1996년 이후 성대결절로 공백기를 거치면서 고음을 자제하고 중저음 위주의 창법을 쓰고 있지만 그녀가 야생의 목소리를 좋아해 그쪽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혜진은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한 타고난 가수이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노력파다. 하루 종일 노래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팝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실용음악과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버클리음대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녀는 또 자신이 고집하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장르의 가수들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는 등 가수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평소 장혜진의 음악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만큼의 도전이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기에 “노래 부르면서 ‘봉춤’ 같은 것을 시도하면 어떨까?” 하고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더니 장혜진은 의외로 반기면서 “핑크가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리본으로 공연을 했는데 참 부러웠다”고 본인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럴 만한 곡을 못 만나서 자신의 전공을 노래에 살릴 수 없었다는 것. 체조 전공자로서 단련된 신체 덕분일까. 장혜진은 암벽등반을 즐긴다. 밧줄을 타고 내려올 때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는다니 놀랍다.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까지 보인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캐릭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꿈은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삶의 철학을 엿본 한량 이봉규는 육십 평생을 돌아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장혜진과 인터뷰하는 동안 많이 배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에 감사해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쳐본다. 땡큐! 장혜진!
- 2018-03-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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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문경시 이화령 산골에 사는 하득용·안미정 부부
-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3-1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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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금리 파티’ 막 내려… 금리인상 대비하라
- ‘저금리 파티’가 끝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략 10년간 지속돼온 저금리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미 국내 금융시장에서도 금리 인상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 금리 인상은 은퇴 후 예금 이자로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숨통을 틔워줄 수 있지만, 빚을 가진 이들에게는 직격탄이 될 수 있다. 당장 은퇴 후 자영업에 뛰어든 ‘베이비부머(1955~1963년)’ 세대가 빚의 굴레에 갇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美 금리인상, 국내 영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지난 1월 말 성명을 통해 “시장을 기반으로 한 물가가 최근 수개월간 상승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금리 인상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되며 자산시장을 요동치게 했다. 글로벌 증시는 폭락했고, 미 국채 금리는 급등했다. 미 연준은 지난 2015년 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며, 금리 인상의 시동을 걸었다. 2006년 이후 10년 만이었다. 본격적인 금리 인상기에 접어드는 2018년에는 약 3차례 수준의 금리 인상이 예고돼왔다. 문제는 금리 인상의 속도가 예상외로 빨라지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4차례 금리 인상도 가능한 것으로 본다. 최근 한국은행 뉴욕 사무소에 따르면, 주요 해외투자은행(IB) 16개 기관 중 6개 기관이 올해 미 연준이 금리를 4차례 인상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월 조사 때보다 2개 기관이 더 늘었다. 올해 3차례 인상을 전망한 곳은 9개 기관으로, 전월보다 한 곳이 늘었다. 이민구 한국씨티은행 WM상품부 부장은 지난해 말 한국경제매거진 ‘MONEY’와의 인터뷰에서 “2018년 연 3회 수준의 완만한 금리 인상과 점진적인 유동성 축소를 예상하기 때문에, 채권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부정적이지만 주식시장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예상을 뛰어넘어 금리 인상이 급격히 진행될 경우 국내 증시에 먹구름이 드리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한미 간 ‘금리역전’의 경우 국내 증시에서 막대한 자금이 유출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올해 미국은 3~4차례의 금리 인상 예상이 우세하지만, 한국은 1400조 가계부채 등으로 1~2차례 금리 인상에 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현재 연 1.25∼1.5%인 미국의 정책금리와 연 1.5%의 한국 기준금리는 10년 만에 역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미국인의 한국 상장주식 보유금액은 265조1180억 원에 달한다. 미국이 제로금리 정책을 시작한 2008년 말(64조5080억 원) 이후 미국의 한국 주식 보유액이 4배 이상 급증했다. 향후 미국의 금리가 높아져 달러 강세가 지속될 경우 외국인의 자금유출로, 국내 증시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임대수익으로 노후 준비 ‘빨간 불’ 올해 말 은퇴를 준비하는 50대 중반의 L 씨는 최근 금리 인상 소식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L 씨는 “향후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월세를 받는 임대사업을 고려했는데, 부동산 규제도 많아지고 대출 문턱도 까다로워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미국 금리 인상에 따라 국내 시중은행의 대출 금리가 크게 들썩이고 있다. 금리가 올라 대출 부담이 늘수록 임대수익은 떨어지는 구조다. 한국은행의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임대가구는 2012년 28만 가구에서 2016년 43만 가구로 5년 새 15만 가구나 늘었다. 이 기간 임대가구의 금융부채는 180조 원에서 226조 원으로 증가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은퇴 세대 상당수가 비은행권 대출을 이용하고 있는 점이다. 50~59세의 저축은행·비은행금융기관 대출비중(담보 및 신용대출 기준)은 17.7%, 60세 이상이 25.7%였다. 이는 30대 7.3%, 40대 11.9%에 비해 단연 높은 수준이다. 비은행권 대출의 경우 고금리인 데다 소득 수준이 은퇴 이후 급격히 줄어들게 돼 위험가구에 포함될 개연성이 높다. 특히 지난 1월 말부터는 ‘신(新)총부채상환비율(DTI)’까지 시행되면서, 소득이 적은 은퇴자의 시중은행 거래가 어려워짐에 따라 비은행권 대출을 부추길 수 있다. 신DTI는 소득증빙 요건이 까다롭고, 은퇴 전후세대의 경우 소득 변화 등을 구체적으로 따져 대출 한도를 낮춘다. 이처럼 대출 문턱은 높아지는데, 대출 이자마저 치솟고 있어 빚이 많은 은퇴 세대나 자영업자의 이중고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금리 상승기에는 늘어나는 이자 부담을 고려해 안정적인 자금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금융사회적기업인 ‘희망만드는사람들’의 서경준 본부장은 “부채를 안고 임대사업이나 창업을 한 경우 금리 인상에 따른 실질적 영향을 세밀하게 살펴봐야 한다”며 “월 상환 부담이 급격하게 커지는 것이 아니라면 소비규모 등을 줄여 현금흐름을 합리화하고, 임대사업 수익 등이 매우 저조한 경우 매각도 신중하게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연말 은행 가계대출(신규취급액 기준) 금리는 연 3.61%로 2014년 10월(3.64%)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본격적인 금리 인상기에 접어들면서 은행 가계대출 금리는 지난해 8월(3.39%)부터 4개월 연속 오르며 0.22%포인트나 올랐다. 이 기간 주택담보대출은 3.28%에서 3.42%로 0.14%포인트 상승했고, 신용대출은 3.78%에서 4.49%로 무려 0.71%포인트 올랐다. 그간 저금리에 애태웠던 예금생활자들에게 금리 인상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다. 금리 상승기를 맞아 금융권은 금리 혜택을 높인 예·적금 상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증시는 불안하고 금리는 올라가면서 시중의 돈이 안전 자산인 ‘예금’으로 몰려들고 있다. 올 들어 연 2% 이상의 금리를 내세운 시중 은행의 특판 예금 상품은 ‘조기 완판’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은행이 연 2.1% 금리로 특별 판매한 ‘우리투게더 더드림 정기예금’은 출시 후 4거래일 만에 완판됐고, SC제일은행의 공동 구매 정기예금도 출시 11일 만에 1000억 원을 조기 달성해 가입 고객 모두 최고 금리인 연 2.3%를 적용받는다. 전북은행은 2월 5일부터 3월 2일까지 ‘상반기 고객감사 특판 예·적금’을 판매한다. 가입기간이 12개월 및 24개월인 특판 예금은 최대 연 2.4%(우대금리 포함), 만기 12·24·36개월로 판매되는 특판 적금은 최대 연 2.65%의 금리가 적용된다. 판매 한도는 1000억 원으로, 조기 소진될 수 있다. 인터넷 전문은행의 금리도 눈에 띈다.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의 2월 둘째 주 기준 예금금리는 별다른 조건 없이 연 2.2%다. 저축은행 예금상품 금리는 2% 중후반대로, 시중은행에 비해 높은 편이다. 2월 13일 기준 만기 12개월 기준으로 저축은행의 고금리 예금을 살펴보면, 페퍼저축은행이 최고 연 2.27%의 정기예금을 판매 중이다. 세종저축은행은 연 2.66%, 안국저축은행과 키움YES저축은행은 연 2.65%의 정기예금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최대 4% 적금 상품도 등장했다. 우리은행 ‘우리웰리치100여행적금’은 최고금리가 연 4.7%로, 여행 고객을 잡기 위한 특화상품이다. 우리은행·우리카드 실적에 따라 높은 우대금리를 제공한다.
- 2018-03-1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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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율주행에서 건강관리까지, ‘스마트카’가 온다
- # 직장에서 은퇴한 강모(67세) 씨는 수입이 줄어들자 자동차를 유지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주유비에 자동차보험, 주차비도 그렇지만, 차를 구입한 지 오래되어 수리비가 만만치 않았다. 자녀들이 독립해 예전처럼 차를 쓸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차량공유 서비스를 이용하며 걱정을 덜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호출한 자율주행 공유 차는 강 씨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스스로 운전해준다. 필요할 때만 부를 수 있어 경제적인 데다 차량 소유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없다. 최근 자율주행차는 무인 상태를 최종 목표로 발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가솔린이나 디젤을 연료로 하는 차 대신 전기차가 늘고 있으며, 차를 공유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한편으론 자동차가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기술 등과 만나 커넥티드카로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 업종에서 이제 전기전자 업종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자동차 산업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에 신기술과 새로운 용어가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는 걸까. 이에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와 시니어에게 가져올 파급 효과를 살펴보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어려워지는 일 중 하나가 운전이다. 60대 이상 운전면허 소지자는 2016년 기준 전체 면허 소지자의 14.8%인 461만 명에 이른다. 고령화의 영향으로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고령 운전자로 인한 사고도 늘고 있다. 2016년 전체 교통사고는 22만917건으로 2015년과 비교하면 1만 건이 넘게 감소했다. 하지만 2015년 대비 2016년 60대 이상 운전자가 유발한 교통사고는 무려 2784건이나 증가했다. 이처럼 자동차는 편리함도 주지만, 안전을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다. 젊을 때부터 운전을 해온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운전을 하길 원한다. 이동이 힘들면 사회 참여를 제대로 못하게 되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우울증까지 올 수 있다. 그래서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시니어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자동차 산업의 빅뱅을 일으킬 첨단기술들 현재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이끄는 트렌드는 크게 4가지를 꼽을 수 있다. 바로 자율주행차, 커넥티드카, 차량공유 서비스, 전기차다. 이 중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분야는 자율주행차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2020년에 사람이 필요 없는 완전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완성차, 부품, 반도체, IT, 통신 등 관련 기업들의 협력과 인수합병(M&A)이 적극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최근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차량용 인공지능 1위 기업인 엔비디아와 중앙처리장치 기업인 인텔을 중심으로 협력하고 있다. 인텔은 자율주행 부품 업체로 유명한 모빌아이를 인수했다. 엔비디아는 최근 완전 자율주행 인공지능 컴퓨터인 ‘드라이브 PX 페가수스’를 선보였다. 또한 글로벌 IT 기업도 이젠 자동차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다. 구글의 자회사 웨이모는 완전 자율주행차를 시험 운행했으며, 애플도 프로젝트 타이탄으로 자율주행 시스템을 테스트하고 있다. 국내 한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교통사고의 89%는 운전자 과실이 원인이다. 그래서 무인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교통사고가 90%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알아서 척척 운전을 해준다면 노화로 신체나 인지기능이 저하된 사람도 생활이 편리해진다. 하지만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려면 기술 보완 외에도 아직 걸림돌이 많다. 우선 소비자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 국토교통연구원이 2016년 실시한 조사 결과 운전에 따른 피로감이 줄고 차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율주행차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시스템 오류와 보안, 유지관리 비용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또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았을 경우 차 소유주와 제조업체 중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스마트폰, 자동차의 스마트한 변화 # 박모(74세) 씨는 은퇴 뒤 아내와 자동차로 맛집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다니는 게 취미다. 그런데 시력이 저하되면서 운전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새로 구입한 자율주행차 덕분에 드라이브하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또 차 안에서 스트레스를 측정해주고, 건강 컨설턴트와 영상으로 상담도 할 수 있다. 얼마 전엔 차에서 심장질환으로 아찔한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박 씨의 건강 이상을 파악한 자율주행차가 근처 병원 응급실까지 차를 이동시켜줘 큰 도움이 됐다. 커넥티드카가 뜨고 있다. ‘커넥티드카’는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스마트폰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사람과 자동차, 병원, 쇼핑 등 사실상 모든 것과의 연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차 안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음성인식 인공지능 비서가 교통상황도 알려준다. 또 차에서 내릴 필요 없이 신용카드와 연계되는 전자계정을 부여받은 차로 상품 결제도 가능하다. 특히 커넥티드카는 차 안에서 운전자의 건강상태를 체크해준다. 자동차에 앉기만 해도 자동 측정이 가능하다. 얼굴과 눈동자를 인식해 졸음운전을 감지하는 기술은 이미 여러 기업에서 개발됐다. 도요타는 운전자의 심전도를 측정하는 스마트 핸들을 공개했다. 현대자동차는 심박수와 뇌파를 통해 운전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기술을 활발히 개발 중이다. 건강 이상이 발견되면 차가 스스로 119에 신고도 한다. 헬스케어 산업은 자동차 산업보다 규모가 훨씬 큰 데다 고령자 급증으로 인해 자동차 업계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차량은 이제 소유에서 공유로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차량공유 기업 리프트는 자동차를 소유하는 시대가 10년 안에 끝날 거라고 예측했다. 국내에서도 젊은 층의 자동차 구매가 감소하고 있다. 반면 대표적인 차량공유 기업인 쏘카의 회원수는 2014년 51만 명에서 2016년 240만 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자동차도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현대자동차도 차량공유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전기차 비중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친환경차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는 202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를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도 판매 중단을 논의 중이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전기차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에 판매된 전기차는 100만 대를 넘었다. 자동차의 빅뱅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트렌드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빠른 속도로 발전 중이다. 자동차 산업은 이제 금융, 헬스케어, 차량공유 등 산업의 경계를 나누기도 어렵다. 자동차 산업의 첨단기술은 시니어의 이동성에 큰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운전을 하지 않는 탑승객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지, 시니어의 니즈는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미래 자동차 산업의 과제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다음 연재 순서 ❹식스 포켓(six pocket) 시대, 손주와 SNS로 친해지기 ❺해외 시니어 여행 트렌드 ❻3D 프린팅 기술 어디까지 왔나
- 2018-03-15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