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동년기자 박미령
나이가 드니 추억이 재산이라 지갑에 남은 돈 헤아리듯 옛 생각만 뒤적인다. 특히 6월이 오면 찬란한 하늘 너머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하늘나라에 먼저 간 친구다. 그 젊은 나이에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한 달 내내 애태우다 겨우 찾은 그녀는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은 내 마음속에만 있었다.
꽤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 급작스레 가버리니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혼이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바빴다. 누군들 죽음을 예상하겠냐마는 젊은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웠다. 바람이 그 친구의 손길처럼 온몸에 스미던 날 임동진의 모노드라마 를 보았다.
무대는 갓 이사한 짐으로 스산하다. 독거노인 서진우는 추억을 꺼내듯 이삿짐을 정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임동진의 50년 연륜이 깃든 목소리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극 중으로의 몰입을 유도한다. 임신 8개월에 사고로 죽은 딸 사진에 대고 마치 살아있는 딸에게 말하듯 시시콜콜 이야기해댄다.
아내도 암으로 먼저 가니 말은 허공에 뿌려져 한마디씩 외롭게 떨어진다. 메아리도 없는 그곳에 오직 들려오는 소리는 옆집 젊은 부부가 싸우며 내는 악다구니뿐. 그는 젊은 날의 자신에게 말하듯 ‘인생은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라고 소리친다. 삶의 막바지에 깨달은 고백이다.
그때 한 점 혈육인 손녀에게서 전화가 온다. 결혼 소식이다. 한없이 기쁘다. 그녀의 결혼식에 가려고 옷가지를 준비하며 그는 모처럼 만면에 희색을 띠고 몸동작도 의욕적이다. 여기에 사위의 전화는 찬물을 끼얹는다. 결혼식에 오지 말란다. 일순 객석은 서진우와 함께 못된 사위를 요즘 젊은 세대의 얄팍한 마음 씀씀이로 감정이입하며 술렁인다.
오은희 작가는 여기에 서진우 아내의 일기로 진실을 밝히며 극을 반전시킨다. 누구의 어떤 행동인들 이유가 없겠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인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혼자 이 세상에 남았지만, 젊은 날 감쪽같은 줄 알았던 바람에 대한 벌이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속죄하는 마음과 그리움으로 애가 탄다. 아내는 사랑을 용서로 대신하고 남편은 그리움으로 속죄한다.
여기서 과연 죽은 자가 고통스러운가? 살아남은 자가 더 고통스러운가? 하는 질문이 관객들의 마음에 던져진다. 후회가 또 다른 벌은 아닐까?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소중함은 왜 늘 상대가 사라진 다음에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움은 복일까? 벌일까?
배경의 찌그러진 창은 어느 쪽으로든 조금은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닮았다. 첼로 박스의 흠집도 마음의 상처를 말하듯 무대 곁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다. 임동진의 탄탄하고 노련한 연기는 마치 동네 아저씨가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연스럽다. 아내의 목소리로만 나오는 정영숙의 마음 담은 소리는 진한 감동으로 퍼진다.
최병로의 섬세하게 바뀌는 창밖 풍경 연출은 짐짓 모노드라마의 단조로움을 깨고 극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어 좋았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지막 부분 배경이 너무 현란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너무 자주 바뀌고 끝부분의 현란함은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몰입을 방해했다.
그러나 가족관계가 옅어져 가는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연극이었다. 90분의 모노드라마가 지루하기는커녕 아쉬웠다. 극에서 빠져나오니 자연 그리운 사람들이 떠오른다. 푸른 하늘에 어른거리던 친구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다. 그녀에게 이토명 시인의 이라는 시를 보낸다.
너에게 사랑을 말할 때
목이 울컥, 하고 메이는 걸 보니
마음은 목 언저리에도 있나 보다.
세대 공감의 특별한 어린이날 선물, ‘스노우쇼’
글 이유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교수
미국의 사회학자 마크 프리드먼(Mark Freedman) 박사가 만든 ‘앙코르 커리어’(Encore Career)라는 환상적인 신조어가 있다. 은퇴 후의 고령자가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받으며 가치 실현의 정신적인 충족도 누리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잃지 않는 일자리 창출로 제2의 인생을 다시 산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한국국학진흥원이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라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면접을 통해 선발돼 일정 교육을 마친 할머니들이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해 동화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으로 한국판 앙코르 커리어일 수 있다. 참여한 할머니들의 가장 큰 만족도는 손자 같은 어린이들과의 교감이고 스스로의 사회적인 자아실현이었다.
공연을 보면서도 그런 행복감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특히 5월 가족의 달에는 더 그렇다.
마침 한국에 찰리 채플린, 마르셀 마르소의 뒤를 잇는 세계적인 광대 슬라바 폴루닌이 내한 공연한다. 런던타임스가 ‘이 시대 최고의 광대’라고 극찬한 그의 대표작 ‘스노우쇼’는 지난 20년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관객 수천만 명을 행복하게 만든 공연으로 올리비에상, 골든마스크상 등 세계적인 연극상을 받았다. 그는 올해 나이 65세의 시니어 예술가이다.
‘스노우쇼’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만이 만들 수 있을 법한 무대로 남녀노소 누구라도 어린 시절 동화 속으로 여행시켜 주는 환상적인 무언극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엄청난 눈 폭풍이 무대에 휘몰아쳐 객석까지 뒤덮는 판타지가 펼쳐지고 배우와 관객이 천진한 눈싸움으로 어우러져 세대를 뛰어넘는 원초적인 동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어린이날 선물로, 부모님께는 동반 데이트 어버이날 선물로 최적의 공연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감동적인 문화 체험까지 안겨줄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일정 5월 14일~30일
장소 LG아트센터
출연 Ivan Polunin, Artem Zhimolokhov, Aelita West, Dmytro Merashchi 등
주최 LG아트센터
7080 라이브 카페와 근사한 레스토랑이 곳곳에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는 백운호수. 그중에서도 수준 높은 클래식 연주와 더불어 맛 좋은 이탈리안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은 ‘피카소’ 레스토랑이 유일하다. 피카소의 작품과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교수 3인방이 머리를 맞대어 탄생시킨 ‘피카소’는 유럽피안의 여유로운 감성과 정취를 담아낸 인테리어와 무대로 클래식 아티스트에게 더욱 사랑받는 맛집이다.
‘맛’과 ‘멋’이 공존하는 문화 공간
피카소 레스토랑의 가장 큰 매력은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식사를 하는 동시에 수준 높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과 교수가 엄선한 아티스트들의 공연 일정에 따라 클래식 피아노 연주를 비롯해 대금, 리코더, 하프, 성악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특히, 무대의 단을 낮추고 관객과 마주할 수 있는 거리를 가깝게 해 식사를 즐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아티스트의 입장에서도 큰 공연에 앞서 관객이 호응을 살피거나, 공연 이후 그 여운을 달래기 위해 피카소를 즐겨 찾곤 한다. 피카소의 서성완 본부장은 “넉넉한 공간과 차분한 분위기 덕분에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고객의 만족도가 높다”며 피카소에 방문한 이들의 평균 식사시간은 두 시간 내외라고 이야기했다.
해 질 무렵부터는 무대 전방 스크린에 ‘찰리 채플린’이나 ‘애수’ 등 흑백 무성영화를 상영하는데 이 또한 클래식한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 이 외에도 유명 작가들의 조각 등 예술 작품을 전시해 보는 즐거움을 더 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작품의 경우엔 실제로 구매가 가능하다. 피카소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디너타임에는 셰프 추천 코스가 예약제로 운영되며, 철저히 고객의 주문에 따라 특별한 만찬이 마련된다.
아티스트가 말하는 '피카소 레스토랑'
무대와 테이블이 굉장히 밀착돼 있어요.
바로크 시대의 테이블뮤직과 비슷한 개념이죠.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무대와 객석, 아티스트와 관객이 분리된 느낌이 아닌, 함께 호흡하고 융화된 공간이라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에요.
- 박경리 리코디스트
서양의 살롱콘서트나 하우스콘서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에요. 특히 레스토랑 천장이 높고 울림이 좋아 노래를 하다보면 공명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런 무대에 서면 관객과 대화를 하는 기분도 들고요.
- 소프라니 박인실
피카소 레스토랑 가는 길
백운호수 학의동 방면에서 좌회전하여 300미터 정도 올라간다. 왼쪽에 ‘학현슈퍼’가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위치한 ‘피카소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신무용의 대모 김백봉(87) 선생의 70년 춤 인생을 담아낸 '청명심수(淸明心受), 김백봉 춤의 아리랑'이 오는 12~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번 공연은 김 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의 춤사위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의 춤을 올곧게 이어가겠다는 뜻을 담아 마련했다. 이날 김 선생은 객석에서 제자들의 공연을 지켜볼 예정이다.
김 선생은 최승희의 수제자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공연한 '화관무', 최승희의 '보살춤'을 재해석한 '만다라' 등 수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1966년에는 경희대 무용학과 개설에 앞장서며 전통 무용계의 거목으로 불렸다.
그동안 선보인 김 선생의 작품들은 군무가 주를 이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가 직접 안무한 독무에 초점을 맞춘다.
그중에서도 '청명심수'는 김 선생의 '산조'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그의 춤 세계가 모두 담겨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다시 일어나 만든 작품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아울러 1976년 초연한 무용극 '심청', 1947년 초연 당시 독무로 시작해 군무로 발전한 창작무용 '화관무', 1954년 월남 후 첫 발표회에서 초연된 '검무'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新중년들에게 공연은 쉼표여서 좋다. 때론 백마디의 말보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지 않는가. 찌는 무더위에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아니 즐거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우리들에게 ‘허기’를 채울 문화감성 충전을 울려보자.
부모님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며 진한 감동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극, 뮤지컬, 퍼포먼스를 구성해봤다.
★4D와 태권도의 한판 넌버벌 퍼포먼스 ‘탈’
넌버벌 퍼포먼스 ‘탈’ 공연 첨단 3D 맵핑 기술도입하여 4D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눈을 가리고 날카로운 칼에 달린 사과를 격파하는 태권도의 고난이도의 기술과 무대전체에 도입된 3D 맵핑 영상에서 이에 맞춰 배경 이미지와 격파 효과 등을 제공하고 영상과 배우의 동작을 결합시켜 ,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완벽한 조화로 하나의 4D 퍼포먼스를 만들어낸다.
이번 4D 공연을 준비한 KTA (대한태권도협회) 와 SR그룹 최소리 총감독은 “4D 공연은 마치 영화의 액션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며, 관객들에게 지금 까지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넌버벌 시장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전통무예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 이유는 무예에서 운동종목으로 발전시킨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운동종목인 태권도의 기본 틀을 깨고 줄거리와 캐릭터 등의 극적인요소를 더하여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대한태권도협회 소속 태권도 국가대표시범단 40여 단원들의 무술합이 200단이 넘는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태권도 4단은 흔히 볼 수 없는 높은 단수이지만 국가대표시범단에는 이러한 4단 이상의 고단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8단 이상의 고단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스토리의 주된 내용인 선과악의 대결을 파워풀한 태권도의 격투와 격파시범으로 표현하였고, 여기에 감동적인 스토리 , 애절한 사랑 그리고 리드미컬한 비보잉과 파워풀한 타악연주로 보는 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피켜의 전설이 된 김연아 선수의 더블악셀과 같은 회전수를 가진 900도 돌려차기 기술은, 공중에서 두바퀴반을 회전한 후 정확한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해낸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외에도 눈을 가리고 칼 끝에 달린 사과를 정확히 격파하는 기술, 5미터 높이의 장애물 격파 고속 10회전 격파 등 한계를 넘어선 최고의 격파 기술을 자랑한다.
대한태권도협회는 넌버벌 퍼포먼스 ‘탈’을 통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태권도를 대중적인 생활체육으로 확고히 정착시키고, 이를 넘어 문화사업으로 까지 발전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공연명 : 넌버벌퍼포먼스
공연장 : 올림픽공원 K-아트홀
공연기간 : 2014.06.28.~2014.08.31.
공연시간 : 평일 오후7시 / 토요일 오후3시,7시 / 일요일 오후3시 / 월공연없음
*6/28 오픈공연 오후7시 / 7/4 공연없음 / 7/5, 8/15 특별휴관일 공연없음
티켓가격 : VIP 50,000원 / 일반석 30,00원
주최,주관: (사)대한태권도협회 ㈜ SR그룹
★14억명을 열광시킨 뮤지컬 ‘비밥’
88일간 중국 28개 도시에서 한국 공연의 저력을 보여준 뮤지컬 비밥이 텐진 공연을 마지막으로 7월 6일 입국했다. 비밥은 해외로 간 한국 공연 중 최장기간, 최다도시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에 걸맞게 비밥에 대한 중국 현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비밥팀의 숙소까지 찾아와 선물을 건네고 심지어 같은 호텔에 숙박을 하기도 하였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비밥이 성공리에 이번 투어를 끝낸 것은 한국 공연 업계에서도 놀랄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비밥은 드라마, K-pop의 한류를 넘어선 공연 한류의 선두주자로 우뚝 섰다.
또한 이번 공연의 열기는 현장을 찾은 매스컴의 반응과 현지 공연 관계자의 공연 초청으로 이어졌다. 비밥은 중국 최대 시청률을 자랑하는 CCTV의 성광대도의 오프닝을 장식하였고 스촨성, 복건성, 광저우 등의 공연 요청을 받아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번 비밥 중국투어는 한국 공연 콘텐츠 시장을 넘어 세계시장을 무대로 한 새로운 공연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비밥측은 이번 투어를 계기로 G2로 우뚝 성장한 중국 관광객들의 종로 비밥 전용관 유입이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연명 맛있는 뮤지컬
공연장 시네코아 비밥 전용관 / 인천 비밥 전용관(인천중구문화회관)
공연일시 서울 2012.03.20 ~ OPEN RUN (연중무휴)
총감독 최철기
연출 전준범
코미디연출 백원길
티켓가격 서울 VIP 6만원 / R석 5만원 / S석 4만원
러닝타임 75분
관람등급 36개월 이상
주최&제작 CJ E&M, ㈜페르소나
★모노드라마의 새 역사를 쓴 명품 연극 ‘염쟁이 유씨’
‘염쟁이 유씨’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고자 하는 연극이다. 그러나 죽음을 무겁고 지루하게 다루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깨져버린다. 소박하고 진솔한 염쟁이의 삶을 유쾌하게 표현한 염쟁이 유씨는 2010-11시즌부터 새로운 연극역사를 쓰고 있는 1대 염쟁이 ‘유순웅’과 함께 깊이 있는 작품 분석·선 굵은 연기 2대 염쟁이 ‘임형택’, 그리고 2012~13시즌부터 3대 염쟁이 ‘신현종’ 3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올라 1인 15역을 도맡아 하는 연극이다.
등장인물로는 염쟁이 유씨, 조직폭력단의 우두머리와 그의 부하들, 장례 전문 업체의 대표이사인 장사치, 유씨의 아버지와 아들, 기자, 어떤 부자와 그의 큰 아들, 작은 아들, 며느리, 막내딸, 기자 등으로 다양하다. 배우는 혼자서 이 모든 역을 신들린 듯 표현해낸다.
공연은 쉼 없이 계속 되며, 객석의 지휘자로 공연시간 90분을 관통하는 가슴 저린 감동과 놀라운 재미를 선사하는 세 배우의 불꽃 튀는 연기의 향연을 비교 체험 할 수 있는 색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염쟁이 유씨’는 관객들이 함께 만드는 작품이다.
관객은 구경꾼으로서만이 아니라, 문상객으로 혹은 망자의 친지로 자연스럽게 극에 동참한다. 낯선 이웃의 죽음 앞에서도 고인의 명복을 빌던 우리네 삶의 미덕처럼, 망자를 위해 곡을 하고, 상주를 위해 상가집을 떠들썩하게 하던 모습이 연극 속에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전통의 장례문화를 소재로 죽음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과 답을 통해 삶의 진정성과 소중함을 감동적으로 풀어낸다.
공연명
공연장 대학로 이랑씨어터
공연일시 서울 2014.04.09 ~ OPEN RUN (연중무휴)
총감독 김인경
연출 위성신
출연 유순웅 임형택 신현종
티켓가격 3만원
러닝타임 90분
관람등급 만 8세 이상
주최&제작 한강아트컴퍼니
★자살이라는 극단적 코믹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 웃겨 죽는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대학로에서 공연하고 있는 여타의 공연과는 다르게 ‘자살’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풀어낸 블랙코미디 소재의 연극이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자살’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관객들을 참여시키며 한바탕 재미있는 소동극을 벌이게 된다.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었던 2000년 초반에, 뉴스에서는 충격적인 보도내용이 방송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살사이트의 존재였다. 온라인 세상에서 자살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실행에 옮길 회원들을 모집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생각과 배경에서부터 ‘죽여주는 이야기’의 서사는 시작이 된다. 타인의 비극과, 세상을 버리려고 하는 절박함을 돈을 받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신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주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방치되고 방관이 되어 천사가 된다.
어쩌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방관하고 애써 무시하면서, 개인의 출세와 이익에만 집중하는 현대인들의 세태를 ‘죽여주는 이야기’ 공연을 통해서 엿볼 수 있지는 않을까.
무겁고 암울한 소재로 한 놀이를 관람 하고 되돌아가는 관객들은 ‘자살’과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보고 박장대소 하고 나서, 집으로 되돌아간다.
관객들은 과연 어떠한 메시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될까?
어쩌면 나의 비극에도, 타인들이 비웃을 수 있는 비인간적이고 불안한 관계의 허망함을 들여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열린 공연의 방식처럼, 가져가실 수 있는 메시지도 열려있는 공연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웃음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앙금은 슬프고 우울한 것이 될 것이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연일 매진행진 중이며, 공연 기간도 코믹하게 ‘죽을 때까지’로 정해두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창작 뮤지컬
창작 뮤지컬 가 재정비를 거쳐 리뉴얼 오픈했다.
뮤지컬 는 송창식의 대표곡인 ‘담배가게 아가씨’를 모티브 삼은 작품이다.
뮤지컬 ‘담배가게 아가씨’는 2000년대 초반 그룹 ‘문차일드’로 활약했던 허정민이 배우로 전업한 후 뮤지컬 무대까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한 작품으로, 2012년 초연 당시 소설가 이외수를 비롯한 많은 공연 관계자에게 관심을 받았다.
더불어 VIP시사회 당시에는 연말 시상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스타가 공연장을 찾아 화제를 낳기도 했던 창작 뮤지컬이다.
스토리는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온 유나 부녀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아현동 달동네에서 작은 담배가판대를 운영한다. 사건사고 없이 조용하던 동네는 유나의 미모 때문에 시끌해지고 평생 연애 한번 못한 현우는 유나의 외모에 반하게 된다. 현우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남자 사랑을 독차지하는 유나. 너도 나도 달려들어 유나에게 고백하지만 차이기 일쑤다.
앞서 ‘담배가게 아가씨`는 서울, 대구, 울산, 대전, 부산, 안산 등 전국 각지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공연명 창작 뮤지컬
공연장 대학로 소리아트홀 3관
공연일시 OPEN RUN (연중무휴)
총감독 김재목
연출 김지환
음악감독 지현수
주최&제작 JJ글로벌, 극단 담씨
신경숙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원작 연극 '엄마를 부탁해'가 4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공연은 오는 6월 7~29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3주간 만나볼 수 있다. ‘엄마를 부탁해’는 2010년 객석 점유율 90%를 기록한 바 있으며, 같은 해 10월 앙코르 무대도 갖는 등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가족들이 신문광고와 전단 등을 내며 엄마의 행방을 쫓아보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자, 새삼스레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인생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되는 내용이다.
엄마 역은 지난 앙코르 무대에 섰던 배우 손숙이 다시 맡았다. 장녀 역에는 배우 예지원, 아버지 역에는 중년배우 전무송이 캐스팅됐다. 배우 박윤희(장남 역), 조주현(차남 역), 전익령(차녀 역) 등도 함께 출연해 무대에 오른다.
28일부터 30일까지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공연된 연극 '친정 엄마와 2박 3일'은 '진부함 속의 진정성'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요약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연극의 줄거리는 2009년 초연 이후 전국 순회 공연과 영화로 제작되면서 사람들에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런 신파적인 작품을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찾게 만들어 주는 요인은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력과 관객 수요층을 제대로 파악한 마케팅 전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회 출연한 배우 강부자의 연기는 내용을 알고 있어도 연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딸 미영은 어느 날 연락 없이 시골 정읍에 있는 친정집을 방문한다. 모두들 타지로 떠나고 아버지도 없는 친정 집에는 엄마 혼자 쓸쓸히 전기 장판의 따뜻함에 의지하며 지내고 있다. 혼자서는 밥도 잘 차려먹지 않는 엄마의 모습에 궁상맞고 속상해 화를 내고 엄마는 연락 없이 내려온 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속상하기만 하다.
객석을 가득 매운 40-50대 중년층은 연신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훌쩍였다. 아마도 이제는 떠나 버린 친정엄마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살아 생전 제대로 효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연극을 보는 동안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극은 이처럼 새로운 티켓파워로 떠오른 공연 관객층의 변화를 제대로 활용한 마케팅을 통해 성공적인 관객 동원력을 선보이고 있다. 예당 아트홀 대부분의 객석이 중년층으로 가득찬 연극 작품은 대전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풍경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석이 가득 찼다고 해서 작품성에 대해 그다지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연출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기 때문이다. 덩그러니 놓인 시골집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가 오가지만 신선한 장면이 연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극장에 어울릴 법 한 무대를 큰 아트홀로 옮겨와 허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작품성보다는 대중성에 초점을 맞춘 연극인 '친정 엄마와 2박 3일'. 향수에 젖게 만드는 연극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기사제휴: 대전일보 최신웅 기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 꽃을 피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가 생각나는 4월이다.
겨우내 입었던 외투가 무겁다 느껴질 때 남녘에서 시작한 봄은 들녘을 초록의 물감으로 물들이며 슬금슬금 성큼성큼 다가왔고 개나리, 목련이 만발한 봄의 길목에서는 무언가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행복한 예감에 빠져들곤 한다.
아름다운 봄날에는 가족간에도 사랑과 배려로 서로를 충전시켜 주는 시간을 가졌으면 참 좋겠다. 우리 삶이 지치고 힘들어 방전되었을 때 가정과 가족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행복충전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랑이 있기에 가족은 소중한 존재이며 그런 가족이 함께 만들어 가는 가정은 우리에게 늘 따뜻함을 선물한다.
3년 전, 딸 아이가 고3이었을 때 매일 편지를 써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 년간 301통의 편지를 써 주었다. 우연한 기회에 아는 출판사에서 책 출간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와 100여통을 발췌해 ‘아빠는 있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게 됐다. 이로 인해 TV와 라디오에 출연하는 기쁨도 가졌지만,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딸과의 약속을 지키고 힘든 고3 시절을 보내는 아이와 작은 행복을 나눴다는 것이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내가 먼저 행복 충전소가 되어 나눠주는 사랑의 마음은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며 지친 몸과 마음을 행복으로 다시 충전할 수 있도록 아내가 끓여 놓은 따뜻한 된장찌개가 생각나는 봄날 저녁이다.
어느덧 40년. 명창 김영임씨가 국악에 몸담은 세월이다. 20년 전부터는 효(孝)를 주제로 한 공연을 펼치며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그동안 자그마치 100만여 관객이 그의 소리를 들으며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울고, 덧없는 인생역정이 떠올라 울고, 자식들이 헤쳐가야 할 인생 험로가 근심스러워 운다. 관객 모두가 자식이자, 부모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한다. 그렇게 한껏 눈물을 쏟아내면 용솟음치는 카타르시스와 그 뒤로 잔잔히 우러나오는 애뜻함이 있다. 그래서 김영임의 소리는 효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한 예술인이 20년 가까이 한 주제로 콘서트를 했다면 이젠 눈 감고도 레퍼토리를 술술 외울 정도로 익숙해졌을 터.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위기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듯 김영임씨는 그날그날의 공연이 마지막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놓는다.
“무대에 설 때마다 오시는 분들에게 감동이나 관객에게 좋은 소리를 들려드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거든요. 젊을 때에는 부족해도 예쁘게 봐주셨지만, 세월이 가면 갈 수록 더 좋은 소리를 내야 하고 관록이 드러나야 하죠.”
오는 5월10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효 대공연-소리’에서 깊은 감동을 선사하게 될 그녀를 만났다.
-국악인으로 40년을 사셨다. 효 공연은 초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관객들의 흐름도 보일텐데요.
우리 소리라고 하면 연세가 많은 분만 본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우리 공연은 어린아이부터 10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이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어요. 효 이야기를 담은 우리 소리와 연극이 함께 어우러진 공연이에요.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되고, 부모는 자식을 기르면서 헤쳐온 길을 돌아보게 되죠.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마음가짐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수원시는 효의 고장이잖아요. 5월이면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달이고. 공연의 컨셉과 가장 잘 맞는 거죠. 우리가 항상 부모님에게 잘 해야겠지만, 늘상 마음 뿐인게 우리의 걱정이잖아요. 공연이 가정의 달인 5월에 열리는 만큼 여러분들에게 오랫동안 우리 소리를 지켜온 김영임의 진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딸이자 며느리, 어머니, 또는 아들, 사위, 아버지의 삶을 거쳐가게 되는데 공연을 통해 효에 대한 생각과 ‘김영임이란 사람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구나’하는 감동을 주고 싶어요.
-수많은 공연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 텐데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주일 동안 14회의 공연을 소화했던 적이 있어요. 하루에 2회씩 연달아 무대에 올랐으니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거든요. 그렇게 마라톤 공연을 해도 다시 무대에 설 힘이 나는 이유는 제게 선물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죠. 공연마다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광경이 한 장면씩은 꼭 있어요.
한번은 어머니를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로 이불을 싸서 휠체어를 태워서 오시는 며느리나 딸이 있었어요. 경희대학교 명예의전당에서는 3일간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날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어요. 더욱이 그곳은 주차장에서 공연장을 오려면 언덕을 올라와야 해서 객석이 많이 빌 것이라고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수많은 자식들이 어머니를 들쳐업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옆에서는 며느리나 딸들이 우산을 받치고요. 그날도 객석 5천석을 가득 매웠어요. 그런 광경을 보면 제가 먼저 무대 뒤에서 감동을 받죠.
-해외 공연요청도 많이 다니시죠?
네. 1989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죠. 카네기홀은 모든 아티스트가 서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잖아요. 그곳의 3천석을 다 매웠는데, 레드카펫에 리무진에서 한복을 입고 내리는데 여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공연이 스케일이 크다보니 외국에서 개인적으로 섭외가 많이 들어와요. 지금은 LA,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영국 로얄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적도 있는데, 전통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니까 파란 눈의 단원들이 바이올린 활대를 흔들고 박수를 치며 환영을 해줬어요. 무채색 계열의 오케스트라 의상과 화려한 색감의 한복이 보여주는 대비는 소름끼치도록 멋있었어요.
-남편 이상해씨도 함께 무대에 오르고 계시는데, 파트너로서의 남편 이야기도 해주시죠.
콘서트 내용은 가족 이야기거든요. 사실 효 공연을 시작하게 된 것도 남편의 아이디어였어요. 남편이 연예인이다보니 관객들이 먼저 원하죠. 제 남편도 어르신들을 위해 무대에 서야겠다고 결심해 한 무대의 주인공이 됐어요. 처음엔 서먹하고 창피했지만 이제는 익숙하죠. 가끔은 나보다 이상해씨가 더 박수를 많이 받아요. 잊지 않고 공연장을 찾아주는 올드팬에게 항상 감사하죠.
최근에는 대중에게 그간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드려야 하나 하는 고민에 무료 공연을 하고 있어요. 형편 탓에 공연장에 올 수 없는 분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드리기도 해요. 제게 이런 일을 하도록 한 것도 남편이에요. ‘재능으로 솔선수범해야 한다’ ‘돈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공연을 해드릴 수 있지 않느냐’하는 동기부여를 계속 주거든요. 저도 이제는 환갑인 만큼 앞으로는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국악인의 길을 가게 된 강렬한 계기가 있을텐데요?
어릴 적부터 라디오를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그때 좋아했던 가수가 은방울자매, 이미자 등이었죠. 집안에 국악을 즐겨듣는 사람이 없어서 민요는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 언니와 함께 여성국악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고 국악에 빠져들었죠. 하지만 부모님은 ‘쟤가 커서 뭐가 되려고…’하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옛날엔 공부 웬만큼 해서 좋은 남편 만나서 결혼하는 걸 바람직하게 여기는게 어른들의 생각이었거든요.
오빠가 미국에 있었는데, 노래 못하게 미국으로 보내라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어요. 결국은 큰언니가 수원으로 시집을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갔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까 시집 보내려고 문화센터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꽃꽂이도 가르쳐줬거든요. 그런데 그게 하나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노래만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집에서 노래만은 안 되고, 무용을 가르치는 걸로 결론을 냈지만, 무용을 하면서 경기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가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19세 때였죠. 제가 무용은 14세부터 했는데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등의 노래가 나오는데 몸에서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그때 경기민요 명창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리로 바꾸게 된 거예요.
노래를 하기까진 수원에 계시던 큰스님이 큰 역할을 하셨죠. 언니네 집에 붙들려가서 가위로 머리카락이 다 잘릴 지경이었는데, 마침 언니가 불교신자였어요. 큰 스님이 집에 오셨을 때 언니가 ‘동생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했더니 그 스님이 말하길 ‘동생은 보살님 마음대로 하는 동생이 아니다. 동생이 하고싶은 대로 놔둬야 한다’고 얘기해 준거죠. 그때 언니가 저를 놔준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제가 있게 됐죠.
-한때 가수로서, 연기자로서 활동할 기회도 많았는데 왜 굳이 국악을 고집해오셨나요?
실제 드라마를 했었고, 광고도 출연했어요. 한때에는 가요를 하라는 제의도 있었죠.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고(故) 백영호 선생님이 ‘제2의 이미자로 키워주겠다’는 제의를 해서 음반을 낸 적도 있지만, 결국 내가 갈 길은 ‘소리’였어요. 소리를 하면 온 몸에 전율이 오고, 잠을 자도 환청이 들리고, 24시간 노래로 시작해서 노래로 끝나는 일상이거든요. 그래서 요즘 문하생들을 보면 ‘너희는 왜 수업이 끝나고 책을 덮으면 거기서 끝나니?’란 말을 자주 해요. 화장실을 가든, 설거지를 하든, 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 노래가 입에서 맴돌아도 노래가 될까말까 한데…. 이건 전공자에게 하는 얘기거든요. 아마추어라면 노래 한자락 배우고 나면 끝이지만, 이 노래로 인해 우리 국악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재들은 달라야 하잖아요.
-김영임씨의 국악은 옛것이 아닌 현대적인 느낌을 연상케 한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가져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악이라면 반드시 쪽지고 개량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대에서만 완벽하게 보여주고, 찢어진 청바지 입는 것도 좋아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것도 좋아해요. 다만 노래방에 가는 건 싫어해요. 막힌 공간에서는 노래가 잘 안되거든요.
-개인적 취향의 문제군요.
네. 저는 국악도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 수 있는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노래할 수 있는 소양도 키워야 해요. 때로는 무대 분위기에 맞게 노래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옷도 입을 줄 알아야 해요. 그게 똑같지가 않거든요. 제가 나이 60세여도 꼭 비녀를 찌르고 개량한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저는 청바지도 좋아하고, 래깅스도 입어요. 다만 무대에서는 쪽머리를 짓더라도 제 손으로 하는 법이 없어요. 40년간 사극만 한 전문적인 선생을 모셔와서 완벽하게 기름 발라서 머리를 하죠. 화장도 전문가에게 맡기고요. 그렇게 무대에 올라야 프로페셔널한 공연을 할 수 있죠.
-국악 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이 선행돼야겠지만 스타도 많이 발굴돼야 한다는 것 같아요.
우선 어린 국악인을 키우는게 시급하단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는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돈과 관계없이 어린 학생에게 우리 소리를 들려주고 교육시키는 사업이거든요. 또 제가 올해 상반기부터 국악예고를 출강나가고 있어요. 자청해서 나가는 건데 대학교는 8년 정도 출강하다가, 어린이 저학년이 중요하단 생각이라 지금 국악예고도 나가고 있어요. 시흥에 있는 국악예술고등학교. 국립이라서 국립전통예술 고등학교예요. 후진양성을 위해 길을 많이 열어놓고 싶어요.
경기일보 박성훈 기자 pshoon@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