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곤(金元坤·63)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는 독특한 이력들을 갖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교수라는 것도 충분히 화제가 될 수 있는 이력이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미니어처 술병 수집가이며 영화광이기도 하다. 얼마나 그 취미를 파고들었는지 미니어처 취미는 ‘닥터 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영화 취미는 ‘영화 속의 흉부외과’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소위 말하는 ‘몸짱’으로도 유명하다. 환갑을 앞두고 1년 동안 몸 만들기에 매진한 그는 세미누드 사진집까지 펴낼 정도로 자신을 가꿨고, 중년을 위한 몸 만들기 책도 펴냈다.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는 그가 다음으로 시도한 영역은 4개 외국어다.
그는 50세의 나이에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4개 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4개 외국어능력시험의 고급 과정에 단 한 번에 합격했다. 이 정도면 사람이 좀 불공평하게, 그러니까 김 교수가 어떤 특출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김 교수는 그런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저는 제가 언어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집에서는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영어 알파벳 선행학습 한 거하고 서양 사람 얼굴을 AFKN에서 본 게 제 어린 시절 외국어와 접촉했던 전부예요. 그러니까 대학 졸업 전에는 어학 관련해서는 접한 게 없습니다.”
더구나 김 교수는 콤플렉스까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사투리 발음에 대한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욕적으로 한글 교육 정도는 내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돼서 한글을 가르치고 받아쓰기 테스트를 했는데, 받아쓰기가 영 엉망인 거예요. 막 야단을 쳤죠. 그런데 아이가 ‘아빠가 발음하는 대로 썼다’ 하는 겁니다. 그 이후로는 뭐 아이에게 한글 교육 같은 거 안 했어요. 지금도 영어의 p 발음과 f 발음은 구분하기 힘들어요.(웃음)”
그가 50대가 넘어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 자체가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 주5일제 제도가 시작되면서 전에 비해 여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중을 생각해서 후회 없이 한 가지를 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영어 외의 제2외국어를 찾다 보니 가장 만만한 게 일본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인생에 후회가 없을 일을 한번 해보자
“운동이나 외국어, 다 어렵죠. 운동도 그렇고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궤도에 올려놨다고 해도 잠깐 게을리하면 쭉 떨어진다는 거예요. 멈춘 상태로 그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게 무서운 거죠. 학원에 다니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봐요.”
그는 특히 전업으로서, 혹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취미로서의 공부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그건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걸 뜻하는 거예요. 올림픽을 목표로 하거나 대회가 있으면 그러한 구체적인 목표에 매진하면 되지만 취미 생활로 공부를 하면 목표가 있을 수 없죠. 그러니 평생 해야 한다는 건 어렵죠. 먹고살 일도 아니고. 열심히 하면 수입이 보장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얻을 수 있는 건 자기만족과 자기발전이란 건데, 그 외에는 사실 동기 부여가 없는 셈이죠. 그게 힘든 거죠.”
하긴 그렇다. 취미로서의 공부란, 아무도 옆에서 강요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 본인은 그냥 안 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다 좋은 거잖아요. 공부나 운동이나.”
외국어에서 문법과 단어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
김 교수가 자신의 외국어 정복기를 묶어 책으로 만든 ‘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문법과 단어를 뼈대와 근육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일상 회화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는 근간의 외국어 공부 흐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 시절에는 해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이유도 없었죠. 그러니 오로지 가르치는 게 문법이었어요.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사실이었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니 말하는 게 중요하다, 해서 일상 대화가 강조됐습니다. 사실 말하는 건 중요하죠. 그런데 한국 사람끼리를 생각해 보세요. ‘밥 먹었니.’ ‘날씨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 일상 대화를 보면 늘 그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렇게 단순히 얘기해도 일상생활에선 불편이 없죠. 그런데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만날 식당에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말이란 게 밥 먹고 날씨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문제가 있죠. 심층적인 얘기도 좀 하고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해 얘기도 하려면, 단어를 모르면 할 수 없어요.”
외국인이 우리 문화권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에게 공자에 대해 설명해 주려면 공자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철학적 단어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문법이나 단어의 바탕이 좋은 사람은 외국어 능력 발전에 가속도가 붙지만 회화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역으로 발전이 잘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자를 많이 안다고 중국어를 잘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본어다. 그런데 시니어들 중에는 한자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여 중국어도 일본어만큼 배우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자를 많이 알고 있으면 중국어를 배우는 데 조금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중국어에서 특히 어려운 건 성조예요. 우리나라는 억양이 달라도 성조가 없으니까 다 알아듣는데, 중국은 성조가 없으면 아예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어순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죠.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쓰는 한자 대부분이 중국계 한자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의 상당수는 일제 당시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다. 애초에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는 데다, 중국은 따로 간체자라고 하는 새로운 한자 체계를 조직하여 쓰고 있다. 아무리 한자 지식이 많다고 해도 현재의 중국에서 통용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김 교수는 프랑스는 유럽 언어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발음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선 중국어 성조가 더 어려우냐, 프랑스어의 발음이 더 어려우냐 하는 비교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프랑스어의 문법은 크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영어로 자란 세대니까, 영어와 다르면 무조건 어려운 거죠. 그리고 스페인어는 발음은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쉬운 편이긴 합니다.”
진짜 공부는 일상 속에서 한다
김 교수는 올해 우리 나이로 63세다. 그는 자신도 나이를 거스를 순 없으며 젊었을 때보다 기억력이 쇠퇴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학원을 가면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단어 암기에서 제가 그들에게 뒤진다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자기의 타고난 능력에 대해선,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변명하기가 좋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암기는 가장 효과가 있는 시점에 반복하고 자주 반복하는 게 좋아요. 학원을 마치고 나오면 해방이다, 이러면서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영화를 보고, 소주 한 잔을 하든지 그러면, 암기가 잘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타고 가면서 배운 걸 보고, 자기 전에 또 봅니다. 거리를 가면서도 공부할 것들이 많아요. 간판에 적힌 글자들만 봐도 뭔가 궁금해지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공부하죠.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마치고 나서 바로 짧은 시간에 반복해서 다시 복습을 하는 것, 그리고 자투리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 그의 태도는 공부법에서 말하는 복습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만든다.
“나이 든 사람들과 공부를 해보면 그분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긴 해요. 그러나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머리 중심 노익장의 시대가 올 것
김 교수는 ‘나이 많은 몸짱’이란 개념도 거의 10여 년 전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꽤 보편화된 개념이 됐다고 진단했다. 아직도 스페셜하긴 하지만. 그 자체가 화젯거리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몸짱은 그렇다 칩시다. 사람들이 이제 다 그런 개념을 갖게 됐으니까. 그런데 머리를 쓰는 것은 어떤가요? 나이를 먹은 사람의 특성상 머리를 쓰는 게 몸을 쓰는 것보다 더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노인이 돼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는 건 오래된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억력과 관련된 문제예요.”
김 교수는 공부에 뜻이 있는 시니어들이 막상 해보려고 하면 자꾸 기억이 안 나게 되니 좌절감을 느끼고 ‘나는 안 된다’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몸짱’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정립이 된 것처럼 자연적으로 머리를 바탕으로 하는 노익장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각해 보면,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걸 처절하게 견뎌야 하는 몸이 바탕이 되어야 했으니 몸이 먼저 주목받았던 게 당연합니다. 사실 머리는 당장 먹고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죠. 그래서 머리와 관련된 기능은 쉽게 퇴화하고 유지하는 게 어려운 걸 수도 있어요.”
은퇴, 그 자체를 잘 모르겠는 마음
나이를 잊은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김 교수에게 은퇴 후의 삶이란 어떻게 다가올까?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너무도 건강하게 됐어요. 은퇴 생활이 60대에 적용된다고 보면, 남들은 일하는데 은퇴한 자신은 놀고 있으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은퇴 후라는 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자’인지, ‘유유자적하게 살자’는 것인지 모르게 됐어요. 사회적으로 정립이 안 된 걸 개인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죠. 내년에는 양상이 또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의학의 발달과 사회적 진화로 인해 기존의 정년 개념은 이제는 무의미하게 됐다. 이제 은퇴라는 말은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말일 수도 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은퇴에 대한 개념을 들으며 느낀 것을 많은 시니어들도 동감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넓은 공부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술, 영화, 운동, 외국어까지 섭렵했다. 이제 다른 영역으로 김 교수가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한 것들도 도전을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우연히 한 거죠. 우연히 시작한 걸 버려선 안 된다, 한때의 추억으로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앞으로의 욕심이라면 현재 하고 있는 외국어, 운동들로 그 자체 내에서 내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나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운동은 가시적인 발전에 한계가 있습니다만 외국어는 끝이 없을 거라고 봐요. 커피도 그렇잖습니까? 다 맛있다 하다가도 원산지, 볶는 법 등등을 알게 되면 끝이 없잖아요. 언어도 그런 게 더 없겠습니까?”
그는 나이가 들어도 지금 꾸준히 하고 있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상 퇴보하는 건 없도록 하고 싶어요. 그 기간이 오랫동안 연장이 됐으면 싶고. 1차 목표는 70세로 하고,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75세로 늘리려고요(웃음).”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 노인일쾌사에서 우리는 조상들 역시 구강 질환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여섯 가지 즐거움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이 시에서, 그는 노인의 또 다른 즐거움은 치아가 없는 것(齒豁抑其次)이라면서, 치통이 없어 이제는 잠을 편안히 잔다(穩帖終宵睡)고 적었다.
하지만 다산(茶山)이 미처 몰랐던 것이 하나 있다. 그를 괴롭혔던 치통과 이가 빠져버리게 된 원인이 바로 그가 마지막까지 의지했던 잇몸 때문이었다는 것 말이다.
흔히 우리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물론 은유적인 속뜻도 있겠지만, 그만큼 잇몸은 꽤 튼튼해서 치아만큼 버텨 줄 것이라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과의사들은 그 믿음을 헛된 믿음이라고 단언한다.
치과질환 잇몸관련이 압도적
의료현장에서 치과의사들은 특히 중년으로 접어들수록 치주질환과 관련한 치료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2013년 건강보험통계연보에 따르면 단일상병으로는 치은염과 치주질환이 8번째로 진료비가 많았으며, 치과 질환 중에서는 유일하게 발표한 순위 20위 안에 포함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잇몸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잇몸을 구성하는 두 가지 조직 중 어느 곳에 발병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잇몸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이 잇몸에 염증을 일으키게 되면 ‘치은염’이라 부르는데, 치은염은 제때 치료만 이뤄진다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치주염은 상황이 다르다. 잇몸의 염증이 잇몸뼈까지 전이된 상태를 치주염이라 부르는데, 치주염으로 잇몸뼈를 잃게 되면 회복은 쉽지 않다.
특히 이로 인해 잇몸뼈의 높이가 낮아지게 되면 치아가 벌어지고, 음식물이 끼면서, 다시 염증의 원인이 되고 결국 악순환을 반복시킨다. 또 노안(老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여기서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치근우식. 치근우식은 말 그대로 치아의 뿌리가 썩는 것을 이야기 한다. 잇몸으로 보호되고 있던 뿌리 부분이 점차 노출되면서 충치균에 감염되면 발생한다.
치근우식이 무서운 것은 진행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것. 일반적으로 치아를 보호하고 있는 법랑질은 성인이 되면 잘 썩지 않고, 설사 충치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 진행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하지만 치아 뿌리 쪽에 충치가 생기면 속도가 빠르고 치명적이다.
특히 이 치아우식은 지독한 입냄새의 원인이 되므로, 새로운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중년들에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치주질환으로 치아 흔들리면 ‘사망선고’
치주질환에서 최악의 상황은 치아가 견디지 못하고 빠져 버리는 상황이다. 치주질환은 상태가 악화가 되어서야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치아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면 이미 살리기 어려운 상황인 경우가 많다.
구로이즈치과의원 채규창 원장은 “치은염은 염증을 긁어주는 치주소파술 정도로 치료하면 되지만, 치주염까지 진행되면 잇몸을 일부 잘라내는 등의 수술이 필요하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치주질환을 예방하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원인이 되는 치태를 없앨 수 있도록 스케일링을 통해 치석을 제거하고, 치실이나 고압 구강세정기 등으로 치아관리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영양상태 역시 잇몸건강에 영향을 주니 이 점도 신경 써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치석제거를 위한 스케일링은 국민건강보험 적용대상이므로 낮은 본인부담금(1만3000원)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잇몸약에 대해서 치과의사들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대부분의 잇몸약이 비타민과 칼슘이 주성분인 영양제에 지혈제와 부종완화제를 더한 것이어서,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것이 그리 추천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치주질환이 전신질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나오기도 했다. 분당서울대병원 이효정 교수는 최근 발표를 통해 대만 의료진의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연구진이 10년간 71만 9426건의 치료 사례를 연구한 결과, 치주질환을 방치한 환자의 경우가 치료한 환자에 비해 뇌졸중 발병이 37%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발병 후에는 반드시 치료를 받기를 주문했다.
조부모가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이 부모만큼 많아진 사회상을 반영해 건강과 관련한 습관에 대해서도 인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강릉원주치과대학 박덕영 교수는 “결국 건강한 잇몸은 본인 스스로가 평소에 어떤 습관을 갖고 관리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올바른 관리방법과 습관을 익히고, 손자, 손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육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내 신정아(申貞娥·44) 씨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얻은 이경훈(李敬薰·48) 씨와 그를 살린 분당서울대병원 한호성(韓虎聲·56), 최영록(崔榮綠·40) 교수가 그들만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서, 그리고 여기 좋은 교수님들과 함께해서 전 복 받았죠. 제가 새 삶을 얻은 것은 모두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경훈씨에게서는 남다른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씨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따뜻했고, 부부를 바라보는 교수들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내의 간을 이식받은 남편, 이 부부의 새로운 삶에 동행하는 의료진은 한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통증, 그리고…
이경훈씨는 2011년 11월 신정아씨와 화촉을 올렸다. 마흔 넘어 결혼했지만, 그렇기에 남들보다 즐겁고 소중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씨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든 다 해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과로가 쌓이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위가 쓰린 날이 많아졌다. 동네 병원에서 위궤양을 판정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이 불던 일요일로 기억됩니다. 말로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결국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위궤양은 약 처방을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평소 앓던 B형 간염 증세가 악화되면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생겼더라고요. 그때부터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병원을 오가는 동안 그는 점점 지쳐갔다. 지난해 7월에는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야 했다. 그 이후, 다니는 병원을 포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정밀검사결과는 간암이었다. 다행히 색전술은 받았으나 간기능 저하로 인해 간이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대학병원에서는 간이식 수술을 할 만한 의료진이 없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판정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서 간이식을 받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내의 간을 받을지는 몰랐었죠.”
이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간이식 명의로 알려진 한호성 교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한 교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생각하고 2014년 가을 한 교수를 처음 만난다. 지난 3월 드디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사랑과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현재 이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통상 간이식 환자들은 면역억제제를 장기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 등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극복하고 있다. 의료진의 말을 잠시 빌리면,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관리가 되고 있어 약도 줄이고 있고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검사결과도 없다. 아마도 아내와 의료진에게 받은 사랑 덕택이 아닐까? 다만,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는 과정동안 직장을 잃게 돼 경제적인 부분이 어려운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제를 뛰어넘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도, 가장으로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엄마에게 신장, 남편에게 간을 준 여자
신정아씨는 가족을 위해 두 번 장기 기증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신장을, 남편에게는 간을 떼어준 특별한 사람이다. 신씨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고혈압과 갑상선 질환을 앓다가 유행성출혈열의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부전이 생겨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하게 됐다. 신씨는 어머니를 위해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 이식 수술 후 어머니와 신씨 모두 건강하게 지냈다. 이씨와 결혼도 하고 행복이 무르익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께 신장을 떼어준 지 8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남들과 다른 건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간을 떼어주는 일, 그걸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신장이식을 했기 때문에 간이식도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결국 적합판정을 받게 됐고,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주는 일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신씨는 남편도, 의료진도 만류했지만 간을 떼어주고 싶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시 깨 볶는 소리가 들리는 가정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현재 신씨는 퇴원 후 건강관리를 받으며 음식 조절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두 번이나 장기기증을 했지만, 남편의 사랑에 기운을 내고 있다. 그녀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두 번의 장기 이식 수술을 경험하며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어요. 장기이식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참 따뜻하고 믿음직한 의료진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참 따뜻한 선생님들이에요. 친절하다는 부분이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진짜로 생각을 해주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이 선생님들은 ‘환자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우린 많은 병원을 다녀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웃음)”
특히 이씨는 수술 전후 상황이 아주 편했다고 회상한다.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잘 될 거라고, 아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수술 후에도 그냥 숙면한 것처럼 일어났죠. 중환자실에 있어도 되는 건지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수술도 수술이지만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두려움도 사라졌죠.”
전문의 3명의 긴박한 협동작전
2015년 3월, 부부의 간이식 수술은 분당서울대병원 암센터 간이식팀 한호성 교수(암·뇌신경진료부원장)와 조재영, 최영록 교수가 맡았다. 이들 3명은 팀을 이뤄 수술을 진행했다. 보다 신속하고 정교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자 수술팀, 수혜자 수술팀으로 나눠 각각 진행하고 다시 협력하는 방식이다.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최영록 교수에게 당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 남은 과제가 뭔지 물어봤다.
“이식 수술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이미 신씨는 어머니께 신장이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죠. 부부는 우리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수월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부부 모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흔치 않은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술이었어요. 앞으로도 부부가 더욱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의사는 항상 환자 중심으로 산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6월 2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잠정 의심환자에 대한 간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사실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집도한 한호성 교수는 이른바 ‘노력하는 명의’로 통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한 교수의 삶은 환자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듣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항상 책보다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로서 살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 제시된 것처럼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옳다’라는 판단 대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환자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에게 좋은 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본인의 의사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외과의로서 말씀드리자면, 작은 수술이나 큰 수술이나 합병증을 조심하셔야 되는데요.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리가 더 수월해집니다.”
제2 서해안고속도로 사장 류영창(柳塋昌·60)씨는 공학자(서울대 토목공학 박사)이자 과학자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물박사’다. 류 사장은 공무원 시절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수자원개발과장을 비롯해 수자원정책과장, 공보관, 기술안전국장, 한강홍수통제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물과 관련된 업무를 했다. 그런 류 사장이 물 관련이 아닌 건강(의학)정보 책(생활건강 사용설명서)을 발간한 것이다. 최근에는 건강 관련 강연과 칼럼쓰기에도 여념이 없다.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국토부 국장 시절 국책 사업을 기획할 때 고혈압이 왔어요. 의사를 찾아 아무리 생활요법을 가르쳐달라고 해도 혈압약 먹으란 얘기만 하더라고요. 병원문 나서면서 오기로 약 안 먹고 고혈압 고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3년 만에 약 한 알 안 먹고 다 고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사들에게 맞아죽을 각오로 책 한 권을 썼습니다. 건강과 의료 패러다임도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 시작한 건강·의학 공부
그는 자신의 집안을 ‘뇌졸중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는 물론 이모, 외삼촌까지 전부 뇌졸중 등 심혈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어머니는 신경성 위장병을 비롯해 고혈압으로 사실상 50여년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등졌다. 결국 친가에도 뇌졸중이 발병한다. 류 사장의 아버지였다. 그는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16년 동안 반신불수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엔 내 차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인 2008년 그도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어요. 특히 심장이 약했어요. 조금만 뛰면 숨이 차고, 밤 늦게까지 공부하면 코피를 쏟는 약골이었지요. 성인이 돼서는 집안 어른들이 대부분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머지않아 내 차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병원에 가니 무조건 약을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민간요법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더니 ‘나도 (혈압약) 먹어요’라며 버럭 화까지 내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무조건 스스로 이겨내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때부터 시간 쪼개가며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약 위주의 치료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됐어요. 깨달음이 커지면서 점점 다양한 측면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게 된 셈이지요.”
의학·건강 상식을 깨다
그의 집무실에는 건강 관련 서적이 가득하다. 물론 시간을 쪼개가며 건강·의학공부를 지속하기 위함이다. 특이한 점은 그 책들마다 포스트잇 메모가 빼곡하다는 것. 그는 틀린 이론이나 틀린 이론을 지적한 연구자들의 중요 문구에 대해 4색 볼펜으로 중요도를 가려내 메모한다고 했다. 특히 파란색 볼펜으로 밑줄 쳤거나 메모한 텍스트는 반드시 이론을 수정해야 하는 틀린 이론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언론 기고 칼럼이나 생활건강 사용설명서 개정판에 반영하기 위함이다. 현재 의료계와 날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단 의료업계에서 말하는 ‘성인병’이라는 용어부터 고쳐 써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인병이라는 명칭은 1957년 일본의 후생성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암이나 뇌졸중, 심장병 등이 40~60세 정도의 나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요즘엔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이나 어린이들도 이런 질병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성인병이 아닌 ‘생활습관병’이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고 정확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에선 1997년부터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성인병과 생활습관병은 차이가 크지요. 성인병은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병이 난다는 것이고, 생활습관병은 습관을 잘 고치면 병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병원에 가면 대부분 무조건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하고, 환자도 약을 처방해 주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양약(洋藥)은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오래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겨 다른 장기(臟器)에 병을 유발해요. 어떤 약은 몇 년 후에 부작용이 발견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진단은 의사에게, 치료는 자연치유로
류 사장이 서양의학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외상(外傷)을 비롯해 응급 처치, 증세의 판단 등은 서양의학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그는 말한다. 다만 치료에 있어서는 몸의 면역력을 높여 스스로를 치료하는 자연치유력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소한 병원에 가기 전에 본인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예컨대 당뇨병을 앓는 미국 환자들은 스스로 당뇨병에 대해 약의 부작용 자연요법 등을 스스로 공부하고 병원을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대사례가 많다. 의사들이 주는 대로 처방약을 그대로 받아 먹는 등 의사들의 지시를 신처럼 복종한다는 것. 심지어 일부 의
사들은 약의 부작용 등은 알려주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환자를 주눅들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혈압약은 성기능장애라는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데도 이에 대한 소상한 설명 없이 처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런 공급자(의료계) 위주의 시장이 바뀌어야 함은 물론이고, 의사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도 개선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말 못하던 공무원, 제2의 황수관 박사로
“제가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어요. 이 동네 사람들이 대개 말을 잘 못하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요새 건강 강의를 많이 하다 보니 말주변도 많이 늘었어요. (의사들과 대립각을 세우더라도) 이제 꼭 해야 할 말은 하려고 합니다. 지금껏 국가나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 봉사를 해야 하는 시기인 거 같아요. 사람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지요.”
그는 자신이 국가나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학창시절부터 모두 국·공립학교를 다녔고 30년 국토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을 받았다. 때문에 이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며 눈빛을 빛냈다. 건강 관련 강연을 다니며 건강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강연료를 미리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봉사한다는 기분으로 강연에 임한다는 의미다.
개인특성에 맞는 정교하고 세밀한 검진과 감각적이고 편안한 공간, 프리미엄 건강검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빅5병원에 대해 파헤쳐보기로 했다.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은 어떤 강점을 내세워 검진센터를 운영하고 있을까?
근거중심 검진…맞춤형 건강 설계 ‘진일보’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근거중심 의학(Evidence Based Medicine), 현대 의료는 수많은 분석을 통한 과학적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벼운 감기로 병원에 갈 때나, 심각한 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할 때 모든 처방이나 수술은 근거중심 의학이 기본이 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건강검진도 마찬가지다. 검진 자료를 통한 데이터분석이 확보돼야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맞춤 검진이 완성된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근거중심 예방의학’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에 찾아가 봤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강남파이낸스타워 38~40층에 자리 잡은 강남센터 2003년 10월 프리미엄 건강검진을 선도하겠다는 목표로 개원해 12주년을 맞았다.
초기에는 국립대병원이 강남권에 진입하겠다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지만 현재는 110명으로 한정된 CEO 멤버십 구성을 비롯해 일반진료 인원도 예약이 가득 찬 상태다.
그렇다면 강남센터의 차별성이 무엇일까?
가장 큰 특징은 검진센터에 ‘헬스케어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검진 수준에서 나아가 ‘한국인에 맞는 검진 자료’를 만들겠다는 큰 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실제로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을 1년에 70~80개씩 쏟아내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금까지 400여 편의 논문이 게재된 상태이다.
이러한 연구가 건강검진 프로그램 개선에 활용되고 있으며 국내외적으로 건강검진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는 건강검진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서울대병원만의 정통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수진자 대비 교수 비율이 가장 높다는 점과 즉각적인 연계 서비스 역시 강점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상근직 교수가 53명이나 되며 필요할 경우 본원에서도 인력이 투입된다. 상담 시 정신과 교수가 투입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서울대병원 교수들만으로 이뤄진 프리미엄도 한몫하고 있다. 검진 이후 ‘나만의 건강 지침서’를 발간해 개인별로 제공하고 있는데 질병, 운동, 음식 정보 등을 한눈에 알 수 있게 제공하고 있어 사후관리측면에서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조상헌 강남센터 원장은 “이제는 체계적인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형 검진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야 할 시기가 됐다”며 “단순 검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예측모델을 만들어 가는 등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질병도 닮은 가족, 가족특화 검진으로
서울성모병원 평생건강증진센터
건강검진이 대중화되면서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많아졌다. 모두 개인별 맞춤 검진이라는 플랫폼을 갖고 있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부족하다기 보다는 따듯하지 않다는 표현이 정확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의문을 갖고 서울성모병원에 찾아갔다.
본관 4층에 위치한 평생건강증진센터는 고객들에게 건강검진이라는 느낌보다 휴식하는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 ‘공간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심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연결선’이라는 인테리어 콘셉트로 쾌적하고 세련된 공간이 펼쳐진다. 불현듯 고민의 해답이 나온 듯했다. 분위기를 관통하고 있는 ‘평생’, ‘가족’이라는 단어였다.
현재의 건강을 확인하는 의료서비스라는 소비자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건강검진을 지속적인 관리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가족’ 단위의 건강관리가 이뤄지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은 성모병원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가족관리 프로그램은 개개인이 건강검진을 따로 받는 것보다 가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과 환경에 맞춰 검진을 진행한다. 가족의 질병력을 검사하고 그를 기반으로 가능성 있는 질병을 확인해 생활습관 교정을 제시한다. 암, 고혈압, 당뇨와 같은 질병들은 유전적 요인에 기인하는 바가 커서 가족 단위의 건강관리와 검사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센터를 찾아오는 고객 중 약 10% 가량이 건강검진을 부부나 자녀 등 가족 단위로 받고 있다. 주로 60~70대 부모를 모시고 건강검진을 함께 받으러 오는 30~40대의 모습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이다.
주목할 점은 60대 이상을 위해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 폐질환 등 고령자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질환들을 관리하기 위해 인슐린, 심장초음파, 경동맥초음파, 갑상선초음파, 복부골반CT, 뇌 MRI/MRA, 저선량 폐 CT, 골밀도검사를 특별하게 진행하고 있다.
김영균 센터장은 “종합건강검진이라는 개념에 평생이라는 의미를 더한 것은 건강검진 고객들이 평생 건강할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는 의미와 평생이라는 긴 시간동안 건강검진 고객들과 동행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건강한 가족건강을 위해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신체 리모델링까지 ‘패스트 트랙’ 접근
세브란스병원 체크업
건강검진을 받아도 통증은 여전하다. 어깨도 아프고, 무릎도 쑤신다. 특별한 병은 없다고 하는데 지긋지긋한 요통이 개선되기는 어렵다. 건강검진을 하면서 이런 부담을 덜어낼 수 있을까? 건강검진과 함께 신체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곳을 찾아본 결과, 세브란스 체크업이라는 해답이 나왔다.
서울역 연세재단 빌딩 4, 5층에 위치한 세브란스 체크업은 1994년 개원한 이래 매년 1만여 명이 이용하는 종합검진센터다. 서울역 4, 5번 출구와 바로 연결되는 통로를 통해 곧바로 체크업으로 올라가는 순간, 월넛과 실버계열의 시원한 인테리어와 서울 중심부를 아우르는 전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곳곳에 스며든 ‘체크업’이라는 이름 역시 긍정적이다. 건강을 점검(Check)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향상(Up)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체크업의 건강검진 프로그램도 타 병원과 마찬가지로 일반 검진과 프리미엄 검진이라는 투 트랙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따로 있다. 검진과 함께 신체 리모델링 분야까지 손을 뻗쳤다는 것.
이 부분에 집중하기로 하고 5층에 위치한 신체리모델링 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센터는 3D촬영을 통해 체형, 척추 근력 및 구조, 보행 등을 분석하고 평상시 걷거나 앉거나 서있는 동안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될 수 있는 각종 근골격계 질환을 진단한다.
이를 바르게 교정하기 위한 운동처방요법도 시행하고 있다. 척추질환 수술 후 통증이 심해지는 경우, 퇴행성 질환을 예방하거나 완화시키고 싶은 경우, 비만 등 생활습관병을 관리해야 할 경우 등 다양한 이유에 따라 설계되는 1:1 맞춤 처방은 매력적이다.
신체 리모델링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삶의 질’ 측면에서 건강검진과 연계해서 진행돼야 할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설준희 센터장은 “건강검진은 어떤 병이 있는지 확인하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검진과 연계되는 신체 리모델링은 국내 최초로 도입된 부분인 만큼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매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편안함을 제공하는 숙박검진의 메카
서울아산병원 건강증진센터
건강검진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준비해도 붐비는 사람들. 언제 내 차례가 오는지 순서대로 기다리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의료 시장이 변하고 있는 것처럼 호텔 같은 곳에서 편하게 검진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물론 국내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병원들은 대부분 숙박검진을 시행하고 있다. 이미 활성화됐지만 이 분야에 더 주력하겠다는 곳에 찾아가봤다.
아산병원 1990년대 초부터 VIP 검진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프리미엄 숙박검진’을 운영해오며 꾸준한 성장가도를 달려와 시장에서의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신관 15층에 위치한 건강증진센터 프리미엄 병동은 호텔을 방불케 하는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국내외 많은 건강증진센터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는 관계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객실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뛰어난 조망권의 약 350평 규모를 자랑한다. VVIP Room 1실과 특실 4실, 1인실 4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루 최대 12명의 고객에게만 객실을 제공한다.
전 객실에 욕실과 조리실이 갖춰져 있고 특실인 경우는 부부 또는 가족이 쾌적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게 최적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CEO를 위한 집무실과 회의실을 별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0여 평의 검사 공간은 갤러리를 연상시키며, 한복을 개량하여 만든 수진복은 고객에게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검사를 자동으로 안내하고, 대기 없이 바로 연결되는 자동 검사 유도 시스템을 자체 개발한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대기업 총수나 기업CEO급이 주 이용층인 ‘아산 프리미어 멤버십’프로그램과 해외고객이나 국내 VIP고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프리미엄 건강검진 프로그램’ 두 가지로 나누어 운영된다.
최재원 건강증진센터장은 “고급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고객들의 요구에 맞춰 프라이버시를 보호받고 호텔처럼 편안하게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여유 있게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 건강검진의 새로운 패러다임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센터
스마트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의료기기분야에 ICT를 융합한 ‘스마트 헬스케어 플랫폼’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신체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질병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이제는 건강검진 시장에서도 이를 적절히 적용하는 것이 관건이 됐다. 아직 국내에서는 미진한 부분이지만, 최초로 시행하고 있다는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센터에 찾아가 봤다.
센터는 병원계 처음으로 지능형 능동적 RFID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스마트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구축했다. 종전에는 검진에 앞서 필요한 문진표 등을 종이에 수기로 작성해야 하고 검진 당일에도 일일이 수진파일을 들고 검사실 이곳저곳을 찾아 다녀야 하는 등 불편이 컸다.
하지만 ‘스마트 건강검진’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종이 차트나 검사지 등이 사라졌다. 실제로 수진자들은 스마트 폰이나 태블릿 PC를 활용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다.
사전 문진을 마치지 못한 수진자도 당일 병원에서 대여 받은 갤럭시탭, 갤럭시 플레이어나 검진센터 직원의 안내를 통해 본인 스마트폰에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문진표 작성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문진을 마치고 나면 스마트 기기들이 삼성서울병원 지능형(ACTIVE) RFID 시스템과 연동된다. 이 시스템은 수진자의 편의를 대폭 높이기 위해 기존 RFID칩을 수신기에 직접 갖다 대야 하는 태그 방식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다.
검사실 근처에 가면 수진자가 자동으로 인식돼 검사실 직원이 수진 대기현황을 쉽게 확인하고 접수할 수 있는데 특히 필요한 검사가 무엇인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검사실 복도 중간에 담당자가 태블릿 PC를 통한 RFID 인식을 통해 수진자 검사진행현황 및 검사실을 안내하고 필요에 따라 정체된 검사실에서는 검진순서를 변경하는 등의 개선점도 보였다.
수진자 입장에서 보면 본인만을 위한 ‘스마트 비서’가 실시간으로 건강검진 전 과정을 챙겨주는 셈이어서, 건강검진이 처음인 사람도 누구나 손쉽게 검사를 받을 수 있다.
김재준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센터장은 “스마트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적용해 수진자의 궁금증을 즉각 해소하고, 체감 대기시간을 감소시킬 것으로 예상된다”며 “궁극적으로 수진자와 병원이 서로 소통하며 건강검진을 진행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