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전 경력이 주로 군 관련 경력에 치우쳐 있어 그를 무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화가였으며 소설, 신문 칼럼, 에세이 등 글을 잘 쓰는 문필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난 후 집필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영국 해군장관 출신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전시내각의 총리로 임명되는 1940년 5월 10일부터 덩케르크 작전(다이나모 작전)으로 불리는 대규모 철수작전이 끝나는 5월 28일까지 19일간의 행적을 추적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내각을 이어받은 처칠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받는 갖은 압력 속에서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전부를 이룬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작년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를 감명 깊게 보았던 영향이 크다. 당시 놀란 감독이 표현해낸 기적 같은 철수 장면이 떠오르면서 당시 영국 내의 상황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두 편은 서로 이어진 작품으로 순서만 바꿔 보는 셈이다. 두 편 모두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는 게 흥미롭다.
‘덩케르크’는 등장인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이름 없는 국민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돋보인다. 반면에 ‘다키스트 아워’는 이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진흙탕 싸움이 전개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은지 불분명하다. 현저한 전력의 열세 속에서 히틀러에게 항복하고 희생을 줄이는 것도 나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처칠은 항복은 곧 노예의 삶을 의미한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무수한 정치적인 공세 속에서 처칠의 흔들리는 신념을 잡아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이름 없는 지하철의 시민들이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이 아닌 픽션임이 분명한 이 장면이야말로 감독의 의중을 여실히 반영하는 지점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막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결국 이름 없는 일반 국민들인 것이다. 처칠은 그들을 대변하며 용기를 얻는다.
처칠의 무기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언변이다.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처칠의 말과 관련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정적을 제압하는 여유 있는 유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디선가 접했을 법한 익숙한 그의 명연설이 감독 조 라이트의 뛰어난 연출을 통해 화면에 전개된다. 역광을 활용한 어두운 분위기의 의사당에서 행하는 마지막 연설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렇다. 결국은 말의 힘이다. 처칠은 사실 과거 군사적 판단착오로 여러 전쟁에서 실패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말의 힘으로 일어섰다. 올바른 판단을 하였으면서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러 무대에서 사라진 정치가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언제쯤 자극적인 막말이 아닌 우아한 언어로 상대를 제압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이런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수많은 명언 중 “싸우다 패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도, 무릎 꿇고 굴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 상황과 중첩되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처칠 역의 게리 올드만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가 옛날 의 그 미치광이 형사였다니.
영화산업의 메카,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 재봉틀 하나로 ‘할리우드’를 정복한 한국 아줌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바네사 리(48·한국명 이미경). 그녀의 할리우드 정복기는 어떤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공식 타이틀은 ‘패브리케이터(Fabricator)’. 특수효과 및 미술, 의상, 분장 등을 총칭하는 ‘FX’ 분야에 속해 있는 전문직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디자이너의 상상 속에 있던 배우의 의상을 현실에서 재현해내는 일이다. , , , 등 슈퍼히어로의 멋진 의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할리우드 최고 몸값의 패브리케이터 바네사 리를 LA 아트 디스트릭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할리우드 No. 1 패브리케이터
“패브리케이터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생소할 거예요. 번역을 하면 특수의상 제작자 정도가 제일 맞겠네요. 의상뿐 아니라 원하는 모양의 몸집을 만들기도 하는데 팻 슈트(Fat Suit)라고 불러요. 뚱뚱한 몸이나 괴물, 외계인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 개봉을 앞둔 영화 에서 배우 게리 올드만이 윈스턴 처칠 역을 맡았는데 배우의 몸보다 두 배 가까이나 큰 슈트를 제작해야 했어요. 폼 라텍스와 마이크로비즈라는 소재로 처음 시도했는데 정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어요. 게리 선생님도 마치 최고의 예술품 같다며 인정해주셨죠.”
바네사 리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탑’ 패브리케이터다. 이는 지난 13년 동안 쌓아온 그녀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화만 100여 편, 제목만 들어도 반가운 , , , , , , , , , , 등이 그녀의 손길을 탔다.
할리우드의 FX 분야는 철저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작사에서 FX 부분을 총괄할 숍(Shop)이나 아티스트에게 작업을 의뢰하면, 다시 그들이 의상, 분장, 헤어, 미술팀을 꾸리는데 보통 인력을 공개 채용하는 법이 없다.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인맥으로만 구성된다는 것이다. 언뜻 공정하지 않고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한 번은 모를까 실력이 없으면 그다음엔 이 바닥에 발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진정한 프로의 세계죠. 나는 이 바닥의 이런 속성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요. 생각해보세요. 서른이 훌쩍 넘은 동양 여자가, 영어도 잘 못하고, 더군다나 핸디캡까지 있는 내가 무엇으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요? 일 잘하는 거 빼고 미인도 아니고 날씬하지도 않아요(웃음).”
상처받은 명랑소녀
그녀는 두 살 무렵, 백신 접종 부작용으로 소아마비를 앓았다. 두 다리가 굳어진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어머니는 매일같이 침을 맞히러 다녔고 찜질을 해주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3년 만에 오른쪽 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끝내 왼쪽 다리에는 장애가 남게 됐다.
하지만 이씨는 명랑소녀였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쾌활한 성격에 친구도 많았다. 학창 시절 내내 오락부장을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 가족은 정말 빈털터리가 됐어요. 아빠 치료비로 다 쓰고 쌀을 살 돈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집이 망하니까 친구들이 다 떠나버리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마음을 다 주지 말아야 하는구나. 현실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거죠.”
미대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형편상 포기해야 했다. 대신 택한 것이 메이크업 학원.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영화를 좋아한 이씨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 사회는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메이크업을 해주는 직원으로 취직이 됐어요. 일을 잘하고있는데 일주일 만에 사무실에서 호출이 오더군요. 다리가 왜 그러냐고 묻기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렇다고 하니까 봉투 하나 내밀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짤린 거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요. 이후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됐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권리
딸이 상처받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과감히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 1993년, 이씨는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한국을 떠나왔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생계 때문에 공인회계사 사무실에 취직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뭔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패턴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술을 가르쳐주고 취직도 시켜준다고 하길래 그 길로 등록을 했죠.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패턴을 배웠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신명나게 하는지, 이씨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실력도 남달라 패턴을 배운 지 6개월 만에 취직이 됐다. 이후 7년간 그녀는 자바(LA 의류산업 중심지)에서 일하면서 고액 연봉을 받는, 소위 잘나가는 패턴사로 자리 잡게 된다.
“자바에서 일하는 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딸아이도 낳고 점점 생활이 안정되어갔어요. 그런데 어느 해 딸이 아파서 잠시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때 조그만 신문광고를 보게 됐어요. 할리우드의 한 숍에서 특수의상 패턴사를 구한다는 광고였는데 그게 제 마음을 흔들어놓은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이씨는 다시 자바로 돌아가지 않았고, 시급 12달러를 받으며 밑바닥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이씨의 선택을 두고 주위에서는 걱정과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때 힘을 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투잡, 쓰리잡이라도 뛸 테니 원하는 것을 하라며 용기를 줬다.
“살다 보면 운명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는 거 같아요. 나중에 알았는데 할리우드 쪽에서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광고가 나왔고 내가 그걸 본 거예요. 나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물론 한동안은 돈이없어 정말 고생을 했죠. 딸아이에게 정부에서 나오는 공짜 분유를 먹여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가족은 행복했어요. 남편과 함께 지금도 이야기해요. ‘우리 그때 진짜 재미있고 행복했지’라고요.”
슈퍼맨을 만드는 여자
지나고 보니 한국에서의 상처도 자바에서의 7년도, 버릴 것 없는 시간들이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빈틈없는 실력으로 무장된 바네사 리는 할리우드에서 깐깐하기로 이름난 넘버원 아티스트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특수분장계의 대부 릭베이커, FX 디자이너 패트릭 타투포우로스, 특수효과의 거장 스티브왕, 완벽주의 의상감독 콜린 앳우드…. 할리우드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은 모두 바네사 리의 스승이자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동료이며 친구다.
창의력은 기본, 사고의 유연성과 순발력은 패브리케이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보이는 모든 것이 의상 재료가 될수 있고 부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볼 때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다.
특수한 원단은 통달하고 있어야 하고, 각종 신소재에 대한 세미나가 있으면 찾아다니며 공부해야 한다. 슈퍼히어로의 전투 의상을 하도 많이 만들어 전쟁이나 무기에 대해 박사가 됐다. 우주선과 우주복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나사(NASA)에서도 일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해졌다. 실제로 에서 그녀가 만든 우주복을 보고 나사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고.
의상을 맡았을 때, 팔꿈치 장식을 위해 해체한 스키 부츠가 스무 개가 넘고, 샤키 오닐이 입을 라이트 의상에 사용할 특수 라이트테이프를 찾기 위해 전 세계 전기 회사의 신제품들을 뒤졌다. 늘 화학약품을 다루다 보니 스태프와 배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방면으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정말 좋아서 미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없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일하고 고작 엔딩크레디트에 수백 명의 스태프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뿐이죠.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도 있냐고 묻는데 ‘패브리케이터’ 카테고리는 없어요. 특수효과 부문에 속해 있으니까요. 돈이요? 물론 적지 않게 받죠. 메이저 제작사가 아니면 의뢰를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할리우드 제작 환경 안에서 보면 그렇게 대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에요. 돈을 벌려면 배우가 되는 게 낫죠(웃음).”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비하인드스토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숨은 즐거움 중 하나이지만 그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들의 사생활 보장은 스태프들의 프로페셔널 정신이기도하다.
유명 배우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럴 때는 좀 난감하다고. 이씨는 여간해서는 배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로서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폼’ 빠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그래도 좋은 이야기야 어떻겠냐며 하나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친절한 바네사 리.
“게리 올드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게리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내가 만든 팻 슈트(Fat Suit)에 완전히 감동을 받아 먼저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배우와 찍은 유일한 사진이에요(웃음). 딸아이가 연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하자 조언을 해주고 싶으니 꼭 촬영장에 데려오라고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에요. 또 배우 매튜 매커트니에게 직접 소개를 해주어서 그가 주연을 맡는 영화 에 참여하게 됐어요.”
숙취 때문에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서도 남다른 미모를 뽐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막내 스태프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건네던 안소니 홉킨스는 영화 에서 만났는데 무거운 슈트를 입고도 불평 한 번 하지 않던 영국 신사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녀가 애써 만든 전자회로 슈트가 아쉽게도 통편집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하자 직접 텐트로 찾아와 아쉬움을 표했다고.
보디슈트를 만들려면 배우들의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다면서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는 유쾌한 그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조니 뎁의 보디슈트를 언젠가는 꼭 만들고 말겠다는 사심(?)도 드러낸다.
꿈의 공장 ‘슈퍼슈트팩토리’
올해는 바네사 리에게 조금 특별한 해였다. 할리우드에서 일한 지 13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스튜디오를 갖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슈퍼슈트팩토리(Super Suit Factory)’. 이제 회사의 대표로서 제작사와 FX 숍을 상대하게 되었다. 영화사와 직접 계약을 하기도 한다. 개인으로 활동할 때보다 입지가 훨씬 굳어진 셈이다. 물론 몸값도 뛰었다.
또 하나 강동원 주연의 한국 영화 을 맡게 된 것도 그렇다. 한국 영화가 특수의상에 큰돈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데 특별히 은 주인공의 전투복을 위해 할리우드 최고 제작자를 찾았고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은 아마도 나에게 특별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워낙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라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점도 큰 의미가 있어요. 한국은 나에게 아픈 기억도 주었지만 솔직히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었던 부분이 있거든요. 한국인의 근성과 기술은 미국인들이 못 따라와요. 언젠가 나의 경력과 노하우가 한국 영화계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의 팬들에게도 깜짝 선물이 될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한국 배우와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이 늘어나는 만큼, 그녀의 역할도 주목된다. 실제로 이씨는 10년지기이기도 한 할리우드 특수분장 및 헤어 전문가 다이아나 최씨와 함께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언제 그 그림이 완성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거지요. 지금은 다이아나도 저도 너무 일이 많아서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오늘을 후회 없이 살다 보면 어느덧 내가 바라던 내 일이 되어 있더라고요. 너무 영화 같은 소리만 한다고요? 글쎄요… 뭐 여긴 할리우드니까요!(웃음)”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