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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정리러가 알려주는 옷장 정리 꿀팁
- 채우는 것이 곧 잘사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우고만 살아왔다면 물건 하나 버리는 게 쉽지 않지요. 하지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채워왔다면 이젠 정리하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시간이 왔다고요. 내 옷장은 나를 잘 표현하고 있는가? 옷장 정리의 첫 번째 과정은 스스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정리 방법이 있지만 물건의 진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옷장 속 쌓여 있는 옷들을 보며 나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나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옷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고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보세요.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드나요? 잘 입는 옷 VS 잘 안 입는 옷 좋아하는 옷의 비중과 그렇지 않은 옷의 비중을 따져보세요. 옷장을 잘 관리하는 방법은 좋아하고 자주 입는 옷의 비중을 늘리는 것입니다. 관리가 잘 안 되고 입을 옷이 없는 분들은 좋아하고 자주 입는 옷보다 입었을 때 그냥 그렇고 잘 안 입는 옷의 비중이 높게 마련이지요. 이렇게 따져보지 않고 분류해보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지만, 좋아하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을 나눠보면 생각보다 ‘입었을 때 그냥 그렇고 잘 안 입는 옷’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옷장은 주인을 닮는다 옷장 정리가 잘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삶에 따라 옷장을 정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옷장도 삶의 과도기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합니다. 체중이 늘거나 줄고, 임신과 출산으로 환경이 바뀌고, 나이에 따라 취향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경력 전환으로 업무에 필요한 스타일을 요구받을 수도 있고요. 퇴직을 해서 더 이상 정장 바지와 재킷이 필요 없다면 옷장을 정리할 때입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한두 벌만 남기고 인생 2막의 삶에 맞는 새로운 옷으로 옷장을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TIP 1 비우기 비우기 바구니를 활용하자 그만 입어야 할 옷들을 골랐다 해도 이 옷들을 정말 버려도 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비우기 바구니를 활용하세요. 50cm×50cm×50cm 정도의 크기가 되는 박스를 준비한 다음 안 입는 옷, 앞으로도 안 입을 것 같은 옷을 바구니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옷들은 ‘진짜’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홀가분하게 집어 넣으셔도 됩니다. 그런 다음 옷장이 아닌 제 3의 장소에 보관합니다. 비우기 바구니에 넣은 옷 중에 필요한 옷이 있다면 다시 꺼내서 입을 수도 있지만(아마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6개월이 지나도 옷들이 바구니에 그대로 담겨 있다면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다면 1년 후에는 홀가분하게 떠나보내십시오. ‘아까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정하자 왜 물건을 정리하지 못하냐고 물어보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대답이 “아까워서”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제품을 구매했을 때의 기억만 가지고 아깝다고 합니다. 물건의 가치가 ‘사용함’에 있다면 사용한 뒤에는 가치를 재정의해줘야 합니다. 아까워서 나중에라도 먹겠다고 냉동실에 넣어 놓은 음식은 언제 먹을지 알 수도 없고 결국 안 먹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음식의 가치는 ‘가장 맛있을 때’에 있기 때문이지요. 옷과 신발, 가방을 가득 진열해놓기만 하면 무슨 기쁨이 있을까요. 입고 즐기려 사둔 옷들이 1년이고 2년이고 옷장에서 나올 일이 없다면 그 가치는 무엇인지 재정의할 때입니다. 부피가 작은 물건부터 정리하자 옷은 우리가 매일매일 착용하는 물건 중 덩어리가 가장 큽니다. 그래서 정리하기도 쉽지 않죠. 만만치 않은 부피의 옷들을 빼고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정리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가장 작은 물건부터 정리해볼 것을 권합니다. 예를 들면 여성분들은 속옷이나 스카프, 남성분들은 넥타이부터 정리하면 좋습니다. 넥타이는 경조사용 1, 캐주얼용 2, 격식 있는 모임용 2개면 충분합니다. TIP 2 채우기 홈쇼핑을 멀리하자 시니어가 자주 애용하는 쇼핑 중 하나는 홈쇼핑입니다. 그리고 타깃 고객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여성분들이죠. 홈쇼핑에서 물건을 샀던 분들은 아마 경험하셨을 겁니다. 화면에서 보던 옷이랑 알게 모르게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요. 무료반품이라는 획기적인 서비스가 있지만 화면빨과 모델빨에 넘어가 구매한 그 아이템이 진짜 나를 위한 것일까요? 옷장 속 아이템을 파악하자 사고 보니 옷장에 비슷한 옷이 있었다는 옷장 괴담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내가 어떤 옷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되기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똑똑한 쇼핑러가 되려면 옷장이 내 손 안에 있듯 훤히 꿰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슷한 옷을 ‘또’ 구매하는 실수를 막고 코디해서 입을 옷까지 고려할 수 있습니다. 옷을 구매할 때는 흰색 조명 아래서 입어보자 의류 매장에서는 대부분 따뜻하면서도 세련되게 비춰주는 누르스름한 빛깔의 조명을 씁니다. 이런 조명 아래에서는 옷 색깔과 디자인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습니다. 옷을 잘 고르는 팁은,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후 매장 안에 있는 모든 거울 앞에 서 보고 가급적 조명의 영향을 안 받는 곳에서 꼼꼼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매장에서는 괜찮았던 옷이 집에서는 영 그 느낌이 안 나는 것은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TIP 3 정리하기 나무 옷걸이를 사용하자 옷장은 옷을 보관하는 곳이지 옷을 쟁여두는 곳이 아닙니다. 나무 옷걸이는 옷걸이의 두께 때문에 옷을 촘촘히 넣어둘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철 옷걸이는 빈틈없이 빽빽하게 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정리할 옷이 많아도 그냥 걸어놓게 됩니다. 나무 옷걸이 사용을 추천하는 이유는 옷과 옷 사이의 공간을 확보해 옷장에 어떤 옷이 걸려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정리도 그때그때 할 수 있습니다. 수납박스는 2개 정도만 사용하자 그 계절에 입을 옷만 옷장에 놔두고 나머지 옷은 수납박스에 보관합니다. 그런데 수납박스가 너무 많으면 계절마다 옷을 꺼내고 넣어두는 작업이 즐겁지 않고 그야말로 ‘일’이 되어버립니다. 정리 과정이 쉽고 단순해야 힘이 들지 않습니다. 봄과 가을옷은 거의 같이 입으니 함께 분류하고 여름옷과 겨울옷 박스를 각각 하나씩만 준비해두면 옷 찾기도 쉽고 버릴 옷들을 쓸데없이 쌓아두지 않게 됩니다. 부부라도 옷은 분리해서 보관하자 부부의 옷을 함께 보관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옷이 뒤섞여 있으면 정리를 해놔도 금세 다시 어지러워집니다. 부부라 해도 옷장은 따로 쓸 것을 권합니다. 그래야 각자의 옷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확인이 가능하고 정리 여부를 판단하기에 좋습니다. 부부 옷을 아내가 관리하는 경우라면 남편이 잘 안 입는 옷(하지만 놔두라고 이야기하는)은 비우기 바구니를 활용해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옷 어딨어?” 하고 물으면 비우기 바구니에서 꺼내주면 되고, 6개월이 지나도 옷을 찾지 않으면 속 시원하게 버리면 되니까요.
- 2019-03-0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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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복 코디는 아내에게 맡긴다
- 요즘은 교복 자율화 실시로 학생들의 복장이 제각각이지만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교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나팔바지에 생선 등처럼 주름을 세우거나, 목 칼라 주변에 호크 몇 개 더 달아 덜렁거리도록 해서 멋 좀 내는 게 전부였다. 대학생이 돼서야 비로소 교복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청바지, 티셔츠가 다였다. 심지어 나는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나오는 ‘윤동주 시인’의 복장처럼, 검은 교복 상의를 걸치고 다녔다. 그거 하나만 입으면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됐고 비싼 옷을 살 필요도 없었다. 4년 동안 그러고 다니다가 취업을 하니 그때부터 양복이 정복이었다. 수십 년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다. 넥타이는 정말 싫었다. 휴일에 경조사가 생겨 넥타이를 매야 할 때는 마치 누가 내 목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은퇴를 하면서 넥타이의 압박에서 겨우 풀려났지만 그마저도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제2의 인생 설계 후 강의를 하게 됐는데 의무적으로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됐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이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편하게 입고 다니니 자유롭고 젊어 보이기까지 해서 좋았다. 내가 선호하는 건 진한 색깔의 옷들이다. 나이 들수록 밝게 입는 게 좋다고 해서 티셔츠만큼은 다양한 색상을 골라 입는다. 날씨에 따라 가벼운 조끼를 속에 입고 노타이 차림에 재킷을 걸치면 그만이다. 바지는 청바지도 좋고, 상황에 따라 언밸런스한 정장 바지도 잘 어울린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싶다. 어떤 옷은 편한 맛은 있지만 체격에 안 어울리고, 어떤 옷은 디자인은 좋은데 얼굴색과 잘 맞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아내가 옆에서 코디를 해준다. 아내의 패션 감각은 남다르다. 잘 맞춰서 골라주는 옷을 입으면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실 내가 좋아하게 된 패션도 아내가 추천한 옷이다. 그 옷을 자주 입다 보니 이제는 내 전용 패션이 됐다. 패션 감각으로 따지면 나는 거의 문외한이다. 계절이 바뀔 때가 제일 부담스럽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옷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봄이 왔는지도 모르고 아직 겨울옷을 입고 있고, 가을이 다 지나고 초겨울이 왔는데도 반소매를 입고 외출해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사람이 결혼 후 아내의 달달한 잔소리를 들으면서 무딘 감각이 점점 살아났다. 요즘 내 옷차림은 많이 세련되어졌다. 모임에 나가 사람들에게 패션 감각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우쭐해진다. “어떻게 그렇게 젊어 보이냐? 비결이 뭐냐?”라고 묻는 친구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자신감도 생기고 기분도 좋아진다. 나이 들수록 옷을 정갈하게 잘 입어야 한다. 여든이 넘은 장모님은 병원에 갈 때면 항상 장롱에서 깨끗하고 좋은 옷을 꺼내 입으며 “잘 입고 가야지, 차림이 추레하면 간호사들도 우습게 봐” 하신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옷 잘 입는 비법이 하나 있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된다. 그리고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역시 당신의 패션 감각은 최고야!” 그러면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가정도 화목해진다. 자신에게 패션 감각이 있어도 옷 구매와 외출복 코디는 아내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 아내에게는 남편 꾸며주는 시간이 큰 기쁨 중 하나일 테니까….
- 2019-03-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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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 뭉치 분실 사건
- 분주했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도착했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으로 열쇠 뭉치를 찾았다.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당연히 있어야 할 열쇠 뭉치가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술이 확 깼다. 주머니 내용물을 다 꺼내고 입고 있는 옷에 달린 주머니까지 다 뒤져봤는데도 열쇠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낭패였다. 열쇠 뭉치에는 열쇠와 함께 교통카드, USB가 달려 있고 지인이 선물해준 헝겊 열쇠 케이스도 있다. 무게도 좀 있는 편이라 주머니에서 빠져 나갈 리는 없었다. 누군가 가져갈 만한 것은 최근 충전한 교통카드에 들어 있는 현금 6만 원 정도. 그 외에는 쓸모가 없다. 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예비 열쇠를 만들어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가방 안쪽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히 예비 열쇠가 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잠을 잘 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아끼던 물건, 자주 사용하던 물건을 분실하면 겪는 현상이다. 아침에 깨서 어젯밤 일을 회상해봤다. 모임을 마치고 맨 처음 간 곳은 빈대떡집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벗어놓은 두툼한 겨울옷이 처치 곤란이라 둘둘 말아 이리저리 옮긴 기억이 난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 뭉치가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겨울옷들은 디자인을 중시해 주머니 깊이를 얕게 만들어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지퍼로 주머니를 잠글 수도 있지만, 추운 날 손을 넣고 다니기 때문에 지퍼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다. 두 번째 간 집은 커피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간 곳이 당구장, 네 번째 간 곳이 호프집이었다. 가는 곳마다 두툼한 롱패딩을 대충 접어뒀다. 당구장에서는 손님들이 마구 들이닥치는 바람에 손 씻고 계산하고 돌아오니 이미 옷이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다음 날 역순으로 돌아보자며 열쇠를 찾으러 나섰다. 먼저 빈대떡집에 들렀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건지 주말이라 문을 닫은 건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원망스럽게 밖을 돌아봤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없었다. 커피집, 당구장도 가봤지만, 보관하는 분실물이 없다고 했다. 네 번째로 간 호프집은 술김에 따라간 곳이라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돈을 지불하고 카드로 결제한 덕분에 영수증이 있었다. 영수증에 찍힌 상호와 주소를 확인하고 그 집을 찾을 수 있었지만 역시 보관하는 분실물이 없다고 했다. 오는 길에 충무로 전철역 분실물센터에도 들러봤다 전철 좌석에 열쇠 뭉치가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실물센터는 주간에만 열고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시내로 나가 저녁까지 일부러 시간을 보냈다. 아직 못 가본 빈대떡집에 가봐야 했기 때문이다. 왠지 그 집에 보관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집에도 열쇠 뭉치는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귀가하는데 동네에서 지인들을 만나 또 한잔했다. 열쇠는 분실하기 쉬우니 도어 록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고 도어 록은 지문이 찍혀 어지간한 전문가라면 바로 열 수 있으니 아날로그 자물쇠가 낫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뒤 사무실을 오랜만에 나갔다. 그런데 책상 아래에 있는 컴퓨터 본체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열쇠 뭉치가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열쇠 뭉치가 없어진 날 USB를 사용하려고 컴퓨터에 꽂았는데 접속이 안 되어 몇 번 시도하다가 그대로 두고 간 것이다. 내 손을 벗어난 물건은 잃어버리기 쉽다. 우산도 그렇고 모자, 장갑도 그렇다. 주머니에 넣어두거나 가방 안에 넣어둬야 한다. 주머니도 바지 주머니가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보다 안전하다. 교통카드를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분실한 적이 있으므로 앞으로 열쇠 뭉치는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이물감이 느껴지고 꺼낼 때도 불편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소 잃고도 외양간을 못 고치는 이유다.
- 2019-02-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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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의 롱 패딩
- 작년 겨울 한 유명 백화점에서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롱 패딩은 없어서 못 팔았다. 이 상품을 사려고 고객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등 그야말로 광풍이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의류 업체에서는 롱 패딩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그야말로 롱 패딩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런데 롱 패딩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는 보도가 들려왔다. 살 만한 사람은 대부분 샀을 테고 올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은 탓도 있다는 분석도 따랐다. 내가 한때 일하던 회사에서 1996년 ‘UMBRO’라는 영국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처음 들여왔다. 달러 환율이 800대 1까지 가던 시절이었으니 수입해서 팔 만했다. 그때 상품 품목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롱 패딩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 옷을 입고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추리닝 정도가 주종이던 스포츠 패션에서도 멋스러웠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패션이라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나는 그 무렵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했는데 롱 패딩 가격을 놓고 사장과 갈등을 빚었다. 수입 원가 1만5000원 상당의 품목이었으니 9만 원 정도로 팔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요즘처럼 오리털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인조 솜으로 만든 패딩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비싸게 정가를 매겨야 팔릴 품목이라며 판매가를 놓고 고집을 피웠다. 더 올리면 안 팔린다고 강하게 조언했는데도 사장이 내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12만 원, 15만 원, 18만 원으로 가격을 순차적으로 올렸다. 롱 패딩이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판매는 부진했다. 결국 1997년 1월이 돼서야 사장은 내게 가격 책정을 맡겼다. 하지만 이미 판매 기회를 놓친 상황이었다. 이런 상품은 추운 겨울에 잘 팔리고 첫 추위 때가 적기다. 11월이 적기이고 날씨에 따라 12월까지도 판매가 이어질 수 있지만, 1월에 겨울 상품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년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패딩이 100만 원을 훌쩍 넘었는데도 날개 돋친 듯 팔린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롱 패딩 가격으로 사장이 책정한 가격은 너무 비쌌다. 롱 패딩의 유행이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난 작년에서야 시작된 셈이다. 나나 사장 모두 너무 앞선 시기에 롱 패딩에 큰 기대를 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유행에 민감한 편이고 유행 주기도 짧다. 롱 패딩 하나를 사면 더 이상은 사지 않는다. 롱 패딩을 입어보니 과연 따뜻했다. 무릎까지 덮어주니 당연하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무릎에 옷이 닿아 걸리적거렸다. 이를테면 멋을 포기한 패션이다. 마치 이불을 두르고 다니는 형상이다. 패딩 옷에 붙은 모자에 털이 달린 것도 있다.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보온 효과는 거의 없다. 털이 붙었다는 이유로 비싸기만 하다. 따로 따뜻한 모자를 사서 쓰는 편이 더 실용적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롱 패딩을 가져가려 했다. 고산에 올라가면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부피 때문에 포기했다. 숙소에서는 입을 수 있으나 트레킹 때는 입을 수 없다는 조언도 작용했다.
- 2019-01-2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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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히말라야 100km 트레킹 완주
- 1월 6일부터 20일까지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전남불교환경연대가 주관하고 청소년 13명이 포함된 총 27명 팀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목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정이었다. 8박 9일간의 일정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와 제2의 도시 포카라 관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팔은 한국과 3시간 15분 시차가 나는 나라다. 남한보다는 약간 크고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의 봉우리를 보유한 산악 국가다.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7000m가 넘지 않으면 ‘마운틴(mountain)’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3대 미봉으로 불리는 마차푸차레도 피크(peak)로 불린다. 8박 9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2시간 만에 당도한 나야풀에서 시작되었다. 첫날부터 고전이었다. 4시간짜리 코스였는데 돌계단으로 된 오르막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숙소에 돌아와 땀에 젖은 옷을 말려봤으나 습도가 높아 귀국하는 날까지 마르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7시간을 걸어 고라파니까지 갔다. 계속 오르막 돌계단이 나왔고 소똥, 말똥이 마구 방치되어 있어 냄새가 진동했다. 이날부터 체력 미달로 탈락자가 한 명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등에 진 짐이 부담스러웠다. 원래 짐을 날라주는 포터를 2인당 한 명씩 고용했는데 포터가 가지고 가는 짐 외에도 개인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있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날씨 또한 한국의 늦가을 정도의 기온이라 내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땀을 빼며 고전했다. 3일 차에는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우리는 이미 3000m 고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때 가장 걱정하던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목적지인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없다고 했다. 샤워도 하지 말고 특히 머리를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했다. 샤워는 물론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털모자를 쓰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티슈로 눈곱만 겨우 닦아내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남자들은 아예 면도를 포기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땀이 워낙 많이 나서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날마다 땀에 젖어도 목욕을 못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4일 차에는 타다파니에서 촘롱을 거쳐 시누와까지 6시간, 5일차에는 도반, 히말라야 롯지, 데우랄리까지 6시간을 걸었다. 길도 가파랐지만 데우랄리는 해발 3150m라서 고산병을 적응하는 구간이었다. 도반부터는 눈길이었다. 아이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겨울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내려 길이 사라지기도 했다. 6일 차는 디데이였다. MBC로 불리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해발 3700m), ABC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갔다가 다시 마차푸차레 캠프로 돌아와 숙박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입구에는 트레킹 완주 축하, 환영 간판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故 박영석 대장과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묘비가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마치 서울의 인왕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8091m, 마차푸차레는 6993m이다. 전문 암벽 등반 기술이 필요한 구간이다.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두통에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소화도 안 되어 방귀도 자구 뀌게 된다. 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이드 말로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은 긴장이 많이 됐다 기대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신령한 산으로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가 눈앞에 다가와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눈 덮인 산들과 계곡을 보고 있자니 태고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설산의 한기와 찬바람은 이불 안쪽까지 뚫고 들어왔다. 7일 차부터는 하산을 했다. 밤부까지 내려온 뒤 8일 차에는 촘롱에서 갈림길로 지누단다까지, 9일 차에는 나야풀까지 매일 8시간을 걸었다. 8박 9일 동안 우리는 약 23만 보, 100km를 걸었다. 히말라야는 여러 산이 겹쳐 있다. 그래서 산 하나를 넘어가려면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그다음 산을 올라야 한다. 당연히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또다시 급경사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마저 돌계단은 우기에 홍수와 산사태가 자주 없어진단다. 도반까지는 돌계단이 많지만 그 뒤부터는 자연스런 흙길이다. MBC에서 ABC까지는 왕복 4시간 코스. 양옆에 트인 계곡이 있어 분위기가 호젓했다. 68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완주했다. 이 코스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뿐 아니라 특히 고산병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도 없었고 고산병 증세도 겪지 않았다. 평소의 체력만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시니어의 버킷리스트에 히말라야 트레킹이 들어 있어도 소망일 뿐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 항목 하나를 지운다. 탄탄해진 무릎 위 근육과 허벅다리 뒷 근육을 만져본다. 숙박과 숙식 롯지(Lodge)는 우리나라 민박집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숙박 시설이 열악하다. 샤워하기가 어렵다. 더운 물을 쓰려면 200루피(한화 2000원) 정도 내야 하고 방은 난방이 안 된다. 싼 건축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이라 문도 틀어져 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침낭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 수단껏 이불을 구해왔고 150 루피 정도에 뜨거운 물을 사서 물통과 핫팩을 안고 자야 했다. 식사 메뉴도 다양하지 못해 전통 음식인 달 바트를 자주 먹었다. 돈을 더 주면 한국 라면과 밥을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파는 롯지도 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좌식 변기라 불편했다. 휴대폰 충전과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도 100~200루피의 돈을 받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롯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예약 없이는 숙박도 어렵다. 독방도 있지만 대부분 한 방에서 4~6명이 자야 한다. 보통 6시에 저녁식사를 마치지만 특별히 여가시간을 즐길 거리가 없어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자는 경우가 많다. 복장 1월의 날씨이지만, 카트만두는 낮 기온이 약 20℃나 된다. 그러나 고산에서는 영하 15℃까지 떨어지므로 옷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 아침시간에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춥고 트레킹을 하다 보면 땀이 나서 하나씩 벗게 된다. 포터가 짐을 날라주지만, 포터 짐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으면 나머지 짐은 스스로 메고 가야 한다. 기온 편차가 심해 여름옷에서 겨울옷까지 갖춰야 하니 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포터는 여러 사람 짐을 합쳐서 지고 가기 때문에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가져가면 안 된다.
- 2019-01-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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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단상
- 며칠 전부터 아파트 입구 나무에 색색의 꼬마전구가 반짝거리는 장식이 생겼다. 연말이면 부녀회에서 설치하는데, 작은 아파트라 조촐하지만 오가며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크리스마스도 생각나고 이제 올해도 다 지나가고 새해가 다가온다는 걸 실감하게 해 준다.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또 다음날이 계속된다는 삭막한 생각을 하지만 어릴 땐 왜 그리 크리스마스 시즌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가슴 떨리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기다리며 설렜던 기억이다. 딸만 셋인 우리 집에 크리스마스 전날이면 창문의 빨랫줄에 양말이 세 개 걸렸다. 정이 넘치던 아버지는 작은 양말에 들어가지 않는 선물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착한 아이인 너희에게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갔다”고 웃으셨는데, 나이가 들고나서부턴 산타는 아버지란 사실을 알아채고 흐뭇해했었다. 그래도 두 살씩 터울 지는 동생들에겐 비밀처럼 진짜 산타할아버지가 왔었다고 숨겼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잘 나가지 않던 교회도 열심히 출석했다. 작은 봉투에 담긴 사탕과 과자를 받는 재미도 있었지만,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 늦은 밤까지 집집을 오가며 대문 앞에서 캐럴을 부르기도 했다. 개인주의인 요즘에는 한밤중에 누가 와 대문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땐 꽤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른 재미있던 기억이 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옛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다. 어릴 적 동네마다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뽑기 장수를 마주쳤을 때다. 작은 국자에 설탕을 녹여 나무젓가락 끝에 소다를 콕 찍어 저어주면 설탕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철판에 뒤집어엎고 누르개로 눌러주면 반반하고 동그란 설탕 과자가 만들어졌다. 거기에 별 모양이나 아령 같은 모양의 틀을 찍어주는데, 그 모양을 부서지지 않게 잘라내면 투명한 설탕 과자를 경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겨울날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추운 줄도 모르고 옷핀 끝에 침을 묻혀가며 열심히 모양을 잘라내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대부분 가운데가 부러지거나 망가져서 경품을 타는 건 매우 어려웠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옛 추억의 풍경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어 좋다. 엊그제 을지로 입구에서 새끼줄로 단단히 겨울옷을 입은 나무를 보았을 때 코끝이 찡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정릉의 마당 넓은 집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경사진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은 커다란 잔디밭이 반듯하고 둘레에 라일락 꽃나무와 보랏빛 방울꽃이 주렁주렁 열리는 등나무가 있었다. 철이 되면 아름답게 피어 눈을 즐겁게 해주던 장미꽃 나무도 여러 그루 있었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새끼줄로 장미랑 꽃나무에 겨울 채비 옷을 입혀주었다. 솜씨 좋은 아버지가 열심히 새끼줄을 꼬아 나무에 겨울옷을 입혀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도 따뜻해지는 듯했었다. 꼼꼼하게 감싸서 한겨울 추위도 견딜 수 있었던 꽃나무도 늠름하고 멋지게 보였다. 을지로 입구의 새끼줄 옷을 입은 나무가 그 옛날 마당 넓은 집의 겨울옷 입은 꽃나무와 아버지를 추억하게 해주었다. 한겨울에 느낀 아련한 단상들이다.
- 2018-12-2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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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피로 사회
- 불과 몇 개월 전의 무더위가 어느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어느덧 가을이 깊어간다. 기온이 갑자기 하강하여 부리나케 옷장을 열고 겨울옷으로 교체작업에 나선다. TV 화면에 비치는 설악산은 온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장관이 화려하다. 바야흐로 나무들은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생의 다운사이징을 준비한다. 꽃이 만발한 청춘의 봄도 화사하지만, 인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의 중후한 미도 그에 못지않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인생의 황금기로 언급한 6, 70대가 아마도 단풍에 물든 인생의 가을이 아닐까 한다. 아직 나무숲을 헤매고 있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백세의 눈으로 숲을 관조하는 시각에서 우리의 삶은 이미 단풍이 물드는 초입에 당도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삶이 아름답고 향기로워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비 맞아 누추하고 칙칙한 낙엽이 될까 걱정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름다움은커녕 노후에 대한 걱정으로 온통 우울한 얼굴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관계마저 삭막해져 가는 듯하다. 오가는 언어에도 날이 서 있다. 해탈까지는 아니어도 나이 들면서 타인에게 너그러워지는 게 보통인데 편협하고 옹졸한 모습을 보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슴 아픈 일이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모임에 나가면 서로에 대한 덕담보다는 뒷담화로 모임 이후 감정이 상하곤 한다. 단풍처럼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다운사이징 하는 관계들이 늘어났다. 길지 않은 인생에 무슨 낙을 보려고 억지로 그런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나 싶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풍성한 인간관계를 즐기고 살다가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데 우리네 삶은 그 반대로 단풍 근처에도 못 가보고 칙칙한 낙엽으로 하나둘 사라져 갈 것을 생각하면 입맛이 씁쓸하다. 그러나 어쩌랴. 뾰족한 말의 창에 찔려 피 흘리며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외로워지더라도 관계를 정리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이것이 작금의 노년이 겪는 삶의 애환이다. 행복이란 감정의 영역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성이나 의지로 행복하고자 해도 감정으로 느낄 수 없으면 행복이 아니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더라도 행복감의 유통기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큰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생활 속에서 작은 행복을 만들어가는 게 좋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감정 환경은 그리 밝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진영 간, 지역 간, 세대 간, 상하 간, 남녀 간에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해 갈가리 찢겨 있고 온라인상의 참람한 댓글들을 보면 거의 인격살인에 다름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제정신 차리고 감정 추스르며 살아가기도 힘겨울 지경이다. 그러니 노년의 환경이라고 정상일 리 없다. 감정피로지수가 높은 사회를 살아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기시미 이치로의 에서처럼 인간관계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니 환경 탓만 하며 불행에 빠지지 말고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질’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엊그제 비가 오는 속에서도 춘천마라톤이 열리는 북한강 변 춘천 가도의 단풍은 선명하게 빛났다.
- 2018-11-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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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 라트비아 ‘리가’
-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 2018-11-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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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쨍한 사이다 맛 동치미
- 추운 겨울 아침 며느리가 전화했다. 친정엄마가 동치미를 보내셨는데 어머님께도 갖다 드리라며 한 통을 더 주셨다 한다. 말만 들어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사부인의 김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어서 맛보게 될 동치미에 벌써부터 입맛이 다셔졌다. 사돈댁이 사는 곳은 충청도인데 마당에서 익힌 동치미라 했다. 며느리가 들고 온 동치미에는 탱글탱글한 무가 알차게 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국자 떠 국물을 마셔보았다. 달콤 시원하며 쨍한 맛이 났다. 이 맛은 예전 정릉의 마당 넓은 집에 살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정릉의 집은 파란 잔디가 깔린 마당이 꽤 넓었다. 잔디밭 주위로는 해마다 새빨간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곤 했다. 한쪽으론 커다란 라일락나무가 있어 향기에 취했고 안방 창문 앞 등나무엔 은방울처럼 예쁜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보기에 좋았다. 마당이 넓었던 정릉 집은 꽃이 필 때도 아름다웠지만, 눈 내리는 한겨울 풍경도 못지않게 좋았다.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마당 한쪽에 구덩이를 파고 서너 개의 큰 장독을 묻던 일도 즐거운 추억 중 하나다. 한겨울이면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집에 찾아오신 소사 아저씨와 함께 커다란 장독을 땅에 묻었다. 장독을 묻은 후엔 솜씨 좋은 소사 아저씨가 지푸라기를 꼬아 멋진 장독 덮개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소사 아저씨는 잔디밭 주변의 장미나무에도 겨울옷을 입혔다. 칭칭 새끼줄로 꼰 짚옷을 두른 장미나무는 이듬해까지 따뜻하게 겨울을 견뎠다. 예전에는 김장을 하면 한 접 두 접씩 했다. 한 접이 배추 100포기이니 4등분 한 배추 400개가 산처럼 쌓였다. 요즘에는 4~5포기 정도만 하지만 그땐 다들 찬거리가 부족할 때라 겨울 반양식으로 김장을 했다. 물론 딸들도 돕기는 했지만 대부분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왁자지껄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김장을 도와주셨다. 엄마는 김장보다 아주머니들께 대접할 음식 준비로 바쁘셨다. 따끈한 쇠고기뭇국과 김칫소와 함께 먹을 돼지고기를 삶아냈다. 뽀얗게 김이 서린 주방에서 아주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어울려 먹던 밥상은 늘 즐겁고 풍성했다. 그렇게 배추김치와 동치미가 땅에 묻은 장독으로 차곡차곡 들어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게 익었다. 어느 눈 내린 추운 겨울날, 바가지를 들고 나가 짚 덮개를 벗기고 장독 뚜껑을 열어 떠낸, 살얼음이 사르르 뜬 동치미는 쨍한 사이다 맛이 났다. 어쩌면 그렇게 달고 시원한지… 땅속에서 서서히 익힌 게 아니면 어떤 김치도 그런 맛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마당 넓은 집에서 사는 동안은 매년 겨울 맛있는 김치와 동치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살기 편한 아파트로 이사하신 후부터는 한 번도 그 맛을 본 적이 없어 아쉽다. 오늘 며느리의 친정에서 보내온 동치미가 옛 맛을 떠오르게 했다. 아삭한 무와 국물을 맛보며 옛 추억을 떠올려봤다. 사부인께 감사 전화를 드려야겠다.
- 2018-03-0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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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간 추석 연휴 계획 세우기
- 이번 추석 연휴는 장장 10일이다. 추석 당일이야 차례지내고 가족 친척들이 모이니 그런대로 보낸다 치자. 나머지 9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혼자 아무 것도 할 일 없다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미리 일정을 짤 필요가 있다. 연휴가 다가오고 있으면 늘 그래 왔다. 첫째 할 일은, 여름옷을 정리하고 가을 옷으로 준비하는 일이다. 반팔 옷과 얇은 옷들을 잘 세탁하여 내년 여름까지 잘 보관해두는 작업이다. 안 입었던 옷들과 버릴 옷들을 이 참에 가려낸다. 누구한테 줄 옷과 그대로 버릴 옷도 구별해 둔다. 가을 옷은 간절기에 잠깐 입는 옷들이다. 11월말쯤에는 다시 정리하고 겨울옷을 준비해야한다. 가을 옷도 꺼내면서 남 줄 옷과 버릴 옷으로 구분해야한다. 입을 옷은 다림질하여 언제라도 입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작업에 하루는 족히 잡아야 한다. 두 번째 할 일은 책 정리이다. 여름내 본 책과 보려고 꺼내 둔 책 등 양이 엄청나다, 역시 남에게 줄 책과 버릴 책, 그리고 필자가 볼 책들을 우선순위를 정한다. 이럭저럭 하루 일거리이다. 세 번째로, 책 정리하다가 눈에 들어 온 책 중 하나를 골라 집중적으로 완독하는 일도 하루 일거리이다. 마침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꼭 읽어야 할 책을 고르는 것이다. 네 번째 할 일은 애창곡을 3곡쯤 마스터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배운 노래인데 잊어먹어서 다시 익혀야 하는 노래, 최근에 배웠으나 아직 내 노래로 만들지 못한 노래를 중점적으로 익히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가서 실습까지 마쳐야 내 노래가 된다. 이 작업도 하루 종일 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당구치는 지인을 물색한다. 보통 때는 저녁시간에 만나다 보니 시간 관계 상 보통 한 판 또는 삼판양승으로 끝냈으나 낮에 만나 한 나절 아예 당구를 신물 나도록 치는 것이다. 끝나고 저녁 식사 겸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를 보내면 된다. 여섯 번째로, 추석연휴에는 볼만한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된다. 하루에 2편~3편을 몰아서 보면 하루가 간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감상문도 써야 하니 바쁜 날이다. 일곱 번째, 혼자 등산을 가는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남한산성 성곽일주를 했다. 7시간 걸리는 난코스이다. 아침 식사하고 출발해도 하루 종일 걸린다. 집에 와서는 딴딴해진 종아리를 붙잡고 마사지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여덟 번째, 다들 떠난 서울 도심에 카메라 들고 나가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전시회와 볼거리 등이 많다. 아직 서울길도 못 가봤다. 연휴에 서울을 벗어났다가는 교통이 막혀 고생한다. 아홉 번째는 채우지 말고 하루쯤 남겨둔다. 필자처럼 몸이 근질거려 연락해오는 지인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열흘 연휴 계획은 꽉 찬다.
- 2017-09-20 1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