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주거공간인 펜트하우스는 자산가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고급단지 최상층에 조성되며 고급 자재와 인테리어, 최첨단 설비가 적용돼 있다. 시장 상황과 큰 관계없이 최고가 거래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까지 서울에서 거래된 최고가 단지 세 곳이 나란히 해당 단지의 펜트하우스 타입인 것으로 조사됐다.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나인원 한남, 에테르노 청담 등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존 펜트하우스 외에 앞으로 어떤 고급 펜트하우스들이 등장할까?
마제스힐
2025년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에 들어설 예정인 고급 주택 ‘마제스힐’의 펜트하우스는 단 14세대만 분양되며, 분양가는 500억 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고교·세화고교·상문고교 등 강남 8학군의 교육환경을 누릴 수 있으며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등 문화 인프라가 인접해 있다. 내부에는 핵 대피시설(N.E.F)이 도입될 예정이며, 단순 대피를 위한 방공호가 아닌 3개월간 숙식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모든 세대에는 방탄, 방폭 유리를 사용했다. 피트니스센터, 스크린 골프장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비롯, 세대 안으로 차를 탄 채 이동할 수 있는 주차시설이 들어선다. 이 외에도 영화관·와인라운지·보타니컬 라운지·호텔 컨시어지 및 세차 서비스·발렛주차와 차량 대기 서비스·경호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더팰리스 73
‘현시대에 가장 완벽한, 최상위 주거 공간’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더 팰리스 73’은 삼성물산이 시공사로 참여하고, 삼성전자와도 업무협약을 맺었다. 2027년 준공 예정이며 지하 4층~지상 35층, 2개 동에 럭셔리 대형 평형 아파트 56세대, 최상층 펜트하우스 2세대, 럭셔리 테라스 오피스텔 15실 등 총 73세대 규모다. 세계적 건축 거장인 리처드 마이어의 설계 사무소인 마이어 파트너스(MP)가 단지 내, 외관 설계에 직접 참여했다. 독립형 단독 룸으로 구성된 스파 공간, 풀과 라운지를 보유한 풀 사이드 클럽, 프라이빗 피트니스 클럽과 스크린 골프룸과 라운지로 구성된 골프 하우스가 마련될 계획이다. 이 외에도 레스토랑과 연계된 다이닝 라운지, 와인 룸과 비즈니스 라운지, 다양한 크기의 미팅룸과 티(tea)룸도 조성된다.
워너청담
2025년 완공될 ‘워너 청담’의 펜트하우스는 분양가 350억 원에 달한다. 슈퍼카 4대를 집 안에 주차할 수 있는 ‘스카이가라지’, 복층 구조, 지하 와인 보관소와 한강 조망 테라스, 인피니티 풀 등 특수 설계를 내세웠다. 또 전용면적이 고급 주택 여부를 가르는 기준(245㎡)을 훌쩍 뛰어넘어 취득세율이 11%에 이르는 만큼 취득세만 43억 500만 원(농어촌특별세·지방교육세 포함)을 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중장년이 가장 일하기 적합한 직종은 ‘농림·어업직’이며, 적합한 직업은 플로리스트로 나타났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최근 발표한 ‘2020 한국의 직업정보’ 보고서에서 중장년(50~69세)이 수행하기에 직업별로 어느 정도 적합한지 조사를 진행했다. 해당 조사는 총 537개 직업군에서 1년 이상 종사하고 있는 직장인 1만 6244명을 대상으로 했다.
설문 문항은 “직업훈련 등을 받아 중장년층이 새롭게 진입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중장년층의 경력과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직무)이라고 생각한다”, “중장년층이 일하기에 작업환경(들고 옮기기, 오르내리기 등)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와 같이 3개 문항에 대해 5점 척도(①전혀 아니다, ②아니다, ③보통, ④그렇다, ⑤ 아주 그렇다)로 응답 평균값을 측정했다.
직업 훈련 등 신규 진입 적절성을 고려했을 때 중장년이 가장 일하기 적합한 직종은 ‘농림·어업직’이었다. 이어 ‘미용·여행·숙박·음식·경비·청소직’과 ‘영업·판매·운전·운송직’이 뒤를 이었다. 반면 가장 적합성이 낮은 직종은 ‘연구직 및 공학 기술직’으로 나타났다.
적합성 수치가 가장 높은 개별 직업은 플로리스트다. 플로리스트는 꽃을 보기 좋게 배열하는 일을 하는 직종 중 하나다. 흔히 꽃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콘셉트와 분위기를 정하고 이에 맞는 꽃 구매, 생화 관리, 작품을 만들어 예쁘게 포장하는 것 등 다양한 업무를 포함한다.
두 번째로 높은 직업은 자연 및 문화해설사로, 자연환경의 유래와 역사, 중요성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 탐방 해설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한다. 계절마다 바뀌는 관찰로를 모니터링하기도 하고, 안내판을 만들거나 해설을 위한 학습 자료를 개발한다. 업무의 난도는 높지 않지만 파트타임 형태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수입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주로 관광객을 상대하다 보니 남들이 쉬는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외에도 심리 상담 전문가, 공예원, 보험 모집인, 양식 조리사, 창업 컨설턴트, 부동산 중개인, 보험 대리인 및 중개인, 인적자원전문가, 조각가, 텔레마케터, 방문 판매원, 직업 상담사, 보석 감정사, 자재관리사무원 순으로 적합성 종합지수 평균값이 높았다.
프로게이머, 경호원, 스포츠 강사, 스턴트맨 등 전문적으로 기술을 다루거나 신체 활동이 많이 필요한 직업은 다소 낮은 직업 적합성을 보였다. 나영돈 한국고용정보원장은 “한국직업정보 재직자 조사는 직업 특성뿐만 아니라 직업의 입직 요건, 직무 내용, 업무수행능력·지식·가치관, 흥미·성격·환경, 관련 학과 정보, 임금, 직업전망 등 노동시장정보를 함께 제공하고 있으므로 정부, 학교 및 기업체는 물론 청소년들에게 유용한 직업정보로써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 하고 싶어 야단인 세상이다. 들어보면 제각기 대단한 구석도 있고, 웃음 나는 구절도 있으며, 눈물 훔치게 하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재미난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성화 관악FM DJ는 ‘듣는’ 아나운서다. 누구보다 말할 기회가 많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듣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고 듣는, 현역 최장수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잘 듣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지 않은가.
이성화 DJ는 1959년 부산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한 상업방송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다. 이후 서울 MBC, RSB 라디오 서울(동양방송의 전신), TBC 동양방송까지 다양한 방송국의 개국 아나운서로 자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대 DJ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맡기도 했다.
아나운서, 현대사 한복판에 서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아나운서로 한창 이름 날리던 때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이 많던 시기였다. 부산 MBC 아나운서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우연히 들어선 다방 창가에 앉아 있는 엄순영 씨를 발견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에 감탄한 이성화 아나운서는 엄 씨를 미스코리아 경남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를 설득해 심사 3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부산 미스코리아에 선발되면서 엄 씨는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자격까지 얻었다.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실시했던 미스코리아 본선 대회는 경복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대회 전날 엄 씨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그는 당시 김지태 서울 MBC 사장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사모님이 그를 깨우며 하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 쿠데타가 일어났대요’ 하시는데,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멍한 채로 대문을 열었더니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가지 뭐예요.” 그때가 1961년 5월 16일 아침이었다. 2년 차 사회 초년생이 5·16 군사정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아나운서 자리에 앉아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인부터 유명 가수, 배우 등 명사를 만날 일이 많았다. 만났던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던 여류방송인클럽이 한 군부대를 위문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안내받으며 사단 내부를 둘러보고 사단장을 비롯한 장성들과 기념 촬영을 했죠. 굉장히 대접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던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역사적 인물이 될 거라고는 말예요.” 그는 지금도 김재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권력이 다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한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와 배짱
인생무상,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전성기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는 업계 안팎으로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은 1세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이 좋다고 소문 난 덕분에 당시 생방송 스케줄이 잡힌 PD들에게는 섭외 1순위 아나운서였다. 게다가 당시 발간되던 잡지 ‘아리랑’에서 진행한 아나운서 인기 순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동양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처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택시 기사와 전화 연결을 할 때 제가 ‘기사님 밤늦게 운전하고 들어가도 부인께서 식사 정성껏 챙겨주시면 덕분에 기운 나시죠? 그러면 기사님도 부인께 친절을 베풀어야지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상대편에서 ‘그럼요. 다음 날 아침상에 달걀프라이가 올라온답니다’ 하고 대답하거든요. 듣는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그의 인기에는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듣기 좋은 음성이 한몫 단단히 했다. 연극 연출가 오사량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며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목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 목 관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천직이나 다름없다.
이성화 DJ의 방송 인생을 논할 때는 당찬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 방송 인생이 시작된 것, 예상 못한 순간에 순발력을 발하는 기지도 그의 당찬 성격에서 비롯됐다.
전국체육대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가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중계방송의 진행석에서 방송 준비를 하던 그는 마이크를 쥐고 대뜸 육 여사가 앉은 단상으로 올랐다. 단상 밑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이 막아섰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양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잠깐 인터뷰만 할게요’ 하고서 그 둘이 망설이는 틈을 타 단상에 올라섰어요. 올라가는 동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한 다음 육영수 여사한테 ‘안녕하십니까. 이따 방송 시작하거든 날씨가 어떤지만 여쭤볼게요. 오늘 날씨가 좋지요? 하고 물으면 ‘네’ 하는 대답이랑 선수들 잘 뛰라는 말씀만 해주세요’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계획에 없던 영부인의 인터뷰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쾌지나 청춘에서 제2의 청춘을 열다
이후 1980년 신군부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TBC 방송이 문을 닫았다. 이때 그의 활약상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밖에서 그만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에 대한 욕심, 재능, 외부의 인정을 모두 던져두고 30년을 주부로 살았던 그는 9년 전 뜻하지 않게 아쉬움을 풀 기회를 얻었다. TBC 방송국 막내 PD였던 동료의 소개를 받아 비영리 라디오 방송국 관악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 관악구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발음이 정확해 한국어 선생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방송을 맡은 그 역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제작진과 함께 고민한 끝에 폐지됐던 ‘쾌지나 청춘’ 방송을 되살리는 카드를 선택했고, 그는 현재 9년째 ‘쾌지나 청춘’의 월요일 DJ를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은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쾌지나 청춘’은 고정 코너 ‘생활의 지혜’, ‘생활 건강’과 요일마다 다른 여섯 가지 단독 코너로 이뤄진다. 이성화 DJ와 함께하는 월요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가 진행된다. 코너의 아이템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인물에 대한 사전 취재와 원고 작성은 모두 그의 몫이다. 녹음을 진행해보고 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회차를 늘려 추가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및 진행자만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없다. 관악FM 내의 오랜 파트너인 김우신 PD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베테랑 DJ로서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기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방송 제작에 힘써준 그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까지 기획진행 이성화, 기술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매 방송마다 빠짐없이 넣는 멘트만큼이나 그를 향한 애정이 빼곡하다.
한창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방송했던 베테랑 방송인에게, 30년이란 기나긴 공백기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청취자에게 신청곡을 주문받으면 막내 작가가 서고로 뛰어올라가 CD를 찾는 동안 즉흥에서 멘트를 지어내던 시절과는 사뭇 딴판이지만, 라디오 DJ 일은 그에게 여전히 즐겁기만 한 분야다. 그는 매 방송이 끝난 뒤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일일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젊을 때부터 습관처럼 하던 기록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방송과 게스트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성·드라마, 그가 전할 새로운 이야기
평생을 진행자로 살았지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꿈도 꾼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 말이다. 만약 PD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중장년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라떼’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만 살아오며 나이 들어버린 이들의 세월을 조명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모르게 겪은 고통과 고난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가부장 사회의 제도와 법률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각자의 가정에 자양분으로 쓰이고 만 거예요. 그래서 유능한 여자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많아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만날 때나 털어놓고 말죠.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만 해도 그랬다. 일에 욕심이 있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남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해 끝내 집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은행에 입사할 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바깥일을 하면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방송인이었던 그도 방송을 마치면 아내이자 엄마로서 일할 줄만 알았지 자기 계발에 시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로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30년의 시간이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쉬운 만큼 그는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에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는 80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도전할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엿한 스토리텔러로 활약하고픈 열정이 샘솟아 4년 전에는 전문 학원까지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쾌지나 청춘 기획하고 진행하랴, 집에 가면 블로그 글도 올리랴. 게다가 남편 밥도 챙겨줘야 해요. 쉴 새 없이 바쁜데도 드라마가 너무 쓰고 싶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대본을 썼어요. 드라마라는 게 제각기 다른 갈래의 사람들이 한데 얽혀 진행되는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멋진 예술의 한 줄기로 끼고 싶은 거죠.”
‘옛날 사람’인 그는 그가 실제로 보고 들은 ‘옛날이야기’를 50분짜리 대본 한 편에 풀어냈다. 요즘 사람들의 AI, 우주 공간 같은 요즘 이야기 말고 욕심쟁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명예를 탐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았다고 했다. 그 대본으로 당장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고, 촬영 현장에서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꾸준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처음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던 그 당찬 성격과 배짱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1세대 아나운서인 그는 아나운서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친화력이 있으려면 배려와 친절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처음 보는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며, 이를 이끌어내는 능력까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친화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관악FM에서만 4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400개의 이야기를 듣고 400개의 아름다움을 뽑아낼 줄 아는 그는 친화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야기가 익숙하거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좋고, 몰랐던 세월의 이야기라면 새로워 좋다. 들을 줄 아는 아나운서, 한결같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다.
영화 '인턴'을 기억하는가. 70대 노인이 은퇴 후 패션 회사에 시니어 인턴으로 재취업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는 비단 영화 속 이야기 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시니어 인턴십 제도가 있고, 이를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시니어 인턴십이란, 만 60세 이상인 자를 대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 창출이 이뤄지도록, 정부가 시니어 인턴 채용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하는 재정 지원 사업이다. 보건복지부 주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11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시니어 인턴십으로 구직자를 채용하는 기업은 1인 당 3개월 동안 월 약정 급여의 50%(월 최대 37만원까지)를 지원 받을 수 있다. 또한 인턴 종료 후 계속근로 계약 6개월 이상 체결한 경우 채용 지원금을 3개월 월 약정 급여의 50%(월 최대 37만원까지) 추가 지원 받을 수 있다. 최대 총 222만 원의 인건비를 지원 받게 된다.
그렇다면 시니어 인턴십은 어떻게 참여 가능할까. 만 60세 이상은 누구든지 신청 가능하다. 인턴십 신청을 한 후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및 수행 기관의 소양 교육을 이수하면 자격이 된다. 이후 구인처에서 서류와 면접으로 심사를 진행하며, 이를 통과하면 시니어 인턴으로 채용 된다.
시니어 인턴십은 정부 지원 사업이지만 수행 기관에게 사업을 위탁해 진행한다. 수행 기관은 중소기업과 시니어 인력을 연결하고 교육을 지원한다. 실질적으로 수행 기관이 시니어 인턴십의 운영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지난 15일 2022년 시니어 인턴십 수행 기관 명단을 공개했다. 서울 25개를 포함해 전국 248개로, 250여 개에 이른다. 2021년도 수행 기관 213개에서 확대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인 일자리 사업은 올해 82만 개에서 내년에 84만 5천 개로 확대된다. 이 가운데 취업형(시니어 인턴십, 취업 알선형) 노인 일자리 사업은 1만 4000개 증가 된 12만 7000개다. 이에 사업을 전담할 수행 기관도 확충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행 기관에는 영리·비영리 법인, 사회 경제적 조직, 직업 정보 제공 사업자, 무료 직업 소개소, 기업 협회, 경제 단체 등이 속한다. 선정 기준에 대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사회 계획의 적절성 50점, 수행 기관 역량 30점, 참여 기업 확보 여부 20점'이라고 밝혔다. 심의 결과 70점 미만은 수행 기관 선정 대상에서 제외됐다.
시니어 인턴십에 참여 가능한 기업은 만 60세 이상인 자를 고용할 의사가 있는 4대 보험 가입 사업장(비영리법인, 기업협회 등) 중 근로자 보호 규정을 준수하는 기업이다. 소비향락업체, 다단계판매업체, 임금체불사업장, 3개월 미만 계절 수요 업체, 기존 참여 기업 중 최근 2년 간 계속고용 실적이 없는 기업, 각 부처 및 지자체 예산 사업으로 설립 또는 운영비 등 지원 받는 기업 등은 참여가 불가하다.
또한 요양보호사 및 간병인, 경호원, 경찰, 군인, 소방관 및 교도관, 환경미화원, 가사 도우미, 대학교수 및 강사, 학교 교사, 우편물 집배원 등의 직종도 제외된다.
한국의 20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적이었다. 본격적인 개항, 일제 강점기와 광복, 전쟁과 분단, 그리고 독재정치와 민주화 운동까지 혼란하고도 찬란한 세월을 보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뤄진 비극적인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니어들은 이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참여자로 때로는 방관자로 때로는 관계자로 활동했다. 그렇기에 시니어들에게 근현대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고 생활에 가깝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의 경제 성장 과정부터 군사정권의 독재와 민주화 운동까지 시니어들과 함께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세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국제시장 (Ode to My Father, 2014)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해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 ‘덕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난 덕수는 소년기에 전쟁을 겪으며, 아버지와 여동생과 떨어지며 남은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온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덕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20대 청춘 시절에는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독일에 가서 석탄을 캤다. 독일로 파견나온 간호사와 고국에 돌아와 결혼도 하고 해양대에 합격하며 오랜 꿈을 이룬다. 그러나 막내 동생의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다시 베트남으로 떠난다. 덕수의 희생 덕분에 온 가족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영화는 끝이 난다.
201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천만 관객을 돌파하여 ‘국민 영화’ 대열에 올라섰다. 남북 분단으로 가족을 잃고, 가족과 나라를 위해 평생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산업화 세대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며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이산가족으로 갈라섰던 여동생과의 재회 장면은 수많은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며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남산의 부장들 (The Man Standing Next, 2019)
“너하고 나하고 그냥 머슴살이한 거야, 규평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40일 전, 미국에서는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이 청문회를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 정권의 실체를 고발하며 파란을 일으킨다. 그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규평과 경호실장 곽상천이 나서고, 대통령 주변에는 충성 세력과 반대 세력들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흔들린 충성과 그 날의 총성, 대통령이 암살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영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린 이 사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꼽힌다. 영화의 서사는 대통령 암살사건 발생 40일 전,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육군 본부에 몸담았던 세력들의 관계와 인물들의 심리를 면밀히 따라가며 담담하게 진행된다. 실제 인물들의 과열된 ‘충성 경쟁’과 이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관객들을 영화에 푹 빠져들게 만든다.
1987 (1987:When the Day Comes, 2017)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한다. 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 검사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또 경찰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이어간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문에 의한 사망을 증명하는 흔적들이 나타나자 윤 기자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라고 보도한다. 이렇게 영화는 어떤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조사하고 알리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부패된 공권력 사이에서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고 박종철의 비극적인 죽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정점이었던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중 하나가 됐다. 부패한 독재정권에 열렬히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도 강렬한 역사의식을 일깨운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 선글라스로 반쯤 가린 무표정한 얼굴, 근육질의 몸. 경호원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다. 게다가 이 세계는 한동안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다. 꽤나 케케묵은 이 통념을 깨트린 이가 있다. 2002년 국내 보안 업체에 ‘첫’ 여성 경호원으로 입사해 톰 크루즈, 빌 게이츠, 히딩크, 고르바초프, 박세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경호 업무를 수행해온 이용주(李庸朱·39) ADT캡스 경호팀장. 화려한 경력에 놀라고 단아한 외모에 또 한 번 놀라면서 28세의 나이에 팀 수장이 되어 맹활약해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에게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는다. 경호학과를 졸업한 1호 여성 경호원으로도 주목받았지만 국내 여성으로서 경호학 석·박사 학위도 최초로 취득했다. 입사 5년 만에 경호팀장 자리에 오른 사실도 입지전적인 이력이다. 남자도 쉽지 않은 분야에서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근성과 유연성을 자랑하는 파이터가 연상됐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환경에서 홀로 견뎌왔을 고독한 시간들도 느껴졌다.
“입사했을 때 여자 경호원이 저밖에 없었어요. 남자 경호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죠. 현장에 나가면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니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 심정이 이해는 됐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런 눈치까지 봐야 했으니 더 힘들었죠. 멘토도 없어서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는지도 몰라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매일 고민했죠.”
여성 경호원 생명은 짧다는 얘기도 자주 들려왔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택한 길의 결말도 함부로 상상하지 않았다. 당장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하며 몸과 마음의 탄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후배들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였기에, 선도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했다.
“결혼과 출산은 경력 단절로 이어져 여자들에게 큰 부담이었어요. 저도 지인들에게 ‘결혼하면 보직 변경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부서를 선택할 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경호 업무를 더 이상 못 하게 되는 건가 고민이 됐죠. 부서 내에서는 상의할 사람이 없어 인사팀에 상담을 요청했더니 왜 그런 고민을 하냐고 하더군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았을 때 또 자격지심이 밀려오더라고요. 출산 과정의 공백기를 과연 이해해줄까 염려스러웠어요. 선례가 없어 속앓이를 했던 것 같아요. 경호학과 나온 여성들이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법원 경비대 등 안정적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건 그 때문이에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회사의 배려를 많이 받았거든요. 후배들은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죠.”
서비스 마인드 없으면 고독한 직업
그녀는 일의 핵심을 재빨리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남성 중심의 체력과 무술 실력이 주로 요구되어왔던 경호 업무야말로 시대에 맞게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여성의 강점인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차별화를 꾀해 신뢰를 얻었다. 이를테면 의뢰인이 일정을 마치고 차량에 오르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최적의 컨디션을 위한 각종 음료도 구비해놓는다거나 식사가 늦어지면 시장기를 달래줄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식이다. 그녀가 경호를 ‘토털 서비스’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경호원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할 때 서비스 마인드를 강조해요. 의뢰인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경호를 하라는 거죠. 음료수 하나를 살 때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의뢰인에게 어떤 음료가 더 필요할지 헤아려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서비스 마인드입니다. 체력 좋고, 오랫동안 잘 서 있는 것이 경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준 고르바초프
태권도 4단, 유도 3단, 합기도 2단의 무술 실력을 갖춘 그녀는 슬럼프에 빠지기 전까지는 음대를 지망하며 플루트를 배우던 학생이었다. 플루티스트의 꿈을 접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TV에서 우연히 경호원을 꿈꾸는 학생 인터뷰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평소 운동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용인대학교 경호학과로 진로를 바꾼다. 망설임은 없었다. 악기 연주에 투자한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새로운 선택에 적응하는 데 부지런했다. 당시 TV에 나왔던 학생은 같은 학교 선배로 만나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경호원 꿈을 접었지만 제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조언도 해줍니다. 9년 연애하고 결혼했으니까 어느새 제 인생 절반을 함께했네요. 둘째 낳았을 때 육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는데 그때 남편이 ‘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좋겠다, 대신 내가 부모 역할 더 많이 하겠다’라고 말했어요. 남편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국내외 명사들의 수행 경호를 도맡아 해온 그녀는 2008년도에 방한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일주일을 꼬박 함께 다녔다. 당시 팔십에 가까운 고령이어서 지병 유무, 복용약 등을 체크하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갈 수 있도록 이동 경로에 따른 병원들도 미리 알아봤다.
“돌발 상황도 있었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사진을 찍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여자라 약해 보였는지 팔을 꺾으며 밀어붙이는 통에 진땀을 흘렸습니다. 하루는 계단에서 넘어지실 뻔해서 신속하게 부축을 했는데 남자 손길이 아니어서 불편하셨나봐요. 괜찮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나 차차 제 마음을 알아주셨어요. 마지막 날 호텔에서 나오면서 ‘한국에서 좋은 친구를 알게 돼서 너무 고맙고 좋다’는 내용의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헤어질 때는 할아버지처럼 저를 꼭 안아주셨지요.”
외빈 경호를 하게 되면 팀을 구성해 예행연습을 한다. 묵게 될 호텔에 가서 도면을 받아 내부 구조를 살피고 지방으로 이동할 때는 식당 등의 비상구까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2011년 필리핀 장관들이 우리나라의 환승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체험을 해야 했기에 바짝 긴장했다. 각 노선표는 물론 지하철 어느 칸을 타야 바로 계단을 이용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현장에 들어갈 때는 위험 상황에 대비해 시·분·초 단위로 사전 점검을 해요.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해도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죠. 대부분 개인적인 업무를 보거나 자녀들하고 올 때는 아이들 관련 일을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가 제일 난감하지만 의뢰인들과의 감정 갈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녀는 사회가 흉흉할수록 경호 문의가 많다고 했다. 특히 학교 폭력, 데이트 폭력 때문에 경호를 의뢰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아이 경호는 학교와 학부모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문의가 오면 저도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상담을 해드립니다.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경호를 맡기지 못하는 분에게는 자존심을 지켜드리려고 하지요. 아이를 경호하면 당장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친구들과의 관계, 아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인식에 문제가 생겨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드려요.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요. 협박 전화 때문에 친구들도 다 떠나고 부모도 힘들어 전화선을 뽑고 사는 의뢰인이 있었는데 상대를 멀리서 봐도 몸을 벌벌 떨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심했습니다. 신변 보호가 우선이지만 이럴 때는 의뢰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카운슬러 역할도 합니다.”
현재 여성 경호원 비율은 10%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 여성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선호하는 의뢰인이 많아져 더 큰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그녀 나이 올해 마흔. 경호원은 나이 제한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런 건 없어요. 경력이 쌓일수록 경호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해요. 몸과 마음, 두뇌가 동시에 가동돼야 하지요. 물론 현장에서 일할 때는 무전기와 3㎏에 달하는 삼단봉, 가스총, 전기충격기 등 기본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체력관리는 필수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운동도 하고 독서도 합니다.”
2011년도부터 시작한 호신술 재능기부에 이어 최근에는 심폐소생술 강의까지 하고 다니느라 더 바빠진 그녀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타이틀도 의미 있고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독려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더 얹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삶의 매순간이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음은 분명히 알 것 같다.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나 사진을 보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맑은 눈과 예쁜 미소를 지닐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만인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몇 편의 영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표작 에서는 멋진 파티 걸로, 싸구려 패스트푸드로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유명한 보석가게 티파니의 쇼윈도를 구경하는 가난한 아가씨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해 잊지 못하는 장면으로 남게 해주었으며, 비상계단의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문 리버’ 라는 노래를 정말 달콤하게 불러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서는 작은 나라 공주님으로 여러 나라를 순방하던 중 공식적인 행사에 지쳐 잠시 뛰쳐나와 일반인처럼 로마의 이곳저곳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역을 연기했다. 경호원을 따돌리려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장면은 너무나 귀여웠다. 그 당시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정말 상큼하고 예쁜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영화를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줬던 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 홍보대사를 하면서 죽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웠지만 나이 들어 그 모습을 잃어버리는 여배우들도 많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나이 들어서도 얼굴에 주름살만 생겼을 뿐 체형도 그대로인 채 미모가 여전했다. 게다가 좋은 일까지 많이 하니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도 있었다.
오드리 헵번이 봉사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하면서 독일의 침략을 받은 벨기에에서 살던 어린 그녀와 어머니를 버렸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와 네덜란드로 이주한 뒤 아주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끌고 가는 광경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배우로 성공한 후 그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치 추종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배우로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어머니가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영화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많은 여배우들이 욕심을 내는 역이었지만 몇 날을 고민한 끝에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 그 후 는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을 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안네 역할을 꼭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나치 협력 때문에 양심상 수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60년, 영국에서 홀로 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간 그녀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유니세프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말년에 대장암에 걸렸는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보기만 해도 행복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를 시작했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참 슬프고 가슴 아프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방송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보다 오드리 헵번의 사망 소식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외모만큼 마음도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 영화배우만이 아닌 진실한 사람으로 언제까지나 필자에게 기억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댓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 불현듯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고운 얼굴은 아니었어도 목소리는 청아했다. 필자가 자원입대한 공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에 복학했을 때 그녀는 3학년이었다. 나이는 필자가 네 살 위였다. 경상도 시골 태생이었던 필자는 서울 생활이 서툴기만 했다. 세련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의상학과를 다녀서인지 옷매무새가 세련되고 늘 깔끔했다. 나이 차이가 있어 친오빠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만나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곤 했다. 여동생이 없었던 필자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4학년이 되던 봄날, 제안을 해왔다. 여자 친구와 단양팔경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는데 여자끼리는 두려우니 필자가 함께 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통에 거절도 못하고 따라가 경호원 역할을 하기로 했다. 물론 기차여행이었다. 출발 시각에 맞춰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일이 급하게 생겨 못 가게 되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부터 필자와 함께하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기차를 타고 단양으로 향했다. 살가운 누이동생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도담삼봉과 상선암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찾아야 했다. 참으로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냥 즐거운 모습이었다. 따로 방을 잡으려니 혼자 무섭다며 반대해 한방에 들었다. 남녀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이미 각오했지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하룻밤을 한방에서 보냈다. 친누이 동생을 보호하듯 팔베개까지 해서 말이다. 대단한 인내심의 발휘였을까? 아니면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나머지 여행까지 마치고 우리는 귀경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일이 오히려 그녀에게 큰 신뢰를 준 것 같았다. 필자에게 더 마음을 쏟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짝사랑에 필자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후회가 남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필자는 기대했던 행정고시에서 낙방한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지리산 자락 고향 마을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그 시기에 그녀는 계절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 필자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리라 기대했을 그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필자가 직장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종로에 있는 커피숍에서 재회했다. 물론 필자는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필자와의 만남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걸 자기 운명으로 돌렸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약사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았단다. 그 뒤 친정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다 옛 생각이 나서 얼굴 한번 보려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 뒤 필자는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어느 늦가을 그녀는 지리산 칠불사 암자로 온 이야기와 함께 골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엽서를 쓴다고 적었다. 엽서 맨 아래에는 ‘다른 곳으로 떠나며… 칠불사에서’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연락이 되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만나 그녀가 좋아하던 짙은 커피 향을 맡으며 추억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싶다.
또한 파리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 얽힌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을 정도다. 그중 기억나는 일화는 1963년 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대형 여객선으로 미국 나들이에 나설 때 전 유럽이 떠들썩했던 일이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사고라고 발생할까봐 온통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이는 유럽인들이 를 얼마나 소중히 아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아무리 열심히 봐도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눈썹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필자의 직업적 본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다빈치와 가깝게 교분을 나누던, 순결·사랑·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을 그린 화가 라파엘로(Sanzio Raffaelo, 1483~1520)의 작품 막달레나(Maddalena Doni) 초상화와 비교해보기로 했다.
살펴보니 라파엘로 역시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 눈썹을 아주 흐리게 처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당시 상류층 여인들 사이에서 ‘눈썹 제거하기’가 상당히 성행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유추(類推)를 가능하게 했다.
그 후에도 여인을 그린 초상화에서 ‘눈썹 없는 여인’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초상화를 남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초상화들을 보면, 경우에 따라 눈썹이 짙게 그려지기도 하고, 옅게 그려지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면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작품 를 감상해보니 초상화의 중심이 되는 소녀의 아름다운 눈초리에 매료되면서도 소녀가 머리에 쓴 ‘터번(Turban)’형 머리덮개가 화려하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원작을 다시 보았을 때 ‘속눈썹’ 역시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소녀가 ‘전신성 무모증(全身性無毛症, Alopecia totalis)’에 시달렸을 거라는 임상적 진단을 내렸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 유명한 ‘북유럽의 모나리자’를 본다는 기쁨은 잠깐, 소녀가 겪어야만 했던 가슴앓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애잔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