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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칫덩어리 곤충 농장, 귀촌 4년 만에 탈피하고 날개 돋다
- 곤충농장을 운영하며 살아온 지 올해로 7년째. 이지현(54, 꿈트리곤충농장 대표)은 하루하루가 즐겁다. 아침이면 콧노래를 부르며 농장으로 나간다. 원하던 삶을, 원하던 곳에서, 원하던 방법으로 누린다. 행복이 별건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불만과 불편을 털어내고 자족하며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이지현이 그 본이다. 음대를 나온 그녀는 도시에서 오랫동안 피아노학원을 운영했다. 전공 따라 길을 걸었던 셈이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게 곤충농장을 꾸리면서 변했단다. 농장은 이지현에게 만족의 샘이다. 그녀의 눈빛과 태도에선 농장에서 길어 올린 기쁜 샘물이 찰랑거린다. 귀농 초기엔 시련이 유일한 길동무였다. 막다른 길로 몰리다시피 했다. 지금이야 곤충농장이 고맙기 짝이 없지만, 고초를 겪던 당시엔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아아, 내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아마도 후회와 자책으로 괴로웠으리라. 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 “당시 식용 곤충 산업이 농가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해 많은 이들이 뛰어들었다. 매스컴의 요란한 보도에 이끌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잠깐 반짝하고 그만이었다. 사육 농가가 별안간 늘어나면서 판로 확보가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굼벵이 가공식품을 생산하고도 판매하기가 실로 어려웠다.” 미리 판로 문제에 관한 공부나 모색을 하진 않았나? “자신감 하나 가지고 일을 벌였다. 생산만 잘하면 판매는 저절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참 안일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다양한 작목 가운데 곤충 사육을 선택한 이유는? “농사에 뜻을 세우고 한동안 고민했다. 세 가지 조건을 선택지로 삼았다. 첫째, 혼자 해낼 수 있는 작물일 것. 둘째, 미래 지향적인 농업일 것. 셋째, 리스크가 적은 일을 찾을 것. 이 셋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게 곤충농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을 착수했다.” 농사를 가볍게 보고 덜컥 귀농하는 이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다. 그게 실패를 예약하는 행위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로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웃음) ‘나도 농사나 지어볼까?’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곤충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농사처럼 어려운 게 없더라.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굼벵이를 잘 키워놓기만 하면 러시아로 고가에 수출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찾아온 이에게 금전적 손실을 봤으니까.(웃음) 이래저래 난항이 많았다. 그러나 극복했다. 방향 전환으로 위기를 넘어섰다.” 치유농장, 누구나 생기 회복하는 공간 뜻밖의 벽에 부닥친 이지현은 숙고 끝에 농장의 주제를 갱신했다. 단순한 상품 생산 체제에서 진일보한 곤충 체험농장을 띄워 활로를 찾기로 했다. 이쯤에서 그녀는 비로소 농업에 필요한 식견과 실력을 쌓기 위해 농업교육장을 드나들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뒤늦게 기초 쌓기에 나선 것. 앞서가는 곤충 체험농가들을 찾아 기법을 배우는 건 물론, 요건을 갖춰 영농후계자 자격을 얻었고, 갖가지 기술 자격증을 따 향후의 약진을 도모했다. 공예와 원예에 관한 교육까지 받은 건 그 역시 체험농장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체험농장으로 전환하고 난 뒤엔 참으로 부지런히 뛰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졌으니까. 기존 가공식품 생산은 그대로 지속했다. 거기에 체험 프로그램을 접목했으니 일의 양이 한결 늘어날 수밖에. 우선 체험 공간을 구비하는 게 필요했다.” 농장 구조를 보면 매우 기능적이다. 유기적인 동선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효율적인 구성을 한 농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키위를 재배했던 비닐하우스에 갖가지 유실수와 화초를 넣어 원예 체험을 할 수 있는 치유온실로 변경했다. 치유텃밭과 치유정원도 조성했다. 곤충 관찰을 비롯해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실내 체험장도 만들었다.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구성해 틀을 갖추었다. 이 모든 요소는 계속 보강됐으며, 그건 현재진행형이다.” 관건은 체험자들을 어디서 어떻게 하나라도 더 불러들이느냐에 있었겠지? 사람이 좀체 오지 않아 문을 닫는 체험농장도 있다. “비교적 수월하게 체험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농업교육을 받은 기관들의 조력을 받은 덕분이었다. 부지런히 교육장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교류한 이들이 농장의 홍보사절 역할을 해준 효과가 컸다. 현재 아동, 초중등 학생, 청장년층, 경증 치매 노인, 독거 노인 등 다양한 신분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체험객으로 참여하고 있다.” 곤충 체험농장으로 전환하고 4년여가 지났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나? “그간 점진적인 성장을 해 이젠 안심할 수 있는 궤도에 올라섰다. 가장 만족스러운 건 적성과 취향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이 즐겁다. 활동량은 많지만 피로감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다.” 아동들이 왔다고 치자.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활동을 하나?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체험을 한다. 이를테면 누에, 누에나방, 장수풍뎅이 등 곤충들을 관찰하고 돌보게 함으로써 곤충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키울 기회를 제공한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보기도 하고, 누에똥을 활용한 비누 만들기도 한다. 치유온실에 들어가 식물들의 생태 이벤트를 접하고, 온실에서 채취한 허브로 각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시간도 갖는다. 텃밭과 치유정원에서도 아동들은 평소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한다. 나무나 풀과 함께 소꿉놀이를 한다. 아이들은 이 모든 체험활동을 이색적인 놀이로 받아들이며 환호한다. 웃음꽃을 터뜨린다. 순식간에 몰입해 즐기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낀다.” 체험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낀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선한 영향력이라 할까, 난 농장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런 걸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뜻을 이루고 있다는 실감을 자주 하는 거다.” 바람에 날아다니는 비닐봉지 하나를 움켜쥐고도 신나게 노는 게 아동이다. 순진하고 즉흥적인 충동에 취해서. 마치 행위예술가처럼. 그토록 민감한 영혼을 품은 아이들을 어른들은 일상의 틀 속에 가둔다. 그녀는 그게 마땅치 않다. 딱딱한 일상의 틀을 흔들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감성 발육을 돕는 게 곤충 체험농장이라는 것.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정성 있는 공간이라는 것. 이지현은 그런 취지의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더 많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용케 나도 하고 있다는 자긍심도 비친다. “체험농장을 통한 치유 효과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처음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발달장애인이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고 드디어 입을 연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치매 노인도, 고독한 독거 노인도 이곳에 와선 표정부터 부드럽게 변한다. 동네 어르신들도 마찬가지다. 생기를 회복한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자연을 품은 농업의 힘이 이렇게 크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아울러 귀농을, 아니면 귀촌을 적극 권유하고 싶다.” 농장으로 거두는 소득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치유농장으로 바꾼 후 수입이 해마다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남편이 벌어들이는 월급보다 많은 수익을 얻고 있다.” 시골을 오해하지 마라 이지현의 남편은 대기업 근무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골 생활을 통해 인생을 좀 더 좋은 쪽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시골에 내려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낙향을 했다. 연로한 부모님을 돕고, 부부애를 돋우며, 한결 쓸모 있는 활동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유한한 시간을 낭비 없이 살고자 했다. 물론 이지현도 남편의 뜻에 공감했다. 부부는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시골로 내려가는 게 현명한 판단이라고 봤다. 남편은 이곳에서 자신이 원했던 일을 찾아내 전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만의 직업을 가진 거다. 각자의 취향과 지향에 부합하는 일을 갖고 신뢰에 찬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남편은 틈틈이 아내의 농장 일을 거들어준다. 그러나 거의 전적으로 이지현이 농장을 주도한다. 이건 매우 공정하고 진취적인 귀농 스타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런데 주변 귀농인들은 다들 무탈할까? 이지현의 얘기는 이렇다. “흔히 나만은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귀농한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문제는 세 가지 요인에서 발생한다. 무리한 초기 투자, 미진한 사전 준비, 경영 마인드 부재….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도시로 돌아가는 농가도 봤지만 그리 많진 않다. 다들 일단 어떻게든 버틴다.” 남편은 귀농을 원하지만 아내의 반대에 봉착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나? “시골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문화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선입견 말이다. 사실은 도시 못지않게 풍성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게 요즘의 시골이다. 자연과 동행하는 게 농업이라는 걸 감안해도 귀농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다양한 보조금 지원 정책, 자연재해에 관한 보험제도 완비 등 예전보다 귀농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 육체노동에 대한 거부감, 권태, 텃세 등도 관점의 폭을 넓히면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다.” 요즘 고민이 있다면? “프로그램 발굴 문제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강화하기 위해 여전히 고심한다.” 귀농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른가? “도시에선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 촌에 내려와 농사를 하는 것인데, 어느덧 삶의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치유농장을 통해 나 자신을 치유한 결과다. 한때 경제상의 대형 사고가 발생해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태평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지현에겐 ‘암말도’라는 별명이 있었다. 도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 붙은 별명이다. 이마저 과거의 일이 됐다. 어느덧 할 말 딱 부러지게 하는 유형으로 진화했다. 게다가 속사포처럼 말이 빠르다. 요컨대 그녀는 무척 다른 사람이 됐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뀌었다. 이지현이 알려주는 귀농 Tip •반드시 사전에 귀농교육부터 충분히 받고 귀농하자. •귀농인들의 실태 파악을 위한 현지답사도 필수조건이다. 발품을 많이 팔수록 얻는 게 많다. 남의 농장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며 농사를 배우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가급적 지역 특산 작물을 선택해 농사를 시작하자. 기술 숙달과 유통 측면의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플랜을 수립하고 귀농하자. 목표를 뚜렷하게 설정하라는 얘기다. •과학적인 농사를 하라. 진부한 관행 농업으로는 정착하기 어렵다. •지역의 봉사단체에 가입해 공익적인 활동을 하라. 보람도 크지만 어디에나 있는 텃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을 경우 미리 치료하고 귀농하자. 쪼그려 앉아 일하는 시간이 많은 게 농사다.
- 2024-07-1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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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 확률 낮은 게 귀농”, 중년이 지켜야 할 전제는…
- 올해로 환갑에 이른 귀농인 진용기(은현농장 대표)에겐 좌우명이 하나 있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워도 뛰어드는 데 있다’는 것이란다. 자신의 이름을 위트 있게 풀어낸 기치를 삶의 돛대에 매단 셈이다. 그가 충주시 신니면으로 귀농한 건 5년 전이다. 남다른 용기를 쏟아부어 거둔 성과일까? 진용기는 험악한 암초 한 번 만난 일 없이 순항을 거듭했다. 전공으로 삼은 수박 농사로 귀농 첫해부터 7000여만 원에 달하는 순소득을 올렸다는 게 아닌가. 바야흐로 그는 귀농인의 본으로 떠오르고 있다. 귀농 이전에 진용기는 전국 각지의 농촌을 돌아다녔다. 귀농 또는 농업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농부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이랬다. 농사란 믿을 수 없는 직업이라는 것. 마지못해 매달려 하는 행위라는 것. 그건 귀농에 뜻을 둔 사람의 기를 꺾어놓을 수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진용기의 관점은 달랐다. 농업을 첨단 산업으로 바라봤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읽었다. 이렇게 그는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농사에 입문했다. 신선한 시각으로 농업을 읽은 다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식의 신중한 태도로 사전 준비부터 철저히 했다. 그러곤 농사에 투신, 첫해부터 기세를 돋우었다. “서울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귀농을? 진짜 네가 농사를 짓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렇게 힐난했던 지인들 사이에서 그는 이제 ‘농사로 성공에 이른 대단한 친구’로 회자되고 있다. 진용기는 대기업 임원 출신이다. 회사원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중에 모두 내려놓고 방향을 급선회해 농부로 변신했다. 무슨 이유로? 직장 생활의 만족도가 낮아서였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속박 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을 찾아 삶을 바꾸고 싶었다. 요식업을 할까, 해외여행을 할까, 갖가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오래전부터 관심 가졌던 귀농을 하자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귀농귀촌박람회에 구경 간 게 귀농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박람회에서 지자체들이 귀농 홍보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농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해 귀농 선진지 견학을 할 수 있었다. 유익한 탐방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귀농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귀농을 통해 삶을 좋은 쪽으로 이동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품었던 거다. 그래 우선은 농업 현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공부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2~3년간 틈틈이 특산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촌 곳곳을 견학했다.” 견학을 통해 어떤 느낌을 받았나? “농부들은 흔히 농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 농사에 뛰어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직업이라는 얘기였다. 서울에서 그냥 직장 생활을 하는 게 낫다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선진 농업을 한다는 귀농인들의 형편도 겉으로 보기와 달리 여의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열심히 일하지만 그 대가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녹록지 않은 농업 현장을 목도하고 귀농의 뜻을 접을 생각을 하진 않았나? “오히려 귀농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농업의 문외한에서 벗어나 귀농에 관한 어느 정도 이해와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철한 사업 마인드를 가지고 농사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를테면 적당히 전원생활도 즐기며 적당히 농사짓자는 식의 적당주의는 아예 배제하는 게 옳다는 걸 확인한 기회였다. 귀농을 하나의 창업으로 간주하고 심도 있는 준비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지게 됐다.” 귀농인마다 나름 단단한 각오와 준비를 하고 농사에 뛰어든다. “누군가 도시에서 치킨집을 차린다고 치자. 그는 치밀하게 상권을 분석해 위치 선정을 하는 등 주도면밀한 사전 작업부터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귀농인들의 준비 수준은 대체로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스크를 끌어안고 귀농하는 셈인데, 난 그런 폐단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6개월 일하고, 6개월 쉬자는 목표 사실 농사를 은근히 만만하게 보고 귀농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시골에 들어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이끌린 듯 곧장 과감하게 농사를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괴이한 방식은 필패의 첩경이라는 게 진용기의 지론이다. 성공한 귀농인 대열에 올라선 그가 보기에 실패 확률이 매우 낮은 게 귀농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 냉정한 사업 마인드를 장착하고, 물샐 틈 없는 사전 준비를 하는 게 필수 조건이라는 것. 그는 귀농 준비에 무려 7년여의 기간을 투여했다. 기이할 지경으로 오래 뜸을 들였다. “최소 2~3년에 걸친 충실한 준비와 연구를 할 경우 성과가 주어지는 게 귀농이다. 난 다각도로 준비 작업을 했다. 잦은 귀농 투어로 농사 물정을 익힘과 동시에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갖가지 공부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비로소 귀농 창업을 결심했다. 아울러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이 담긴 밑그림이었나? “우선 가족은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가기로 했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희생을 강요할 순 없는 일이었다. 아내에겐 좋은 직장이 있기도 했다. 철수해야 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서울에 있는 자산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원칙도 정했다. 따라서 농토나 집은 임대해 사용하기로 했다. 귀농 첫해부터 수익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기본 지표로 삼기도 했다. 중요하게 여긴 게 더 있다. 노동에 매몰되는 귀농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생각해,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6개월은 일하고, 6개월은 쉴 수 있는 농장 조성을 목표로 삼았던 거다. 이러한 청사진을 만든 뒤 다시 현장 투어에 나섰다.” 햐! 또다시 견학을? 이번엔 무엇을 얻었나? “작목 선정을 위한 견학이었다. 숙고 끝에 수박 농사가 유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비교적 수월한 재배 기술, 상당히 안정적인 수익성, 낮은 진입장벽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잘 하기만 하면 1년 중 6개월만 일해도 지속 가능한 작목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수박 주산지인 충주시 신니면을 재배지로 정했다. 이쯤에서 남은 문제는 수박 재배 기술을 어떻게 익히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기술을 숙달했나? “신니면 수박 농가를 통해 6개월 동안 빡세게 기술을 배웠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면서. 일당 같은 건 받지 않았다. 밥만 얻어먹는 조건으로 일을 도우며 수박 농사의 메커니즘을 두루 익혔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가 완료됐으며, 비로소 농지와 집을 빌려 2019년에 귀농했다.” 귀농 이후 진용기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자비로운 힘의 보호와 감독을 받은 양 순탄하게 탕탕 질주했다. 사실 그 힘이라는 건 오직 진용기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서 발원했을 뿐이다. 그의 비결인즉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 데 있었다. 어떤 리더십 연구자는 이런 말을 했다. ‘준비에 실패하는 건 실패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지닌 재능 중 위대한 건 준비 능력? 딱히 그런 건 아니겠지만 진용기가 노련하게 연출한 귀농 드라마에 박힌 키워드는 ‘준비의 파워’ 바로 그것이다. 40대 때 귀농이 바람직해 그는 3500평의 농지를 빌려 지은 비닐하우스 20개 동에 수박을 재배한다. 시설과 임대에 들어간 투자비 총액은 1억 5000여만 원. 지난 5년간의 연평균 순수익은 7000여만 원.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는 게 무척 많은 실적이다. 회사 생활을 할 때 그가 받은 연봉은 1억 원 수준이었단다. 수박으로 거둔 연 소득은 거기에 미치진 못한다. 그러나 지출 항목이 즐비한 도시에서보다 한결 여유로운 경제효과를 누리고 있다지. 게다가 그는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다. 농장 저편 마을에 얻어둔 셋집 대신 거의 모든 나날을 농장에 설치한 농막에서 숙식하는 그가 지닌 전자제품은 대부분 주변 지인들을 통해 구한 중고품이다. 집을 놔두고 굳이 불편한 농막에서 거주하는 건 왜일까? “수박과 함께 24시간을 동행하다시피 해야 건강한 생육을 거들 수 있다. 가령 밤중에 돌풍이 몰아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하우스로 달려가 단속한다. 농막의 활용도는 굉장히 크다.” 충실한 사전 준비를 한 귀농인도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수박 농가들도 예외는 아닐 것 같은데? “농가 대다수가 안정적인 운영을 한다. 아이고, 좀 더 빨리 귀농할걸! 그렇게 아쉬워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두어 농가는 실패해 철수하기도 했다. 성패를 가르는 건 수박의 품질이다. 제대로 잘 기를 경우 수집상들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밭떼기로 통째 가져간다. 유통 문제로 신경 쓸 게 없다는 얘기다. 재배 시기엔 푼돈이 연달아 나가지만 수확기엔 일거에 목돈을 거둘 수 있다는 게 수박 농사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직은 진입장벽도 낮다. 향후 시장성도 밝다. 그래서 내가 귀농인들에게 수박 농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예전엔 드물었던 청년 귀농이 요즘엔 흔해졌다. 귀농 시점은 언제가 적합하다고 보나? “농사에 뜻을 두었다면 가급적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귀농하는 게 좋다. 농사는 기본적으로 체력 싸움이다. 따라서 60대 이후의 귀농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귀농 정책자금도 주로 청년층에게 지원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이래저래 인생의 단맛 쓴맛을 아는 40대쯤에 귀농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본다.” 귀농할 뜻은 있지만 실패가 두려워 망설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초기에 이미 궤도에 오른 당신의 사례는 상당히 독특하다. “실패의 불씨는 준비 부족에 있다.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한다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40대에 준비를 잘하고 귀농할 경우, 초기엔 좀 고생을 하겠지만 신속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농업도 즐거운 직업일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도시에서보다 스트레스 덜 받고 돈을 벌 수 있는 게 농촌이라는 걸 널리 알리고 싶다.” 애초 진용기의 목표는 6개월간 일하고 6개월간 노는 데에 있었다. 이건 아직 미완이다. 하지만 머잖아 완성될 조짐이 완연하다. 이미 8개월은 일로, 4개월은 휴식으로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니까. 이쯤의 귀농이면 발군(拔群)이다. 진용기가 주는 귀농 Tip •철저한 사전 준비와 치열한 사업 마인드. 이 두 가지에 귀농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걸 유념하자. •일단 귀농 현장 경험부터 충분히 쌓아라. 그러면 안목이 생긴다. 과연 내가 농업의 현실에 어울리는 능력과 소양을 지녔는지 객관적인 눈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땅이나 집은 서둘러 사지 말고 우선 임대해 귀농하자. 나중에 철수할 경우 팔리지 않아 곤욕을 치를 수 있다. •귀농을 반대하는 가족을 억지로 설득해 동반 귀농하지 마라. 심각한 갈등이 빚어져 정착에 실패할 수 있다. 단독 귀농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남편만의 ‘나 홀로’ 귀농, 이게 요즘의 귀농 트렌드다. •대부분의 텃세는 귀농인의 오만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자세를 낮추라. 그러면 융화되기 쉽다. 약간 어수룩한 처신을 하면서 합리적인 거리를 두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초기엔 농사 수입이 전무할 수 있다. 최소한 1년 정도는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비축하고 내려가자.
- 2024-06-2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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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건강 찾아 ‘귀촌’… 아토피도 텃세도 이겨낸 ‘긍정 엄마’
- 전주에서 진안으로 이어지는 소태정 고개 국도변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외벽에 진분홍색을 입혀 로맨틱한 멋을 풍기는 가게다. 과하지 않게 잔잔한 인테리어로 개성을 돋운 내부는 봄 햇살 내려앉은 듯 상쾌하다. 통유리창 너머에선 연둣빛 숲이 서성거린다. 이 카페는 귀촌인 임진이(48, 카페 ‘비꽃’ 대표)가 폐허처럼 방치됐던 건물을 임대받아 재생했다. 셀프 리모델링으로 되살렸다. 미술을 전공한 그에겐 결혼 전 미술학원을 운영한 이력이 있다. 카페 한쪽 벽면에 흑백 모노톤으로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의 작품이다. 카페를 차린 건 4년 전이었다. 전주시에서 살았던 임진이는 2014년 이곳 산 많은 고원지구 진안군으로 귀촌했다. 그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초등학생이던 딸 둘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시골 생활에 입문했다. 아토피는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통과 불편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난치성 질환이다. 그러니 엄마로서 심정이 오죽했으랴. 해볼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러다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르는 게 유력한 대안이라고 여겨 시골에 들어왔다.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내세워 귀촌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이는 밀어붙여 뜻을 이루었다. 남편은 전주에 머물러 하던 사업을 차질 없이 계속하고, 나머지 가족은 귀촌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은 것. 이렇게 주말부부가 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설고 고즈넉한 시골로 삶을 이동한다는 게,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시골살이에 쏟아붓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만큼 딸들의 아토피 치유에 대한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서인가, 지성이면 감천인가, 마침내 아이들이 피부 건강을 회복했다. “시골의 좋은 자연환경과 깨끗한 먹거리가 가져다준 성과였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이들은 바람직하게 성장했다. 매우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자랐으니까.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의젓하게 성숙한 셈이다. 과외를 받지 않고도 학교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했으나 그마저 기우에 불과했다. 딸들이 자랑스럽다.”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계기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우리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잘 정착했다. 초기 한때 힘에 부쳐 돌아갈 궁리도 했지만 아이들을 고려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오히려 나 자신이 한결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귀농·귀촌인 대상으로 멘토 역할도 한다지? “그렇다. 서서히 일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성과가 주어졌고, 자연스럽게 시골살이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어려운 게 많았다. 전주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할 정도였다. ‘그것 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난 시골에 가지 않는 거야!’ 그랬던 친구들의 말이 언제부턴가 바뀌었다. ‘어! 나도 촌에서 살아볼까?’로.”(웃음)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 “귀촌 직후 집을 지으려다 실패한 경험을 꼽아야겠다. 주민과 진입로를 놓고 분쟁이 빚어져 결국 건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곤 주택을 임대해 사는 것으로 귀촌 생활을 시작했다. 집의 상태가 허술해 여름엔 몹시 더웠고,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렇게 초기 4년을 이모저모 불편하게 살다 마을과 좀 떨어진 산 아래에 비로소 집을 지어 이사했다.” 진입로를 둘러싼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의 마찰은 하나의 풍속처럼 흔해졌다. 역귀농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해법은 무엇이라 보나? “희한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두 번째 집 역시 진입로 문제가 있어 아직까지 고충을 겪고 있다. 사전에 법적인 문제를 충분히 점검했지만, 저 멀찍이 있는 진입로 일부의 소유권을 가진 주민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진입로가 폭우에 망가져도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귀농·귀촌을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시골의 토지를 살 때 법적인 문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마을에 믿을 만한 지인 하나쯤 미리 만들어 해당 토지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불운을 예방하라는 걸.” 원주민의 텃세가 두려워 귀농·귀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일까? “텃세로 곤욕을 치른 사례가 있을망정 그걸로 마을 인심 전체를 측정할 일은 아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불상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난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을 실감하며 살았다. 서로 돕고 나누는 관계를 추구할 때 정착이 수월해진다.” 임진이는 아침 일찍 카페로 출근해 문을 연다. 카페 앞 국도를 통해 전주로 출근하는 직장인 중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 같은 아침 간편식이나 차를 주문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서다. 운영은 순조로울까?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들이닥쳐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주변 일대에 카페들이 급속히 늘어 경쟁도 심화됐다. 진안에서 생산되는 청정 농산물로 만든 음료와 간편식을 팔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다. 식재료의 원가 대비 마진도 기대치 이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나?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다시 뛰고 있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 공간의 구색을 바꾸었다. 진안 홍삼이나 벨기에 와플이 들어가는 브런치 메뉴도 개발했다. 국도를 오가는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메뉴도 만들었다. 으쌰으쌰, 이제 새로 출발한다!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거다.(웃음) 좋은 반향이 있을 거라 예상한다.” 뜻밖에 얻은 벽화 그리기 직업 삶이 원래 그렇듯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질주를 했으나 돌아보면 우습게도 원래 자리 그대로다. 그렇다고 무슨 악마의 계략이 거기에 개입됐을 리 있으랴.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시련도 강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다. 임진이는 부진했던 카페의 상황을 그렇게 긍정의 눈으로 읽어낸다. 사실 귀촌의 날들 속에서 그에게 닥쳐온 고통과 불편의 가짓수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단다. 그러나 그걸 위기가 아닌 충전의 기회로 간주해 허들을 넘어서길 거듭한 것 같다. 고생이 오히려 정신을 단련시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해준다는 걸 깨달으며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래 결과적으로 그의 귀촌 생활은 순항을 위주로 펼쳐졌다. 바야흐로 이젠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럴 수 있게끔 부지런히 뛰었다. “카페 일만 본업은 아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일감을 갖는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가장 보람차고 즐거운 일은 마을 벽화 그리기다. 이건 재능기부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커졌다.” 마을 벽화를 그려 수익을 얻는가? “그렇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그려준 마을 벽화가 맘에 든다며 행정 쪽에서 아예 사업을 위탁해주더라. 그래 주민들과 협업해 본격적으로 벽화 작업에 나섰다. 지금까지 진안군 관내 20여 개 마을에 100여 점의 벽화를 그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휘해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신선한 얘기다. “내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누가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할 경우엔 뜯어말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 시골에 살면서 미술 관련 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발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직업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주어졌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돈보다 값진 보람이 크다. 마을 벽화 역시 일종의 창작 행위이기 때문에 작품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벽화를 완성한 뒤 밝고 깨끗하게 변한 마을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지역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시골에서 잘 살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가 있다.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대접받기보다 먼저 대접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가령 고령층이 다수인 시골에선 꼭 필요한 민원조차 넣지 않는 걸 알고 내가 나섰다. 가로등이나 과속방지턱 설치에 관한 민원 신청을 해 해결하는 식으로.”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임진이에겐 동네 주민들이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다. ‘민다리’라 불리는데 ‘민원의 다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심 갖고 찾아보면 나에겐 물론 남에게도 좋은 일은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진안군 정책자문위원을 맡아 주민 편익에 관련한 의견 제시도 한다. 이렇게 생활상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러자 도시에 살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열리지 않던 안목이 열리더란다. 아울러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능동적으로 변했고. “내가 참여하는 공공활동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소소한 일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익에 관심 갖고 움직이다 보면 얻는 게 많다. 우선 인적 자산이 형성된다. 나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선한 사람이 아니건만 남들이 선한 사람이라고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땐 정말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곤 한다. 이런 감정은 도시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시골도 자본주의의 흐름을 타고 돌아간다.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귀촌 이후 남편의 사업 부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부를 누린 적도 있지만 졸지에 정반대 상황과 직면한 셈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 아닌가? 낙심하진 않았다. 다만 귀촌 10년 중 절반 이상은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시골이라는 한정된 조건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경제적인 면의 성공? 글쎄, 돈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선한 삶에 더 큰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귀촌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진정성 있는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산다는 건 복잡한 퍼즐 맞추기와 닮았지만 희로애락을 거쳐 마침내 완성으로 가는 드라마인가? 솔깃한 이야기에 즐거웠다. 임진이가 주는 귀촌·귀농 Tip •땅을 사거나 집을 짓는 일을 서두르지 말자. 적어도 2년 정도 집을 임대해 살면서 마을의 물정을 익히고 풍토를 파악, 과연 나의 성향과 어울리는 동네인지 판단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을 구입할 때는 진입로에 따른 원주민과의 분쟁 소지가 없는지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하자. •시골에 가면 관의 많은 지원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산이다. 자립 의지를 가지고 뛰어들어야 한다. •시골의 제도권 교육 환경은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측면이 있다. 승마, 골프, 사격까지 거의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차질이 생길까봐 우려해 시골 생활을 꺼려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한결 듬직하게 성숙한다. •재력에 의지한 과시적 처신은 금물이다. 원주민과 갈등을 빚고 외로운 처지에 몰리기 십상이니까.
- 2024-05-1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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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전민이 살던 고가로 귀촌해, 화전민처럼 살았더니…
- 그의 산중 살림이 어언 30여 년째. 이력이 길어 쌓인 내공도 겹겹일 터다. 따라서 번듯한 집과 농장을 갖추었을 성싶지만 웬걸, 거처의 모습에 애써 다듬거나 꾸민 흔적이 거의 없다. 원래 화전민이 살았다는 집부터 옛 모습 그대로다. 1000평 규모의 농장 역시 야생 초원에 가깝다. 그렇다면 천하태평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집? 또는 못 말릴 자연주의자의 거처? 후자가 정답이다. 즉 안희상(76, 다락골 구름밭 농장)과 아내 정선희(71)는 외진 산골에서 자연과 동행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하는 데에서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고수해왔다. 농사도 유기농보다 한층 진보적인 자연농법을 구사한다. 자연의 생태 그대로를 존중하는 천연농법으로 자급자족을 도모하고, 나아가 삶과 생각의 대부분을 자연으로 채워 만족스러운 나날을 누린다. 서울에서 살았던 안희상은 대형 건설사 직원이었다. 그는 수시로 해외 근무를 했는데 45세 때의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게 산골로 이주한 계기였다. 폐 하나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산이라는 요양소에 입소했다. 무너진 건강을 산에서 회복하기 위해 귀농을 했던 것. 그리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암을 물리쳐 안정적인 건강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았고, 지난 30여 년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만약 산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안희상의 답은 이렇다. “도시 생활을 지속했다면 일찍 세상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시의 복잡한 일상과 식습관에서 벗어나는 게 살 길이라고 봤는데, 그게 입증된 셈이다. 자연이 주는 산나물 중심의 음식을 먹고, 번잡한 문화생활을 배제하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면서 뇌가 편해졌는데, 이 역시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준 제철 식단의 힘도 컸다.” 집이 인상적이다. 작고 낡아 불편해 보이지만 고색창연해 정겹다. 옛날 집을 원형 그대로 두고 사는 이유가 있겠지? “100여 년 전에 화전민이 지은 토담집이다. 요즘처럼 흙이 오염되기 이전 시대에 지어진 황토집인데, 헐어내고 새로 짓기엔 아까웠다. 8평짜리 본채에 툇마루를 보탰을 뿐 본래의 구조를 유지한 채 살고 있다. 난방은 아궁이에 군불을 때 해결한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지만 우리는 원래 있는 조건 그대로를 수용하며 살기로 했다. 이 집에서 살았던 화전민들의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자, 도시에서 익숙해진 습관과 사고를 싹 바꾸자, 그러면 병이 낫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거다.” 반듯한 냉장고가 없는 대신 작은 김치냉장고 하나만 가지고 산다지? “최대치의 간소한 생활을 한다. 적은 소유로 적은 소비를 하기 위해서다. 쓰레기 배출에 따른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도 적은 소비는 당연한 거라 봤다. 우리는 계곡물을 호스로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쓴다. 세탁기 없이 사시사철 손빨래를 하며, 원초적인 형태의 생태 화장실을 집 밖에 설치해 배설물을 퇴비로 바꾼다. 농사용 장비는 기계톱이 유일하다. 호미와 괭이로 모든 농사일을 감당해온 셈인데, 그러한 육체노동이 암을 낫게 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건전한 노동은 떳떳해서 아름답다. 그런데 부인을 너무 혹사시키는 건 아닌지?(웃음)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산다. 다행히 그의 기질은 강인하고 투철하다. 때로 파이터로 변한다.(웃음) 한편 아내 역시 불편하고 간소한 산중 살림의 긍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매사 쾌활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산에 살면서 산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대해서도 부부가 공감대를 갖고 실천해왔다.” 야생 조수는 산골의 원주민 2월 말의 산중을 채운 공기는 차갑지만 봄기운이 이미 흥건하다. 여기저기 수선화 새잎들이 소복이 올라와 솔바람에 설레어 살랑거린다. 머잖아 온갖 봄꽃들이 다투어 우르르 피어나면 숫제 야생 화원으로 바뀔 거란다. 다종다양한 약초, 야생화, 꽃나무 등속이 어울려 꽃 정원을 연출하는 것인데, 이 가상한 꽃밭이 바로 안희상 부부의 농토이자 일터다. 고구마, 마늘,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은 물론, 갖가지 산나물이 산재한 채 마음껏 활개 치는 식의 자유로운 성장을 해 결실을 맺는다. 농약을 치거나 비닐 멀칭을 해주는 식의 요령은 전혀 동원되지 않는다. 그래 자연농법이다. 안희상은 자연의 생리와 기법을 존중하는 한편 인위와 간섭을 배제하는 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농부가 해야 할 진정한 업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 농부라야 비로소 이상적인 먹거리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며, 나아가 식물들이 성황리에 펼치는 순수한 생명 이벤트를 즐겁게 관람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사가 동화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즐겁기만 하랴. 농장이 자리 잡기까지 고생도 적지 않았으리라. “구체적 계획 없이 산에 들어온 탓에 처음엔 막막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무질서한 주거 환경에서 하나하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실은 즐거웠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는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건강 문제를 잊을 정도로.” 초보 농부로서 겪은 애로점은? “돌이 많은 밭이라 돌을 캐내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았다. 초기부터 시도한 유기농법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잘 자라는 건 산나물들이었다. 결국 농장의 절반을 산약초로 채웠고, 유기농법을 자연농법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해서 야생에 가까운 농원이 형성됐다. 문제는 실로 낮은 소출 수준이었다. 따라서 잠시 실망도 했지만 적은 생산일망정 자연이 베푸는 선물임을 자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소출이 적다면 소득도 적을 텐데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나? “산에 들어올 때 가져온 자금에 여유가 있어 한동안 문제가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궁색해지더라. 해법은 소비를 줄이는 데 있었다. 도시에 사는 아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건 사실 30여 년의 산중 생활 중 유일하게 낭패스러운 대목이다. 자급자족을 추구했지만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았으니까.” 근래의 기후 변동으로 농부들의 애환이 많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기후위기에 따른 자연재해를 불러들이는 건 건 결국 인간이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생활습관의 변화가 대안일 테고. 농사 역시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가는 게 옳다. 독성을 품은 화학농약에 의존하는 농사는 결국 몸에 좋지 않은 먹거리를 양산할 뿐이며, 동시에 토질을 망쳐 자연 생태를 깨트린다. 관행농법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귀농인이라면 마땅히 자연농업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야생 조수에 의한 농사 피해를 호소하는 농부들도 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우리는 초기에 부엌도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보니 천장에 걸어둔 냄비에 뱀이 들어앉아 있더라.(웃음) 이걸 어쩌나. 죽여?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알고 보면 원래 이 산골에 자리 잡고 산 건 사람보다 짐승들이 먼저였다. 야생 조수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를 내쫓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멧돼지를 죽인다. 원주민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야생 조수들이 자연 속에서 하는 선한 몫까지 고려하면 해결 방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이 답이라는 얘기다.” 상생의 가치는 귀하지만 자신하고도 불화하며 사는 게 사람이다. 상생을 염두에 두고 내려온 귀농인조차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고심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웃과의 갈등. 이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도 만만치 않은 사안이다. 불합리한 정도가 지나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태와 맞닥뜨리곤 했다. 완고하고 이기적인 사람에겐 사실 대책이 없다. 그런데 이건 있다. 도시 사람들의 큰 이기심에 비할 때 시골 사람들의 작고 단순한 욕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그럼에도 갈등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부족하고, 재주 없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난항은 어쩌면 순항으로 데려가는 징검돌이다. 안희상은 초기의 개척시대를 통과한 탄력으로 산중의 삶을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운항, 일찌감치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불편하고 낯설고 거친 생존 조건조차 ‘자연스럽게,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원래 야생의 기질을 타고났을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그는 굳이 이를 악물고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자연의 감화력에 흡수되었고, 자연농법 삼매경을 경험했으며, 건강을 회복했고, 결핍과 불만이 없는 영일(寧日)을 누린다. “불편한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느끼며 살았다. 어떤 논문에 이런 게 있더라. 윤택한 밭과 거친 밭에 시금치 씨앗을 나누어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해 분석한 결과 거친 환경에서 자란 시금치의 약성이 더 뛰어났다는 거다. 사람의 경우도 비슷한 게 아닐까? 산속에서 검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게 힘들 것 같지만 안분지족(安分知足)할 경우엔 삶의 질이 높아진다.” 자연의 모든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반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속에 살면서 나는 자연에 대해 외경과 감사를 느끼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더 온전한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어떨 때 외경의 감정이 일어나나? “가령 밭에 뿌린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작은 싹이 자라 열매를 맺을 때 경이롭다. 뇌우가 쏟아지는 밤, 마루에 앉은 나의 옷깃에 날아와 앉아 비를 피하는 개똥벌레를 바라볼 때도 환희를 느낀다. 이럴 때면 성찰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꽉 막힌 산골에서 원초적인 스타일의 삶을 구현하는 일. 적게 먹고 담백하게 사는 일. 그걸 30년째 즐겁게 지속하다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삶의 관성을 넘어선 안희상의 ‘도발’이 놀라워서. 안희상이 주는 귀농 Tip •자연은 예술을 뛰어넘는다. 자연을 향유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귀농하는 게 현명하다. 도시에서 몸에 밴 놀이 문화를 싹 버리고 시골 생활에 입문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철저하게 결여된 사람이라면 귀농을 아예 하지 않는 게 옳다. •도시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귀농귀촌을 하면 원주민들의 문화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재능이나 자금력보다 자연에 의지하자. 자연 생태에 관한 안목과 사랑이 생기면 도시에서보다 수준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강도 높은 노동이 요구되는 게 농사다. 따라서 50세 이전에 귀농하는 게 좋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귀농을 삼가라. •집을 크게 짓지 말자. 철수할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매도가 어려워 진퇴양난에 빠지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유념하자. •몸에 좋은 먹거리를 거둘 수 있는 자연농법을 하라. 그러면 오지 산골에 살더라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자연농법을 위해서는 생태 화장실이 필수품이다. 배설물로 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 2024-04-2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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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 후 카페 창업으로 숨통 틔운 초보 농부 “난 치열하게 살았다!”
- 여기 한갓진 시골에 아담한 카페가 하나 있다. 귀농한 부부가 운영한다. 아내는 낙천적이고 남편은 신중한 성향의 소유자다. 이상적인 조합이다. 대략 큰 그림을 그려놓고 꿈을 좆아 달리려는 아내의 과속을 남편이 적절히 견제해 균형을 잡아가니까. 매사 협의 과정엔 충돌이 잦지만 결국은 중간 지점을 찾아 절충한단다. 귀농 가부 문제에서부터 부부의 주장이 엇갈렸다. 귀농 이후에도 의견이 상충하는 때가 많았다. 폐가에 가까웠던 농가 주택을 근사한 카페로 재생하면서도 자주 옥신각신했다. 아무려나 카페는 잘 돌아간다. 딱히 주변 경관이 수려한 입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곳은 아닌 데다, 카페의 담백한 외관과 내부의 소박한 디테일이 어우러져 손님들의 호감을 산다. 부부가 귀농한 지 올해로 6년째. 전에 살던 곳은 인천. 남편 이태호(46, 카페 ‘홍담’ 대표)는 IT 업계를 거쳐 다년간 자영업을 하다가 이곳 충남 홍성군 구성면 시골로 귀농했다. 귀농을 먼저 제안한 건 아내 우연희(41)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살맛나게 살아보자는 아내의 느닷없는 제안에 이태호는 아마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것 같다. 부부 공히 시골 생활 경험이 없는 데다 귀농이 자칫 가시밭길을 걷는 고행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아니, 시골 생활을 장난으로 아나?’ 아내의 귀농 제안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그랬다.(웃음)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짓고 소탈하게,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는 게 아내의 목적이었다. 그건 여러모로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다.” 아내의 생각을 꺾어놓을 필요성을 느꼈다는 얘기인가? 무모한 도전이 없는 인생은 따분할 수 있다.(웃음) “여러 날을 숙고했다. 내가 싫다고 아내의 뜻을 묵살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 차분하게 생각해봤는데 시골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남자들에겐 수렵 생활에 대한 로망이라는 게 다들 있지 않나? 결국 아내의 뜻을 따르게 됐다.” 사전 귀농 준비는 했나? “이 대목에서도 아내와 이견이 있었다. 매사 긍정적인 전망을 하는 아내는 ‘일단 그냥 내려가자, 내려가서 적응하면 된다, 귀농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리지만 우리만큼은 다를 거다,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했다. 착각에 빠져 있었다.(웃음) 이런 아내의 주장까지 동의할 수 없었던 나는 양재동에 있는 aT센터를 드나들며 관련 정보부터 수집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귀농귀촌종합센터를 통해 귀농교육도 받았다. 아내의 손을 잡고 곳곳을 돌며 귀농 투어를 하기도 했다. 농업시설업자들을 통해 유용한 팁도 얻었다.” 충실한 사전 준비를 한 셈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도출할 수 있었을 테고. “기본적인 방향 하나를 미리 확정할 수 있었다. 흔히 농토는 빌려 쓰고 대신 시설 설비에 자금을 투입하라는 얘기를 하지만, 이건 위험한 방법이라는 걸 현장 답사를 통해 알았다. 만약 농사에 실패할 경우 시설비를 몽땅 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 자금은 전적으로 토지 구입에 쓰고 시설은 지원금을 받아 하자는 원칙을 세우고 귀농지 선정에 나섰다.” 홍성군을 귀농지로 선택한 이유는? “경상도나 전라도는 너무 멀어 일단 배제했다. 1년의 절반은 추운 겨울인 강원도도 제외했다. 경기도도 뺐다. 땅값이 너무 비싸니까. 결국 충청도로 가기로 했는데, 우리가 귀농할 당시 충북권은 예산 부족으로 귀농지원금이 적다고 해 충남권이 적합하다고 봤다. 해서 충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귀농교육을 받는 한편 토지를 물색, 마침내 이곳 홍성에 터를 잡게 됐다.”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는 데는 아내도 동의했나? “동의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실랑이를 피할 길이 없었다.(웃음)” 나이 든 남편들은 흔히 말한다. 아내의 뜻을 따르는 게 신상에 좋다고. 살아보니 아내의 머리가 더 현명한 걸 알겠더라, 그리 판단하는 거다.(웃음) “난 아내를 존중한다. 하지만 삶터 문제는 워낙 중요한 대목이라 양보할 수 없었다. 아내는 마을 한가운데 나온 매물을 사자고 했는데, 가격이 저렴하다는 매력이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130여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의 복판에 거주할 경우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자신이 없어 반대했다. 본의 아니게 마을에 민폐를 끼칠 수도 있어 조심스러웠다. 결국 아내가 양보해서 마을과 떨어진 이곳의 매물을 사게 되었다.” 뜻밖에 찾아온 많은 손님 부부가 구입한 터의 면적은 밭 600평을 포함해 약 800평. 60년 전에 지어져 낡다 못해 쓰러져가는 빈집 한 채가 딸린 터였다. 땅을 결정한 뒤 이태호는 일주일 만에 이사해 귀농 생활에 돌입했다. 가까이 있는 홍성읍내에 셋집을 얻어 임시 거처로 삼고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귀농 열차에 몸을 싣고 일단 질주하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신속하게, 거침없이 움직였다. 이사하자마자 즉각 집수리에 나서는 한편 농사에 뛰어들었다는 게 아닌가. 다분히 충실했던 사전 준비에서 나온 추진력이었으리라. 농사 작목은 어떤 걸 선택했나? “30여 종의 작물을 심었다. 600평에 불과한 작은 밭에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던 거다. 귀농 전 막연하게 생각한 건 고구마 농사였다. 소규모라도 고구마 한 가지를 잘 키워 생산하면 부부가 먹고살 만한 정도의 수익은 나오지 않을까, 대충 그런 구상을 했는데 귀농교육과 현장 답사를 통해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렇다면 고구마보다 유능한 작물을 찾아내야 했다. 과연 우리 밭의 토질에서 어떤 작물이 잘 자랄지 알아내기 위해 30여 종을 시험 재배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 블루베리가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현재 블루베리 400주를 기르고 있다.” 집수리는 부부가 손수 했다지? “비용도 줄이고, 우리의 취향에 맞는 집을 만들고 싶어 거의 모든 공정을 직접 처리했다. 워낙 낡은 집이라 기둥, 서까래, 흙벽 정도만 남기고 털어낸 뒤 보수작업을 시작했다. 옛날 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고치고 다듬었다.” 수리 과정에서 부부간 의견 충돌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많이 다퉜다.(웃음) 아내는 감성적 스타일로 개성을 살린 구조를 추구했다. 반면 난 실용성과 기능성 중심의 단순하고 깔끔한 공간을 원했다. 결국 절충점을 찾아갔지만 이견 조율하느라 우왕좌왕이 잦았다. 보수를 완료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처음부터 카페로 개조하자는 계획을 가지고 진행했나? “아니다. 카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지만 편안한 살림집을 만들되 부부 둘이 차를 마시며 기분 좋게 쉴 수 있는 공간도 꾸미자는 정도의 계획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도중에 바뀌었다. 집 고치기를 지켜보던 마을 이장님이 카페를 하면 괜찮을 거라는 조언을 해준 게 계기가 됐다. 시골 카페라도 운치를 돋운 분위기에 착한 서비스를 할 경우 가능성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카페를 통해 부진한 농업소득을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봤다.” 결과적으로 카페를 차린 건 탁월한 선택이었나? “그렇다. 2019년에 오픈하자마자 뜻밖에도 손님이 많이 찾아왔으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대형 카페들은 손실이 컸지만 우리는 무난했다.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공간이라 강아지를 안고 오는 이들도 많다. 카페가 마을 사랑방 역할도 해야 한다는 걸 감안해 과도한 인테리어는 자제했다.” 시골 생활 만족도 80% 카페의 분위기는 뭐랄까, 영업집이라기보다 정겹게 꾸민 이웃집 사랑방처럼 편안하다. 천장에 노출된 서까래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옛이야기들을 두런거린다. 창밖으로는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다가온다. 카페 외벽은 온통 하얀 칠을 입혀 정갈하다. 귀농을 선창했던 이태호의 아내는 하얀 집의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즐기는 식의 낭만적인 시골 생활을 갈망했다지. 그 바람이 얼추 이루어졌다. 특히 안도할 만한 건 카페 수익을 통해 원만하게 가계를 꾸려나가게 됐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서사는 부를 축적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지어 부를 확장하긴 어렵다. 이태호 역시 농업소득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경험했는데, 용케 카페 사업에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는 더 달리고 싶다. 카페는 중간 정거장 정도로 여긴다. “농사로, 특히 소농으로 돈을 벌기는 실로 어렵다. 우리는 카페를 통해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었지만 사실 시골 카페의 태생적인 성장 한계는 명확하다. 확장성이 크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라 보나? “일의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남의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아이들 대상의 방과 후 학습교사를 맡고 있다. 한편 지역의 청년 귀농인들을 모아 농업회사법인을 설립, 다양한 형태의 소득 창출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건 성장 가능성이 크다. 이를 중점 사업으로 삼아 키워나가고자 한다.” 귀농 6년 차에 이르렀다. 현재 상황에 만족하나? 원했던 삶을 살고 있나? “흠, 만족도 80%쯤? 도시에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시골로 내려오면서 우리 부부는 가족 중심의 삶, 가족이 모태가 되는 삶을 목표로 삼았다. 그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귀농 이후 아이 둘을 얻었다. 4인 가족이 된 거다. 농사의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소박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가족과 함께 따뜻하게 살 수 있는 현 상황에 순간순간 기쁨을 느낀다.” 모두가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세상이다. 돈에 관해선 어떤 생각을 하지? “돈이 많아야 행복도 가능하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밥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을 한다. 금전보다 소중한 가치는 부부애, 가족애에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언사는 수굿하지만 생각엔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다. 온유한 품성이 느껴지지만 매사 치고 나가는 성향? 지난 귀농의 날들을 그는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난 치열하게 살았다!” 이태호가 주는 귀농 Tip •귀농 실패 사례가 드물지 않다. 섣불리 뛰어드는 건 무모하다. 심사숙고하되 일단 귀농을 결정했다면 과감하게 도전하라. 보수적인 접근으로는 부족하다. •지자체들에서 주관하는 ‘6개월 미리 살아보기’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초를 다지자. •귀촌과 귀농이 융합된 형태의 시골살이를 모색하자. 소규모 농토를 통해 농업인 자격증을 획득하고 혜택을 받되, 라이프스타일은 귀촌의 방식을 취할 경우 한결 만족도가 높아진다. •농사 하나에만 의존하지 말자. 과도한 노동에 몸이 망가질 수 있다. 찾아보면 농외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 •남편만의 단독 귀농은 필패의 지름길이다. 술과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반면 아내가 귀농을 주도해 함께 내려온 경우엔 99%가 정착에 성공하더라. •부부가 함께 일하는 데 의미를 둘 경우 시골 카페도 권장할 만하다. 단 주변의 시장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결정하라.
- 2024-03-2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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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50세대 위한 평생 살 집 준비 지침서 ‘은퇴 후 평생 살 집’ 출간
- 의식주 가운데 하나에 해당할 정도로 중요한 ‘집’. 대한민국에서 집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누군가에게는 자랑거리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는 편하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나의 집’이 필요하다. 40·50세대인 지금부터 준비해야 로망의 집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40·50세대의 노후 살 집 마련 지침서 ‘은퇴 후 평생 살 집’이 최근 발간됐다. 이 책은 시니어 매거진 가 40·50세대를 위해 기획한 콘텐츠 큐레이션 매거진 시리즈 ‘dice@11pm’의 세 번째 책이다. 40·50세대는 자녀의 독립이나 은퇴로 인해 라이프스타일이 변하는 시기다. 그에 따라 노후에 지낼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깊은 고민이 동반된다. ‘은퇴 후 평생 살 집’ 편에서는 40·50세대의 고민을 덜고 준비를 돕고자 노후 주거지에 대한 정보를 총망라했다. 단독주택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귀농귀촌부터, 대기 행렬이 이어지는 프리미엄 실버타운까지 다양한 주거 유형을 소개한다. 독자는 나에게 맞는 집은 무엇인지 탐색하고, 어떻게 하면 마련할 수 있는지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파트1에서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다운사이징’ 등 주거 트렌드와 함께 노후에 어떤 준비를 하면 될지 전반적으로 설명한다. 파트2는 대한민국 인구 1000만 명이 넘게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투자와 주거 목적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물론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실제 사례들도 엿볼 수 있다. 파트3에서는 단독주택 매입 방법부터 시골살이 로망을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단독주택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포함했다. 파트4에서는 실버타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만 60세 이상만 입주 가능한 실버타운의 장단점, 유형별 맞춤 실버타운 등에 대해 소개한다. 파트5는 ‘따로 또 같이’ 사는 코하우징을 중심으로 공동체 주거에 대해 얘기한다. 국내외 다양한 코하우징 사례도 만나 볼 수 있다. 파트6 마을과 도시 편에서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지역사회의 역할이 중요해진 이유와 전 세계 최근 동향에 대해 다뤘다. 파트1부터 6까지 순서대로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처럼 어느 파트를 봐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책 곳곳에 있는 QR코드를 활용하면, 지면의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더 많은 정보를 습득 가능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노후 주거지 선택에 대한 마음을 굳히고 취득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편집인은 “삶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나이 들어서 어디서 살 것인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숙제가 됐다. 다이스앳 ‘은퇴 후 평생 살 집’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주거 유형이 있고, 트렌드가 시시각각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 가능한 집이 나의 노후를 위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인생의 중대한 숙제를 푸는 데 있어 ‘은퇴 후 평생 살 집’이 큰 도움이 됐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의 ‘dice@11pm’ 시리즈는 40대 이상의 ‘후기청년’ 세대를 위한 다양한 은퇴·노후 정보를 다룰 예정이다. ‘dice@11pm’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드는 매일 밤 11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주사위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명명됐다. 6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처럼 ‘dice@11pm’도 여섯 개의 파트로 구성됐다. 는 프리미엄 경제신문 ‘이투데이’가 발행하는 중장년 대상 월간지다. 품격 있는 시니어들이 행복한 노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강, 금융·자산, 주거, 뷰티, 여행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심사하는 ‘우수콘텐츠 잡지’에 2017년부터 3년간 선정되어, 공공성과 유익함을 인정받았다.
- 2024-03-0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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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에 귀촌 선언, 남들은 뜯어말렸지만 얻을 건 다 얻었다
-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 2024-02-2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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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려한 산중 농원의 희로애락, “귀촌으로 밝은 내일 꿈꿔”
- 해발 800m 고지에 덩그러니 농장 하나 있다. 높고 외지고 고요한 곳이다. 속세가 아스라이 멀어지는 산간이다. 사위로 펼쳐지는 풍광은 콘테스트에서 뽑은 귀재처럼 잡티 없이 빼어나다. 손에 잡힐 듯 구름은 가깝고, 정적에 휩싸인 숲은 청신한 기운을 뿜는다. 환경이 이러니 사로잡힐 수밖에. 김영혜(58, 놀숲치유농원 대표)는 한동안 남편과 함께 귀농지 물색을 위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김천시 증산면 고지대의 수려한 풍광에 꽂혀 낙점하고 귀농했다. 순수한 자연과 함께 평온한 여생을 누리기에 이보다 나은 곳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귀농 전 김영혜는 부산에서 영어학원 강사 겸 원장으로 뛰었다. 잘나가는 학원이었다. 규모를 늘릴 필요성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은 다른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겐 남편과 공유한 오래된 꿈이 있었다. 적당한 시점을 골라 산골로 들어가자는 소망을 지니고 살았던 것인데, 50대에 접어들 즈음 소망의 농도가 짙어져 더 미룰 수 없었다. 유한한 인생을 도시에서 미적거리며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쯤에서 더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산골로 들어가자!’ 부부는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산골의 자연과 동행하며 부부만의 유토피아를 일구는 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일이야말로 삶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본 것 같다. 주변 지인들은 귀농을 뜯어말렸다지. 그러나 그의 내심엔 이미 산골이 꽉 박혀 더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망설이다가 꿈을 이룰 기회를 영영 놓칠 수 있다고 봤다.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시골 생활을 시작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좋은 터를 찾아낸 것이다. 맨 처음 한 건 집짓기였다. 남편이 먼저 이곳에 들어와 1년여 동안 토목공사를 하고 건축을 완료했다. 남편은 건축 감리사다. 그래 모든 공사를 직접 주도했다. 공사를 마친 뒤인 2012년엔 나도 들어와 합류했다.” 귀농인들은 흔히 조언한다. 집을 짓기 전에 가령 셋집을 빌려 한동안 살면서 농촌과 농사의 물정을 미리 익혀두라고. 그게 차후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라고. “우리는 아무런 사전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다. 상당히 무모한 도전을 한 셈이다.(웃음) 귀농교육도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받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나 농민사관학교 등을 통해 부지런히 공부했다. 하지만 ‘무작정 귀농’엔 어쩔 수 없는 누수가 발생하더라.” 귀농을 쉽게 생각했다? “그렇다. 철저한 준비를 해도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게 귀농인들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우리는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일단 성공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원했던 경관이 있는 곳에서 원했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원하는 이에게 이곳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질린다.(웃음) “처음엔 자연 풍경에 벅찬 만족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건 잠시 맛본 행복감에 불과했다. 지금 돌아보면 초기엔 자주 우울했던 것 같다. 난 도시에서 매우 활동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아는 이 없지, 얘기할 사람 없지, 마을과 동떨어진 외딴집에서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직 남편을 괴롭히는 게 일이었다.(웃음)” 남편은 구미시로 출퇴근해 산 절반, 하늘 절반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훤칠한 경관은 가히 압권이다. 외진 암자처럼 고즈넉해 은자를 선망하는 사람에겐 더 적격이리라. 세상의 아귀다툼과 소음이 침범 못 할 곳이니 마음 하나 온전히 다스리며 한 그루 나무처럼 조용히 살기에 적당한 장소다. 터를 고른 부부의 눈썰미가 평범치 않다. 김영혜는 남편과 함께 도시에서 오랫동안 명상 수련을 했다. 그 내공으로 삶터와 풍경을 보는 안목이 열렸나? 그러나 어디에 살든 돈 문제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법. 자연과 교제하며 명상이 있는 소박한 생활을 추구하더라도 경제가 뒷받침돼야 지속 가능하다. 그래 그는 농사로 소득을 얻기로 하고 귀농을 한 게 아닌가. 그런데 막연히 생각했던 농사라는 경기장에 걸린 허들이 한둘이 아닌 걸 그는 뒤늦게 알았다. “농사로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농사에 문외한이라 재배 기술도 서툴렀다. 따라서 초기엔 수입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있어 고민이 많았다. 무슨 수를 찾지 않으면 상황이 매우 나빠질 수 있어 불안했다. 그래 귀농 2년이 지날 즈음 남편이 구미시에 사무실을 내고 감리사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이곳에서 출퇴근하면서. 불가피한 대안이었다. 상황이 개선되면 곧바로 농사에 복귀하기로 했으나 남편은 지금도 구미로 출퇴근한다.(웃음)” 농사 작목은 어떤 걸 선택했나? “고추, 들깨, 두릅 등을 재배했지만 소소한 텃밭 농사 수준에 그쳤다. 주 작목은 오미자다. 현재도 오미자 농사를 계속하고 있다.” 오미자를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귀농교육을 통해 초심자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게 오미자 농사라는 걸 알고 시작했다. 마침 집 뒤편에 야생 오미자밭이 있어 그걸 기반으로 삼았다. 오미자 농사는 초기 자본과 인력도 덜 든다. 오미자 넝쿨이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망을 설치해주고, 풀을 잡기 위한 차광막이나 부직포를 설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재배 기술을 숙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첫해 농사에선 거둔 게 없었다. 모종이 죽거나 순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고전했다. 이듬해엔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작황이 저조했다. 해결책은 재배 실력을 키우는 데 있다는 걸 깨닫고 멘토를 모셔 도움을 받았다. 순을 관리하는 요령, 효율적으로 물과 거름을 공급하는 방법 등 재배에 따른 모든 기법을 공부했다. 흙의 과학을 배우기도 했고, 토질 개선을 위해 토양검사도 했다.” 비로소 실력을 갖춘 농부 대열에 올라선 셈이었겠다. “프로 농부들에게 농법을 익히면서 작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미자 농사 3년 차부터 비로소 튼실하게 달린 결실을 거둘 수 있었으니까. 이후 10여 년 차에 이른 현재까지 고품질 오미자를 무난하게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소득 효과는 여전히 미미하다.” 연평균 매출이 얼마나 되기에? “500평 규모의 오미자밭에서 2000만 원 정도 올린다. 이건 재배 면적 대비 최대치 매출이다. 그러나 안정적인 수입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오미자 수익 외에 농장에서 발생하는 다른 소득은 없나? “민박업을 하고 있다. 힐링 또는 치유를 테마로 한 민박이다. 그런데 이 역시 아직 궤도에 올라서지 못했다. 결국 남편이 도시에 나가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부족한 수익 구조를 보완하고 있다. 농장 수입으로만 따지면 지난 10여 년간 연속적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도시에서보다 생활비가 한결 덜 드는 게 시골 생활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던가? “귀촌의 경우엔 생활비 절감이 가능할 테지만, 귀농엔 이모저모 비용 지출이 많다. 이를테면 농사 장비와 시설 설치 등에 드는 재투자 자금이 필수적이다.” “끝까지 달려 꽃피어보고 싶다” 김영혜는 귀농 10여 년을 이렇게 결산한다.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 비록 농업소득은 아직 시원치 않지만 애초 원했던 삶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원했던 자연과의 동행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생태환경 속에 살고 있음에 안도하는 것 같다. 아쉬운 건 남편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직장을 두게 한 점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이는 이상적인 분업의 형태다. 똘똘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는 부부가 함께 농장일 하나에 몰두할 수 있길 바란다. 귀농의 목적이 애초 거기에 있었으며, 그래야만 진정한 만족을 구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따라서 농업소득을 안정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파도에 시달리고서야 튼튼한 뱃사공으로 자란다. 시련이 성숙의 효모인 건 농사도 마찬가지. 그는 막연히 뛰어든 농사의 경험을 통해 한결 냉정한 눈을 얻었다. 지나온 날들을 점검해 한결 당차고 실속 있게 행진할 수 있는 솔루션을 찾아냈다. 바로 치유농업이다. 치유농업은 농산물만이 아니라 농가가 보유한 경관과 문화까지 자원으로 삼아 심신의 교정이 필요한 이들에게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산업이다. 요사이 등장한 신종 트렌드다. 그는 이미 치유농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치유농업에 필요한 여건을 더 보완할 참이지만 기본 틀은 잡혔다. 숙소, 심신단련실, 체험교육장이 있으며, 산책로와 숲속의 명상 공간도 구비했으니까. 부부가 오랫동안 해온 명상 수련 경력도 자산이다. 무엇보다 유능한 자산은 자연환경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널찍한 농원 전역이 매우 정갈하다. 얼마나 많은 땀을 쏟아야 이런 모습이 나올까. 너무 과도한 근로에 얽매여 사는 건 아닌가? “일이 버거울 때도 있다. 풀을 뽑다가 연골이 찢어지기도 했다.(웃음)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시간을 낭비한 감이 있다. 사실 귀농 생활에 탄력이 붙은 건 5년 전부터다. 이제 도약할 시점이다. 나에겐 성취욕이라는 게 있다. 현재에 눌러앉는 성격이 아니다. 치유농업을 중심에 둔 개성적인 농원으로 키워나갈 참이다.” 이 농원은 매력적인 자연 풍경만으로도 호감을 준다. 치유농업을 위해 어떤 점을 보완할 계획인가? “해발고도가 높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이는 약점이지만 오히려 장점으로 어필할 수도 있겠지. 관건은 홍보에 달려 있다고 보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귀농을 통해 뭔가 변한 건 없나? 내면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MBTI(성격 유형 검사)로 보니까 ‘사고형 인간’에서 ‘감정형 인간’으로 바뀌었더라.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건 외부와 심리적 거리를 두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귀농이 주는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외향성이 강화된 것 같다. 한번 뜻을 크게 펼쳐보고 싶다는 열망, 끝까지 달려 완전하게 활짝 꽃피어보고 싶다는 심리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나 할까.” 단지 일에 파묻히기만 하면 ‘노잼’이다. 방향이 뚜렷하고 행보엔 격한 구석이 있어야 생동한다. 그는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김영혜가 주는 귀농 Tip •사전에 귀농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라. 대충 내려와서 대충 농사에 뛰어들었다간 쓴맛을 볼 수 있다. 농사 작목, 규모, 자금 능력, 유통 문제 등에 관한 구상은 물론 실행 방안을 미리 마련해두자. •귀농교육을 미리 충분히 받아도 현장에선 헤맬 수 있다. 하물며 사전 귀농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귀농이라면? 이건 귀농 필패 비결에 속한다.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고독해질 수 있다. 그러나 깊은 관계는 가능치 않다. 시골 정서와 도시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미리 전제하면 소소한 상처 정도는 가볍게 넘어설 수 있다. •무엇보다 내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자. 몸 망가지기 쉬운 게 농사니까. 특히 풀 뽑기를 하다 관절염을 얻을 수 있다. 풀을 뽑을 땐 쪼그려 앉지 말고 퍼질러 앉아라. •자력으로 수준 높은 농사 기술을 터득하기 어렵다. 반드시 멘토를 만들어 도움을 청하자.
- 2024-01-3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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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비부머 직장인 “은퇴 후에도 같은 지역 아파트에 거주 원해”
- 현재 직장에 다니고 있는 2차 베이비부머(1968∼1974년생) 대부분은 10년 이내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은퇴 후에도 현재 거주지와 비슷한 지역의 아파트에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는 2차 베이미부머 직장인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은퇴 준비 설문조사 결과를 종합해 ‘2차 베이비부머 직장인의 은퇴 후 소득 및 주거에 대한 인식 조사’를 발간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가량(47%)이 향후 5년 이내에 현재 직장에서 퇴직할 것으로 예상했고, 10년 내 퇴직할 것이라는 비율은 89.5%로 나타났다. 거주지 선택에 관련한 부분에서, 설문 응답자의 절반(49.7%)이 은퇴 후 현재 사는 집에서 이주할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부분 이사를 하더라도 현재 거주 지역과 동일한 지역 내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응답자 중 64.2%는 은퇴 후에도 계속 서울에 거주하고 싶다고 답했다. 서울 거주자 중 수도권(경기, 인천)으로 이주를 원하는 비율은 22.1%, 지방으로 이주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4%에 불과했다. 반면, 지방 대도시(대구, 광주, 대전, 부산, 울산, 세종) 거주자는 72.3%가 은퇴 후에도 계속 지방 대도시에 살고자 했으며, 지방 소도시로 이사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23.1%였다.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각각 1.3%, 2%였다. 더불어 2차 베이비부머들은 거주 주택을 노후 소득원보다는 생활 기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거주지를 정할 때 교통 편의성(22.2%)과 생활시설 접근성(20.7%)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다고 답했다. 부모(2.5%)나 자녀와의 거리(2.4%)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생활 편의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희망 거주 형태에도 반영돼 은퇴 후 아파트에 살기를 바라는 비율이 63.9%에 달했다. 단독주택 거주를 원하는 응답자도 25%로 나타났지만, 타운하우스(5.6%), 오피스텔(4%), 시니어타운(1.6%)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현저히 적었다. 이정원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연구원은 “우리나라 은퇴자에게 거주 주택은 생활 근거지인 동시에 전체 자산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 자산이기도 하다”며 “특히 2차 베이비부머들은 거주 주택을 노후 소득원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기보다 생활의 기반으로 여기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이어 “은퇴가 다가오고 있는 만큼 실질적인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며 “남은 기간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재원을 확충하는 동시에 재취업이나 창업을 위한 자기 계발과 주택 다운사이징, 주택연금을 활용한 추가 노후 소득 확보 방안을 고민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 2024-01-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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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벌 생각 없이 농사를 취미 삼아 즐기는 까닭
- 농사는 흙에 땀을 쏟아 결실을 거두는 일이라는 점에서,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나 햇빛의 동향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라는 점에서 신성한 직업에 속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농사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다. 귀농의 경우는 더욱 버겁다. 자칫하면 풍랑을 만나 표류할 수 있다. 올해로 귀농 5년 차에 이른 김광호(65, ‘예단비농원’ 대표) 역시 이를 잘 알고 농사에 뛰어들었다. 농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장애물을 돌파해 기필코 부농의 꿈을 성취하겠다는 투의 결기로 무장한 건 아니었다. 그는 여느 귀농인들과는 다른 방향에 타깃을 두었다. 농업으로 경제 효과를 거둘 생각 자체를 아예 내려놓고 귀농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득 창출에 목적을 둔 귀농은 애초에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시골에 내려왔다. ‘난 그냥 농사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래! 그게 취향에 맞으니까.’ 김광호가 스스로 다짐한 목표가 그랬다. 농사를 즐긴다? 이게 가능할까? 자그만 텃밭 농사라면 몰라도 3000평이나 되는 농토를 재미 삼아 일구기로 작심하고 귀농을 하다니…. 김광호의 포부는 화통하고 유쾌하지만 평범을 초월해 낯설다. 그러나 그는 뜻한 대로 살아왔다. 지난 5년이 통째 즐거운 나날이었단다. 물적 소득은 별로 없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호황을 누리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한다. 김광호는 30년간 서울에서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했다. 은퇴했으니 이제 지도 펴놓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 할 상황이 도래한 셈이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아내가 챙겨주는 밥으로 채우는 ‘삼식이’ 노릇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길을 터주었다. “30년간 고생한 당신, 이제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이건 김광호에게 일종의 복된 신호였다. 진로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으니까. 그는 곧바로 내심에 두었던 행선지를 자비로운 아내에게 통고했다.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깊숙한 산골짝에 함께 들어가 살자는 제안을 한 거다. 그러나 아내에게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머리를 맞댄 상의 끝에 합의한 게 귀농이었다. “이젠 용도 폐기된 인생이 시작되는 건가? 무엇으로 활로를 삼을까? 퇴직하자마자 고민했다. 어쩌면 공직과 함께 흘러간 세월보다 더 길 수 있는 여생을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는 게 숙제였다. 아내는 깊은 산골만 아니면 어디든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래 이곳으로 귀농하게 됐다. 처음엔 나 혼자 내려와 살았다. 농촌의 물정을 익히고 농사를 체험하는 일부터 선행하는 게 옳다고 봐서.” 선발대 역할을 했다? 빈 시골집을 빌려 썼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귀농 준비자를 위한 미리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귀농인의 집’에서 1년간 살며 다양한 체험을 했다. 공과금을 제외한 모든 걸 무료로 제공하더라. 귀농 준비자들에게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어서 좋았다.” 원주민들은 마을에 새로 등장한 귀농인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무대에 올라온 신인배우를 바라보듯 은연중 주시하게 마련이다. 불편은 없었나? “처음에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더라.(웃음)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하고 적극적으로 주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매번 인사 잘하는 건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나서서 도왔다. 그렇게 1년이 잠깐 사이에 지나갔는데, 그즈음 주민들이 비로소 속내를 밝혔다. 주민들로서는 외지인에게 일단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귀농인이 마을 분위기를 흐려놓거나, 땅값만 올려놓는 등 폐단을 경험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결론은 이랬다. ‘당신은 다르다!’(웃음)” 집과 농토는 어떤 경로로 마련했나? “시골에 빈집은 많다. 그러나 팔지 않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도시에 사는 집주인의 자제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품을 많이 팔아야 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땅한 매물을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용케 마을에서 매물이 나왔고, 여러모로 맘에 들어 매입했다. 집은 튼튼하게 잘 지어진 구옥이다. 남향으로 들어앉아 환하다. 집에 딸린 전답 3000평도 세트로 나와 함께 샀다. 이건 점토질 토양인데 말 그대로 ‘문전옥답’이다. 운이 따라준 것 같다.” 100여 종의 작물 길러 김광호의 집은 마을 중앙부에 있다. 저만치 사방으로 높거나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간혹 거쿨진 노송 숲이 보여 아늑한 분위기를 돋운다. 그에 따르면 이곳이 길지(吉地)란다. 뭐든 한번 해볼 만한 곳이라 한다. 뜻을 펼치기에 적격인 곳이라 한다. 그 ‘뜻’이란 농사를 즐기자는 데 있다. 여기에 기름진 농토가 있다. 딱히 빼어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것도 없는 자연 풍광도 있다. 게다가 그의 조력자이자 지지자인 아내의 긍정적인 에너지까지. 이건 완벽한 조건이다. 따라서 농사를 한바탕 신나게 즐기지 않고 어떻게 견디랴. 김광호의 생각이 처음부터 그렇게 웅장했다. 그의 농원에선 현재 10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거의 모든 농작물이 망라된 것 같다. 농사로 돈 벌 목적이 부재한 대신 농작물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은 질겨 해마다 작물 수를 늘려왔다. 그래 다종다양한 결실물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듯이 소득 효과는 미미했다. 이 대목에서 귀농인들은 경악한다. 내가 이러려고 귀농을 했나?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고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광호에겐 고심할 이유가 없었다. 태연자약할 수 있었다. 애초 소득 문제라는 뇌관을 제거한 귀농을 구상하고 농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폭약이 터질 일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닐까. “돈벌이 대신 농작물을 취미 삼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자 모든 게 대체로 수월했다. 재배 기술은 서울에 살 때 이미 익혀둔 게 있었다. 18년간 남의 땅 25평을 빌려 주말농장을 일군 경험 덕분이다. 귀농교육도 충분히 받았다. 수년간 총 1000시간 정도 교육을 받았으니까. 요즘도 공부를 계속한다. 식물의 생태를 알면 알수록 농사 재미도 커지더라.” 농장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어디로, 어떻게, 누구에게 가나? “생산성에 의미를 두지 않은 농사라서 소출은 적다. 아마 남들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수확물은 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과 친지, 이웃, 방문객 등에게 나누어 준다. 손수 지은 깨끗한 먹거리를 남들과 나누는 일은 정말이지 행복하다. 남는 물량은 공판장으로 보낸다. 다른 농가보다 싼 가격을 매겨 로컬 푸드에 내다 팔기도 한다. 그런데 전체 매출은 실로 낮은 수준이다. 사실 지금까지 손에 쥘 만한 게 거의 없었으니까.(웃음)” 농장 일은 부부가 함께 하나? “아내는 간접 지원을 한다. 농장을 놀이터로 삼은 남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만으로도 그지없이 고맙다. 아내가 농장에 모습을 나타내기만 해도 몹시 기분이 좋아진다. 농장 일이 쉽지 않다. 벼농사는 남에게 맡기기도 했지만 일의 양이 엄청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품이 많이 들망정 기본적으로 매사 재미있다. 식물들이 자식처럼 보이고, 병든 식물을 내 손으로 응급처방을 해 살려냈을 때는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모든 농부가 작물을 애지중지하며 비지땀을 쏟는다. 그렇지만 흔히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지 못해 고민한다. 농사를 취미로 즐기는 당신의 방법을 의아하게 보는 눈은 없을까? “초기엔 나의 미숙한 농사 기술을 구박하는 이들이 있었다. 취미 생활 형태의 운영 방식에도 ‘그게 뭐야?’라며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인정하고 있다. 농사의 목적과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걸 이해하면서.” 궁금하다. 농업소득이 미미한데 생활비는 무엇으로 조달하나? “연금으로 산다. 부부 둘이 소박하게 먹고살기 충분한 수준이라 걱정이 없다. 연금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경제의 불확실성이 자명했다면 농사를 취미처럼 즐기기가 불가능했겠지. 서울에서 가지고 살았던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점도 시골 생활의 만족도와 안정성을 높여줬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건 내가 원래 좋아한 식물 재배를 맘껏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농사에 50%, 이장 일에 50% 알고 보면 풀들도 춤을 춘다고 했던가. 김광호는 식물들의 생동과 약동에 덩달아 즐겁다. 물과 햇빛과 공기만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고 순환하는 식물들의 생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깊숙이 관찰하면서, 그는 인생의 참다운 열매를 따는 듯 만족을 느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설은 간결해 ‘식물이 너무 좋다, 농사가 재미있다’는 정도에 그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흥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다. 흔치 않은 형태의 ‘농사 삼매경’에 빠진 셈이다. 그는 또한 마을 이장을 맡아 동분서주한다. 50여 가구로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외지인이 이장에 선임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시골 마을의 권력은 보통 이장에게 집중돼 있다. 따라서 이장 선거전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마을도 드물지 않다. 물론 김광호의 관심은 마을 권력에 있지 않다. 공무원 출신으로 재능기부 차원에서 이장직 권유를 수락했다. “올 들어 주민들과 마을대동회로부터 이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고사했다. 자꾸 요구하면 차라리 이사 가겠다고 강경하게 나가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양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이장 일을 하다 보니 이 역시 재미가 있더라. 보람도 크다.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바라보는 안목도 생겼다. 식물에 빠져 사는 것처럼 요즘은 이장 일에도 푹 빠져 지낸다. 농사에 50%, 이장 일에 나머지 50%의 에너지를 배분하며 산다.” 향후 지금의 일들에 어떤 걸 더 보태고 싶나? “소득과 무관한 농사로 재미있게 살아보겠다는 꿈은 이미 이루었다. 원했던 삶과 지금의 삶이 일치하는 기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깨소금 맛이라 해야 하나? 이젠 프로 농부를 지향하고 싶다. 귀농 2막이랄까. 농사의 방향을 전환, 소득 창출에 주력해볼 참이다. 준비는 이미 다 해놓았다. 농(農)식물원으로 가꿀 구상도 가지고 있다.” 놀이로 시작한 농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겠다는 것. 돈보다 취향을 중심에 두고 살아 만족스러웠던 날들도 이제 어깨 뒤로 넘길 시점이라는 얘기다. 김광호가 주는 귀농 Tip •농사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 쉽지 않다. 시골에 왜 빈집이 많은지, 기존 귀농인들이 일쑤 귀농을 만류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헤아려보라. •1만 평 이상의 농지 규모를 확보하거나 스마트 팜을 조성할 경우, 또는 특수작물을 재배할 경우 상대적으로 승산이 높을 수 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다. •지자체들이 주관하는 ‘미리 살아보기’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라. 큰돈 들이지 않고 농사와 농촌의 물정을 익힐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인터넷 정보처럼 빠르게 퍼지는 게 시골 소문이다. 주민과 융화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좋은 평을 들을 수 있다. •부부 동반 귀농은 필수다. 혼자만의 귀농은 실패를 초래할 수 있는 첩경이다.
- 2023-12-29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