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야, 덤벼라! 난 돌고래처럼 질주하리라!

입력 2025-09-25 07:00

[박원식이 만난 귀촌 생활] 충북 보은군 시골에 사는 차재만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귀촌이나 귀농이나, 시골을 무대로 도시에서보다 유쾌하게 잘 살아보기 위해 결행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그러나 삶의 내용은 아주 다르다. 귀촌이 단거리 주자의 소질을 요구한다면, 귀농은 마라토너의 소양을 필요로 한다. 귀촌이 꽃을 즐기는 일이라면, 귀농은 꽃을 피울 수 있는 뿌리부터 돋우는 일에 속한다. 한마디로 귀농은 상당히 고달픈 여정을 밟아야 한다. 따라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귀농에 겁부터 집어먹는다. 누가? 바로 세상의 거의 모든 아내들이 그렇다. 올해로 귀농 12년 차에 이른 차재만(59, 보은군 ‘차차농원’ 대표)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애초 차재만의 귀농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묵살하지도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게 남편의 해묵은 꿈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부는 머리를 모아 합의점을 찾아냈다. 남편 먼저 단신 귀농을 하기로 했던 것.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일단 남편을 선발대로 파견하고 이후 상황을 살펴 합류 시점을 고를 계획이었다. 이건 흔히 볼 수 있는 부부 귀농의 한 유형이다.

남편을 먼저 내려보낸 뒤,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 비로소 편승하고자 하는 아내들의 ‘작전’엔 사실 결함이 없다. 짜릿한 도전이자 아슬아슬한 모험일 수 있는 귀농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슬기의 소산이다. 아내는 제자리에 남아 직장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경제상의 안전판을 유지하고, 남편은 조속히 아내를 불러들이기 위해 갈기털을 휘날리며 내닫는 말처럼 한층 분발하게 마련이니 참신한 꾀가 아닐 수 없다.

홀로 귀농한 차재만의 고독한 나날은 꽤 길게 이어졌다. 아내가 오랜 거주지였던 대전의 살림을 정리하고 합류하기까지 3년이 걸렸으니까. 그 3년 동안 차재만은 인생의 혹한기 비슷한 고초를 겪었다. 미리 예상한 시련의 분량을 상회하는 고생을 맛보았다. 어쩌면 자신감에 부풀어 농사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봤을 수도 있다.

“보은은 나의 고향이다. 낙향을 통해 귀농한 셈이다. 나이 들수록 고향이 그리웠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던 어릴 적 추억, 정겨운 산천, 농사지으며 고달프게 사셨지만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신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 이런 게 강렬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결국 자연스레 낙향하게 됐다.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농사를 시작해야 정착이 빠를 거라 생각해 40대 후반에 귀농했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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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의 귀농엔 유리한 점이 많다고 한다. 특히 부모에게 농토와 농사 기술을 물려받은 경우 탄탄대로에 올라선 것과 마찬가지라, ‘금수저 귀농’이라 일컫는다.

“집안의 막내인 나는 물려받은 농지가 전혀 없었다.(웃음) 혼자 내려와 살기 시작한 거처는 부모님 사후 풀 더미에 묻혀 16년간 방치된 폐가였다. 화장실조차 없어 불편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그래 거의 모든 걸 뚝딱뚝딱 고쳐 썼다. 생활상의 적응은 매우 빨랐다. 친형님 두 분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시골살이를 대체로 원만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 시점이라서, 가끔 형님들이 주선한 농장 일이나 집수리 같은 걸로 용돈을 벌기도 했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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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이 무작정 귀농했더니

차재만과 아내는 충남대 전산학과(현 컴퓨터융합학부) 출신. 둘은 선후배 커플로 인연을 맺어 결혼에 이르렀다. 부부는 대전에서 각자 직업 활동을 했다. 아내는 재능교육 학습 회사에 들어가 국장직까지 맡았다. 차재만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회사에서 다년간 근무했다. 나중엔 노후대책으로 유력하다고 본 카센터를 운영한 덕분에 갖가지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웬만큼 망가진 물건은 못 고치는 게 없다. 이러한 재능을 그는 농사에 쓰는 한편, 알바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주민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봉사활동 도구로도 훌륭했다. 농가의 고장 난 농기계나 전기 시설을 무료로 수리해주면서 단박에 호감을 샀던 거다. 덕분에 ‘우리 동네 맥가이버’라는 애칭도 얻었다.

그는 이렇게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시골 생활의 밑면을 본때 있게 다져나갔다. 혼자 돌아다니는 외기러기처럼, 아내 없이 사는 차재만을 불운한 이혼남으로 오해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내 해소됐다. 다만 어인 까닭인지 손에 쥔 자금이 빠듯해 내핍을 겪으며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한동안 라면만 먹고 살다시피 했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일단 열심히 뛰는 걸 상책으로 삼아 열악한 상황을 극복, 활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인생의 모토랄까, 내겐 그런 게 하나 있다. ‘서두르지 말자. 삶의 모든 걸음을 차차로, 차근차근 내딛어 목적지에 도달하자!’라는.”


농토는 어떻게 마련했나?

“자금력이 딸려 임대한 땅으로 농사를 개시했다. 그런데 정작 농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기술은 부족하고, 작물에 관한 이해도 빈약하고, 유통에 대한 상식도 없던 터라 고전했다. 용을 쓰며 땀 흘렸지만 헛수고에 그쳤다. 귀농교육조차 받지 않고 농업에 덤벼들었으니 사필귀정일지도.”


다소 낭만적인 감정에 이끌린 귀농을 한 편인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다.(웃음) 준비 없이 무작정 귀농한 측면이 분명하니까.”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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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은 어떤 걸 길렀나?

“여러 가지 재배했다. 맨 처음 손댄 건 임대한 복숭아밭이었다. 400평(약 1322㎡)에 불과한 규모라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복숭아를 수확하기까지 버거운 과정을 거친 반면 돌아오는 대가는 변변치 않았다. 벼, 보리, 양파, 무, 더덕, 도라지, 들깨, 옥수수, 고추 등도 결과는 비슷했다.”


그 많은 작물 중에 당신을 기쁘게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도라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작은 규모라 시원치 않았다. 작물의 작황이 모두 부진한 건 아니었다. 뭐랄까, 농사는 허무한 게임이더라. 가령 양파를 번듯하게 수확하고도 적자를 봤다. 유통 구조에 무지해서 발생한 오류였다. 무 농사에서도 참패했다. 야심을 갖고 제법 규모화해 무를 길렀는데, 가뭄이 들어 모조리 타죽었다. 이듬해엔 홍수가 들이쳐 몽땅 녹았다. 아이고!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수익은커녕 빚만 늘어났으니까. 귀농 초기의 실상이 이렇게 허탈한 것이었다.(웃음)”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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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챗GPT 강사로 맹활약해

실패한 농사를 회고하는 차재만의 안면에 살짝 허탈한 웃음이 번진다. 그건 우울한 것이라기보다 안도의 한숨에 가까울 테지. 요컨대 차재만은 시행착오로 점철된 한 시절에 유감이 없다. 고난을 통해 실력을 길렀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안목을 얻었기 때문이란다. 이쯤에서 그는 총체적인 숙고를 통해 벼농사에 운명을 걸기로 했다. 대전에 머물던 아내도 비로소 합류해 힘을 보탰다.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남편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으리라. 세상에 믿을 건 건강한 부부 사이뿐이다. 어설프게 설치는 상대의 꼴에 얄밉다가도 변덕처럼 생각을 고쳐먹는 게 배우자다.

“아내에겐 늘 미안하고 고맙고 눈물겹고, 뭐 그렇다. 그녀는 대전의 집을 팔아 전전긍긍하는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 자금을 수혈해주었다. 그걸로 비로소 집을 지었다. 농토도 사들여 벼농사의 규모를 확대해나갔다.”


벼농사에 꽂힌 이유가 있나? 자본이 넉넉할 경우 벼농사가 괜찮다고 하던데.

“벼농사의 메리트는 한둘이 아니다. 우선 경지면적이 넓어도 기계화됐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타 작물에 비해 생산성이 일정하고, 소득 변동률도 낮아 안정적이다. 노동시간도 길지 않다. 단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고가의 장비가 필수적이다. 재배면적도 수만 평에 달해야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따라서 쉽사리 뛰어들기 어려운 작목이긴 하다.”


거대한 투자를 할수록 수익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로 들린다.

“바로 그렇다. 그뿐 아니라 경륜도 필요하다. 남들이 쫓아올 수 없을 정도의 못 말릴 근면성도 요구된다. 벼농사 이전이나 이후나 난 쓰러질 지경으로 바지런히 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귀농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죽을 각오로 일할 능력이 없다면 그냥 도시에서 살아라!’ 농사는 고도의 집중력과 노동력을 요하는 직종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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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총 4만 평(13만 2231㎡)의 농지를 소유했다. 그중 90%에 벼농사를 한다. 농지 일부는 아내의 조력으로 샀고, 나머지는 지원금이나 융자를 받아 확보했다. 한마디로 부채가 엄청 많다. 그러나 갚을 능력에 관해선 염려하지 마라.(웃음) 자신 있으니까. 향후 10년 안엔 깨끗이 청산할 작정이다.”


농사가 바야흐로 안정 궤도에 진입했다는 얘기겠지? 연 매출액은?

“벼농사로 자리 잡은 건 겨우 2, 3년 전부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익을 올릴 시점이다. 연 매출? 약 2억 원이다. 그 가운데 40% 정도가 순수익이고.”


이제 부인은 시골 생활에 정붙이고 잘 지내나?

“그 사람, 여기 내려온 지 딱 한 달 만에 못 살겠다고 하더라.(웃음) 이후 여러 고생이 많았으며, 사실 아직도 시골살이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명민한 사람이다. 자신의 일을 찾아냈다. 전공을 살려 인공지능에 관해 밤새워 공부하더니, 몇 해 전부터 챗GPT 강사로 맹활약한다. 곳곳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온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당신은 농사일 하나에 올인하고 있다. 사람이 일만 하고 살아도 되나? 인생은 노루 꼬리처럼 짧다.(웃음)

“글쎄다. 아직은 한눈팔 겨를이 없다. 내가 바라는 좋은 삶은 아내와 함께 맘 편히 여행 다니는 것과 농장을 키워 죽을 때 자식들에게 넘겨주기다. 이 두 가지를 완수하기 위해 이렇게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잡념 없이 일에 몰두하기!’ 이것이 차재만의 뱃머리에 매달린 깃발이다.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돌고래처럼, 그는 더 큰 바다로 탕탕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인터뷰를 마친 며칠 뒤 차재만의 도정공장에 불이 나 전소됐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전에도 창고가 불타 5000만 원 상당의 피해액이 발생했다. 이번 피해 규모는 훨씬 크다. 재난보험도 없는 상황이다. 거센 파도가 들이친 셈. 하지만 그는 돌덩어리처럼 담담하다. 통화로 들은 차재만의 한마디는 이렇다. “뭐 별일 아니다.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일이 생긴 것뿐, 차차 복구하면 된다.”


차재만이 주는 귀촌 Tip

•준비 없는 귀농은 위험하다. 괜한 고생을 사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패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농사의 관건은 물과 토양의 품질 수준에도 달려 있다. 맘에 드는 농토가 있더라도 덜컥 매입하지 말고, 수질검사와 토질검사를 통한 검증부터 하라.

•시골에서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마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어울리자. 나 혼자 잘 살 순 없는 게 시골 생활이다. 게다가 농촌은 흥미로운 곳이기도.

•작물 선택을 신중히 하자. 가급적 해당 지역의 특산 작목을 선택하는 게 유리하다. 난 대추 명산지 보은으로 귀농했지만 대추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대추 농사를 했다면 덜 고생했으리라.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각자 하기 나름이다. 죽을 둥 살 둥 농사에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가가 돌아온다. 오기와 끈기로 조합된 다이내믹 에너지를 쏟아붓자. 그게 생동할 수 있는 비결이다.

•재난보험에 가입하자. 재난 대비책 중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나는 보험을 들지 않아 손실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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