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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사람이 잘라 말한다. “보성군이야말로 남도 여행 1번지이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먹을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숱하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이야 캐묻지 않아도 알겠다.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예전에 보성 땅을 훑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풍경도 풍물도 역사도 문화도 개성이 있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준 게 아닌가. 하오의 해변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바다에 일렁이던 붉은 윤슬을 잊을 수 없다. 찰나의 잔물결에 불과한 삶의 눈부신 슬픔을 환기시켜 죽비처럼 가슴을 쳤으니. 해서 내겐 그날의 윤슬이 보성 최고의 명장면으로 새겨졌지만, 여행자의 눈과 감성을 일깨우는 이 고장의 명소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부족할 지경으로 즐비하다. 오늘은 건축문화유산을 답사할 참이다.
보성여관을 찾아간다. 벌교읍 다운타운 중심지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그 시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여관이었다. 건물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이렇게 화려한 여관이 어떤 연유로 남도 끝자락 포구 벌교에 들어서게 됐을까?
당시 벌교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이었다. 전남의 4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니 기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벌교의 번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와 왕래가 잦은 데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접점인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전남 내륙의 곡창에서 긁어모은 양곡을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했다. 즉 식민지 수탈기지의 한 전형이었다. 하루 20여 차례 화물선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가혹한 정황이 훤히 비친다. 여하튼 벌교는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였다. ‘본정통’이라 부른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시대적 배경이 완연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남도여관 그곳
보성여관은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식 건물의 특징인가? 전체적으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문들과, 2층에 줄느런한 창문들이 외부의 햇빛과 거리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덕분에 오밀조밀해서 갑갑해 보일 수 있는 내부 구조에 생기가 돋는다. 주로 직선과 사각의 연쇄로 이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우리의 전통 건축과 다른 걸 알 만하다. 가늘고 날렵하게 깎아 세운 사각기둥, 널빤지로 마무리한 벽면과 천장, 다다미방,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 곳곳에서 일본식 작풍이 느껴진다. 독특하기론 원래의 용도대로 지금도 여전히 여관과 찻집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람만 할 수 있는 여느 근대 건축유산과 달리 보성여관은 실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래는 성장기 한때를 벌교에서 살았다. 벌교의 변천사와 벌교 사람의 희로애락에 밝다. 그래 ‘태백산맥’에 벌교의 지형지물과 풍속과 인물을 끌어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곤 했는데, 보성여관은 그중 한 곳이다. 거장의 소설에 출연한 보성여관의 운세는 별안간 환하게 열려 드라마틱한 상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글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황홀하다’는 조정래의 치열한 문학정신까지 더듬어보게 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까. 보성여관만이 아니다. 벌교읍이 통째 ‘태백산맥’의 아우라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답사객들이 밀려들면서였다. 조정래의 문학 장정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되고, 덩달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도 마련되면서 문예적 공기마저 감도는 곳으로 변했다. 소설 한 편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이, 고즈넉했던 지방 소읍을 생동감 넘치는 문화지구로 바꿔놓은 셈이다.
참 아름다운 숲속의 정자, 열화정
이제 조선 고택을 만나기 위해 강골마을로 접어든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강골마을은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들이 펼쳐지고, 자연이 연주하는 원초적 선율에 다름 아닌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강골마을은 여전히 수려하다.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러니 눈 밝은 옛사람들의 정주가 필연이었겠지. 이곳엔 ‘이진래 고택’과 ‘이정래 고택’이 있다. ‘이준회 고택’도 있다. 보성 지역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구현한 셋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을 뒷산 초록 풀숲엔 살포시 감춰진 듯 조붓한 길이 하나 있다. 섬려한 발길을 기다리는 오솔길인가? 바닥에 희고 미끈한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윽고 길 끝에서 열화정(悅話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평온한 정자다. 아름다워 첫눈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작은 집이다. 협착한 산골짝에 걸맞은 크기라서 조화롭다. 조선 후기 문신 이진만이 지은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정자다. 덤벙 주춧돌 위에 세운 둥근기둥, 누마루와 쪽마루와 툇마루, 기능성을 고려해 배치한 방들, 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 등 고수의 배합 솜씨가 능란하다.
숲은 초록 일색이다.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이 토하는 저 초록빛 아우성이라니. 실바람 한 뭉텅이에도 서슴없이 설레어 몸을 흔드는 꽃들, 잎사귀들. 식물들의 희열과 자유를 이해할 만하다. 열화정 주인은 이 청산에 묻혀 나무처럼 살고 싶었나? 속세의 탐욕과 광기를 밀어내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일 때 의지할 곳은 자연이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
‘막걸리 페스티벌’로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
보성은 예로부터 산·바다·호수를 일컫는 3경(三景)과 의향·예향·다향을 뜻하는 3보향(三寶鄕)의 고장이라 불렸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에게 보성의 문화에 관해 이모저모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에 관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보성 땅 벌교가 마치 주먹으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은 고장인 양 엉뚱한 오해를 초래했다. 팩트는 그게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보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친 고장이다. 보성군은 의병장 안규홍의 동상과 ‘황금주먹’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했다. 사실관계를 외부에 알려야 할 필요를 느껴서인 것 같다.
흔히 가치 있는 근대 건축유산들이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반면 보성여관은 원형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 그 배경이 있다면?
“보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보성여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개발 바람이 거셌던 새마을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에 나섬으로써 안전한 보존 조건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자체마다 문화원의 역할도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원의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 그렇다고 보나?
“아쉬운 대목이다.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체지만 혁신에 소홀하다. 침체를 털어내고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데 잘 구현되지 않고 있다. 문화원은 지역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그릇을 채워야 하는데 여전히 구습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7년째 보성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간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내심 전국 최고의 문화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오더라. 다양한 문화 테마를 설정, 내실 있는 운영을 하자 주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줬다. 보성문화원은 이미 주민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셈이다. 보성문화원을 통해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청년층의 동참도 적극적이다.”
보성군은 ‘서편제보성소리축제’로 2022년부터 2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을 받았다. 김 원장은 내년에 흥미로운 축제 하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와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는 것.
어릴 적 주입식 교육의 힘은 아주 세다. 우리 모두가 흔히들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말고도 그 시절엔 각 지역의 특색이나 지역명은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 영주도 있었다. 영주라 하면 무조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부석사 무량수전이 따라붙었다. 강산이 무수히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어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장, 경북 영주다.
또는 영주 사과일까. 선비의 고장답게 사찰이나 서원은 당연하다. 추억의 풍경이 곳곳에 남겨져 있어 도심과 골목길에서 가슴 뭉클한 그리움도 솟는다. 그리고 무섬마을을 지키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둘러보면 어디서든 수백 년 혹은 수십 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영주 여행은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물 위에 뜬 섬,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영주의 내성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너른 모래톱, 그 위로 S라인의 곡선이 길게 이어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의 풍경이 무심하다.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마을이다. 물 수(水), 섬 도(島). 수도리의 물섬이 무섬이 되었고,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수도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300년 넘도록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이 다리였다.
홍수라도 나면 다리는 강물에 잠겼고 휩쓸려 내려가,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다리를 다시 놓곤 했다.
폭 20~30cm, 높이 60cm, 총길이 150m. 폭이 좁아 걸을 때면 아슬아슬해서 장대에 의지하기도 했다.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폭이어서 예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지레 모래톱에 앉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외나무다리 중간의 몇 군데에 마주 오는 이를 피할 수 있는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걷다가 어질하거나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물에 빠질 듯한 두려움도 생긴다. 다리 위를 걷는 발끝만 보며 걷다가 강의 물결에 취하면 낭패다. 그래서 강 건너를 잇는 이 다리는 그 옛날엔 시집올 때 가마 한 번 타고, 죽어서야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려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물돌이 마을, 무섬의 느린 시간 속에 잠겨 모래톱에 주저앉아 저편을 바라보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이 노래가 절로 입안에 맴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운 외나무다리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 TV 예능과 CF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섬마을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시인 조지훈은 서울로 유학을 떠나면서 무섬에 남겨둔 아내와의 이별을 ‘별리’(別離)라는 시에 담았다. 조지훈 시인의 처가로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마을 첫머리쯤에 있었다.
무섬의 집들은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과는 달리 늘 그 자리에 있던 풍경이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50여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라고 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만죽재(晩竹齋), 해우당(海愚堂)을 비롯해 지정문화재가 10곳이고, 100년 넘는 고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울 밑에 선 봉숭아도, 풀숲 가득한 곳에 피어난 들꽃들도 물씬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수백 년 켜켜이 쌓인 깊은 역사가 그대로 전해지는 옛집들이 고스란히 무섬마을이었다.
마을이 어찌 이리도 조용할까. 발소리조차 민망하다. 걷다가 호박이 매달린 담장을 향해 셔터를 누르니, 마당에서 일하시던 어르신이 “그게 뭐 볼 게 있기나 한가. 쓸데 있으면 그 호박 따가”란다. 그래도 되는지 싶어서 괜찮다고 하니 직접 두 개나 따주셔서 황송한 마음에 보물처럼 잘 모시고 왔다.
영주라 하면 부석사
유홍준 교수는 자연과 건축이 제자리를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문화유산 부석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내지 못한다고,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 칭송한 부석사 당간지주 인근 은행나무 산책로는 여전하고, 그 길 위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볼 만하다.
천년고찰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무량수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으로 펼쳐진 백두대간 능선의 풍광에 넋을 잃어보는 것도 부석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온통 경사진 경내를 돌기엔 다리가 뻐근하고 숨찰 때도 있다. 하지만 영주까지 와서 어찌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목조건물 부석사에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마음 내려놓고,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향교나 서원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국립인 반면 서원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한 소수서원의 역사와 향기가 물씬하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때맞추어 선비 복장으로 글을 읽는 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한 그 뜰에 앉아 가만히 옛 선비들의 기운을 전해 받을 수도 있다. 선비교를 따라 너른 뜰을 지나면 선비촌으로 접어든다. 옛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래등 같은 양반님네 고택의 안마당과 대청마루, 담 너머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배롱나무, 그리고 강학 시설과 저잣거리도 조성되어 있어 옛 선비마을의 풍취가 가득하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근대역사문화거리
현대 일상에서 찬찬히 되돌아보기 좋은 곳으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영주 원도심에 가면 근대 생활 모습과 건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근대 산업 시기의 양곡가공업을 짐작해볼 만한 풍국정미소,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여전히 동네 주민의 머리를 깎고 계시던 80년 전통의 영광이발소, 몇 걸음 건너편에 고딕 건축양식의 영주 제일교회가 붙어 있고, 근대 시기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영주동 근대 한옥은 주변으로 풀밭이 무성하다.
또한 관사마을은 역사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영주-안동 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고 철도 역무원들의 관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불리게 된 관사골은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칠이 벗겨지고 낡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식 목조 관사 주택의 전형인 5호와 7호 관사를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수리를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집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집이었지만, 근대 건축이라고 지정만 되면 뭐하냐 넋두리 한다. 낡고 헐어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데 곤란한 점이 많은 모양이다. 도시생활사적 가치가 크다지만 변화에 따른 관사골 주민들의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의 여건도 염두에 둘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낡은 지붕과 담벼락,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던 안마당의 텃밭에서 정 깊은 추억이 솟는다. 관사골 저편 언덕 위로 부용공원이 내려다보고 있다. 흑백 필름 같은 풍경 속에서도 현재와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팔복예술공장은 폐허를 딛고 일어선 복합문화공간이다. 쓸모를 잃고 버려진 폐공장을 도시재생사업으로 일으켜 세운 이색 예술 공간이다. 폐공장 시절은 길었다. 25년간이나 방치되었으니까. 그러니 형상이 오죽했겠는가? 무너지거나 으스러지거나 널브러진 것들이 태반이었다. 용케 남은 건물들도 금이 가거나 비가 샜다. 뒤숭숭하기가 흉가와 맞먹었다. 이렇게 공장의 한 생애가 종을 쳤다. 갈 길을 잃은 유령들의 비밀 집회소쯤으로 전락했다. 그런 와중에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앰뷸런스를 타고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달려와 수혈을 하고 수술을 해 꺼진 숨을 되살렸다. 전주시 팔복동 제1일반산업단지 안에 있다.
팔복예술공장은 2년에 걸친 사전 작업과 공사,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한 시범운영을 거친 뒤 2018년에 개관했다. 이제 겨우 네 살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아주거나 알아보는 눈이 많다. 개관 첫해에만 6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젠 재생 문화 공간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헌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대신, 헌것을 싹 갈아엎고 새뜻한 새것을 건설하는 대신, 헌것에 잔존하는 쓸모를 재료로 삼은 재생사업의 성과가 이렇게 대단하다. 폐허를 폐허로만 볼 일 아니다. 폐허 속에 역사와 인간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헌것을 헌것으로만 볼 일 아니다. 헌것 안에 새것 뺨치는 예술과 미감이 박혀 있다.
폐공장의 재생 설계를 주도한 총괄기획자는 건축가 황순우. 인천시의 근대건축물을 본때 있게 재생한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실력을 과시한 인물이다. 그는 팔복예술공장 설계에 나서기 전 한동안 뜸을 들였다. 폐공장이 지닌 역사성과 사회성,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숙고했던 셈이다. 그는 이런 요지의 얘기를 했다. “재생은 기억에서부터 온다고 봤다. 따라서 1년 동안 설계를 하지 않고 기억을 재생시키기 위한 작업부터 했다. 지역주민, 지역 예술가들과 수시로 만나 폐공장을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부터 했다. 물리적인 작업은 맨 마지막에 했다.” 그는 단순한 형식적 구조 변경을 구사해 후루룩 단숨에 예술 공간을 설계하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폐허에 남은 옛이야기를, 스러져가는 건물들이 간직한 기억을, 퇴락한 풍경의 이면에 감추어진 은유를 옹골차게 발굴해 공간 구축의 질료로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팔복예술공장은 크게 보자면 본관에 해당하는 A동, 아동과 청소년의 예술 놀이터인 B동, 그리고 야외 공간으로 구성됐다. A동은 외벽에 붉은 칠을 해 도드라진다. 벽면 일부엔 통유리창을 냈고, 옥상 난간의 프레임도 산뜻하다. 낡을 대로 낡은 원래 건물의 취약한 구조를 부분적으로 보강해 기능성을 살린 공간이다. 로비엔 폐공장을 남기고 사라진 카세트테이프 생산업체 ‘썬전자’의 히스토리를 알려주는 아카이브 섹션이 있다. ‘썬전자’는 이곳에서 1979년에 공장 가동을 시작했으나 CD(Compact Disk)라는 신종 기록 매체에 밀려 1991년에 문을 닫았다. 공장의 이런 굴곡진 역사와 애환의 기억들을 예술로 재생함으로써 존재 증명을 하는 게 팔복예술공장이다.
공간 곳곳에 음미할 만한 서사 있어
A동 로비부터 시작되는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재래식 변기가 하나씩 놓인 화장실 4칸이 나온다. 많게는 500여 명에 이르렀던 ‘썬전자’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변기가 달랑 4개뿐이었다니. 과거 노동 환경이 얼마나 거칠었나를 변기들이 구슬픈 톤으로 비가를 읊어 웅변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게 예술이고 예술인이다. 화장실 구역이 통째 전시 작품인 건 배설 욕구조차 참아가며 일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비애와,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표현한 작가들의 글과 벽화가 이곳에 난무하기 때문이다.
미술관들은 저마다 특유의 전시회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기획전을 펼침으로써 미술관의 독자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팔복예술공장도 마찬가지다.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 전시를 추구해왔다. 탄소중립 등 환경문제를 환기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대중의 관심을 산 전시회로는 ‘구스타프 클림트 레플리카전’을 꼽는다. 현재 2층 전시장에서는 ‘공존 : 호모 심비우스의 지혜’전이 진행되고 있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란 생물학자 최재천이 제기한 용어로 ‘공생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불편을 조금만 감수하면 얼마든지 생태적 전환을 할 수 있다는 게 최재천의 생각이다. 이번 기획전은 결국 환경문제를 화두로 던지는 셈이다. 24개국 8팀 77명의 환경예술 작가들이 참여해 다양한 시각언어를 선보이고 있다.
몇몇 작품을 볼까? 손정은의 ‘강요’는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인간의 탐욕을 힐난하는 설치 작품이다. 유리병에 닭의 실제 사체를 욱여넣은 작품도 있다. 엽기적이지만 통렬하다. 김순임은 대형마트에서 사온 식자재에서 채집한 씨앗이나 뿌리를 포장 용기에 심어 발아시킨 식물들의 정원을 보여주는 설치 작품 ‘홈플러스 농장 2002’를 전시했다. 김유정의 ‘소리 없는 산’도 식물 설치 작품. 뿌리가 없는 채로 공기 중의 수분과 양분만으로 생존하는 식물 수염틸란드시아에 뒤덮인 폐가전제품들을 산의 형상으로 조형했다. 문명 이전 혹은 이후의 공존과 상생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강현덕의 ‘아름다운 소멸’ 역시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이야기한다. 작가마다 선명한 환경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자연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소비사회의 광기에 사려 깊은 거부권을 행사한다. 자연의 생존권을 침탈하는 일상의 풍속에 예리하거나 유려한 반론을 제기한다.
A동에서 컨테이너를 엮어 공중에 설치한 통로를 따르자 B동 2층에 닿는다. 이곳엔 아동들을 위한 ‘이팝나무 그림책도서관’과 청소년들이 예술을 주제로 맘껏 이벤트를 펼칠 수 있는 ‘꿈터 마루방’이 있다. 1층의 내부와 외부 역시 예술 놀이터다. 흥미로운 건 B동 구역에서 비로소 손질과 땜질을 거의 하지 않은 폐공장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낡고 삭아 추레한 폐건물을 그대로 놔둔 채 디자인 요소로 살려냈다. 따라서 이곳에선 과거로 잠시 회귀한 듯 감정적 동요를 느낄 수밖에 없다. 반짝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상의 이방과 이면이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폐허란, 그 미련 없는 분위기란 차라리 하나의 유적이다. 새것과 날것으로는 좇아갈 수 없는 우수와 정취가 깊어 감정이입이 쉽다. 세월의 풍상에 누추하게 구겨진 저 오래된 사물이 뿜는 아련한 빛에 문득 직관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나여! 인간이여! 너의 몸을 스친 풍상은 한 조각 빛이라도 남겼더냐?
공간 전체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커피 생각이 난다. 마침 A동에 카페가 있다. 여공(女工) 이미지를 조형한 대형 인형 ‘써니’를 심벌로 조성한 찻집이다. 조명구도 탁자 일부도 공장 시절의 용구를 활용해 만들었다. 이곳은 ‘썬전자’ 노동자들이 407일 동안 전개한 노조사수투쟁의 센터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복예술공장 곳곳에 반추할 만한 기억이, 음미할 만한 서사가 담겨 있다.
강경 읍내에 들어서기 무섭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때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던 이름난 포구였고, 조선 말기에는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강경 장날이 있던 곳. 이제는 북적이던 그 자리에 그 시절의 낡은 건축물들이 세월을 지키고 빛바랜 표정의 골목 사이로 영화를 누리던 오래전의 시간들이 너울거리고 있다.
옥녀봉 아래 금강 물길 따라 흐른 세월
먼저 옥녀봉에 올라 강경의 풍경을 조망해보자. 강경 포구의 역사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좁다란 골목길을 오르면 나타나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봉우리. 당시의 통신 방법인 봉수대가 우뚝하다. 해조문 아래로 금강 줄기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파시가 2~3km 늘어섰고 고깃배가 빈틈없이 정박해 있었다는 포구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뿌옇고 조용하다.
옥녀봉에 올랐으니 비탈 낮은 절벽 위에 위치한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까지 들여다보고 내려와야 한다. 박범신 작가는 강경읍에서 익산으로 기차 타고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새벽밥 먹고 집을 나오면 저 아래 금강변 갈대밭에 들어가 하루에 책을 두 권씩 읽었다고 한다. 작가를 키워낸 옥녀봉 일대의 갈대밭과 강경은 여전히 옛 모습을 지닌 채 평온하다.
흐린 날, 읍내 길 걸어 근대 문화 속으로
강경 읍내는 느릿한 도보 여행으로 맞춤한 소읍이다. 골목을 오르고 그 거리를 구석구석 꼼꼼히 걸어서 다녀야 제맛이다. 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가면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님과 잠깐만 이야기해도 강경의 면면을 알기 쉽게 안내해주어 매우 유익하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등록문화재 제323호로, 1920년대 영향력 있던 조직체였지만 지금은 강경역사문화안내소 역할을 한다.
강경은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시대부터 200여 년간 무역의 허브였다. 서해와 금강의 넉넉한 물길을 따라 강경포구에 이르러 활발한 장마당이 펼쳐지던 100년 전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관공서, 은행, 교회 등이 들어서며 가히 강경의 전성기였다. 그중에서 도시의 중심 상권을 본정통이라 했던 그 거리에 남겨진 근대 문화를 찾아가 본다.
그 길 초입의 강경상업고등학교 교장 관사는 뾰족한 기와지붕의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문득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이 떠오르는 느닷없는 상상력이 발동되기도 한다. 이제는 폐가인 듯 너무 낡아서 수필처럼 맑고 순한 이야기 속의 풍경은 아니지만, 교장 관사를 둘러보는데 아사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케케묵은 옛 일본식 가옥이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강경의 볼거리와 근대 문화유산은 양손의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강경상고를 시작으로 1937년 준공된 등록문화재 제60호 중앙초등학교 강당과 스승의 날 발원지라고 하는 강경여중고가 그 길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다. 옛 사진에서나 보았던 듯한 1930년대 정도의 모습으로, 퇴색된 근대 문화의 흔적이 마치 릴레이식으로 이어진다.
강경읍 계백로에 위치한 붉은 건물의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강경의 번성했던 근대 문화를 상징한다. 지금은 강경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들어가 보면 복층처럼 낮은 위층까지 전시관으로 포함된다. 특히 당시 사용되었던 묵직한 은행 금고를 볼 수 있다. 건물 뒤편으로 새롭게 조성된 일제 강점기의 강경구락부는 마치 시대극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날씨조차 흐려서 은근히 옛 맛을 더한다.
강경의 근대 역사는 골목에도 켜켜이 묻어 있다. 걷다 보면 그 길 끄트머리 어느 모퉁이에 반듯하고 정갈한 자태의 2층 주택이 눈에 띈다. 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은 전통적인 한식 건축물이지만 1층과 2층 사이의 난간에 기와를 얹은 것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나이 많은 약방 건물이 동네 골목의 오래된 주택이나 낡은 적산가옥들과 잘 어우러진다.
고난을 감당해낸 선교의 성지, 강경
읍내 길을 걷다 보면 의외로 한국 초창기 선교 역사의 흔적을 자주 만나게 된다. 높은 건물은 별로 없고 예스러운 집들과 무수한 젓갈 가게 사이로 뾰족한 첨탑이 눈에 확 들어오는 강경성당, 배의 형상을 한 외관과 하얀 외벽에 붉은 지붕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도 가까이 있다.
한국에서 첫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기념비가 있는 구 강경 성결교회, 옥녀봉 아래 초가지붕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와 한옥의 강경 북옥감리교회 예배당, 100년이 넘는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는 강경 제일감리교회 등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답게 일제의 탄압 아래서 종교적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의 역사를 감당했던 증거를 곳곳에서 보여준다. 성지순례지로 강경이 손꼽히는 이유가 있다.
강경읍 외곽의 금강가에 자리 잡은 죽림서원은 대숲이 배경이다. 왼편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강학 장소인 임이정과 팔괘정이 나지막한 야산에 자연스럽다. 조선 시대 사설 교육기관인 죽림서원의 낮은 담장 돌계단에 서면 안이 훤히 보이고 대숲에서 세월의 바스락거림을 듣는다. 금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내려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좋다.
아름다운 미내다리 이야기
읍내를 조금 벗어나 강경천 제방길을 걸어보는 시간도 특별하다. 그 둑방길을 가다 보면 멀리서 둥그스름한 원형의 다리가 보인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년)에 석재만으로 만들어진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 시절 강경포구는 물길 따라 사통팔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느 해 큰 장마로 강경에 몰려든 상인들의 발이 묶였다고 한다. 비로 인해 그 길을 연결해주던 다리가 떠내려가고 오도 가도 못 할 지경. 강경포구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재물을 모아 다리를 만들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온다. 따뜻한 이야기와 어울리는 예술적 토목 건축술로 평가받는 다리다.
200년 전통의 곰삭은 감칠맛, 강경
강경을 입에 올리면 저절로 따라붙는 말이 젓갈이다. 잠깐만 둘러봐도 도처에 젓갈백화점과 젓갈상회 천지다. 강경 읍내에 위치한 젓갈 가게가 140여 곳이나 되고 전국 젓갈 유통의 60%를 차지한다고 하니 가히 강경만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주는 천하의 별미 젓갈 반찬.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과학적 숙성 방법으로 예전보다는 짠맛이 덜하고 고소하다. 간 김에 젓갈 한 병 사면서 잊었던 ‘덤’ 문화의 즐거움도 경험한다.
옛 영화를 간직한 골목골목마다 오래된 시간이 반기는 곳, 강경.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극의 장면 속을 걷는 기분이다. 덜 변하고 자취 없이 사라진 것들이 많지 않아서 그리움도 적을 것 같은 곳. 쇠락한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있는 옛 시간이 고스란한 지난 100년의 유장한 기록들. 강경젓갈만큼 곰삭힌 날들이 거기 있었다.
강경 근대 문화 거리와 젓갈 이야기
자동차 : 서울 기준 당일 여행. 경부고속도로 천안→천안논산 고속도로→논산시 강경읍 도착, 약 두 시간 소요
기차 : 서울역에서 강경역까지 무궁화호로 2시간 반 정도. 레트로 감성의 기차 여행이다.
주소 : 구 강경노동조합(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문의하면 근대 문화 여행 안내를 받을 수 있다. 041-746-5411
여행 코스 : 옥녀봉과 주변▷강경 읍내▷구 강경노동조합▷강경상업고등학교와 주변▷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구락부▷젓갈 가게▷강경성당과 성지순례▷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죽림서원▷미내다리
예고도 없이 찾아든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멈춘 듯 움츠러들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찾아 떠나고 싶을 때다. 여전히 여행은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갑갑한 일상에 갇혀 있는 자신을 가끔씩 끄집어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물결이 비단처럼 고운 바닷가
삼척을 대표하는 항구 정라진(汀羅津)은 말 그대로 비단처럼 잔잔하다. 그 수면 위로 비치는 바닷가 마을이 고요하다. 한때는 동해안 최대 항구이기도 했던 삼척항이다. 지금은 그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소박한 어촌 마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원도 지도에서 가장 아랫녘에 위치한 삼척, 한때는 동해를 대표하는 무역항이었다. 최고의 호황기였던 1970~80년대 수많은 어선이 항구로 몰려들었고, 노가리와 대구, 정어리, 오징어가 풍년이었다. 그 무렵의 삼척항은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는 밤새 잡아온 오징어 손질에 바빴고, 햇볕 좋은 나릿골 마을은 온통 오징어 건조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태백산지의 지하자원 덕에 시멘트 공장과 석탄을 원료로 하는 화력발전소까지 들어서서 돈이 넘쳐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도 있었다. 시멘트 공장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은 옛 영화가 사라진 소박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향수 어린 친근한 이름 정라항(汀羅港)은 여전히 어민들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정라항은 삼척시에서 2km 정도 거리에 있다. 마을과 가까이 맞닿아 있어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릿한 갯내음과 더불어 곰치국이나 싱싱한 활어회를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막상 그 거리에 들어서니 조용하다. 가끔씩 통통배의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고, 어선의 깃발이 바람에 살랑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활기찬 항구의 소란함이 다시 찾아오길 고대한다.
조용한 항구를 뒤로하고 입구의 말랑이슈퍼를 지나 나릿골 마을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춘 듯 한적하다. 그 길로 좁다랗게 비탈진 골목이 미로처럼 쭉 이어진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눈비 내릴 때는 어떻게 다닐까 걱정될 정도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나릿골은 예전엔 층층이 골은 낮지만 물이 풍부해서 습기를 받은 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나릿골에서 볼 수 없는 꽃이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나리꽃처럼 정감 어린 감성 마을로 변모하는 중이다.
지나가는 담벼락에 듬성듬성 벽화가 그려져 있어 심심치 않다. 몇 년 전부터 정라항 주변 나릿골을 ‘오감이 피어나고 웃음이 번지며 걷고 싶은’ 감성 마을로 조성해 언덕 마을에 표정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동해안 여행자들의 한 달 살기 등을 지원하기 위해 빈집 6채를 사들여 게스트 하우스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그 골목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숨차게 오르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나릿골의 작은 집 4채
나릿골의 작은 집 4채를 삼척시로부터 지원받아 교육관 1동, 전시관 및 체험관 2동, 외부 작가가 거주할 작가의 집 1동으로 리모델링한 미술관이 언덕 끝에 기다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유휴시설 활용사업 일환으로 탄생한 문화 공간이다.
나릿골의 좁다란 골목길 걷기도 여행의 색다른 재미지만, 미술관을 편히 가려면 산등성이까지 자동차로 갈 수도 있다. 차량 통행이 어려울 만큼 비좁았던 길이 도시재생사업으로 조금 넓어졌다. 걷기가 용이하지 않을 경우엔 택시나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으니 누구나 가파른 그 언덕 끝까지 오를 수 있다.
골목을 돌고 돌아 오르는 길에는 잘 가꾸어진 작은 카페와 아기자기한 시설들이 소소하게 자리한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오면 작은 공원이 있을 뿐 주변 공터는 한산하고 깔끔하다. 요즘 많이 알려진 다른 벽화 마을처럼 예쁘거나 특이한 카페, 또는 포토존 같은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원하건대 더 이상 부대시설을 늘리지 말고 지금의 단순함을 유지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망대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 가슴이 뻥 뚫린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 속에서 머릿속이 청량해진다. 저 멀리로 정라항의 잔잔한 물결이 비단처럼 살랑거린다. 소박한 도시 삼척과 시멘트 공장을 감싸 안은 봉황산의 능선이 부드럽다. 마을 전체가 미술관처럼 보인다. 산언덕 드문드문 알록달록한 색감의 지붕들 사이로 그들의 애잔한 삶이 엿보이고, 텃밭에는 보송보송 파꽃이 피어났다.
미술관은 조붓한 골목길을 따라 몇 걸음 더 내려가야 한다. 길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뉘 집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바닷가 산동네, 그 올망졸망함이 문득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군데군데 빈집들이 보인다. 마실을 간 것일까. 나릿골을 두고 먼 곳으로 떠났을까.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정라항 그리go 작은 미술관’. 나릿골의 감성과 바닷가 마을이 만들어낸 멋진 소통의 공간. 1전시관과 2전시관은 하얀 담장을 두고 몇 걸음 떨어져 있으며, 앞면이 모두 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어 바다와 마주한다. 그리고 전시 작가가 머물 수 있는 작가의 집이 전시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신선한 물빛 감성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더 멋질 것 같은 곳.
바이러스를 피해 방구석만 지키기에는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겨울이었다. 정라진 항구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향수 어린 그 시절의 그리움에 잠깐 젖어보는 것도 괜찮다. 해풍에 오징어가 말라가는 자연 속의 건강한 풍경으로 수분을 채우고 위로받는 하루, 기꺼이 만들어볼 일이다. 바닷길과 감성 마을 골목을 천천히 올라 다다른 작은 미술관에서 버석하던 일상에 감성을 채우고 에너지를 얻는다.
어디쯤엔가 와 있을 봄, 삼척항 호젓한 산등성이에 올라 바라보는 비단 물결 반짝이는 바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하루다.
주변 볼거리
여행 중에 잠시 휴식을 주는 곳, 죽서루
동해가 아우르는 지역에서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는 죽서루(竹西樓). 시간 여행하듯 삼척 읍성 성곽로를 따라가다 보면 나타난다. 누각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삼척시 서편으로 오십천(五十川)이 절벽 아래 흐른다. 관동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 시내에 있어서 삼척 주변을 여행 중이라면 잠시 들러 쉬어가기 딱 좋다. 죽서루는 송강 정철의 가사에 나오는 터이기도 하다.
평온한 마음의 휴식, 성내동 성당
삼척의 성내동 성당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천주교 발전사에 의미 있는 곳이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진 야고보 신부의 순교 기념비와 기념 건물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피살된 진 야고보 신부의 족적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성전을 한 바퀴 돌면서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가지고 성당 주변 풍경에 잠겨보는 것도 특별하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도경리역
삼척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도경리역이 있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그곳에 가려면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야 한다. 예전엔 아주 깊은 산골이었을 듯싶다. 삼척시와 동해시의 경계에 위치하는데 두 도시는 이웃 마을처럼 아주 가깝다. 1939년에 지어진 도경리역은 현재 영동선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역사(驛舍)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98호다. 일제강점기에 자원수탈의 도구로 역사나 터널을 만들었는데 이 역도 그중 하나다.
바다와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서면 그립다. 인천의 바다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낮은 곳이거나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바라보아도 자신을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다. 인천을 거쳐간 근대 역사를 더듬어가며 그리운 바다를 가슴에 품고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거리를 걸으면 하루짜리 최고의 힐링 여행이 완성된다. 천천히 걸어도 반나절이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개항기 역동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이국적 풍광의 인천개항누리길을 걸어보자.
코로나 시대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여행 기분은 제주를 가더라도 비행기도 타고 면세점도 들러야 제맛이다. 전철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인천을 가는 여행은 비행기 타지 않고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겨울 오후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인천역은 서울시청역에서 1시간 9분이면 도착한다. 금방이라도 서해가 펼쳐질 것 같지만 지하철 1호선 종착역에서 내리니 차이나타운임을 알리는 황금빛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서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화교뿐만 아니라 여러 바다를 거쳐 건너온 사람들도 있다. 인천항은 조선시대에 근대 문물을 처음 받아들인 항구였다.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연한 건축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특유의 현란한 붉은색 간판이 거리를 원색으로 물들인다. 반면 일본인 거리는 단색의 정돈된 이미지가 완연하다.
자장면 맛은 변함이 없지만
계단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가면 좌우의 석등이 다른 생김새로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 양식을 보여준다. 계단 끝부분에는 공자 상이 자리 잡고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유로운 이동이 방해받는 시대, 서해의 겨울바다를 보려면 차이나타운을 천천히 30여 분 정도 걸어 다니다가 자유공원으로 올라야 한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던 이 지구는 지금 조용하다. 간간이 마스크를 끼고 방한 장비로 중무장한 산책자들만 보일 뿐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간신히 눈만 빼꼼하다.
평소에는 식사시간이 되면 긴 줄이 이어졌다는 유명한 중화요릿집도 점심시간인데 홀이 한산하다. 자장면의 맛은 변함이 없지만, 풍경은 어쩐지 낯설다. 과장해서 말하면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다. 차이나타운 상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의 개점휴업이다. 코로나 사태뿐만 아니라 영하 11℃의 한파도 한몫한 듯하다. 이 모든 현상은 전 지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서 비롯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문제가 발생하면 답을 구해 슬기롭게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인천은 최초에 대한 기록이 꽤 있다. 1882년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체결지, 이듬해 해관 설치, 1884년 청관(淸館)의 기원과 자장면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교회, 호텔, 공원, 전환국, 철도, 우체국 등 한국 근대사의 여명을 장식한 도시다.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인터넷과 디지털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근대의 전 지구적 접속은 항구가 중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이 선구적 위치를 점했다. 이동, 변화, 융합, 그리고 창조가 가능했던 국제도시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 지금은 항구보다 세계적 허브공항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바다를 통해 문화는 교류되었고 이 도시는 교류 초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항도시 인천이다. 개항 이후 세계와 처음 만난 도시가 인천이고 이후 천지개벽의 역사가 펼쳐졌다.
운요호사건으로 일본과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1883년에는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을 개항하기에 이른다. 속속 외세가 당도한다. 한국 화교의 태동은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시작됐다. 화교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청나라는 3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4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 남방 출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청국 조계지는 상징적인 조세는 냈으나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경찰서, 감옥, 신문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중국이었다.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의미를 지닌 사당 의선당(義善堂)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항해의 수호 여신으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과 같은 마조신을 모시고 있다. 화교들이 터를 잡으면서 중국 문화가 인천으로 유입되었고 그렇게 자장면과 같은 중국적인 것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북적이며 향불이 끊임없이 타올랐던 의선당의 향불도 코로나 시대인 현재는 꺼져 있다.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
일본은 자본의 침탈을 개시한다. 일본의 조계지였던 개항장 일대는 현재 역사 문화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적산가옥이 즐비한 일본풍 거리다.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는 1882년에 건립된 일본 영사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위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장소였다. 해가 잘 들고 산을 배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선점했다.
구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1888년에 건립되었다. 인천의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해운업을 독점했고 쌀과 잡화를 실어 나르는 기선을 운영했다. 인천은 대외 항구뿐만 아니라 강화를 거쳐 노량진에 이르는 국내 운송까지 겸하는 요충지였다. 일본 해운회사의 본점 또는 지점이 설립되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개항 초기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출장소로 출발했고 1883년에는 인천지점으로 승격해 본격적인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주로 사금과 금괴의 업무를 봤다. 이후 해관세에 대한 업무도 개시했다. 화폐로 사용했던 은폐에 대한 업무도 진행했다. 개항 전에 상평통보나 당오전을 사용했던 조선은 개항 후 돈의 가치가 하락하자 일본의 자금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인천과 경성에 전환국을 설치해 일본과 같은 신식 화폐도 발행한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 은행이 제58은행이다. 이후에는 1은행과 18은행에서도 업무를 같이 수행한다. 근대식 금융권이 최초로 인천에 밀집돼 있었다는 것,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근대가 태동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인천은 자본가, 은행가 상인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무역은 일본이 앞섰고 정치 외교에서는 청나라가 우세한 분위기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앞서기 시작한다. 외국 자본의 횡포로 조선의 소가죽, 호피, 쌀 등이 헐값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개항 이전의 인천은 200여 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황무지에 불과했다. 이곳에 일본 세력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의 쇄도가 이어지며 외국인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조합을 만들어 협약을 맺고 건축을 했다. 차별을 두는 지배자들의 속성을 잘 보여줬다.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도 변화를 맞는다. 은행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초기 일본은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우선 경제적 이익에 집중했다. 따라서 은행의 침투가 활발했다. 건축상의 변화는 벽돌을 쌓는 신기술에 있었다. 인천 개항장에 벽돌 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의 은행 건물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졌는데 멀리서 보면 돌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일본도 기술 초기 단계여서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화되기 이전이었다. 나무로 전환된 신고전주의 양식이 인천에 많이 나타났다.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하부 2m 정도는 화강석이고 상부는 벽돌, 출입구는 석재로 축조해 건물을 지탱하도록 했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청일 조계지로 형성되었던 지역은 1910년 일본 상인의 거주지로 바뀌었다. 일본은 인천 일본인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해 홍예문까지 뚫는다. 1906부터 1908년까지 3년간 이어진 공사였다. 돌산을 폭파하느라 많은 희생을 내고 준공도 늦어졌다. 일본 명칭은 아나몬[穴門]인데 조선에게는 혈문(血門)이다.
서양인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는 각국 외국인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된 시설이었다.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이다. 전망이 빼어난 곳에 서향으로 지었다. 인천 앞바다로 열려 있는 구조다. 개항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영사관, 무역회사 등 서양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머무는 등 일제강점기 전의 개항 시기에는 외국인으로 북적댔다. 조계지가 철폐될 때까지 중요한 외교 장소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조수간만의 차로 무역항으로서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를 건설한다. 조선과 세계를 잇는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조수간만의 차를 이겨냈다. 백범 선생도 이때의 작업에 강제동원됐다고 백범일지에서 고백했다.
개항장에는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이 있다. 역사적 상처도 있다. 이국적 공간이자 부인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긴 안목으로 반면교사로 삼아 효율적 공간으로 꾸려야 할 일이다. 문호개방으로 인천은 신문물을 처음 접했고 근대과학 산업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새로운 문명을 만나 근대도시가 된 인천에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아픔과 슬픔 속에서 140년 전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국제도시다. 스스로 변하지 못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개화시기보다 더 변화가 심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바람이 서늘해지자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 지인들과 서울 곰탕 맛집 정보를 공유하다 멀리 나주곰탕 이야기로 흘렀다. 꿀꺽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주곰탕, 돼지국밥처럼 향토색 강한 음식은 타지역에서 먹으면 왠지 그 맛이 안 난다. 곰탕 먹으러 나주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지인들이 숟가락을 얹었다. “나주곰탕 포장 부탁해.” 말은 이래도 그들도 안다. 나주곰탕은 나주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을.
3味로는 부족한 맛의 고장
나주가 호남 물류 중심지였던 호시절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나주평야와 뱃길 교통이 편리한 영산강을 품은 지리적 여건 덕이었다. 100여 년 전 영산강 나루터에는 특산물과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화가 ‘나주 3味’라 불리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우시장에서 나오는 머리 고기와 뼈, 내장 등을 푹 고아낸 장터국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부터 조선시대 관아인 금성관 앞에 큰 장이 섰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구경꾼들이 밥에 고깃국을 말아 후루룩 먹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소 부산물로 국을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시초가 무엇이든 맛있는 곰탕을 지금 시대에도 맛볼 수 있으니, 식탐 많은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주 사는 지인이 “나주에 오면 곰탕보다 홍어를 먹어야죠” 하며 홍어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이다. 나주 3味에 연탄돼지불고기까지 야무지게 맛볼 생각이었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으로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주행 KTX를 타면 아침 식사로 곰탕을 먹을 수 있다. 나주역에서 구도심의 나주곰탕거리까지는 차로 약 5분 거리다. 많은 곰탕집 중에서 주로 가는 곳이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이다. 하얀집은 개업한 지 110년이나 되었고,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은 60년 정도 되었다. 동네 주민에게 최고 맛집을 물어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어느 집에서 먹어도 맛있어요. 다만,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서울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고, 나주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요” 한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주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국물 색이 맑다. 나주곰탕과 설렁탕 모두 소뼈와 고기를 푹 고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나주곰탕은 소뼈를 적게 넣고 양지나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밥은 말아져 나온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에서 펄펄 끓은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몇 차례 토렴한다. 밥알에 짭조름한 간이 배고, 뚝배기가 뜨끈해지면 살코기, 달걀지단, 대파를 올려 손님상에 낸다.
곰탕 맛은 국물 빛깔처럼 맑고 개운하다. 다진 양념을 풀면 칼칼해진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기는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곰탕 맛을 북돋는 김치도 중요하다. 숟가락 위에 밥, 고기, 잘 익은 배추김치 또는 깍두기를 올려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노안집의 배추김치는 감칠맛과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김치 담글 때 여러 가지를 섞은 잡젓을 넣어요. 봄배추를 싹둑싹둑 썰어서 잘 익힌 김치가 최고 맛있지요. 봄에 또 오세요.”
곰탕 먹고 나주읍성 산책
곰탕거리 일대에는 고려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목’의 사적지들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객사이자 나주목의 중심 관청이었던 금성관,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의 살림집 목사내아, 고려시대 때 세운 나주향교 등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려시대 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문과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993년부터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 2018년 완공해 나주읍성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최근 나주향교 옆에 ‘39-17마중’이 들어서 구도심에 활기를 더한다. 39-17마중은 카페&와인바, 게스트하우스,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나주 의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난파 고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집을 한 젊은 부부가 매입해 ‘1939년의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라는 뜻을 지닌 39-17마중을 조성한 것이다. 부부의 눈에는 한·일·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한 근대 건축물과 마당의 아름드리 금목서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영화 세트장 같은 난파 고택은 게스트하우스로, 마당의 큰 창고는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는다. 향교 담장이 카페 창가에 앉아 나주산 농산물로 만든 음료를 마시노라면 진짜 나주 여행하는 것 같다.
홍어 튀김 먹을 줄 알아야 홍어 고수
“홍어앳국 드셨나봐요.” 택시기사가 딱 알아본다. 홍어앳국 첫 경험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만든 홍어앳국을 드셨네요. 홍어 숙성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손님이 드신 앳국이 가장 많이 삭힌 등급 같아요. 나주 사람들은 그 정도 삭힌 걸 좋아해요. 앳국에는 4~5월에 나는 여린 보리 순을 넣어야 제맛이 나죠”라며 거든다.
홍어앳국은 홍어 뼈 육수에 된장을 풀고, 삭힌 홍어 내장과 보리 순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홍어 애는 홍어 간이다. 생 홍어 애는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삭힌 홍어 애를 넣은 홍어앳국은 암모니아 향이 매우 강하다. 알싸한 냄새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후각이 조금 마비되면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삭힌 홍어가 나주의 별미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왜구 침략을 피하고자 흑산도 사람들을 나주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다. 흑산도 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배에 싣고 며칠 동안 나주로 건너오는 사이 생선들이 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한 생선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맛있는 생선은 홍어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영산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산포는 곰탕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영산포 선창가에 40여 개의 홍어 식당과 홍어 판매장이 자리해 있다. 거리에서부터 홍어 삭히는 냄새가 풍긴다. 홍어요리 전문점에서 홍어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삼합, 홍어튀김, 홍어무침, 홍어찜, 홍어전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강해지므로 차가운 음식부터 나온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전, 홍어찜, 홍어앳국, 홍어튀김 순으로 먹어야 삭힌 홍어 맛에 차차 적응할 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홍어튀김은 홍어 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게 굴욕감을 안겼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 입천장이 까져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심 가득한 나주 4味 연탄돼지불고기
영산포 선창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구진포 장어거리가 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던 곳이라 민물장어가 흔했다. 당시에는 장어 식당 열댓 채가 성업했다. 지금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 장어거리의 명맥을 유지한다. 구진포 장어 원조집으로 알려진 신흥장어도 이제는 타지역 장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내력의 깊은 손맛은 여전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주 3味에 별미 하나를 추가한다면 송현불고기집의 연탄돼지불고기를 손꼽는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맛집이다. 8년 전 송현불고기집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 허름한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놀랐고, 주인이 연탄불 앞에 앉아 석쇠 위 삼겹살을 쉴 새 없이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고기 맛이 바뀌었을까봐 걱정했는데, 고기 표면에 기름이 번드르르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은 그대로다. 가위로 고기를 직접 잘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싼값에 배불리 한 끼 먹었으니 가성비와 가심비를 다 잡았다.
◇ 이색 명소 & 맛집 ◇
나주목사내아(금학헌)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 최고 수장인 목사의 살림집이다. 건물 이름이 금학헌이다. 1825년에 건립된 ‘ㄷ’자형 전통한옥으로서 내아 1동과 행랑채 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 의복 무료체험과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성정을 베푼 목사들의 이름을 딴 온돌방에는 옛집에 걸맞은 전통가구와 침구가 갖춰져 있다. 나주시에서 운영해 숙박료가 저렴한 편이다. 나주시 금성관길 13-8, 09:00~18:00 관람료 무료, 061-332-6565
영산강 황포돛배와 영산포등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가 사라졌다가 30여 년 만에 관광용으로 부활했다.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문화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왕복 운항한다. 영산포등대는 내륙 하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등대 기능을 상실했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나주시 등대길 80, 10:00~17:00 월요일 휴무, 영산포 선착장 매표소 061-332-1755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와 도래한옥마을 산포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는 명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다. 수목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풍산 홍 씨 집성촌인 도래한옥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다.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23-7, 09:00~17:00 입장료 무료, 061-336-6300
백제고도 부여에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백제 유적지 말고는 이렇다 할 관광 콘텐츠가 없어 아쉬웠다. 2년 전 규암면 규암리 자온로에 ‘자온길 프로젝트’라는 마을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 첫 단추가 독립서점 ‘책방세간’이었다. 호기심을 안고 찾아간 시골 책방은 꽤 신선했다. 지금 그 마을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 다시 가봤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을 재생 프로젝트
부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 규암리로 향했다. 시내에서 차로 고작 5분 정도 떨어진 마을인데 딴 세상인 듯 고요하다. 규암 나루터 인근 골목에서 ‘책방세간’을 다시 만났다. 2년 전 모습 그대로 있어주어 고마웠다. 시골에서 책방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책방 주인도 그런 사정을 잘 알 텐데, 이곳에 책방을 연 이유가 궁금했다.
자온길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하고 진행하는 박경아 씨는 “부여에 제대로 된 서점이 없어요. 규암리에 가장 필요한 문화공간이 책방이라고 생각했어요. 책방세간이 전통문화를 알리고, 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그가 시골집에 책방을 차린 사연은 규암리의 전성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규암리는 해방 전후만 해도 20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규암장터가 열리면서 규암나루터에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마을 거리에는 선술집과 여관이 즐비했다. 극장과 백화점도 있었다. 규암리의 전성기는 1968년 백제교가 놓이면서 막을 내렸다.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나루터가 제구실을 못하게 됐다. 상권은 부여읍으로 옮겨갔고,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붐비던 장터 국밥집, 부여에 처음 세워진 극장, 양조장 등이 폐허가 되었다. 집주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집도 늘어갔다.
약 20여 년 전 부여전통문화대학교 재학생이었던 박 대표가 규암리의 방치된 근대건축물들을 눈여겨본 것이 자온길 프로젝트의 바탕이 됐다. 자온길 프로젝트는 규암면의 버려진 공간들을 개조해 전통문화 예술마을로 꾸미는 마을재생사업이다. 빈집과 상가들이 차근차근 전통공예 작가의 작업실과 쇼룸, 로컬푸드 레스토랑, 카페, 책방, 한옥 스테이, 북 스테이 등의 문화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구심점이 책방세간이다.
임 씨네 담배 가게가 책방이 된 사연
책방세간은 원래 ‘임 씨네 담배 가게’로 불렸다. 담배와 잡화를 팔던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 있는 건물이었다. 책방으로 개조할 때 외벽과 내부 구조물을 최대한 헐지 않았다. 천장 위에 숨어 있던 서까래와 내벽 속 나무 문을 찾아내 복원했다. 임 씨가 잡화를 팔던 공간은 책방세간의 메인 공간이 되었다. 담배를 팔던 옆 공간에는 책장과 테이블을 두었다. 책장은 사실 담배 진열장이다. 벽면에 은박 벽지를 발라 담배 속지를 표현한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카운터는 지붕을 덮었던 함석판과 담배 가게의 금고로 꾸몄다.
임 씨 가족의 거주 공간은 카페로 개조했다. 벽장이 있는 작은 방에는 동화책과 전통 놀이 도구를 넣어 키즈존을 만들었다. 이 방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벽장에 숨어 책을 읽는다.
책방세간만의 특징이라면 전통공예가 대중의 일상에 시나브로 스며들길 바라는 책방지기의 마음이 책방 구석구석에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공예·디자인 서적의 비중이 높으며, 책과 전통공예품을 함께 배치해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청자 잔에 말차라떼 주세요”
책방세간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전통공예품 숍 ‘편지’가 문을 열었다. 우체국이었다가 전파사로 사용됐던 건물을 고쳐 생활소품, 의류, 생활도자기 전시·판매장으로 사용한다. 도자기 판매장 유리창에 붙은 ‘전파사’ 글자가 그 흔적이다. 삼각 지붕을 얹은 회벽 건물은 단박에 적산가옥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규암리에는 일본이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여지소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수탈한 쌀을 규암나루터에서 배에 싣고 백마강을 건넜다고 한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편지’를 에워싼 아름드리 밤나무, 보리수나무, 향나무는 싱그럽게 자랐다.
카페 수월옥의 사연도 만만찮다. ‘빼어난 달’이란 뜻을 지닌 수월옥은 술과 음식을 팔던 요정이었다. 한 세대를 건너 카페 수월옥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가와 다름없던 건물이 부여 핫 플레이스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을 주민들은 공사를 하다 만 것 같은 건물에 손님들이 많으니 신기해한다. 수월옥은 건물이 두 채인데 한 채는 내벽 콘크리트를 드러내 모던한 분위기를 살렸고, 한 채는 한옥 느낌을 살려 좌식으로 꾸몄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가구와 소품은 색동무늬 방석, 소반, 골무, 도자기 등의 전통공예품을 사용했다.
수월옥은 차 주문법도 독특하다. 선반에 놓인 청자, 백자, 진사, 분청사기 등의 찻잔을 고를 수 있다. “청자 잔에 말차라떼 주세요” 하고 주문하니 바리스타가 말차라떼 빛깔과 비슷한 청자 잔에 차를 내준다. 꽃봉오리 모양 청자 잔과 말차라떼의 조화가 찰떡궁합이다. 수월옥은 SNS 사진 맛집으로 소문났지만, 사실 차 맛집이었다.
활기를 되찾는 규암리
옛날 국밥집은 ‘웃집’이라는 이름의 독채 숙소가 되었다. 전통공예품 쇼룸과 숙소가 결합한 형태로 꾸며졌다. 한옥스테이 이안당은 일본식 건축 양식을 접목한 100년 된 근대 한옥이다. 옛 자온양조장 건물에 딸린 살림집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너른 마당에는 깊은 우물이 있고, 마당에서 양조장 굴뚝이 보인다. 주인이 사용했던 자개장, 경대, 항아리, 도자기 등의 세간살이가 세월을 안은 채 그대로 있다.
오래된 건물은 고쳐 사용하는 것보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게 수월하다고 한다. 박경아 씨에게 도시 재생 방식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옛집을 허물고 똑같이 다시 짓는다고 해도 그 옛집이 아니잖아요. 세월을 재현할 수 있나요. 문화재를 똑같이 만들 수 없듯 옛집도 그런 것 같아요. 비록 문화재적 가치가 낮은 서민들의 근대 가옥이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모두 역사이니까요.”
자온로를 산책하며 옛것의 가치와 도시 재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도시 재생은 죽어가는 건물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해 생명을 이어주는 작업이 아닐까. 쇠락했던 규암리가 사람들의 온기로 다시 따듯해지길 기대해본다.
◇ 이색 명소 & 맛집 ◇
궁남지 궁남지(사적 제135호)는 1400여 년 전인 백제 무왕 때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연못 둘레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중앙에 신선이 노니는 산을 형상한 섬을 만들어 왕궁의 정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궁남지는 무왕의 잉태지였다. 여름에는 연꽃이 가득 핀 풍경이 장관이며, 야간산책 명소로도 유명하다. 연못 중앙의 정자와 다리에 조명을 켜놓는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4시간 개방, 입장료 무료.
부여서고 책방세간 바로 옆에 있는 수공예품 편집숍이다. 책방처럼 여러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부여서고’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동남아에서 수입한 라탄소품, 가방, 모자, 의류, 머플러, 도마, 문구, 조명 등의 생활 잡화와 천연염색 소품을 판다.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상품도 있다.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84
장원막국수 구드래나루터 근처에 있는 오래된 가게다. 허름한 시골집의 작은 방에 앉아 막국수를 먹노라면 할머니 댁에 놀러온 듯하다. 메뉴는 메밀막국수와 편육 두 가지뿐이다. 메밀막국수 면발은 조금 가늘고 쫄깃하다. 시원한 육수는 새콤달콤한 편이다. 돼지 목삼겹살로 만든 편육에 막국수를 감아 먹어보길 권한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62번길 20, 11:00~17:00, 메밀막국수 7000원
여행은 떠나는 것이다. 자기에서, 익숙함에서, 나의 성(城)에서. 이것이 여행의 첫 번째 의미다. 이런 떠남의 관성을 가지고 있는 여행은 나에게 세상의 숨결을 들려준다. 그래서 여행은 내 삶의 보물지도다.
여행에서 가끔 마주치는 어둡고 그늘진 자리는 그대로인 채로 그 자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을 때 아름다운 곳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그늘과 친밀해져야 자아에 더 익숙해지고, 더 강해진다. 우리 근대사에서 수탈의 아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 목포가 그렇다.
목포는 고즈넉하면서도 생의 치열함과 남도의 향기가 섞이지 않고 각각 공존하는 건강한 샐러드 같은 도시다.
유달산에서 본 굽이진 영산강에서는 망국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바람에 펄럭이는 돛과 노 젖는 소리에 장단 맞춰 사공이 부르는 뱃노래 ‘목포의 눈물’이 들려온다. 구슬픈 가락의 리듬이 애잔하고 참 서럽다.
유달산 주변으로 역사의 어둠이 남아있는 곳들이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
목포 최초의 서구적 근대 건축물로 1900년 일본 영사관으로 지어져 광복 이후 관공서, 도서관, 문화관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현재는 전시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영산로 29번길 6
◇ 목포근대역사관 2관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으로 문을 연 착취의 최첨병 역할을 하던 곳이다. 현재는 일제 강점기 사회상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이곳은 바다를 매립한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주 거주지였다. 주변에 아직 일본식 가옥 형태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목포시 번화로 18
◇방공호 대피 시설
목포근대역사관 1관 뒤편에 있는 당시 미군의 공습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방공호. 동굴 안에는 당시 징용으로 공사에 동원되어 수탈당하는 모습을 인형으로 전시해 놓았다. 지난 시절 아픔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주는 생채기다.
해지는 풍경을 좋아한 어린왕자는 슬플 때마다 해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하루에 마흔네 번이나 해지는 구경을 갔다. 유달산 주변에서 느꼈던 아픔이 하찮게 여겨질 정도의 주황빛 노을이 목포에도 있다. 바다와 섬이 만나는 선에 떨어지는 태양은 아픔을 더 큰 슬픔으로 치유해주는 명의다.
바다가 보이는 해변공원은 목포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행복 바이러스의 진원지다. 평화 광장에는 포토존 ‘LOVE GATE’가 앙증맞은 모습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앞 잔잔한 바다 위 워터 스크린에서는 겨울철 과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곤 매일 세계 최대의 부유식 바다 분수와 음악, 레이저 빛이 어우러진 초대형 해상 음악 분수쇼가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276대의 분사용 노즐과 96대의 분사용 펌프가 작동하여 70M 높이까지 분수를 쏘아 올린다. 뿐만 아니라 관람객과 함께하는 사연소개, 프로포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여행자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다.
해안을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걷다 보면 ‘천연기념물 500호’인 갓바위를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이 갓을 쓰고 서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는데, 걸어가서도 볼 수 있도록 보행교를 바다 위에 설치해 놓았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세 가지 종류의 각기 다른 결을 가진 공간이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생의 공간, 지나온 시간을 증언해주는 치유의 공간,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창조의 공간이다. 목포의 미래를 위한 공간은 해안 길을 따라 조성돼있다.
◇ 국립 해양유물 전시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바다 속 수중문화유산을 발굴하여 전시한 곳이다. 해양문화체험 등 종합적인 해양문화전시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무료관람이며, 매주 월요일이 휴관일이다.
제1전시실: 서해와 남해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고려시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제2전시실: 중국 무역선(신안선)과 동아시아 해상교역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제3전시실: 어촌 민속을 중심으로 전시
제4전시실: 한국의 전통 배를 주제로 한 배 전시
◇ 목포자연사 박물관
7개 전시실을 갖춘 지구의 자연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전시관 앞 공원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어 각 계절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지친 몸을 달랠 수 있다. 여기의 입장권으로 옆에 있는 문예역사관, 생활도자관 전체의 관람이 가능하다.
아이들과 동행하는 여행이라면 이곳 문화의 거리에서 하루를 보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추천 맛 집
해빔
해변공원 길 건너편에 해초비빔밥이 있다. 이곳에서 멍게해초 비빔밥, 낚지해초비빔밥 등 각종 해초비빔밥을 맛볼 수 있다. 맛의 깔끔함과 해초의 싱싱함이 그만인 곳이다. 목표시 미항로 83
돌집 식당
누구나 한번쯤은 남도식당의 푸짐한 반찬과 인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근래에는 남도 식당들의 음식도 바닷가 특유의 짠맛이 많이 순화되어 누구의 입맛에나 잘 맞는 편이다. 건어물거리와 종합수산시장 근처에 있는 목포식 백반집이다. 남도식당의 문화와 음식이 가진 장점을 경험할 수 있다. 목포시 복만동 2-38
멀리 가지 않아도 소소한 풍경을 즐기며 심신을 가다듬어 주는 곳, 세상의 소음을 잊고 평온한 마음으로 한 나절 보낼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마곡 서울식물원의 겨울
서울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크고 작은 수목원이나 식물원이 100개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도심 근교나 수도권을 벗어난 외곽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지난해 5월에 개장한 '서울식물원'은 지하철이나 버스로도 쉽게 가볼 수 있다.
오래전 온통 논밭이었던 때와는 달리 요즘 거길 가면 공항 가는 길 일대의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 마곡 지구로 형성된 그 지역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치솟은 빌딩들이 이미 가득하다. 그곳엔 도시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어느덧 마곡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는 '서울 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미세먼지의 공습과 겨울 추위가 외출을 망설이게 할 때 언제라도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지하철 9호선 마곡나루 역에 내리면 지름이 약 100m에 달하는 원형 온실의 멋진 모습이 눈앞에 떡하니 서 있다. 관람객들이 자연스러운 동선으로 순환하면서 입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도록 설계된 건축물의 부드러운 표정이 압도한다. 미래도시를 연상케 하는 식물원의 디자인이 얼핏 생명체의 구조를 느끼게 한다.
지구 반대편을 여행하듯 걷다
식물원은 열린숲, 주제원, 호수원, 습지원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입구의 열린숲의 안내 서비스를 받는다. 온실 외부로는 한국 정원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주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들길을 산책하듯, 아이들의 놀이동산처럼, 사람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거기 있다.
온실로 들어가면 열대식물원과 지중해식물원이 세계 12개 도시 정원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최초의 보타닉 공원이다. 원형 건물의 벽과 천장을 그물 모양의 철제 프레임과 유리로 마감해 하루 종일 햇빛이 가득 들어온다. 시야가 환해서 어느새 마음도 밝아진다.
열대 식물원은 적도 근처 월평균 기온 18°C 이상인 지역으로 하노이, 자카르타, 상파울루, 자카르타, 보고타의 식물을 볼 수 있다. 밖은 한겨울인데 벗은 외투를 팔에 걸치고 산책하듯 걷는 관람객들이 흔하다. 이 겨울에 지구 반대편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식물들을 이곳에서 여행하듯 걸으며 즐긴다.
후끈한 열대관에서 지중해관으로 넘어가면 기온이 확 다르다. 이어지는 지중해 식물원은 바르셀로나, 샌프란시스코, 로마 등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풍부하고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가득하다. 정글처럼 숲을 이루거나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하다. 로마의 올리브나 싸이프러스, 아마존을 방불케 하는 숲, 낯선 이국의 식물들이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특히 지중해관 스카이워크 입구 쪽에 우뚝 서 있는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바오밥 나무가 인상적이다.
바오밥 나무를 지나 스카이워크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다양한 각도에서 식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숲 위를 걷듯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내려다보는 온실의 푸르름이 평화롭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들이 이국적인 식물들을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를 누려보는 시간이다.
이곳에서 옆문으로 나가면 식물문화센터가 이어진다. 로비 한가운데 시선을 잡아끄는 녹색 샹들리에. 정찬부 작가의 작품 ‘피어나다’가 생동감 있게 밝고 힘을 느끼게 하는 초록 색감이 싱그럽다. 이밖에도 식물전문도서관, 씨앗도서관, 편의 시설이 있어서 궁금한 것을 더 살펴보거나 편안하게 쉴 수도 있다. 초록의 식물 속에서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연인들이나 체험 프로그램에 몰두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이쁘다.
일제강점기 근대문화유산 마곡 문화관
식물원 밖 뒤편 쪽으로 '어린이정원학교'와 '마곡 문화관'이 보인다. 마곡문화관은 예전에 가뭄이나 대홍수에도 안정적인 논농사를 위한 물관리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건립되었고 등록문화재 363호로 한국 근대 산업 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로 보존가치가 크다.
한때 용도 폐지되었던 것을 복원하여 1층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 지하엔 배수펌프관이 있다. 1928년 지어진 일제강점기의 펌프장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가 되고 있다. 근대문화적 건축물의 분위기 때문에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낮보다 아름다운 식물원 호숫가의 밤
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싼 호수의 야경은 더없이 좋은 산책로다. 식물원을 감싸던 노을이 지고 가로등이 켜지면 고요함과 한적함 속에서 고품격의 산책을 제공한다. 신비로운 조명이 호수에 반영되고 영화처럼 그 길을 걷는 맛을 즐겨볼 일이다. 이른바 마곡의 핫플로드다.
멀리 가지 않아도
“훌쩍 떠나고 싶어”고 종종 이런 말을 한다. 그렇게 일상에서 멀찍이 벗어나면 과연 자유로운 영혼이 이입되고 막연하게 그려오던 신기루에 다가갔을까. 더러는 여행 폐인처럼 무수한 날들을 멀리 떠나 있기도 한다. 그런 모습이 때로 감흥 없을 때가 있다. 과연 그런 날들이 어떤 시간을 제공했을지 생각해 본다.
머나먼 곳을 찾아가는 일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다만 일상에서 내 안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편안함과 관대함이 온몸으로 퍼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값비싼 티켓으로 외국의 이름난 성지나 낯선 곳을 누비고 돌아오면 그 거리만큼 영혼이 치환되었을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하루쯤 가뿐히 식물원을 다녀오면 알 수 있다. 날마다 새순이 피어나는 곳, 온실의 채광 아래서 산소 뿜뿜하는 식물들의 생명력과 함께 숨 쉬는 시간은 더없이 충만한 시간이었음을. 멀리 가지 않아도.
-주소 :서울 강서구 마곡 동로 161 서울식물원
△여행정보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8번 출구 (도보 10분) ▷ 주제원 (7번 진입구)
-9호선 마곡나루역 3, 4번 출구 연결 ▷ 열린 숲 (1번 진입구)
*버스
-겸재정선미술관 정류소 하차(도보 2분) 672, 지선 6631, 6642, 6712
-마곡나루역 정류소 하차 (열린숲 도보 5분) 672, 6642, 6645, 6648,
* 운영 시간
평시(3~10월) : 오전 9:30 ~ 오후 6시
동절기(11~2월) : 오전 9:30 ~오후 5시
( 열린숲, 호수원, 습지원은 연중무휴. 주제원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 무료입장- 6세미만 65세이상, 1~3급 장애인(보호자1인 포함), 4급~6급 장애인 본인, 국가유공자, 참전용사증소지자,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증 소지자
- 공원구간(열린숲, 호수원, 습지원) 무료
- 주제원 유료- 어른 5,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 제로페이 결제 시 30% 할인.
-평소에도 특별전시나 이벤트를 자주 하므로 언제 가더라도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식물원을 나와 조금만 걸으면 양천 향교가 있다. 향교로 올라가는 길에 홍원사(弘願寺)라는 절이 있고, 거기서 한 발짝 더 걸으면 오래된 국숫집이 보인다. 이름조차 '옛날국수' 집이다. 오래 전의 향수 어린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침 날이 흐려서 만들어 놓은 국수가 처마 밑 구석에 한 줄로 모여져 있다. 햇빛 쨍한 날이면 주렁주렁 널어놓은 국수를 볼 수 있다.
몇 걸음 더 걸어가면 '양천 향교(陽川鄕校)'가 보인다. 조선 태종 11년에 만들어져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교다. 이름은 양천향교지만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해 있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주변과 함께 옛 시절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 특히 능소화가 향교 담벼락을 뒤덮는 초여름 무렵 다시 찾아가 볼 만하다.
양천 향교에서 이어진 골목을 통해 걸어가면 '궁산 근린공원'이 강서지역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그곳의 궁산 기슭에 ‘궁산 땅굴’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대 대륙 침략의 기지로 쓰인 김포비행장과 한강 하구 일대를 감시하던 일본 군부대의 본부와 탄약고 등으로 사용된 곳. 이렇게 아픈 역사가 곳곳에 있다.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그 옆으로 우리 산천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작가 겸제 정선의 연구를 토대로 만들어진 ‘겸제정선미술관’이 궁산을 배경으로 앉혀졌다. 화가의 작품과 예술적 업적을 볼 수 있으며 기획전시와 체험문화공간도 있다. 한국화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 속에 들어가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또 미술관 주변에 '허준박물관'도 있어서 들러 볼만 하다. 박물관 둘레의 산책로를 걸으며 옛 시간의 향기를 즐겨볼 수 있다. 서울 식물원을 비롯 주변의 볼거리도 놓칠 수 없는 서울 서남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