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T, AI, IoT, 로봇 및 자율주행 기술이 불러온 4차 산업혁명은 애그리테크(Agritech)에도 혁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오랜 농사 경험을 빅데이터로 순식간에 얻고, 청년들의 노동력을 로봇으로 대신하며, 악천후에 직관적 판단은 AI가 내리는 등 초보 농부가 단숨에 베테랑 농부를 따라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업 첨단기술은 농사의 시행착오를 줄임으로써 자칫 귀촌이 노후 리스크가 될 수 있는 중장년에게 큰 조력자 역할을 한다.
◇ 인공지능 스마트 관개 시스템
초보 농부의 난관 중 하나는 논밭에 물 대기다. 대부분의 관개(灌漑) 작업은 정확한 데이터보다 농부의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농업 기술을 세계 최초로 농촌진흥청(이하 농진청) 국립농업과학원이 개발했다. 바로 ‘작물 수분 스트레스 진단 및 AI 기반 적정 수분 공급 기술’이다. ‘인공지능 스마트 관개 시스템’은 작물 재배 환경을 정확하게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시기에 적정량의 물을 공급해 작물의 생육을 촉진, 수확량 및 품질을 향상시킨다. 아울러 작물의 생체반응, 즉 엽온(葉溫)을 측정·분석해 스트레스까지 진단한다. 해당 시스템을 사과, 복숭아 재배에 적용했을 때 수확량(18~34%) 및 품질(8~64%) 향상, 물 사용량(25~31%) 및 물 관리 시간(95%) 절감 효과를 보였다.
◇ 농장 단위 맞춤형 기상·재해 예측 경보 서비스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로 농업 분야의 기상·재해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이에 농진청에서는 농장 단위의 상세한 기상·재해 예측 알고리즘을 개발해 사전 알림 서비스를 시행한다. 이는 위치 기반 서비스 응용 사례 가운데 농업-기상-ICT 융합 실용화의 첫 사례다. 일반적인 기상청 예보의 경우 읍면 규모(5×5㎢)지만 농진청 농장 예보는 개별 농장(30×30㎡) 규모로 더욱 정밀하다. 해당 서비스는 기상 요소(기온, 강수량 등 11종), 농장 재해(가뭄, 저온해 등 15종) 정보 및 작물 30종(사과, 배 등)에 대한 생육 단계별 맞춤형 대책(사전·즉시·사후)을 알려준다. 2019년 기준 섬진강 수계의 24개 시·군을 대상으로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서비스를 원하는 1만 549개 농가(1만 7624필지)를 대상으로 실시 중이다.
◇ 지능형 자율주행 무인 방제 로봇
농업 인구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성과 작업 편의성을 향상하려면 농작업의 자동화 및 로봇화가 필수다. 이에 과일나무의 형상을 인식해 과수에만 농약 살포가 가능한 지능형 방제 시스템과 자율주행 플랫폼을 융합해 과원용 방제 로봇을 개발했다. GPS 및 라이다(LiDAR, 레이저 펄스를 이용해 물체의 거리를 측정하고 이미지화하는 기술) 기반 자율주행 기술로 제초 작업, 병해충 방제, 수확을 대신하는 농업 로봇이다. 고역 작업인 농약 살포에 로봇을 활용함으로써 인력 대체 실현이 가능할뿐더러, 농약 사용 30% 절감 및 비용 절약 이점이 생긴다. 방제 로봇의 경우 지난해 현장 접목 연구를 통해 올해 시범 보급사업 및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이와 더불어 농진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는 디지털 사과 과수원 연구를 진행, 무인 자동 약제 살포 장치와 가지치기·꽃따기 기계에 대한 실증을 마쳤다. 기존 고속 분무기로 1㏊를 방제하려면 평균 3~4시간 걸리지만, 무인 자동 약제 살포 장치로는 20∼30분 만에 전면 방제가 가능하다. 스마트폰 앱으로도 병해충을 방제할 수 있어 편리하다. 가지치기, 꽃따기, 잎 솎기 등 수작업으로 해오던 일도 이 기계를 이용하면 1㏊ 기준 300~500시간 이상 걸리던 작업을 8시간 만에 마칠 수 있다.
◇ 화분 매개용 디지털 벌통
지난해부터 이상기후로 인해 야생 화분 매개자(Pollinator)가 대거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과채류의 67%가량은 꿀벌, 뒤영벌 등 화분 매개용 벌에 의존하는 형편이라 그 심각성이 커졌다. 이에 IoT 기술을 적용한 ‘화분 매개용 디지털 벌통’을 개발해냈다. 디지털 벌통은 벌통 내부의 온도, 습도, 탄산가스 농도를 모니터링해 자동으로 최적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벌통 입구에 이미지 프로세싱 및 딥러닝 기술을 접목한 카메라와 디지털 센서로 벌의 크기, 형태, 색깔을 학습시켜 실시간으로 벌의 활동량 측정·관리가 가능하다. 벌의 활동량이 떨어지거나 움직임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농가에서 바로 건강한 벌로 교체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술은 기존 대비 화분 매개 활동량을 2.3배, 작물 수정률을 1.2배 끌어올렸다.
최근 농촌 고령화,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노동력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이 벌집에서 나갈 때 꽃가루를 자동으로 묻혀 나가는 ‘자동 꽃가루 부착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벌의 주광성과 정전기 힘을 이용한 것인데, 부착기를 설치한 벌통에 수정용 꽃가루를 넣기만 하면 된다. 벌이 사람 대신 직접 수분 작업을 해내며 노동력이 감소된다. 키위 농가의 경우 노동 비용은 70% 줄었고 생산량은 20% 이상 오르며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 모바일 다목적 스마트 영상 물꼬
논에 물을 넣고 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기에, 고령의 초보 농부가 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논물 수위를 확인하고 자동으로 물꼬를 여닫을 수 있는 스마트 영상 물꼬 시스템이 개발됐다. 스마트 영상 물꼬는 PTZ 카메라(Pan Tilt Zoom, 원격 회전, 줌 조정이 가능한 카메라) 및 수위 센서를 이용해 논물 양을 실시간으로 촬영, 분석한다. 농부는 논에 직접 가지 않고도 모바일 앱과 웹을 통해 물 조절뿐만 아니라 생육 및 수로 상황을 점검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기록도 남아 빅데이터나 AI 모델에 적용하면 스마트한 작물 재배가 가능하다.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의 저탄소 물 관리 시범사업을 통해 확산돼 온실가스 감축 사업 지역 중 고양시 등 9개 지역에 영상 물꼬 설치·관리를 지원하고 있다.
◇ 스마트 트랩 병해충 예찰 진단 시스템
해충 번식으로 인한 작물 피해가 속출하며, ICT 기반 병해충 예찰 무인 자동화 기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이에 온실에 발생한 해충을 유인하고 관련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확인하는 스마트 트랩(지능형 덫)이 전국에 보급됐다. 지난 5월 농진청은 경남 함안군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설원예연구소에서 ‘스마트 트랩을 이용한 해충 자동 예찰 기술 시연회’를 열었다. 스마트 트랩은 성 페로몬 및 LED(385㎚) 발광으로 해충을 유인, 이미지 분석 기술을 사용해 온실 내 병해충 방제 정보를 제공한다. 딥러닝을 활용한 나방류 이미지 분석 결과 및 스마트 온실 내 온·습도 진단, 방제 기술 정보 등을 모바일 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실시간으로 해충 진단 정보를 받아 빠르고 효과적으로 방제 여부를 결정, 해충으로 인한 작물 피해 최소화에 기여한다.
◇ AI 기반 농산물 시세 및 경락 정보 서비스
농식품 스타트업 ‘록야’는 AI 기반 농산물 시세 예측 시스템 ‘테란’(TERRAN), 작물별 생육 정보 분석·의사결정 서비스 ‘잘키움’, 노지 작물 재해 기상 정보 제공 서비스 ‘FWRM’ 등 신기술을 접목한 농사 솔루션을 제공한다. 특히 빅데이터와 AI 전문가들이 공들여 만든 ‘테란’의 경우 농산물 가격 변동을 다각도로 분석해 표준화된 농산물 가격 정보를 내놓는다. 강원도의 경우 지자체 최초로 ‘테란’을 도입해 농산물 수급 및 출하 등 정책 수립에 활용할 방침이다.
권민수 록야 공동대표는 “귀촌 후 농사 초반에는 재배도 어렵지만, 애써 키운 농작물을 판매·유통하는 과정도 난항을 겪는다. 수요자에게 저렴하면서도 이윤이 남는 적정선이 얼마일지, 또 그 가격이 한 달 뒤에도 유효할지 등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농산물의 가격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분석해 생산자가 적합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디지털 농업 기술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권 대표는 주식 시장처럼 AI를 기반으로 농산물 시장의 가격을 표준화하고 농산물의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KAPI 지수’를 개발했다. 그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주 고객이지만, 일반 농업 생산자를 위한 보급형 앱 ‘테란 라이트’를 3개월에 6000원 선으로 저렴하게 내놓았다. 작물의 경락 정보를 분석한 AI 뉴스 및 경락 가격 그래프, 전문가 리포트 등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초보 농사꾼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및 일러스트=농촌진흥청 제공]
서산은 서울에서 두 시간 남짓한 거리다. 바다가 있고 나지막한 산이 있고 역사의 숨결이 머문다.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는 흐릿할 때도 있고 더할 수 없이 화려해지기도 한다. 서산에서 어떤 해넘이를 만날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떴는데 불현듯 가을의 개심사가 궁금하다. 세상사 번잡함을 내려놓고 느리게 걷기 좋은 곳, 서산에 간다.
개인 취향으로 서산 제1경은 개심사다. 왕벚나무 꽃이 피는 봄철에는 상춘객으로 들썩이는데 가을은 어떤 색일까? 여전히 소담스럽다. 단풍이 은은하게 든 나무에 둘러싸인 개심사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개심사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판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이 실개천을 지나고 나서는 급격히 휘어진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길을 걸을 때면 휘어진 길 끝에서 만나게 될 풍경에 대한 기대가 크다.
돌계단이 끝나자 개심사가 나타난다. 봄의 분주함과는 확연히 다른 가을의 고요함이 흐른다. ‘마음을 여는 절’, 개심사의 가을은 번잡하지 않아서 좋다. 마음을 열기 좋은 계절은 가을이다.
연못가에 서 있는 우람한 둥치의 서어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었고 주렴처럼 열매를 늘어뜨리고 있다. 경내 계단을 올라 만난 건물의 기둥이 독특하다.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도랑주의 자연스러운 곡선미 위에 부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유리산누에나방이 날개를 펴고 쉬고 있다. 명부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오르며 가을햇살이 내리쬐는 숲으로 들어간다. 가을날 거닐기 좋은 절, 개심사는 시간이 느려지는 여행지다.
해미읍성 또한 산책하기 좋은 서산 여행지다. 읍성 안의 너른 잔디밭은 시민들의 휴식처다. 초가를 새로 얹는 분주한 손길이 겨울 채비에 한창이다.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아름드리 회화나무는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는 듯 상처 입은 채 서 있다. 읍성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바람을 느낀다.
서산은 바다가 지척이어서 가볼 만 한 곳이 많다. 간월암, 삼길포항에서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를 만날 수 있다. 간월암(看月庵)은 만조에는 섬이 되었다가 간조가 되면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나타나는 신비의 섬, 간월도에 있는 암자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일몰 시간까지 기다려 간월암 앞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붉게 변하는 하늘을 바라본다. 우측으로는 빨간 등대가 보이고 갈매기들이 하늘로 날아든다. 서산은 느려도 좋다고 말하는 여행지다. 개심사의 단풍과 해미읍성의 바람, 간월암의 낙조까지 천천히 쉬며 놀며 서산을 만나보자.
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피부질환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어났다. 강한 자외선에 피부가 화상을 입는 것은 물론, 벌레와 곤충에 물려 알레르기나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상처를 통해 감염돼 자칫 온몸에 물집이 퍼지기도 하는 ‘농가진’도 여름철 유의해야 할 질환이다.
강한 햇빛, 일광화상과 다형광발진 주의해야
여름철 가장 대표적인 피부질환은 ‘일광화상’이다. 자외선에 노출된 피부가 붉어지며 따갑거나 화끈거리는 증상을 나타내는데, 심하면 통증, 물집, 부종이 생기기도 한다. 강한 햇빛에 30분 이상만 노출되어도 일광화상을 입을 수 있는데, 4~8시간 후 노출 부위가 붉어지고 가려움을 느끼게 된다. 24시간 후 증상이 가장 심해지고, 3~5일이 지나야 호전된다. 또, 화상 부위에 색소침착이 발생해 수주 이상 지나야 서서히 옅어진다.
이러한 증상을 보이면 찬물로 샤워하거나 얼음찜질을 하는 것이 좋으며, 물집이 잡혔다면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 일광화상을 예방하려면 자외선 차단이 우선이다. 자외선이 강한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외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야외 활동 시에는 양산이나 모자를 쓰고, 자외선 차단제를 잘 발라준다.
또 다른 질환으로는 ‘다형광발진’이 있다. 노출 직후 발생해 바로 사라지는 햇빛 알레르기와는 달리 몇 시간 또는 며칠에 걸쳐 몸에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구진과 수포, 습진 형태의 병변이 나타나 가려움증을 호소하게 된다. 건국대학교병원 피부과 안규중 교수는 “다형광발진은 2주 정도 증상이 지속되다 사라진다”며 “흉터가 남지는 않지만 매년 재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태양광선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긴 소매, 긴 바지를 입고 자외선 차단제를 잘 사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곤충교상, 심하면 호흡곤란 일으켜
모기, 벼룩, 개미, 지네, 벌 등 곤충에 물렸을 때 보이는 피부 반응을 ‘곤충교상’이라 한다. 곤충의 타액 속에 포함된 독소나 곤충의 일부가 피부에 남아 생기는 이물 반응에 의해 질환이 나타난다. 피부가 붉게 변하거나 구진이 생기며, 중심부에 물린 듯한 반점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통증, 부종, 가려움증 등을 동반한다. 벌과 개미에게 물린 경우 알레르기 반응이 발생하기 쉬운데, 드물게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곤충에게 물리면 해당 부위를 깨끗이 씻고, 벌에 물렸을 때는 벌침을 신속히 제거한다. 이때 호흡곤란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면 즉시 전문의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방 피부염’은 독나방 유충인 송충과 접촉 후 피부에 붉은 발진과 두드러기 같은 구진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피부 자극뿐만 아니라 상처를 통해 독물이 들어와 피부에 염증을 유발하게 된다. 몇 시간, 길게는 며칠에 걸쳐 가려움과 통증이 지속되며, 독성이 강한 경우 발열, 오심, 구토 등을 호소할 수 있다. 접촉 부위를 긁거나 자극하지 말고 물로 잘 씻은 후 반창고 등을 이용해 송충의 체모를 떼어내는 것이 좋다.
농가진, 심하면 하루 만에 온몸에 퍼져
‘농가진’은 여름철 아이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질환으로, 전염력이 높아 주의가 필요하다. 벌레에 물린 상처나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부위에 생긴 상처를 통해 감염되는데, 물집과 고름, 노란 딱지 등이 생긴다. 물집이 난 부위가 가렵고, 전염성이 강해 하루 만에 몸 전체로 퍼질 정도로 쉽게 전염되는 것이 특징이다. 심한 경우 고열, 설사를 동반하고, 드물게는 성인의 겨드랑이, 음부, 손 등에도 증상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물과 비누로 감염 부위를 깨끗하게 씻고 소독한 뒤, 딱지를 제거해 연고를 바르면 도움이 된다. 고열이 나거나 전신에 증상을 보이는 경우에는 전문의와의 상담 후 7~10일가량 항생제를 복용한다. 안 교수는 “농가진을 예방하고 전염을 막으려면 손과 손톱을 청결하게 하고 피부를 긁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함께 사용하는 옷과 수건도 소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무서운 것도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씨는 게가 무섭다고 합니다. 이시하라 신타로씨는 나방과 나비가 무섭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꽤나 시적인 무서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와 아주 닮은 어느 시인은 벌집이 무섭다고 합니다. 진정한 무서움은 영구적입니다. 그것은 무서움을 느끼는 인간의 일생을 초월한 것일 겁니다. 돈이 없는 것이, 적이 있는 것이, 불행해지는 것이 무섭다. 그러한 이유와 대상이 있는 공포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초월한 공포의 원형과 같은 것, 이유도 대상도 없이 그냥 불쑥 느껴지는 무서움을 문득 느끼는 적은 없습니까?”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朗)의 수필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나는 세상에서 개가 제일 무섭다. 골목에서 개와 마주치면 모골이 송연하고 다리가 떨려 꼼짝할 수 없다.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치는 나를 보면 개들은 ‘나를 무서워하는 인간도 다 있네. 나의 본성을 보여줘 볼까?’ 하듯 침을 질질 흘리며 그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개 주인에게 "제발 개 좀 붙잡아주세요"라고 애원하면 "우리 개는 순해요. 절대 물지 않아요"라고 한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당신한테만 복종하겠죠. 그러나 평생 길러준 주인을 물어 죽인 개 뉴스 못 들으셨어요? 유기견들이 야생 개가 되어 등산객을 위협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어요. 늑대가 개 조상이라는 걸 몰라요?” 이렇게 대들고 싶지만 입이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다.
자기보다 큰 개에 질질 끌려 다니며, 인간의 가장 고상한 행위인 산책이라는 걸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저러다 줄 놓치면 어쩌나" 싶다. 도사견이 그리 좋으면 도사견 사육장에 가서 살면 되지 사람이 밀집해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위협적인 동물을 끌고 다니다니 이해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이나 마약탐지견 등은 어쩔 수 없지만 낯선 사람을 보면 짓고 무는 개, 예방주사도 맞히지 않은 개를 물고 빠는 인간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다.
개띠인 필자가 왜 이토록 개를 무서워할까. 어머니는 개를 길러본 적도 없고 개에게 물린 적도 없단다. 눈을 마주치지 마라, 무시해라 등등의 충고를 들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개만 보면 놀라 자지러지며 소리를 질러대고 진땀이 흐르고 부들부들 떨린다. 공포와 분노가 쌓여 어느 순간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애니멀포비아(Animalphobia)는 동물 공포증이다. 공포 때문에 동물을 가까이할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애니멀포비아들은 벌, 거미, 새, 뱀, 바퀴벌레 등 개인에 따라 무서워하는 것이 다르다. 애니멀포비아가 10명에 한두 명꼴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 공포증은 정신과 치료로는 나아질 수 없는 생태적 공포란다. 그렇다면 동물보호법 이전에 애니멀포비아보호법이 있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한국고양이보호협회 사이트에는 ‘애니멀포비아, 혐오자를 만났을 때 대처 방법’이 있다. 애니멀포비아의 고통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문구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이 너무 강경하게 굴면 녹음이나 촬영을 해서 112에 신고하란다. 인간이 동물을 겁주는 게 아니라 동물이 인간을 겁주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되었다.
필자는 하필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를 무서워하는 바람에 생명을 경시하는 별종 취급을 당하고 있다. 정말 억울하다. 아무리 작은 개라도 마스크 씌우고 줄 묶어 다니라고 개 기르는 분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저희 개는 순하고 물지도 않아요.”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제발 애니멀포비아들이 겪는 심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헤아려주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인간은 못될망정 짐승은 되지 말아야지." 필자는 목줄도 마스크도 하지 않은 개 주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애니멀포비아를 배려하지 않는 당신, 개만도 못한 짐승이오!”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행복한 노후’ 즉 은퇴 이후 시작되는 ‘시니어 라이프’를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의식 구조 속에서는 노후 생활의 행복은 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특히 자신의 분신인 손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특별히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나의 분신, 현우와 승우
제게는 지금부터 4년 여 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녀석들이야 서로 4촌 간이지만, 저로서는 마치 쌍둥이 손자를 안은 느낌이었습니다. 두 아들 집을 왔다갔다 하며 녀석들을 어르기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하던 어느 날, 마침내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순간이 다가오더군요.
“두 손자 현우(炫宇)와 승우(承宇)는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나의 분신들이며,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는 이 녀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밤 안으로, ‘앞으로 살면서 손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두 손자들은 제가 앞으로 많은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쏟아서 사랑해 주어야 할 제 인생의 소중한 열매들이니까요.
나중에 아들, 며느리들과도 협의를 거쳐 완성한 리스트 가운데는 ‘두 손자들과 몽골의 초원에 누워 밤하늘의 별 바라보기’ ‘유치원 시절부터 두 손자들에게 한자 가르치기’ ‘사진을 바탕으로 한 손자들의 육아일기 쓰기’와 같은 항목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 뒤로 손자들에게 가급적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손자바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녀석도 유달리 할아버지를 좋아해 주었으며, 특히 먼저 태어난 현우는 집도 가깝고 해서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종종 제 곁에서 자고 가기도 했지요.
◇ 블로그에 올리는 두 손자의 육아일기
요즘도 변함없이 수시로 손자들의 사진을 찍고 간단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데, 앞으로 2년 쯤 후에 만약 여건이 된다면 ‘바보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볼까 생각중입니다. 이 목표가 성사된다면 아마도 손자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손자들이 가슴 속에 아름다운 꿈을 간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 그리고 손자들을 정서적인 사람으로, 또 배려심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특히 노력을 해 왔습니다. 어린이집을 거쳐 금년에 유치원에 들어간 손자 녀석들이 지난 7월 말에 난생 처음으로 방학이란 걸 했습니다.
◇ 농가주택에서 두 손자를 위한 캠핑
두 손자의 아비, 어미들이 한참 전부터 두 아이의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생각들을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춘천 농가주택에다 여름캠프를 만들어서 일주일쯤 데리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얘기했지요.
일단 두 손자 녀석들은 서로 무지하게 좋아하는 사촌 형제와 일주일 동안을 같이 지낸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을 해서 어쩔 줄 모르더군요. 그리고 녀석들을 보내는 입장의, 최근에 둘째 아이를 낳아서 육아에 여념이 없는 둘째 며느리 현우어미도, 직장생활을 하는 큰며느리 승우어미도 큰 걱정을 하나 덜어낸 홀가분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손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다양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 나무 그네와 수영장
텃밭에다 벤치형 나무 그네를 사다가 설치했고, 한쪽으로는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놀 수도, 잘 수도 있도록 평상을 만든 다음 평상 위에 두꺼운 비닐 장판을 깔았습니다. 또 전기선을 끌어다 텐트 안에 예쁜 전구와 함께, 모기나 나방을 잡는 ‘블랙홀’이라는 기구도 설치했습니다.
또 장난감 가게에 가서 전시용으로 사용하던 미니 플라스틱 수영장을 사다가 낮은 평상 위에 설치를 끝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중간에 무료하지 않도록 수영은 물론 물총, 비눗방울 기구, 그리고 종이찰흙 등 자질구레한 장난감 소품들도 몇 가지를 사다 놓았지요. 마침내 7월 24일(금), 두 손자를 데리고 춘천으로 와 아내와 같이 상당 기간 연구를 하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여름방학 캠프를 녀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녀석들의 반응이 어땠냐고요?
상상 이상이었지요. 아이들 말로 ‘뿅!’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캠프 생활에 녀석들은 잘도 적응해 주었습니다. 해주는 대로 밥도 척척 잘 먹었습니다. 특히 야채 종류는 입에 대기도 싫어하던 승우 녀석이 사나흘 지나더니 밥상 앞에 앉으면 스스로 손바닥에 상추 한 잎 올려놓고, 그 위에 밥과 삼겹살 한 점, 쌈장을 얹은 다음 입속으로 밀어넣고 우걱우걱 씹는 모습이란… 세상에 그보다 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모습이 또 있을까요.
밤이면 두 녀석이 제 양 옆을 차지하고는 제 팔을 베고 누워서, 제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꿈나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들…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앞으로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8월 1일 저녁까지, 8박9일에 걸친 손자들의 여름캠프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일주일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일주일을 넘어 9일 동안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잘 지내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도 얼마나 서운해하며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손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이틀 정도는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더군요. 그러나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피로였습니다.
그 모습을 SNS를 통해서 본 어떤 분이 “손자를 위해 희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 봐야 학교 들어가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는 건 그걸로 끝인데, 왜 그렇게 애를 쓰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참 이기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투자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얻어지는 행복이란 게 과연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주 못 본다고 해서, ‘9일 간의 캠프생활’이란 그 아름다운 기억마저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분의 글에 이렇게 답글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투자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저는 손자들과 함께하는 행복이란 할아버지, 할머니의 수고에 대한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손자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바탕으로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한 어떤 투자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행복하니까요.”
>>>글·사진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사람은 자신의 피리어드(period) 대로 역사를 생각한다. 70의 인생을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겐 한국영화의 지난 70년은 인식과 학습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현재 대부분이 망자(亡者)의 것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현목 감독과 그의 영화 ‘오발탄’같은 것이 그렇다. 거목 유현목은 갔지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명성과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된다. 은 언제 봐도 늘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명화(名畵)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것.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영화 ‘오발탄’은 지난 70년 한국 영화의 역사에 있어 우리 시대의 크나 큰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결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적 예감은, 마치 뛰어난 마법사의 그것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직도 오발탄의 분단, 오발탄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오발탄 때문에 생겨 버린 경제적 불평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후반 임권택을 위시한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등이 일궈 낸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코리안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있어 진짜 르네상스는 신상옥 감독과 그의 키드(kid)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빅뱅(big bang)이었다.
신상옥의 1961년작 는 죽은 남편의 친구가 인근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사랑방의 객으로 머무는 동안 안주인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두 남녀의 은근한 ‘밀당’이 미망인의 딸 옥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욕정은 늘 이성의 벽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 담장 어귀에 서서 항상 머뭇대기 십상이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두근대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 에로틱한 것은 없다. 단 한 번의 입맞춤 혹은 부둥키고 얽히는 섹스 없이 이처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생전에 만든 등 주옥같은 80여 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원대한 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위용을 떨쳤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 필름’과 관련해서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1980년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뤄 낸 신화를 한국적으로 치환시키면 이해가 빨라진다. 현대화된 한국 장르영화의 시작은 신상옥이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말은 정확한 기술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상옥의 후예들이 나왔는데 예컨대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신상옥 감독처럼 연출과 제작, 투자, 배급을 동시에 진행하며 화제작, 흥행작을 양산해 냈다. 모두 ‘아버지’’ 신상옥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1 르네상스기에서 이만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는 김태용의 작품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원래 이 영화는 이만희의 소실된 명화 중 하나이다. 1967년에 만들었지만 지금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김수용 감독이 1981년에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이만희에 대한 오마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복역하다 잠시 휴가를 나온 여인 문정숙은 기차 안에서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는 남자 신성일을 만나 하루살이 나방 같은 연정을 불태운다. 그 사랑 참 쓸쓸하고 허무하며 가슴이 아프다. 1960년대라면 여전히 독재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동원된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은 첨단기술로 포장된 지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짜릿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이만희의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작품들, 곧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7인의 여포로’ ‘삼포 가는 길’ 등은 신상옥과 달리 그가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상옥이 시류라는 서핑을 잘 탄 인물이었다면 이만희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정을 지닌 채 살아가려 했던 감독이었다 이만희는 한마디로 위험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이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천재는 불우한 법이다. 이만희는 1975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 역사는 이만희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사구(砂丘)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이창동의 등장은 어쩌면 이만희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너무나 많은 기억들, 작품들
70년사의 갈 길은 멀다. 중간중간 떠오르고 명멸하는 감독들, 제작자들, 배우들의 면면이 길고도 길다. 그중에서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혈맥 아닌 혈맥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계보에 속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로 이들의 시대였다.
이장호 감독이 이루어 낸 70년 영화 역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바보선언’ 등 일련의 영화들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감독이 시대의 어둠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스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중 ‘바보선언’은 탈(脫)정치적인 척, 사실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적 지식인의 깊은 정치적 좌절과 그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소매치기와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가는 저지대형(低地帶型) 인간 동철이 가짜 여대생 혜영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사실은 콜걸이자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좌충우돌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 사회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의 시선을 통해 삶의 가닥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바보선언’은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을 견뎌 내려는 영악한 이야기 꾼이 의도적으로 꾸며냈던 자기 모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흉포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는 어두운 멜로드라마로 시대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인물이다. 배창호는 이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꼬방동네 사람들’ 처럼 사회파적 시선을 자신의 작품에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러나 곧 ‘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앵그리 영 맨’ 혹은 ‘비트 제너레이션’의 세대임을 갈파한다. 배창호는 한국영화계에 ‘스타일’을 들여 놓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예술이라는 점을 그는 명명백백하게 낙인찍어 놓았다. ‘적도의 꽃’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배창호가 이루려고 했던 영화적 스타일은 그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에서 빛을 발한다. 이명세는 영화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쪽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회화적이면서 키치(kitch)적이다.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 컷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동영상의 예술에 가깝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계보는 한국영화가 스타일에 있어 한 움큼의 큰 성과를 거둬 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명세가 로 새로운 좌표를 찍을 무렵 한국영화계의 한쪽에서는 목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뉴 코리안 시네마’의 바람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와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은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대거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 2편이, 또 다른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에는 김의석 감독의 이 올랐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신작 역시 경쟁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한국영화의 당시 칸 진출이 유독 눈길과 화제를 모았던 것은 해외 영화계,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 영화 권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적 경향에 한 관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3~4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유럽 평단들의 시선은 여전히 한국영화 하면 신상옥, 김수용,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등 구세대급 감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유럽 영화계 내에서 공식적인 발판을 마련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들’로서는 흔히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김지운 등 당시 40대 감독들이 거론돼 왔으며 그 뒤를 이어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등 30대 감독들까지 포함해 이들을 일컬어 충무로에서는 일명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의 기수들로 분류했다.
유럽 칸 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마치 1990년대에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이 이를 통해 대거 해외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위상을 급격하게 올려 놓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럽영화계는 첸 카이거와 장 이모우 등 북경대학 출신의 일명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집중 소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뉴 코리안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후 세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으며 분단문제, 민족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한 후 영화예술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도화된 산업화 시대의 영향과 혜택으로 인해 MTV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공상과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달콤한 인생’,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새로운 70년사를 위하여
새로움은 늘 오래된 것으로 대체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10년을 돌진하듯 활동해 왔던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도 그렇다. 이들 모두 이제 ‘올드 보이’가 됐다. 50대를 훌쩍 넘긴 감독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피의 혁명’을 요구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에 호응하는 듯 2010년대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 등등.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직 지난 70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에 눌려 완전히 개화한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생이 그렇듯, 영화도 다 그런 것이다. 바뀌고, 잊히고, 새로 기억되며, 그래서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 남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론 영광스럽고, 때론 팍팍하며, 때론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참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70년을 영화 혼자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의 감독과 배우가 있기까지 그 전의 감독과 배우가 있었고, 또 다시 그전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건 일직선의 끈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찬욱과 김기덕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70년 전사(全史)의 영화를 보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일별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점지해 나갈 것이다. 분명한 일 하나는 과거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간다면 세상은 언젠가 꼭, 영화처럼 될 것이다.
△ 오동진(吳東振) 영화평론가
문화일보,연합뉴스,YTN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지 FILM2.0 편집위원과 동의대학교 초빙교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BS 시네마 천국 MC, YTN 시네24 MC를 역임했다.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과 마리끌레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리산이 좋아 귀농을 마음먹은 젊은 부부. 어렵게 마련한 생활 터전이 산사태에 쓸려 나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서 얻게 된 새로운 행복. 해야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아서 행복하다.
◇지리산 여름휴가 왔다가 마음먹게 된 귀농
2012년 9월 17일 새벽3시, ‘뚜뚜, 뚜뚜, 뚜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어…. 아직도 비가 오네?” 부스스 일어나 어두운 작업장에 불을 켠 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시작하려는 순간. 왜일까? 오늘따라 얼굴과 몸 주위로 정전기가 일듯 기분 나쁜 전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내 몸을 맴도는 정전기들을 날리고서 제빵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계량을 하고, 반죽기를 돌리고, 1차 발효…. 성형을 한 후, 다시금 2차 발효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후, 커피를 준비한다. 요 며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이순간이 저녁인지, 아니 새벽이던가? 가끔 헷갈릴 정도다. 뭐 어찌됐던, 지리산에서 느끼는,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2011년 4월 남편과 지리산으로 휴가를 왔다가 휴양림에 텐트를 치고 2박3일 야영을 하며, 둘레길을 돌았다.
“와, 이런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이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 3개월간 산청, 하동, 유림, 함양, 남원, 산내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모든 조건이 적당히 들어맞는 빈집을 찾아 나섰고, 우연한 인연으로 ‘동네 대소사는 나를 통해 움직인다’라며 스스로를 ‘할매이장’이라고 칭하시던 할머니 한분을 뵙게 되었다.
그분이 소개해준 허허벌판 그리고 싸리나무밭. “아뇨, 할머니 저런 벌판 말고, 기왕이면 빈집에 조그마한 마당도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런 곳 없을까요?
순간, 화색이 만연한 할머니에 미소를 보았다. “오호라, 그런데~ 있어, 있어. 난 또 집 짓는 줄 알았지. 이리와 봐, 여기” 이렇게 소개받은 이곳. 흡사 폐가를 연상시키는 첫인상에 과연 이집을 고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빈집 수리는 10여개월여의 공사기간 동안 1주일에 3일씩 공을 들였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왕복 4시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열정을 쏟았다.
먼저, 쥐가 뛰어다니던 천장을 빠루(지렛대)와 삽으로 뜯어내고, 콘크리트 드릴로 벽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벽 하나를 허물어냈다. 고무대야와 삽만으로 시멘트 50포를 반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열 겹짜리 벽지를 떼어내고, 스크레퍼로 벽면을 고른 후 얼룩진 벽에 퍼티를 발랐다. 파벽으로 포인트도 주고, 자꾸만 떨어지는 천장지를 붙잡으려 겹치는 부분마다 얇은 몰딩을 대어주니 마치 일본 다다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사에 연속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낼 곳도, 피곤한 몸뚱이를 잠시나마 누울 한 평 공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추억이 된다더니,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고 2012년 2월 10일 완전 전입과 함께 ‘경축, 귀농생활’을 시작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산사태로 쓸려간 보금자리 보고 ‘헛웃음만’
2012년 9월 17일 오전 7시. 빵 굽기 완료. 남편이 빵 배달을 간다. 우산을 쓰고, 한손엔 빵 바구니를 들었다.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측은해 보인다. 여전히 몸 전체에 정전기가 맴돌고 있다. “왜 이러지?” 아마도 비 때문일 거야 하고 넘겼다.
이후 시간이 지나 오후 12시 10분.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들어가기가 싫다. 계속 졸리고 춥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거실에서 인터넷 서핑 중인 남편 옆에 누웠다.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는데, 오늘따라 물소리가 참 크다. ‘안방에 들어가서 잘까?’ 생각하는 순간 “우르릉 쾅…….와지직 우당탕, 쿵쿵. 와장창.”
일순간 유리파편이 얼굴로 날아들고, 차가운 빗물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그랬다 바위가 벽을 치고 거실 안까지 들어왔다. 아니다. 이미 우리 집 창고와 안방, 화장실은 쓸려가고 없었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벽과 지붕도 없어졌다. 우리가 누워있던 거실 빼곤 모든 곳이 산에서 흘러내린 바위, 나무와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1초, 2초, 3초…. 흙탕물이 밀려들어온다. 이건분명 현실이다. 거실 창문으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 느낀 공포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집 앞 도로는 이미 계곡으로 변해있었고, 산에 박혀있던 중대형 사이즈의 바위들이 도로를 점령했으며, 우리 집은 앞 틀만 남고 옆과 뒤쪽은 모두 쓸려간 후였다. 떨리는 손을 꼭 잡고, 남편과 몸만 빠져나왔다. 그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살았다. 남편과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집 뒷산의 자랑이었던 30년 된 호두나무와 밤나무가 시뻘건 흙탕물에 엉켜 있었다. 눈물은 커녕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게 밀려들었다.
“거의 1년을 고치고, 딱 6개월 살았는데…….”
“화목보일러에(기름겸용) 기름 200리터 채워놨는데…….”
현실을 무시한 바보 같은 미련들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산사태가 나고 2시간 정도 지나니 비가 그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분들 모두 우리 집 앞에 모여 걱정이 많으시다.
“어떻게 저산에서 산사태가 나지?”
“산사태가 날 산이 아닌데….”
“사람 몸 안 상한 게 어디냐,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하시며 모두 응원에 말씀을 해주신다. 그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혹스러우나 그래 젊지 않은가!
“역시 이래서 귀농할 거면 젊을 때 해야 해!! 그치?”
“응, 응, 그러네요.….”
처음 빈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 소개받았던 그 허허벌판 땅에 재해협회(수재민 구호단체)에서 빌린 임시주택과 작은 컨테이너에서 2012년 9월 17일 낮 12시 10분, 3번째 태풍 ‘산바’로 인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산사태 1주일 후 제빵용 오븐과 소모품을 다시 사 모았고, 전기도 물도 없는 곳에서 50여 일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수도가 들어왔다. 두달 후 전기가 들어오면서, 2012년 겨울 컨테이너에서 다시 빵을 굽기 시작했다.
한겨울 밖과 안에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그 서늘한 공간에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가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빵을 만들었다. 한 달 수입 단돈 3만1000원.
“이런 시골에서 빵집이라니 그것도 우리 밀빵?”
“유기농 설탕? 100% 우유버터는 뭐야? 뭐가 다른데?”
“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먹어보면 차이도 모르겠는데 비싸기만 하고 에이, 장사가 되겠어?”
처음 빵집을 하겠다고 하니 모든 귀농인과 주민들에게 우려에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역시나 쉬운 일도 없고 세상에 공짜도 없었다.
◇단조롭지 않고 할 일 많아서 즐거운 인생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죽을 하고 빵을 굽고 포장까지 하려면 6∼7시간이 걸린다. 시장 빵과 프렌차이즈 빵집과의 차별화를 위해 매일 반죽을 하고 굽고, 정확한 시간에 배달했다. 그렇게 3개월쯤이 지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반품이 줄어들었다. 비록 10평 남짓한 작은 북카페이고, 1억5000만원이 넘는 빛을 안고, 매달 내야하는 이자에 허덕이며 살지라도 우린 힘들지 않았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허무한 요행과 단조로운 일상보다는 매일매일 새로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런 현실을 즐길 수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린 웃을 수 있었다.
산사태가 나기 전, 운영하고 있던 북카페. 그곳에 들렸던 대다수에 손님들은 자신들도 귀농을 꿈꾼다 했다. 하지만 막연히 시골생활은 평화롭고 안락하리라는 동경 속에서 환상과 헛된 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련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 지부터 상상해 보라고, 우선 온갖 벌레(지네, 나방, 거미, 개미 등)들과 집안에서
함께 생활 할 수 있는지, 한여름 뙤약볕에 썬크림 없이 서있을 수는 있을까? 그로인해 주근깨와 얇아진 표피층에 자외선이 닿아 검은 점들을 만든다면? 내가 산사태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
그 상황 안에서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친다면 귀농생활 성공확률 50%이다. 남은 50%는 근면, 성실함 등이 채워줄 것이다. 시골은 부지런해야 살 수 있고, 부지런하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다.
이른 봄. 눈 녹기가 무섭게 산을 오르면서 산나물(다래순, 취나물, 곰취 등)을 뜯어 발효액도 만들고, 고로쇠 수액도 받는다. 여름엔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농사일로 바빠진다. 낮엔 더위를 피해 계곡에서 다슬기도 따고,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가을엔 호두, 밤, 감 등을 따고, 곶감, 고추도 말리고, 버섯, 오미자, 산머루 등 여러 약초들을 캐러 다니며, 그것으로 수입을 창출한다. 겨울엔 겨우살이 채취 또는 메주, 된장, 고추장, 김장김치(절임배추)를 담아 판매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귀농에 있어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자연과의 동화인 듯싶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확실히 부족하나 풀, 벌레, 새, 나무 등 자체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또 즐긴다면 시골살이가 단지 고단함과 무료함의 연속이진 않을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서울, 창원(주말부부)
·귀농 전 직업: 직장생활
·귀농 결심동기: 시골생활에 대한 꿈
·귀농 선택작목: 지역 특산품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 시 나이: 39세
·귀농지 선택사유: 지리산을 좋아해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2억 2000여만원
·현재 영농규모 : 고사리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유기농 빵 판매로 연간 2500만원 정도)
·향후 계획: 다양한 많은 일들을 도전하고 싶다
눈이 왔다. 베란다 창문 밖으로 보이던 다양한 색의 조합들이 오늘은 하얀색과 회색으로 통일돼 보였다. 오늘이다. 그동안 춥다고 밖에 못 나가고 있었는데 집안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핑계가 생겼다. 더구나 얼마전 어린이집에서 눈썰매 탄다고 애들 방수바지와 부츠까지 샀으니 준비는 완벽했다. “눈이 많이 왔네, 여보! 애들하고 요 앞 공원에 갔다올게.” 하하. 성공이다. 그렇게 집에서 나와 눈구경하러 공원으로 갔다. 나만큼이나 밖에 나와서 좋은 큰아들이 저만치 앞서 걷다가 뒤돌아서서 나를 부른다. “아빠~ 저 나무는 왜 치마를 입고 있어요?” 잠복소를 설치한 소나무를 보며 아들이 물어본다. 해충방제를 위해 설치했다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보온소로 바꿔 설명했다. “민재도 겨울에는 추우니까 옷을 두껍게 입잖아. 나무는 춥다고 따뜻한 곳으로 움직일 수 없고, 옷도 없으니까, 사람들이 저렇게 옷을 입혀놓은 거야.”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것 중 하나가 보온소와 잠복소이다. 일반인 중 나무 관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잠복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보온소를 잠복소라고 하면 곤란하다. 엄연히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잠복소(潛伏巢)란 기온이 내려가면 월동을 위해 해충이 나무에서 땅 밑 은신처로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해충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짚이나 새끼 등으로 나무 기둥(보통은 지면으로부터 1.2m 높이에 설치한다)에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유인된 해충을 봄에 제거해 태워버림으로써 그 속의 해충들을 제거하는 병충해 방제의 한 방법이다. 보온소(保溫巢)란 추위로 인해 나무가 얼어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추위에 약한 나무(배롱나무, 감나무 등)를 짚으로 감싸주는 것이다. 둘 다 나무의 겨울나기를 위한 방법이지만 목적이 다르므로 말도 구별해 써야 한다. 특히 근래 들어 제설작업에 쓰이는 염화칼슘에 의해 가로수 및 띠녹지에 있는 수목들의 피해가 많다 보니 보온소의 일종인 방풍막을 설치해 피해를 저감시키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관행적으로 잠복소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된다고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다. 잠복소를 이용해 잡는 해충인 미국흰불나방과 솔나방 등이 1980년대 초에는 천적도 없고 방제방법도 발달하지 않아 잠복소를 이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약제도 발달했고, 해충들의 천적인 맵시벌, 침파리, 거미 등 토착천적들이 많아져서 피해 발생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잠복소 설치가 오히려 유익한 익충을 잡을 수도 있다고 한다. 또 설치 시기가 연말인 11월이다 보니 수목관리 잔여 예산을 정리하기 위해 지출하는 측면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빠, 저 큰나무가 저렇게 작은 옷을 입으면 엄청 춥겠어요. 좀더 따뜻하게 큰 옷을 입히면 안 될까요?” 처음에 거짓말을 하니 말이 꼬인다.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한다. “저 나무가 춥지 않도록 민재가 가서 꼬옥 껴안아 줘. 그러면 나무가 춥지 않을 것 같은데….” “나보다 아빠가 더 크니깐 아빠가 껴안아주세요.”이런 망할! 거짓말하면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