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기획앨범 ‘찰나’를 발매한 최백호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신년호 표지를 장식했다. 그가 수놓을 2023년은 어떤 모습일까?
타이틀곡 ‘찰나’는 빛났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모두 인생을 수놓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는 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지난해 73세의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74세의 시간이 기대됩니다.”
‘가요계 3대 코’ 최백호(최배코), 개코, 지코가 한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은 올해 힙합곡을 내기로 약속했다.
“완전히 새로운 힙합을 해보고 싶어요. 타이거JK와 함께 했는데, 개코, 지코와는 어떤 노래가 나올지 궁금해요.”
나이 듦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라는 최백호는 80대엔 또 어떤 멋진 노래를 부를지 기대된다고 말한다.
“잠들기 전, 99개 힘든 일이 있었어도 한 가지 좋은 일을 떠올리면 그 하루가 찬란해지죠. 나이 듦도 똑같아요.”
최백호는 늘 준비돼 있었기에 기회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매순간, 매일, 매년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75분의 1초. 찰나(刹那)는 이토록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 찰나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우리의 삶이 된다.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를 작사·작곡하고 노래한 가수다. 일상에서도 낭만을 품고 살았기에 그는 낭만을 노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최백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낭만 가객’으로 등극했다.
최백호는 낭만의 시간과 도전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획앨범 ‘찰나’를 발매한 그는 젊은 가수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외적인 변신도 시도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신년호 표지를 장식하며 젊은 스타일을 멋지게 소화한 것. 변화의 준비를 마친 최백호가 수놓을 2023년이 기대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살아온 세월이 다 없어진 것 같지만 그냥 흘러가지 않아요. 어떤 형태로든 다 쌓여 있어요. 그 많은 것이 내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요. 저는 지난해 73세의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74세의 시간이 기대됩니다.”
후배들과 협업한 ‘찰나’
기획앨범의 타이틀곡 역시 ‘찰나’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낭만에 대하여’를 잇는 포크송으로 누가 들어도 최백호 노래다. ‘찰나’는 빛났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모두 인생을 수놓은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최백호의 세월을 그대로 담은 목소리가 가사와 맞물리며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제 노래가 원래 좀 그렇기는 해요. 별로 정돈되지 않고 노래가 제 박자에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요. ‘찰나’에서는 특히 제 목소리가 가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오죠. 나이가 느껴진다는 반응도 많고요. 기획하고 믹싱한 분들이 노래와 맞다고 판단해서 제 목소리를 그대로 살린 것이라 생각해요.”
앨범 ‘찰나’의 수록곡은 총 8곡이다. 최백호는 마지막 곡 ‘책’만 작사쪾작곡하고, 나머지 7곡은 후배들에게 맡겼다. CJ ENM의 신인 작곡가 육성·발굴 프로젝트인 ‘오펜 뮤직’ 출신 작곡가들이 노래를 만들었다. 최백호는 2018년부터 오펜 뮤직의 멘토로 참여했고, 그 인연이 ‘찰나’로 이어졌다.
최백호는 직접 노래를 쓰고 만들어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하다. 때문에 그에게 ‘찰나’ 앨범 자체는 실험이고 도전이다. 최백호의 새로운 변화에 후배 가수들이 동참해 힘을 실어줬다. 지코, 타이거JK, 정승환, 정미조, 죠지, 콜드 등이 피처링에 참여했다.
노래의 장르가 달라지니 창법 또한 달라졌다. 최백호는 타이거JK와 힙합곡 ‘변화’를 불렀다. 그는 고음을 소화하며 파워풀한 창법을 보여줬다. 죠지와는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 ‘개화’를 함께했다. 최백호의 목소리에 신나는 리듬이 붙으니 가사가 주는 설렘이 더해졌다. 최백호는 후배들과의 작업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고, 깨우친 것도 많다”고 소감을 밝혔다.
“저는 좋은 노래는 쉽고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꼭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어요. 젊은 세대의 노래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진 거죠. 또 제가 평생 혼자 노래 부르다 보니 하모니를 잘 못 내요. 같이 노래 부른다는 게 어렵기도 했고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실력 있는 작곡가들과 가수들이 있어서 K-팝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죠.”
이번 앨범에는 특히 ‘가요계 3대 코’ 막내 지코가 ‘찰나의 순간’ 내레이션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최백호는 “사실 지코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지코 측의 요청으로 그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면서 지코라는 존재도 알게 되었고, 협업도 이뤄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가요계 3대 코’ 최백호, 개코, 지코가 한자리에 모였다. 최백호는 발음하면 최배코가 되어 가요계 3대 코 맏형이 됐다. 세 사람은 올해 힙합곡을 내기로 약속했다. 최백호는 “진짜 부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힙합을 해보고 싶다. 이번에 타이거JK와 함께 힙합을 처음 해봤는데 재밌었고, 노래가 들을수록 좋다. 개코, 지코와는 어떤 노래가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앨범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여름 최백호의 건강이 악화돼 녹음이 힘든 상황이었다. 최백호는 “그때 의사가 ‘노래를 안 부르고 오래 살든지, 노래를 부르고 일찍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답은 “선생님, 저 노래 부를게요”였다.
최백호는 자기 몸보다 후배들의 노력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몸이 안 좋다 보니 녹음할 때 아주 예민했다. 후배들을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 “지금은 많이 호전됐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전했다. 최백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생 가수라는 사실 또한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나이 듦의 변화
최백호는 화가라는 직업도 갖고 있다. 59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최백호는 ‘나무 그리는 화가’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나무밖에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변화할 뿐이지 배신을 하지 않는다”며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를 밝힌 그는 특별한 나무 이야기를 전했다.
“고향이 부산 기장인데 어머니께서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님이셔서 사택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 사택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고향에 갈 때마다 그 나무를 보고 와요.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나무죠. 그런데 다른 학교가 들어와서 그 나무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때마침 거기 문화원장과 식사 자리가 생겨서 나무 얘기를 했더니 보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최백호 나무라고 이름도 생겼다죠. 하하.”
최백호에게 어머니는 매우 큰 존재다.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백호의 어릴 적 꿈은 어머니처럼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미술에 소질이 많았던 터라 미술 교사를 꿈꿨다. 학창 시절 그는 미대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등록금이 부족해서 재수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장 잠잘 데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최백호가 선택한 방법은 생계형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부산 라이브 클럽을 3년, 서울 라이브 클럽을 1년 넘게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1976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만든 곡으로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라고 한다.
“운 좋게 데뷔 앨범이 잘됐지만, 여전히 가난했어요. 기획사에서 돈을 안 줘서 수입이 없었거든요. 28세까지는 하숙비를 못 낼 정도로 너무너무 가난했어요. 29세가 되어서야 돈을 왕창 받고 그 회사를 나와 다른 회사로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데뷔곡 이후 최백호는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30대의 그는 술집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하루에 술집 일곱 군데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최백호는 “술도 매일 마시고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던 때였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돈은 많이 번 덕분에 최백호는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했다. 30대 중반에 서울 목동 아파트를 샀다. 최백호는 “그 집이 터가 정말 좋다. 풍수가 좋은 집이다”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집에서 불후의 명곡 ‘낭만에 대하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낭만에 대하여’는 1994년에 나왔는데, 1995년 KBS2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오면서 역주행 인기를 끌었다. 20년이 넘은 현재도 여전히 사랑받는 곡이다.
“그 집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만든 덕에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집으로 갈 수 있었죠. ‘낭만에 대하여’는 40대에 만든 곡이에요. 20대에는 만들 수 없는 노래죠. 나이가 들면서 노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예요. 노래가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사람들이 항상 새로운 노래처럼 반응해주시고 좋아해주셔서 신기하고 감사해요.”
나이에 따라 새로운 감성이 생기고 노래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그는 70대에 ‘찰나’를 만났다. 최백호는 “80대에는 또 어떤 멋진 노래를 부를지 기대된다. 나이 먹는 것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년기일수록 나이 듦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일침을 날렸다.
“행복은 선택이라고 하잖아요.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세요. 99개의 힘든 일이 있었어도 한 가지는 즐거운 일이 있었을 거예요. 오늘 이렇게 즐거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면 하루가 찬란해지죠. 나이 먹는 것도 똑같이 생각하면 돼요.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2023년, 70대 중반에 접어드는 최백호. 새해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목표가 없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다 도망가는 사주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는 쪽이다”라고 답했다. 누구에게나 기회의 순간은 오지만, 누구나 그 기회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최백호는 늘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 순간, 매일, 매년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낭만에 대하여’에도 탄생 비화가 있어요. ‘낭만에 대하여’를 쓰고 며칠 뒤 조용필 씨의 전 매니저가 앨범을 만들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낭만에 대하여’가 세상 밖에 나올 수 있었죠. 참 신기한 일이에요. 어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평소에 바른 자세, 진정성을 갖추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회들을 잡았고 지금의 결과를 얻은 게 아닐까요?”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 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를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대한민국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낭만’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을 때, 1순위로 떠오르는 가수가 있다면 바로 ‘최백호’가 아닐까? 한국의 대표적인 낭만 가객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의 곡 ‘낭만에 대하여’는 여전히 대중에게 각인되고 있다. 요새도 애창곡으로 주저 없이 이 노래를 꼽는 중년들이 많을 것이다. 가수 본인 역시 이 곡을 자신의 인생곡으로 꼽았다.
당시 그는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며 어딘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고 곡을 썼다고 한다. 그가 제일 처음으로 떠올린 가사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였다. 우연히 김수현 작가도 이 가사 한 줄에 반해서 그의 노래를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했는데, 그것이 선풍적인 인기의 촉매제가 됐다. 단 한 줄의 가사는 시작을 만들었고, 그 시작의 한 줄은 그에게 또 다른 인기를 안겨다줬다. 한마디로 낭만과 낭만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주인공의 놀이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와 소주를 한잔 마셨는데, 괴로운 일이 있던 친구가 2차를 가자며 졸랐다. 2차는 젊은 시절의 추억에 젖을 수 있는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맛있는 술을 음미하자고 했다. 술 대신 노래에 취하고 싶다는 친구는 “오늘의 기분은 낭만적인 노래로 잊고 싶어!”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 때문에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을 고스란히 접고, 그날은 함께 근사한 음악을 듣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려다 그냥 비를 맞으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렸다. 고된 하루의 끝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 색소폰 소리로 달래고 있을 때, 새빨간 립스틱의 마담이 유혹적인 저음으로 “사장님 참 멋져요!”라고 속삭인다면 어떨까? 친구가 원하는 낭만은 그런 것일까? 겉은 구질구질해 보이는 50대 후반이어도 속은 아직도 멋있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은.
낭만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종의 방파제다. 일상은 종종 무의미하고, 삶은 식은 돼지 간처럼 퍽퍽하다. 하지만 누구나 삶을 잘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가혹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낭만을 이용한다. 본인 주위를 둘러싼 것들을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파악할 때 경험하는 감미로운 분위기와 기분이 바로 ‘낭만’이다. 객관적 논리에서 조금 벗어나 느끼고 싶은 대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만들 때 낭만을 느끼게 된다.
낭만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바로 ‘주인공 서사’다. 불만스러운 삶을 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사다. 물론 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자기기만으로 현실감을 잃지 않을 만큼 부풀려진 삶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삶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발적인 놀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빈틈을 채워주는 자신만의 놀이가 낭만이다. 자발적인 놀이는 재미와 더불어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는, 오롯이 자신을 위한 놀이다. 또한 호기심, 창의력 등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노력할수록 낭만의 재미는 더욱 커진다.
삶은 놀이가 필요하다. 니체는 놀이에 열중하는 진지함을 발견할 때 비로소 성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낭만과 같은 자발적인 놀이는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더 나아가 조금 더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날 기회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낭만에 열중한다는 건 그만큼 삶을 잘 가꾸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가끔은 잊었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색소폰 연주자 에이스 캐논(Ace Cannon)의 ‘로라’(Laura)가 흘러나오는 다방에 자주 갔던 최백호의 경험이 담겨 있는 곡이다. 심금을 울리는 가사와 애절하고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당시 35만 장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엔 40대 가수가 큰 히트를 기록하기 어려웠던 만큼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사실 이 곡은 발매 당시엔 인기가 없었다. 하루에 평균 한 장도 안 팔리던 앨범이었는데, 작가 김수현의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출연한 장용이 이 곡을 부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최백호는 ‘낭만 전도사’란 별명이 생겼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추억 속 음악은 아련했던 그 시절로 우리를 주유하게 한다. 지난날 삶의 변곡점을 만든 노래가 있는가 하면, 중년에 접어들어 새롭게 전환점이 된 노래도 있다. 오선지에 찍힌 음표처럼, 희로애락의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네 인생 변주곡을 채운 그때 그 노래들을 다시 소환해본다.
도움말 김동률 서강대학교 교수 참고 도서 ‘인생, 한 곡’
70년대의 좌절 속 청춘의 마음을 불태웠던 노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by ‘고래사냥’(송창식)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1970년대. ‘고래사냥’은 대학가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며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던 셈이다. 안개 같던 시절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가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떠나야 한다. 동해 바다로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그렇게 ‘고래사냥’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라고 우리를 충동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by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빠빠빠빰 빠빠빰 빠빠빰 빠 빠빠빰” 중장년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숙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전주다. 반주나 마이크가 없어도 어묵 국물에 숟가락 서너 개 걸쳐놓고 목 터지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자타 공인 최고의 가수이지만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낸 그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왕 조용필의 이름을 전적으로 드높여준 노래다. 1970년대 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각종 단합대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단골곡이 됐다. 대학 엠티에서도 직장 회식에서도 흥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이면 함께 열창하던 노래였다.
중년 이후 다시 들으면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by ‘서른 즈음에’(김광석)
서른을 많이 넘기지 않은 사람은 노랫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은 노래가 주는 슬프고도 시린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치기 어린 사랑 투정이라 짐작했을 그 가사가 얼마나 가슴을 치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서른 즈음에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떠났고 살아남은 우리는 그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by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의 모티브가 된 통학길 완행열차에서 최백호는 첫사랑 그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박경희, 최백호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름을 밝혀도 좋으리라 말한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최백호의 첫사랑인지조차 모를 테니까. 그렇게 낭만은 아득하고 추억마저 긴긴 세월 속에 야위어갔다. 젊은 시절에는 곡의 깊고 유창한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의 장소로 회귀하는 노래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by ‘광화문 연가’(이문세)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 종로서적이 떠오르고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당시 광화문은 청춘들이 몰려다니던 거리였다. 경기고를 비롯해 서울고, 창덕여고, 진명여고, 숙명여고, 이화여고, 배제고, 경기여고 등 명문고교가 즐비했다. 입시학원, 고고장, 나이트클럽, 음악감상실, 분식집, 빵집이 넘쳤고 거리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로 가득했다. 특히 양식집 ‘이딸리아노’는 연예인이나 당대 명망가들이 드나드는 장안의 명소였다. 서울고와 이화여고 중간에 자리했는데, 이곳에서 고등학생 때 언약하고 결혼까지 한 사람도 꽤 있단다. 어느덧 세월 따라 그 시절 청춘들은 떠났고 노랫말처럼 언덕 밑 정동길엔 감리교회만이 버티고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by ‘골목길’(김현식)
그렇게 시작되는 ‘골목길’은 묘한 상상과 함께 사내들의 술자리에서, 대학생 동아리 모임에서, 회식 후 늦은 밤 귀갓길에서 가만히 터져 나왔다. 노랫말처럼 그 시절 신촌의 골목길에 접어들 때면 가슴이 뛰곤 했다. 곳곳에는 숨겨진 술집과 만화방, 장미여관, 은하수여관이 있었다. 곡에 등장하는 신촌 골목길들은 이른바 1980년대 낭만 히피들의 ‘나와바리’였다. ‘골목길’의 탄생에는 신촌블루스가 있다. 1986년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엄인호, 이정선, 김현식, 한영애가 결성한 록 밴드다. 그 시절 ‘레드 제플린’은 ‘러시’와 함께 낭만 히피들의 아지트였다. 엄동설한 골목길 곳곳 카페에 몰려든 젊음들은 벽난로 가득 활활 타는 통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청춘을 노래했다.
서울로 상경한 공순이 공돌이들의 삶을 위무했던 노래
"돌담길 돌아가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 by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랫말에는 고향을 떠나온 이의 애끓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낙엽이 쌓이고 흰 눈이 내려도 미싱을 잡아야 했던, 이른바 수많은 공순이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이 노래는 국민가요라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물레방아 도는데’는 공순이, 공돌이란 이름으로 사라져간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한 헌정곡과 다름없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by ‘사계’(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는 여성 보컬과 건반의 경쾌한 연주와는 대조적으로 여공들의 쳇바퀴 도는 듯한 단조롭고 신산한 삶을 노래한다. 그 발랄함 속에 숨은 페이소스에, 경쾌한 리듬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깊고 무거운 슬픔에 잠기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혁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수시로 아픈 일이 많았다. 노동현장에서 젊은 학출(學出)들은 노동자들과 연대했지만, 때론 일류 대학생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이 땅의 누나, 여동생들이 흘린 회한과 고독이 ‘사계’에 녹아 있다.
우리 시대 중장년은 어떤 음악을 어떻게 즐기고 있을까?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나만의 주크박스를 플레이하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듣는 음악까지 가볍게 치부할 순 없다. 여전히 중장년의 귓가엔 그 시절 울림과 설렘을 안긴 묵직한 감성의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50대 이상 남녀 42명 대상 온라인 서베이 진행
음악은 나의 일상 ,혼자일 때 들으면 더 좋더라!
얼마나 음악을 듣느냐는 질문에 ‘항상 듣는다’(38.1%)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과반수가 주 5회 이상, 대부분은 주 3회 이상 일상에서 음악을 즐기는 모습. 스마트폰이나 소형 기기의 발달로 음악 감상이 수월해진 덕분인 듯하다. 중장년은 주로 ‘혼자일 때’(40.5%)나 ‘스트레스 풀 때’(38.1%), 위로가 필요하거나 어떤 추억이 떠오를 때(33.3%) 음악을 가까이했다.
나에게 힘이 되어준 노래 가사는?
♪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 ‘걱정 말아요 그대’
♪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 ‘나이 서른에 우린’
♪ “When I'm feeling sad I simply remember my favorite things and then I don't feel so bad”(언젠가 내가 슬플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기억해내면 그땐 난 슬프지 않지) - ‘My Favorite Things’
♪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 ‘미련’
♪ “Let it be”(순리에 맡겨라) - ‘Let It Be’
8090 발라드 들으면 기분 전환!
주로 듣는 음악 장르는 발라드, 팝송, 트로트 순으로 나타났다. 최근 트로트 열풍 속 한때는 주류였던 중장년 세대이지만, 그보다는 발라드나 팝송 등 감성적인 멜로디와 가사를 담은 음악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과반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음악을 선호하고, 최신 음악을 즐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기분 전환’(47.6%)을 꼽았다.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 ‘하얀나비’(김정호)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추억만들기’(김현식) ♪‘목마와 숙녀’(박인희) ♪‘그날이 오면’(노찾사) ♪‘서른 즈음에’(김광석) ♪‘너를 위해’(임재범)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 ‘For the Peace of All Mankind’(알버트 하몬드) ♪ ‘Billie Jean’(마이클 잭슨) ♪‘Non Ho L'eta’(질리오라 칭게티) ♪‘Almaz’(랜디 클리포드)
스마트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 플레이!
세월이 변한 만큼 중장년의 음악 감상 방식도 더욱 캐주얼해졌다. 대부분이 스마트폰 앱이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맘껏 듣고 있었다. 실제 음악 앨범을 구입하기보다는 인터넷 다운로드를 이용하는 이가 과반수다.
국내에서 시집 해설을 가장 많이 한다고 알려진 유성호(柳成浩·56) 한양대학교 교수가 첫 산문집 ‘단정한 기억’을 출간했다. 규준이 정해진 딱딱한 논문과 평론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글을 쓰며 모처럼 그는 ‘자연인 유성호’가 간직한 섭렵과 경험의 기억들을 가지런히 펼쳐보였다.
유 교수는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그가 이번 산문집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글까지 모았더니 하나의 범주로 묶긴 어렵더군요. 삶의 이력처럼 복잡한 장르의 글들을 정리하며 목표로 삼은 건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어느 시기에 내가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어요. 또, 살면서 저를 위해 애써준 분들이 쉽게 볼 만한 책을 선물하자는 거였죠. 그동안 평론 전문 서적을 더러 냈는데, 일반인에게 쉽게 읽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책은 평론가나 연구자보다는 어린 시절의 친구와 동창에게 많이 보냈어요. 저야 책 받는 게 익숙한 직업이지만, 그들에겐 책 선물이 귀하고 감동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잘 봤다며 선물도 보내오고, 몇 권 사서 주변에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는 무게를 덜고 소통 친화적인 글을 더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추억
산문집을 엮으며 과거를 음미하는 과정 속에서 유 교수는 지난날 곳곳에 남긴 삶의 흔적들과 마주하곤 했다. 그는 책에서 이러한 인생의 기억과 추억을 ‘물방울의 흔적’에 빗대 이야기했다. 요약하자면, 물방울이 머물다 날아간 ‘마른 흔적’은 그 물방울이 존재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지금은 그 물방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증과 같다는 것이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물방울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실체가 마른 흔적인 셈이죠.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요. 한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이제는 그것이 사라지거나 소멸했다는 ‘실감’ 사이에서 살아가니까요. 그런 점에서 ‘추억’은 물방울 그 자체가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이라 할 수 있죠.”
유 교수는 추억이 꼭 과거지향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의 ‘자화상’ 마지막 문장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에서, 이때의 추억은 지난날을 감싸 안으면서, 그러나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넘어서겠다는 성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추억이란, 기억되는 그 순간의 온기로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꿈꾸는 기억’과 같다고 표현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 가사에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 늙어가는 첫사랑을 만난다면 어떨까요? 반가움과 동시에 상실감도 들 겁니다. 추억은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거니까요.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앞서면 추억에서 ‘꿈’이 빠져나가고, 현재의 물리적 어색함만이 남게 됩니다. 오히려 꿈꾸는 기억으로 머물 때보다 더 왜소하고 허약한 추억이 될지도 모르죠. 그리움은 그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리워하는 마음과 행위 자체에서 빛을 발하고, 그것이 생을 아름답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에 반해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매몰돼 현실에 울분을 갖고, 젊은 세대를 부정하는 등의 행위는 경험적 한계에 갇힌 결과라고 해석했다.
“흔히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는 식의 경험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젊어본 적 있다고 뭔가를 더 많이 아는 건 아녜요. 가령 어딘가를 직접 여행한 사람보다 가지 않고 책만 본 사람이 그곳을 더 잘 알기도 하잖아요. 실제 가본 사람은 경험적 한계에 갇히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렇듯 젊은이는 늙어보지는 않았지만 늙음을 상상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막상 늙어서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죠.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을 내세우게 되고요. 옛날에도 말 안 듣는 학생은 많았는데, 마치 요즘 아이들만 유난하다고 지적하는 것처럼요. 그러니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등의 언행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역설적 기억, 청춘
물론 누군가의 과거 속엔 실제로 열정 넘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청춘’이라 부른다. 유 교수는 ‘청춘’이란 오히려 청춘을 지나버린 사람들의 생에서 발견되는 흔적, 즉 역설적 기억과도 같다고 일컬었다.
“청춘은 젊은 시절 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재적 생의 조건이 아닌, 뒤늦게 발견하는 기억의 형식이라 볼 수 있죠. 저 역시 지나고 떠올려보건대, 온전히 대학 4년이 제 인생의 청춘이었던 것 같아요. 미정형이던 육신과 정신이 그때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과 이후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됐고, 당시를 기점으로 생(生)이 갈라졌으니까요. 지금은 그때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책도 대학 시절의 것이 많은데, 그때 읽은 것이 진짜 책이고, 요즘 읽는 것들은 플러스알파라고 봐요. 말하자면 별책부록 같은 거죠.”
별책부록에 자주 비유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여생’(餘生)이다. 유 교수는 책에서 ‘향원익청’(香遠益淸, 향이 멀리 퍼질수록 더 맑아진다)을 언급하며 “자기 경험에 갇힌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향기를 전하는 노경(老境)의 모습이 간절한 때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여생’이 아닌, 소통과 공감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반 인생’을 살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부분 남은 생을 버티는 식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존경받는 어른으로의 후반생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고, 꿈에 그린 노후를 포기한 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유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로 자신의 말년을 위엄 있게 지켜나가길 바랐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긴 참 어렵죠. 그러나 그토록 힘든 만큼, 오히려 더 되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알 게 뭐야’ 하며 무신경하게 사는 이도 있겠죠.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기억도 있어요. 저도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부재함으로써 진정 존재하는 것들이 생기더군요. 사랑하는 사람, 나와 가치관을 나눈 이들에겐 내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시작되는 기억들이 존재해요. 아무리 내 삶이라도 그 기억의 용량까지 줄일 순 없잖아요. 가치 있다고 여긴 일들을 변함없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남기는 것이 삶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3월, 이달의 추천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일시 3월 5~17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출연 박영수, 신상언, 김도빈 등
서울예술단의 대표작 ‘윤동주, 달을 쏘다.’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완성도 높은 무대로 돌아온다. 시인 윤동주의 치열했던 삶과 예술을 담아낸 뮤지컬로 비극의 시대에 써내려간 그의 시(詩)들이 노래와 춤으로 어우러져 감동을 선사한다.
(행사) 2019 광양매화축제
일시 3월 8~17일 장소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강 매화마을 일원
전라남도 섬진강변 매화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광양매화축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축제다. 새하얀 눈처럼 만발한 매화와 아름다운 섬진강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산책로를 걸으며 백(白)매화뿐만 아니라 홍(紅)색, 청(靑)색 다양한 매화의 색과 향기에 취해보자. 인근 청매실농원에서 광양의 특산품인 새콤달콤한 매실도 맛볼 수 있다.
(클래식) 송영훈의 클래식 큐레이터, 낭만에 대하여
일시 3월 10일 장소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출연 해설가 및 첼리스트 송영훈, 비올리스트 이신규 등
클래식 음악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인 공연이다. 음악과 미술사의 숨은 이야기들을 대한민국 대표 첼리스트 송영훈이 이해하기 쉬운 해설과 수준 높은 연주로 풀어낸다. 차세대 클래식 아티스트들의 연주로 낭만시대와 인상주의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작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
일시 3월 15일~5월 12일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출연 이순재, 신구, 권유리, 채수빈 등
까칠한 성격의 고집불통 할아버지 ‘앙리’와 꿈을 찾아 방황하는 대학생 ‘콘스탄스’가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다. 세대 간의 갈등을 소통으로 풀어가는 주인공들은 보는 이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2017년 초연에 이어 이번에도 내공을 자랑하는 배우 이순재와 신구가 ‘앙리’ 역을 맡았다. ‘콘스탄스’ 역에는 권유리, 채수빈이 더블 캐스팅되어 색다른 분위기가 기대된다.
(행사) 제20회 구례산수유꽃축제
일시 3월 16~24일 장소 전남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온천관광지 일원
산수유꽃이 만발하는 지리산에서 봄의 정취와 시원한 고로쇠 약수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꽃축제다. 행사장에서 산수유꽃으로 만든 먹거리를 맛볼 수 있으며, 산수유떡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공연도 펼쳐진다.
(오케스트라) 노다메 칸타빌레 인 클래식
일시 3월 24일 장소 롯데콘서트홀
일본과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이 드라마 속 정통 클래식이 오케스트라로 찾아온다. ‘한국판 노다메 칸타빌레’인 KBS ‘내일도 칸타빌레’의 연주 대역을 맡은 피아니스트 이현진과 풀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로 클래식 음악을 새롭게 즐길 수 있다.
새해가 되니 한 살을 강제로 먹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삼킨듯해 못내 찜찜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약 먹기 싫어하는 나를 안고 가루약을 숟갈에 손가락으로 개어 입을 벌리고 강제로 입 안에 넣어 주시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작년 연말에 보았던 영화 에 나오는 30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알약이 불현듯 생각났다.
나이를 먹을수록 익숙한 것들이 좋아진다. 자주 가는 음식점에 또 가게 되고, 푸근한 옛 친구가 그립고, 옷도 늘 입던 옷이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편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저 편한 옛 습관에 기대는 게 머리를 쉬게 하는 길이니까. 그래서 늙으면 최백호가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 같은 노래나 들으며 도라지 위스키 한 잔 앞에 놓고 청승을 떨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익숙함’이 문제다. ‘익숙하다’는 것은 ‘익었다’는 뜻이고 익으면 ‘굳게’ 되는 것이고 굳으면 곧 ‘죽음’이 아닌가. 마치 강에서 강물과 함께 떠내려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이듯이 ‘익숙함’에의 안주는 죽음에 다가가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 몸은 왠지 새로운 것에 잘 적응을 못 한다. 스마트폰 쓰는 법을 배우고도 곧 잊어버리는 것은 ‘익숙하지’ 못해서일까?
지난달 모 신문에 실린 서울대학교 연구부총장인 신희영 박사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 박사는 의사로서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학교장과 통일의학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북한의 어린이 의료 지원 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최근 남북 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버리는 바람에 의료협력 사업이 몇 년째 중단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충격의 이유는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의 시각 때문이었다. 남과 북은 문화나 언어만 이질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질병도 그렇게 되었단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바이러스 시대로 진입했는데 북은 아직 세균 시대라는 것이다. 이 말은 갑자기 통일이 되었을 때 북쪽 사람들이 바이러스로 엄청나게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잉카문명이 천연두로 어이없게 멸망했듯이.
놀라운 것은 그뿐만 아니다. 북한 어린이들은 100%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데 그 덕(?)인지 아토피 같은 자가면역 질환이 없단다.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은 늘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대비하고 있는데 적이 없어 심심해지면 자신의 몸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균에 노출될까 봐 애지중지 청결하게 관리하는 젊은 엄마들이 새겨들어야 할 정보다.
익숙한 것만 쫓다가는 우리 생각도 자가면역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신 박사처럼 색다른 관점과 시각이 우리 머리에 창의적인 자극을 주고, 기생충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새해는 세월의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 신선한 물줄기를 쫓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싱싱한 한 마리 잉어가 되고 싶다. 모든 익숙함이여 안녕.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김동률 교수가 고 권태균 사진작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음미한 20곡의 노래와, 각각의 노래가 탄생한 장소에 관한 얘기를 곁들인 음악 여행 에세이다. 두 사람은 노래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 곡이 탄생한 당시 시대 상황과 뒷이야기, 그 시절 청춘들의 낭만과 사랑, 그리고 각각의 노래가 이 땅에 미친 영향 등을 탐색한다. 수록된 노래는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의 사랑과 그리움이 녹아 있는 것들이다. 아득한 낭만을 뒤로하고 세월 속에 야위어가는 추억을 이야기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비롯해, 문득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돌담길과 함께 회상하게 되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등 가버린 젊음과 옛사랑을 추억하며 묵직한 그리움에 젖게 한다.
INTERVIEW:: 늙은 노래를 위한 찬가를 부르다 의 저자 김동률
‘인생도, 청춘도, 꿈도 노래와 함께 간다. 열아홉 순정은 황혼 속에 슬퍼지고 얄궂은 노래와 함께 세월은 간다. 이 책은 삶의 신산함을 겪은 이 땅의 중년에게 바치는 소박한 헌사다.’ 의 저자 김동률 교수가 쓴 서문의 일부다. 늙은 노래가 많이 불리는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를 만나봤다.
을 통해 중·장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노래를 통해 지금 중·장년층의 곤고했던 지난 시절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굴곡 속에 험난하고도 신산한 삶을 보낸 중년세대에게 바치는 조그만 헌사’라고 하겠습니다. 386세대는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등 산업화의 과실을 누리면서도 민주화의 진통 속에서 고민이 많았죠. 보도블록을 깨 던지면서도 낭만을 꿈꾸었고, 그 과정에서 노래는 그 시절 황폐해진 젊음을 위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곡절 많고 사연 많은 파란만장한 시절의 의미를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소개된 노래 중 그때 그 시절, 그리고 현재까지 가장 큰 위로가 됐던 곡은 무엇인가요?
책에 수록된 모든 노래가 위로가 됩니다. 굳이 골라내자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그리고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꼽겠습니다.
요즘 대중가요 가사에 비추어 볼 때, 그 시절 노래에는 시처럼 아름답고 깊이 있는 가사가 많죠. 어떤 노래 가사를 가장 좋아하나요?
역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가 가장 뛰어나죠. 1,2,3절 모두가 폐부를 찌르는 페이소스가 녹아 있습니다. 생의 근원적인 슬픔을 건드린 이 같은 노랫말은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 나타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등의 구절은 김소월의 시구를 능가하는 빼어남이 있죠.
신촌은 예나 지금이나 젊음의 거리입니다. 신촌에서 음악과 얽힌 옛 추억이 있는지요.
대학 시절 신촌에서 하숙 생활을 했어요. 요즘 상업적인 홍대입구와는 다르게 그 시절 젊음의 거리였고, 386세대의 풋풋함과 순수함이 담겨 있죠. 당시 신촌 골목에는 락카페가 많았고 인근 여자 대학생과의 미팅 이후 생맥주로 사랑과 꿈을 나누곤 했습니다. 장밋빛 인생, 러쉬, 우드스탁 등의 술집은 386세대에게는 정신의 고향과도 같습니다.
책에 담지 못한 노래 중에서 중년들이 공감하고, 기억할 만한 게 많을 텐데요.
아직 담지 못한 노래가 많습니다. 고 김정호의 빼어난 명곡들, 서정성이 짙은 해바라기의 노래들, 강산에, 김수철, 그리고 7080시대를 풍미했던 히식스, 키 브라더스, 사랑과 평화 등등 그룹사운드들의 노래들도 앞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 김동률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10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YTN에서 와이드 인터뷰 프로그램 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