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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초조한 중년에게… “우리는 아직 성장 중입니다”
- 중년이 되면 초조함에 휩싸일 때가 있다. 어영부영하다가 인생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리면 어떡하나 싶다. 세상은 그 나이 먹도록 해놓은 게 얼마나 있냐고 다그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괴감에 빠져든다. 그래서일까? 딸이 당연히 알아서 잘살고 있으리라 여기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한성희 원장의 신간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는 그 걱정에서부터 시작됐다. 한성희 원장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한 살 아기부터 85세 노인까지 마음이 아픈 사람이면 누구든 만났다. 그 과정에서 평생에 걸쳐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정신적 문제를 지켜보고 치료해왔다. 43년간 다양한 사례를 접한 그지만 자식에게는 서툰 엄마였다. 10여 년 전, 딸이 공부를 위해 떠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한다 했을 때 깨달았다. 더 이상 품 안의 어린아이가 아님을, 이제는 독립할 만큼 자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료실을 찾은 환자들에겐 했지만 정작 딸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그 마음을 담은 글은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로 세상에 나왔고, 독자들의 공감을 받으며 21만 부가 판매됐다. “살면서 작가라고 불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죽기 전에 책을 한번 내보면 좋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은 있었지만요.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리라 상상도 못 했어요. 이제 아이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고, 서로 떨어져 산 지 15년이 됐네요. 작년에 직접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미국에 갔는데, 늘 앳돼 보였던 딸이 나름의 고민도 생긴 것 같고 지쳐 보였어요.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거죠.” 중간 지점, 또 한 번의 파도 한 원장도 서른일곱에 떠난 미국 연수 당시 이른 ‘중년의 위기’를 겪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며 초조한 와중에 일은 홍수처럼 쏟아졌다.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도 경력이 쌓이는 만큼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야 했다. 자유로운 시기는 끝났다고 여기며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살았다. 딸의 얼굴에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만약 마흔 살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면 엄마로서, 정신분석가로서 너무 늦기 전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신간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는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바람 잘 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전하는 응원을 담았다. “두 돌이 지나면 말이 시작돼야 하듯, 인생 단계별 발달 과업이 있어요. 40대는 생산성을 다뤄야 할 단계입니다. 삶의 스펙트럼이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회사와 가정의 일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시기거든요. 매일매일 전쟁일 거예요. 요즘 40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다고 느껴요.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고요.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미 부와 명예를 이룬 사람투성이죠. 그러다 보니 보통의 삶은 부족한 것이 돼버리고, 박탈감이 들 수 있어요. 게다가 오늘 열심히 한 그 일을 내일도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온전한 ‘나’는 없다며 우울해질 때도 있을 겁니다.” 더불어 바쁜 일상에 지치면 뭐든 새롭지 않다. 벌써 해봤거나, 했던 것의 변주 정도다. 무엇을 먹어도 비슷한 맛이고, 누구를 만나도 비슷한 얘기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지루하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옛날에 재미있었던 순간만 기억난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습관에 갇히게 된다. 다 해봐서 새로울 게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현재를 과거의 방식대로 살려고 하니 매사 심드렁해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까닭이다. 딛고 나아가며 성장하기 마흔 이후 혼란을 겪더라도 한 원장은 “겁먹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간은 유한하고 힘든 시절은 영원하지 않으며, 지나고 보면 가장 풍성한 때였구나 알게 된단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오느라, 세상이 부여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느라 억눌러온 내면의 욕구를 돌아봐야 한다.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었던 모습을 찾다 보면 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고, 어떤 시련이 오든 무너지지 않을 힘이 생길 테다. 남들이 뜯어말려도 강하게 끌리고 포기가 안 되는 길이 있다면 가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가 몇이든 무슨 상관이랴. 처음엔 의아한 선택처럼 보여도 선택이 쌓이고 쌓여 고유한 스토리가 된다. 대신 방향을 완전히 틀어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더 집중할 만한 거리를 찾는 게 먼저다. “그저 더 나아지고 싶은 건강한 본능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저는 환자 한명 한명을 심도 있게 치료하고 싶어 오십에 뒤늦은 개원을 준비했고, 지금까지 해왔던 정신분석 공부를 좀 더 깊이 있게 해보고자 예순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고 고민이 깊었지만, 시작도 해보지 않고 그만두기는 싫었어요. 의사로서 걸어온 길이 흔히 말하는 성공 공식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래도 자신의 느낌을 믿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게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스스로 완전한 어른이 됐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야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구나 짐작해요.”
- 2024-04-2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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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군주 이성계의 기백을 느껴지는 전주 경기전
-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햇살 좋은 봄날, 전주한옥마을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답다. 지난 한 해에 찾아온 관광객이 자그마치 1500만여 명이었다니 말 다했다. 한나절의 눈요기와 입요기만으로도 전주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는 이들이 많다. 한때 상혼에 치우쳤다는 핀잔도 들었다. 그러나 문화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이 늘어 균형이 잡혔다. 바야흐로 문화 요소를 결여한 관광지는 찬밥 신세로 추락하기 쉬운 시대다. 사실 전주한옥마을엔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달걀노른자처럼 박혀 있다. 겉은 상업의 성황으로 요란하지만, 속엔 역사 유산의 광량이 깃들어 찬연하다. 경기전(慶基殿)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한 공간이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1410년에 지었다. 천하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그린 어진은 단순한 추모의 수단이 아니었다. 임금 그 자체로 간주됐다. 어진이 있는 곳엔 임금이 머문 것과 맞먹는 수준의 위상이 부여됐다. 왕실의 영속을 기원하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경기전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우람한 나무들과 대밭이 있는 정원은 운동장처럼 널찍하다. 경기전의 핵심은 공간 중앙부에 조성된 정전(正殿) 구역이다. 홍살문으로 들어가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하자 본전인 정전에 닿는다. 경기전은 한마디로 왕실 사당이다. 태조의 넋을 기리는 제례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정전으로 이어지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혼령이 드나드는 문, 즉 신문(神門)이라 불렀다. 이 문들엔 기둥으로 분할한 세 개의 통로가 있다. 중앙에 있는 통로는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혼령이 출입하는 신도(神道)니까. 바깥쪽 두 통로는 인도(人道)로 쓰였다. 예교(禮敎)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시대의 종묘에 적용된 법식이 이렇게 엄격했다. 통로 끝엔 정전이 있고, 정전 한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감실 안엔 부용향을 담은 향 주머니를 넣어 냄새와 습기와 해충을 잡았다. 화재를 막아주는 벽사(辟邪) 용도로 설치한 두 가지 장치도 위트가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지붕 아래 붉은 풍판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거북 두 마리. 다른 하나는 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6개의 무쇠솥인데, 이건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 ‘드므’라 부른다. 지붕을 타고 내려온 화마(火魔)가 솥을 채운 물에 비친 자신의 살벌한 모습에 놀라 스스로 달아나게끔 설치한 구조물이라 하니 재미있다. 뭐니 뭐니 해도 관심 가는 건 태조 어진이다. 세조 때의 문신 신숙주가 쓴 ‘영모록’에 따르면 태조 어진은 무려 26점이나 됐다. 말을 탄 초상도 있었단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 경기전에 남은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은 원래부터 경기전에 있었던 원본이 오래되어 낡고 해지자 1872년에 원본 그대로 베껴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우뚝한 화가 8명이 합작해 그렸다. 이렇게 부활한 태조 어진의 진본은 현재 경기전 후원의 어진박물관에 소장됐고, 정전엔 복제본을 봉안했다. 망가진 원본은 항아리에 담아 정전 뒤편에 묻었다지. 조선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늘에 맞먹을 지존으로 섬김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을 세운 태조를 능가할 만한 공경의 대상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태조의 어진 봉안처만 해도 여러 곳이었다. 서울 문소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등에 각각 어진을 두었다. 그런데 오직 전주의 어진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전주를 ‘조선의 발원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주는 전주 이씨 이성계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조선의 뿌리가 전주에 박혀 있다는 얘기, 이거 빈말이 아니다. 어진에 드러나는 태조의 모습을 볼까. 그의 실제 키가 180cm에 달했다던가. 초상을 척 봐도 기골이 장대하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바위처럼 묵직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한 틀거지에 포스가 넘친다. 혁명 군주다운 도도한 기상을 테마로 삼아 초상을 그린 것 같다. 곤룡포와 용상엔 용틀임하는 금빛 용들을 연쇄적으로 집어넣어 군왕의 위엄을 돋우었다. 능란하게 휘저은 붓놀림의 자취도 볼 만하다. 색조를 달리한 배색으로 얼굴에 음영을 넣어 살짝 입체감을 살렸다. 오른쪽 눈썹 위에 묘사한 사마귀는 이 어진이 리얼리티에 충실한 그림임을 알게 한다. 풍남문에 걸렸던 순교자들의 머리 경기전 건너편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전동성당이 있다. 경기전 답사를 마친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전동성당으로 이어진다. 저만치서 바라보이는 돔 부위만으로도 아름다워 자력에 끌린 양 성당 정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성당과 마주하기에 이르면 이젠 심취하게 마련이다. 전동성당의 완벽한 건축미에 반해서. 성당의 고고한 내면성이 느껴져서. 건축가 김광현에 따르면 전동성당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 성당이나 독일 뒤렌에 있는 성 안나 성당보다 ‘훨씬 영성적’이다.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감히 영성까지 운운하기 어렵지만, 유려한 건축미에 서린 깊고 따뜻하고 순수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전동성당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배합해 쌓았다. 1908년에 착공, 23년에 걸친 공사로 완성했으니 100여 년 세월이 내려앉은 건물이다. 그러나 세련된 건축 메커니즘과 정교한 디자인이 빼어나 고색을 느끼긴 어렵다. 이 성당이 야기하는 미감은 정면 중앙에 높이 솟은 종탑부와 양쪽 계단 탑의 돔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성당 내부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궁륭형 천장의 곡선이 흘러내린 아래편 좌우에 펼쳐진 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머니의 체온처럼 따사롭다. 성당을 떠받친 기둥 행렬, 수평 또는 수직으로 펼쳐진 벽돌 벽들, 신비감과 안락감을 풍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도 빼어나다. 전동성당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순교의 피와 얼이 배어 있는 터에 세운 성소라는 데 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 전동성당 코앞엔 풍남문이 있다. 전주의 역사성을 웅변하는 성문으로 반월형 옹성(甕城)이다. 원래 전주성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지만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성은 고려 말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주도해 지었다. 그는 전주성에서 우거진 축성 솜씨로 숭례문(남대문)을 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동성당과 풍남문은 불행한 역사를 공유했다. 효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머리가 풍남문에 걸렸던 게 아닌가. 한편 순교 터에 전동성당을 지을 때엔 풍남문의 허물어진 성벽 돌들이 성당의 주춧돌로 쓰였다. 굳센 신앙은 세상의 잔인함에 패하지 않는 법. 순교자들의 영혼은 성벽 돌에 얹혀 마침내 전동성당을 이루었다. 성당 사방으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햇살이 쏟아진다. 천지가 유독 환하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 일찍부터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이 있었다 “전주시는 흔히 말하는 대로 ‘맛과 멋의 고장’이다. 고유한 음식 문화와 예술의 발달로 형성된 멋을 빼놓고 전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맛과 멋’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과거의 경제적 여유에 그 근원이 있다. 전주는 농산물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농업지대였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먹거리 풍부한 곡창지대였던 데에서 전주의 문화와 정서가 토착화됐다는 뜻이다. 전주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에 의해 ‘음식 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통으로 이어진 문화와 예술의 파워 역시 타 도시를 능가한다. 나 원장의 얘기는 전주 사람들의 ‘포용력’에 관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는 원광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전주 사람들은 외지인을 격의 없이 품는다. 예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풍토가 여실했다. 이는 전주만이 아니라 호남권의 보편적 경향이었다. 가령 고창읍성을 축조할 때 전라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탰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 거기에서 나온 포용력. 이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선 양반들의 지배 문화가 횡행했다. 호남권의 서민 문화는 어떠했다고 보나? “전라도에선 서민 문화가 발달했다. 예컨대 호남엔 농부들이 일하다가 모여 쉬는 모정(茅亭)이 매우 흔했다. 이는 사대부들이 즐긴 누각 문화가 발달했던 영남권과 다른 양상이다.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켜낸 서민 출신 의병이 유독 많은 곳도 호남이다. 일찍이 발동한 서민 문화가 민중의식의 싹을 틔웠고, 그게 동학혁명 같은 민권운동으로, 나아가 민주의식으로 발화했다. 전주 특유의 ‘포용력’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상은 이기적인 경쟁과 과욕이 만연해 삭막하다. 전주라고 예외일까? “현대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힘에 좌우되며 돌아간다. 전주엔 좌절감에 가까운 정치적 소외감이라는 게 있다. 넉넉한 전통적 정서와 자긍심이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문화의 힘, 문화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우리 문화원은 지역의 뿌리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쓸모 있는 책자들을 다수 발간했다. 전통문화를 현대적 매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콘텐츠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실로 많다. 한옥마을의 역사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면? “항일의식의 발현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된 배경을 알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엔 일본인이 대거 유입돼 집을 짓고 살았다. 전주가 통째 일본인 땅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전주의 뜻있는 부자들이 나서서 한옥 다수를 지으며 대응했다. 이렇듯 전주를 지키자는 민의의 힘으로 형성된 게 한옥마을이다.” 경기전 내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전주사고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모면하고 유일하게 실록을 보존한 사고다. 전주의 선비와 머슴들이 필사적으로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나 원장은 이 역시 전주의 빛나는 역사 대목으로 꼽았다.
- 2024-04-1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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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과적 연금 활용 위해 꼭 기억해야 할 숫자들
- 다양한 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해온 김 씨는 연금제도마다 차이 나는 내용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제대로 연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시점과 기간이 있다는 것과 연금계좌 가입 시기에 따라 연금 수령 한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 씨가 연금 인출을 위한 기준을 명확히 알기 위해 상담을 신청해왔다. 55세 연금계좌 가입자가 연금 인출 설계를 할 때는 55세를 꼭 기억해야 한다. IRP와 연금저축계좌는 세법상 연금계좌다. 연금계좌는 연간 납입 금액 900만 원 한도로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세액공제율은 소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총급여 5500만 원 혹은 종합소득 5000만 원 초과자의 세액공제율은 13.2%, 미만자는 16.5%다. 세액공제 혜택을 받은 연금계좌의 원금과 수익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55세 이후 정해진 연금 수령 한도 내의 금액으로 연금을 수령해야만 저율의 연금소득세(3.3~5.5%)가 적용된다. 그렇지 않고 55세 전에 인출하거나 55세 이후라 하더라도 연금 수령 한도 금액을 초과하여 인출하는 금액은 16.5%의 기타소득세를 과세한다. 연금 수령 한도 계산 방법은 마지막 ‘2013년 3월 1일’ 코너에서 살펴본다. 10년 공적연금은 국민연금과 직역연금(공무원연금, 사립학교교직원연금, 군인연금, 별정우체국직원연금)으로 나눈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최소 10년을 납입해야 노령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0년 미만이면 납입한 보험료에 이자를 더하여 60세가 되었을 때 반환일시금을 지급받는다. 실직, 사업 중단 등의 사유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한 자는 추후납부(추납)를 활용해 미납 보험료와 이자를 내면 납부 기간을 채울 수 있다. 추납으로 보완할 수 있는 납부 기간은 10년이 한도다. 직역연금도 연금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최소 재직 기간이 필요하다. 2016년 전에는 20년이었던 최소 재직 기간이 2016년 이후 군인연금을 제외하고 10년으로 단축되었다. 만약 국민연금 가입자가 10년을 채우지 않고 퇴사하고 공무원이 되거나, 공무원이었던 자가 10년을 재직하지 않고 퇴직 후 국민연금 가입자가 된 경우에는 자칫 연금의 사각지대가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두 연금의 가입 기간 합계가 10년 이상이면 공적연금연계를 통해 각각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다만, 두 연금 각각 최소 가입 기간 1년은 충족해야 한다. 다음은 사적연금에서 10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자. 보험사는 세액공제 혜택이 있는 세제적격형 연금과 세액공제 혜택이 없는 세제비적격형 연금을 모두 판매한다. 세제비적격형 연금은 세액공제 혜택은 없지만 일정한 범위 내의 가입 금액은 가입 후 10년이 지나면 연금으로 수령하든 일시금으로 수령하든 아무런 세금이 없다. 세제적격형 연금도 10년이 의미가 있는데, ‘2013년 3월 1일’ 코너에서 다루도록 한다. 5년 국민연금과 직역연금(군인연금 제외) 모두 정상적인 연금 수급 연령보다 최대 5년 전부터 조기 수령이 가능하다. 대신 조기연금을 수령하면 정상 연금보다 일정 비율 감액된다. 국민연금은 1년 단위로 6%, 직역연금은 1년 단위로 5% 감액한다. 정상적인 연금 수급 연령보다 5년 일찍 연금을 수령할 경우 국민연금은 30%, 직역연금은 25% 감액된 금액을 수령한다. 공적연금 수급 대상자가 소득이 있으면 연금의 일부 또는 전액이 지급 정지될 수 있다. 국민연금 수급 대상자는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을 합한 금액이 ‘국민연금 전체 가입자의 3년간 평균 소득월액’보다 많으면 정상 연금의 최대 50%까지 감액한다. 감액 대상 기간은 최대 5년이다. 직역연금은 연금 수급 대상자가 공무원 등에 재임용, 선거에 의한 선출직 공무원이 되는 경우, 정부가 전액 출자 또는 출연한 기관의 임직원이 되어 근로소득이 전년도 공무원 전체 기준소득월액 평균액의 1.6배가 넘는 경우에는 전액 지급 정지된다. 직역연금의 일부 정지는 연금 수급 대상자의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을 합한 금액이 전년도 직역연금 평균 월액을 초과할 때다. 연금액의 50%가 최대 감액 비율이다. 직역연금 지급정지 적용 기간은 국민연금과 달리 별도로 정해진 기간이 없고, 취업·취임 또는 개업일이 속하는 날의 다음 달부터 퇴직·퇴임 또는 폐업일 전날이 속하는 달까지다. 국민연금은 연금 수급 개시를 연기할 수 있는데, 최대 5년까지다. 국민연금 수급을 연기하면 정상적인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의 연금액보다 1년 단위로 7.2%씩 증액시켜주는데, 5년을 연기할 경우 36%의 금액을 더 수령할 수 있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되었을 때 소득 발생으로 연금액이 감액되는 것을 원치 않으면 연기연금제도를 활용하면 된다. 직역연금은 연기연금제도가 없다. 국민연금과 직역연금은 연금 수급 대상자가 이혼했을 때 배우자에게 ‘분할연금’을 지급한다. 연금 가입 기간 중 실질적 혼인 기간이 최소 5년 이상 되어야 분할연금 지급 대상이 된다. 분할연금제도 시행은 국민연금은 1999년 1월 1일, 공무원연금·사학연금·별정우체국연금은 2016년 1월 1일, 군인연금은 2020년 6월 11일부터다. 각 연금제도의 분할연금은 법 시행 이후 분할연금 수급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만 적용한다. 사적연금 중 세제적격형 연금은 10년과 아울러 5년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2013년 3월 1일’ 코너에서 같이 다루도록 한다. 2013년 3월 1일 세제적격형 연금계좌는 2013년 3월 1일 전 가입자와 이후 가입자의 의무가입 기간과 연금 수령 기간이 차이가 난다. 2013년 3월 1일 전에 가입한 세제적격형 연금계좌는 최소 10년 납입하고 55세 이후부터 최소 5년간 연금으로 수령해야 연금 수령 시 저율의 연금소득세(3.3~5.5%) 혜택을 누릴 수 있다. 2013년 3월 1일 이후 가입하는 세제적격형 연금계좌는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은 55세지만 최소 가입 기간이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었고, 세법상 연금 수령 한도 금액 내에서 수령해야 한다. 세제적격형 연금계좌의 연금 수령 한도 계산식은 다음과 같다. 연금 수령 연차는 2013년 이후 만들어졌다. 2013년 3월 1일 전에 연금계좌를 개설한 사람은 연금 수령 기간 5년을 적용하기 위해 연금 수령 연차를 6으로 시작한다. 만약 2013년 3월 1일 전에 퇴직연금(DB포함)에 가입한 사람이 퇴직급여 수령 후 60일 이내에 새로 개설한 연금계좌에 전액 이체하면 연금 수령 연차를 6으로 시작한다. 또한 의무납입 기간(2013년 3월 1일 전은 10년, 이후는 5년)을 다 채운 연금계좌의 연금수령 한도의 연금 수령 연차는 연금을 수령하지 않더라도 연금 개시 가능 연령인 55세부터 연금 수령 연차를 계산한다. 연금 수령 한도는 퇴직급여를 연금계좌로 이체하는 경우에도 적용한다. 퇴직급여를 연금 수령 한도 내의 금액으로 수령하면 연금 수령 기간 10년 동안은 퇴직소득세의 30%, 10년 초과하여 연금을 수령하면 퇴직소득세의 40%를 절세할 수 있다. 다만, 퇴직연금 가입자가 퇴직급여를 연금계좌로 이체하는 경우에는 의무납입 기간 기준은 적용하지 않고 연령 기준인 55세 기준만 적용한다. 따라서 2013년 3월 1일 전에 퇴직연금에 가입한 가입자가 60세에 퇴사하면서 받은 퇴직급여를 새로 개설한 연금계좌로 전액 이체하면 퇴직급여 전액이 연금 수령 한도 내의 금액이 되어 퇴직급여 전액을 일시금으로 찾아도 퇴직소득세 30%를 절세할 수 있다.
- 2024-04-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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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위로가 되는 어른의 글
- 김창완 ○○○님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셨는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외로움에 빠지지 마시고 외로움이 세상을 보는 창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람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그걸 어떤 사람은 감옥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손을 내밀 문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선은 님의 외로움을 껴안으세요. -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사연 답장 중 나태주 다시 중학생에게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아이야 잊지 말아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 《마음이 살짝 기운다》 중 밀라논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시작할까? 말까? 나 또한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숱한 고민을 했고 그때마다 되도록 단순하게 생각했다. “재밌으면 해보면 되지!” 모든 어른과 아이가 자기 인생에 마땅히 용기를 내면 좋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 말고 시작해 보라. 그것에 대한 결과와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짊어지면 된다.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중 김창옥 내게 “괜찮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엄마 아빠가 없었다면 그냥 내게 그런 부모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세요. 그리고 상처 난 마음이 낫고 싶으면, 나 자신을 터치해주세요. 사람은 기억을 머리에만 남기는 게 아니라 온몸에 남긴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나를 안아주는 건 나의 지워지지 않은 기억을 안아주는 것과 유사하대요. 스스로를 두 팔로 안고 토닥토닥해주세요. - 《지금까지 산 것처럼 앞으로도 살 건가요?》 중
- 2024-04-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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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나태주가 말하는 어른, “잘 마른 잎 태우면 고수운 냄새 나”
- 이견이 없었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어른은 누구일지 고민했던 편집회의에서 기자들은 나태주 시인을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대중도 마찬가지다. MZ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그는 인기를 넘어 추앙에 가까운 현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낯익어진 마이너한 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팬덤 같은 것이죠. 날씨도 팬덤이 되고 계절도 팬덤이 돼요. 눈과 비가 고르지 않게 한꺼번에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것뿐이죠. 낯익고 익숙한 것을 찾는 거예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다. 최근 출간된 그의 신간 ‘좋아하기 때문에’는 발매 2주 만에 1만 부나 팔렸다. 요즘같이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꿈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이 단지 친숙함에 습관처럼 살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는 책을 통해 “시인은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돌보는 서비스맨”이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통했던 것 같다. 마치 ‘풀꽃’의 한 구절처럼 나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봐주길 기대했기 때문일까. 책을 내놓을수록 20~30대 사이에서 강한 소구력을 발휘했다. 그 소감의 물결에선 희망과 위로, 치유 같은 단어들이 떠다녔다. 타인 감수성과 꼰대 이런 공감대 속에는 어른다움이 있다. 젊은 세대가 ‘꼰대’에 저항하는 이유를 그는 어른의 이해와 변화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이해의 기준으로 ‘타인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투 현상’이 사회를 뒤흔들 때 익숙해진 ‘성인지 감수성’에서 온 말이다. 이제 세상은 내 입장만 고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변에선 ‘타인 감수성’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니까, 시인은 더 좋은 표현이라며 그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나 하나와 나머지의 너로 나뉘어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나를 빼면 모두 ‘너’이기 때문에, 너를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꾸 나 때만 얘기하려 들고, 네 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네 때는 그렇구나, 그거 참 힘들겠다 하고 관심 갖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거죠.” 그는 책 속에서도 꼰대를 상징하는 신조어 ‘라떼’를 지적했다. 어른과 젊은이 쌍방이 조금씩 물러서서 상대를 이해하기를 기대했다. 어른 쪽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도 변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만큼 다양한 약속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지만, 가장 즐거운 일정이 있다. 젊은 세대와 만나는 강연회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만나서 어려운 점, 괴로운 점, 그늘진 점을 봐요. 겉으로는 멀쩡하고 좋아 보이는 청춘들도 소통을 해보면 문제가 있어요. 결혼이 싫은 여성, 학교가 힘든 선생님, 취업이 힘든 청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주려 노력하고 있죠.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고, 도움 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만으로 부모 노릇이 끝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져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해요. 어른이 됐다는 건 졌다는 것이니까요.” 젊은 세대가 갖는 아픔에도 주목했다. 학자금 대출 등으로 ‘젊은 빚쟁이’가 되고, 구직난에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지만, 망가진 경력은 쉽게 되돌릴 수 없어 ‘손닿는 직장’을 선택하기도 어려운 고충에 대해서다. 그는 “가서 막일이라도 해라”가 어른 눈에는 맞는 말 같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어른들이 더 주목해주길,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하길 당부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유교 사회도 농본주의 사회도 아니에요. 편리한 것, 새것을 좇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미 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무조건 어른을 따르라 요구할 수 없어요.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떠도는 (디지털) 유목 사회가 됐어요. 내가 만든 우유 한잔도 휴대폰을 뒤져보지 않으면 팔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노마드처럼 살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죠.” 바뀐 세상에 맞춰 그 스스로도 변화를 택했다. 그는 “나 역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한창 일했던 시기보다 정년퇴직 후 내 생활은 더 많이 바뀌었죠”라고 말했다. 모두 비워내야 좋은 어른 최근에는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어른이 많아졌다. 인문학 강좌의 주제로도 인기가 많다. 세대 간 갈등이 부각되면서 스스로를 고민하는 기성세대가 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태주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좋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젊은 시절은 스스로를 채워야 하는 기간이에요. 이기적인 삶이 되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요. 돈도 명예도 지위도 얻으려면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요.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젊을 때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상 타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아닌 내 내면의 기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철이 드는 과정이죠. 이것을 위해서는 젊을 때 스스로를 꽉 채워놓을 필요도 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을 통정성에 빗대 이야기했다. 살아온 삶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잘못도 인정할 수 있게 돼요. ‘그 대목은 참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었고, 지금 같으면 안 할 텐데 그때는 내가 그랬다’고요. 어른이라면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자기 잘못까지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해요. 우리 사회나 국가 운영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젊을 때 맘껏 채우고 나면 이후에는 비우는 과정이 찾아온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야 돼요. 어떻게 비우고 갈 것인지. 때려 부숴서 비우고 갈까, 곱게 정리해서 도움이 되게 할까 말이죠. 지금 운영하는 풀꽃문학관도 나를 비우는 작업이에요. 그간 모아놓은 것들을 쓰레기가 아닌 보물이 되도록 정리하고 있어요. 이것들을 욕심내 집에 데려가는 순간 쓰레기가 될 거예요.” 그렇게 잘 비우고 간 인물 중 하나로 나태주 시인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청년 시절 누구보다 채우기에 열중했고, 말년에는 자기를 완전히 비워놓은 ‘선비’ 같았다고 평가했다. “옛날 교사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간 운동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모아다가 태운 적이 있어요. 아직 푸르름이 남아 있는. 그 잎들을 태우면 아주 역겨워요. 아직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이 남아 그런 것 같아요. 그에 반해 가을이 되어 탈색되고 말라 떨어진 낙엽들을 태우면 냄새가 고숩고, 가볍게 훨훨 타요. 모두 비워냈기 때문이고, 사람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선거로 인해 정치적 성향이나 세대, 지역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요즘이다. 서로가 상대의 생채기를 기대하며 날선 감정을 말과 글에 담아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팔방이 열려 동서남북이 다 보여요.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왜 동쪽 사람, 서쪽 사람, 남쪽 사람, 북쪽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나요. 다 동지고 친구죠. 인생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죽일 사람도 살릴 사람도 없어요. 성인들처럼 훌륭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BTS와 이생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민이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은 가야 할 길이 멀어 고민이지만, 중년이 넘으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진다. 나태주 시인은 청년과 중년 혹은 노년은 접근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청년들은 미래를 위해 10년짜리 계획이 필요하지만, 중년은 5년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 5년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차근차근 꿈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갖고 준비해야 하고, 중년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방식도 달라져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하는 일만 하려다가는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처를 입어요. 좋아하는 일은 노력하면 잘할 수 있지만 잘하는 일이 좋아지긴 어렵죠. 길게 보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해요. 그래야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대예요.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남은 인생 동안 성공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늘 말과 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는 요즘 말에도 관심이 많다. 신조어와 노래 가사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BTS의 노랫말을 모티브로 한 노래산문집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야기 나누는 동안 요즘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젊은 엄마들이 쓰는 ‘육퇴’(육아퇴근)가 그랬고, ‘독박육아’나 ‘라떼’(꼰대를 상징하는 말)가 그랬다. 그는 ‘이생망’을 지목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줄임말이다. “요즘 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말이에요. 절망적이죠. 왜 망했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생이 망했으면 다음 인생도 망한 인생이 돼요. 좀 부족해도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포기할 수 없어요. 모두 성과에 급급하니 나오는 말이에요.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그는 젊은 세대에 대한 당부를 이어갔다. 많은 장소에서 만난 힘들고 지친 청년들이 잊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너무 큰 꿈에 매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커진 꿈을 원해요.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듯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치려고 하죠. 하지만 집채만 한 큰 것을 바라다가 안 되면 부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어져요.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그것을 성취하는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어요.”
- 2024-04-0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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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 #고립 #디지털시대 #개인주의’ 사회 속 ‘어른’의 의미란?
- 초고령사회가 되면서 나이 많은 사람은 늘어나고 있지만 전문가들이나 관련 통계, 트렌드 서적에서는 어른이 줄어들다 못해 ‘없다’고 말한다. 진짜 ‘어른’이란 어떤 존재일까? 대한민국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아무래도 현시점에서 어른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필요해 보인다. ‘트렌드 모니터 2024’에 따르면 요즘 사람들에게는 어른, 친구, 직장 동료가 부족하다고 한다. 무엇이 올바르고 잘못됐는지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을 주변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고, 상식에 어긋나는 의사결정을 할 때 바로잡아 주고, 함께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시대상이 됐다. 대중도 누군가의 부재를 내포한 모양새다. 책조차 아주 가까운 사람이 술자리에서나 해줄 법한 서슴없는 조언을 담은 ‘세이노의 가르침’, 거의 모든 현대인이 바라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현실을 직시하는 ‘원씽’ 등에 열광한다.(교보문고 상반기 베스트셀러 비교) 저자들은 어떤 사건에 대한 사전적 지식보다 당대에 먼저 겪어본 감정을 공유해준다.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삶에서 조언 제공자, 인생 선배와의 소통에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날것의 충고를 전한다. 어쩌면 우리는 친구든 직장 동료든 이웃이든 관계와 나이를 떠나 먼저 판단해본, ‘진짜 어른’을 갈망하는 걸지도 모른다. #믿고 따를 만한 존재가 없다? 어른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는 여러 전제가 있다. 우선 ①사회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일 테다. 어른의 요건으로 간주하는 일들이 치솟는 물가와 취업난, 끝없는 경쟁과 압박 탓에 점점 지연되는 추세다. 10~20년 사이 우리나라는 압축 성장을 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이제는 직접 번 돈으로 집을 사고, 결혼 준비를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N포 세대’라는 용어가 생긴 지도 오래다. 연애, 결혼, 출산, 경력, 집,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한 이들을 일컫는다. 보장되지 않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보다 즐기겠다는 ‘욜로’, ‘탕진’과 같은 말까지 파생됐다.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다 보니 자연스레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진다. 흔히 떠올리는 책임감과 포용력을 갖고 주변을 돌보는 모습과는 반대다. ②간혹 어른이 필요 없다 여기는 이들도 있다. 해당 현상은 1980~199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부터 두드러진다. 성장 경험이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지속적인 산아제한정책의 추진으로 형제 수가 줄어들면서 부모의 자원을 독차지하게 됐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창구도 늘었다. 물질적·정서적 결핍을 느낄 일이 비교적 줄어든 셈이다. 이민영 T&D 파트너스 대표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늘고 있다”며 “궁금한 점이 생기면 검색을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료를 얻으니, 선배에게 질문 있다며 먼저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른을 굳이 찾지 않고 원하지 않다 보면 자연스레 어른의 필요성 또한 사라질 수 있다. ③어쩌면 우리는 슈퍼맨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 하나 부족하지 않은 인간이 과연 있을까. 어른의 기준은 명확히 세우기 어렵다. 내가 꿈꾸거나 남에게 바라는 바를 자세히 떠올리다 보면 마치 옛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이나 성인군자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의지하고 싶은 존재란 누구인지, 어른은 어떤 가치를 전해야 하는 건지 모호하다. 조관일 창의경영연구소 대표는 “세계적으로 덕망 있고 존경받는다고 알려진 이도 부족한 점이 있기 마련이다”라며 “완벽한 한 명을 오매불망 기다릴 게 아니라 친구나 가족, 상사가 가진 고유한 매력 중 배우고 싶은 부분을 골라 체득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툭하면 꼰대 취급, ‘나이·경력 무관’ ‘꼰대’는 어른 하면 꼭 따라붙는 단어다. 갈등이 심화된 세상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최고의 수단이기도 하다. 상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무턱대고 내뱉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 이처럼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흔치 않다. 멀쩡한 사람도 이 한 단어를 덧씌우면 아무 소리 못 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대 간 갈등을 보여주는 증표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젊은 꼰대’까지 등장하며 나이와 경력이 상관없어졌다. 조관일 대표는 “이전에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으로 거들먹거리는 어른’을 뒷전에서 비아냥대거나 흉보는 은어나 속어 정도였지만, 이제는 상용어가 됐고 면전에서도 꺼낼 정도”라며 “사람을 규정하고 옥죄는 프레임으로 진화했다”고 전했다. 이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어울려 일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별거 아닌 이유로 골이 깊어진다면 피차 손해다”라고 꼬집었다. 조 대표는 모든 관계의 문제가 입장 차이에서 온다고 이야기한다. 상사와 부하, 시어머니와 며느리같이 처지가 달라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입장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또래라 하더라도 역할이 다르면 관점과 논리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렇게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고 불통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을 자주 던지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게 답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짐작해서다. #뻔하지만 가장 어려운 존중과 공존 ‘어른의 부재’는 10년 전에도 화두였다.(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 2014) 이민영 대표는 서로의 목마름을 해결하고 어른답게 살려면 ‘경청과 공감’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물론 부와 명예, 책무를 떠나 내면의 소리를 면밀히 듣고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먼저다. 자신만의 선입견으로 현상을 바라보거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과거에 알던 것에 집착하고 남에게 생각을 강요하면 안 된다. 조 대표는 선배 세대에게는 ‘우·황·청·심·원’(①우월적 지위는 잊어라 ②상황이 변했음을 알라 ③청년 시절을 돌아보라 ④심판하지 말라 ⑤원칙을 지켜라)을, 후배 세대에게는 ‘이·미·자·이·사’(①이유 없이 삐딱하지 말기 ②미래에서 오늘을 보기 ③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기 ④이상과 현실을 직시하기 ⑤사람의 소중함을 알기)를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능력이나 경험은 타인이 알아줘야 가치 있고, 존경은 권리가 아니라 성취다”라며 “‘어쩌다 어른’일지라도, 최소한 합의된 역할을 잘 수행하며 더불어 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이미 결정한 일에도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부작용 또한 예상하기 힘들다”며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를 조금씩 보듬어주며 벌어진 틈을 좁혀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 2024-04-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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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의 섬 무리, 고군산군도… 중국 사신도 감탄한 절경
- 한낮인데도 바다 위에 띄워진 고깃배는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멈춰 있다. 바위섬 저편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선을 고정한 채 바다를 향한 낚시꾼의 뒷모습이 한가롭다. 물때에 맞춰 바닷길이 열리면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서 당도하는 작은 섬의 기적을 날마다 마주한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그저 적요하기만 한 카페는 감성을 품었다. 섬이라는 음절이 전하는 서정성은 쓸쓸함과 평온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섬 안으로 찾아드는 자발적 고립이 주는 진정한 휴식, 더 볼 것 없다. 섬의 군락 고군산군도로 떠난다.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다섯 개의 섬이 내륙과 다리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는 새만금방조제를 관통하며 섬으로 향한다. 시원하게 뚫린 30km가 넘는 방조제 도로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길목마다 전망대와 쉼터가 마련돼 있고, 그중에 해넘이 휴게소는 신비로운 일출과 일몰을 보여주는 곳이다. 고군산군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고즈넉한 섬마을 야미도의 평온함도 스쳐 지나간다. 고군산군도에 닿기 전부터 가슴 확 뚫리는 풍광이 반기는 새만금방조제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다도해 절경을 한눈에, 신시도 전북 군산시 남서쪽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6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군산의 섬 무리’라는 뜻의 고군산군도는 그 옛날 중국 사신 서긍이 고려 방문기를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에서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천혜의 경관과 생태자원으로 고군산 8경으로 불리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신시도에 닿는다. 새만금방조제와 곧바로 연결된 고군산군도의 관문이며, 군도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섬이다. 섬을 둘러싼 199봉에서 월령봉과 대각산으로 이어지는 신시도 산행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코스라서 찾는 사람이 제법 많다. 계절이 무르익을 때면 고운 단풍이 달빛 그림자와 함께 바다에 비친다는 월영단풍은 고군산 8경에 속한다. 섬 속의 국립신시도자연휴양림은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가에 지어진 친환경 휴양림으로 매월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숙박과 상관없이 입장료만 내면 휴양림 주변 탐방이 가능해서 평소에도 산책이나 트레킹을 위한 방문객들이 찾아든다. 산책로를 걸으며 만나는 달맞이 화원이나 전망대를 지나면서 마주하는 숲과 탁 트인 바다는 복잡한 도시를 떠나온 이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내다보는 저 멀리 고군산대교의 주탑과 섬들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시적 풍광과 SNS 감성 품은 무녀도 신시도에서 곧바로 무녀도로 건너오면 따스한 섬마을 풍광이 맞아준다. 섬에 들면서 무녀도라는 지명이 혹시 김동리 소설 ‘무녀도’와 관련 있을까 생각했지만 섬 이름의 유래는 따로 있었다. 섬의 형태가 마치 장구와 술잔을 놓고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처럼 보여 무녀도라 불렸다고 한다. 무녀도에서는 단연 쥐똥섬이 볼거리다. 섬마을 앞바다 저편으로 몇 걸음도 안 된다. 물때에 따라 바닷길이 열리면 질펀한 갯벌 사이로 섬까지 걸어가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련하다. 쥐똥섬 해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똥섬 역시 독특하다. 약 900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무녀도의 똥섬은 시간이 만들어낸 지질구조를 보여준다. 똥섬을 옆에 두고 자리 잡은 펜션 아래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걸어가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무녀도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섬 앞에 시선을 끄는 노란 버스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이 스쿨버스를 개조한 것이다. 무녀 2구 마을버스라는 버스 카페는 서해 오션뷰가 끝내준다. 청량한 바다와 푸른 하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섬 풍광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이뿐 아니라 젊은 층에게 무녀도가 핫플로 소문난 데는 이국적인 버스 옆에 자리한 방탄소년단의 RM 벽화도 한몫한다. 오래된 바닷가 마을의 원시적 풍광과 함께하는 무녀도는 지금 SNS 감성이 풀풀 나는 매력 또한 품고 있다. 신선이 노닐던 섬에서 한나절, 선유도 무녀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선유도다. 예전부터 고군산군도의 섬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섬이다. 섬 북단의 봉우리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선유도다. 이름조차 신선이 놀던 섬이라는 선유도(仙遊島)는 군도의 중심 섬이다. 겨울 끝자락인데도 해변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선유 8경 중 하나로 고운 모래가 10리나 깔려 있어서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해변 너머로 망주봉이 듬직하다. 그 옛날 억울하게 유배된 충신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유래가 깃든,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3호인 망주봉이 물이 빠져나간 갯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름철엔 망주봉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폭포수가 되어 시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석양이 지는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 선유낙조(仙遊落照)는 선유 8경의 으뜸이다. 요즘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 위에서 즐기는 짚라인이나 전기 스쿠터와 자전거, 섬 투어를 위한 유람선, 도보 산책이나 갯벌 체험 등의 재미거리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주변에 옥돌해수욕장의 선유봉 등산길과 명품 데크길도 찾아볼 만하다.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장자도와 대장봉 이제 선유도 맞은편의 장자도를 가기 위해 장자대교 위를 달려간다. 장자도는 대장도를 가기 위한 길목인데 장자도의 호떡마을이 유명해서 오가는 여행자들의 손에 호떡 하나씩 들린 걸 쉽게 본다. 장자도에 딸린 대장도는 선유도나 무녀도에 비해 작은 섬이지만 오밀조밀한 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섬 깊숙이에서 맛보는 자발적 고립의 행복을 누려볼 만한 포인트다. 고군산군도에 들어섰다면 대장도의 대장봉을 빼놓을 수 없다. 오르는 코스는 두 군데 길이 있는데, 우측 장자할머니 바위 쪽 계단길이 수월한 편이다. 비밀의 정원처럼 좁은 숲속을 걷는 듯하다가 정자 쉼터에 앉아 잠깐씩 숨을 고르고 올라야 한다. 해발 140m 정도지만 절대 만만치 않다. 정자 쉼터 기둥에 쓰인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글귀를 보면서 잠시 쉬었다가 구불길과 무섭게 경사진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한다. 숲길 옆으로 바다를 향한 할머니바위는 아기를 업은 여자가 밥상을 든 모습이라고 한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간 남편이 급제하여 돌아오자 아내는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려 내왔건만 남편이 데려온 소실을 보게 되었고, 서운한 마음에 그대로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숨차게 가파른 길을 오르고 섬에 담긴 이야기를 마주한다. 아시아의 숨은 명소로 CNN에서도 소개했던 고군산군도의 대장봉이다. 이윽고 마주하는 잔잔한 서해의 아스라한 섬 무리들이 자아내는 기운을 선사받는다. 땀을 식히면서 일몰 속에 잠긴 신비로운 섬 무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더없는 행운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다도해의 평화로운 풍광에 차분하게 압도당하는 순간이다.
- 2024-03-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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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를 장애아동과 행복하게, 일본의 이케노카와 유치원
- 이케노카와 유치원(池の川幼稚園)은 설립된 지 60년 됐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70대 원장님과 한 달에 한 번 봉사활동을 오는 60대와 70대 두 선생님이 있다. 유치원은 보통 어른들이 짜놓은 프로그램에 맞춰 아이들을 교육하고,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관으로 생각한다.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다르다. 세 명의 선생님이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자 한 명 한 명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주의 깊게 관찰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따뜻한 눈길로 보듬어주는 활동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번 취재를 하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료 교수에게 봉사활동을 권유받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동교육학과 히라구치 나오미(原口なおみ, 67) 교수가 한 달에 한 번 봉사활동을 가는 유치원이 있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히라구치 교수는 30년 넘게 여섯 곳의 유치원에서 구연동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곳이라며 나를 초대했다. 10월 청명한 날씨에 도쿄에서 특급열차로 1시간 40분 달리면 나오는 히타치역(日立駅)에 내려서 다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더 가니 유치원이 나왔다. 주택가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유치원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어서 옛날 시골에 있던 초등학교 같아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조그마한 집 두 채가 나무 옆에 있고, 그 사이로 선생님과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참새들의 합창처럼 끊이지 않았다.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소에지마 유미코(副島由美子, 73) 원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해 보육사 자격이 있었어요. 교육에 대해 특별히 공부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좀 남달랐어요.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보육하는 환경을 보고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취업이 예정되어 있던 회사에 가지 않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곳에서 근무했어요.” 이곳에서 근무한 지 50년이 넘었다는 소에지마 원장은 교실을 둘러보면서 일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유치원의 유래도 들려주었다. 원장의 어머님이 자택 부지에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유치원 히라구치 교수는 대부분의 유치원이 일본 사회의 상식을 의심하지 않고 빨리 어른이 되도록 강요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개인의 성장을 소중히 여기고, 놀이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한다’는 보육 목표를 세운 유치원이 많지만, 실제로는 ‘책을 읽을 때 등을 곧게 펴고 조용히 듣자’며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빡빡하게 짠 주간 계획 일정을 밀어붙이는 곳이 많다고 했다. 일본에는 은연중에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다수 의견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문화가 있는데, 모두가 같은 일을 같은 방식과 동일한 속도로 처리하는 것이 ‘성장’이라는 동조 압력 같은 것이다. 대다수 유치원은 이런 일본 문화를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곤란을 겪지 않도록 가르친다. “입 다물고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건 아이들에게 아무것에도 감동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달라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을 키우는 교육을 하거든요. 장애가 있는 아이나 외국인 자녀와 관계를 맺으면서 어린이다운 도덕관과 윤리관이 형성돼요. 일본도 예전에는 마을 촌민들이 매일 밤 모닥불을 피우고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즐기던 때가 있었죠. 그때는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촌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토의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키워갔어요. 그런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 이케노카와 유치원이에요.”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다른 유치원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자폐증, 다운증후군, 발달장애, 외국인 자녀들도 원생으로 받고 있다. 이곳 아이들이 얼마나 구김살 없이 잘 자라고 있는지, 이 유치원의 교육이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한 히라구치 교수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왜 이곳으로 나를 초대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성장하는 시간 마쓰모토 하루미(松本晴美, 71) 선생님이 전신을 감싸는 검정색 옷을 입은 채 많은 종류의 인형을 들고 무대 뒤에서 인형극을 시작했다. 누워서 듣는 아이, 조용히 듣는 아이, 옆 친구와 이야기하는 아이, 블록을 가지고 노는 아이,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이가 있었지만, 모든 선생님이 아이들을 그대로 두었다. ‘자 앉아요!’라든가 ‘조용히 들어야지!’라는 주의를 주지 않았다. 마쓰모토 선생님은 30여 년 동안 여러 유치원에서 인형극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인형극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특별했다. 선생님의 아이가 이케노카와 유치원에 입학했고 학부모들과 인형극단 모임을 했는데, 그때 인형극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 마쓰모토 선생님은 이케노카와 유치원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케노카와 유치원의 교육은 아이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원생으로 받아주고, 애정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교육 방침을 보고 우리 엄마들도 건강해지더라고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고요. 엄마들도 함께 성장하는 거죠.” 이케노카와 유치원에는 학부모들이 고민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상담반 모임’,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모임인 ‘살구반 모임’ 등 자율적인 학부모 동아리 활동이 많다고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엄마도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만드는 ‘자율적인 커리큘럼’ 유치원을 견학하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건 ‘자율적인 커리큘럼’이다. 소에지마 원장은 아이들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각자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른데, 그런 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며 재미있는 걸 찾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저기 마당에 큰 은행나무 옆 나무로 된 집이 보이죠? 2019년 졸업반 아이들이 ‘같이 놀았던 중급반, 하급반 아이들이 기뻐할 걸 만들어주자!’라는 아이디어를 내서 선생님과 상의해 완성한 집이에요. 우리가 직접 할 수 없는 부분은 유치원 일을 봐주시는 목수에게 부탁했고, 아이들은 직접 나무를 나르거나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직접 완성한 게 두 개의 작은 집이에요. 그 외에 작은 연못도 만들고 봉제 인형이나 가방 등 만든 것들이 많아요. 그런 것이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재미있는 수업이 되죠.” 소에지마 원장이 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무집은 자유시간에 아이들이 마음껏 들락거리는 은신처가 됐다고 한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 이케노카와 유치원도 저출산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때는 원생이 150명도 넘었지만, 현재는 64명이다. 다행히 2019년 10월부터 정부 보조금으로 유아 교육과 보육 요금이 무료가 되어 경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부 교재비나 버스 요금 등은 학부모에게 받고 있다. “제 급여는 40세에 유치원 원장이 되고 난 뒤로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돈 이상의 것을 아이들로부터 받고 있어서 만족합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원이 적으면 오히려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성장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죠.” 아이를 어른과 대등한 인격체로 보고 의사를 존중하며 학부모도 함께 배워나가는 유치원. 이런 선순환이 이뤄지는 유치원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졸업한 학부모로부터 많은 감사 편지가 온다. “장애가 있거나,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있거나, 그 외에 여러 고민을 안고 있는 부모님들이 있죠. 그런 분들이 아이가 우리 유치원에 다니고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웃음이 넘치고, 행복해하는 얼굴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럴 때는 유치원을 운영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모두 구김살 없이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은 필자에게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모든 어린이가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유치원을 이끌어가는 소에지마 원장, 구연동화·인형극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사랑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히라구치 교수와 마쓰모토 선생님이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글을 마치며 소에지마 원장에게 보낸 한 학부모의 감사 편지를 소개한다.
- 2024-03-2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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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 없는 화면보다 미소 띈 얼굴” 좋은 기분 전하는 아이스크림 하나
- ‘녹기 전에’는 아이스크림에 시간의 철학을 접목해 세계관을 확장하는 디저트 가게다. 녹싸(녹기 전에 사장)는 녹기 전에, 늦기 전에 만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매개로 연결된 사람들이 시간을 음미하길 바란다. 신간 ‘좋은 기분’에는 흐르는 순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일과 삶의 태도를 단단히 한 그 만의 경험을 스쿱 가득 담았다. 외관부터 요상하고 의미심장하다. 간판 대신 멈추지 않는 시계와 하루하루 넘기는 형태의 달력이 걸려 있다. 재고 관리가 자신 없어 매일 다른 아이스크림으로 진열장을 채우고(그렇게 탄생한 메뉴만 350가지 이상이다), 디자인에 서툴러 로고조차 새기지 않은 컵과 포장 용기는 오히려 상징이 됐다. 내부 곳곳엔 시간을 주제로 한 책들과 흘러넘치는 아이스크림 모형이 비치돼 있다. 메뉴 순위가 궁금할 이들을 위해 “10.아이스크림의 9.맛 선호도는 8.인기의 7.문제가 6.아니라 5.각자가 가진 4.취향의 3.문제 2.입니다 1.쌀”이라는 재미난 설명도 붙어 있다. 남다른 분위기의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다. 이곳의 주인 녹싸는 팀원들과 아이스크림을 중심으로 다양한 일을 도모한다. 공식 SNS 계정에 손님들이 남기고 간 사연이나 방명록을 라이브 방송으로 소개하고,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녹기 전에 주주총회’를 연다. 물론 이외에도 악필대회, 사생대회를 열거나, 숲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한 달에 한 번씩 함께할 누군가를 모집해 나무를 심으러 가기도 한다. 정체성을 물으니 “여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흐물흐물한 곳이에요. 아이스크림은 핑계죠”라 대답한 이유가 있었다. 흐르는 시간과 아이스크림 ‘녹기 전에’가 탄생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어릴 적부터 줄곧 시간에 대한 화두를 껴안고 살았다. 머리를 맞대고 듣는 벽시계 초침 소리가 좋았고, 짧은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긴 시간은 단순히 재단하기 힘든 감동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공상은 ‘죽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라는 고민으로 끝났다. 살면서 의존할 만한 안식처는 즐거운 기억뿐이라는 확신에, 한평생 질린 적 없는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하고 많은 디저트 중 ‘흘러서’ 시간을 알려주는 아이스크림은 삶과 미래, 죽음에 대해 넌지시 교훈을 준다고, 세상에 기여할 일이 지금보다 훨씬 많을 거라 생각했다. “2017년 종로구 익선동에서 호기롭게 장사를 시작했지만 빠른 상권 변화에 부침을 겪었습니다. 옆에 크레페·호떡 등 다른 디저트 가게가 생길 때마다 크게 영향을 받았고, ‘핫플레이스’ 특성상 일회성 방문이 대부분이라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느껴줄 단골손님이 없었어요. 매출이 떨어지니 자신감이 바닥나 한동안 가게 안쪽에 숨어 있었죠. 새벽 4시까지 닥치는 대로 콘텐츠 기획, 마케팅, 브랜딩, 디자인 분야의 책을 읽었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활약하는 멋진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독서 생활의 말미에는 ‘아, 결국 동력을 얻으려면 책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인지 먼저 들여다보고, 현장 경험으로 체득해야 하는구나!’ 깨달았어요. 그러던 중 2022년 마포구 염리동이라는 동네로 이사했고, 접객의 의미에 더욱 집중하게 됐습니다.”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 많은 점주가 접객 업무를 단순노동으로 여긴다. 점원도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때우거나, 경력 쌓기와는 무관한 스쳐가는 일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자기 시간의 일부를 할애하는데도 소모적이라고만 여기며 하루를 보내기 십상이다. 그러나 녹싸는 접객이 제조자의 세계와 손님의 세계를 매끄럽게 이어주고, 주파수를 맞추는 섬세한 작업이라 말한다. 신간 ‘좋은 기분’은 원래 가게의 또 다른 얼굴이 되어줄 동료를 구하며 해주고 싶은 말을 모아 쓴 글이다. 100쪽이 넘는 별난 채용공고는 입소문을 타면서 책으로 출간됐다. “과거에는 오히려 제품을 전달하는 사람의 역할이 더 컸어요. 이 제품으로 당신의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지 납득시키려면 누군가 친절히 설명해줘야 했죠. 점점 개인의 기분과 역할은 도외시되고 흘러넘치는 물건 자체에만 집중하는 현상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키오스크나 로봇으로 대신하는 풍경도 꽤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저는 오래 지속됐던 것들의 힘을 믿습니다. 직접 인사를 건네고,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접객 일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나를 갉아먹는 상태에서 서비스하지 않으려면 걷고, 목욕하고, 책을 읽고, 불멍을 하는 등 일과 삶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번잡함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일의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하고 내면의 근육까지 단단하게 만들 수 있어요.” 덕분에 ‘녹기 전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찾는 일상의 거처가 됐다. 어떤 기준으로 아이디어를 좁히거나, 뾰족한 마케팅으로 일부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특정 연령만을 대변하기에는 아이스크림이 모든 세대가 전 생애에 걸쳐 즐기는 디저트라서다. 오늘도 그는 6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조금 퉁명스러운 단골손님이 오면 ‘스푼은 2개, 집에 가는 길은 30분 정도 소요된다’는 사실을 바로 떠올린다. “아이스크림 매장 접객은 찾아온 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바라보고 유지해주는 일입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항상 눈에 생기를 띠는데, 그 흐름을 해쳐선 안 돼요. 가게 주인과 직원이 올바른 가치관과 의식을 부지런히 공유해 값진 매장 경험을 겪도록 힘써야 하죠. 그러다 보면 누군가 ‘진정성’의 유무를 판단하지 않을까요. 그저 소박하게 자리한 가게 정도로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간판 대신 걸린 시계를 보며 동네 주민들이 시간을 확인하고, 오가며 마음 나눌 편한 공간이 됐으면 해요.”
- 2024-03-2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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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드윅’이 돌아온다”…3월 풍성한 문화소식
- ●Exhibition ◇갑진년맞이 용을 찾아라 일정 4월 7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십이지신 중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인 용은 예부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삼국시대 무덤 벽화부터 절터의 벽돌, 왕실용 항아리, 대한제국 황제의 도장 등 다양한 미술품에 등장했다. 각 작품에 표현된 용은 용맹하면서도 사람을 닮은 친근한 표정을 하고 있기도 하다.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아 상설전시관에서 용과 관련된 전시품 15건을 소개한다. 전시품은 1층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 2층의 서화관, 3층의 조각·공예관에 분포돼 있다. 전시장 키오스크에 떠 있는 QR 코드를 촬영하면 안내 지도와 목록을 볼 수 있어 쉽게 전시를 즐길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구려 강서대묘의 ‘청룡도’가 있다. 널방(시체를 안치한 무덤 속 방) 동벽에 그려진 것으로, 죽은 자를 지키는 사신의 오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서화실에서는 가로, 세로 각각 2m가 넘는 대규모 용 그림을 만날 수 있다. 푸른 바다 위 먹구름에 겹겹이 싸인 용은 나란히 전시된 호랑이 그림과 함께 정월 초 궁궐이나 관청 대문에 붙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공예관에서는 청자와 백자에 나타난 용을 찾아볼 수 있다. ◇브라이언 아담스 사진전 일정 4월 13일까지 장소 전쟁기념관 캐나다 가수이자 사진작가 브라이언 아담스의 아시아 최초 대규모 전시다. 크게 두 개의 존으로 구성됐으며, 총 140여 점이 전시됐다. 익스포즈드 존(EXPOSED ZONE, 노출)에서는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등 유명 인물과 함께 작업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운디드 존(WOUNDED ZONE, 부상)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부상당한 영국 장병들의 사진이 전시됐다. 전쟁의 상처를 조명했으며, 전쟁기념사업회의 설립 정신과 취지에도 부합한다.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은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간직한 군인들의 사진을 보며, 전쟁의 교훈을 깨닫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Book ◇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김웅철·매일경제신문사)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인 고령자 인구 비율이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일각에서는 그보다 이른 올 하반기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저자는 초고령화에 빨리 대응해야 한다며, 10여 년 앞서 초고령사회를 경험한 일본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중장년층과 젊은 층의 가치관이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으며, 고령화 정책과 기술이 현장 중심으로 발전하며 고령 친화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지역사회에서는 치매 카페와 같은 모임이 생기고, AI택시 같은 혁신적인 교통수단이 도입됐다. 대형마트에서는 고령자들을 위해 특화된 서비스인 ‘슬로 계산대’를 운영하며, 젊은이들은 고령자의 짝꿍 역할을 하면서 IT 기기 사용법을 가르쳐준다. 고령자 서비스를 확대한 편의점, 메디컬 피트니스 등 시니어 비즈니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령화가 단순히 인구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변화라는 것을 깨닫고,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를, 궁극적으로 초고령사회를 넘어 신고령사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김찬호·날) 사회학자이자 베이비부머 세대인 저자가 60세를 지나면서 펴낸 첫 노년 에세이.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마흔 개의 열쇳말을 제시한다. ◇비만·당뇨·콩팥병 악순환 고리를 끊다(송정숙·북아지트) 약사인 저자는 당뇨와 비만의 근본 원인인 인슐린 저항성에 관한 해법을 소개한다. 생활요법과 질 좋은 영양소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생의 오후를 즐기는 최소한의 지혜(아서 브룩스·비즈니스북스)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는 직업적·사회적 쇠퇴기를 맞은 중년들이 삶의 목적을 찾고 새롭게 도약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Stage ◇헤드윅 일정 3월 22일 ~ 6월 23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손지은 출연 조정석, 유연석, 전동석, 장은아, 이예은, 여은 등 스테디셀러 뮤지컬 ‘헤드윅’이 14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음악을 통해 상처로 얼룩진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로커 헤드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994년 뉴욕의 작은 록 클럽에서 첫선을 보인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세기 최고의 록 뮤지컬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5년 초연됐으며, 이번 시즌에는 조정석·유연석·전동석이 헤드윅 역을 맡아 연기한다. 유연석은 7년 만에, 조정석은 8년 만에 헤드윅으로 돌아온다. 조정석은 “예전에 마흔이 넘어도 헤드윅을 할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을 지키게 됐다”며 “2006년부터 네 번의 시즌을 함께했다. 할 때마다 재밌고 여전히 내 심장을 뜨겁게 하는 작품이어서 설렌다”고 소감을 전했다. ◇넥스트 투 노멀 일정 3월 5일 ~ 5월 19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박준영 출연 최정원, 배해선, 이건명, 마이클 리, 산들, 유회승, 홍기범 등 2년 만에 돌아오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의 아픔과 화해,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한다. 16년째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와 그녀의 병이 온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탄탄하고 정교한 드라마로 풀어낸다. 다이애나 역은 지난 시즌에 이어 최정원이 맡았으며, 배해선이 새롭게 합류했다. 남편 댄 역은 이건명이 지난 시즌에 이어 출연하며, 마이클 리가 뉴 캐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딸 나탈리와 아들 게이브 역에는 실력과 에너지를 갖춘 젊은 배우들이 캐스팅돼 기대감을 높인다. ◇그때도 오늘 일정 3월 15일 ~ 5월 26일 장소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2관 연출 민준호 출연 최영준, 오의식, 박은석, 이희준, 양경원, 차용학 연극 ‘그때도 오늘’이 극단 설립 20주년을 맞아 2022년 초연 이후 무대에 오른다. 1920년대 부산, 1940년대 제주도, 2020년대 최전방 등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2인극으로, 각 지방색에 맞는 사투리를 근간으로 시대적 배경을 실감 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배우 겸 작가로 활동 중인 오인하가 극본을 썼다. 공연 관계자는 “독립, 평화,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되짚어보게 한다”고 소개했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4-03-08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