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가 이해‧존중받고 기여할 수 있는 도시(cities), 타운(towns) 또는 마을(villages)로, 지역 주민은 치매에 대해 이해하고, 치매 노인은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자기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지역사회’. 영국 알츠하이머협회(Alzheimer’s Society)에서 ‘치매 친화 지역사회’(dementia-friendly community)에 대해 내린 정의다.
모든 노인이 거주하던 동네에서 계속 일상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치매 노인에게 지역사회의 의미는 더욱 중요할지 모른다. 길 리빙스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정신의학 교수는 2017년 연구에서 사회적 고립이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면 치매 사례가 5.9% 줄어들 수 있다고 계산했다. 해당 연구 결과를 소개한 KBS는 “결혼과 혈연으로 이어진 전통적 형태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성장과 노화에는 상호 간의 소통과 교류가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영국은 치매 문제를 세계 최초로 국가적 안건(아젠다)로 설정한 나라다. 2009년 ‘국가치매전략’을 도입하고, 2012년에는 ‘치매 친화 지역사회’ 관련 정책을 시행했다. 치매 치료제 개발 투자, 치매에 대한 국민적 인식 개선, 치매 환자와 간병인의 여건 개선 등을 위한 노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 지역사회에서는 치매 노인을 비롯한 고령자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여기 앉으세요” 의자 내어주며 외출 장려
영국 노팅엄 시에서는 미국 뉴욕시와 맨체스터시의 유사한 프로젝트에서 착안한 ‘여기 앉으세요’(Take a seat) 캠페인을 열었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상점은 외부에 ‘우리는 고령 친화 상점입니다’(We are Age Friendly) 스티커를 부착한다. 노인은 부담 없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상점에서는 차나 커피, 물 한 잔을 제공하지만 구매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캠페인은 2015년 시작된 이후 노팅엄 내 28개 지역, 300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운영되고 있다. 상점, 백화점, 건축 협회, 카페, 술집, 미용실 등 참여 업종이 다양하다. 고령친화적인 지역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실제 사례인 것이다.
이 캠페인은 외출한 노인이 앉아서 숨을 돌릴 곳을 마련하고, 노인에게 쉴 곳이 부족하다는 점을 모두가 인식하게끔 하고자 시행됐다. 고립감이나 고독감을 느끼기 쉬운 노인에게 외출을 꺼리게 하는 요소를 줄여 외출을 장려하는 것이다. 영국의 비영리단체 ‘노화개선센터’(Centre for Ageing Better)는 “기업이나 가게 주인으로서도 소비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배려하는 업장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인 캠페인”이라고 평가했다.
고령자가 기획하는 고령친화 문화 프로그램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영국의 치매 친화 지역사회 정책’ 연구에 따르면 영국 치매 친화 지역사회 인증 프로그램은 민간이 주도하고 운영하며, 지역 정부의 참여와 인준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 병‧의원, 거주시설이나 학교, 상점, 기업이나 은행, 여가문화시설 등 다양한 기관의 역할을 강조한다. 지역 내 은행 지점은 기억카페에서 치매 노인의 금융 관련 조치, 은행에서 운영하는 금융자산 보호 정책(규정) 등에 대해 홍보하는 식이다.
유명 축구팀의 연고지로 유명한 영국 맨체스터는 영국 내에서 고령친화도시 선두주자로 꼽힌다. 2010년 영국 도시로는 최초로 세계보건기구(WHO)의 고령친화도시 국제 네트워크에 가입했다. 또한 노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 노화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기념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생동감 있고 다양한 모습의 노인 사진을 사용하는 식이다. 이러한 전략은 연령 차별주의(ageism)를 약화하고 노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묘사를 바로 잡기 위해 쓰였다.
맨체스터시가 사용한 고령친화도시 전략 중 하나는 문화다. 50세 이상, 특히 사회적 고립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 의한 고령 친화적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문화 챔피언’(Culture Champions) 봉사 프로그램이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150명 이상의 노인 자원봉사자들은 도시 전역에서 문화 대사로 활동한다.
이들은 동년배를 위한 활동을 구상하고 기획해 운영하거나 소속된 예술단체를 홍보하고, 단체 운영에 대해 조언을 하는 등의 활동을 펼친다. 노인을 위한 라이브 공연이나 디제잉이 준비된 ‘클럽의 밤’(Club Nights)이나 기타, 드럼, 키보드 등의 악기 레슨, 도시의 문화유산과 특색있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버스 투어 등 자체적인 행사나 축제를 계획하고 운영하기도 한다.
노인 인식 개선에 노력하는 미술관
맨체스터시의 고령친화적 문화 프로그램을 논할 때 휘트워스 갤러리(Whitworth Gallery)를 빼놓을 수 없다. 휘트워스 갤러리는 맨체스터 시의회가 주도하는 ‘고령친화도시 맨체스터’ 사업의 파트너다. 1889년 설립된 이후 19세기 맨체스터가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첫 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휘트워스 갤러리는 교육 및 사회 기관의 역할을 맡게 됐다. 2007년부터 맨체스터시의 노인들을 위해 보건‧복지 분야에 예술을 접목하는 ‘문화 제공 프로그램’(Cultural Offer programme)을 운영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노인들과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
휘트워스 갤러리의 프로그램은 2018년에는 주한영국문화원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동으로 마련한 ‘문화접근성 향상 미술관 교육 워크숍’에서 영국의 우수 사례로 소개된 바 있다. 주한영국문화원의 ‘한‧영 참여예술 자료집’에 따르면, 갤러리의 예술 프로젝트 ‘비욘드 디멘시아’(Beyond Dementia)에 참여한 치매 환자들은 예술 작품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진 뒤 실제로 작품을 창작해냈다. 이 작품들은 전시회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됐다.
휘트워스 갤러리의 고령 친화 프로그램은 워크숍이나 예술 참여 프로젝트뿐 아니라 리서치, 간행물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프로그램에 잘 참석하지 않는 점을 고려해 ‘남성 노인의 문화 활동을 위한 핸드북’(Handbook for Cultural Engagement with Older Men)을 제작하거나, 치매 환자와 간병인을 위한 애플리케이션 ‘아트 센스’(Art Sense)를 개발하는 식이다.
에드 와츠 휘트워스 학습‧참여 팀장은 2018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아트 센스 앱에 대해 설명하며 “요양사들과의 면담이나 치매 환자와 대화하거나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좋은 도구임을 깨달아 이를 활용하고자 했다”라며 “젊을 때에 섬유 산업에 종사하던 노인이 아트 센스 앱을 실제로 활용해본 뒤 디지털 방식으로라도 섬유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 좋아했다”고 전했다.
영화로 보는 오페라가 있다. 처음엔 실제 무대에서만 보았던 오페라를 영화 화면으로 본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몇 번의 큰 무대 오페라 작품을 보았던지라 그 생생함을 어떻게 화면으로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영화로 보는 오페라 두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가진 후 그런 기우는 말끔히 사라졌다.
와 를 보았는데 두 작품 다 아는 내용이었고 실제로 보는 무대는 아니었지만 오페라 실황을 그대로 촬영한 거라 느끼는 감동은 같았다. 오히려 인터미션(중간 휴식시간) 부분에선 좀 전까지 연기하던 배우를 인터뷰하는 장면과 작품 소개 등 더 세세한 작품 배경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방금 죽을 듯 연기하던 배우가 인터미션에 웃으며 인터뷰하는 모습이 다소 생소했지만 흥미로웠다. 잠시 후 이 배우는 다시 진지한 연기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영화는 센트럴 메가박스에서 상영하는데 이 극장에선 미리 신청하면 영화를 보는 동안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 좌석에 작은 테이블이 있어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이번엔 케이크 한 조각과 보온병에 커피를 준비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우아하게 즐겼다. 오늘 작품은 다. 오페라에서 나 , 등은 잘 알려진 작품인데 는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관람하게 되어 더욱 몰입해야만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이야기로 나이 어린 애인을 향한 질투와 애증이 적나라하다. 늙은 여왕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나이가 20세나 어린 로베르토 데브뢰 에식스 경이다.
그러나 데브뢰에게는 사랑하는 공작부인 ‘사라’가 있었다. ‘사라’는 데브뢰의 친구 노팅엄 경의 부인이다. 여왕은 그에게 반역의 죄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배신하는 꼴은 못 본다며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여왕의 총애를 받는 그를 질시한 귀족들이 반역죄로 몰아 데브뢰는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늙은 여왕과 연적인 젊고 아름다운 공작부인 ‘사라’)
여왕은 마지막 사인을 하지 못하며 그를 용서하려 하는데 공작부인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증거가 나오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 데브뢰를 구하려던 사라의 남편 노팅엄 경도 배신감에 분노한다. 이들의 사각 관계가 가슴이 아프다.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얽히고설키는지 모르겠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후 천일 만에 참수형을 맞은 앤 볼린의 딸이다. 이 이야기는 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튜더 왕가 헨리 8세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버림받았고 자신의 야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앤’은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금도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처형당하고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뒤돌아서던 어린 엘리자베스. 그렇게 애처롭던 아이는 여왕이 되어 영국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년에 나이 어린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런 고통을 받았는지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소프라노와 테너인 주인공들은 3시간여 동안 계속 노래를 불렀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그들 목소리의 여운은 귓가에서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는 역사적 사실에서 사랑 이야기에 좀 더 초점을 맞춰 각색한 작품으로 네 명의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과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아리아로 가득 채웠다. 빗나간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이 저리다. 깊어가는 가을, 참으로 멋진 오페라 한 편을 영화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