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차 한잔 마실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일까. 용암정 별서(別墅)엔 별반 있는 게 없다. 물가에 정자 하나 세우고 끝! 조선의 별서치고 이보다 가뿐한 구성이 다시없다. 별서란 요즘 말로 ‘세컨드 하우스’다. 상주하는 살림집 인근의 경치 좋은 곳에 지은 별장으로, 사교와 공부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었다. 그래 일쑤 멋 부려 꾸몄다. 연못을 파거나 정원을 꾸리고, 객실을 보태기도 했다. 용암정은 다르다. 치레를 극구 삼갔다. 은자의 심중은 허허롭다. 차 몇 잔이면 하루가 가득 찬다. 그러니 정자 외에 무엇을 덧붙일 것인가.
용암정은 거창의 경승지인 위천(渭川) 중에서도 빼어나다는 요수천 계곡에 있다. 예로부터 신선이 살 만한 동천이라 이름난 골이다. 가을이 깊어 물가에 서린 고적한 정취가 짙다. 숲에선 단풍이 곱게 무르익다 못해 어느덧 잎잎이 지상으로 추락한다. 발길에 밟히는 마른 낙엽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짠해 정이 간다. 접때는 은성한 초록 잎이었던 게 순식간에 저물다니. 이게 잎사귀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나. 목숨 가진 것들 모두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다. 나날이 조락으로 가는 길이다. 가을은 이렇게 문득 삶의 순리를 바라보게 한다. 낭만과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인 계절이지만 그 뒷면엔 서러운 게 있다.
용암정으로도 낙엽이 분분히 흩날려 내린다. 고요한 눈길을 매달고 하늘하늘 내려오는 낙엽들. 스산하다기보다 애틋한 정경이라 가슴을 파고든다. 물가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늦가을의 정자 하나. 이는 어쩌면 내향적 풍경의 절정이다. 거기엔 뭔가 사람을 위무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그대여, 지친 마음을 여기에서 내려놓아라, 야윈 등을 기둥에 기대고 까짓것 세상 근심일랑 헹구어라. 정자가 그리 속삭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정자란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센서를 부착한 전위적 시설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안는 시(詩)이자 추상화다. 하기야 정자를 폼 잡자고 지었으랴. 허영으로 지었으랴. 마른 멸치대가리처럼 누추한 게 삶일망정 마음을 돋워 생기를 얻을 방편으로 지은 공간일 것이다. 정자에 올라 자연으로 진입, 뿔과 발톱이 없어도 야성으로 생동하는 초목을 닮고자 지은 ‘정신의 집’일 테다.
용암정은 향촌의 선비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지은 별서다. 그는 행실과 학문이 빼어나 당세는 물론 후세까지 추앙받았다더라. 그의 가문에는 벼슬길에 오르기보다 초야에 묻히기를 좋아하는 풍조가 대대로 이어졌다. 청빈을 삶의 꽃으로 삼았던가 보다. 임석형 역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백수로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과 권세라면 껌뻑 넘어가는 게 사람이다. 임석형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취직을 한 바 없어 생계는 팍팍했겠지만 배포는 태산이었나? 그는 적게 먹고도 유유하게 노니는 재능을 발휘했다. 일러 안빈낙도다. 생의 절반쯤을 백수로 살며 찬연한 족적을 남긴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조선의 인걸들 중엔 궁색한 호구에도 아랑곳없는 뚝심으로 기차게 활갯짓한 아웃사이더가 많았다. 임석형이 바로 이 늠름한 계보에 속한다. 그는 숲을 소요하는 낙을 최상으로 쳤다. 용암정을 지어놓고 읊조린 노래가 이랬다. ‘이곳에 만약 학을 탄 나그네가 찾아온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숲에서 늙으리라.’
숲 사이 계곡으로는 물이 흐른다.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합쳐진 물길로 수정처럼 맑다. 깊디깊은 산골짝 물도 아닌 것이 티 없이 순수하니 희한하다. 여름철엔 여기서 텀벙, 저기서 풍덩, 물놀이하는 이들이 숱하다. 늦가을의 물은 차가워 물빛조차 푸르다. 파란 유리를 얹어놓은 듯이. 물 위로는 당싯당싯 낙엽이 떠내려간다. 물 아래는 숫제 낙원이다. 크리스털로 세공한 양 투명한 물고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풍처럼 몰려다닌다. ‘초사’(楚辭)에서 어부가 말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 청정한 물에서 담백한 처신의 방법을 읽은 셈이다. 임석형이 청명한 물을 그윽이 관조할 수 있는 냇가에 정자를 지은 이유가 또렷해진다.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 요란한 소동을 청류로 빗자루 삼아 쓸어냈을 테다. 그런 뒤에야 풍류도 옹골찬 법이다.
물만이 용암정의 뜻과 멋을 돋우는 건 아니다. 보라! 희디흰 기암괴석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한바탕 경연을 벌이는 게 아닌가. 물에 발목을 담근 바위들. 바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沼). 바위벼랑을 쏜살처럼 내닫는 물살의 아우성. 이를 일러 임석형은 ‘하늘의 작품’이라 했다. 이곳을 ‘별유천지’라 일컬었다. 물과 바위의 컬래버레이션은 늘 성황리에 펼쳐지게 마련이다. 옛 선비, 자그만 정자 하나 짓고 볼 것 다 봤다. 큰돈 안 들이고 놀 것 다 놀았다. 풍류란 돈으로 살 수 없다. 주저앉은 생각을 탓할망정 주머니 사정 핑계될 일이 아니다.
답사 Tip
위천변엔 호젓한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승을 만날 수 있다. 용암정 위쪽에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대와 강선정이, 아래쪽으로는 요수정과 수승대가 있다.
가을 산이 붉다. 설악산 등 전국의 산은 단풍을 찾은 행락객들로 붐빈다. 추운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만산홍엽이란 뜻처럼 붉은 잎이 수놓은 명산의 가을을 살펴보자.
설악산
가을의 설악은 단풍철의 시작점이자, 많은 사람의 최애 코스다. 초보자의 경우 공룡능선이나 대청봉을 오르지 않더라도 가을 설악의 매력을 충분히 만나볼 수 있다. 단풍이 물든 천불동 계곡은 한번 보면 꼭 다시 가게 되는 마성의 가을 산행지다.
지리산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답게 깊고 너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피소가 폐쇄되어 종주길을 다 걷기는 쉽지 않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혹은 반야봉까지의 산행을 추천한다. 반야봉이나 노고단에 오르면 지리산과 백두대간의 능선, 운무가 피어오르는 섬진강의 풍광이 일품이다.
덕유산
겨울 눈꽃 산행지로 유명한 덕유산은 가을도 빼어나다. 최고봉인 향적봉에 오르면 삼남의 산마루금이 사방으로 장중하게 펼쳐진다. 백두대간의 여러 산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진 포인트로 꼽힐 만큼 풍광이 좋다.
영남알프스
영남알프스는 경상남도 울주군과 밀양시를 아우르는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신불산, 영축산, 고현산, 간월산 등 7개의 산군을 유럽의 알프스에 비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 산행지로는 억새가 만발한
천황산과 천황재, 간월산과 신불산, 그 사이의 간월재 등을 추천한다.
가을 산행에서 다치지 않으려면
숲을 걷는 일은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잘못된 등산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몸에 맞게 무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2~3시간 정도의 산행이 적당하다. 이력이 조금 쌓인 후 3~4시간, 4~5시간으로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좋다. 무릎 관절도 조심해야 한다. 등산스틱을 꼭 쓰고 배낭의 무게는 5kg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 무릎보호대나 스포츠 테이핑을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산이 붉다. 어김없이 계절의 변이가 시작되었다. 설악산에 첫 단풍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많은 인파가 산으로 몰린다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심야버스는 평일임에도 동이 날 지경이다. 가을 단풍은 마치 파도처럼 왔다 갑작스레 빠져나가기 때문에 넋을 놓고 있다가는 추억 없이 겨울을 맞기 십상이다.
지금 노려볼 만한 가을 산은?
설악산
가을의 설악은 단풍철의 시작점이자 많은 사람들의 최애 코스다. 초보자의 경우 공룡능선이나 대청봉을 오르지 않더라도 가을 설악의 매력을 충분히 만나볼 수 있다. 설악동에서 양폭산장 혹은 희운각에 이르는 천불동 계곡, 단풍철에만 개방하는 주전골 계곡 등을 추천한다. 가장 대중적이지만 단풍이 물든 천불동 계곡은 한번 보면 꼭 다시 가게 되는 마성의 가을 산행지다. 산행 후 오색온천이나 척산온천에 들러 온천욕으로 여독을 푸는 것도 좋겠다.
지리산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답게 깊고 너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피소가 폐쇄되어 종주길을 다 걷는 것은 쉽지 않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혹은 반야봉까지의 산행을 추천한다. 대체로 완만하고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걷게 된다. 반야봉이나 노고단에 오르면 지리산과 백두대간의 능선, 운무가 피어오르는 섬진강의 풍광이 일품인데, 노고단은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제로 운영된다. 성삼재로 올라 종주능선길을 걷다가 피아골이나 뱀사골로 하산하는 것도 대표적인 지리산 단풍산행 코스다.
덕유산
겨울 눈꽃 산행지로 유명한 덕유산은 가을도 빼어나다. 최고봉인 향적봉에 오르면 삼남의 산마루금이 사방으로 장중하게 펼쳐지는데 백두대간의 여러 산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진 포인트로 꼽힐 만큼 풍광이 좋다. 덕유산 종주는 향적봉에서 남덕유산을 거쳐 육십령에 이르는 30km 코스다. 다 걷기에는 체력 부담이 크다. 무주리조트의 곤돌라가 설천봉까지 운행되는데 설천봉에서 20분가량 오르면 주봉인 향적봉이 나오고 여기서 중봉까지 왕복 한 시간 반가량의 산행이면 초보자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영남알프스 간월재·신불산·천황산
경상남도 울주군과 밀양시를 아우르는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신불산, 영축산, 고현산, 간월산 등 7개의 산군을 이르러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영남알프스다. 이 7개 산을 걷는 영남알프스 종주가 유명하지만 2박 3일은 잡아야 하는 긴 코스다. 가을 산행지로는 억새가 만발한 천황산과 천황재, 간월산과 신불산, 그 사이의 간월재 등을 추천한다. 천황산은 케이블카로 오를 수도 있으며, 간월재 또한 임도로 트레킹하듯 오를 수 있다.
무주라고 하면 무조건 따라붙는 말이 구천동이다. 나제통문에서 덕유산 향적봉까지의 거리 36km는 무주구천동의 33경(景)을 모두 품고 있다. 그 산자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우리나라의 희귀한 동식물, 태고의 원시림, 맑은 물과 폭포가 무주구천동을 이루고 있다. 지금 이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덕유산은 푸르름이 한창이다.
요즘처럼 답답한 시절에는 산과 숲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올라 힘들인 후에 맞이하는 뿌듯함을 쾌감이라고들 한다. 그 뿌듯함을 위한 고단한 과정이 반갑지 않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렇다. 그러나 덕유산에서는 1500m가 넘는 설천봉까지 등산을 하지 않아도 곤돌라가 가뿐히 나를 올려다준다. 고맙게도.
어둔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덕유산 곤돌라 매표소. 직원들은 아직 출근 전이다. 조금 서두르니 이렇게 여유롭다. 겨울엔 스키장이었던 드넓은 설원이 이젠 마냥 푸르다. 그 위로 아침 해가 쏟아지는 걸 바라보며 즐기는 시간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야외 테이블 파라솔 아래 느긋하게 앉아 조을고 있는 고양이와 눈 맞추고 놀아본다. 잔디밭에 나가 키 작은 꽃들을 렌즈에 담아보기도 한다. 산 정상에 올라 만끽하는 시간보다 더 여유롭고 행복하다.
사시사철 핫 플레이스였던 곳인데 코로나19 사태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겨울엔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타기 어려웠던 곤돌라였다. 오늘은 입장권을 사기 위해 길게 줄 서지 않아도 된다. 탑승장 앞에 서니 빈 채로 운행되는 곤돌라가 연달아 다가온다.
곤돌라를 타고 오른다. 완연한 초록빛으로 변해가는 덕유산 숲이 발아래 울창하다. 올 때마다 인파로 북적였는데 이렇게 한가할 수가 있는지. 유유히 흔들거리면서 숲 사이를 오르는 곤돌라가 15분쯤 지나 가뿐히 설천봉에 내려앉는다. 힘 안 들이고 1520m 산정에 올랐다.
혼자 힘으로 정상에 오른 양 기분 좋게 둘러보고 향적봉으로 향한다. 현재는 설천봉에서 향적봉 구간 탐방은 6월 말까지 예약제를 시행 중이다. 봄철 번식 및 개화시기 멸종 위기종, 특산종 등의 서식지 보전을 위해서다. 건전한 탐방문화를 위해 기꺼이 서명 등의 협조를 했다.
놀며 쉬며 사진도 찍으며 올라도 30분이면 된다. 오르는 길에서 만난 철쭉은 봉오리를 맺었거나 분홍빛으로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산 아래와는 생장이 다르다. 데크로드엔 발걸음마다 돌 틈의 바람꽃이 반기고 군데군데 곰취와 당귀, 그리고 괭이눈과 모데미풀도 보인다. 고산지역의 청정한 숲속에서만 볼 수 있는 온전한 성장 모습이다.
향적봉이다. 1614m에 서서 사방을 빙 둘러보면 적상산이 보이고 멀리 지리산도 보인다. 능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산하를 굽어보는 짜릿함, 참 쉬운 호사다. 인증샷을 찍거나 연애 놀음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대피소와 중봉을 거쳐 다시 돌아오면서 비로소 산이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산을 내려가는 자의 여유로움이다. 무엇보다 새소리가 어찌나 맑고 청아한지. 마침 요즘이 새와 곤충들의 산란기여서 특히 더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설천봉 주변의 삐죽삐죽 뻗은 주목나무의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고산지역에서 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 살아 천년 죽어서도 천년 간다는 주목이 지금 몇 년째 서 있는 걸까. 겨울이면 눈꽃이 얹혀 수정처럼 빛나는, 멋진 상고대가 신비로운 나무다. 덕유산은 한겨울의 설산과 새해의 일출이 명품이다. 그래서 겨울산의 진수다.
이제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간다. 서너 시간 땀 흘려 오르거나, 곤돌라로 쉽게 오른 그 길이다. 우리 사는 인생과 다를 게 뭐 있는지. 그 길에 눈과 비도 내리고 햇살도 비치고 시원한 바람도 분다.
생활 속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나날들이다. 한적한 산정에 올라 청량한 공기 속에서 코로나 블루를 다스려보는 건 어떨지. 단련되지 않은 안일한 몸은 뻐근해도 기분은 뿌듯하고 가뿐하다. 요즘 말하는‘혼산’으로도 당일치기가 가능하니 당장 나서볼 만하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1로 159
-곤돌라 탑승 이용요금: 성인 왕복 1만6000원, 편도 1만2000 , 소인 1만2000원, 편도 9000원
주변 명소 & 맛집
△호국사찰 안국사(安國寺)
적상산 능선 아래에 자리 잡은 아늑한 사찰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산 정상에 위치해 있어 숨차게 오르게 된다. 오가는 이 없는 조용한 사찰 안에서 보는 수국과 작약이 아름답고 다람쥐도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맛고을 회관
덕유산 가까운 마을에서 버섯전골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능이와 송이, 노루궁뎅이버섯이 아낌없이 들어가 있다. 육수의 깊은 맛은 물론 갖가지 산채나물도 별미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군 장수군과 경상남도 거창군 함양군에 걸쳐져 있다. 최고봉인 향적봉의 높이가 1614.2m.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 하여 덕유산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단다.
예년 같으면 10월 마지막 주말이 단풍이 가장 절정일 시기일 텐데 올해는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단풍색이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그러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서 점점 더 진한 색의 단풍을 만날 수 있다. 설천봉에 도착하니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찬바람에 몸이 움츠러든다. 그래도 코끝이 찡할 정도로 밀려오는 상쾌한 공기는 가슴까지 시원하게 뚫어주는 듯하다.
향적봉에 오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주의 덕유산 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다. 대략 20여 분을 타고 올라가면 설천봉에 도착하고(1520m) 거기서부터 600여 미터를 더 가면 향적봉에 오를 수 있다. 다소 부담되는 비용(대인 16000원 소인 12000원)이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편하게 보고 나면 결코 아깝지 않은 금액이라고 느껴진다.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최소한 하루 전에 인터넷 예약을 해야 곤돌라를 탈 수 있다.
우리 일행 중에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어서 향적봉까지는 못 갔지만, 단풍과 탁 트인 전경, 시원한 산바람으로 제대로 에너지를 충전했다.
걷는 게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분들에게 덕유산 곤돌라 단풍 구경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 쾨쾨한 매연,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 공해로 얼룩진 도시의 묵은 때를 자연의 민낯처럼 깨끗이 씻어내고 싶다. 일상의 번잡함일랑 잠시 내려두고 너른 자연의 품 안에 뛰어들어보자. 갑자기 떠날 곳이 막막하다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국립자연휴양림’을 이용해보는 것 어떨까?
◇ 수도권
아쉽게도 서울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없지만, 도심에서 가까운 경기도에는 5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산음자연휴양림’은 3km 거리의 ‘치유의 숲길’, 산림치유프로그램, 건강증진센터 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산림치유지도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양주시에 위치한 ‘아세안자연휴양림’은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의 전통가옥과 놀이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곳이다. ‘유명산자연휴양림’은 우리 꽃 자생식물원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라면 유익하다.
-산음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치유지도사 상주
-아세안자연휴양림(양주시) 이국적인 객실 외관
-운악산자연휴양림(포천시) 가마터 향토유적지 인근
-유명산자연휴양림(가평군) 우리 꽃 자생식물원 보유
-중미산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레포츠 오리엔티어링
◇ 경상도
한려해상국립공원 북단에 위치한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있어 삼림욕을 즐기기 좋다. 아울러 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 앞바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불영사 계곡, 덕구온천, 백암온천, 동해안 해수욕장 등과 연계한 관광 코스로 이른바 3욕(금강소나무숲 삼림욕, 해수욕, 온천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관동 8경 중 하나인 월송정과 명사십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망양정도 가까워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검마산자연휴양림(영양군) 책 4000여 권의 숲속도서관 운영
-남해편백자연휴양림(남해군) 편백나무숲 산림욕, 나비더테마파크
-대야산자연휴양림(문경시) 문경 8경 중심부, 천연염색체험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울주군) 통행차량이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
-운문산자연휴양림(청도군) 야생식물관찰원, 농경시대 귀틀집
-지리산자연휴양림(함양군) 토요 숲속야학, 한지체험관 운영
-청옥산자연휴양림(봉화군) 그린스쿨, 자연학습 체험 교육
-칠보산자연휴양림(영덕군) 금강송숲 탐방, 숲속 작은 음악회
-통고산자연휴양림(울진군) 3욕(삼림욕·해수욕·온천욕) 체험
◇ 충청도
충남 서부의 최고 명산으로 불리는 오서산 자락에 있는 ‘오서산자연휴양림’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히 쉴 수 있는 휴양관과 물놀이장, 야영장, 숲속교실 등을 고루 갖췄다. 휴양림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을 거닐며 숲 해설은 물론, 활쏘기 투호 등 놀이체험과 목공예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은 산 전체가 해송(海松)으로 뒤덮인 희리산의 푸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휴양림 수종의 95%가량을 차지하는 해송에서 피톤치드와 테르핀 성분이 다량 분비돼 삼림욕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상당산성자연휴양림(청주시) 유아, 학생 대상 산림교육 프로그램
-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보은군) 휴양림 내 토속 식용·약용식물 자생
-오서산자연휴양림(보령시) 어린이물놀이장, 대나무숲 체험장
-용현자연휴양림(서산시) 백제 후기 문화유산·유적지 인근
-황정산자연휴양림(단양군) 황정산 암벽지대 소나무 군락 경치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서천군) 해송 삼림욕, 솔방울 공예 체험
◇ 전라도
‘방장산자연휴양림’ 내 ‘에코어드벤처’에서는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친환경 레포츠 ‘집라인(zipline)’을 경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편백나무를 이용한 비누, 문패, 액자 만들기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은 곳이다. 낙안읍성민속마을 2km 지점에 자리한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덕유산국립공원, 무주리조트 등과 가까운 ‘덕유산자연휴양림’,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위치한 ‘변산자연휴양림’ 등은 주변 관광지, 휴양지와의 접근이 편리하다.
-낙안민속자연휴양림(순천시) 낙안읍성민속마을 주변 경관
-덕유산자연휴양림(무주군) 야생식물관찰원, 반딧불이 관찰
-방장산자연휴양림(장성군) 에코어드벤처 친환경 레포츠
-변산자연휴양림(부안군) 모항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인근
-운장산자연휴양림(진안군) 휴양림 내 7km의 갈거계곡
-진도자연휴양림(진도군) 2017년 개장, 남도소리체험관
-천관산자연휴양림(장흥군) 휴양림 진입로에 동백·비자나무숲
-회문산자연휴양림(순창군) 유아·청소년 대상 ‘열려라곤충나라’
◇ 강원도
1989년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휴양림 ‘대관령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대관령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 내 50~200년생 아름드리 소나무 숲 중 일부는 1920년대 인공으로 소나무 씨를 뿌려 조성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다양한 목공예 프로그램을 즐기고 싶다면 ‘백운산자연휴양림’을 추천한다. 휴양림 내 ‘숲속공예교실’은 201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한 발전교육(ISD) 공식프로젝트로 인정받았다. 또한 대한걷기연맹에서 지정한 ‘제1호 건강숲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정선군) 정선오일장(아리랑시장) 인근
-검봉산자연휴양림(삼척시) 오토캠핑장, 산림문화 프로그램
-대관령자연휴양림(강릉시) 숯가마를 활용한 체험·공예 프로그램
-두타산자연휴양림(평창군) 두타산 두근두근둘레길 탐방
-미천골자연휴양림(양양군) 휴양림 내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지
-방태산자연휴양림(인제군) 인근 내린천 래프팅 체험
-백운산자연휴양림(원주시) 숲속공예교실 문화 프로그램 특화
-복주산자연휴양림(철원군) 용탕골 계곡과 잠곡리 경관 수려
-삼봉자연휴양림(홍천군) 오대산국립공원 인근 활엽수
-용대자연휴양림(인제군) 다람쥐 등 다양한 야생동물 서식
-용화산자연휴양림(춘천시) 등산·캠핑 전문 산림레포츠 휴양림
-청태산자연휴양림(횡성군) DIY목공교실, 인도네시아전통전시관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서)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이 붑니다.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찬바람이 붑니다. 지난여름과 가을 무성했던 숲에 대한 기억은 날로 희미해져 가는데, 꽃 피는 봄날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2월의 창밖은 여전히 황량합니다. 겨울, 날이 차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걸 알게 된다는,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낳은 계절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 못지않게 존재감이 드러나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로 겨우살이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인의 외침에 호응하듯 무성하던 ‘나무껍데기’가, 이파리들이 우수수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무 꼭대기에 웅지를 튼 겨우살이가 겨우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이때 보이는 것은 꽃이 아니라 늘 푸른 잎과 줄기, 그리고 연노랗거나 붉은 열매입니다. 이 시기 짙푸른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겨우살이 열매를, 흰 눈이 겨우살이 위에 가득 쌓인 멋진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야생화 동호인들은 강추위를 무릅쓰고 겨울 산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작 봄이 한창인 4월경 가지 끝에 노랗게 피는 겨우살이의 꽃은 크기가 자잘한 데다, 숙주인 큰 나무의 이파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야생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조차 주목받지 못합니다.
다른 나무와 풀이 동면(冬眠)하는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겨울+살이, 겨우살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다른 나무에 기생해 겨우겨우 살아가는 나무란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광합성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다른 나무에 뿌리를 박고 흡기(吸器)라는 기관을 통해 물이나 영양분을 빼앗아 생장하는 반기생식물. 땅까지는 뿌리를 내려보지 못하고 사시사철 공중에 뜬 채 살아가는 가련한 식물입니다. 하지만 한겨울 저 홀로 푸름을 자랑하는 특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등의 능력을 갖춘 영초(靈草)라 불리며 신비와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겨우살이의 번식은 새를 통해 이뤄집니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철 높은 나뭇가지에 가득 달린 겨우살이의 열매는 새들에겐 최상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열매엔 끈적끈적한 점액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새들은 열매를 먹을 때 부리에 달라붙는 점액을 한사코 다른 나무의 껍질에 비벼서 닦습니다. 이때 끈끈한 점액에 묻어 있던 씨앗이 나무껍질에 달라붙어 새로운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지요.
◇ Where is it?
국내에 자생하는 겨우살이는 모두 5종.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겨우살이는 한겨울 참나무나 밤나무, 팽나무, 물오리나무 등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까치집 모양으로 등장한다. 겨우살이의 열매는 연노란색이다. 반면 붉은겨우살이는 이름 그대로 붉은색 열매가 돋보이는데, 눈 덮인 한라산을 비롯해 내장산, 덕유산 등을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다. 상록수인 여느 겨우살이와 달리 꼬리겨우살이는 낙엽 활엽 관목으로 겨울이면 잎은 지고 샛노란 열매만 주렁주렁 달린다. 태백산과 구룡령, 소백산 등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종이다. 가는 줄기가 모여 작은 선인장의 모양을 한 동백겨우살이는 숙주인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남쪽 바닷가와 섬,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참나무겨우살이는 참나무보다는 동백나무나 후박나무 등 제주도 서귀포 일대 상록수에 주로 기생한다.
봄바람 따라 왁자지껄 피어나던 바람꽃들이 어느 순간 기세가 꺾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4월의 깊은 계곡, 높은 산기슭에선 꽃 걱정 말라는 듯 순백의 탐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방긋방긋 눈인사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산기슭과 계곡에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계곡의 푸른 이끼 곳곳에 달덩이처럼 환한 야생화가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그렇습니다. 높고 푸른 산속에 눈 녹은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콸콸 흘러내리고, 그 곁에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이 무더기로 피어 ‘산꽃 들꽃’, 우리의 야생화를 찾아 나선 벗들을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종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처음 발견해 모데미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 성이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란 동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모데미’라는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20cm 안팎의 줄기 끝에 흰색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첫 발견지인 전북 남원의 ‘운봉금매화’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영어 이름은 한국 특산식물답게 한글명인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계적으로는 한국만의 고유종, 한국의 특산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로 제주도 한라산부터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부분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 지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함에도 불구하고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Where is it?
첫 발견지라는 학술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전북 남원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는 정작 모데미풀을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한라산, 설악산, 태백산, 점봉산, 오대산, 광덕산 등 전국적으로 폭넓게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개체 수가 많기로는 소백산과 덕유산이 꼽힌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최고로 꼽는 모데미풀 자생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무성한 초록색 이끼, 바위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모데미풀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