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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冬)장군이 그린 수채화 10선
- 동장군이 기승을 부릴 때 일상에서 만나는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특이한 형상을 만들거나 도공이 빚은 도예처럼 미(美)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람의 손으로 흉내 내기 힘들다. 추운 한겨울에도 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평범하고도 아주 작은 풍경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나는 사진에 미친 남자... 맞다! “동(冬)장군이 그린 수채화” 갤러리다. 카메라 렌즈로 들여다보니 사람의 손길로는 이룰 수 없는 신비로움이 거기 있었다.
- 2020-02-0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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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달항아리 화폭에 담는 최영욱 화가
- 그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묻혀 있던 기억들이 클로즈업된다. 빙렬을 따라온 과거의 시간들은 오늘의 사연과 물들며 포개진다. 누군가의 서사를 복원해내듯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선들은 우리 삶의 무늬를 빼어 닮았다. 최영욱(崔永旭·55) 작가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달항아리도 그랬다. 부정형의 자태는 과묵하고 겸손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지쳐 있던 그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 같았다. 위로받듯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당당한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수행하듯 달항아리를 그린다. 빙렬(氷裂, 도자기를 가마 속에서 굽는 과정에 생기는 균열)을 미세한 선으로 표현할 때는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한다. 무아지경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항아리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백색 돌가루와 젯소(gesso,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를 섞어서 올린 후 사포로 살짝 문지르기를 100여 번 반복하며 정성을 들이는 과정은 도공의 예술혼 못지않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무렵.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입시미술 학원을 접고 다시 붓을 잡았을 때다. 홍익대학교 미대 합격생의 20~30%가 그의 학원 출신일 만큼 명성이 높았지만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자 결심하고 과감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오자 뭘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작가들은 소재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저만의 표현 기법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전업 작가를 선언했는데도 입시상담 문의가 계속 들어오더라고요.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3년 정도 지낼 계획을 세우고 캔버스를 150개 챙겨 갔습니다. 뭐를 그리든 다 채우고 돌아올 작정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렀다가 한국관에서 우연히 달항아리를 보게 된 거예요. 품에 안기듯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신기했던 것은 한없이 수수해 보이고 심지어 제 신세처럼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 백자가 어느 순간 당당하게 보이는 거예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종이에 달항아리를 그려봤어요. 백자의 빙렬은 청자보다 많지 않지만 상상으로 표현해봤죠.”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대호(白磁大壺)의 또 다른 이름. 그 시대의 물레로는 한 번에 만들지 못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여야 했기에 부정형(不定形)의 형태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비대칭의 곡선이 오히려 감식가와 애호가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최 작가도 뉴욕 한복판에서 만난 달항아리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특히 소박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이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철학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품은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구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Scope Art Fair Miami’에서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세 점이나 사갔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였다. “행사 때 제 그림은 아트페어 구석에 걸려 있었죠. 어느 날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 홍보 담당 수석이 오더니 구매하고 싶다고 했어요. 순간 ‘빌 게이츠가 평소 백자에 관심이 있었나?’ 궁금했습니다. 다음 해에 재단에서 시애틀에 지은 건물 완공 기념식에 건축가와 작가들을 초대해 저희 가족도 한복을 입고 참여했죠. 아내가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싼 백자랑 놋수저를 빌 게이츠에게 선물했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의 아버지가 40여 년 전 한국으로 여행 왔다가 경복궁 근처에서 달항아리를 사갔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백자를 곁에 두고 지낸 거지요.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집에서 봤던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후 그에게는 ‘빌 게이츠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더불어 달항아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대적 표현 기법을 부여한 작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달항아리를 처음 그릴 때만 해도 “세계적인 소재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달항아리냐, 참신하지 않다, 메시지도 좀 더 찾아봐라” 하며 염려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냥 좋은 작품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회적 역할을 고심하며 메시지를 담는 작가는 이미 많습니다. 제 그림은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벽지를 바라보듯 편안한, 문득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하나의 무늬 같은 작품이길 바랐어요. 길가의 나무처럼 점점 정이 드는 풍경이 있잖아요. 어느 날은 시들어버린 것들에 시선이 갈 때도 있고요.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면 좋겠습니다.” ‘빙렬’에 담긴 의미 그는 “달항아리의 꾸밈없이 단순한 모습과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비밀한 내면에 자주 머무르며, 삶의 들숨과 날숨에 귀 기울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자세는 그의 몸속 깊이 내재된 성향으로 보인다. “저는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어요. 속세의 잡다한 것들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둥글둥글 이해하며 포용하는 삶.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달항아리를 소재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따뜻하게 안아주면 좋겠어요. 그림도 훌륭한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술에 대한 정신적 지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그는 ‘카르마’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달항아리 연작을 발표해왔다. 그에게 카르마란 어떤 의미일까. “처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진 않았어요. 달항아리의 빙렬을 표현하려면 며칠 꼬박 앉아 그려야 합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 시간이 좋더라고요. 실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 시절도 떠오르고, 다퉜던 친구들도 그립고, 어느 날은 내가 왜 여기 앉아 도자기를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마치 제 인생길을 되돌아보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백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가 자그마한 게 예뻐서 하나 샀어요. 그러고는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어느 날 달항아리를 그리다가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서 ‘그때 왜 백자를 샀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인사동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시절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지금 저는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잖아요.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우연성, 그것들이 모여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요. 그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도 어쩔 수 없이 균열투성이다. 최영욱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빙렬을 그려낸다. 그리고 카르마로 이어지는 무수한 균열들은 해독할 수 없었던 존재의 운명을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이 된다. 삶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최영욱 작가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들은 그의 달항아리 그림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초기 작품인 풍경화, 추상화를 그릴 때도 즐겨 쓴 색채는 흰색 회색이 주조를 이뤘다는 것. 보일 듯 보이지 않게 그리는 화풍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대학교 때 흰색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흰색이 너무 좋아 노트에다가 ‘나는 하얀 테이블보가 좋다, 국화 중에서는 흰 국화가 좋다’고 끄적이기도 했지요. 아쉽게도 백자가 좋다는 말은 없었네요.(웃음) 지금 생각하니 달항아리 그림을 위해 하나하나의 우연들이 저도 모르게 연결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교와 허식이 없는 백자만의 소박함 때문일까, 아니면 무채색으로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한 표현 기법 때문일까. 그의 달항아리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제 그림은 큰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어서 어떤 분들이 관심을 가질까 궁금했는데,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화가 된다고 하네요. 제 작품 전시장에 오신 한 할머니는 달항아리 앞에서 눈물을 훔치시더래요. 왜 우시냐고 물어보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왜 그렇게 엄마 생각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요’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달항아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화해의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거잖아요. 어떤 분은 제 그림을 걸어놓고 차 마시고 명상하는 방을 꾸몄다더군요. 저도 작업실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그런 공간을 하나 만들어볼 생각입니다.(웃음)” 나이 들면서 그는 알게 됐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편한 결론이지만 그래서 자꾸 내려놓게 된다. 작업에 대한 강박도 버렸으니 이제 그의 달항아리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 2019-09-0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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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의 해악과 계영배
- 한밤중에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다. 아들이 술이 취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에 왔는데 아버님이 야단 좀 쳐달라는 내용이었다.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아들을 보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며느리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 밤중에 시아버지인 내게 고자질하려고 전화를 했을까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경찰의 도움으로 퍽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귀가했다니 다행이다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아들을 호출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술이 센 직장 상사가 강권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다가 취하게 되었는데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직장 상사가 술을 권하기도 했겠지만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승부욕이 있어 술자리에서는 술로 이겨보려 한다. 나도 젊은 시절 누가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며 독기를 품으며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한때의 오기였다. 술을 너무 마시면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는 말이 있다. 아들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의미로 계영배(戒盈杯)의 이야기를 해줬다. 계영배는 강원도 홍천 사람 우명옥이 만들었는데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다. 과음을 막기 위해 술이 일정 이상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절주배(節酒杯)를 그가 만들게 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며 술의 해악을 깨닫도록 했다. 우명옥은 뛰어난 도공 실력으로 궁궐의 자기를 만드는 광주분원에 발탁되어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면서 명성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기술을 시기한 동료들이 술집으로 끌고 다니며 그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도공에게 생명인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앓게 된다. 스승도 그를 내치자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면서 술을 끊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계영배를 만들었다. 이 술잔은 조선시대 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의 손에 들어갔다. 임상옥은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거듭났다. 이 술잔이 깨졌을 때 우명옥의 목숨도 끊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술을 경계하기 위해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 소설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라는 작품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아내가 누가 술을 권했냐고 묻자 남편은 “부조리한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은 말 상대가 되지 않는 아내를 뿌리치며 비틀거리며 또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버린다. 사회가 술을 권한다 해도 술 마신 사람의 건강만 나빠진다. 술은 간에도 치명타를 입히지만 관절도 병들게 한다. 술을 이기는 천하장사는 없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장수하는 걸 나는 못 봤다. 술은 적당히 마셔야 삶의 윤활유가 된다. 인간관계에서 적당히 오가는 술잔은 뇌를 기분 좋게 해 대화도 풍성하게 하고 친밀도도 높여준다. 문제는 적당한 기준을 늘 넘어선다는 데 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분위기에 들떠 과음을 하는 것이다. 또 술에 취하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도 하게 된다. 참을성이 약해져 갑자기 욱하면서 사고를 치기도 한다. 술에서 깬 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두가 술의 해악이다. 직장에서 평소 얌전하고 일도 착실히 하던 사람이 술자리에서 상사에게 대들어 그동안 쌓아온 점수를 다 까먹는 것을 보기도 한다.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다. 그러니 술을 마실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계영배를 품자.
- 2019-02-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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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색무광(無色無光)의 깊은 아름다움
- 언젠가 ‘한국 미술을 몇 마디로 집약하는 표현은 무엇일까’라는 화제(話題)가 떠오른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서슴지 않고 ‘검이불루 화이불치(檢而不陋 華而不侈)’를 꼽았다. 그의 근작 ‘안목(眼目)’의 첫 대목도 그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 필자는 일본 최고의 명품관임을 자랑하는 도쿄 와코(和光)백화점에서 일본 도예가 이노우에 만지(井上萬二)의 작품 전시를 우연히 관람한 적이 있다. 전시회에서 내건 화제가 ‘잡스러움이 없는 명품 도자기(名陶無雜)’라서 필자의 흥미를 더욱 자아냈다. 널찍한 공간은 다양한 도예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울러 흰색이 전시장 전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잡티 없는 것’을 추구한 작가의 예혼(藝魂)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했다. 방문객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장을 나오며 필자는 왠지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전’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화려한 작품으로 가득한, ‘흰빛 넘치는 공간’이 오히려 무겁기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 문득 ‘달항아리’의 자태가 떠올랐다. 상기 전시 제목이 말하는 ‘잡것 없는 백자’와 우리네 ‘잡것 없는 백자’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을까? 둘을 비교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부분의 우리네 국보급 백자 ‘달항아리’는 흰색이면서도 광채를 배제한 무색(無色)이라는 게 생각났다. 이것이야말로 둘의 ‘작지만 큰 차이’인 듯싶었다. 우리의 옛 도공은 흰 빛깔(光體)도 ‘무잡(無雜)’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나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기사에 나오는 걸 보면 이는 면면이 이어온 우리 민족의 오랜 ‘예술적 정서’임이 분명하다.
- 2018-09-25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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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리다 ‘르누아르: 여인의 향기展’
- 안치환의 노래 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가사가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 ‘그림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표현하는 듯하다. 또, 그림을 통해 사람의 가치와 품격을 한층 격상시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841년부터 1919년까지 78년을 살다간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그는 공방에서 도자기에 장식하는 그림을 그리는 도공 일을 시작으로, 22세가 되는 해에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79세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특히 50세가 되어갈 무렵 류머티즘으로 뼈가 뒤틀리고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손에 붓을 묶어가며 우울한 그림보다는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특징은 빛을 중요하게 여기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그리기보다는 어느 한순간 인상 깊게 느낀 장면을 그리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상파 화가들은 고전적인 전쟁, 신화, 영웅들의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나 자연풍경과 같은 일상을 주로 그렸다. 선과 색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는 대신 반짝이는 빛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 에드가르 드가의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 르누아르의 ‘무지 발의 무도회’,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식사’, ‘피아노 치는 소녀’ 등에서 보여주듯 어느 한순간의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을 살린 ‘르누아르: 여인의 향기展’은 르누아르의 작품을 마치 살아있는 듯 감각적인 영상으로 재현한 컨버전스 아트(Convergence Art)와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오감이 즐거운 체험형 예술전시로 꾸며졌다.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살아있는 듯 눈을 깜박이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 행복한 모습을 그린다.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라던 르누아르의 말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 전시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분하여 그의 예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PROLOGUE 꽃의 연희’, ‘Ⅰ 몽마르트 가든’, ‘Ⅱ 미디어 화랑’, ‘Ⅲ 드로잉 뮤지엄’, ‘Ⅳ 그녀의 실루엣’, ‘Ⅴ 우아한 위로’, ‘Ⅵ 르누아르의 아틀리에’, ‘EPILOGUE 그의 향기’ 등으로 구성된다. 이중 ‘Ⅰ 몽마르트 가든에서는 인상주의의 주 소재인 다채로운 색상으로 표현된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볼 수 있으며, ’Ⅲ 드로잉 뮤지엄‘에서는 르누아르가 5분 만에 드로잉을 하였다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사각사각’ 소리까지 들려 마치 르누아르가 지금 이 그림을 연필로 스케치하는 듯하다. 또한 ‘Ⅳ 그녀의 실루엣’에서는 그가 진정 추구하고 그리고자 했던 여성의 아름다운 ‘누드화’를 감상할 수 있다. ‘잠자는 소녀’, ‘시냇가의 님프’ 등은 여성의 관능적이고 우아한 모습을 곡선 인테리어의 노출과 천 투사 효과로 표현했다. 특별한 모델이 아닌 우리 일상의 소재로 자신의 부인, 동생이며 가정부였던 가브리엘 르나르를 모델로 삼아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병마와 싸우는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에 새삼 고개가 숙어지기도 한다. 지난 5월 12일 시작된 ‘르누아르: 여인의 향기展’은 올해 10월 31일까지 갤러리아포레 G층 본다비치 뮤지엄 서울숲에서 만날 수 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대하면서 인간에 대한 존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꼈기에, 한 번쯤 다녀오시길 권한다. 더불어 서울의 도심 삭막한 빌딩 숲속에서의 ‘서울숲’ 공원 산책은 또 다른 만족을 선사할 것이다.
- 2018-07-2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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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랍 420년 심수관 가문의 조선 혼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ㆍ정유왜란 피랍인 후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14대 심수관이다. 일본 도예의 대명사가 된 사쓰마 야키(薩摩燒) 중흥의 주인공이라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1969년 그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가 화제가 되자 그의 명성도 부풀어 올랐다. 정유재란 때 납치된 도공들이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땅에 터를 잡고 400년 동안 조선인 혈통을 이어가며 살아온 이야기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로 유명했다. 1974년 한국에 온 그는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강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일제 치하 36년에 대해 묻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답했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면서 유명한 노래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마침 그가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14대째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데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고, 근래에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한일 각료회담 간담회가 그의 집에서 열린 일로 유명해졌다. 2004년 12월 1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유명 온천 휴양지 이부스키(指宿)로 가는 길에 노 대통령이 그의 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신 일이 있었다. 1998년에는 가고시마 한일 각료회담 후 양국 각료들이 그의 집에서 간담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30년째 주일 한국대사관 명예 총영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가교역할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양국이 서로 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도쿄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작품과의 만남이었다. 게이오대학교 신문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신주쿠 이세탄(伊勢丹)백화점에서 ‘심수관 도예전’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달려갔다. 먼저 놀란 것은 작품 값이었다. 막사발로 보이는 그릇 하나에 30만 엔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도예에 까막눈이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큰 놀라움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가 심수관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일본인이었고, 그의 선대가 납치되어온 지 400년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재일동포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통명(通名)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후 꼭 한 번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1990년 7월, 주일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가고시마로 달려갔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후쿠오카까지 7시간, 거기서 특급열차로 가고시마까지 5시간, 다시 로컬 열차로 30분을 달려, 시골 역에서 택시로 30분을 더 가야 했다. 중간에서 하룻밤을 머문 여정이었다. 미야마(美山)라는 지금의 마을 이름보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이 더 유명한 곳이다. 그는 10년 지기처럼 환대해주었다. 수장고에서 선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사이, 14대가 가마에서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잉크빛 작업복은 개량한복 같았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선친께서 조선에 가셨을 때 황해도 해주의 어느 정자에서 탁본을 떠온 것이오. 우리 집 가보요.” 수인사가 끝나고 액자를 화제 삼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문의 내력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말을 들었다. 정유재란 때 붙잡혀온 도공 후예들이 사는 마을이라기에 당신처럼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뿐이오” 했다. 성은 그대로인 임(林) 씨가 있지만, 읽기는 일본식(하야시)으로 하는 집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일본 성으로 바뀌었다 했다. 200여 호 가운데 50%는 조선 도공 후예들이고, 나머지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흘러 들어온 일본인들이라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메이지 유신 무렵까지만 해도 마을에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답니다. 조선의 혈통을 보전시키려는 사쓰마 번(藩)의 보호정책 덕분에 모두가 사족 대우를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유족하게 살았지요.” 그는 나에시로가와 마을이 번 당국으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를 강조하는 사례로, 마을 사람 하나를 죽인 범인과 관련자 6명이 모두 처형당한 사건을 들었다. 서당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잠시 자리를 뜨더니 ‘한어훈몽(韓語訓蒙)’과 ‘숙향전(熟香傳)’ 고본을 들고 왔다. 한어훈몽은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칠 때 쓰던 교과서다. ‘매오 다’(매우 좋다), ‘책을 닐러라’(책을 읽어라) 같은 우리말 고어 옆에 일본 글자로 훈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가르친 우리말로 자녀들에게 ‘숙향전’ 같은 책을 읽혔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말 잔재가 많고, 한동안은 개고기를 먹는 풍습에서부터 제례 혼례에 이르기까지 조선 색채가 남아 있었다 했다. 그가 어렸을 때 돈이 없다는 말은 ‘동가 샤가나이’, 방귀 뀌었다는 말은 ‘방구 시타’라고 했다. 공방과 가마에는 그런 표현들이 더 많다. ‘안질통’은 가마에서 일할 때 쓰는 간이의자다. 물그릇은 ‘무루사쿠’, 흙덩이는 ‘동그레’, 주걱은 ‘비코세’, 막대기는 ‘찌르레’, 흙을 두드려 펼 때 쓰는 연장은 ‘슈르레’, 장작은 ‘찍순’이라 했다. 일본어에는 없는 말들이다. 점심 대접을 받은 뒤 그가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단군사당 옥산궁(玉山宮)부터 찾아갔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우리말 방송이 나왔다. KBS 제주 방송이었다. “우리말을 알아들으시네요.” “아닙니다. 뜻은 몰라도 들으면 편안해서 그냥 틀어놓습니다.” 우리말을 몰라서 미안해하는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차를 내려 차 밭 사이로 난 나지막한 언덕길을 잠시 오르니 대숲 가에 옥산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량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 같은 건물 앞에 작은 도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문)와 돌 등롱이 서 있었다. 일본 신사 분위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사당은 많이 퇴락해 있었다. 상주 관리인이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오래전에 신관이 죽고 새 사람을 모실 수 없어 이렇습니다. 아무나 신관으로 앉힐 수도 없는 일이라서… 다시 사당을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있으니 머지않아 문을 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된 것이 자기 책임이라도 된 듯, 표정에 미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얼른 옥산궁의 유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살기에 여유가 생기고부터 마을에 갈등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자기 가문이 잘났다고 티격태격한 것이지요. 어느 날 밤 현해탄 쪽에서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와 이곳에 떨어졌는데, 다음 날 아침에 와 보니 큰 바위가 있더래요.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라는 단군의 계시로 알고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웠답니다.” 옥산궁이 생긴 뒤 매년 설날과 추석에 단군제가 열렸다. ‘오노리소’라는 신축가가 그때부터 불렸는데, 이제는 노랫말 뜻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도자기 작품에 새겨져 내려오는 노랫말은 ‘오는 날도 오는 날도 매일 매일이 오늘과 다름없네. 날이 저물고 또 해가 떠올라도 오늘은 오늘, 언제나 같은 세월’이라 돼 있다. 고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에 오늘과 내일의 차이가 있겠느냐는 체념과 실망의 의미를 담은 글이다. 옥산궁을 떠난 자동차는 이웃 구시키노(串木野) 시가지를 지나 시마비라(島平) 해안에 멎었다. 1598년 겨울, 1대 심수관 일행 42명이 표착한 해안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14대는 성큼성큼 해변으로 걸어가더니, 검은 빗돌 아래에서 잡초를 한 움큼 뽑아냈다. 선조들의 도래 400주년을 앞두고 그가 세운 기념비다. 비석에는 ‘게이초 경장 3년 겨울, 우리들의 개조 이 땅에 상륙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돌을 세운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그는 해안 바윗돌에 올라, 먼 지평선을 가리키며 고난의 역사를 설명했다. 조선을 떠난 피랍인 배는 3척이었다. 두 척은 맞은편 가고시마 해안에 상륙했는데, 그들의 조상 42명을 태운 배만 이곳에 표착했다.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했다. 오랜 굶주림과 뱃멀미에 시달린 도공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지쳐 쓰러졌다. 배 안에서 숨을 거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덤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녀자들은 신음 섞인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당장 먹을 것과 바람을 피할 움막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풀과 잔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진흙을 파서 가마부터 만들었다. 먹고살 방도는 그것뿐이었다.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구워내는 그릇은 곧 현지 마을의 화제가 되었다. 곡식과 채소를 가져와 바꿔가기도 했고, 돈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맨손으로 와 빼앗아가려는 무리도 있었다. 어느 날 왜인들이 떼 지어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리의 지도자 심당길과 박평의(朴平意)는 의논 끝에 마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유약과 공방 도구부터 챙겨 넣고 옷가지와 취사용품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채 하염없이 걷다가 발을 멈춘 곳이 나에시로가와였다. “여기 지형이 남원 천지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발길을 멈추고 짐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고향 남원 땅을 닮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새 둥지를 틀자마자 번 관리가 성하촌(城下村)으로 이주하라는 명을 가져왔다. ‘성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명령’이라 했다. 마을 어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군부(君父)를 팔아먹은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남원성 함락 때 요시히로 군을 지름길로 안내한 주가전(朱嘉全) 같은 자들이 거기 모여 산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니 거기 그대로 살게 하라. 대신 그들의 조선인 혈통을 철저히 보전토록 하고, 도자기 생산을 적극 지원하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열도의 패권을 겨룬 세키가하라(關が原)전투에서 돌아온 요시히로는 애써 붙잡아온 도공들이 생각난 듯,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도공 마을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이어가게 하고 반드시 동족끼리만 혼인하도록 하라,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게 하라,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라. 생산된 제품은 모두 성에 납입하도록 하라….” 보호·지원정책에 힘입어 조선 도공 마을의 도자기 산업은 날로 융성했다. 번의 지원을 받은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한 뒤로 도자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유명한 ‘시로 사쓰마(白薩摩)’의 탄생이다. 도자기란 자석(磁石) 없이는 아름다운 색과 빛을 낼 수 없는데, 흰 자석을 쓰게 되니 금상첨화가 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시로 사쓰마 한 점이 ‘일국일성(一國一城)에 값한다’는 말로 평가되었다. 차(茶) 문화는 발달했으나 다기(茶器)가 조잡했던 문명의 수준 탓이었다. 이렇게 양산된 사쓰마 야키는 번 재정에 엄청난 보물단지가 되었다. 나가사키 항을 통해 외국에 수출하고 국내 시장에도 출하해 막대한 수입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들이 도공 납치에 혈안이 되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 때 사쓰마 번이 조슈(長州, 현재 야마구치) 번과 함께 중심 역할을 한 것도 그에 힘입은 것이었다. 사쓰마 야키는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12대 심수관 작품이 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심수관 가 수장고에 있는 ‘히바카리(ひばかり)’ 막사발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를 만든 도공도, 흙도, 유약도 모두 조선의 것인데 오직 불 하나만 일본 것이라는 뜻이다. 사쓰마 야키 개조 심당길이 표착 초기에 만든 이 작품은 1998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400년 만의 귀향전’에 출품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쓰마 야키 400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4대가 주관한 전시회였다. 14대와의 두 번째 만남은 1993년 8월 대전엑스포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취재 때였다. 고국과 오랜 왕래가 있었던 그는 친한 도예 작가들과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것 같았다. 같은 처지이지만 고국과 유대가 없어 서먹서먹해하는 도공 후예들에게는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일본 도자기의 신이 된 이삼평(李參平)의 12대 가네가에 삼페에(錦が江三兵衛), 가라쓰 야키 13대 나카사토 다로에몽(中里太郞衛門), 다카도리 야키 12대 다카도리 하루산(高取八山), 하기 야키 12대 사카 고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고다 야키 11대 아가노 사이츠케(上野才助) 등이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출품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조상이 어디서 붙잡혀 갔는지 확실한 연고지를 몰라 “이번 기회에 꼭 확인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조상이 붙잡혀간 남원과 관향인 경북 청송읍을 찾아보는 14대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삶이었다. ‘400년 만의 귀향전’ 때 그는 불까지 조국의 것으로 하자는 뜻으로 남원 교룡산성에서 채화된 불씨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행사를 주관했다. 그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 도유관(陶遊館)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후손들은 가마에 불을 지필 때마다 거기서 불씨를 채화한다. 400주년 기념 행사들을 마친 뒤 14대는 “이제야 선대의 비원을 이루어 감회가 깊다. 특히 400년 사업을 부탁한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기쁘다”고 했다. 그 모든 사업이 단군의 보살핌 덕분이었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돌아와서 열어보니 아름다운 꽃병이었다. 나무상자 안쪽의 친필 휘호에 감격했다. ‘本是同根-14代 沈壽官’ 생면부지의 특파원을 동족으로 대해준 따뜻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가 심수관 도원 당주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지도 30년째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을 또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도예의 기본은 옹기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아들의 아들도 벌써 공방과 가마를 드나들며 흙일을 배우고 있다. 올해 93세가 된 그는 16대를 습명(襲名,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하게 될 손자에게 흙일을 가르치고 있다. 근래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거동이 불편해 2013년 이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최후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어를 아는 택시 운전사를 만나 한국의 각 지방을 돌며 고향 산천과의 작별을 고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 했다.
- 2018-03-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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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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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잡혀간 사람들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 2017-12-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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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골동품 수집, 연적과 꽃창살문
-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벼루[硯], 먹[墨], 붓[筆], 종이[紙]를 말한다. 예로부터 선비나 문사(文士)들 곁에는 이 네 가지가 늘 함께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에 글씨를 쓰면 서찰(書札)도 되고 시(詩)도 되고 서화(書畵)도 되고 상소문(上疏文)도 되었다. 보조기구로는 벼루와 먹을 넣어두는 연상(硯箱)이 있고 종이를 말아서 보관하던 지통(紙筒), 붓을 꽂아두는 필통(筆筒)도 있으나 역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적(硯滴)이라 할 수 있다. 토기나 도자기 혹은 놋쇠로 만들어진 연적은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작은 기물이다. 그런데 그 기형이 다채롭고 격이 높아 선비들의 호사(豪奢)가 되기도 했다. 서울이나 지방의 고미술 상점을 지날 때마다 연적에 눈이 쏠려 만져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예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로 문방사우와 연적을 갖추긴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을 팔았으나, 연적은 없어서 컵이나 주전자에 물을 준비해 조금씩 따라 먹을 갈았다. 그래도 열서너 명은 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사기 연적을 갖고 왔는데 청채(靑彩)의 붕어 모양이 제일 많았다. 나는 형이 쓰던 푸른 문양의 사각형 사기 연적을 갖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팔던 ‘왜사기’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수집하려고 부산 등지에 현대식 사기 공장을 크게 짓고 밥그릇, 국그릇, 종지, 접시, 요강, 연적들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의 청자, 백자, 분청자기와 바꿈질을 했다. 그래서 오지의 초가 구석에 있던 간장종지까지 산뜻한(?) 왜사기로 바뀌게 되었다. 시골 장날이면 우리의 민속품이나 도자기들은 바리바리 일본 상인에게 들려 바다 건너로 사라졌고 흔하던 붕어연적도 씨가 마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향리에 갈 때마다 옛 벗들에게 붕어연적을 탐문했으나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인사동의 고미술상에 있는 연적들은 희귀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들이라 값이 비싸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황학동 일대의 벼룩시장,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훑고 다녔지만 옛것을 모방한 현대의 것들뿐, 조선조 말기의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 중에 골동품점에서 처음 청채 연적을 구입했다. 붕어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까웠는데, 구부린 자태며 비늘과 수염까지 정교한 데다 은은하고 맑은 코발트 유약이 일품이고 수구(水口)며 밑 처리도 깔끔해 얼른 지갑을 열었다. 그 뒤로 인사동 도자기 경매장에서 여러 형상의 연적들을 구입했다. 개중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흘러온 것들도 있었다. 한 30여 년 수집하다 보니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100여 점 되고, 현대 도예가들에게 부탁해 빚은 연적이 300여 점이나 있다. 언젠가는 소장한 연적으로 작은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다. 지금은 물건이 귀해져 값이 만만치 않지만, 내가 연적을 마음에 두고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다른 도자기(항아리, 다완, 주병 등)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팔각(八角) 국화문이나 풀 무늬의 것[사진 1]은 선이 비뚤고 각(角)이 아홉인 것도 있다.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히 빚고, 우리 땅에서 나는 탁한 토청(土靑)을 바른 그 소박함이 좋다. 고미술상에는 도자기는 물론 석물(石物), 목물(木物), 서화 등 그 구색이 다양한데 고졸(古拙)한 멋의 책상이나 소반, 반닫이, 목판 따위에 밀려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짝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대부분의 문짝들은 구옥(舊屋)이 헐리면서 수습된 것이기에 그 짜임도 지방 따라 다양하고 목수 솜씨에 따라 품질이 각색이지만, 연대가 깊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다. 20~30cm의 작은 문짝들도 그 짜임이 조밀하고 문살도 가지런해 조형미가 그만이다. 다락방 들창이었거나 고방(庫房)의 환기창으로 소용되었을 문짝 한 쌍을 벽에 걸고 보면, 벽 너머 푸른 하늘이 열릴 것 같은 아련한 환상에 젖는다.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우리의 목기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고 손으로 툭툭 다듬은 것처럼 비뚤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든든함’이라 칭송했다. 창살 모양에 따라 완자문(卍字門), 아자문(亞字門), 격자문(格子門), 정자문(井字門), 용자문(用字門) 등 그 이름이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꽃창살문’이다. 일반 사가(私家)보다는 사찰 문에, 일일이 꽃 모양을 깎아 맞추고 단청으로 장엄(莊嚴)한 문을 바라보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법당 문의 꽃창살은 1633년에 창건된 법당과 함께 만들어졌다. 긴 세월 비바람에 단청마저 퇴색되었으나, 색을 덧바르지 않고 나무의 속살 그대로를 드러낸 채 속계(俗界)와 선계(禪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연꽃, 국화, 모란의 꽃들이 사선으로 혹은 나란히 연결된 채 500년 가까이 침묵의 고태미(古態美)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법당 문의 문창살을 이토록 정교하게 빚어낸 것은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理事無碍法界]라는 저 화엄(華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석지현(釋智賢, 1946~) 승려 시인의 말이다. 문짝[사진 2]은 지리산 산록에 거주하며 옛 목기들을 정성스레 재현하고 있는 한 목수의 솜씨다. 1 대 2의 비율로 문틀을 짜놓고, 사선으로 문틀에 꽉 차게 두 종류의 꽃 모양을 조각한 문살을 끼웠다. 뒷면에 창호지를 바를까 하다가 공간의 멋을 즐기려 그냥 서재 책장 옆에 걸어두고 있다. 골동품을 수집하려면 주변의 민속품에 먼저 눈길을 줘보자. 아직은 값이 싼 실패, 골무 등 규방의 것부터 홀대받고 있는 작은 문짝들까지 모으다 보면 5~6년 후엔 값도 많이 오를 것이고 심미안도 높아져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청채의 붕어, 해태, 나비 모양 연적도 눈에 띄거든 주저 말고 수집할 일이다.
- 2017-11-0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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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의 그림이야기] 일본 정원을 보며 우리 문화를 본다
- 문화답사를 목적으로 국내 여러 문화예술 애호가와 단체로 일본이 자랑하는 가나자와(金澤)시의 정원(庭園) ‘겐로쿠엔(兼六園)’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일본 전통정원이 그러하듯 잘 정돈된 일본의 정원을 거닐던 한 동행인이 “왜 우리 정원은 일본처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했다. 많은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불평이었다[사진 1]. 일본 전통정원이 ‘얄미울 정도’로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 정원의 나뭇가지는 정원사의 가위와 톱으로 두발(頭髮) 미용하듯 오밀조밀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손질로 가공한 조형물인 셈이다. 그래서 일본 정원은 바라봄의 대상이다. 교토시 료안지(龍安寺)의 정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사진 2]. 방문자가 정원 안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나 괴석(塊石)을 손으로 만지며 촉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마치 거대한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긴장감마저 느끼게 된다. 일본 공영 방송사 NHK의 수석 디렉터인 후지모토 도시카즈(藤本敏和)는 “일본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살며 긴장감이 주는 아름다운 매력(Beautiful charm of tension)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반추하게 된다. 우리 정원은 일본 정원과 많이 다르다. 정원에 서 있는 수목(樹木)은 인위적 손질을 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물론 깔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 바라봄의 대상이 아니어서, 정원에 들어가 나무에 기대기도 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시간을 갖기도 한다. 안식처로서의 정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원은 수더분하게 다가온다[사진 3]. 이와 같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정원문화를 살펴보면서 필자는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도자기 예술에서도 같은 맥박을 느낀다. 일본 남단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조선 도예가(陶藝家) 심당길(沈當吉) 집안의 14대손 심수관(沈壽官) 선생은 오래전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도자기에는 정성을 다해 물레질을 하면서 대가를 생각하는 욕심(慾心)이 묻어 있고, 도공이 무심한 가운데 물레질하여 만든 조선의 도자기에는 무심(無心), 즉 불심(佛心)이 있다.” 또 “영국박물관의 조선 도자기가 있는 전시대 앞 카펫이 유독 마모되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문화에 담긴 각기 다른 정신적 바탕에 대해 생각할 때면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간결함에 내재되어 있는 긴장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문화를 창조했다면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살아오며 엮어낸 ‘순수함의 문화’를 일궈냈다. 즉 일본 문화의 중추가 인위적이라면 꾸밈[假飾]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반면 가식을 배제한 우리 문화는 상대적으로 거칠게 다가오지만 자연을 거역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정직함이라는 더 큰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드높이며 자랑해야 할 심미안(審美眼)이다. 우리 문화의 높은 격조를 다시금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
- 2017-07-10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