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 해안 도시인 페트로바츠(Petrovac)는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구석은 없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 신선한 공기, 푸르고 맑은 물빛, 모래와 조약돌이 어우러진 해변, 16세기에 만들어진 요새, 바다 앞쪽의 작은 섬 두 개가 전부인 해안 마을이지만 동유럽의 부유층들에게 사랑받는 휴양도시다.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도시는 긴 여행에 지친 여행객의 마음을 매우 편하게 해준다. 낚싯대와 책 한 권이 꼭 필요한 곳이다.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
발칸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몬테네그로는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크로아티아처럼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선을 끼고, 해안으로부터 디나르알프스(Dinar Alps) 산맥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풍경의 장관을 보여주는 나라다. 풍치는 빼어나고 음식은 이탈리아 버금갈 정도로 맛있고 물가도 싼 나라인데도 크로아티아 뒷전인 것은 순전히 매스컴 영향 탓이다. 무분별하게 보여주는 영상매체를 스스로 걸러낼 수 있어야 수준 있는 사람이다. 몬테네그로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크기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국가다. 좁은 땅에 로브첸(1749m), 오르엔(1894m), 두르미토르(2522m) 등의 고산이 90%나 차지하고 있어 매우 척박하다. 현지민들은 살기가 힘들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최상의 여행지다. 고산을 지붕 삼고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은 몬테네그로를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조우’라고 표현했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Podgorica)는 전쟁으로 온 도시가 폭격을 당했지만 아드리아 해안선은 완전히 다르다. 코토르 만을 따라 이어지는 293.5km 해안선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와 경계에 있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를 시작으로 페라스트(Perast), 티바트(Tivat), 리산(Risan), 코토르(Kotor)까지 그림 같은 해안 도시가 이어진다.
부드바와 바르 중간쯤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
그러나 아름다운 곳에는 늘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풍치에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때때로 지나친 상흔을 보여주는 곳이 번잡한 관광지다. 긴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때 찾았던 곳이 페트로바츠다. 페트로바츠는 수도 포드고리차의 식당 직원에게 추천받은 곳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서 몬테네그로로 입성해 터미널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음식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메인 요리를 두 개나 시켜 먹고 나서 영어를 잘하는 스태프에게 질문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도시를 추천해줄래?”라고 묻자 그는 메모지에 페트로바츠라는 지명을 써주었다. 지역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코토르를 도망치듯 떠나 ‘부드바(Budva)’에 점을 찍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바르(Bar)’까지 가버렸다. 버스의 남자 안내원이 인파에 밀려 동양인 여자가 목적지를 꼭 알려 달라 했던 지명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르에 도착한 버스의 여자 운전자는 말 안 해준 안내원보다 더 안달이 났다. 그녀는 페트로바츠까지 되돌아갈 수 있는 버스 편을 가르쳐주기만 했지 공짜표는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너네 잘못이니 표 값 돌려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일 뿐이었다.
로마 때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도시
페트로바츠는 부드바(17km)와 바르(21km) 중간 즈음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대던 인근 해안 도시에 비해 조용하고 정적이다. 이 도시는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서인 듀클랴(Duklja) 공국의 성직자 연대기(年代記, 연대순으로 역사적인 사상을 열거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 로마시대 때 한 부부가 이곳의 크라스 메딘스키(Krsˇ Medinski)에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을 욕조로 한 모자이크 조각이 세인트 일리야(Prophet Elijah) 교회 뒤에서 발견되었다. 원래의 지명은 라스트바(Lastva)였다가 20세기, 세르비아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Petar Karađorđevic´, 1844~1921) 왕조 때부터 페트로바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으로 나서면 600m 해안선을 가진 루치차 해변이 있다. 작아서 한눈에도 해안 주변은 다 보인다. 해안선 북쪽 오른쪽 끝에는 오래된 듯한 작은 요새가 있다. 반대편 해안에는 자그마한 소나무 산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가옥 몇 채가 있을 뿐, 해안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바다 앞쪽으로는 작은 섬 두 개가 있고 바위 섬 위에는 마치 ‘인형 집’ 같은 작은 교회가 있다.
영화 등 촬영지로 인기
우선 눈에 익은 듯한 북쪽 해안 끝 카스텔(Castel)로 다가선다. 작은 이 요새는 16세기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선원들의 작은 등대 역할을 했다. 요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와 싸우고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하기 위한 작은 오벨리스크가 기둥처럼 솟아 있다. 요새 옆의 거대한 아트갤러리(Red Commune)는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창고 겸 검역소다. 와인 등의 제품들을 보관했고 전염병이 돌면 환자의 숙박시설, 검역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건축가인 마르코 그레고비치(Marko Gregovic)가 19세기 후반 개조해 오늘에 이른다. 이 건물에는 1만500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고 연중 많은 연극, 예술, 음악 이벤트가 펼쳐진다.
특히 이곳 풍경이 낯익은 것은 영화 (레이첼 와이즈, 애드리언 브로디, 마크 버팔로 주연)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사기꾼 형제 중 동생(애드리언 브로디 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도망쳐온 곳이 바로 이곳. 레이첼 와이즈와의 사랑을 이루는 엔딩 장면도 이 요새와 레드 코뮌을 뒷배경으로 보여준다.
바닷가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카티치와 스베타 네제리아(Katicˇ and Sveta Neđelja)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앙증맞은 이 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정보부가 유고슬로비아 게릴라와 연락 교신하기 위해 주둔했다. 난파선 선원의 귀환을 기원하는 성 일요일이라는 작은 교회가 남아 있다. 교회의 종을 울리면 행운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지만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렵다. 이 도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현재도 외부 관광객보다는 현지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지노가 있는 멋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원 없이 휴양을 즐기면 좋을 곳. 아침 햇살을 맞으며 요새 근처의 바에 앉아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싶은 곳. 낚시를 즐긴다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힌다면 한국식으로 회를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Travel Data
항공편 직항은 없다. 동유럽, 서유럽, 터키 등지에서 항공편으로 몬테네그로로 진입한다. 포드고리차 티바트 공항은 도심과 50km 거리에 있다. 육로로는 주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에서 접근할 수 있다.
현지 교통 기차보다는 버스가 편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로 이용할 경우, 헤르체그노비를 거쳐 3시간 만에 코토르에 도착한다. 코토르에서 페트로바츠까지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해상 편은 굉장히 불편하다. 인근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등 형제 국가에서의 진입에도 엄격한 여권 검사 등 국경 통과 절차를 밟아야 한다.
화폐 공식 화폐는 ‘유로화’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해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언어문제 몬테네그로어와 라틴 문자,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관광지 대부분은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없다.
먹거리 도시 안쪽이나 바닷가 쪽에 레스토랑, 바, 카페가 있다.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바닷가 근처라서 해산물이 많다. 또 몬테네그로산 프로슈토 햄도 유명하다.
숙박정보 카지노가 있는 호텔 외에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꽤 있다. 카지노 호텔은 30만원선이고 게스트하우스나 아파트는 5~6만원선에 이용 가능하다. 저렴한 호스텔은 없다.
날씨정보와 옷차림 몬테네그로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이 길다. 9월은 물론 10월 낮에도 바닷가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습기가 없고 건조해서 여행하기 좋으나 낮에는 햇살이 따갑다. 10월의 평균온도는 20도 정도이니 가을 옷을 준비하면 된다. 겨울에는 9도 정도로 온도가 급강하한다.
치안정보 몬테네그로는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대부분 안전한 편이나 관광지에서는 바가지 상술을 겪을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란다.
페트로바츠 관광 사이트 www.petrovac.org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한국인들은 매스컴 등의 영향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을 선호하지만 바로 인접해 있는 몬테네그로의 풍경은 크로아티아 버금간다. 크로아티아 여행과 함께 몬테네그로 여행 계획도 세워보자. 그리고 페트로바츠에만 머물지 말고 시간 배정을 잘해서 몬테네그로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해보자. 크로아티아부터 시작해 아드리아 해안선을 따라 울치니(Ulcinj)를 벗어나 알바니아, 그리스까지 여행을 한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렌트(www.montenegro-car-rent.com)를 하거나 유람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트레비네는 조용한 강변 마을이다. 레오타르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트레비슈니차 강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소도시. 오스만 시대의 아치형 다리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마을을 잇는다. 고요한 소읍은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든다. 강물 속으로 마을 풍치가 풍덩 빠져 반영되어 흔들거리면 긴 여행자의 묵은 시름이 사르르 치유된다.
모스타르에서 트레비네까지 첩첩산중 길고 긴 여행
한여름, 크로아티아는 지긋지긋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로 도망쳤고 이내 트레비네(Trebinje)로 떠난다. 필자가 예약한 숙소는 개울 옆, 아름다운 전원 카페 분위기가 나는 그런 곳이다. 새로 신축한 듯 모텔은 깔끔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촉수 낮은 불빛의 어둠침침한 야외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숙소 사람들일까?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다. 맑은 개울물을 담아낸 작은 연못 속에는 송어가 살아 움직인다. 모텔 직원은 자기네 음식이 최고라고 했지만 모험은 하기 싫어 야채샐러드와 바다 생물인 오징어 요리를 시킨다. 샐러드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메인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질 좋은 지역 와인 한 잔을 더 시켜 홀짝홀짝 마실 즈음에야 요리가 상차림된다. 작은 삶은 오징어와 삶은 감자, 삶은 근대가 올려져 있다. ‘음식을 참 맛있게 하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준급이다. 어디를 가든 음식 잘하는 곳엔 손님이 많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다가 한 아주머니랑 스치듯 대화를 나눈다. 스위스에서 살다가 이제는 고향으로 내려왔단다. 그러면서 내일 올드타운을 가면 자기 남편이 안내해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낯선 누군가에게 여행 안내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처럼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녀는 가족이 있는 테이블로 날 끌어당긴다. 그녀가 이끈 테이블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무척 깐깐해 보이는 남편 말고도 여러 명이 함께 앉아 있다. 남편은 내일 집으로 찾아오라면서 아주 꼼꼼하게 이름, 주소, 전화번호, 약도를 그려준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이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진다.
트레비슈니차 강과 아르슬라나기치 다리의 조화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다음 날, 죽을 만큼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침 한 방울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아프고 온몸은 천근이다. 일단 메인 타운에 가서 약국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전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말도 해줘야 할 것 같다. 타운까지는 5km. 택시를 부르면 간단할 일을 또 걷고 있다. 땡볕이 강렬해 발걸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카메라를 꺼내든다. 나무가 거의 없어 흰 빛을 띠는 카르스트 지형의 레오타르 고산과 트레비슈니차 강이 휘도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트레비네의 대표 명소인 ‘아르슬라나기치’ 다리(길이 80m 높이 6m)는 무심한 시민들 때문에 위치를 놓치고 만다. 한참을 더 걸어서 메인 타운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야 먼발치의 다리를 보게 된다. 아치형의 다리와 트레비슈니차 강이 한데 어우러진 풍치가 멋지다. 트레비슈니차 강에 이 다리가 만들어진 것은 15세기(1574년) 오스만제국 시대다. 오스만제국 시절 트레비네는 두브로니크와 이스탄불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다리 이름은 당시 다리 통행료 징수권을 갖고 있었던 ‘아르슬란 아가(Arslan-aga)’라는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지도자인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pasa Sokolovic, 1506~1579) 명에 의해 유명한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1489~1588)이 건설을 맡았다. 그는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Visegrad)의 다리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말고도 대단한 작품이 아주 많은 건축가다. 원래는 훨씬 더 북쪽에 있었는데 트레비슈니차 강에 수력발전소가 생기면서 1972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 다리는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건축된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아주 잠깐은 아픔도 잊는다.
보스니아의 오래된 도시에서 만난 ‘드라간’ 부부
도심 구경 대신 전날 밤 식당에서 약속한 집을 찾아 나선다. 긴가민가하면서 한 집을 기웃거리다가 전날 만난 남편 드라간을 만난다.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 외에 아들도 있다. 키가 2m나 되는 아들은 화가란다. 그는 트레비네 근처의 작은 마을에 작업실이 있고 가을에는 스위스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말한다. 작품을 팔아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쓸 정도라면 나름 유명한 화가일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주인아주머니는 소시지와 동유럽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고급 산양 치즈까지 내어준다. 이 집에는 송로버섯을 찾는 강아지도 있다. 이내 부부와 함께 시내로 나섰고 ‘드라간’은 자신이 태어난 이 도시에 대해 많이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
트레비네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스릅스카(Srpska) 공화국에 속해 있다. ‘태양과 플라타너스 나무들의 도시’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355년까지 세르비아 왕국에 속해 있다가 이후 보스니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오스만제국의 지배(1463~1878)를 받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향권(1878~1918년) 아래로 들어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도시 방어를 위한 요새가 건축되고 광장, 공원, 학교, 공장 등이 들어서는 등 규모가 확대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던 1945~1990년에는 수력발전소와 댐, 인공호수, 터널 등이 건설되면서 급격히 발전했지만 보스니아 내전은 이 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트레비네 메인 타운에는 오래된 유적지가 없고 묘지만 많다.
드라간 부부와 함께 1908년에 설립된 세르비아 정교회를 찾는다.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보스니아이지만 그들은 그리스 정교회다. 트레비네는 10세기부터 가톨릭 교구가 생겼고 ‘가톨릭 10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도시다. 또 중심 광장인 ‘자유광장(Trg Slobode)’으로 가는 길목에도 19세기 말에 세워진 자그마한 성모 탄생 교회가 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자유공원 앞의 카페는 유명한 배우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라고 드라간은 말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공원 한쪽에 마련된 청과물 시장에서 복숭아를 사면서 요반 두치치(Jovan Ducic, 1871~1943) 동상을 발견한다. 요반 두치치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트레비네 도서관에는 두치치가 기증한 장서 수천 권이 전시되어 있다. 또 이 도시 언덕 위에는 2000년, 그를 기리기 위해 코소보의 그라차니차 수도원을 본떠 완공한 헤르체고바카 그라차니차 수도원이 있다. 드라간 부부와 함께 ‘체바피(Cevapi 혹은 체바치치(Cevapcici))’도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어릴 적 추억을 듣는다. 약 덕분에 목은 좀 나아졌고 여러 가지를 보여주려는 현지인에게 감동받아 한국식으로 몰래 밥값을 낸다. 그들은 한국식 ‘밥값 계산’에 감동했는지 기어코 차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까지 안내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고향 떠나 스위스에서 살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드라간. 그는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나이 든 그가 여행객과 대화를 할 정도의 영어구사를 하는 것도, 외국인을 안내해주겠다는 마인드도 스위스에서 얻은 지식일 것이다. 그는 내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그리고 트레비네에 오면 ‘내 집’에서 언제든 ‘공짜’로 묵으라는 말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집에 다시 가서 정담을 실컷 나누고 싶다.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하지만 가는 곳마다 스토리는 달라진다. 매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들. 묘한 인연의 발자취를 트레비네에 남겼다. 인터넷을 못해 지속적인 연락은 못하지만, 내 가슴속에 영원한 추억을 남긴 드라간. 동양인이 그곳으로 여행을 온다면, 나와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분명히 반길 것이다.
>>Travel Data
가는 방법 한국에서 직항은 없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있다.
현지 교통 사라예보를 기점으로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가 운행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택시밖에 없었다. 필자처럼 모스타르에서 접근하거나 몬테네그로의 포드고리차에서 이용하는 편이 낫다.
음식과 숙박 올드타운에 체바피를 잘하는 집이 있다. 또 모텔 스튜데낙(Motel Studenac)은 음식과 숙박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먹은 생선스프는 최고였다. 또 트레비네는 질 좋은 와인 산지다. 브라나츠 와인은 발칸의 희귀 품종으로 타닌과 산도가 높아 명성이 높다. 포드루미부코예 1982(Podrumi Vukoje 1982) 와이너리가 유명하다. 시내에서는 택시를 타야 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트레비네는 작은 도시다. 매일 산책하고 근교의 산을 다닌다 해도 한 달 머물기는 버거울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기점을 두고 크로아티아나 몬테네그로를 연결하면 된다. 렌터카를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김영희(金英姬) 前 대사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 세 개 있었다. 동네 한가운데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방앗간 집과 우리 집에 우물이 있었다. 1949년 한글날 태어난 나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집 우물에 던져져 죽을 뻔했다는 얘기는 알고 있다.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집에다 큰아들이 국군 장교로 참전 중이어서, 인민군이 우리 가족을 몰살하기 위해 우물의 깊이를 재고 전 가족 이름을 적어갔단다. 옆 동네에서는 이미 우물 속 가족 몰살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우리 식구 명단을 작성해간 이틀 후에 미군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단다.
훗날 내 어릴 적 얘기를 전해들은 미국인 내 남편은 한국전쟁에 자기 외삼촌 두 명이 참전했는데, 아마도 우리 동네를 탈환한 미군 중에 자기 삼촌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형제는 아들 여섯, 딸 셋 9남매다. 그중 나는 여덟 번째로 막내딸이다. 나보다 20세 많은 큰오빠는 6·25전쟁에서 생사를 넘으며 수많은 공훈을 세웠고 충무, 화랑 등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전쟁 막바지에 남한의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대한 대규모 중공군의 끈질긴 공격을 중대 병력으로 격퇴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지도를 바꾼 사나이’로 알려진 우리 오빠 김한준 대위가 2012년 사망했을 때,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육군장(陸軍葬)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장례식이 개최되었다.
세계지도를 보며 넓은 세상을 동경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선 책이 몹시 귀했다. 그러나 나는 오빠, 언니가 많은 덕택에 여러 가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책에는 모르는 세계, 모르는 나라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책은 세계지도였다.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보면서 넓은 세계에 대해 꿈꾸고 상상했다.
넓은 세계에 대한 나의 동경은 장래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으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외교관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외교관이 되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외교관은 해외에 나가 넓은 세상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는 것은 막연히 알았다.
내가 전주여고를 졸업할 즈음에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은 9남매 뒷바라지에 매우 헌신적이셨고, 그동안 오빠, 언니들의 중, 고, 대학 입학으로 논밭은 거의 다 팔려나갔다. 나는 대학 대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마음속에서도 포기한 건 아니었고, 일단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고 야간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68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5급을(현 9급) 국가공무원 시험과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1960년대의 실업률은 하늘을 찔러 매년 공무원 시험 응시율은 상상을 초월했고, 나아가 군대 가산점제도가 있어 여성의 공무원 시험 합격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다행히도 나는 두 곳 모두 합격했는데, 서울시 공무원을 택해 1969년 3월 서울시 중구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0년 국제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지만,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구청의 민원실에서 호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였다.
구청의 민원실에서는 일일이 호적을 보면서 손으로 주민등록 카드를 밤늦게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오후 6시에 시작되는 야간대학 수업에 맞춰 퇴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료들의 격려와 눈총 속에서 겨우 1학년은 마쳤으나, 출석 미달로 학점은 엉망이었다.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1970년 12월 어느 날, 명동의 백화점에 선물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친구는 독일에 가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을 했다. 내 귀와 눈이 번쩍 떴다. ‘해외개발공사’에서 간호보조원(지금은 간호조무사)을 양성하여 독일로 파견하는데, 자신도 그 파견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해외개발공사 간호보조원 양성소에서 차기 입학원서를 받고 있는 중이란 말을 듣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독일 행을 결심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내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다. 독일에 가서 병원근무 마치고 독일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말에 모두가 황당해 했다. 안정된 공무원 직장을 버리고 막연한 해외 파견 꿈을 꾸는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독일에 정말 갈 수 있을지, 또 내가 희망하는 대로 병원 근무 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겠다고 했다.
간호보조원 양성소 입학 자격은 ‘중학교 졸업 이상’이었으나, 들어온 여성들의 배경은 천차만별이었다.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공무원, 은행원, 대학생 등 해외로 나갈 길을 찾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유학생 외에 여성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양성소에서 9개월간 이론을 배우고 병원과 보건소에서 3개월의 실습을 거친 후 간호보조원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 독일로 파견되는 과정이었다.
1972년 8월 27일 초조하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는 독일에 도착했다. 새벽의 쾰른 공항은 안개가 자욱하고 추웠다. 공항에는 독일 전 지역의 병원에서 한국 간호요원들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 푯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 4명과 간호보조원 6명이 북독일의 작은 도시 웰첸 시립병원에 배치되었다. 내가 3년간 일해야 할 곳이었다.
나는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했는데, 대부분 교통사고를 당하고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구의 환자들로 병원일은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야간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힘든 근무시간인 오전 근무를 자원했다. 외진 곳에 있는 병원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자전거를 사서 타는 법을 배우고 밤길을 다녔다. 병원에서 일하는 3년 동안 나는 야간학교에서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우며 대학입학 준비를 했다. 한국에도 라디오가 있느냐고 묻는 환자도 있었지만, 우리는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동양에서 온 ‘천사’였다.
30년 만에 이룬 외교관의 꿈
우여곡절 끝에, 1975년 9월 나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쾰른대학교의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드디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힘든 육체노동 없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쾰른대학교에서 예비과정을 거쳐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10년 동안 나는 죽을 각오로 정말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학 전공에, 부전공으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을 공부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1986년 초 나는 박사 학위를 들고 가슴에 큰 희망을 품은 채 한국에 왔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최루탄 가스에 찌들어 있는 여러 대학을 찾아갔지만, 학연 지연이 없는 내게 한국사회는 냉정했다. 그러나 절망은 없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다. 한국에서 실망하고 다시 독일로 간 내게 쾰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겼다. 보수적인 쾰른대학교에서 외국인이 전공과목을 강의한 첫 사례가 되며, 1990년 7월까지 나는 4년 동안 독일 학생들에게 교육철학을 강의했다.
그사이 유럽에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5월 한국 외교부는 독일전문가 특별채용 공고를 냈다. 그 공고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내 어릴 적 ‘외교관 꿈’이 떠올랐다. 특별채용시험 면접 때 “한국은 나를 낳아 키워주었고, 독일은 내 정신을 살찌게 해준 나라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먼 길을 돌아 30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1991년 2월 말 폰 바이체커(R. von Weizsacker) 독일 대통령 국빈 방한 시 통역으로 나는 외교관 업무를 시작했다. 독일 담당관으로 본부와 독일을 오가며 통역한 정상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독일의 라우(J. Rau), 헤어촉(R. Herzog) 대통령이다. 독일 통일 직후 우리나라의 통일 열기는 대단하여 매년 수많은 고위인사들의 독일 방문이 있었고, 자료 작성과 브리핑, 통역은 정무담당인 내 업무였다. 나는 주 독일 대사관에서 1등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후, 2005년 9월 주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대사가 되었다.
선진국과 분단 극복의 꿈
현재 내 책상 위엔 커다란 세계지도 책이 놓여 있다. 뉴스에 주요 해외사건이 보도되면 지도를 펴 보고 그 주변 국가들을 살펴보며 머릿속에선 습관처럼 보고서를 쓰고 있다. 매년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해외를 방문할 때는 항상 그 나라의 지도가 내 가방 속에 들어 있다. 화성에 착륙한 인간의 모습과 지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3개월은 남편과 함께 베를린에 체류하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철학, 인문학 학회에 참석한다. 겨울 3개월은 보스턴에서 지낸다. 쾰른대학 학생 때 만난 남편은 현재 보스턴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변화된 한국의 위상을 실감하지만, 삶의 여유가 있는 사회가 부럽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우리 세대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산업화, 민주화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국내적인 시각에 머문 편협한 사회현상은 안타깝다. 세상은 넓고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냉혹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분단을 극복하는 꿈을 꾼다. 평생 분단과 함께 살아온 우리 세대와는 달리 다음 세대는 진정한 선진국의 시민이 되어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 파리, 런던까지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김영희(金英姬) 외교관
퇴임 후 세계무대에서 얻은 경험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고자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2010.3.)를 펴냈다. 우석대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특강했다. 언론의 독일통일전문가 토론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현재 '여성평화외교포럼'(사)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