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hibition
◇ANDY WARHOL : BEGINNING SEOUL
일정 6월 27일까지 장소 더현대서울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의 회고전이 이탈리아 주요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한국에 도착했다. 여의도 더현대서울의 개관을 기념하며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국내에서 진행된 앤디 워홀 전시 중 최대 규모다. 앤디 워홀은 미국의 대표적인 상업미술가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 작품을 찍어내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택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표현하며, 양극단에 있던 상업주의와 순수미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매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유명 스타들의 얼굴이 담긴 셀레브러티 시리즈와 캠벨 수프 등 소비 상품을 소재로 한 판화가 대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앤디 워홀의 대표작을 비롯해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드로잉 작품까지 총 153점을 공개한다. 앤디 워홀의 삶을 키워드로 돌아보는 인트로를 시작으로 총 6개 섹션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며, 마지막 섹션에서는 화려한 작품 뒤에 감춰진 내성적이고 겁 많던 앤디 워홀의 또 다른 모습까지 살펴본다. 그만의 예술적 감수성이 담긴 개인 소장품도 함께 엿볼 수 있다.
◇필립 콜버트 : 넥스트 아트 팝 아트와 미디어 아트로의 예술여행
일정 5월 2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세기에 앤디 워홀이 팝아트의 신대륙을 개척했다면, 21세기에는 필립 콜버트가 있다.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차세대 앤디 워홀’이라 평가받는 영국의 팝아트 작가 필립 콜버트의 전시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기존 팝아트에서 한층 진화한 장르를 선보이고 있는 필립 콜버트는 오늘날 미술 시장이 주목하는 팝아트의 비전이다. 짧은 이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런던의 유명 화랑인 사치 갤러리 소속 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몽블랑, 벤틀리, 삼성KX 등 글로벌 대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대중미술을 구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조형 작품과 미디어아트 등 60여 작품을 선보이며,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을 향한 필립 콜버트의 헌정작이 세계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다. 또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과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인근에 설치된 3m 높이의 대형 조형작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독특한 회화 스타일로 현대인의 소비문화를 지적하고, 예술적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영감이 필요한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 Book
◇은퇴의 맛 (한혜경 저·싱긋)
“다 내려놓으면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삶의 의미와 재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교수로 재직 중 수많은 퇴직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들의 삶을 연구한 은퇴 전문가 한혜경이 교단을 떠나고 직접 마주한 달콤씁쓸한 은퇴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맞이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은퇴 전문가로서 은퇴 후의 삶을 나름대로 잘 극복해나가리라 자부했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고 말한다. 은퇴는 생각보다 더 씁쓸했으며,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듯한 기분에 온갖 상념과 불안,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고. 은퇴와 관련한 책을 두 권이나 펴내며 간접 경험을 한 만큼 무언가 다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고 저자는 반추한다.
그렇게 1년 정도 지지고 볶으며 시행착오를 거치던 어느 날, 저자는 문득 행복을 깨닫는다. 재직 중에는 몰랐던, 온전히 내 시간의 주인으로 살며 느끼는 행복이다. 저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삶의 재미를 찾는다면 은퇴 생활의 불안감도 서서히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이틀 사이에 끝날 놀이가 아닌, 여생을 바칠 수 있을 만한 가슴 뛰는 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일생의 중요한 기로 앞에서 멘토를 찾는다. 초행길을 떠나기 전 자신보다 먼저 첫발을 뗀 이들의 이야기를 지도 삼아 펼쳐보는 것이다. 은퇴 또한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이 무용해질 만큼 낯설고 두려운 여정이다. 하지만 앞서간 이들의 진심 어린 격려와 조언이 있다면, 조금 더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이 그 길라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한국인의 종합병원 (신재규 저·생각의힘)
췌장암 4기를 진단받은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한 저자가 직접 겪은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현안을 분석하고, 개선점을 제안한다.
◇걷는 생각들 (오원 저·생각정거장)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산책하며 발견한 삶의 의미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나이 듦, 인연에 대한 성찰 등 중년 여성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를 위한 노래 (메리 올리버 저·미디어창비)
미국이 사랑하는 베스트셀러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집으로, 인간과 개의 특별한 유대를 서른다섯 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에 담았다. 저자가 평생을 함께한 반려견의 그림도 함께 수록했다.
● Stage
◇시카고
일정 4월 2일~7월 18일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김태훈
출연 최정원, 아이비, 박건형, 김영주, 차정현 등
매혹적인 하모니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 브로드웨이 대표 뮤지컬 ‘시카고’가 돌아온다. ‘시카고’는 문화적 황금기인 동시에 도덕적으로는 쇠퇴기였던 1920년대, 미국 쿡카운티 교도소 여죄수들의 유혹과 욕망, 복수를 다룬다. 미모의 죄수 ‘록시 하트’가 정부를 살해한 죄로 수감돼 시카고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고, 전직 배우 ‘벨마 켈리’의 자리를 위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가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된 아이러니한 상황을 화려한 춤과 관능적인 재즈로 발칙하게 풍자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국내 초연부터 함께한 ‘시카고’의 살아 있는 역사 최정원과 200:1의 경쟁률을 뚫고 새롭게 선발된 걸그룹 소녀시대 티파니 영 등 클래식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캐스트로 전에 없는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 ‘올 댓 재즈’(All That Jazz) 등 유명 넘버를 15인조 빅밴드의 풍성한 라이브 선율로 감상할 수 있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일정 6월 6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1관 연출 오세혁
출연 도창선, 조풍래, 김재범, 김지온, 최석진 등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뮤지컬화한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과 의심을 그린다. 친부 살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약 2000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서사를 밀도 있게 집약해 고전 속에 담긴 위대한 철학을 무대 위로 고스란히 옮겼다.
◇데스트랩
일정 6월 6일까지 장소 플러스씨어터 연출 황희원
출연 고영빈, 송유택, 이지현, 이현진, 선한국 등
한때 잘나갔던 극작가 ‘시드니 브륄’이 우연히 자신의 학생이 쓴 희곡 ‘데스트랩’을 발견하고, 이를 탐내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1978년 미국 극작가 아이라 레빈이 집필한 이 작품은 초연 당시 토니어워즈에 노미네이트될 만큼 짜임새 있는 줄거리를 자랑한다. ‘데스트랩’을 차지하기 위한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심리전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1945년 4월 1일 아이젠하워는 1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미국 위스콘신 주에 있는 파커 사로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케네스 파커. 회사 사장이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랬습니다. 만년필 선물은 잘 받았고, 유럽에서의 궁극적인 적대 행위의 종식(독일의 항복)에 공식적인 서명이 있다면 나는 그 만년필을 사용하겠다는 것. 이 두 사람은 1937년부터 친분이 있었습니다.
약 한 달 뒤 이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5월 7일 프랑스 상파냐 지방 랭스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관실에서 독일의 무조건 항복 조인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인식에서 미국, 소련, 프랑스, 독일 4개국 대표가 서명을 했고, 여러 기록에 의하면 이때 사용된 만년필은 세 자루였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서명한 사람은 4명인데 만년필은 세 자루.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 한 사람이 실수로 만년필을 가져오지 않은 것일까요. 관련 필름을 찾아봤습니다. 독일 대표는 탁자 중앙에 놓인 만년필을 잡아 다른 종이에 써본 후 서명을 합니다. 펜 끝이 살짝 보이고 클립은 화살클립입니다.
미국과 프랑스 대표 역시 같은 모양의 만년필을 잡았습니다. 소련 대표만 다른 만년필입니다. 화살클립에 펜촉이 살짝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미국 파커 사의 파커51입니다. 서명식이 끝나고 아이젠하워는 파커51 두 자루로 V자를 만들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필름에서 본 것을 종합하면, 추측이지만 실상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조인식 전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각국 대표에게 만년필을 준비하지 말라는 연락을 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이 연락대로 했지만 소련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소한 에피소드가 앞으로 있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예언처럼 예고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 달 6월 5일 독일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분할 점령되는, 나중에 동서(東西)로 45년간 분단되는 베를린조약 문서에 아이젠하워는 파커51로 서명합니다. 참고로 5월 7일 항복 조인식에서는 아이젠하워가 파커51만 제공하고 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파커51은 항복과 분단까지 이래저래 독일에 아픔을 준 만년필입니다.
파커51 어떻게 생겼을까요?
파커51은 공식적으로 1941년에 처음 출시되었고 197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펜촉의 대부분은 손잡이 속에 들어가 있고 펜 끝만 살짝 나와 있어 뚜껑을 열어놓아도 잘 마르지 않았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만년필의 최대 장점은 매우 튼튼하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생산된 1940년대 것들 중에는 아직 현역(現役)으로 있는 것이 많고 1948년 이후의 것들은 고장 난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아이젠하워가 좋아했던 것은 물론 올해 94세인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아직까지 파커51을 사용하는데 자주색 몸체에 금색 뚜껑의 모델을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밖에 트루먼 대통령, 니미츠, 마크 클라크 장군이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만년필일까요? 이삼십 년 전이라면 몰라도 현재 1위는 정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몽블랑 사의 마이스터스튁 149입니다. 몽블랑 149는 1952년에 출시되었으니 파커51보다는 열한 살 적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어 현존 최장수 모델이면서 만년필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만년필입니다. 펜촉을 보면 파커51처럼 감싸져 있지 않고 시원하게 오픈되어 있습니다. 이런 펜촉을 오픈 펜촉이라고도 하는데 몽블랑 149는 오픈 펜촉의 대표, 파커51은 감싸진 펜촉의 대표입니다. 앞에서 정반대라고 말씀드린 것이 이제는 이해되시죠.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149가 51에게서 1위를 빼앗기도 했지만 1990년 독일의 통일 서명에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파커51이 독일을 나누었다면 독일의 몽블랑 149는 독일을 다시 이어준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만년필에는 만년필입니다.
2010년 전후를 즈음해 나는 알프스로 발길을 돌렸다. 히말라야 지역을 지겨울 정도로 쏘다닌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본의 아닌 ‘가난의 전시’가 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은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덕분에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싸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트레커에게는 반가운 일일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른으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나 자신이 마치 ‘가난의 갤러리를 배회하며 우쭐대는 부르주아 관람객’처럼 느껴지는 게 싫었다. 알피니즘의 역사를 봐도 히말라야보다는 알프스가 우선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프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히말라야에 그토록 집중한 것은, 박정희 시대가 낳은 ‘성과 우선주의’의 우스꽝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높은 곳에 먼저 오르는 놈이 장땡’이었던 시절의 유물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박물관의 먼지 쌓인 진열대에서도 치워진 지 오래다. 등반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트레킹이라는 개념이 시작되고 크게 발전한 지역 역시 알프스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알프스는 제쳐놓고 히말라야만 고집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프스 트레킹에 대한 오해들
알프스 트레킹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그중 첫 번째가 “히말라야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알프스 트레킹을 할 경우 대개 산장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산장의 편의시설(샤워실, 화장실, 침대, 식당 등)은 매우 만족스럽다. 최소한 서울의 3성 내지
4성급 호텔 수준이다. 3성급 이상의 호텔에 머물면 당일 저녁식사와 다음 날 아침식사를 제공받는데 비용이 10만 원 수준이다. 과연 비싼 가격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1박에 3000원도 안 되는 히말라야의 로지에 비하면 비싸다. 하지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다르지 않은가.
알프스 트레킹의 매력 중 하나는 음식과 와인이다. 산장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서울의 웬만한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 레스토랑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근사한 와인을 제값 주고 마실 수 있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알프스 주변 국가는 이른바 ‘서양의 선진국’들이다. 선진국에서의 트레킹 비용을 최빈국과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두 번째 오해는 “알프스에 가면 자기 짐을 모두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랬다. 인건비가 비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프스에는 차량과 케이블카 등을 이용한 딜리버리 시스템이 정착한 지 오래다. 즉 커다란 카고백에 짐을 잔뜩 넣어 가도, 당일 필요한 짐만 배낭에 챙겨 길을 떠나면, 딜리버리 서비스맨들이 그날의 종착지인 산장에 나머지 짐을 옮겨준다. 비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이제 짐이 무거워 알프스에는 못 가겠다는 말은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그림엽서 속 풍경 같은 ‘투르 뒤 몽블랑’
알프스 트레킹의 시그니처 코스는 당연히 투르 뒤 몽블랑(Tour du Mont Blanc, TMB)이다.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걸어서 넘는 아름다운 길이다. 당신이 알프스로 진출한다면 제일 먼저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곳곳에 깔끔한 편의시설이 넘쳐나는, 그림엽서 속 풍경 같은 길이다. 그래서 일단 알프스 트레커들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면, 이제 눈을 돌려 알프스 곳곳에 숨겨진 트레킹 코스들을 들여다보라. 당신은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 매혹적인 코스들을 다 둘러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나는 2010년 이후 거의 매년 여름을 알프스에서 보냈다. 알프스 자락의 3대 산악도시로 흔히들 프랑스의 샤모니, 스위스의 체르마트, 이탈리아의 쿠르마유르를 꼽는다. 대부분의 트레킹 코스는 이 도시들 중 한 곳 이상을 통과한다. 내가 가본 아름다운 코스들 중 한 곳은 투르 몬테로사(Tour de Monte Rosa, TMR)다. 체르마트를 끼고 돌며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을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알프스 전역은 스키장용 케이블카 노선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체력이 부치는 사람은 차량과 케이블카를 이용해 다음 목적지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심산(沈山)
작가, 심산스쿨 대표, 코오롱등산학교·한국등산학교 강사. 산악 관련 저서로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알피니스트 열전’,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산악문학 탐사기’,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 등이 있다. 대한산악연맹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을 수상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 때문에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사람, 그것을 무시하거나 수용하고 체념하는 사람, 그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 세 부류가 있다. ‘마녀체력’이라는 책을 쓴 이영미 작가(53세)는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운동을 통해 허약체질을 건강 체질로 바꾼 것이다.
이 작가는 2018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콘셉트로 이 책을 썼다. 지난 4일 일산의 한양문고에서 독자들과 만난 그는 “153cm의 작은 키에 게으름뱅이 저질 체력의 소유자가 어떻게 아침형 근육 노동자로 변신했는가”를 들려줬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3년 동안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건강 때문에 총체적인 난국에 부딪히게 됐어요. 늘 피곤함에 절어 살다가 고도고혈압 진단을 받았죠”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후 난생처음 수영장에 등록해 6개월 동안 운동을 하면서 세 가지를 깨달았다. ‘그동안 건강을 돌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몸이 머리보다 기억을 잘한다, 체력은 좋아질 수 있다’라는 것이다. 수영을 꾸준히 한 결과, 지금은 2킬로미터를 한 번에 종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다음으로는 달리기에 도전했다. 집 앞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매일 돌면서 운동량을 하루 한 바퀴씩 늘려나갔다. 이제는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할 정도가 됐다. 못 타던 자전거도 배웠다.
동아마라톤대회를 시작으로 철인 3종 대회에 참가했다. 첫 대회에서 수영하면서 공포감에 경기를 포기할 뻔했다. 그 일을 계기로 “두려움이 발목을 잡을 때는 더 중요한 걸 생각하면 그것을 누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운동에서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한 연습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 그는 나이가 많다고, 체력이 약하다고 운동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시작부터 하세요. 그리고 연습하세요. 마치 ‘1만 시간의 법칙’처럼 점점 나아질 거예요. 인생의 지혜는 건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올 수도 있어요.”
그가 자전거로 미시령을 넘을 때의 일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한 굽이씩 가다 보니 어느새 고개를 다 너머 있었다. 이것은 “작은 목표들이 쌓여서 크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며 “운동하다 보면 누구나 실패의 경험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의 맷집은 강해지고, 실패를 통해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배운다”라면서 운동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수영, 자전거, 배드민턴 등 모든 운동은 유니폼을 입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또 다른 모습의 나로 변신하게 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다. 운동 덕분에 결혼 22년 차의 부부 싸움 양상도 달라졌다고 한다. 싸우고 나면 1주일씩 대화를 하지 않던 부부가 지금은 각자 2시간씩 운동을 하고 나서 다시 만나니 긍정의 에너지가 생겨 싸움이 금방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혹시 평생 이루고 싶은 것이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동을 하세요. 운동을 하면 노인도 청춘이 되고, 운동하지 않으면 청춘도 노인이 될 수 있어요.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규칙적으로 꾸준히만 하면 돼요.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돈과 시간이 많아도 갈 수 없는 곳들이 많아요.”
이 작가는 운동 덕분에 50살이 넘어서 눈 덮인 몽블랑과 세계 3대 트레킹 코스 중 한 곳인 노르웨이도 다녀왔다. 혼자였다면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친구들과 함께해서 가능했다고 한다. 마치 작은 거인처럼 자신감 있게 전하는 그의 강연은 “지금 운동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운동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뭐부터 시작하지?”라며 고민하는 사람, 의지도 부족한 사람에게 강력한 운동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VVIP에게만 허용된 초호화 공간부터 소박한 맛집까지, 전 세계 슈퍼리치들이 사랑하는 핫플레이스를 소개한다.
글 브라보 마이 라이프 편집국 bravo@etoday.co.kr
◇ 쿠알라룸푸르 ‘마인즈 리조트&골프 클럽’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는 명문 골프장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마인즈 리조트&골프 클럽’은 상위 1% 슈퍼리치를 위한 멤버십 운영으로 주목받고 있다. 엄격한 선별 과정을 통해 500명 미만의 소수정예 회원만을 수용한단다. 덕분에 방문객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황제라운딩을 즐길 수 있다. 타이거 우즈의 우승 코스로도 유명한 이곳의 63개 홀 중 18개 홀은 한국 골프 여왕 박세리가 직접 설계에 참여했다. 코스 중심에는 60만 ㎡가 넘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데, 마인즈 리조트 쇼핑몰과 연결돼 유람선으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마치 바다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코스의 그린피(green fee)는 40만 원 선으로 알려졌다.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더 클럽’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에는 회원은 물론 자식과 손주 세대도 이용할 수 있는 멤버십 ‘더 클럽’이 있다. 6만9000㎡의 너른 부지에 들어서 있는 호텔과 레스토랑, 최고급 레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한마디로 상류사회를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피트니스, 사우나, 골프 연습장, 풋살, 테니스, 농구 코트 등 다양한 운동시설은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클럽을 구현하고 있다. 회원 전용 시설은 어린 자녀를 둔 가족을 배려한 노력이 엿보인다. 오아시스 야외 수영장에는 어린이를 위한 모래사장과 키즈풀이 있고, 사우나에서는 가족이 함께 즐기는 ‘패밀리 데이’를 진행한다. 키즈 클럽은 다양한 예체능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으며, 피트니스의 종목별 주니어 레슨은 시즌에 따라 새로운 주제로 운영된다.
◇ 빌리어네어숍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1300억 원짜리 요트를 살 수 있을까? 슈퍼리치를 위한 온라인 쇼핑몰 사이트 ‘빌리어네어숍’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이 사이트 카테고리는 요트를 비롯해 전용기, 헬리콥터, 자동차, 모터사이클, 시계, 레지던스 등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어마어마한 상품(?)들을 판매한다. 3억1950만 유로(약 4161억 원)에 달하는 모나코 몬테카를로의 투어 오데온 스카이 펜트하우스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가 하면 2억6079만3700유로(약 3356억 원)짜리 보잉 B787-8 항공기도 구매할 수 있다. 사이트 내에서 가장 가격이 싼 상품은 명품 모터사이클 브랜드 두카티의 디아벨크로모. 하지만 이조차도 1만6500유로(약 2124만 원)로 만만찮은 가격이다.
◇ 네커 아일랜드
카리브해의 이국적 풍경을 품은 지상낙원. 하지만 1인당 하루 숙박료가 1000만 원에 육박하고 기본 3박 이상부터 이용할 수 있으니 일반인들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곳. 영국 기업 버진그룹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 소유한 ‘네커 아일랜드’는 타인의 시선과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럭셔리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초호화 섬 리조트다. 또한 전 세계 부호들의 단골 휴양지로도 유명한데,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를 비롯해 팝 디바 머라이어 캐리, 자넷 잭슨 등이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문객들은 산호초와 터키색의 맑은 바다로 둘러싸인 네커 아일랜드에서 고급스러운 숙박, 워터 스포츠, 최고 수준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이용요금은 인원수에 따라 달라진다.
◇ 프레지던트 윌슨 ‘로열 펜트하우스 스위트’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프레지던트 윌슨 호텔의 ‘로열 펜트하우스 스위트’는 하루 숙박비만 약 9000만 원에 달한다. 빌 클린턴, 빌 게이츠, 마이클 잭슨 등 국빈급 명사와 셀럽이라야 예약 가능하다고. 국가 원수나 슈퍼리치가 주 고객인 만큼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위한 서비스가 눈에 띈다. 전용 엘리베이터와 비상구, 금고는 물론 객실 창을 모두 방탄유리로 설치했고, 보안팀이 항시 대기한다. 초호화 객실에서 희귀 고서와 예술품을 비롯해, 큰 창으로 몽블랑 호수와 알프스 산맥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개인 요리사와 집사 등이 특별 서비스도 제공한다.
◇ 거슨 클리닉
1920년대 미국의 맥스 거슨 박사가 창안한 거슨 요법을 중심으로 심신 안정과 건강 개선에 필요한 식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거슨의 웹사이트(gerson.org)에서는 멕시코 티후아나(Health Institute de Tijuana)와 헝가리 부다페스트(Gerson Health Center)의 시설을 소개하고 있다. 항암을 비롯해 각종 질환 개선을 위해 설립됐으며 유기농 식단을 기반으로 생식 주스, 자연 보조제, 커피 관장 등을 통해 몸의 기능을 돕는 곳이다. 거슨 요법을 선호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티브 잡스가 있다. 두 곳 모두 입소하면 최소 2주 동안 머무르면서 거슨 요법에 기반을 둔 힐링 프로그램을 따라야 한다. 멕시코 시설 이용비는 2주에 1만2000달러(약 1390만 원), 헝가리는 8100유로(약 1043만 원) 선이다.
슈퍼리치가 찾는 맛집은?
55도 와인앤다인 와인의 풍미와 어울리는 요리를 제공하는 ‘55도 와인앤다인’은 주식부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을 비롯해 젊은 최고경영자(CEO)들의 단골집이다. 이곳 메뉴인 디너 코스 어드밴티지의 가격은 7만5000원으로 샐러드, 수프, 게살크림파스타, 푸아그라파테, 생선요리, 한우등심스테이크, 커피가 나온다.
시로’s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는 미국 시애틀의 초밥집 ‘시로’s’를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의 코스 메뉴인 시로’s 테이스팅 디너 가격은 65달러(약 7만6000원)로 수프, 애피타이저, 회, 초밥 등이 제공된다. 1130억 달러를 보유한 자산가의 식사 치곤 소박해 보인다.
루스티코 미국 전 뉴욕 시장이자,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마이클 블룸버그의 단골 식당으로 버뮤다에 있다. 이탈리아식 파스타와 피자가 유명하며, 샌드위치와 샐러드 햄버거 등은 점심시간 한정 메뉴로 판매한다. 지역 해산물로 만든 요리 또한 유명하다. 식사는 전화 예약으로만 가능하다.
레스토랑 오늘 ‘레스토랑 오늘’은 한식을 주제로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이다. SK그룹이 설립한 식문화 전문 사회공헌재단인 행복에프앤씨재단이 운영한다. SK그룹 총수는 물론 임원진, 인기 연예인 방문이 잦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임 콘셉트에 맞춘 메뉴로 연회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메뉴는 계절마다 바뀌는 코스 요리다.
스미스&월렌스키 20년 넘게 열리고 있는 ‘워런 버핏과의 점심 경매’, 지난해는 약 54억7000만 원으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 귀한 식사 자리는 워런 버핏의 단골 식당으로도 알려진 뉴욕의 스테이크 맛집 ‘스미스&월렌스키’에서 주로 이뤄진다고 한다.
잡어와 묵은지 서울 서초구 소재의 이곳은 만화 ‘식객’ 광어 편에 등장한 맛집이다. 단연 허영만 화백을 비롯해 LG, GS 계열 기업 총수들이 찾는 식당으로도 유명하다. 태안 신진도에서 매일 공수한 생선으로 뜬 회를 2년 숙성한 묵은지에 싸먹는데 그게 아주 별미란다.
넘어져 부서져도 눈 덮인 산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가며 설상 경사로를 질주했다. 수줍은 미소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간이 갈수록 반전에 반전을 더했다.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겨울 놀이에 인생을 던진 두 남자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도봉산에 있는 한국등산학교에서. 전영래(55)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세훈(51세) 씨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자주 보면서 살게 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하고 뭔가 풍기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한국등산학교 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정작 본업은 따로 있다. 임세훈 씨는 음향 엔지니어, 전영래 씨는 건설업자다. 겨울 놀이에 빠져 산다는 이 두 남자의 시작은 모두 산(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한 임세훈 씨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장교 부인들과 어울리셨는데 절에 자주 갔습니다. 저도 따라다녔어요. 대부분 절은 산에 있잖아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습니다. 기웃거리면서 ‘저게 뭐하는 것이냐’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알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선배들이 산에 간다면서 스키를 메고 가더라고요. 겨울 산행을 하려면 스키를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프스스키장에 가서 처음으로 스키를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적설량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중학교 때만 해도 산에 가면 보통 허리까지 눈이 왔어요. 눈을 그냥 등산화로 헤치고 밟아가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그걸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뭔가 편안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러셀로 오르면 4~6시간 걸려 올라가는 산을 스키로는 2시간이나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시간도 단축되고 체력 소모도 없어요. 그때부터 산악스키에 빠져든 거죠.”
스키를 계속 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있었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에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 경치를 보고 싶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등산과 스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유럽 스키의 벽을 깨고 겨울을 찾아다니다
임세훈 씨는 스키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빙벽에도 오른다.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특전사로 차출됐다. 군에서 패러글라이딩 팀에 있었고 스키도 좀 타봤다. 7년 넘게 부사관으로 있다가 1991년 3월에 전역했다.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나 스키장이었다. 스키장 패트롤(안전요원)로 들어가 일도 하고 원 없이 스키 슬로프를 질주했다.
“스키 시즌이 끝날 무렵 스키 강사와 패트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어요. 지금도 종종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데 강사와 패트롤 중 누가 더 스키를 잘 타냐는 거였어요. 그때 마침 자리에 한국스키협회 이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너희 시합해봐.’”
매력적인 경품도 걸렸다. 10명에게 스위스 스키장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스키장이 폐장할 때쯤 슬로프를 정리하고 스키대회처럼 기문을 설치하고 각각 10명씩 20명이 맞붙었다. 협회 이사장이 연수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10명에는 강사 4명과 패트롤 6명. 그중에는 임세훈 씨도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체르마트 스키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스키 좀 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연수 첫날 체르마트 스키장의 A급 패트롤과 최정상 슬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2급에서 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중 가장 늦게 내려온 사람과 20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저희 실력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슬로프 경사도가 낮아졌어요. 강사도 패트롤 A급에서 C급으로 내려갔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슬로프 근처에도 못 가고 평지에서 자세만 배웠습니다.”
8일간의 연수를 마친 뒤 임세훈 씨는 함께 갔던 협회 이사장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도 1000프랑(유로 가입 전 프랑스 화폐 단위)이 안 됐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방법도 알아냈다. 스위스 스키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요. 형편없더라고요. 제 실력이요. 한국스키협회 추천을 받아서 일단 스위스 국립스키학교에 등록했어요.”
입교 허락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영어도 안 되니 학교 측에서 걱정했다.
“한국어로 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사전을 스위스 현지에서 샀습니다. 스스로 교재를 번역해서라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어차피 내용의 80%는 전문용어이니까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강사들이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고 브랜드 협찬도 연결해주셨어요. 2년 공부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레벨3을 땄습니다. 개인 강습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학업을 마친 후 스키 전문 브랜드의 데몬스트레이터(최고 스키 지도자) 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키도 열심히 탔고, 동양인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월급 받으면서 세계의 유명 스키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겨울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스키도 타고 제가 하던 음향 일도 했습니다. 겨울만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스키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브랜드 홍보차 유럽의 한 스키장에서 모굴스키를 타다가 앞서 타던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고 피하려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존심 때문에 싫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스키와 등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재작년에는 남극에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 노는 날 탔죠.(웃음)”
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본토인 테라노바 만에 두 번째 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임세훈 씨는 이곳에서 연구하는 박사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으로 파견된 것. 크레바스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고 블리자드가 부는 극한 상황을 해결하는 등 더 원활하게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돌아왔다.
“사실상 백수입니다. 그래도 군에서 연금도 나오고요. 남극 안전요원으로 활동도 했고, 동호회 형식의 스키 교실, 등산학교 등에서 강연도 합니다. 봉사에 가깝지만 교통비 정도는 주십니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키와 등산은 생활이자 직업입니다.”
신장 투석하면서 해외로 스키 타러 다닌 전영래 씨
“매년 스키장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샀어요. 구입하고 나면 누구랑 갈까 생각해요.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요.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가야 하니까 함께 스키 탈 친구들 목록을 정리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키 시즌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악인이던 삼촌을 따라서 이 산 저 산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암벽등반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결국 교복을 입고 성인들 틈 사이에서 산행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산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성북동 살았는데 우이동에 선배가 하는 산장이 있었어요. 책가방 거기다 가져다 놓고 등반하고 자고 아침에 학교 가고 또 등반하고. 그러다 산악스키에 빠지게 됐어요. 형들이랑 있으면 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눈이 많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스키를 탄다고요. 그리고 스키를 타야 산을 오르내리는 게 쉽고 빠르다고 했어요. 1985년도에 스키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스키도 타야 했어요.”
지금처럼 스키장이 많을 때가 아니라 선배들이 차를 몰고 스키장에 갈 때 따라갔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선배들 밥 챙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그런데 정작 산악스키의 매력 포인트는 알고 있어도 산악스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라 정보도 풍부하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 외국에 나가서 배워오면 그게 정확한 정보라고 믿을 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 정도였다.
스키장 가려고 사표 낸 건설사 직원
“직장생활할 때는 퇴근과 동시에 스키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회사가 방배동 쪽이어서 용인 양지에 있는 스키장을 이용했죠.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4~5년 동안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쇼트트랙을 했어요. 이상화 선수를 배출한 은석초등학교의 빙상부원이었습니다. 성북동에서 목동, 방배동으로 출근했다가 양지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 피로를 느껴 사표 던지고 나왔습니다.(웃음)”
1997년 직장을 그만둔 그는 회사의 대표가 되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등반하고 스키장가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정말 원 없이 갔다. 4일, 5일 정도는 스키장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아침에 스케이트장, 저녁에 스키장. 몇 년 하다 보니까 슬로프를 타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산악스키처럼 좀 색다르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2003년에 강원도지사배 강원 산악스키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출전했습니다. 산악스키대회 장면을 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참가하려니 많이 떨렸습니다. 산악용 스키가 원래는 따로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엄홍길 선배에게 빌렸습니다. 스키장의 곤돌라가 돌기 전인 새벽 5시쯤에 대회를 시작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끝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더군요.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신나게 살던 전영래 씨의 인생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 고산에 다녀온 뒤로 신장이 망가졌다. 7년 동안을 자가 투석해야 했다. 성격상 집에서 쉴 수 없었던 전영래 씨는 투석에 필요한 장비와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착같이 스키를 탔다.
“제가 좀 외향적이에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몸이 안 좋아도 삿포로나 나가노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꽤 무거운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각자 짐에 나누어 넣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투석하고 열심히 스키 타고, 돌아와서 남들 한잔씩 할 때, 자기 전에도 투석하고 그랬어요.”
스키 타고 등반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신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럽의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2012년에 투석기를 꽂고 운전까지 해가면서 새벽에 스키장에 가고 있는데 일산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와 조직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있으니 수술받으려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후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는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더라고요. 바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갔죠. 투석할 때는 어디든 3시간 이내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니까 장시간 비행도 쉽지 않죠. 신장 이식하고 6개월 후에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몽블랑으로 날아갔습니다.”
매년 못 가면 한 번, 기본 두 번은 해외 스키장으로 나간다. 산 다니고 스키 타는 사람들의 건배사에 ‘백두산’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100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스키도 타고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겨울 스포츠 즐기는 Tip
1 시즌권은 8월부터 준비한다.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하기 싫으면 애플리케이션 알람 신청을 해놓으면 된다.
2 부상 없이 스키를 안전하게 오래 타고 싶으면 다운힐(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기술)은 최소한 정식 자격을 갖춘 곳에서 강습을 받아야 한다.
3 레벨에 맞는 강사에게 강습받기를 권한다.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지식을 가르치는 데몬스트레이터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들은 스키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키스쿨에서 최소한 3회 이상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4 시니어에게 산악스키를 권한다. 산릉선을 스키를 신고 돌면서 경치도 보고 운동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가, 스키로 내려오기 어려우면 짊어지고 내려와도 된다. 산악스키용 부츠는 등산화와 비슷해 신고 내려올 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임도 따라서 산행하듯이 스키를 신고 걸으면 된다. 크게 힘들지 않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블리자드 쌓인 눈이 강풍에 휘날려 일어나는 눈보라.
•러셀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길을 뚫는 방법.
손목 위의 작은 우주라 불리는 시계. 시계는 당신이 누구인가를 표현하는 징표일 수도 있고, 패션을 완성하는 마침표일 수도 있다.
시계란 참 묘한 물건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착용한 사람의 취향까지 읽을 수 있게 해준다. 한 번 구입하면 대를 물려 쓸 정도로 시계 안에서의 시간은 값지게 흐른다. 우리의 손목 위에서 수많은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시계. 그 안에도 트렌드가 존재한다.
또 다른 럭셔리 아이템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아우터는 고급 소재의 코트가 아니라 고가의 패딩이고, 가장 인기있는 차종은 고급 세단이 아니고 레인지로버와 같은 럭셔리 SUV다. 이런 현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사람들이 현명한 소비의 기준을 단순히 비싼 가격표에만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용성을 겸비한 고가의 제품을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럭셔리라는 단어 앞에 또 다른 형용사가 붙은 것을 좋아한다. 시계 시장도 다르지 않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오토매틱보다는 기계식 워치에 더 큰 의미를 두던 럭셔리 시계 브랜드들이 2015년 애플 워치 출시 이후 일대 변혁을 겪는다. 단단한 줄만 알았던 스마트 워치와 럭셔리 워치 사이의 벽은 애플 워치를 통해 조금씩 무너졌고, 럭셔리 시계 시장은 ‘디지털 럭셔리’라는 새로운 장르에 속속 도전장을 던졌다. 최근 2018년 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에서는 이런 트렌드를 반영한 수많은 스마트 워치들이 등장했다. 벤틀리보다 비싼 스마트 워치로 불리는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모듈러 45 풀 다이아몬드는 총 589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스마트 워치로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GPS 연결 기능은 물론이고 안드로이드 페이까지 가능하다. 루이비통 역시 구글과 협업한 커넥티드 워치 탕부르 호라이즌을 내놓으며 스마트 워치 시장에 뛰어들었다. 탕부르 호라이즌은 사용자 인근에 있는 여행 명소를 제안하는 지능형 위치 기반 서비스인 ‘니어 미(Near Me)’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젠 시계를 고르기에 앞서 우리가 가진 럭셔리 시계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바꿔야겠다. 수트 차림에만 차는 고급 시계가 아니라, 운동복 차림에도 찰 수 있는 시계. 이것이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또 다른 럭셔리의 기준이다.
다시 돌아온 얼굴
최근 시계 트렌드가 흥미로운 이유는 상반된 트렌드의 공존 때문이다. 시계 브랜드들은 한쪽으로는 맹렬히 미래를 좇고 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과거의 것을 복각하고 있다. 지난해 블랑팡은 1957년 선보였던 ‘피프티패덤즈 MIL-SPEC 1’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버전을 다시 내놓았다. 태그호이어 역시 1966년에 출시됐던 오타비아 린트 모델을 복각해서 출시했으며 예거 르쿨트르, 제니스, 파네라이, IWC 등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파네라이는 자신들의 첫 시계인 라디오미르 3데이즈 아치아이오를 80여 년 만에 새롭게 복각하며 시계 안에서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빈티지한 디자인의 복각 시계들은 요즘 복고 패션 트렌드와 맞물려 매력을 더하고 있다.
컬러를 입은 시계
시계 하면 으레 떠오르는 컬러들이 있다. 골드, 실버, 블랙, 브라운 등. 마치 우리나라 도로 위의 풍경처럼 시계는 질리지 않아야 된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컬러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 다양한 컬러의 스트랩과 다이얼로 무장한 시계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지난해 팬톤 컬러로 선정된 그린 컬러 트렌드는 시계 시장에도 예외가 없었다. 몽블랑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100,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오프쇼어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등 깊이 있는 그린 컬러로 무장한 시계들은 남자들의 손을 컬러 네일 못지않게 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프랑스 남동부, 론 강과 알프스가 합쳐진 지역을 ‘론 알프스(Rhone-Alpes)’라고 한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이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지대다. 스위스 제네바와 이탈리아 토리노, 밀라노와 가깝다. 이 일원을 사부아(Savoie)라 일컫는데 안시(Annecy)는 오트 사부아(Haute-Savoie) 주의 중심 도시다. ‘안시’는 동화 속에서 꿈을 꾸는 듯한 마을이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첫 방랑길에 오른 16세의 루소와 바랑부인이 만난 골목 프랑스 리옹에서 출발한 열차(ter)가 안시에 다다를 즈음, 종일 내리던 가을비는 서서히 멈추고 알프스 산맥에 걸친 구름은 빠르게 하늘로 퍼지고 있다. 안시 역에서 멈춘 기차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론 알프스를 기대고 사는 안시는 1860년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좁아진 티우(Thiou) 운하 사잇길에서 장 자크 루소 골목으로 접어든다. 생 피에르 성당(Cathe´drale Saint-Pierre) 옆 작은 마당에는 루소의 흉상이 놓여 있고 이런 문구가 있다. “Jean-Jacques Rousseau rencontrait Ici Madame de Warens(장 자크 루소가 여기에서 바랑 부인을 만났다).”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루소(1712~1778)는 무작정 16세에 고향 스위스 제네바를 떠나 방랑길에 나선다. 그가 처음 도착한 도시가 안시였다. 그날 성당에서 하룻밤을 보낸 루소는 다음 날 운명의 여인 바랑 부인을 만난다. 그가 ‘엄마’라고 부르던 이 부인은 29세로 루소와는 13년 차이가 났다. 루소는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바랑 부인을 찾아오던 그 관계는 13년간 이어진다. 바랑 부인은 루소의 후견인이자 연인, 스승이었다. 그의 암흑기나 다름 없던 청년기 추억을 남긴 곳이 안시였다.
티우 운하에서 만난 동화 속 올드 타운
루소 거리를 비껴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든다. 티우 강 구 시가지(Viellie ville)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는 꽃으로 치장한 카페, 레스토랑이 이어진다. 12세기에 지은 중세풍의 건물과 작은 운하가 어우러진 골목은 마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주황색 석회암으로 지은 건물들 사이로 운하의 물결이 일렁거리면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내 마음까지 넋을 놓아 버린다. 운하 양쪽을 잇는 페리에르(Perriere) 다리 근처에는 12세기 초에 지어진 팔레 드 릴(Palais de L'lsle)이 있다. 안시를 소개하는 엽서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운하 한가운데 건축된 건물은 ‘섬의 궁전’이란 뜻이다. 제네바 공작의 거처였던 이곳은 이후 행정관청, 법원청사, 조폐국 등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와 2차 세계대전 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된다. 운하 끝,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헌신회가 보이면서 넓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 깊은 호수에서 안시를 조망하다
둘레가 약 40km인 넓디넓은 안시 호수(Lac d’Annecy) 위 저 멀리 산정의 구름들이 하늘로 향한다. 안시 호수에 알프스 산의 반영이 비친다. 유람선은 정박한 채로 있고, 시뉴 섬(Ile des Cygnes)에도 가을색이 짙어지고 있다. 큰 정원을 끼고 에둘러 난 호숫길에는 프랑스의 의사이며 화학자인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 1748~1822)의 동상이 있다. 그는 안시 근처의 탈루아르 몽맹(Talloires-Montmin) 태생이다. 또 바스(Vasse) 운하의 시작점에는 사랑의 다리(Pont des Amours)가 있다.
마을 언덕 위에는 12~16세기에 지어진 안시 성이 있다. 제네바의 영주들과 느무르 공작들의 거주지였던 이 건물은 1953년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현대미술과 종교미술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인적 없는 골목을 따라 걸어 오르면 안시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다. 그곳에 성모 방문 수녀회(Basilique de la Visitation) 성당이 있다. 작고 조용하며 고풍스러운 안시 가옥의 지붕들을 조망하면서 사르르 상념에 빠져든다. ‘난 지금 그림책에 있는 프랑스 동화마을에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Travel Tip!
현지 교통편 인근 도시 리옹에서 열차를 이용하면 2시간 정도 소요 된다. 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안시행 정기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음식과 숙박 관광도시인 만큼 음식들이 맛있다. 퐁듀 등 사부아 지역의 전통 요리(사부아야르드, Savoyarde)가 특색이다. 일요일에는 노천시장이 열린다. 고급 휴양도시여서 명성 있는 국제 호텔은 물론 작은 가족적인 호텔들이 있다.
기타 정보가을에는 안시 이탈리아 영화 축제(10월), 사과와 꿀 페스티벌(11월) 등이 열린다. 겨울에는 알프스 산맥 능선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안시의 스키 리조트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동계스포츠의 메카이도 하다.
오트 사부아주 웹사이트(www.haute-savoie.gouv.fr)
아침 교육현장에서 열성 참석자를 만났다. 경제 관료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경제 부분 전문성의 최고 자리라 할 수 있는 산업자원부 장관까지 지낸 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제 5단체 가운데 2개 단체의 수장을 지내고, 대기업 CEO도 두 번이나 맡는 진기록도 보유했다. 바로 현 LG상사 고문이자,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희범(李熙範·66) 회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런 그가 평범한 화요일 새벽 조찬 포럼에 나타났다. 형식적인 참석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포럼의 참석자 대표라 할 수 있는 총원우회 회장을 맡고, 이·취임식까지 가졌다.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aSSIST(서울과학종합대학원)의 CEO 포럼과의 인연을 묻자 그는 처음엔 입장이 달랐다고 했다.
“이 포럼이 처음 생긴 것이 2005년이니까, 장관 재직시절이었어요. aSSIST측에서 요청이 와서 CEO 과정의 강사로써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좋은 분들과의 매력을 느껴 눌러앉게 되었고,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아마 현재 서울 시내에만 경영자 포럼이나 모임이 100개 이상 되겠지만, 여기가 교육과정이나 내용이 다양하다고 생각됩니다. 참석자들도 중견기업의 CEO나 공직자, 민간연구소 연구원 등 다양해서, 여러 입장에서의 다채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이 안에서 비즈니스도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식견도 넓어지기도 하고 말이죠.”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모임을 참석해 열의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형식적인 것과 거리가 있다. 그의 배움에 대한 진정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독 국내에서 이렇게 조찬 모임이나 경영자 과정의 인기가 많은 것은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칭찬한 적이 있잖아요. 제가 공직 시절 대통령을 보좌해서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현지 관계부처 장관과의 미팅을 조찬으로 추진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쪽에서 놀라더라고요. 아침은 가족과 함께 먹는 것 아니냐고. 아예 조찬회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이죠. 결국 빠듯한 일정 탓에 무리하게 오전에 약속을 잡아서는, 수위도 출근 안 한 건물의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그 장관과 단 둘이 마주앉아 회의를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다면 이런 현상이 꼭 우리만의 일일까? 이에 대해 이제 우리보다 더한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중국이다.
“중국에서도 우리와 같은 경영자 모임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6개월 과정의 비용이 4만달러 수준이니 가격은 국내 수준보다 훨씬 높은 편이죠. 게다가 모임도 오전에 잠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말에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 선전(深?) 등을 돌며 1박 2일 일정으로 해요. 그들에게 힘들거나 비싸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봐요. 이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품 하나를 잘 만들게 되면 그를 통해 얻는 수익이 얼마인데 그런 소리를 하냐는 것이죠. 그들의 정보와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어떤지, 기업 경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경험이었죠. 매일 빅데이터들이 계속 쌓이고 이를 활용하는 기업의 패러다임이 매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경영자들에게 이런 모임들은 트렌드를 읽고, 도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정가에서 기업가로 변화하는 동안 그는 다양한 기관, 다양한 조직에서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이 모임을 놓지 않았다. CEO 포럼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마 산업자원부 차관을 맡은 뒤 바로 장관에 임명됐으면 많은 어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그 사이에 한국생산성본부 회장과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맡으면서 관료 시절엔 알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체득하게 됐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것도 이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산업부 후배들도 이제 1일(日) 1사(社) 방문을 유지하고, 현장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경영자가 되고 나서는 그간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웠다고 했다. 공직과 기업 간 시각차가 분명히 존재하고, 공직자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애정을 갖고 기업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는 겸손이 섞여 있지만, 실제로 그는 현장을 찾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2000년 산업자원부 자원정책실장 시절, 발전사업 분할 때 한국전력 노조가 전면 파업을 선언하자,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조원들의 집결지를 찾아 사태 해결에 앞장선 일화는 유명하다. 또 장관 재임 시절에는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도시락 미팅’을 가지며, 일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수첩 사이에 노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흔히 포스트잇으로 부르는 접착식 메모지다. 그는 미소지으며 “제가 가장 애용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창조의 노란 패드’라고 부르고 있어요. 작성한 정보가 완료되지 않고 계속 업데이트할 수 있어 애용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이 수첩 안 메모지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공포의 노란 패드’. 사무관, 서기관 때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던 그를 지칭한 별명이다. 수치 하나까지 틀림없이 기억하려는 철저한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따로 묻진 않았지만 또 다른 별명은 아마 그도 알고 있으리라.
그의 꼼꼼함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모습은 안주머니 가득 자리 잡고 있는 샤프들이다. 몽블랑 같은 명품이 자리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샤프 중에서도 흔히 우리가 ‘제도 샤프’라 부르는 흔하디 흔한 물건이다. 그는 “샤프로 작성하면 쓰고 지울 수 있으니까, 다양한 수치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설명했다. 결국 두 가지 키워드다. 정보와 업데이트. 여러 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총원우회 회장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제 좀 한가해졌다고 대답하며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30개가 넘는 직함을 함께 내려놓았다. 한때는 국내뿐만 아니라 두바이 아부다비 왕립 연구소 자문위원이나, 에티오피아의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 참여 등 여러 활동에 참여했던 그다.
“10기까지는 신입 기수 내에서 회장을 뽑았지만, 이제 모임이 성장한 만큼 본격적인 사업진행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이 형성되면서 요청이 있었어요. 저도 나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교류를 강화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순 교류를 떠나 전체 790명 회원을 위해 소모임을 활성화하고, 문화예술 공연 지원이나 사회공헌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
이희범 회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정무직 공무원을 거친 뒤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LG상사 고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이공계 출신 최초의 행시 수석 합격자로도 잘 알려졌다. 상공자원부 사무관을 시작으로, 주EU사무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산업자원부 차관 등 경제 관료로 이름을 알렸고,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03년 12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 퇴임 뒤에는 한국무역협회장을 역임하고, 2009년 STX그룹 에너지 부문 총괄 회장으로 영입되며 기업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2013년 LG상사 고문으로 이직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글. 박종진 만년필동호회장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대한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 끝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만년필도 이와 같다. 1800년대 후반 실용적인 만년필이 만들어졌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필요 없는 것은 사라지고 편리한 것은 추가돼 지금의 모습이 됐다. 이것은 재미있게도 발전하고 다듬어지는 우리의 인생(人生)과 비슷하다. 유년기,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발전기가 치열하게 경쟁하던 청년기인 황금기가 있다. 그리고 황금기를 지나면서 만년필은 완성됐다.
발전기
실용적인 만년필의 시작은 1883년 뉴욕에서 보험을 하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46세에 발명했다. 실용적이라는 말이 앞에 붙은 것은 이전에도 만년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잉크를 저장 휴대하려는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17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이 남아 있고 1800년대가 되면 특허가 등록되는 등 갖고 다닐 만큼은 못 돼도 만년필은 있었다. 워터맨은 모세관현상(毛細管現象)을 이용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쓸 수 있고 필기 도중 잉크가 쏟아질 일은 없어졌다.
만년필은 빠르게 발전했다. 휴대가 일반화됐고 체온(體溫)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데워진 공기는 펜촉에 남아 있는 잉크를 밀어 흘러나왔고 쓰려고 하면 손에 묻었다. 화살클립으로 유명한 파커사(社)의 창업자 조지 파커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여러 발명가 중 하나였다.
세기가 바뀌면서 문제는 해결되고 편리하게 스포이트 없이 잉크를 채울 수 있게 됐다. 1905년 처음 클립이 만년필에 장착돼 연필 모양이었던 만년필은 클립의 추가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황금기
1920년대 이후 만년필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전이 실용적인 만년필의 아버지인 워터맨사(社)의 독주(獨走)였다면 황금기는 워터맨, 셰퍼, 파커, 월의 4파전이었다. 먼저 치고 나온 것은 셰퍼였다. 바닥에 떨어져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껍고 튼튼한 펜촉을 장착하고 ‘LIFE TIME’이란 이름으로 첫 구매자의 평생 동안 보증을 해주는 자신감 있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것은 즉시 성공했고 내구성은 업계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해 파커는 빨강과 검정의 두 가지색으로 대비, 눈에 확 들어오는 듀오폴드를 내놓는다.
기능의 추가는 아니었지만 컬러는 황금기 초반에 보증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1위였던 워터맨 역시 컬러의 공격에 움직이기 시작해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1924년 새로운 재질인 플라스틱이 상용화돼 컬러는 다양해지고 무게는 가벼워졌다. 1929년에는 위와 아래가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유선형이 등장했다. 만년필의 전형(典型)으로 알고 있는 형태이다.
고무 튜브 안에 잉크를 채우던 방식이 1930년대 들어서자 구식(舊式)이 됐다. 요즘처럼 몸통 뒤의 꼭지를 돌려 잉크를 채우는 것도 이 시기를 전후로 독일과 미국에서 나왔다.
현대
1920년부터 시작해 1940년까지 약 20년간의 황금기는 보증(保證), 컬러, 플라스틱 재질, 유선형,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 등 현대 만년필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대에 남은 것은 이것들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1941년 만년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만년필인 파커51이 출시됐다. 황금기에 나온 모든 것들이 적용됐고 어디 한 군데 허술한 곳이 없었다. 흔들어도 잉크가 튀지 않았고 전쟁터에 군인이 꽂고 나갈 만큼 튼튼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두 자루의 파커51로 V를 만든 것은 꽤나 알려진 일화다.
황금기의 유산(遺産)은 파커51에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2년 몽블랑사(社)에서 출시한 몽블랑149 역시 그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유선형의 몸체, 크고 화려한 펜촉,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은 파커51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만년필은 1883년 실용적인 만년필의 시작이 약 30년의 발전기와 황금기의 20년을 지나 완성된다. 사람으로 치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쉰 살이다.
쉰 살은 쉰 이어(year) 고 시니어다.
수집과 동호회
동전 위에 있는 만년필은 “World’s smallest Pen”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로 알려진 펜이다. 잉크를 넣어 사용할 수 있고 성냥개비보다 작아 길이는 약 41mm다.
때때로 Doll’s Pen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메리 왕비의 인형의 집에 전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왕비는 영국 왕 조지5세의 아내로 당시 세계 최고의 수집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크리스마스에 자국의 군인에게 연필과 담배가 담긴 ‘Princess Mary Tin’을 보내기도 했다.
만약 이와 비슷한 만년필이 있는데 좀 더 알고 싶고 진위(眞僞)를 가려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동호회를 찾아야 한다.
수집에만 열을 올리는 만년필의 동호회는 옛날이야기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비싼 만년필을 자랑한다면 이내 싸늘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 수도 있다.
새로운 만년필을 구하는 것은 탐험과 같다. 낭떠러지가 있고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고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별 아래 둘러 앉아 맹수를 사냥한 전사의 성공담이 있는 것처럼 동호회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서랍 속에 만년필이 있다면 분명 그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알아봐 들려줄 수도 있고 내가 사냥꾼이 돼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임은 그런 이야기로 차 한 잔을 두고 10시를 넘어 11시가 다 되도록 채워진다.
사물(事物)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