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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 약속한 바람둥이 유부남과 부적절한 관계에 가슴앓이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작고 허술한 나뭇잎 배가 시냇물의 작은 소용돌이에서 맴돌듯이 그와 나의 관계도 좀체 진전되지 않는 상황이 위태롭고 답답했다. 나뭇잎 배처럼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관계였던가, 우리 사이가. 나는 사별, 그는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 상태), 서로의 공감대가 달라서일까. 아니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조건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구나 우리는 고교 시절을 오롯이 함께 지냈던 사이인데… 그렇게 조마조마 위태롭던 나뭇잎 배가 내 바람과 달리 순풍을 타기는 고사하고 기어이 뒤집어지고 말았으니…. 동창 장례식에서 재회한 그와 나 지방 소도시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그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1년 전 동창의 장례식장이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자 동창이었으니 나보다는 그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동창들은 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다. 게다가 고작 3개 반이었으니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져도 서로 낯선 얼굴은 없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서울에 거주하던 그는 추석을 맞아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한 것 같다고. 동창은 즉사했고 옆자리 아내는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라 썰렁한 빈소는 바로 밑의 동생이 지키고 있었다. 충격을 받으실까 노모한테는 알리지 않았다고. 어차피 90세 넘은 고령에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니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장남이 죽은 것도 모르고 목 빼고 기다리는 노모에게는 내려오기로 한 아들이 갑자기 일이 생겨 못 오게 되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고 들었다. 급하게 사람이 간 데다 사고가 난 지점이 고향 가까운 곳이라 구태여 거주지 서울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지만, 되도록이면 노모 곁에서 마지막을 보내게 하고 싶었던 형제자매, 고향 친척들의 마음도 작용했다. 아무리 다 큰 자식이라 해도 집에 다 와서, 엄마 곁에서 죽고 싶었던 것 같다는 말을 보태며. 나는 마침 추석을 쇠러 3일 전부터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내게도 고령의 어머니가 계시니. 남편이 7년 전 떠난 후부터는 명절에 고향 친정을 찾는다. 시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당연히 시댁에서 지냈지만 남편에 이어 시부모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후에는 친정엄마와 오롯하게 보내고 있다. 비보는 작은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다. 나뿐 아니라 명절 맞아 고향을 찾은 동창생들이 더러 있었기에 뜻하지 않게 모두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식당이나 슈퍼마켓 등 자영업을 하면서 고향을 지켜온 동창들을 제외하고 타지에 나가 사는 동창 중에 몇 년에 한 번이나마 얼굴 보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얼굴도 있었다. 그는 후자에 속했다. 그가 고향을 찾은 것은 20년 만이라고 했다. 결혼 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가족은 그대로 있고 본인만 사업 관계로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게 3년 전이라고. 재정착하느라고 나름 바빠서 고향을 찾은 것은 그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마치 나를 만나기 위해 20년 만에 발걸음을 한 것 같다며 농담을 진담처럼 해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나는 사별녀, 그는 엄연한 유부남 그와 나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우리는 30분 거리를 걸어 통학했는데 집 방향이 거의 같아서 함께 등하교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고 둘만의 내밀한 추억이나 은밀한 기억이 있지는 않다. 나는 선머슴 같은 기질이라 사춘기 이성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기엔 뭘 한참 몰랐고, 그는 그대로 그 나이의 보통 남학생이었을 뿐 여학생의 마음을 섬세히 읽을 줄 안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때 좀 특별한 관계였더라면 하는 것은 지금의 내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자 뒤늦은 달뜸 탓이 아닌가. 그때 그랬기에 그와 내가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중년 아줌마의 소녀적 감성이 빚어낸 통속적 로맨스라도. 그럼에도 나는 그가 반가웠고 그도 나를 반겼다. 특별한 관계는 이제부터면 되지 않나.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20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동창 녀석의 죽음이 우리를 연결해줬다고 하면 이기적이고 잔인한 말 같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리가 좀 더 일찍, 아니 아주 많이 일찍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을 때 사귀기 시작하고 그 인연을 따라 맺어졌다면 너도 나도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에 내 가슴은 또 콩닥이며 설레었다. 죽은 남편만 불쌍하지. 단언컨대 내 결혼 생활은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남편은 나를 많이 아껴주던 사람이었다. 개인택시를 운전하며 큰돈을 벌어오진 못했지만 성실하게 가족을 챙겼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운전을 하다 보니 사고 위험에 늘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어느 날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하여 의식을 잃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금슬이 좋았기에 혼자 살아온 지난 세월이 더 외로웠고, 누군가를 만나 빈자리를 메우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하던 때에 그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엄연히 아내가 있고 대학생 두 자녀가 있다. 유부남인 그와 나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귐은 깊어지고 있었다. 차 한잔이 밥이 되고, 밥자리가 밤자리, 잠자리로 이어졌다. 한번 열린 마음과 몸은 거침이 없었다. 7년간 굳게 닫혀 있었으니 더. 뻔한 레퍼토리라 해도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내와 곧 이혼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사업을 핑계 삼아 한국과 캐나다에서 별거 중이라고 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라지 않나.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삼각관계 질투의 덫에 걸린 나 그러나 정작 일은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세상 떠난 동창의 아내와 그가 자주 만난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와 사귀는 줄 알 리 없는 내 친구가 가십 삼아 한 말이 나한테까지 들려온 것이다. “장례 마치고 그 아내의 문병을 갔던 모양이야. 좀 어색한 그림이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남편을 창졸간에 잃은 데다 아내도 많이 다쳤으니 위로차 문병할 수도 있겠지. 근데 병원 출입이 너무 잦은 게 수상한 거지. 서울 사는 가족들이 간호하기 힘들다며 서울 병원으로 옮기자고 하는데도 본인이 마다했다잖아. 남편 고향이지 본인은 아무 연고도 없으면서 말이야. 아마도 두 사람이 자유롭게 만나려고 그런 것 같아.” 명치쯤이 타는 듯 아리면서 가슴에 쿵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서는 ‘웅~’ 하고 사이렌이 울렸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만나면서 동시에 그 여자도 만났다는 건가. 캐나다에 있는 그의 아내가 아닌 연적(戀敵)이 따로 있었다니! 이 무슨 전혀 예상치 않은 삼각관계인가! “죽은 동창의 아내를 돌보는 야릇한 상황이라니,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사람 캐나다에 가족이 있다지? 근데 그 여자한테는 돌싱이라고 속였다나 봐.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어. 그 말을 하는데 그 여자 얼굴이 한껏 달떠 보이더래. 남편 죽은 여자 낯빛이 아니더라나. 사랑에 빠진 얼굴이 그런 얼굴이라지 아마?” 이어지는 친구의 말이 귓전에서 웅웅대며 가슴에서 홧홧한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정말로 그 여자와 만나는 사이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어차피 싱글도 아닌 놈이니 한바탕 잘 놀았다 생각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굶주려 있던 차에 그렇다고 아무 놈하고나 할 수는 없고 그래도 좋아하는 놈하고 한 게 어디야? 좋아. 까짓 거 헤어질 결심을 하는 거야.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선 아는 척할 것도, 거론할 것도 없이 조용히 물러나주는 거야. 그게 그나마 구겨진 자존심을 챙기는 길이고. 어차피 유부남이잖아. 여기서 끝내는 게 뒤탈이 없을 거야. 오히려 잘됐어.’ 진심도 아니고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마음속으로 지껄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결국 양다리 걸친 놈한테 속았다는 생각이 차오를 무렵,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노모를 뵈러 고향에 내려가 있다는 게 아닌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자주 가네.” “연로하시니까. 언제 또 캐나다로 불쑥 가게 될지도 모르고. 있을 때라도 자주 뵈러 와야지.” “근데 지금 자기 혼자 있어?” “혼자 있지 그럼 누구랑 있어? 아, 우리 어머니? 잠깐 텃밭에 나가셨어. 왜 인사드리고 싶어서? 장래 새 며느리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서? 하하.” 전화기 너머로 부스럭 소리가 난 것도 같다. 그 여자를 향해 “쉬” 하며 입술에 손가락 대는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아, 나는 꼼짝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바야흐로 질투에 뼈와 살이 타들어가는 삼류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 2023-09-2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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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의 제단에는 환상의 향이 피어오른다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환상이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 사랑 자체에 대한 환상, 환상 없이는 애초 사랑이 설 자리가 없는 거지. 사랑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사랑이 갖는 그 환상성 때문 아닐까? 거기에 착각의 고명을 올리면 한 그릇 사랑으로 손색이 없겠지.” “그럼 넌 사랑해봤니? 네 식으로 말하자면 환상해봤니? 어째 네 말이 체념적으로 들리네.” “…….” 친구와의 대화가 여기서 중단됐다. 환상을 발설하는 순간 은빛 날개가 잿빛으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에. 남루하고 추레한 본색이 드러나면 내 삶의 발판도 흔들리니까. 그에 대한 나의 환상이 지워질세라 지금도 그의 실체에 조바심 나는 덧칠을 수시로 해댄다. 평범한 청동상에 찬란한 도금을 입히듯. 그의 실체라니?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내게 더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 아니었나. 단지 어느 날 그가 차갑게 돌아섰고, 그럼에도 그를 잊을 수 없는 나의 고통의 간격을 환상으로 메우고 있을 뿐…. 그와 나는 공중파 라디오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와 출연자로 만났다. 직업 특성상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나를 만난다는 것이 그에게 약간의 설렘을 주지 않았을까. 물론 방송에 출연할 정도면 그 또한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렇게 내가 다소 우위에서 우리의 만남이 시작되었지만 1년 후 나는 그에게 차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내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는 홀연히 떠났다. 이후 나는 7년째 ‘환상 중’이다. 내과의사인 그를 의학 정보 코너에 초대하고 일주일 후, 그는 방송 출연료로 내게 밥을 사고 싶다고 했다. 출연자들로부터 그런 식으로 식사 대접을 받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일로든, 개인적 호감으로든 친분과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자리였음에도 첫 만남부터 그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미 좋아진 관계에서 왜 우리가 서로 좋아하게 되었나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거라면 몰라도. 어느새 그는 나에게 완벽한 남자, 나는 그에게 완벽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우리 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떤 젊은 여자가 신랑감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직업 좋은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엉망인 치열, 왜 여태 교정하지 않았냐고 여자의 부모가 물었다. 당황한 쪽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고. 1년 넘게 교제하면서도 남자친구의 치열이 심하게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상대의 약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약점조차 장점으로 보이게 하는. 그처럼 내게 혹은 그에게 남이 보기엔 약점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 또한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관계를 타인에게 노출한 적이 없었으니. 우린 그냥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도 돌싱 나도 돌싱, 게다가 50대 중반. 세상에 대해 너그럽고 둥근 시선을 가질 만한 때라는 보편적 공감대도 견고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세 번째 잠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섹스 뒤의 후희처럼 그의 언어는 나른하고 황홀했다. 내 환상의 그물코는 그렇게 꿰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수시로 꽃이나 향수, 책 등을 선물했고, 치료에 대한 답례로 환자에게 받은 자잘한 명품 소품들도 자신이 갖지 않고 내게 건넸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도 내가 사는 동네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과자 따위를 손수 사들고 오기도 하고, 새벽에 불쑥 내 집 앞에 서 있기도 했다. 마치 밤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지치고 간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봐야 그날 병원 일을 안정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한마디로 그는 자상하면서도 멜랑콜리했다. 유약하고 섬세했다. 내 안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내 모든 것을 내어줄 태세로 나는 감동했다. 환상과 착각의 그물이 빠른 속도로 짜여져갔다. “헤어진 아내는 남편하고 자식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 착했지만 답답했지.” 돌이켜보면 눈치 챌 순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스테이크의 마블링처럼 그의 맘짓, 말짓 사이사이에 그의 성격적 단면이 비쳤으니. 그게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중년의 한국 남자가 그만한 일로 아내와 이혼을 한다?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그의 아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을 리는 없으니. 나도 이혼을 했지만 남편은 도박중독에 빠진 데다 재활 의지도 없었으니까. 적어도 그 정도 사유는 돼야 이혼까지 간다는 게 통념 아닌가. 머지않아 내게도 잔인한 순서가 닥쳤다. “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 언젠가는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과 가까워질수록 그만 만나야 한다는 조급함이 맥박처럼 뛰었지.” 당신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냐고 속삭일 때는 언제고, 처음부터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말은 또 뭔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슨 유부남의 내연녀도 아니고. 황당했다. 그렇게 나는 한 칼에 ‘정리’를 당했다. 나는 그에게 한갓 전리품에 불과했을까.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고치겠다며 붙잡고 매달릴 새도 없었다. 이후로 그는 전화와 문자, 이메일 등 일체의 연락 수단을 차단해버렸으니까. 계절이 변해 옷을 갈아입듯이 그의 변심과 이별 통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불가항력적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조건의 장애도, 심리적 장애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그 무장애가 장애였을까. 싫증과 권태의 요소였을까.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짜릿함을 추구했던 걸까.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벽이 있었던 걸까. 한마디로 바람둥이였을까. 그의 아내도 나처럼 일방적인 이별 통보의 뒤통수를 맞은 걸까. 생각의 꼬리를 물어봤자 놀이터에서 신명나게 놀던 두 아이 중 하나가 ‘난 그만 집에 갈래’ 하고 폴짝 뛰어갈 때처럼, 홀연히 떠난 아이가 그였고 망연히 남겨진 아이는 나였다. 간신히 마음을 수습하고 일상을 꾸리며 방황을 환상으로 박제해 가슴에 들어앉힌 것이 어언 7년째. 오늘도 나는 환상의 도금이 행여 벗겨질세라 나의 지난 사랑을 가슴팍에 보듬는다. 나의 사랑이 허상은 아니었다는 주문을 외우며. 나는 비로소 그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를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 오늘도 내 사랑의 제단에는 환상과 착각의 향이 피어오른다.
- 2021-08-0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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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가고 싶은 미술관, '소마미술관'
- 소마미술관엔 행정상 내부 관장이 있고, 외부 전문인 명예관장이 있다. 큐레이터의 역할과 책임이 클 수밖에 없다. 큐레이터는 전시 기획은 물론 미술품의 수집·연구·관리에 관한 실무를 전담하기에 ‘미술관의 꽃’으로 일컫는다. 화가·평론가와 함께 현장미술의 삼각 축을 이룬다. 소마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박윤정 씨. 그는 소마미술관 근무 15년을 포함, 20여 년간 큐레이터로 활동한 베테랑이다. 소마미술관에 대해, 그리고 미술 감상법에 대해 묻기 위해 마주앉았다. “소마미술관은 88올림픽 문화제전을 계기로 출발한 역사성, 그리고 올림픽조각공원이라는 매우 강력한 하드를 가지고 있다.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구축한 소프트도 뒤처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강점을 살려 ‘다시 가고 싶은 미술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과 미술관이 직결되는 출입 통로가 이상적이다. 접근이 쉬워 관람객이 많을 것 같은데. “대중에게 미술관 문턱은 아직도 낮지 않은 것 같다. 과거에 비해 관람 인원이 크게 늘지 않은 추세이니까.” 미술관 측이 문턱을 낮춰야 하지 않나? 재미가 있으면 찾아가게 마련이다. “소마미술관은 물론 요즘의 미술관들은 발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단순히 전람회만 여는 공간이 아니다. 멀티 컬처의 열린 장으로 바뀌었다. 각종 문화와 교육 관련 프로그램, 심포지엄, 작가와의 대화, 그리고 축제나 공연까지 펼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관람객이 적은 건 왜지? “이론 중심의 미술교육 제도가 문화의 성장 속도를 저해하는 걸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예술에 젖어들 수 있는 풍토 조성이 필요하다.” 그간의 전시회 중에서 가장 성황을 이루었던 건? “2015년에 가진 ‘프리다 칼로-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 전이다. 어릴 때엔 교통사고로 몸이 다 부서지다시피 했고, 바람둥이 남편에게 평생을 시달렸으며, 멕시코 패션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프리다의 드라마가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전시장을 찾아왔다. 한동안 ‘프리다 신드롬’이 일 정도였다.” 조각공원의 작품들 중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사견임을 전제하자. 잔바람에도 작품이 움직여 신선한 감흥을 주는 조지 리키의 ‘비스듬히 세워진 두 개의 선들’이 좋더라. 대칭과 비대칭의 조합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문신의 ‘대한민국 올림픽-1988’과 이우환의 ‘관계항-예감 속에서’도 내겐 특별했다.” 미술작품 감상법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미리 사전 정보를 알아두는 게 좋겠다. 미술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내가 느끼는 모든 게 예술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있다. 전시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방법도 고려하자. 무엇보다 쉽고 좋은 건 도슨트의 설명을 경청하는 일이다.”
- 2021-01-2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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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배우는 컬러링] 따뜻한 봄바람 속 바람둥이 하늘매발톱꽃
- 일반적으로 꽃은 한 명의 상대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을 상징합니다. 민들레나 해바라기가 그렇죠. 하지만 모든 꽃이 그럴까요? 재미있게도 바람둥이꽃도 있습니다. 매발톱꽃 종류가 그렇습니다. 6월에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는 이 친구는, 이성을 찾아 움직이진 못하지만 다른 꽃의 꽃가루를 좋아해 꽃 색상이나 변이가 다양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람둥이라는 꽃말도 가지고 있고, 중국에서는 ‘매춘화(賣春花)’로 불리기도 한다네요. Tip 독특하게 생긴 형태로 인해 눈길을 끄는 꽃. 하늘을 나는 매의 발톱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다섯 개의 꽃잎 사이에 꽃받침 잎이 나와 있는 복잡한 형태에 유의해 그려봅니다. 가운데 흰 부분의 음영과 꽃술을 먼저 그린 뒤 퍼플컬러로 꽃받침 꽃잎과 꼬리 부분의 음영을 표현합니다. 꽃받침 꽃잎에서 보이는 옐로, 라이트 블루, 약간의 그린 톤을 더한 다음 그레이톤으로 덧칠해 채도를 낮추며 음영을 넣어줍니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춰가며 꽃술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옐로보다 어두운 네이플스 옐로로 꽃술의 음영을 표현합니다. 꽃잎의 꼬리 부분도 둥근 양감이 표현되도록 음영을 더합니다. 전체적으로 더 어두운 부분과 꽃술 부분도 라인으로 덧칠한 후 완성합니다. 이해련 작가 blog.naver.com/lhr1016 인스타그램@haeryun_lee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실내환경디자인을 전공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글로벌미래평생교육원과 신구대학교식물원 보태니컬아트 전문가 과정의 겸임교수이며 한국 보태니컬 아트 작가협회(KSBA)와 보태니컬아트 아카데미 ‘련’의 대표다. 영국 보태니컬 아트 작가협회(Society of Botanical Artist)의 Annual Exhibition 2017에 참가하는 등 국내외 각종 전시에서 활동 중이다.
- 2019-07-0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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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원의 뇌와 인간의 뇌
- 전에 어떤 여성 개그맨이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었다. 그땐 그저 우스갯소리로 여겨지던 이 말이 요즘 와서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전혀 흔들리지 않을 듯이 공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구축한 것처럼 보이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이윤택, 고은으로 시작한 미투 태풍이 김기덕, 오달수, 조민기, 조재현 등 영화계를 거쳐 어느덧 정치 거물 안희정까지 다다랐다. 지금 알려진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이 받는 충격이 이미 엄청나게 큰 상태지만, 중요한 건 이 바람이 아직 시작인지 끝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미 불길한 예언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바람에 옷깃을 스치기만 해도 변명은커녕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바람이 한때 지나가는 계절풍은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다. 역사가 전개되는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답보 상태인 듯이 보이는 역사의 흐름이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변화의 동력을 얻는다. 처음에는 우연인 듯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으로 등장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필연의 태풍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미투 운동도 미국 등지에서 그저 몇몇 바람둥이들의 스캔들로 끝나며 살랑살랑 불던 미풍처럼 잦아들겠지 했었는데 어느새 대한민국에 상륙하면서 태풍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문명사적 변화의 힌트는 무엇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이 현상은 과거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동안 낯선 이에게 당한 성폭행을 제외한 가까운 사이에 벌어진 성 관련 범죄는 대부분 쉬쉬하거나, 혹은 불거져 나오더라도 피해자인 여성이 꽃뱀으로 몰리는 등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본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덮이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이런 변화를 오랜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물로 본다. 하긴 남녀 사이의 위상이 과거보다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젊은이들 간에는 남자와 여자가 거의 동등한 듯 보인다. 또 다른 시각은 한국인의 유별난 기질에서 찾기도 한다. 일본 모 신문의 한국특파원 여기자는 이런 미투 현상이 일본에선 거의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며 한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 사태의 본질을 유심히 살펴보면 남녀 간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벌어진 현상의 공통점은 대부분 어떤 형태로든 상하관계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미투 현상은 몇몇 용감한 여성들에 의해 공고하던 권력의 허상이 깨져나갔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어떤 학자가 언급했듯이 이른바 ‘포스트 가부장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머나먼 과거 파충류의 뇌로부터 시작해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그 뇌들이 모두 함께 잔류해 있단다. 다시 말하면 우리 뇌에는 본능을 관장하는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 시대의 뇌, 그리고 유인원의 뇌 위에 현생인류의 특징인 전두엽이 발달한 상태가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포유류나 유인원은 대개 권력을 쟁취한 우두머리가 모든 암컷을 소유한다. 어쩌면 무수한 폭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그마한 권력에 취하여 주변의 여성들을 암컷들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들은 현생인류로 진화하지 못한 포유류, 기껏해야 유인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컷이었다는 이야기다.
- 2018-03-0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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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닐라 스카이 (Vanilla Sky)'
- 카메론 크로우 감독 작품이다. 주연에 바람둥이 데이빗 에임즈 역에 톰 크루즈, 데이빗의 이상형 여자 소피아 역에 페넬로페 크루즈, 섹스 파트너 줄리 역에 카메론 디아즈가 나온다. ‘바닐라 스카이’는 인상파 화가 모네 작품에서 하늘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담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러고 보니 빈센트 반 고흐의 풍경화도 비슷한 작법이었다. 그래서 이 생소한 단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 셈이다. 남자의 자격에서 인기를 얻은 가수 배다해가 활동하던 그룹 이름이 ‘바닐라 스카이’였다. 한국 영화 ‘루시드 드림’ 감상평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누군가가 꿈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했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난해하다. 꿈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고 바닐라 스카이처럼 시시각각 판단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는 뜻도 담고 있다. 데이빗은 아버지 유산으로 받은 잘 나가는 출판사 사장이다. 돈 많고 잘 생겨서 주변에 사람이 많다. 여자도 많아서 바람둥이이다. 이미 줄리라는 애인이 있는데 그의 33세 생일 파티 때 운명의 여인 소피아가 나타난다. 첫눈에 소피아에게 반한 데이빗은 그때부터 소피아에게 사랑이 옮겨 간다. 줄리는 질투에 불타서 데이빗을 차에 태우고 질주하면서 동반 자살을 꾀한다. 차량 전복사고로 줄리는 죽고 데이빗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추한 얼굴이 된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여기서 피해 의식이 발동한다. 잘 생긴 외모는 그만큼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추한 얼굴이 된 데이빗은 실의에 빠져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다행히 의사의 노력으로 데이빗은 제 얼굴을 회복하고 소피아도 옆에서 보살핀다. 그러나 데이빗은 소피아에게서 줄리의 환상을 보며 정신 착란에 빠진다. 소피아를 줄리로 착각하며 질식사 시키고 범법자가 된다. 그리고 난해한 꿈의 세계에 들어간다. 개를 동결시켰다가 해동해서 다시 회생시키는 기술이 등장하는가 하면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나타나 꿈은 편집이 가능하다고 한다. 좋은 것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없애는 것이다.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에게는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이라는 게 사실 별로 없다. 무난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인(凡人)이라고 한다. ‘꽃길만 걷고 싶다’는 좌우명을 카톡스토리에 담고 있는 사람도 많다. 범인들에게 인생은 사실 지나온 과정이 모두 꽃길이다. 특별한 고난의 나쁜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데이빗은 줄리에게는 빼앗길 수 없는 백마 탄 왕자였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이냐?”는 줄리의 질문에 데이빗은 줄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데이빗의 사랑은 소피아에게 사랑이 옮겨 갔다. 줄리에게는 데이빗이 행복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동반자살을 꾀한 것이다. 여자는 사랑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데이빗은 잘 생긴 외모를 잃으면서 인과응보의 죄 값을 받은 셈이다.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처럼 순간의 판단도 그때마다 중요하다.
- 2017-11-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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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외 수변무대에서 본 명작 오페라
- 월드컵 평화의 공원 수변무대에서 펼쳐진 오페라 을 감상했다. 하늘 공원 억새 축제의 일환으로 주변이 온통 인파와 축제 분위기였다. 월드컵 경기장 전철역에 내리자마자 이미 화장실에 길게 늘어선 줄이 축제장의 인파를 짐작하게 했다. 이번 공연은 집에서도 멀고 며칠 전 하늘공원과 일대를 돌아 봤기 때문에 갈까 말까 망설였었다. 그러나 깊어 가는 가을 저녁 수변 무대에서 펼쳐지는 오페라는 어떤 느낌일지 보고 싶은 마음의 결정을 하고 발길을 옮겼다. 수변무대는 평화의 공원 수변에 마련한 야외무대이다. 정작 연못은 무대 때문에 안 보였다. 미리 연못을 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수변이라는 실감이 안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꽤 많은 수의 의자가 지정좌석제로 정열 되어 있었다. 로열석이라는 맨 앞자리를 배정받았는데도 정작 무대의 높이 때문에 배우들이 잘 안 보이는 상태였다. 차라리 중간 좌석이 가장 로열석일 수 있겠다 싶었다. ‘카르멘’은 프랑스 음악가 비제가 스페인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비제는 정작 스페인에 가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스페인에 대한 상상력이 더 스페인 사람들을 정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사람들은 휴가철이면 스페인에 가고 싶다고 얘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그만큼 스페인 사람들이 매력적인 모양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스페인 사람들은 묘한 매력이 있다. 얼굴은 서양 사람인데 머리 색깔 등이 검거나 갈색인 사람들이 많다. 동서양의 믹스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정열적이고 다른 서양처럼 인종 차별 같은 것도 없다. 작품 ‘카르멘’은 뮤지컬, 무용, 오페라 등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몇 년 전 영화 ‘셸위댄스’의 여주인공 쿠사카리 타미요가 발레리나로 무대에 섰을 때 직접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이 작품이 더 기억에 남는다. 여주인공 카르멘은 못 말리는 여자이다. 팜므파탈의 거역할 수 없는 파멸적 사랑을 부르는 여자이다. 돈 호세라는 순진한 병사를 유혹했다가 곧 싫증을 내며 다른 남자에게 갔다가 죽음을 맞는다. 순진한 남자 한 명이 그녀로 인하여 파멸되는 과정에서 남자들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집시 여인 카르멘의 자유스러운 행동과 사고방식에 순진한 남자 돈 호세는 인생을 걸었다가 배신당한다. “사랑은 자유로운 새, 아무도 길들일 수 없어요. 붙잡으려 하면 도망쳐 버리고, 벗어나려 하면 꼭 붙잡고 놓지 않을 거예요." 라는 가사는 집시 여인 카르멘의 자유스러운 사랑 방식을 잘 설명한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하는 여자 바람둥이의 본성이다. 이날 카르멘 역은 메조소프라노 추희명, 돈 호세 역으로는 테너 엄성화가 출연해서 갈채를 받았다. 귀에 익은 ‘투우사의 노래’ 등 ‘카르멘’에 나오는 노래는 오페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들이다. 마에스타 오페라 합창단과 마포구립소년소녀 합창단의 합창이 있어 더욱 빛을 발했다. 춤을 아는 사람들은 파소도블레 음악에 다리가 들썩였다. 가을 밤 야외무대에서 본 오페라는 특별한 감상이었다. 그러나 밤 기온이 쌀쌀해서 단단히 대비를 했는데도 추웠다. 가끔 얼굴 피부를 손으로 비벼줘야 할 정도였다. 실내 공연장과 달리 비교적 사진 촬영에 관대하고 공연 중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허락되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 2017-10-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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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리로 가는 길(Paris Can Wait, Bonjour Anne)>
-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곱게 늙은 여배우 다이안 레인,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 여행길에서 남편 아닌 남자에게 느낀 40여 시간의 미묘한 이성적 감정 등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영화 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딸도 2017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코폴라 감독의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가 80세에 만든 첫 장편 상업영화다. 일단 코폴라라는 이름만으로 믿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80세의 나이에서 오는 솔직함이랄까, 남편이 아닌 남자와 40시간 동안의 자동차 여행은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화였는데, 감추기 어려운 감정들을 오히려 남편이 도와줘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앤(다이안 레인 분)은 남편(알렉 볼드윈 분)과 전세 비행기로 칸에서 부다페스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앤이 귀가 아파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아르노 비아르 분)가 자기 차로 파리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한다. 7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자크는 군데군데 들르며 시간을 지체한다. 앤은 빨리 파리로 가자며 재촉하면서도 자크의 낭만적인 매력에 점차 빠져든다. 자크는 앤에게 파리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며 능청을 떤다. 남편은 바람기 많은 프랑스 남자를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자크는 여행 중에 틈틈이 늑대로 변할 소지가 있었지만, 파리까지 앤을 잘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 파리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앤은 자크와의 재회를 암시하는 여운을 남긴다. 자크는 앤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행복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남편과 살 만큼 산 유부녀의 틈새를 노린 질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지루함을 찌른 바람둥이 프랑스 남자의 수작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영화제로 유명한 칸에서부터 프랑스 남동부를 영화로 돌아보는 것이다. 실제로 관광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액상 프로방스, 로마의 유적 가르 수도교,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과 뤼미에르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포도주와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토리상으로는 안 넣어도 되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풍광을 담으려고 여기저기 들른 것으로 보인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안 레인의 매력이다. 1965년생으로 170cm의 늘씬한 여배우다.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소피 마르소처럼 책받침 미녀로 유명했다지만, 오십 고개를 넘다 보니 많이 늙기는 했다. 그러나 곱게 잘 늙었다.
- 2017-08-2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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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탄생한 ‘흥보씨’
- 지난 4월의 첫 번째 금요일은 아내와 오랜만에 저녁 데이트 하는 날이었다.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창극 흥보씨( Mr. Heungbo)를 함께 보러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의 푸름과 꽃들로 봄이 무르익어가는 아름다운 장충단 공원길을 걸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영면한지 5년 후 고종은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직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 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단골식당이 된 ‘다담에뜰’에서 식사와 차를 한잔하고 손을 잡고 걸어서 달오름에 올랐다. 다담이란 불가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는 다과라는 뜻이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우리에게 창극이 있다. 판소리가 한 명의 소리꾼이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라면 창극은 여러 명의 소리꾼들이 역할을 나누어 노래하고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다. 지난해 해오름에서 창극 향연을 처음 함께 본 후 아내와 나는 창극을 좋아하게 됐다. 창극 흥보씨는 한 마디로 우리의 전통 흥부전(흥부가)을 집으로 치면 대들보와 기둥만 남기고 완전히 현대판 흥부전으로 바꾼 새로운 창작이었다. 우리 내외가 창극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었지만 아내도 아주 재미있게 잘 봤다고 만족할 정도로 좋았다. 흥보씨의 새로운 버전으로 창작 스토리를 소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은 것들이 예상을 불허하는 것들이었다. 첫째 흥보와 놀보의 아버지 연생원은 아이를 갖지 못해 흥보는 길에서 주워와 길렀다. 가문이 흥하라고 흥보, 아내가 바람을 피워 뒤늦게 출산한 놀보는 귀한 자식이라 놀랍다는 의미로 놀보라 이름 지었다. 이런 출생의 비밀로 시작된 이야기는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기 시작 하였다. 흥보가 형, 놀보가 아우였으나 착한 흥보는 아우를 위해 계약서 작성을 통해 형과 아우를 바꾸어 생활하는 부분도 연출가의 기획이다. 둘째 강남의 제비는 오늘날 바람둥이 제비로 묘사하고 제비가 갖다 준 씨앗은 박 씨보다 찬란한 구슬 같은 씨앗이었다. 호랑이가 말을 하고, 우주인이 나타나고 흥보의 처로 등장하는 이소연의 가난타령, 제비 유태평양의 제비 노정기, 무대장치, 보리수 나무의 등장이 특이하였다. 그럼에도 무대장치의 핵심은 칼, 몽둥이, 톱의 기능을 한 부채였다. 그 씨앗이 물질적인 부를 갖다 주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안정을 갖다 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점이 오늘날 물질보다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 같았다. 셋째 창극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통상 전래 판소리와 같이 권선징악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노래와 춤을 삽입하여도 관객들에게 친근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극 전체를 흐르는 비움의 철학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가난하더라도 바른 생활을 하는 흥보가 원래 형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스토리다. 마지막으로 창극 흥보씨가 재미있는 창작극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흥보와 놀보 역을 맡은 두 주인공의 뛰어난 연기, 예측을 불허하는 극본 과 연출, 캐릭터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해준 전 단원들, 그리고 우주의 신비스러움과 판소리의 맛을 살리면서도 젊음과 경쾌함을 선물한 음악 감독의 합작의 결과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서양음악과 춤을 차용하여 창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극이었다. 이런 훌륭한 창극단이 있는 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창극이 서양의 오페라처럼 세계화로 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흥부를 흥보로 놀부를 놀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정확한 정설은 아직 없는 것 같아 기획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2017-05-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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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오! 캐롤>
- 뮤지컬 을 보러 갈 기회가 생겼다. 제목만으로도 신나는 춤과 음악이 어우러져 경쾌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젊은 날 좋아했던 노래와 향수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아 큰 기대가 되었다. ‘오 캐롤’ 하면 크리스마스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유명한 팝가수 닐 세다카가 만든 이 곡의 이름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에서 따와 지었다고 한다. 가수였던 ‘캐롤 킹’에게 이 노래를 만들어 사랑을 고백했다는데 그녀 역시 ‘오! 닐’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재치 있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 이면의 이야기는 몰랐어도 닐 세다카가 만든 ‘오 캐롤’과 ‘유 민 에브리 씽 투 미’나 누구라도 들으면 어깨를 들썩이지 않을 수 없는 ‘원 웨이 티켓’ 등 신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마음이 설레었다. 은 작년 말부터 공연을 시작해 롱런하고 있는 작품이다. 극장을 옮겨 디큐브시티 극장에서 하는 이번 공연은 5월 7일 마지막 무대에 올려졌다. 필자는 이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래 공연을 계속한 건 그만큼 관객의 호응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출연진도 매우 화려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톱 뮤지컬 배우가 모두 등장하는 것 같다. 필자가 보러 간 날은 유명한 뮤지컬 배우 남경주씨와 김선경씨가 캐스팅되었다. 무대도 화려했지만 오랜 기간 공연한 작품이어선지 배우들의 액션이 매우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1960년대 미국 마이애미 파라다이스 리조트에서 만난 네 커플의 유쾌한 러브 스토리가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결혼식 당일 신랑이 나타나지 않에 충격을 받은 ‘마지’와 그런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가수지망생 ‘로이스’가 파라다이스 리조트를 찾아온다. 파라다이스 리조트는 한때 화려한 스타였던 ‘에스더’가 운영하는 위락시설로 오랜 시간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쇼 MC '허비‘가 가슴앓이하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곳엔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노래하는 바람둥이 ‘델’과 그의 팬이자 후원자인 ‘스텔라’도 있고 급사 일을 하는 어수룩하지만 멋진 곡을 만드는 작곡가 ‘게이브’도 있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픔을 지닌 ‘에스더’는 오랜 시간 묵묵히 그녀를 지켜온 ‘허비’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여 파라다이스 리조트를 떠나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한다. 리조트는 가수 ‘델’과 그의 후원자인 ‘스텔라’가 맡아 경영하게 되고 파혼을 맞았던 ‘마지’는 용서를 빌며 찾아온 ‘레오나르도’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다. 친구를 위로하려고 왔던 ‘루이스’는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가 ‘게이브’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여 연인 사이가 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네 커플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좌충우돌 즐거운 뮤지컬이다. 한정된 무대에 여러 장치를 바꿔가며 공간 활용을 다양하고 멋지게 한 연출이 돋보였고 이제까지 보았던 뮤지컬의 음악 팀이 무대 아래에 배치되었던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무대 위쪽에 차려진 점이 독특했는데 리조트의 클럽 장면이 자주 나와 연주자들이 무대 위쪽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아주 신나고 멋진 음악은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8인조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1960년대의 의상과 분장, 무대를 통해 시대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세련되게 보여준 을 보면서 마치 배우와 한 무대에 있는 듯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며 흥겨운 분위기에 흠뻑 빠졌다. 젊은 날 매우 즐겨 불렀던 ‘원 웨이 티켓’을 들으며 향수에도 젖어봤다. 뮤지컬이 끝났는데도 흥얼거리고 있는 필자를 보며 웃음도 났고 기분도 좋았다. 우리 관객을 위해 화려하고 흥겨운 무대를 보여준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 2017-05-16 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