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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역할이든 하나의 삶, 같은 무게 지녀
- 캐릭터를 만나 위태로우면서도 설레는 낭만을 느끼고, 한 인물의 인생을 곱씹는 고독한 과정을 차곡차곡 걸어간다. 나이 들수록 깊어지는 감정과 걷는 길에 대한 신뢰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딛도록 인도한다. 연기가 곧 삶인 배우 예수정(67)의 이야기다. “릴케 이야기라면 언제든 하고 싶어요.”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그가 말했다. 배우 예수정은 독일의 시인 릴케가 좋아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고,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에 매료되어 연극을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그와의 이번 인터뷰는 릴케와 함께 떠나는 여행 같았다. 여행하듯 쉼이 되는 연극 예수정은 2000년대 들어 ‘도둑들’, ‘부산행’, ‘신과함께: 죄와 벌’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와 ‘비밀의 숲’, ‘원더우먼’ 등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그가 연기를 시작한 건 연극을 하고 싶어서였다. 1979년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이라는 연극으로 데뷔했다. 이어 ‘과부들’, ‘밤으로의 긴 여로’, ‘화전가’ 등 많은 연극 무대에 올랐고, 히서연극상, 한국여성연극인상 연기상, 이해랑연극상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쓸었다. 연극을 시작한 이유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의 계몽 공간’이라는 말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연극이란 언제나 스스로 계몽되고 관객을 계몽시키는 매개체다. 그는 매 순간, 매 작품마다 자신부터 계몽된다고 했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연기자라는 직업이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관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제게 계몽은 알람이에요. 알람을 듣고 깨어서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죠. 사회 속에 있는 나를 살펴보는 거예요. 사회의 어떤 부조리함에 대해 깃발을 들고 나서란 의미는 아니에요. 하지만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생각하라는 거죠. 이마에 등불 하나 켜고 내 안과 밖을 비추며 보는 거예요. 브레이트는 그렇게 관객의 따귀를 때리며 연극임에도 현실을 생각하도록 이질감을 주죠. 실생활을 체에 쳐서 걸러내면 굵은 입자들이 위에 남잖아요. 연극은 그렇게 입자들이 딱 보이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좋아하죠. 극을 통해 나부터 계몽되고, 그렇게 설레고, 그런 설렘을 극장을 찾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은 거예요.” 그에게 연극은 쉼이자 기쁨이다. 매일 같은 장면을 연습하지만 언제나 예측불허의 상황이 벌어지고 자신을 거기에 내던진다. 그 과정이 마치 여행 같단다. “연극은 매일 같은 장면을 연습하잖아요. 2주간 하는 연극이어도 이전에 석 달씩 연습을 했어요. 매일 똑같은 상황이지만, 매번 달라요. 마치 우리 삶처럼요. 아침에 눈 뜰 때마다 하늘색이 다르고 심장 두근거림이 다른 것처럼, 일부러 다르게 연습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연극 무대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고, 44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결이 다른 공간에서 연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연기자나 배우라고 인식하기보다 그저 공연이라는 장르를 즐겼다.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 작업을 하며 배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고. “관객석이 안방 극장, 시네마 극장, 인터넷 극장으로 바뀐 거죠.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현장감은 작업을 하는 당시에만 느껴요. 그리고 완성된 작품이 공개될 때 관객과 연결되는 것이죠. 연극하고는 조금 달라요. 그럴 때는 배우라는 걸 느끼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배우라는 건 거의 잊고 살아요.(웃음)” 철학과 고독을 곱씹다 릴케는 실존주의를 예언하며 현대문학의 문을 연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에게 시는 삶 그 자체였다. 예수정 역시 그렇다. 그에게 연기란 삶 그 자체다. 44년이라는 연기 인생에서 주인공을 맡고 싶다는 갈증은 없었는지 묻자, 그는 “어떤 역할이든 하나의 인생이기 때문에 무게감도 같다”고 답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각 캐릭터가 가진 서사에 집중하고 그의 철학을 곱씹는다. 연극에서 주인공은 작품의 기승전결이라는 파도를 여유 있게 타야 한다. 조연은 주인공의 그림자로 서사에 맞는 뒷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는 캐릭터의 희로애락이라는 파도를 타며 수영한다. 특히 낭만을 느꼈던 작품이 있냐고 묻자,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연극에서 맡았던 어머니 역 ‘메리’에게서 낭만을 느꼈단다. “낭만은 위태로운 설렘 같아요. 느닷없이 계산하지 않고 나를 다 내어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나를 다 준다는 건 위태롭죠. 그러면서도 설레는 것이 낭만 아닐까요?” ‘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가 직접 제작하고 좋아하는 후배들과 함께 올린 무대다. 제작비가 부족해 집에 있는 가구들을 가져와 무대를 꾸며야 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할 때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공연을 끝까지 마치고 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분의 삶을 산다’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작품이나 캐릭터가 가진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60대 후반에 접어든 요즘은 작품이나 역할의 철학을 고르는 기준이 과거와 달라졌는지 물었다. 인간 예수정으로 역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 자체로서 조금 더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젊을 때는 악한 역이 궁금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 인물의 타당성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맡았던 장 회장 역이 딱 그랬어요. 그 사람은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 나의 목표를 향해 가장 확실하게 걸어가는 게 내 인생이고, 그 외의 것들은 쳐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목표를 위한 수단을 쓴 거지 비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둘러대지 않고 솔직한 거죠.” 어떤 한 인물의 인생의 서사를 생각하며 연기한다는 점에서 배우는 탐구하는 직업이다. 특히 작품이나 캐릭터의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였으니, 맡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은 오롯이 혼자 지나가야 하는 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누구에게나 고독한 순간이 있어요. 처음 고독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서럽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겠죠. 그런데 그 불안함을 살짝 걷어내면 나에게 굉장히 좋은 시간이 와요. 고독은 타인,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 자리가 없을 때 느껴지는 것이에요. 그때가 바로 나와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자연을 찾게 된다.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더욱 밀착시키게 된다. 자연과 자연 속의 내가 하나 되었을 때 단단해진다. 그는 릴케의 말을 인용했다. “‘나무 사이를 거쳐 수많은 나라를 지나온 바람, 아침, 밤, 이런 자연들은 우리가 끼어들 수 있도록 허용한다.’ 고독하다고 물리치려하거나 도망가려하지 않아도 돼요. 릴케의 말처럼 자연은 우리가 끼어들 수 있게 하니까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뜻이죠. 그의 표현대로, 이 시간을 거치면 우리는 ‘총명’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부했다. 혹시 이 차가운 겨울에 고독을 느낀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고, 막연한 불안감은 꼭 없어진다고. 나이 듦과 죽음 또한 인생이기에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온 연륜은 첫 주연을 맡아 2020년 개봉한 영화 ‘69세’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2020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서 맡은 역은 69세 ‘효정’.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노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편견에 맞닥뜨리는 역할이다. “수치심은 무슨, 감히 어디다 손을 대. 자존심이 상한 거죠. 나이가 드는 것과 감정이 무뎌지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감정이 깊어지죠. 겉으로 보기에는 무덤덤해 보일 수 있지만 무뎌지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감정에 속지 않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연륜이 있기 때문에 감정을 풍선처럼 불기도 하고 바람을 빼기도 하면서 운용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릴케는 자신의 묘비에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라고 적었다. 그는 죽음까지 포함한 삶 자체를 긍정했다. 또한 누구에게나 고독은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정 역시 고독과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정이라는 삶이 하나의 극이라면, 67년 동안 매일 무대에 오른 셈이다. 그는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 있을까? “살아 있다는 건 죽음이 언제나 따라다닌다는 거죠. 환한 빛으로 가득 찬 신비롭고 예쁜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죽음 자체, 죽음 직전은 물론 두렵겠죠. 우리가 대학에 가면 얼마나 신이 날지 상상하면서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치러야 할 수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잖아요.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죠. 저라고 죽음을 어떻게 피해가겠어요? 하지만 내 몸에서 영이 떠나서 가는 곳을 생각하면 위안이 되죠.” 나의 좌표를 들여다보며 그에게서는 여전히 연기에 대한 기쁨이 느껴졌다.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었다. 또한 단단하게 나아갈 그만의 심지가 있으면서도, 세상에 흔들리지 않을 여유가 있었다. 그라고 상처받은 적이 없었을까. 릴케의 시를 사유해서일까. 역시 사람이기에 상처받지만, 아파하면서도 어떻게든 한 발을 내딛게 된다고 했다. 내가 걷는 길에 대한 어떤 신뢰가 있는 것처럼. 한 작품을 마치고 나서 성장해 있는 자신을 보며 거창하지는 않아도 어찌됐든 걸어가고 있다고 다독인다. 그는 이렇게 계속 걸을 수 있다면 배우라는 일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특별하게 무엇을 노력한다기보다 이제는 하나의 습관처럼 됐어요.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놓치는 것은 없나’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하죠. 지금 나의 좌표가 어디쯤인가, 걸어가는 길이 너무 헤매는 길은 아닌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이 시대를 내가 어느 정도 범위로 수용하고 거부하며 가고 있나 생각해요.” 2022년의 끝자락이자, 60대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는 그다. 이 무렵 삶에 자극을 주는 단어가 있냐고 묻자 ‘청허’(聽許)라는 답이 돌아왔다. 잘 듣고 허락한다는 뜻이다. 역시 릴케의 문장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의 말을 곱씹어보자. 잘 듣고 나를 인내하며 허락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언젠가 신에게 청허를 빈 것은 ‘하나의 혼을 묵과해 줄 신의 인내’뿐이었다.” - 릴케 ‘말테의 수기’
- 2022-12-01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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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작가 노경식, 언제나 인생은 ‘젊은 연극제’
-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
- 2017-09-2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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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배우 예수정의 두근거리는 삶
- 화장기 없는 얼굴. 보송보송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 한 떨기 수선화처럼 여리여리한 배우 예수정(芮秀貞·60). 수줍은 소녀 같았던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소녀가 아닌 소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석유통을 지니고 있다며 야무지게 쥐는 두 주먹. 연극을 이야기할 때 빛나는 눈동자. ‘5월은 역시 어린이달’이라며 개구지게 웃음 짓는 모습까지. 건강보조식품이 아니라 연극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그녀. 그래서일까? 무대 위에서 더 건강하게 빛나는 배우 예수정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79년 연극 으로 데뷔, 그야말로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온 예수정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내면 연기로 보는 이의 심장까지 쿵쿵거리게 만드는 그녀가 요즘 가장 설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실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설레는 게 줄어서인지, 자연이 주는 설렘이 커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명(黎明), 길을 나설 때 찬란한 햇빛, 이렇게 꽃이 핀다든지 나뭇가지가 새순 내느라고 그러는 것을 봐도 설레고요.” 조금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예수정 하면 ‘배우’라는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는데, 작품 속 역할이 주는 설렘은 없는지 궁금했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설레는 것보다는 어떤 작품을 대할 때 설레는 마음이 커요. 내 심장을 가장 뛰게 했던 작품은 2012년과 작년에 했던 이에요.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죠. ‘구조가 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가?’, ‘우리는 해방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한다.’ 등의 메시지는 평생 머릿속에만 있거든요. 실제로 내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늘 삶의 과제처럼 남아 있는 거죠. 근데 작품에서는 액팅(acting)이 되어 있고 난 액팅 아웃(acting out) 하잖아요. 그런 작품을 만나면 피가 뜨거워지죠.”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펼쳐낸다는 기분일까? 그녀는 그보다도 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했다. “펼쳐볼 수 있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그대로 행위하니까, 그때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것을 느껴요. 평상시 제 삶은 고즈넉해서 뭔가 역동치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만나면 굉장히 행동적으로 변하죠. 실제 삶 자체보다도 더 큰 의지를 갖고 한 발을 딱 내딛는 거예요. 언젠가 나도 내 삶에서 그 한 발을 분명히 내디딜 것을 희망하지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그 한 발을 내딛거든요. 사고가 현현화되고, 나의 이상이 현상화되는 순간인 거죠. 그래서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의 삶이 어렵지만, 실제 삶은 굉장히 생생하고 풍부해지죠. 우리 딸도 연극공부를 해서 지금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물론 고생할 게 눈에 선하죠.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있어요. 연극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이 풍부해질 것이란 거죠. 그래서 딸에게도 ‘훌륭한 길 택했다’고 얘기해줬어요.” 내겐 참 고마운 직업 ‘배우’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한다’기보다는 한 인간이 거대한 사고를 이뤄내는 과정에 연기가 양질의 영양분을 더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무척 고마워요. 내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길에 현재 내 직업이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온전히 만족하고 행복하죠. 직업과 내 인생은 서로 보탬이 돼요. 작품을 통해서 나 개인 예수정보다 더 나은 정신을 들여다보고, 그 정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삶이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죠. 사실 작품이 끝나면 배우는 다시 누추해지거든요. 그것을 인지하면서 덜 누추해지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고, 그 노력한 만큼이 분명히 작품에 입혀진다고 봐요. 그런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인생을 사는 폭도 넓어지죠.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최고의 직업이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우라는 직업이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숙명을 직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순간 역시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교를 (고려대) 독문학과를 나왔는데, 그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됐어요.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계몽의 공간이다’라는 말을 알고서는 ‘아, 내 평생 여기(극장)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라고 강하게 느꼈죠. 그 이후로 연극반에 들어갔고 엄마(배우 故 정애란) 몰래 연기를 시작했어요. 내가 고생할까 봐 연기하는 걸 반대했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했지만, 저 나름의 신념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배우라는 것이 굉장히 소망이 가득한 일이라는 것 말예요.”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살아 숨 쉬는 ‘열정’ 처음 배우를 꿈꿨던 그때의 열정이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연기 인생 37년, 그때 가슴을 울렸던 그 결심이 현재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생각을 남 앞에서 이야기할 만큼 내 삶 자체가 계몽적이거나 혁명적이지는 못했어요. 때문에 입으로 말할 순 없지만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속에서 없어지지는 않죠.” 그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이 있는데 나름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분명할 것 같았다. 그런 기자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내공’이나 ‘연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끄럽기만 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까지는 없고요. 소신이라면, 내 사고가 계속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는 한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나도 모르죠. 어느 순간 나 스스로 느낄 때 내 사고가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빨리 떠나야죠. 무대나 필름에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때는 무슨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때문에 질질 붙들고 있지 말고 떠나야죠. 떠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걸어나가야겠지만.(웃음)” 그녀의 말처럼 정년이 없는 배우로 살아가다 보면 쌓여가는 경력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담을 설렘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작품이 나에게 왔을 때 내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그 특성을 얼마만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겉으로 찌글찌글한 모습만이 나이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 역시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큼(60년)을 살아왔다면 중간에 실수도 있었겠지만, 단 1초라도 은총을 받아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나갔다면 그 흔적들이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여태 먹은 끼니만큼의 밥값은 해야지 될 텐데, 그게 어떻게 묻어져 나올까? 나도 궁금해요.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없어요. 어떤 역할이든 좋아요. 거기에 내 끼니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궁금하고 설레거든요.” 어떤 역할이든 좋다고 말한 그녀. 요즘 떠오르는 중년의 로맨스, 특히 젊은 남자배우와 중년 여배우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도 적지 않다. 유독 멜로물과는 거리가 먼 배우 예수정. 혹시 그녀도 그런 로맨스를 꿈꿔본 적은 없을까? “저는 뭐랄까. 사람이 참 건조해서. 아마 제가 만에 하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리고 그 역할이 제 피를 끓게 한다면 조금 또 다른 시각을 볼 것 같아요. 인생의 경험이 많아진 만큼 역으로 젊었을 때 청춘의 삶 속에 있었던 보석 같은 정서가 흐려졌을 수가 있죠. 어떤 젊은이를 만났을 때 남성이라서 끌리는 로맨스가 아니라, 그 젊은이를 통해서 다시 내 안에 생성되는 조금은 잊고 지냈던 그런 것들이 소생되면서 꽃처럼 피어나는 그런 거라 할까? 아, 소통하는 것. 그 노인 안에도 있는 젊음의 생기, 그 외부의 매개체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이 아닌 실제 그녀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남달랐다. 아니, 오히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그게 아마 동지의식이 있어서인가 봐요. 같은 작품을 하다 보면 동료애로 만나게 되죠. 제자들이 스승의 날 이야기를 꺼내면 ‘야야, 친구의 날은 없니? 하긴 에브리데이 친구의 날이니 친구의 날은 없나 보다.’고 말하기도 해요. 저는 아마 ‘공연’이라는 분명한 매개체가 있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무대 앞에서는 다 같은 배우니까요.” 조금 전 이야기와는 다른 면모였다. 자신을 건조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친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왜 자신을 건조하다고 생각할까? “옛날에 어떤 분이 날 표현하기를 ‘습기 없는 나무’ 같대요. 어? 이 사람 나를 참 잘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이 좀 촉촉한 느낌이 나야 로맨틱하고 그런데, 그걸 아마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사는지 몰라요. 스스로 습관들인 자신의 삶이 건조한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말하다 보니 그게 나만의 (실수하지 않으려는) 방어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연극’을 먹어 건강하고, ‘연기’를 해서 행복한 그녀 그녀는 배우로 살아가며, 연극을 하는 것이 곧 삶의 행복이자 건강의 비결이라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건강한 에너지가 샘솟는 법. 그녀가 하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역할이요? 다 해봤어요. 대학 때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던 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한 여성이 굉장히 육체적으로는 쇠퇴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젊었을 때 순수성을 잃고 거기다 마약까지 하게 되죠. 그 여인은 자기가 본의 아니게 영혼, 정신, 육체가 다 망가진 삶 속에서도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게도 그 역할을 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요.” 예수정의 데뷔작 의 연출을 맡았던 한태숙 감독은 당시 ‘예수정은 속에 불덩이가 있는 여자’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 불덩이는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늘 내 속에 있으니까요. 없어지지 않아요. 넘칠 듯한 석유통을 품고 있거든요. 불은 언제나 붙어요. 오히려 그게 내 인생의 커다란 함정이랄까?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나를 건조하게 만드는지도 몰라요. 삶 속에서 그게 확 타버리고 난 다음에는 어떠한 고통으로 다시 그 열량을 채워가야겠죠. 배우는 숙명적으로 ‘고통은 성숙의 미로’라는 말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한 송이 꽃을 피워내야 해요. 그 고통을 지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땐 ‘아, 이 고통이 결국 내 삶을 꽃을 피우는 대미지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곤 하죠. 또 한 가지, 나는 연극을 먹고 건강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연극이 날 건강하게 하고, 내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죠. 누구든 매 순간 충실하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저는 연기가 생활이니까, 그걸 날마다 충만히 하는 가운데 늘 무언가가 채워지는 거죠. 그게 제겐 힘이 되고 행복인 셈이에요.” 예수정(芮秀貞)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 1980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대학원 문학석사, 1984년 독일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연극학석사, 2004년 제5회 김동훈연극상, 2005년 제26회 서울 연극제 여자 연기상, 제10회 히서 연극인상, 제41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6년 제1회 한국 여자 연극인상 등 수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19그리고 80’, ‘고곤의 선물’, ‘벚꽃 동산’, ‘허난설헌’, ‘바다와 양산’, ‘그린 벤치’, ‘손님’, ‘늙은 부부 이야기’ 등 주연.
- 2015-05-07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