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관람객을 더 끌어들일 수 있을까? 이는 미술관 운영자들의 공통 관심사다. 정성껏 성찬을 차렸으나 풍미를 즐겨줄 객이 드물다? 이건 참 난처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머리를 쥐어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해야 한다. 다양한 맥락을 살펴 개발한 매력적인 콘셉트로 미술관의 흡입력을 키워야 하는데, 구하우스(Koo House)는 특별한 대안을 찾아냈다. 여느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흥미로운 게 이 미술관에 있다.
책 안 읽고 그림 감상 안 하는 스마트한 무뇌 사회. 이렇게 사이버 세상의 풍속을 야박하게 깎아내리는 관점이 흔하다. 이를 무모한 견해라 할 수 있으랴. 그러나 감성과 감각의 충전 기회를 갖지 못해 목말라하는 이들이 많다. 미술 작품은 어렵다는, 심지어 괴롭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쉽고 편한 미술관을 찾지 못해 불만인 이들도 많을 것이다. 구하우스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을 표방하며 2016년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냇가에 있다. 냇물 저 건너로는 시퍼런 산야가 넘실거린다. 자연에 슬쩍 한 자락 걸친 미술관이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은 사실 모든 미술관이 추구하는 이상적 방식이다. 편리와 안락감을 좋아하는 고객의 니즈를 모를 바보가 어디 있겠나. 그러나 다분히 정형화된 관습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구하우스는 흔한 틀을 깼다. 미술관을 아예 ‘집’처럼 구성했으니까. 건물부터 그다지 튀는 것 없이 평범한 편이다. 설계자는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건축가 조민석 씨. 그는 개성과 품격을 겸비한 구하우스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기발하거나 묘한 미감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 건축은 아니다.
전시실의 구색도 색다르다. 휑한 화이트 큐브 일색에서 벗어나 가정집 분위기를 애써 돋우었다. 전시실에 붙은 이름도 대담하다. 리빙룸, 다이닝룸, 라이브러리, 베드룸, 패밀리룸 등으로 명명했으니 말이다. 이름만 집처럼 달고 있는 게 아니다. 전시장의 꾸밈새 역시 이름에 걸맞은 내용물로 채웠다. 한마디로 내 집 안을 술렁술렁 편하게 돌아다니는 기분으로 작품 감상의 용무를 볼 수 있는 미술관이다. 곳곳에 놓인 의자나 소파는 대부분 작가들의 창작품이지만 편하게 앉아 쉴 수 있다. 괜히 사람 기죽이는 근엄한 미술관과 딴판이니 흥미롭다. 그렇다면 전시 작품의 질도 가정적이라서 소박할까? 아니다. 별 감흥 없는 범작들이 내걸린 전시장처럼 섭섭한 게 없는데, 이 미술관의 작품들은 흔히 격조가 넘친다. 최현진 학예실장의 얘기는 이렇다.
“집처럼 편한 분위기와 자연스러운 전시 방식을 도모했다. 관람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턱 낮은 미술관! 이게 우리의 콘셉트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에는 다들 놀란다. 의외로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많아서다.”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이 흔하다
그림을 볼까. 1층 전시장의 절반쯤 되는 공간에서 현재 특별한 기획전이 펼쳐지고 있다. 구하우스의 12회 기획전 ‘데미안 허스트-새로운 종교’전이다.(11월 21일까지) 데미안 허스트는 1991년 첫 개인전에서 상어의 시체를 유리관에 담은 기괴한 작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작가다. 현재 허스트의 작품 가격은 피카소의 작품 값을 뺨칠 기세로 맹위를 떨친다. 구하우스의 이번 전시회에서는 의약품을 소재로 한 그의 연작을 만날 수 있다. 의학이 종교의 아성을 딛고 ‘새로운 종교’로 기능하는 추세를 은유한 작품들이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거대한 해열진통제엔 ‘성체’(聖體)라는 제목을 붙였다. 미사 전례에 쓰이는 면병(麪餠)을 연상시키는 이 발칙한(?) 조각은 현대 의약품이 예수의 피와 살에 육박하는 성물임을 암시한다. 의약에의 과도한 의존을 풍자한 반어법일 수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의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기획한 전시회다.
구하우스는 설립자인 구정순 관장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삼은 미술관이다.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수십 년간 모은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400여 점으로 구하우스를 세웠다. 데미안 허스트의 기획전에 나온 작품들 외의 모든 작품이 그의 소장품이다. 재미있는 건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이 흔하다는 점이다. 주로 현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컬렉션이기도 하다. 찻잔이나 인테리어 장식물 등 소소한 공예품도 양념으로 곳곳에 진열해 디테일을 완결했다. 볼 것 많고 즐길 것 풍성한 미술관이니, 무심코 왔다가 팔짝 뛸 듯이 반색하는 관람객들이 많다는 학예실장의 얘기가 그럴싸하다.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시장은 라이브러리라고 한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옆에 있는 이곳엔 프랑스의 조각가 자비에 베이앙의 작품 ‘모빌’이 있다. 근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라이브러리의 구색이 완연해 ‘집 같은 미술관’을 표방한 구하우스의 지향을 직감할 수 있는 이 전시장의 안짝엔 침대와 화장실을 설치한 소공간이 있다. 이 역시 유명 작가의 작품이다.
1층 벽면 하나를 통째로 채우다시피 한 대형 작품 ‘Pictures at an Exhibition’은 이 시대 최고 작가의 하나로 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사진 드로잉 작품이다. 미술관의 작품을 볼 때 작가 이름표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는 건 옹졸한 짓일 수 있다. 작가의 이름을 몰라도 감흥의 파장은 일렁거리기 때문이다. 내 취향과 안목으로 고른 작품이면 걸작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가가 괜히 대가이랴. 영혼까지 뒤흔드는 그 뭔가를 그리고서야 대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하우스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를 만난 즐거움이 크다.
2층 전시장에도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피카소, 앤디 워홀, 백남준, 줄리안 오피, 막스 에른스트 등의 작품을 보느라 숨이 차다. 눈을 들이박고 봐야 할 작품들이다. 능란한 화가의 솜씨는 마법을 닮아 손바닥만 한 그림에도 백 가지 세계를 담는다. 좁쌀 한 알에 만화경을 후벼 넣는다. 그걸 주마간산 격으로 볼 수밖에 없는 짧은 안목에 속이 켕긴다.
전시장의 가지런한 동선은 고즈넉한 정원으로 이어진다. 막판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설치한 별관에 닿는다. 터렐은 ‘빛의 예술가’다.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만든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화가다. 빛을 버무린 몽환적인 동영상으로 관객을 명상에 빠트린다. 터렐의 작품을 막바지에 보게 한 건 기똥찬 한 수다. 관람객에게 자신의 내면을 그림처럼 바라보게 하는 명상의 시간을 제공하니까. 전시장 그림들을 포식한 뒤 나오는 디저트가 이렇게 맛있다.
자유로를 벗어나 파주출판단지로 들어서자 드문 정경이 펼쳐진다. 저마다 개성과 미감으로 돋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늘어선 건물들로 풍경이 생동한다. 너절한 난개발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계획도시다. 내로라하는 건축가 여럿이 숙의하고 궁구해 만들었다. 홀로 있어도 매력으로 튈 건물이 군락을 이루어 볼거리로 족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출판단지 북쪽 끝자락에 있다.
주차장에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으로 이어지는 동선엔 작은 갈대밭이 있다. 하릴없이 누렇게 시든 채 살랑거리는 갈대들. 애잔한 서정을 자아낸다. 겨울 찬 바람 속에서 바라보이는 헐벗은 식물엔 한 번 더 눈이 간다. 괜스레 들머리에 갈대밭 소로를 조성했으랴. 몇 걸음 안 되는 길이지만 갈대들의 고요한 율동에 마음을 조율해보라는 뜻이겠다.
갈대밭을 돌아 너른 잔디 정원으로 들어선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전면부가 와락 시선을 압도한다. 유별한 건물이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형상이다. 수직으로 곧추선 건물의 삼면과 달리 곡면과 곡선의 연쇄로 이루어진 전면부 벽면의 이색이라니. 다각도로 휜 벽면이 두루마리 풀려나가듯 흐른다. 매끄러운 유영을 한다.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이지만 둔탁하지 않고 유려하니 모순적인 웅자(雄姿)다. 곡면들의 부드러운 파동에선 선율이 느껴지고 언어가 흘러나올 것만 같으니 건축으로 구현한 음악이자 시라 할까보다. 무감각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하여금 이토록 고매한 내면을 열어보이게 하다니. 경이로운 건축미라 할 수밖에 없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매년 서너 차례씩 미술 기획전을 펼친다. 언제 방문하더라도 그림을 즐길 수 있다. 그림만이 다는 아니다. “건축물 자체가 예술품이다!” 이렇게, 뮤지엄 측이 표방한다. 관람객의 상당수는 건축 자체의 디자인을 구경할 목적으로 찾아든다지. 국내외 건축가들, 건축학도들의 발길도 이어진다는 거고. 디자인과 미학은 물론 공법을 들여다보기 위해.
문외한의 눈에도 인상적인 건 건축 공법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건물의 서편 동체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건물을 떠받친 하부 기둥이 전혀 없는 구조여서다. 이른바 캔틸레버(cantilever, 일명 외팔보) 공법을 적용했다. 이는 건축 일반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기술이다. 그러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경우에선 상황이 다르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내리누르는 어마어마한 하중을 캔틸레버로 감당하기가 실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실제로 사고가 날 뻔한 일도 있었다. 캔틸레버에 타설한 콘크리트가 한쪽으로 밀리는 위험 상황이 발생했던 거다. 그러나 극복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이 건축물에 동원된 기술력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1400평 부지에 지은 연면적 11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이루어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알바루 시자(′Alvaro Siza)다.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로 흔히 ‘모더니즘의 마지막 거장’이라 부른다. 대표작으로 포르투 세할베스 현대 미술관, 아베이루대학교 도서관, 리스본 엑스포 파빌리온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비롯해, 안양 알바루 시자 홀, 아모레퍼시픽 연구원을 설계한 바 있다.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1988년 미스 반 데어로에 유럽 현대 건축상, 2001년 울프 예술상, 2002년, 2012년 두 번에 걸쳐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알바루 시자를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라 치지만 그는 사실 초기 모더니즘 건축의 경향에 대해선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복잡다단한 생활환경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 과거 양식과의 과도한 단절로 마땅히 존중하고 반영해야 할 전통성을 무시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합리성만큼은 적극 수용했으며, 건축 패턴의 전통성과 지역성을 외면하지 않는 건축적 고려와 추구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다졌다.
곡면과 평면, 곡선과 직선의 드라마틱한 조합과 변주가 야기하는 감흥은 이 뮤지엄 건물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의 핵이다. 단순하되 정밀하며, 웅장하되 고요하다. 이 점에서 이 뮤지엄은 시자의 시그니처 스타일에 값한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건축에서 가장 눈여겨보고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료성과 단순함이다.” 그는 건축에 덕지덕지 군살을 붙이지 않았다. 군살빼기에 차라리 능하다. 이는 창의 수효를 최소화해 지은 뮤지엄의 외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자가 말한 ‘명료성’과 ‘단순함’은 모든 진리의 요체이기도 하다. 아무리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도 참뜻을 알고 나면 뜻밖에도 간명하지 않던가. 시자의 건축이 그저 하나의 시설물에 불과한 게 아니라 치열한 지적 탐색의 결과물일 수 있는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알바루 시자 설계, ‘명료성’과 ‘단순함’ 추구
건물 곡면의 흐름에 편승해 천천히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뮤지엄 출입구 앞이다. 문을 열고 로비로 접어드는데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기보다 후루룩 빨려 들어온 기분이 든다. 홀리듯 외관에 한참 취했던 바람에 벌어진 심리적 오작동? 뮤지엄을 찾은 재미가 이렇게 쏠쏠하다.
1층 공간은 로비와 카페테리아, 아트숍 등이 있는 휴게 공간과 미술 전시실로 양분돼 있다. 물론 둘을 나누는 벽은 없다. 개방적인 성향의 공간이다. 입구서부터 안통까지 층고가 점차 높아지는 구성으로 홀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북서향으로 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광으로 공간의 반쯤은 밝으나 반쯤은 침침하다. 이곳에 인공조명은 거의 없다. 이게 외부의 자연을 끌어다 내부에 배포하는 것으로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알바루 시자의 방식이다.
한쪽 벽엔 높고 기다란 책장이 있다. 책들이 빼곡하다. 관람자들은 자유롭게 뽑아 읽을 수도 있고 할인가 구매도 가능하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만든 책들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등 외국문학 번역서로 다수의 밀리언셀러를 배출한 출판사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가 지은 미술관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그는 일찍부터 알바루 시자에게 꽂혔다고 한다. 언젠가는 시자의 설계를 받은 건축물을 짓고 싶다는 숙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포르투갈이나 영국에 날아가 시자의 건축물 답사에도 열을 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자와 손잡고 뮤지엄을 건립했다. “디자인이 정말 맘에 들어. 미메시스는 내 작품 가운데 최고야!” 가슴 깊이 품었던 숙원을 푼 홍지웅에게 시자가 건넨 말이 그랬다.
뮤지엄 건립엔 건축가 김준성(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도 한몫 단단히 했다. 건축평론가들은 김준성을 ‘감성 건축의 대가’라 부른다지. 그는 건축 견습생 시절에 시자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배운 적이 있다. 대가를 사사했으니 무엇으로, 왜,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하는지 옹골차게 얻은 게 많았을 것이다. 시자와의 이런 인연으로 김준성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건축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시자를 말하는 글을 볼까.
“사실 시자의 건축적 행보는 논리적으로 혹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정리하기 어렵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투명하리만치 선명한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그의 작업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켜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작게는 재료에서 크게는 관계적인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단단하게.” (2020년 5월 20일자, 서울신문 기사 중)
전시실을 볼까. 1층의 절반과 2~3층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세 개의 전시실은 물론 계단 벽면들도 건물 외부 벽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칠갑을 했다. 내·외부에 통째 순백색 입히기. 이건 시자의 관습이다. 그가 추구하는 ‘명료성’과 ‘단순함’을 구현하는 데엔 백색이 적격이라 봐서일까? 그러나 순전한 화이트 큐브에 현기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관람자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전시실들에서는 면과 선이 극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곡면과 곡선이, 평면과 직선이, 예각과 둔각이 상호 교접하거나 교차하며, 또는 대비를 이루며 공간에 생기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화이트 큐브의 지루한 단조로움을 타파한다. 이 뮤지엄을 예술적 건축물로 보는 눈이 많은 이유는 선과 면의 다채로운 조합에서 야기되는 심미감 때문일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조명의 구사 방식이다. 전시실마다 인공조명을 자제하고 태양이 무상으로 보내주는 빛을 끌어다 쓴다. 3층 전시실은 숫제 인공조명을 전혀 도입하지 않았다. 슬래브 지붕을 뻥 뚫어 설치한 천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천장에 매달아놓은 이중 천장의 가장자리를 통해 공간에 흩어질 뿐이다. 이렇게 살포된 빛은 그 농담(濃淡)의 묘를 붓으로 삼아 화이트 큐브에 수묵을 그린다. 시시각각 광량과 광도가 변하는 게 빛이다. 따라서 전시실의 조도(照度)도 시시각각 변하며 덩달아 분위기도 미묘하게 변전한다. “비 내려 빛이 너무 약하거나 어두운 저녁에는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죠?” 뮤지엄 공사가 진행 중일 때 건축가 김준성이 스승에게 물었다. 알바루 시자의 답은 이랬다. “안 보여주면 돼!”
시자의 건축은 건축 자재들만의 집적이 아닌 거다. 자연의 빛이 가세하고서야 건축이 완결되고, 그 쓰임새와 미감이 완성된다고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시자는 빛을 다루는 달인? 빛의 탐식가? 그건 그렇고, 아무튼 자연광이 어슴푸레 아롱지는 3층 공간은 미술 전시실이지만 뭔가 원초적인 동혈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상상력을 북돋아 아득한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3개의 전시실에서는 기획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30~40대 작가들이 참여했다. 기량도 개성도 저마다 발군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엔 세상에서 그림처럼 재미있는 게 없지 싶다. 오늘도 그런 감흥을 느끼며 깜냥껏 즐겼다. 그러나 뇌리에 남은 건 미술작품이 아니라 건축 자체다.
바다가 발밑으로 떨어지는 언덕 위에서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예술작품들을 만나며 그 기발함에 놀란다. 깜짝 놀랄 만큼 신기해하다가, 숨겨진 위트에 웃고, 예술성에 감탄하며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모른다. 몇 시간의 짧다면 짧은 관람시간이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나긴 예술기행을 나선 듯하다. 현대미술품과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들이 삭막한 현실에 웃음을 찍는다.
가을 바다가 보고파서 간 강릉
그곳에서 만난 아트 뮤지엄. 횡재했다는 기분이 든다. 바다를 마주하며 예술작품과 함께 힐링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강릉 하슬라아트월드. 하슬라(何瑟羅)란 말이 외국어인가 싶었는데 순수한 우리말, 그것도 고구려 때 강릉을 부르던 이름이다. 하슬라 또는 아슬라(阿瑟羅)라고도 불리었는데 ‘큰 바다’,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슬라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할 만한 곳이 어디일까?
이름을 내건 만큼 자부심 가득한 복합예술공간, 하슬라아트월드에 답이 있다. 푸르디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절벽 위에 우뚝 선, 외관이 유리로 된 사각형 건물이 하슬라아트월드다. 그 안에 뮤지엄 호텔, 현대미술관, 피노키오&마리오네트 박물관, 20’s 카페가 있고 외부에는 야외 조각공원과 바다카페가 있다. 바다를 품고 산허리를 안은 복합예술공간에서 촘촘하게 예술이라는 보물찾기에 나선다.
지금은 복합예술공간으로 자리 잡았지만 첫 시작은 야외 조각공원
실내 전시장에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지만 아껴두고 호흡부터 가다듬을 겸 야외로 나가 조각품들을 만났다. 통나무와 빛이 만드는 최옥영의 ‘우주’라는 작품은 쏟아지는 햇살 그림자 위에 의자를 놓아둠으로써 우주 안의 휴식을 부른다. 오른쪽의 바다카페를 지나 언덕을 따라 솔숲 사이로 난 덱 산책길을 걷다 보면 풍요와 바다를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하슬라아트월드 건물과 바다가 어우러진 일품 전망을 볼 수 있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는 바다와 하늘은 드넓은 스케치북이 되어준다. 그 위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예술성이 결합된 작품들을 곳곳을 채운다.
입구에는 붉게 단풍이 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것은 무엇일까? 해시계다. 양철통을 사선으로 절단한 것 같은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나온다. 터널 너머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 같은 남자와 상하 대칭의 자전거, 하늘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 등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산책로 따라 이어지듯 나타난다.
자연의 숨결을 음미한 후 현대미술관에 들어서면
하슬라아트월드의 공간 디자인이 강릉의 바다와 햇살이 비쳐 든 창가 안에서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비지 갤러리이자 현대미술관 1관은 색색의 타일과 곡선미가 흐르는 작품들이 골동품, 커피 소품, 도자기, 난로 등 옛것들과 혼재한다. 2관으로 가기 전 화려한 실과 소금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에 멈춰 선다. 2019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Personal Structures’에 참가한 최정윤 작가는 소금으로 만든 청동 검에 우주의 무한한 색을 담은 실을 휘감아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나만의 보물을 찾아낸다. 평소에 좋아하던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살포시 미소 지었고, 에밀리아노 로렌조(Emiliano Lorenzo)의 빙하 위 북금 곰들을 볼 때는 집에 있는 폴라 베어 인형을 떠올렸다.
키네틱 아트 작품과 설치미술, 수학과 예술이 만나는 프랙털 아트를 관람하며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하러 들어갔던 고래 뱃속을 연상시키는 터널설치미술을 통과한다. 현대미술관 3관을 지나면 피노키오 박물관이 나온다. 바다가 도화지처럼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전 세계 예술가의 피노키오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마리오네트와 함께 동화와 현대미술의 만남이 줄 끝에서 섬세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하슬라아트월드는 보물찾기를 하듯 한 곳 한 곳 시선을 가벼이 둘 수 없다. 예술품에 집중하다가 휴식하고 싶다면 뮤지엄 안의 카페나 바다 전망이 펼쳐지는 야외 카페에서 가을 햇살을 음미하면서 가을을 즐겨도 좋다.
주소 : 강원 강릉시 강동면 율곡로 1441
관람시간 : 09:00~18:00 (매주 수요일 휴관)
관람요금 : 성인 1만2000원, 어린이 1만1000원
주변 맛집 : 바다마을횟집(강릉시 강동면 정동등명길 23)
등명해변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섭해장국과 물회로 부담스럽지 않은 점심을 먹기에 좋다. 섭은 강원도 사투리로 시장에서 흔히 보는 홍합의 열 배는 됨직한 자연산 홍합을 말한다. 섭해장국은 커다란 홍합 살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어 끓인 해장국으로 시원한 맛보다는 듬직한 맛이 난다. 회무침을 곁들이면 궁합이 잘 맞는다.
지하철 사당역 근처에 있는 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는 요즘 ‘모두를 위한 세계’ 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제목과 달리 내용은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기획전시회다. 그런데 소재를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사적 보편적 주제인 자유와 평등으로 풀어 각국 작가들이 여러 장르로 표현한 점에서 제목과 연결된다. 그 중 눈길을 끄는 작가가 있어 소개한다.
제주도 출신 덴마크 국적의 제인 진 카이젠의 ‘거듭되는 항거’
이름과 국적이 암시하듯 입양된 작가는 뿌리를 찾은 끝에 결국 2001년 가족과 재회하고 할아버지의 회고록에서 제주 4·3사건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8채널 영상설치 작품으로 무당, 희생자 유가족, 목격자, 추상적 시를 읊는 배우 등이 증언한다.
4·3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주제의 범위는 의외로 넓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다음에 일어난 정치 권력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가가 ‘2019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맡게 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윌리엄 켄트리지의 ‘더욱 달콤하게 춤을’(2015)
작가는 1955년생으로 정치학, 아프리카학, 연극 디자인, 오페라 연출을 공부하여 다양하고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한 국가에서 사는 백인으로 관람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림자 극, 목탄 드로잉, 발레, 거리 연극, 음악, 영화를 조합한 영상 작품이다. 작가는 북쪽에서 남수단으로 피난 가는 르완다 난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사람들의 이동, 발칸반도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의 행렬,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대규모 인구 이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장례행렬, 난민의 행진을 연상케 하는 풍경에서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춤추고 노래하며 무언가를 애도한다. 4개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아프리카 브라스 밴드의 연주곡에는 그들의 슬픔이 진하게 녹아 있다. 그림자극같이 표현한 것은 모든 실체를 기본적인 요소로 설명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로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의 특별한 의도다. 물론 제목은 역설적으로 붙인 것일 터다.
이 전시회는 단지 3·1운동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등 역사의 수직적 연관성과 동시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평적 관련성, 그리고 인권 문제 등 다양한 보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모두를 위한 세계’라는 이상은 가능할까?
‘모두’라는 말은 까다롭다. 개개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모두’는 언어적 독단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처럼 소외되고 그늘진 역사와 삶을 찾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모두’는 정당화되고 균형을 이룬다. 작가들의 치열한 정신이 잘 구현된 전시로 보인다.
바야흐로 봄이다. 산으로 들로 봄꽃 나들이도 좋지만, 풍성하게 마련된 전시도 즐길 겸 갤러리 나들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올 한 해 눈여겨봐야 할 5가지 미술전시와 더불어 연간 일정을 함께 정리해봤다.
◇ 빔 델보예 개인전
장소 갤러리현대 일정 2월 27일~4월 8일
신개념주의(neo-conceptual) 예술작품들로 주목받는 벨기에 작가 빔 델보예의 국내 첫 전시다. 돼지 몸에 문신을 새긴 작품들을 선보이며 ‘돼지 문신’ 작가로도 불리는 그는 드로잉, 조각, 사진 등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며 독특한 소재로 구현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문양의 미학적 요소를 사물에 응용한 작품들과 일반적인 형태와 개념의 맥락을 비트는 작품 30여 점을 보여준다. 고딕 양식으로 레이저 커팅한 스틸, 손으로 조각한 타이어, 살라미 햄으로 구성한 대리석 문양의 바닥 사진 등 작가만의 유머러스한 작품세계와 전통적 요소가 맞물리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빔 델보예 (Wim Delvoye, 1965~)
박제된 돼지의 몸에 명품 브랜드의 로고를 그려 넣으며 경악과 흥미로움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세계로 유명해진 빔 델보예는 스위스 팅겔리 미술관(2017),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무담(2016),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2016), 파리 루브르 박물관(2012), 로댕 박물관(2012), 베니스 구겐하임 컬렉션(2009), 리옹 현대 미술관(2003), 파리 퐁피두 센터(2000)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베니스비엔날레, 시드니비엔날레, 상해비엔날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독창적인 예술관을 펼치고 있다.
◇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장소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일정 5월 6일까지
한국 아방가르드 작가계의 선두주자이자 1970년대 대표 여성 작가인 정강자의 회고전이다. 정 작가는 개인전을 위해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지난해 7월 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하며 이번 전시는 그의 유고전이자 최초의 회고전이 됐다. 올해 1월 31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월 25일까지)과 천안(5월 6일까지)에서 동시에 개최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을 기리고 그의 50여 년 화업을 미술사적, 사회적으로 균형 있게 재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작가의 최근작과 더불어 아카이브 자료를 배치해 자신의 삶을 여성상과 자연물, 기하학적 형태에 투영한 작품들을 아울러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정강자 (鄭江子, 1942~2017)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후 ‘키스미’(1967)처럼 파격적인 조형작업을 비롯해 ‘투명풍선과 누드’·‘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1970)과 같은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1960~70년대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도전이 응집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신전(新展)’의 일원으로 한국 미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여러 경계와 틀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으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작업에 대한 선정적인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 니키 드 생팔 개인전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일정 6월 30일~9월 25일
프랑스 여류 작가 니키 드 생팔의 작품 12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특별 전시다. 프랑스 파리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공공미술로 잘 알려진 그의 대담성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입체조형물 및 회화, 판화 등으로 구성된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 그의 후기 입체작품들을 폭넓게 전시할 계획이다.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여성지 ‘보그’와 ‘엘르’, 사진 주간지 ‘라이프’의 사진 모델로도 등장했을 만큼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니키 드 생팔은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슈팅 페인팅’(1961) 등 그의 작품은 페미니즘 성향이 두드러지며 여성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 많은 편이다. 그가 만들어낸 뚱뚱한 여성 조각인 ‘니나’ 시리즈를 비롯해 여성의 몸을 과장해 표현한 작품에는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분노와 고발 의식이 담겨 있다.
◇ 윤석남 개인전
장소 학고재갤러리 일정 9월 예정
2013년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I’m Not a Pine Tree)’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윤석남의 개인전이다. 홍콩 아트바젤(세계적인 미술품 아트페어) VIP 책자 전면에 소개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큐레이터들의 극찬을 받은 설치미술 ‘핑크룸’(1998)이 갤러리 한 층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 기법을 통해 제작한 그의 신작 발표가 예고돼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윤석남 (尹錫男, 1939~)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1919)의 극작가 겸 영화감독인 윤백남의 셋째 딸로 태어나 해방 이전까지 만주에서 살았다. 1954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6남매를 홀로 키우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는 줄곧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고 있다. 40대에 늦깎이 화가로 데뷔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1995), ‘부엌’(1996), ‘허난설헌’(2005) 등 꾸준히 작품을 내놓으며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 마르셀 뒤샹 전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일정 2018년 12월~2019년 4월 예정
국내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의 전시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주요 작품 및 아카이브는 물론, 마르셀 뒤샹을 소재로 한 사진, 드로잉,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를 비롯한 당대 작가들의 관련 작품까지 총 110여 점을 소개한다. 특히 변기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뒤샹의 대표작 ‘샘’(1917)을 이번 국내 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도쿄국립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순회전이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 화가 자크 비용(Jacques Villon, 1875~1963)과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Raymond Duchamp-Villon, 1876~1918)의 동생으로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입체파의 균열된 형태, 사진과 영화의 스톱 모션 등 자연의 시공간에 관한 지배적 관념을 뒤엎는 아방가르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2’(1912)는 당시 예술평론가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켰을 만큼 독특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여성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 ‘로즈 세라비’(1921),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1923) 등 파격적인 예술세계를 보였으며,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
◇ 2018 상반기 전시 일정
3월 '이정진: 에코-바람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월 8일~7월 1일
'예술가 (없는) 초상'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3월 20일~5월 20일
김용익 개인전 ‘Endless Drawing’ 국제갤러리 3월 20일~4월 22일
'한국서예사특별전: 명재 윤증'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3월 29일~5월 20일
4월 이반 나바로 개인전 'THE MOON IN THE WATER’ 갤러리현대 4월 19일~5월 27일
5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5월 3일~10월 14일
'강요배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5~6월 예정
6월 육근병 개인전 ‘생존은 역사다’(가제) 아트선재센터 6월 15일~8월 5일
◇ 2018 하반기 전시 일정
7월 '박이소: 기록과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7~12월 예정
'조선민화걸작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7월 5일~8월 26일
'이창수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7월 예정
8월 '프란시스 알리스 개인전' 아트선재센터 8월 31일~11월 4일
9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201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9월 6일~11월 18일
11월 아키 사사모토 ‘항복점(Yield Point)’ 아트선재센터 11월 23일~2019년 1월 13일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 궁중회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1월~2019년 2월 예정
12월 '한국현대미술대가: 한묵'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2월 4일~2019년 3월 10일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곡선 건물 한 채가 눈에 띈다. 연둣빛 잔디밭과 파란 하늘 사이, 마치 흰 종이가 펄럭이듯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다양한 전시품은 물론 건축물 그 자체로도 미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이곳, 바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특유의 매력에 이끌려 햇살이 스미듯 자연스레 발걸음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다양한 규모의 전시 공간이 한 덩어리에 담긴 설계가 돋보인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2002·2012)에 빛나는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루 시자(Alvaro Siza)가 설계해 건축물 그 자체로도 예술 작품이라 평가받는 곳이다. 일반 관람객 외에도 국내외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이 방문하는 등 미술관 그 이상의 가치를 선사하는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흰색에 가까운 연회색 빛 벽면으로 둘러싸인 건물에는 그 흔한 간판이나 전시 현수막도 걸려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 도도함에 ‘대체 정체가 뭐야?’ 하는 호기심이 든다. 벽면의 단조로움은 곡선이 생동감을 선사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단순한 벽면 덕분에 곡선의 날렵함이 더욱 눈에 띈다. 얼핏 두 채로 보였던 건물은 입구에 다다라서야 잘록한 허리를 드러냈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건물을 훑어보고 입구에 들어섰다.
자연광이 선사하는 예술의 향연
전시공간으로 가기 전, 1층 로비는 널찍한 카페로 꾸며졌다. 실내 카페와 테라스에서는 커피, 생과일주스, 허브티 등을 즐길 수 있다. 카페에서 슬쩍 미술관 내부를 둘러보면 조금은 침침하다는 생각이 든다. ‘빛으로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인공조명을 두지 않아 자연광으로만 명암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작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자연광에 의존하다 보니 개관은 오전 10시로 동일하지만, 폐관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봄·가을에는 오후 6시, 여름에는 오후 7시, 겨울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새하얀 벽면이다. 전시 작품도 널찍하게 간격을 두고 걸어 여백이 많은 편이다. 오히려 그런 점들 덕분에 작품 하나에 오랜 시간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흰 벽면의 단조로움에 곡선 구조가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중간중간 보이는 통유리 자연조명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와 온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언제 가느냐에 따라 그림자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면서 흰 여백에 무늬를 수놓는다.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즐기는 예술
1층 카페와 한 공간에 있는 ‘북앤아트숍(book &artshop)’에서는 미메시스(‘열린책들’이 설립한 예술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을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단순히 비평가들이 쓴 담론보다는 예술가들이 삶의 혼이 담긴 자서전, 창작노트, 일기, 예술 에세이 등을 위주로 출간하고 있다. 미메시스에서는 오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더라도 책의 속살은 실로 꿰매는 전통 제작 방식을 고수한다. 이러한 고집은 디자인 문구를 만드는 데도 발휘된다. 정교한 디자인에 높은 품질의 디자인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내놓는다. 출판과 건축, 예술의 만남을 아우르는 문화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지향하며 다양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프로그램 일정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및 신청 가능하다.
△ 이용 정보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파주출판도시)
매주 월요일, 화요일 전시 휴관
카페·북앤아트숍 매일 운영
◇ Exhibition
1) 태양의 화가 반 고흐: 빛, 색채 그리고 영혼 전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apM CUEX홀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새롭게 연출한 전시다. 고흐의 수작들을 디지털 영상 기술과 접목한 최첨단 전시 기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체험하도록 했다. 인상파와의 교류, 대자연, 고흐의 방, 동양의 색채, 초상, 동생 테오와의 편지 등 8개의 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와치아웃 시스템을 이용한 멀티채널과 1만 픽셀 이상의 초대형 화면의 이머시브(Immersive) 시네마 등을 마련했다.
2)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 전(CHOI SUNU’S FAVORITE)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미술학자 최순우(1916~1984)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전시로, 그가 생전에 아끼고 좋아했던 작품들을 글과 함께 소개한다. 평생 한국의 미를 탐색하고 박물관을 발전시키는 데 헌신한 최순우의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다. 1층 통일신라실에서는 돌함과 뼈단지 등 일제강점기에 약탈됐다가 돌아온 문화재를, 2층 서화관에서는 김홍도서첩, 달마도 등을, 3층 조각·공예관에는 반가사유상, 달항아리 등 15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3) 코디최 개인전 CODY CHOI Color Painting: Frustration is Beautiful
일정 10월 28일~11월 20일 장소 PKM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40)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 작가인 코디최(Cody Choi)의 개인전이 10월 28일부터 11월 30일까지 PKM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11년 이후 5년 만에 개최되는 개인전으로 회화와 설치 작업 약 20 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 준비를 위한 기금마련 전시라는 점에서 뜻 깊은 자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작가이자 문화이론가로서 활동하는 코디최는 현대사회의 문화정체성과 권력관계에 관해 탐구한다. 현시대 다양한 문화가 빚어내는 충돌과 간극에서 태어난 제3의 문화 혹은 혼종문화, 동시대 사회현상에 주목하며 회화·조각·설치 등의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LA 아트센터 칼리지를 졸업한 코디최는 LA 현대미술관, 타이페이 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등 국내외의 주요전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독일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와 프랑스 마르세유 현대미술관 등 유럽에서 순회 회고전을 진행하고 있다. 20세기 문화 지형도 (2010), 동시대 문화 지형도(2010) 등 현대문화에 관한 전문비평서를 출간했다.
◇ Book
1) 초혼 (고은 저 · 창비)
고은 시인의 3년 만의 신작 시집이다. ‘때’와 ‘곳’에 얽매이지 않는 ‘자가지무(自歌自舞)’ 정신으로 우주와 소통하는 대자유의 세계를 펼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아우르는 우주적 상상력과 예리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2) 보고 시픈 당신에게 (김광자 외 86명 공저 · 한빛비즈)
전국 한글학교에서 늦깎이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 어르신들의 시와 산문을 엮었다. 글자를 익히면서 느끼는 기쁨, 가족에 대한 사랑, 삶의 애환 등이 돋보인다. 손글씨의 느낌을 살려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 저시력자를 위해 큰 글자로 다시 정리했다.
◇ Movie
1) 기적을 증명한 두 남자 이야기
개봉 11월 3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맷 브라운 출연 데브 파텔, 제레미 아이언스, 토비 존스 등
인도 빈민가의 한 수학 천재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영국 수학자의 특별한 우정을 그렸다. 숫자가 유일한 친구였던 순수한 수학 천재 ‘라마누잔’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해 그의 열정적인 천재성과 삶의 고뇌 등을 담았다. 라마누잔 역을 맡은 배우 데브 파텔이 해외 유수 언론에서 “실존 인물 라마누잔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받는 등 작품성 못지않게 그의 연기력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개봉 11월 10일 장르 드라마
감독 나가이 아키라 출연 사토 타케루, 미야자키 아오이, 하마다 가쿠 등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하루를 더 사는 대신, 세상에서 무언가를 한 가지씩 없애야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전 세계적으로 130만부 이상 판매량을 올린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제작했다. ‘세상에서 전화가 사라진다면,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요?’라는 포스터 속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신선한 스토리 전개로 잊고 지낸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인생의 행복을 선사한다.
◇ Stage
1) 연극 재공연, 이웃사촌들의 수상한 진실게임
일정 10월 27일~11월 20일 장소 대학로 선돌극장
연출 이동선 출연 이황의, 김수보, 리우진, 곽지숙 등
지난 3월 초연돼 뜨겁게 주목받았던 극단 몽씨어터의 (작가 석지윤, 연출 이동선)가 11월 20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재공연 된다. 연극 는 치밀한 구성과 전개, 팽팽한 긴장감과 반전, 그 사이를 비집고 터지는 폭소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이웃 혹은 사람 간 의심이 한순간에 누구든지 싸이코패스로 몰아갈 수 있는 현대인의 각박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예작가 석지윤의 독특한 언어, 이동선 연출가의 감각적인 연출에 힘입어 씁쓸하면서도 웃음 터지는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과 마주하게 한다.
빌라의 고양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간다. 주민들은 벌어지는 상황을 진단하고 해결하고자 대책회의를 연다. 그런데 301호의 혼자 사는 남자가 수상하다. 사람들은 그가 분명 고양이를 죽인 싸이코패스가 틀림없다고 믿게 된다. 싸이코패스를 잡기 위한 평범한 이웃들의 위험하고 묘하게 웃긴 진실게임, 바로 연극이다.
2) 천재 시인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다
일정 11월 5일~1월 22일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연출 오세혁 출연 강필석, 오종혁,이상이, 정인지, 최주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던보이였던 시인 백석의 시가 뮤지컬로 재탄생한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백석과 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의 시 노랫말로 표현했다.
3) 꿈과 희망을 위해 링 위에 서다
일정 11월 1일~1월 15일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노우성 출연 신성우, 송창의, 신구, 김진태, 김지우 등
영화 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실베스터 스탤론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며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박진감 넘치는 권투시합 장면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그려내며 2014년 토니어워드와 드라마데스크어워드에서 무대디자인상을 받았다.
4) 고모와 조카의 예측 불허 동거
일정 11월 22일~12월 11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구태환 출연 하성광, 정영숙
세상을 곧 떠날 것 같다는 고모의 편지 하나에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30년 만에 고모를 찾아가는 조카의 이야기를 담았다. 배우 인생 첫 2인극 도전이라는 중견 배우 정영숙이 고모 그레이스 역을 맡아 섬세한 감정연기를 펼친다.
5)인간의 죄의식과 예술가의 고뇌
일정 11월 20일까지 장소 아트원씨어터 3관
연출 김동수 출연 남명렬, 이명호, 박지일, 김병철, 손성호 등
1995년 제26회 동인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정찬의 소설을 연극화한 작품이다. 같은 해 11월 첫 공연한 이래로 상업성이 짙은 작품들이 주목받는 공연계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통의 밀도를 담아내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경계의 떨림이 느껴지는 눈빛이 입을 열었다. 머리에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며 가벼운 질문에도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도, 맞서는 것도 이제는 ‘정신 사납다’고 표현하는 이 사람,
코디 최(최현주 崔玄周·55).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대나무 위 무림고수를 만나고 온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보다.
코디 최란 이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그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 세 가지가 생겼다. 어려운 문화이론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강의실력자. 현재 유럽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유명한 미술 작가. 마지막으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는 점이다. 문화이론을 가르치는 미술 작가. 이론과 실기를 엄연히 다른 분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그런 게 가능한 능력자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외적으로 직업이 두 가지입니다. 미술 작가 겸 문화이론가 아니면 교수.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이론 강의를 주로 하고 밖에서는 미술 작품 활동과 전시회 하면서요. 작가로 한 30년, 강의는 27년째 하고 있어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대학교(NYU)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줄곧 미술대학 교수였던 코디 최. 한국에서는 문화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언론정보대학이나 언론학부, 건축디자인학과, 공대, 국제대학 등에서 강의 요청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하다
코디 최는 미술 세계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20대 초반까지 한국인이던 코디 최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때 저는 80학번 어린 대학생이었습니다. 모든 게 불안한 시대였죠. 광주민주항쟁, 학교도 오랫동안 휴교하고요. 1학년 내내 서너 달 수업했을까요. 2학년에 올라갔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미국에 가는 것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가자마자 막노동 같은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코디 최. 그러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 다녔는데(웃음) 미국에서는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야간대학에 다녔어요. 한 학기 등록금 몇 십만 원만 내면 수업이 거의 무료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이었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 그때 조금이라도 피곤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일반교양으로 듣게 된 미술 과목이었다.
“전공과목 외에 일반교양수업 중에서 미술 과목 하나를 들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숨 좀 쉬려고요.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낭만을 좀 느끼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관심 갖고 바라봐 주는 교수들이 생겨났다. 제대로 된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을 때 코디 최를 유심히 봐 왔던 상담 교수가 미술대학을 권유했다. 한국에서 붓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미술이라니.
“미술이요?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버는 전공을 선택하고 싶다고 교수에게 말했더니 요즘 디자인 분야가 돈을 많이 번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LA 아트센터 칼리지(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국제무대가 주목하다
입학 초기 디자인을 전공한 코티 최는 점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불편했어요. 잘 안 맞고 힘들었어요. 우선 언어가 자유롭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리고 또 내 나라가 아니니까. 모르는 곳에 가 있으면 불안하잖아요. 눈치도 보게 되고요.”
그 불편함은 위장병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불안과 불편함, 한국과 미국의 음식 차이 등 여러 가지가 요인이 합쳐지면서 먹기만 하면 체했다.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던 분홍색의 현탁액 소화제 펩토비스몰을 이용해 문화 정체성의 혼동과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됐고 그 신선한 충격은 국제무대에 코디 최를 알리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90년대는 초 뉴욕에서 꽤 많이 주목받는 작가였고, 한국에도 이름을 좀 알리던 시기였어요. 한국의 국제화랑 전속 작가로 10년 동안 활동했어요. 2, 3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서 전시했습니다.”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90년대 초 NYU에서 강의 제의가 왔다. 강의에 대한 학생들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Adjunct professor’ 즉, 강의만 전문으로 하는 교수로 10년 넘게 있었다.
“2002년 이화여대에서 NYU 미술대 학과장한테 한 학기 초빙교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한국 출신이니까 가 보지 않겠냐며 권유하더군요.”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됐다. 뉴욕과 유럽을 돌며 활동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복잡해졌다. 개인사정이 생겼고, 50대를 바라보던 상황에 미국생활이 외롭고 모든 게 지루해진 시점이었다.
“2002년에 이화여대에 초빙교수로 와서 한 한기 동안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뉴욕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내가 더 늙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강의를 하며 사는 것도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한국에 들어온 코디 최는 2년 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20년여 고생했는데 또 다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미국과 한국의 대학 시스템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저도 어렵고 한국의 대학도 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문화 차이였던 거죠. 제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충돌이 한국에 오니까 다시 또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해가 돼요.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30대도 아니고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학과장이나 주임교수쯤 할 나이에 강의만 하는 교수를 하겠다고 온 거죠. 근데 이제는 괜찮아요. 마음은 자유로워졌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그 부분이 좀 억울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세상에 바랄 것도 없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온 거 같아요.”
코디 최, 유럽 회고전은 순항 중
현재 그의 작품은 유럽 각지를 돌며 ‘코디 최 컬처 컷(CODY CHOI Culture Cuts)’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작년 5월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할레(미술관)에서 시작해 프랑스 마르세유현대미술관 전시도 8월에 끝났다.
“올해 12월에는 스페인 렉토레이트 대학 미술관과 살라 모레노 빌라 전시관 두 곳에서 동시에 회고전이 있을 거예요. 내년 4월엔 독일 켐니츠 국립 미술관으로 가요. 제가 1986년부터 했던 작품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90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변신 안 한 슈퍼맨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이런 저런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타고 저 멀리에 가면 화려한 망토 두른 코디 최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이 들어서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한 3~4년 전 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이 다른 일로 한국에 왔다가 미술계에 수소문했다더군요. 최근 서구 미술 시장에 동양 작가, 특히 중국 작가의 활동이 활발한데 그런 관점에서 쭉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하던 아시아 작가 코디 최라는 사람이 있었고 재조명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고마운 마음으로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와 함께 작업하던 마이크 켈리 파운데이션의 평론가 존 워시맨과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마리드 부르졸라가 합세했습니다. 그렇게 2,3년 준비해서 유럽 순회 회고전이 기획된 것이죠.”
현재 그의 순회 회고전은 미국과 중국에서도 전시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100% 안 될 거라 믿었다
코디 최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대표 작가가 됐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대형이라는 큐레이터가 저에게 차 한 잔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만나 보니 20년 전쯤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라더군요.”
이대형씨는 ‘2017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한창 작가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대형씨가 나에게 와서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에 원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면서도 100%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 행사에 나가기엔 이완씨가 어렸고 무엇보다 한국 미술계에서 코디 최 자신에게 손들어 줄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됐다는 겁니다. 안 될 줄 알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어요.”
최근에 와서 이대형씨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작가 선정 작업을 하면서 젊은 작가와 함께할 연배 있는 작가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가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본인 생각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코디 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10명 중 6명은 말리더라는 거죠. 그럼에도 본인 의지를 믿었다는 말에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코디 최가 베니스 비엔날레 대표 작가가 됐다는 소식에 유럽 미술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원래 내년 4월로 잡혀 있던 독일의 한 미술관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딱 끝나기 일주일 전에 전시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또 다른 독일 화랑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 시작하고 한 달 후인 6월 24일 코디 최의 전시를 열겠다고 날짜까지 못을 박았다. 사실 코디 최의 작은 바람이라면 아내와 함께 평화롭고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베니스 비엔날레 덕(?)에 당분간 그 바람은 잠시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이다. 그것이 코디 최의 직업 중 큰 영역을 차지한다면 피곤하지만 즐기는 것이 순리 아닐까?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뭔가 보여주시길. 부탁해요, 코디 최!
‘펩토비스몰(소화제)’ 수만 통으로 적신 화장지를 뭉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 세계가 코디 최를 주목하게 된 대표작 중 하나다.
>>코디 최(최현주)
LA 아트센터 칼리지 학사,
1994~2004년 뉴욕대학교
Adjunct professor
(강의전문교수), 2002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前문화창조아카데미 지식융합 감독,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
2017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
저서
◇ 전시(Exhibition)
앤서니 브라운 전-행복한 미술관 (Anthony Browne Exhibition-Happy Museum)
일정 9월 2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 2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 ‘행복한 미술관’이라는 부제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6월 개막 첫 주에 1만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남녀노소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그림들과 더불어 앤서니 브라운의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행복한 도서관’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장에서 관람한 그림들을 책을 통해 다시 감상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다.
2016 광주비엔날레 ‘제8기후대(THE EIGHT CLIMATE)’
일정 9월 2일~11월 6일 장소 광주 비엔날레전시관, 아시아문화전당, 무등현대미술관 등
‘제8기후대’라는 콘셉트로 열리는 전람회인 만큼 전시 공간마다 온도, 밀도, 분위기, 기압 등 다양한 기후 환경을 연출한다. 절제된 색과 요소들로 표현한 이번 공식 포스터에는 예술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방향성, 발전, 흐름, 변화하는 움직임, 목표를 향한 전진 등을 의미하는 화살표를 통해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37개국 97팀(119명)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도서(Book)
세종의 서재(박현모 외 11명 공저ㆍ서해문집)
여주대 ‘세종시대 문헌연구팀’의 심층해제문 중에서 ‘세종시대를 잘 드러내는 문헌’과 ‘세종을 만든 책’을 선별해 담았다. ‘1부-세종시대가 만든 책’, ‘2부-세종을 만든 책’으로 크게 분류해 등 12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헌별로 전문가들의 해제와 더불어 그 책이 세종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오사카대학 쇼세키카 프로젝트ㆍ글항아리)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의심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수학, 공학, 미학, 역사학, 법학, 화학, 경제학, 정신의학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도넛의 구멍’이라는 개념에 대해 파헤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문과 탐구라는 영역을 더 흥미롭게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 영화(Movie)
평범한 50대 주부가 찾은 인생의 행복
개봉 9월 29일 장르 드라마 감독 미아 한센 러브 출연 이자벨 위페르, 로만 콜린카, 에디뜨 스콥 등
2016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프랑스 신예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신작이다. 한 가정의 아내·엄마이자, 존경받는 교사로 평범하게 살던 50대 여성이 갑작스러운 남편의 고백 이후 불안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평온했던 일상이 파괴되며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하는 주인공 역에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캐스팅돼 기대를 모았다.
폭탄 달린 경성행 열차에 탄 두 남자
개봉 9월 7일 장르 액션, 드라마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등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조선인 일본 경찰의 갈등과 우정을 그렸다. 김지운 감독은 과 에 이어 이번 영화로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김 감독과 네 번째 영화를 작업하는 배우 송강호가 조선인 일본 경찰 역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 의 주인공 공유가 의열단의 리더를 맡아 미묘한 두 남자의 관계를 연기한다.
◇ 공연(Stage)
부를수록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
일정 9월 10일~10월 30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연출 이종훈
출연 고두심, 김영옥, 이홍렬, 이종원 등
1998년 세종문화회관 초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작품으로, 1990년대 대표 악극 중 하나다. 올해는 원작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해석과 세련된 무대 연출로 50일간 공연한다. 이전보다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간의 신파형 악극을 탈피하고, 우리 춤과 노래를 보강했다.
아름다운 초상화에 가려진 욕망
일정 9월 3일~10월 29일 장소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연출 이지나
출연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홍서영 등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 소설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불멸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했던 도리안의 삶과 깨달음을 노래한다. 체코 프라하의 이국적 풍경에 몽환적인 색감이 어우러진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2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사건
일정 11월 6일까지 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유준상, 지창욱, 오만석, 오종혁 등
고(故) 김광석이 불렀던 노래와 더불어 청와대 경호관이라는 인물을 통해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전개가 돋보이는 창작 뮤지컬이다. 2013년 초연부터 참여한 배우 유준상과 지창욱을 비롯해 장유정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 신선호 안무 감독이 함께해 완성도를 높였다.
음악으로 만나는 서울
일정 9월 8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준연 출연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의 620년 역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관현악 연주회다. 북한산, 청계천 광통교 서화시장, 보신각, 전차 등 서울이 걸어 온 자취와 미래의 모습을 담은 음악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오늘의 서울, 산과 들, 강이 어우러진 옛 한양의 모습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