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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이 캄캄하다면 저 강물에게 물어라
- 강과 산과 하회마을이 맞물려 자아내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서애와 겸암의 행장을 더듬어보는 재미도 짭짤하다. 부용대 주차장에 당도한 뒤 부용대-겸암정사-옥연정사 순으로 탐승한다. 하회마을 나루터에서 도선을 타고 강을 건너 부용대에 오르는 방법도 있다. 그저 봉긋할 뿐, 야트막한 야산이다. 산길은 밋밋한 데다 펑퍼짐해 풍경이 맺힐 리 없다. 꼭대기에 오른들 뭐 볼 게 있으랴 싶었으나, 웬걸, 부용대(芙蓉臺) 산마루에 닿자 급격한 반전이다. 별안간 확 트이는 시야 가득히, 수직벼랑 저 아래로 사행(蛇行)하는 낙동강이 엄습해오는 게 아닌가. 강의 젖을 물고 들어앉은 물동이동(洞) 하회마을도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 모래밭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몽당연필처럼 작달막하게 짜부라져 코믹하다. 부용대는 강물과 하회마을을 한꺼번에 부감할 수 있는 전망대다. ‘부용’은 연꽃을 상징한다. 이곳 아찔한 벼랑 위에서 옛사람들은 하회마을을 통째 연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의 길지라고 일렀다. 긴 말이 필요 없겠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를 통해 물가의 마을 중 살기 좋은 곳으로 하회를 제일로 쳤다. 살기에 좋아 출세한 이들이 속출했나. 풍산 유 씨 씨족촌인 하회마을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형제 대(代)부터 번창해 위력을 떨쳤다. 현대에 이르러선 인파가 몰리는 관광명소로 거듭난 마을이다. 고택과 초가로 연출한 관광 재료들에 힘입어 상업이 기차게 발달했다. 그러나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땅에 납작 엎드려 포복하는 마을일 따름이다. 거뭇한 기와지붕과 누런 초가지붕이 어우러진 자못 이상적인 색감 조합으로 평화롭다. 하회마을을 에두른 솔숲과 강물은 또 얼마나 평온한가. 마을 안에선 지금 열띤 호객 경쟁이 벌어지고, 여행자들이 왁자하게 떠들어대고, 연인들은 혹간 초가집 뒤란에 숨어 숨 막힐 키스를 할지도 모르지만 높은 곳에서 보면 일체가 은자처럼 마냥 고즈넉하다. 티 없이 조화롭다. 삶이란 이렇게 멀리서 보면 모든 게 상통이자 상생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아 애잔하다. 가장 드높은 곳에 상주하는 신이나 하늘에게 우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해 슬픈 나를 자각할 때다. 부용대 서편 오솔길을 따르자니 숲이 제법 깊어진다. 솔향기 감돌아 청신하다. 아무리 작은 야산이라도 향이 있고 깊이가 있고 기품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서 멈춰 산에 산다. 청산을 건너던 나비가 들꽃에 꽂혀 갈 길을 잊듯이. 강물에 밀리는 모래알처럼 덧없는 인생, 굳이 꿍꿍이와 아귀다툼이 난무하는 비정성시(悲情城市)에 살 일이 뭐람. 그쯤의 생각이었을까. 겸암은 문득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이 야산 자락에 공부방을 두고 지냈다. 겸암정사(謙菴精舍)가 바로 그곳이다. 부용대 동쪽 산자락 아래편엔 서애 유성룡이 벼슬을 마치고 머문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다. 야산 양편에 형제가 나란히 정사를 짓고 자연 속에 은거했던 셈이다. 벼슬살이로 보낸 세월이 길었으나 둘 다 퇴계를 사사한 도학자로서도 쌓은 게 많았다. 못 말릴 산야 기질도 스승을 닮아 자연을 경전으로 읽었고, 흐르는 강물과 솔의 푸름을 바라보기를 유락(遊樂)으로 삼았다. 그래 격물치지의 혜안이 환하게 열렸을 테다. 특히나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 서애를 따를 이가 누구랴. 서애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과 권율을 임금에게 천거했다. 실로 신의 한 수였다. 지척에 살아 형제간 만남도 잦았던가보다. 심심파적으로 산꽃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일도 흔했으리라. ‘층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야산의 3부 능선쯤에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는 옛길 하나. 형제는 이 ‘층길’에서 상면하길 즐겼다고 전해진다. 옹색해서 위험한 층층 벼랑길이라 요즘은 아예 출입을 금지했다. 옥연정사는 강변의 높직한 둔덕에 있다. 고가의 관용과 운치로 아름답다. 서애는 여기에서 임진왜란의 전말을 담은 ‘징비록’을 집필했다. 전쟁의 사령탑 역할을 한 서애였으니 리얼리티로 생동하는 책이다. 그의 성품은 맑고 온유했다지. 그러나 실록엔 곱지 않은 평도 간간이 나타난다. 줏대가 약해 폐단을 당차게 간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기록했다. 만년의 서애는 “평생 부끄러운 일이 많아 한스럽다”고 탄식했다. 세상의 갈채에도 불구하고 묵은 빚을 느꼈다? 그렇더라도 그 겸허한 풍모가 오히려 출중하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설령 비바람의 광란에 수면을 찢기더라도 유유히 흐를 뿐이다. 먼지구덩이 세상이라도 아랑곳없이 나아간다. 눈앞이 캄캄한 삶이라면 저 강물에게 물을 일이다.
- 2020-12-1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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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빛 번져 천지가 붉다
- 병산서원 앞 병산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친다. 서원 답사 뒤에는 강변 산책을 즐겨볼 만하다. 인근 부용대 쪽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가 있다. 병산서원을 기점으로 하는 둘레길인 ‘선비길’도 운치 있다. 한 시간쯤 걸으면 하회마을에 닿는다. 꽃다운 시절은 저물었어도, 꽃 하나쯤 마음에 두는 맛까지 포기할 수 없다. 때로 꽃 보러 뜬금없이 길을 나선다. 해동 무렵엔 동백꽃 보러 월출산에 간다. 몸통에서 분리된 멸치 대가리처럼 이미 맹탕이 된 꿈, 그게 꽃을 본들 푸르륵 새삼 날갯짓을 하겠는가. 꽃을 봐도 꽃이 없다. 하나, 피기만 하는 게 꽃은 아니다. 목숨 있는 것들, 머잖아 다들 저문다. 그러니 저무는 꽃도 꽃이요, 저무는 인생도 인생이다. 순리를 안다는 건 내 주제를 깨달아 수긍하는 일일 게다. 야야, 저문 꽃날에 앙앙불락할 거 없다! 꽃 보러 간 내게 꽃이 하는 얘기가 대개 그렇다. 안동 병산서원에 꽃이 한창이다. 꽃빛 번져 천지가 붉다. 배롱나무들 일제히 꽃을 피워 서원의 뜰과 늙은 기둥과 잠잠한 기와지붕에까지 붉은 물이 든다. 화양연화(花樣年華), 배롱나무의 아름다운 시절이 바야흐로 절정에 달했다. 백 일쯤 계속 피는 꽃이니 절정치고는 별나게 길다. 폭죽처럼 일시에 작렬하다 일시에 지는 벚꽃은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언제 한 번 꽃 피어본 일 없는 인생은 차라리 혀를 깨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배롱나무의 개화기가 긴 건 기묘한 전략을 써서다. 꽃을 아끼는 꽃이지 않은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지 않고 차례로 개화하도록 꾀를 쓰는 게 아닌가.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연이어 올라온다. 먼저 핀 송이가 지자마자 대기해 있던 망울이 송이로 벌어져 빈자리를 채워 넣는다. 꽃들의 ‘인해전술’이다. 무릇 욕망을 아껴 쓰지 않고 욕망을 이룰 수 없다. 빠르게 가는 것은 천천히 가는 것들보다 오래갈 수 없다. 병산서원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터를 잡아 건립했다. 서원 뒤편, 서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존덕사 계단 옆에 사는 배롱나무의 수령은 400년에 가깝다. 유학자들은 배롱나무를 선비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 나무는 허물 벗는 뱀처럼 스스로 껍질을 벗는다. 그래 줄기가 미끈하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다. 유학자들은 그걸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봤다. 절집에 흔히 배롱나무가 있는 것도 비슷한 까닭에서다. 집착이라는 허물, 망상이라는 허울을 훌훌 벗은 수행승의 참모습을 걸친 것 없는 배롱나무의 형상에 견주었다. 전혀 다른 눈도 있었다. 오히려 불경하게 취급해 집 안에 심기를 꺼렸다. 배롱나무의 맨 살갗에서 발가벗은 여체를 연상했던 것이다. 나무 하나를 놓고도 사람들의 감관이 이렇게 서로 다르다. 불난 호떡집도 아닌 것을, 병산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닥거린다. 하기야 꽃놀이패가 배롱나무의 호시절을 놓칠 리 없다. 여름날의 병산서원 배롱나무꽃은 이미 파다하게 알려졌다. 꽃구경은 보너스로 치고, 서원의 고풍(古風)과 풍취에 반해 한 번 찾은 뒤로 다시 찾는 이도 많다. 한국의 서원 건축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는 평도 숱하다. 산수 간에 들어앉은 건축물이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어서다. 거저 얻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건축을 할지언정 인위의 개입을 애써 자제한 흔적이 그걸 알게 한다. 몸을 낮추고서도 한 번 더 몸을 낮추는 일, 유학자들은 그걸 본분으로 삼았다. 신독(愼獨)이라 하지. 홀로 있는 골방에서도 들여다보는 눈이 곁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 삼가길 수양의 방편으로 알았다. 그러니 집을 짓더라도 분에 넘치는 치장을 할 리가 있었겠는가? 서원이란 한마디로 학교. 서책만을 도구로 삼지 않았다. 자연을 경(經)으로 읽어 심성을 북돋우는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병산서원은 자연을 가르치는 교실이기도 했다. 만대루(晩對樓)를 보라. 자연 풍경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원 전면에 세운 누각이다. 사방으로 벽이 없으니 뭐 하나 가두지 않는다. 솔바람이 지나가고 물소리가 흘러간다. 나비가 날아들고 잠자리가 쉬어간다. 달빛이 들이치고 노을빛이 다녀간다. 사람인들 가둘까보냐. 만대루에 오르거든 마음의 감옥에서 탈주할 일이다. 내가 나를 가두지 않는 한, 나를 가둘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득달같이 알아차릴 일이다.
- 2019-08-30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