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강이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삼랑진(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이다. 어린 시절 인근 지역에서 자랐어도 별생각 없이 다녔는데 삼랑진이라는 이름에 이런 아름다운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부산 구포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 때마다 삼랑진역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행정구역상 밀양 내에 있는 읍이지만 당시는 밀양역보다 더 크고 번성했던 곳이 삼랑진이었다.
삼랑진 옛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삼랑진은 매우 화려하고 번성한 곳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일본 상선이 삼랑진 포구까지 왔다.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다 보니, 삼랑진 지역 중심엔 일본인들 관사가 많이 지어져 현재에도 제법 남아 있다. 문화재보존정책 때문에 개·보수를 하지 못해 지금은 아주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언젠가는 이 지역의 근대화 문물들은 보수·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삼랑진장에 가자!
삼랑진장은 4일과 9일에 들어선다. 삼랑진이 쇠퇴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작아지고 사람 수도 줄었다. 최근엔 마트까지 생기면서 시골 장날의 분위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삼랑진장은 인근의 김해시 생림면 사람들과 삼랑진 지역의 연세 많으신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어릴 적부터 발길이 닿은 곳이라 마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해 장을 이용한단다. 어르신들은 마트의 물건보다 찬거리 등을 푼돈으로 흥정하며 살 수 있는 삼랑진장을 좋아한다.
가는 날이 장날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삼랑진에는 강바람과 산바람이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도시처럼 바람을 막아줄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차에서 내려 삼랑진 장터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날의 분위기를 느껴봤다. 큰 카메라를 들고 외지인이 이리저리 다니니, 상인들 모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오방떡을 구우시는 할머니가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왔능교?”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반갑고 기뻐서 “네~”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더 붙였다. 잡지에 넣을 사진 촬영을 한다고 설명하며 할머니 모습을 찍었다. “찍지 마!” 하면서도 포즈를 잘 잡아주셨다.
추운 날 꽁꽁 얼은 생선을 파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찍으려 하니 할머니가 욕을 하신다. 그래도 상부상조하는 의미에서 4마리에 1만 원 하는 고등어를 사니까, 덤으로 작은 놈 한 마리를 끼워주신다. 고등어를 팔아주니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장터에서 파는 생선들은 냉장 시설이 없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냉동 생선을 녹여 손질해 판다. 이 추운 날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손질을 하신다. “할머니 장갑 좀 끼시죠?” 하니 “장갑 끼면 잘 안 된다” 하신다. 조용한 시골 장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있다면 음악 테이프와 CD를 판매하는 트럭이다. 하루 종일 상인들과 손님들에게 최신 트로트를 들려준다. 시대가 변하면서 트로트 노래들도 USB용으로 나온다. 뭔가 하고 둘러보는 사람은 있지만 구입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보니, 물건 파는 사람도 차 안에 들어가 있다. 날씨도 춥고 사람들도 많이 안 다니니 일찌감치 포기한 모양이다.
장터 사람들
삼랑진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젊은 사람에게는 좀 생소한 것들이다. 주로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뿌리 식품이나 보신용 식품이 많다. 우엉과 말린 연근, 둥굴레, 돼지감자 같은 뿌리 식품이 많다. 장날의 자리에는 권리금과 자릿세도 있다 한다. 보통 가게 앞에서 장사를 할 경우엔 상권의 성향과 위치에 따라 자릿세 차이가 있다. 삼랑진장에서 20년 동안 장사를 해온 한 분은 자릿세를 내기 싫어 장터 가장 끝 쪽에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판다. 추운 날이라 구멍 난 깡통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요기를 하기 위해 고구마 몇 개를 넣어 굽고 있다. 그분에게 연근이랑 우엉, 돼지감자를 1만 원어치씩 구입하고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날씨도 춥고 심심했는데 20분 동안 말동무도 되어주셨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오늘 펼친 물건들 재고가 많이 쌓였는지 상인들은 팔지 못한 물건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면 물물교환을 한다. 불과 몇십 분 전에 1만2000원에 팔던 김천촌닭을 5000원에 사가라고 한다. 삼랑진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진다. 하루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잔영(殘影)첨럼 남아 있다.
경남 양산시쯤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오늘의 목적지인 창원시 수산대교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는데 밀양시를 지나면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라이딩 중에 한 대원의 자전거 체인이 끊어졌는데 선두를 이끌던 필자는 배낭에 넣어 두었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또 한 명의 대원을 뒤에 달고 밀양시 삼랑진읍까지 달리고 말았다. 미안했다. 필자가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허비한 시간 때문에 예정된 3박 4일 안에 모든 일정을 소화할 수 없게 됐다.
결국 밀양시 근처에서 라이딩을 끝내고 궁리 끝에 장비를 차에 싣고 첫날밤에 묵었던 산수정으로 철수했다. 첫날 산수정을 떠나면서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더 들르겠노라고 인사했으나 불과 이틀 만에 다시 그 집을 찾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걸걸한 여주인도 흔한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을 터인데 실제 약속이 지켜지자 반가운 마음에서인지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정성을 다해 상차림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 도착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술과 노래방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특별히 기분이 좋으셨던 여사장님의 깜짝 등장으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고 노랫소리는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 3시까지 낙동강 강가에 울려 퍼졌다.
광란의 밤이 지나고 산새들이 지절대는 아침이 밝았다. 날이 밝자 어둠 속에 잠겼던 강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영풍교(경북 문경시-예천군) 밑 출렁이는 강물 위에도 고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4일 중에 이날이 가장 날씨가 쾌청하면서 미세먼지도 별로 없어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서울을 향해 2~3시간 라이딩하기로 하고 차에서 자전거를 다시 내렸다. 그동안 뻐근했던 다리도 풀리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없던 힘도 불끈 솟았다. 강둑을 지나고 농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드디어 상주시를 벗어나 문경새재길로 접어들었다.
문경세재길에 접어든 뒤에도 힘찬 라이딩을 계속했고, 이윽고 새재길 옆 주평마을로 들어섰다. 시계를 보니 당시 시각은 낮 12시 30분. 이날은 마침 어버이날이어서 늦어도 저녁은 서울에 올라가 가족들과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가는 건 무리라 여겨 여기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문경새재를 눈앞에 두고 강가 옆 마을 입구 팔각정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으로 3박 4일간의 피로를 털어내면서 모든 일정을 끝냈다.
필자는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 했다. 자전거 라이딩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전거 라이딩에 대한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낙동강 700리 길 자전거 라이딩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필자의 건강과 비록 이제는 주인을 닮아 낡아가고 있지만 이 길 위에서 한 번도 말썽을 부리지 않고 보필해 주었던 필자의 애마, 자전거에도 한없는 애정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 또한 어려웠던 시간을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보냈던 SD21 동료들에게도 감사드리고 모두에게 사랑의 하트를 뿅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