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으로부터 응모를 권유받고서 많이 망설였다. 나의 삶이 브라보를 외칠 만큼 멋지거나 이룩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 공부하는 모임의 구호를 좋아하는데 ‘Per Aspera Ad Astra(고통을 넘어서 별을 향하여)’다. 나 스스로 죽을 만큼 고통의 시간을 넘어 지금의 시간에 이르렀으므로 이 시대를 열심히 살아가는 중노년 세대와 그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충분히 뜻이 있을 것 같아 써보기로 하였다.
2021년 소설 ‘효옥’ 출간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했을 정도로 어려운 시간을 겪었을 때 그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했는데, 그때 오래된 숙제가 생각이 났다.
3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좋은 친구와 영월의 청령포를 가본 적이 있었다. 는개가 자욱한 날, 거룻배를 타고 깊고 유장한 강을 건너 청령포에 들어갔다. 오백 년 전에 스러져간 어린 임금과 젊은 충신들의 피눈물이 는개처럼 내리는 듯하였다. 낙락장송은 말없이 서 있는데 오백 년 전 선조들의 한이 는개처럼 서린 듯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 건너 감자전에 동동주를 파는 천막집에서 통음하였다. 언젠가 이곳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어린 단종과 그를 지키려고 목숨을 던진 사육신, 그리고 수양의 얘기를 써보리라 다짐했다.
과연 조카뿐만 아니라 수많은 충신들을 척살하고 권력을 차지한 세력들에게 어떤 역사적 당위성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바쁘고 힘든 공직 생활 가운데 글쓰기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일선 기관장 2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본청과 청와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같은 어려운 자리에서 일하면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기에도 벅찼다. 이제 그 숙제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자료를 모으고 연필로 한 줄씩 한 줄씩 써나가기 시작하였다. 편지 한 장 쓰기도 싫어하는데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어릴 적 글짓기로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기억 외에는 따로 소설을 쓴 적도 없고, 역사학자도 아니므로 당연히 힘이 들었지만, 자료를 수집하고 여러 책들과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이긴 자들 편에서 쓰인 기록들을 넘어서서 야사와 전래된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보고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려고 애썼다. 소설이지만 엄정한 역사적 사실에 터 잡아 쓰려니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실록을 읽으면서 단 한 줄의 기록에서 성삼문의 딸 ‘효옥’이라는 실존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 초기 최고 명문가의 어린 딸이 노비로 전락하는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파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재위 15개월 만에 의문사한 수양의 아들 예종의 이야기도 찾을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역사에 대한 평설 형식의 글과 ‘효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동시에 써나갔다.
중간중간 쉬기도 하고 포기하려고 손을 놓기도 하면서 거의 6년의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나 포기하려 하다가도 연필로 써놓은 수백 장의 글이 아까워서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을 많이 내는 문학 전문 출판사는 역사 평설보다는 당연히 소설 ‘효옥’을 출판하자고 했다. 유명한 출판사에서 처음 소설을 내는 작가의 책을 출판해주는 것도 고마운데 계약금을 주기에, 나중에 책이 많이 팔려서 인세가 나오면 같이 받기로 하고 사양했다. 출판사의 손익분기점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 원고가 넘어가고도 출판까지 무려 2년여가 걸렸다. 책 500쪽 분량의 원고를 300쪽 분량 내외로 줄여달라는 요구에 다투기도 하고 출판을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다. 분량을 줄여가는 그 시간이 끝도 없는 수정과 퇴고의 시간이 되었다.
출판사 대표가 “두꺼운 벽돌 책은 서점 서가에 꽂히지도 않는다”고 독려하였지만 내가 쓴 글을 통째로 줄이는 과정은 나의 손발을 자르는 것처럼 아까웠다. 결과적으로는 그 과정이 책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시간이 되었다.
2021년 책이 출판되고 한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교보문고에 별도 소설 매대가 만들어졌다. 유명 작가들도 단독 매대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출판사의 격려에 힘든 시간을 잊을 수 있었다. 손녀들이 소설을 들고 단독 매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은 오래도록 자랑스러웠다.
2024년에는 ‘제1회 이윤기문학상’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한글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로 존경했던 분의 문학상은 과분하다고 진심 사양했지만 스스로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여러 미디어와 인터뷰가 있었다. 그중에 서울대 국문과 출신이자 현직 시인인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잠깐 책을 잡았다가 새벽까지 다 읽었다. 놀랍고 대단하다. 무엇보다 소설 ‘효옥’의 성취는 문장력이다. 필력이 준엄하고 단어가 적확하다. 언젠가부터 고위직 공무원이 은퇴 후 소설을 쓰는 일이 유행처럼 번져왔는데 ‘효옥’은 그 편견을 부순다. 소일거리로 써본 소설이 아님이 느껴진다”고 큰 지면을 할애하여 격려해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매일경제 2024. 9. 2.).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두 번이나 통독했던 수고로움도 감미로운 기억이 되었다.
이 기자는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을 인터뷰하여 기자상을 받은 사람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고 여러 분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몇 군데서 얘기는 있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미디어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평생 공직에 종사했던 사람의 첫 소설을 읽어주시고 박수 쳐주시는 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좋은 소설을 더 써보라는 권유나 후속작을 기대한다는 격려를 많이 받지만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대로 “생전에 단 한 권의 책만 내더라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저만의 신념을 지키는 가운데서 새로운 작품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2023년 자전거 국토 종주 그랜드슬램
소설 ‘효옥’이 출간되고 여러 일간지에 소개되고 SBS와 월간지 ‘신동아’ 등 매체와 인터뷰하는 등 바쁘게 지내면서 건강이 전과 다르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 아침마다 산책을 하다 보니 조금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 즈음 산책길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같이 산책하던 후배가 자기가 타던 중고 자전거를 타보라고 주었다. 동네 가까운 자전거길에서 조금씩 타면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자전거로 다치는 사고도 많고 워낙 늦은 나이에 시작한다고 하니 집사람이나 주변의 걱정과 만류가 많았다. 그러나 자전거 라이딩이 주는 신세계 같은 자유로움도 너무 좋았고 차츰 체력이 붙는 느낌까지 들면서 조금씩 더 멀리 라이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서 주로 자전거길에서만 타면서도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체력이 자신이 없어 고심하다가 전기자전거를 장만하였다. PAS 방식이라 힘들 때 특히 오르막에서 전기의 도움을 받는다. 차차 재미를 느낄 때 전국 자전거길을 7번이나 종주한 지인 한 분과 17년 정도 자전거를 탄 고수와 함께 7~8명의 라이딩 모임을 만들었다. 낯선 길, 먼 곳으로 나서기에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자전거 고수의 “일반 자전거로 충분히 탈 수 있다”는 격려에 큰마음 먹고 자전거를 새로 장만한 뒤에는 전기자전거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물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드롭바의 로드 자전거가 아닌 일자형 하이브리드 자전거다. 멀리 가지 않을 때는 혼자서 분당, 과천, 청계산 여의천길을 많이 탄다. 특히 여의천길은 서울 시내답지 않게 개울 물가를 따라 청계산 입구까지 호젓하게 달릴 수 있다.
자전거 동호인들은 전국 자전거길을 이명박 대통령의 최고 치적으로 손꼽는다. 우리나라 자전거길은 각 자치단체의 노력이 보태어져서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2000km가 넘는 전국 자전거길에는 120여 개의 인증센터가 있어서 한두 개 도장을 찍다 보니 전국 도장 깨기 의욕이 불타올랐다. 보통 먼 곳으로 가서 1박 2일 또는 2박 3일 라이딩을 하면서도 체력을 감안하여 하루 70~80km 이상은 타지 않았다.
춘천에서 시작한 북한강 자전거길은 그야말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이다. 경북 영덕에서 시작해서 7번 국도를 따라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동해안 라이딩은 낙타 등처럼 오르막 내리막이 많아서 힘든 도전이었다. 한두 군데서는 내려서 끌고 언덕을 넘었다. 그러나 바다는 물감을 뿌린 듯 새파랗고 2월 말 즈음의 먼 산에는 하얀 눈이 녹지 않아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웠다.
제주도 환상 자전거길은 말 그대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환상(Fantastic과 Ring Shaped의 중의적 표현일 것이다)의 길이었다. 용두암을 출발하여 4박 5일간 천천히 돌았는데, 특히 제주 동쪽 해안 풍경은 외국 어느 곳 못지않았다. 경치 좋은 곳에는 꼭 좋은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커피 한잔씩 즐기며 느긋한 라이딩을 마쳤다.
금강 자전거길, 오천 자전거길, 영산강 자전거길까지 모두 바다나 강을 끼고 있어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교훈과 함께 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라이딩 자체가 힐링이었다.
강변의 갈대숲은 깊고 따뜻했으며, 강물은 소리 없이 유장하였다. 주마간산이라는 말대로 차를 타거나 걸어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들이다. 우리 산하의 속살을 만지는 듯 감미로웠다.
힘이 들었지만 나의 두 발로, 나의 끓는 피로, 나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람을 가르며 우리 강산의 산하 속으로 조금씩 나아가서 스스로 하나가 된 듯하였다. 빠르다거나 늦다거나 위험하다거나 하는 것은 이미 논의의 차원이 아니었다. 시골의 조용한 길에서는 자전거용 블루투스를 켜고 바람 소리와 음악을 함께 즐겼다. 먼 소실점을 향해 페달을 저어 마냥 달리면 스치는 바람은 너무도 상쾌하고 나는 어느덧 소실점의 가운데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산과 강과 물과 바람에다가 음악까지 하나 된 것 같은 일체감과 몰아의 경지가 나를 한껏 고양시켜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강과 산하가 나를 불렀다. 담양부터 광주 외곽 길 내내 어른 키보다 더 큰 억새밭은 거의 영산강 하구까지 이어졌다. 섬진강 자전거길은 양장구곡처럼 휘어진 곳이 많으니 물길은 느리고 조용하였다. 구례 하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벚꽃길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경기도 개군, 양평, 이포로 이어지는 벚꽃길은 환상처럼 아름다웠다.
자전거길 국토 종주의 그야말로 난관은 문경새재였다. 백두대간 이화령을 넘어야 상주를 지나 낙동강으로, 부산으로 갈 수 있다.
수안보에서 오르막을 겨우 넘어 괴산 쪽 행촌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이화령 정상은 구름에 싸여 있어서 출발점에서 올려다보니 저 산 정상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른다는 게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7~10도의 오르막 경사가 5.4km 계속되니 심장이나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벅찼지만 일단 천천히, 두 번이나 쉬면서 꾸준히 올랐다.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오르막은 정상과 함께 내리막도 예정하고 있다. 오르막에선 고개 숙이고 참고 견디어내고, 오히려 내리막에서 좀 더 조심하면서 즐길 뿐이다. 정상에서는 감개무량함으로 가슴이 벅찼다. 내리막을 타면서 여기를 어찌, 자전거로 올라왔는지 대견하였다. 도반 한 분은 미니벨로를 타고 여기까지 올랐으니 감탄할 뿐이었다. 낙동강 하구 부산까지는 5명이 시작해서 3명만 끝까지 갈 수 있었다. 한 분은 구미 즈음에서 피할 수 없었던 비와 추위로 감기에 걸렸고, 한 분은 다른 일정으로 중도 귀환했다.
2023년 11월 18일 합천 창녕에서 눈 내린 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기 시작해서 밀양 삼랑진, 양산을 지나 낙조가 장엄한 낙동강 하구를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면서 부산까지 달렸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전국 종주길 마지막인 낙동강 하굿둑 인증센터에서 감격의 마지막 인증 도장을 찍었다. 길을 잘 안내해준 분께 허리 깊숙이 숙여 진심의 감사 인사를 했다. 이렇게 2341km 자전거길 국토 종주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라이딩할 때는 속상한 일이나 걱정되는 일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다. 같이 라이딩하는 분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어차피 세상사 어려운 일이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 같은 것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면 그냥저냥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과천까지 왕복 20km도 힘겨워했다. 자전거 동호인들이 가볍게 넘는 아이유 고개는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에야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저질 체력이었다. 그럼에도 칠십 나이에 국토 종주를 마쳤으니 스스로 기적처럼 기뻤다. 같이 라이딩을 시작한 두세 분은 자전거의 세계로 이끌어주셔서 진심 감사하다고 인사한다.
은퇴 후 삶의 질은 무엇보다 건강이 좌우하는 듯하다.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도 자전거를 권하고 싶다.
일과 공부, 그리고 서예·바둑·골프·당구
많이 벌어놓은 재산이 없으니 나름 일은 계속해야 하지만 젊은 시절과는 달리 한가롭게, 생활비 버는 정도, 소일거리로 사무실은 가끔 나가야 한다. 다행히 30여 년 공직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사건의 전말과 구제 가능성을 빨리 판단하고 해결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할 수 있으니, 일이 생기면 젊은 세무사나 변호사에게 자문·지도 역할을 하며 어려운 일도 많이 해결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아침 일찍 조찬을 하거나 Zoom으로 공부하는 모임이 있는데 커리큘럼이 좋아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동서양 역사, 인문학, 최근의 경제 동향이나 AI까지 최고의 전문가 강사진에다가, 주제가 시의적절하고 다양해서 지식과 감각을 새로이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늦은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하지만 특히 나보다 더 바쁜 CEO들이나 더 나이 많은 분들이 새벽 일찍 모여 강의에 열중하는 걸 보면 스스로에 대한 독려도 된다.
서예는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전국 서예대전에서 입선도 해보았지만, 명필이라기보다는 가끔 뜻이 좋은 글귀를 써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바둑은 오래전에 한국기원에서 아마 5단증을 받았는데, 인터넷 바둑에서 6단 정도를 가끔 둔다.
최근에는 당구 잘 치는 고교 동기들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늦게 시작한 게 다행이라고 느낀다. 더 일찍 시작했으면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 했지 싶다.
골프도 좋아하지만, 비용 때문이거나 건강 때문에 주변에 골프 치는 친구들도 줄어들고 있어서 가끔씩 바람 쐬는 정도로 즐길 뿐이다.
편안함에 이르렀느냐?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치기에는 스스로 많이 부족하지만, 숫자만 다루는 공직에서 평생을 보냈고 편지글도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책을 썼다거나, 처음에 전기자전거로 시작하고 아이유 고개도 못 넘던 사람이 나이 칠십에 국토 종주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으니 누구라도 해볼 수 있는 도전이라고 권하고 싶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햇빛만 있다면 세상이 사막이 된다는 말처럼 비바람 불고 폭풍우 치는 날도 우리의 일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도 별을 향하여 하루하루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은퇴 후의 편안한 날들이라 감사하고 있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편안함에 이르렀느냐?”라는 물음에 이제 담담하게 미소 지어본다.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이라는 이백(李白)의 시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