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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여행으로 딱 좋은 당진의 깊은 맛
- 여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바다를 찾고, 누군가는 숲으로 갈 것이다. 바쁘게 사는 세상, 멀리 훌쩍 떠나기엔 살짝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거야? 가만히 앉아 여름 타령만 하기엔 아까운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고’ 하며 투명한 햇살이 부추긴다. 초록 물이 듬뿍 올랐다. 퍼석한 시간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끄집어내 주기로 한다. 당진은 서울과 수도권 기준 자동차나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남짓 거리다. 무심히 그냥 떠나면 된다. 무심코 떠난 곳에서 맞는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하루가 행복하다. 사람들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에 굳이 의미를 담는다. 알고 보면 그럴 일은 아니다. 마을 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지역 들판이나 노포에 주저앉아 바라보는 느린 풍경에 세상 스트레스 날리면 되는 것 아닌가. 당진은 그러기에 적당하다. 당진에서 여름을 맞는 법, 왜목마을 바다와 갯벌 제법 덥다. 아무래도 바다를 먼저 봐야겠다. 충남 당진은 서해와 아산만을 경계로 절반 이상이 바다와 접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비릿한 포구와 너른 들길이 번갈아 나온다. 당진의 왜목마을 해수욕장에선 바다와 갯벌, 일출과 일몰뿐 아니라 해안가 절벽 쪽의 해식동굴을 비롯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한 왜목마을 앞바다는 예부터 많은 배의 왕래가 있었다. 해안가에 해상 조형물 ‘새빛왜목’이 우뚝하다. 왜목의 지형이 왜가리 목처럼 생겼다는 유래에서 착안하여 꿈을 향해 비상하는 왜가리를 표현한 작품이다. 모래사장이 워낙 넓고 갯바위가 공존하는 왜목마을 해변은 바다의 즐거움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모래밭에 그늘막과 파라솔이 즐비하다. 해변에 서면 바닷바람에 금방 땀이 마른다. 바닷가는 일반 지역보다 기온이 내려간다. 바닷물에 발 담그고 잠깐만 서 있어도 서늘하다. 물이 빠지면 갯벌 위에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즐겁다. 다시 물이 차오르면 푸른 바다와 시원한 파도 소리가 일품인 왜목마을 바다 풍경이 청량하다. 당진 바다의 대표적인 왜목마을과 난지섬은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기도 하다. K팝 스타 BTS의 슈가가 앨범 작업으로 며칠 머무르며 조용히 머리 식히기 좋았던 당진 바다를 추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해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맞을 수 있는 왜목마을을 지나면서 이근배 시인의 ‘왜목마을에 해가 뜬다’는 시비를 만난다. 여기 왜목마을에 와서/ 백두대간의 해는 뜨고 진다/ 저 백제, 신라의 찬란한 문화/ 뱃길 열어 꽃 피우던 당진…. 푸근한 시간여행, 레트로 감성의 면천읍성 마을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당진이다. 성안마을로 불리는 면천읍성(沔川邑城)일대는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따사로운 마을이다.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서해안권 내포 지역의 대표적인 요충지였다. 그 옛날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고 국방상 거점이었다. 평탄한 지형에 축조되어 면천군을 방어하는 성곽으로 기능이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그 후 동학운동과 항일의병 활동지였고, 성 안쪽에 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진 걸 볼 수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조선왕조의 정통성이 깃든 공간 면천 객사 앞에 천년 세월을 넘긴 은행나무 두 그루가 노구를 지지대에 받친 모습으로 울울창창하다. 바로 옆 계단 밑에 자리한 군자정 역시 고려 공민왕 시절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부근에 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 재직 시 세웠다는 골정지가 있다. 봄과 여름이면 벚꽃과 연꽃으로 절경을 이루고, 당진의 걷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성 안으로 들어왔으면 지나치지 않고 돌아볼 곳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당진이라면 폐교를 이용한 아미미술관이 많이 알려졌지만, 우체국이 미술관으로 예쁘게 변신한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의 앞마당과 정원의 쉼도 좋다. 언덕길의 낡은 자전거포는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로 바뀌어 동네 사람들의 문화 마실터이기도 하다. 책방 옆집의 감성 소품 진달래상회, 공출판사, 그야말로 옛날식 ‘별다방’, 시장제분소 떡방앗간 골목을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기에 딱 좋다. 걷다가 허기질 때쯤 되면 초록색 쑥면의 초원콩국수집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마음 챙김의 시간, 성지 순례길 당진을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돌아보다 보면 내심 수긍이 된다. 천주교가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분들이 순교한 유적지 신리성지,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충청 최초의 본당인 합덕성당,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솔뫼성지 등이 있다. 세 군데 각각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어 성지 방문만을 목적으로 하루를 계획해도 좋을 듯하다. 또 다른 길이 있는데 바로 버그내 순례길이다. 버그내는 합덕의 오래된 장터 이름이다. 순교자들의 길을 따라 고요하고 평온하게 자연 속을 걷는다.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성당과 신리성지까지 13.3km 코스로 비순환형 길이다. 대략 4~5시간 걸으며 차분히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다. 당진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챙김의 시간도 갖는다. 하얀 연꽃잎이 스며든 맛, 신평양조장 당진의 술도가 신평양조장 역사는 90년이 넘었다. 그 세월 동안 발효된 술맛은 더 깊어졌다. 하얀 연꽃잎을 발효 과정 중에 곁들여 빚어내는 백련막걸리로 지금껏 맛을 지켜왔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3대째 이어온 가업은 장인정신으로 양조 문화를 계승해나가는 중이다. 오래된 한옥 고택 옆으로 신평양조장 뮤지엄이 먼저 보인다. 해풍을 맞고 자란 당진의 품질 좋은 쌀로 오랜 세월 동안 백련막걸리와 백련맑은술을 어떻게 빚어왔는지 보여주는 곳이다. 백련막걸리는 한때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여전히 전통주 명가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양조갤러리에서는 술의 제조 공정, 역사의 흐름에 따른 술의 변화, 세상의 술 이야기를 꼼꼼하게 보여준다. 술 한 모금 시음도 하고, 막걸리 만들기 체험과 소믈리에 교실 등의 참여 시간도 준비되어 있다. ‘시간이 익어가는 양조장’이라는 테마로 돌아보는 옹골찬 예술 감성 공간이다. 술과 인문학에 관한 공부, 하얀 쌀과 그에 대한 가치 또한 비로소 새롭다. 하얀 꽃 백련잎과 연잎주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신평양조장의 꿈도 쉼 없이 발효되고 익어간다. 불꽃 같은 삶, 작가 심훈의 필경사 신평양조장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필경사(筆耕舍),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농촌 소설 ‘상록수’가 탄생했다.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고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다. 필경사 마당에는 당시 농촌 계몽 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전시되어 있다. 마당 옆에 자리한 심훈기념관에는 작가 심훈의 활동이 전시물과 영상, 디오라마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되어 전시되었다. 작가이면서 영화감독이기도 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당시 경성방송국 조선어 아나운서까지 맡았던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아나운서로 뉴스를 읽던 중 ‘황태자 폐하’라는 부분을 도저히 읽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불편한 기분을 참지 못해 3개월 만에 해고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산 아래 소박한 작가가 직접 설계했다는 ‘심훈의 집’. 전통적인 외관과 내부는 오밀조밀 짜임새 있고 정갈하다. 집 앞으로 들판이 펼쳐지고 저편으로 서해가 보이도록 자리 잡아, 문학적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초가집 뒤편으로 그가 심었다는 대나무 숲이 가끔 바람에 일렁인다.
- 2024-07-1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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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창업의 작지만 큰 세계, ‘스몰브랜드’ 전략 다섯 가지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이다.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을 말하며 언급해 더 널리 알려졌다. 소비자와 브랜드가 가치를 공유하는 ‘브랜딩’ 세계에서도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처럼 개인의 가치관이 녹아든 ‘스몰브랜드’(Small Brand, 작은 브랜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몰브랜드를 정의하는 기준은 뭘까? 매출 규모, 직원 수, 공간 크기, 판매하는 제품 수 등 우리가 숫자로 볼 수 있는 것들은 기준이 아니다. 스몰브랜드라는 용어는 아직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는 브랜드’라고 정의한다. 왜 스몰브랜드인가? 프랑스 파리에서 ‘최고로 짐 잘 싸는 사람’으로 소문나 황후의 전담 패커까지 되었다가 여행 가방 전문 브랜드를 만든 것,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시작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해 최근에는 중년들도 즐겨 찾는 온라인 편집숍 ‘무신사’는 ‘무지하게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이라는 커뮤니티에서 시작됐다. 누구나 스몰브랜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다. 창업 시장에서 스몰브랜드가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는 소비의 개인화, 가치 소비, 1인 가구 증가, 취향의 다양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1인 가구가 늘었고, 개인의 삶과 취향이 다양해졌으며, 브랜드의 철학을 보고 소비하는 것이 곧 나를 나타내는 시대가 되었다. 이청수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정책실 사무관은 “우리나라에서 기술 창업이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최근 비기술 창업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면서 “과거에는 ‘창업’이라면 은퇴 후 아버님들이 치킨집 차리는 걸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가치를 반영한 창업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스몰브랜드를 나타내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철학’, 그리고 ‘나다움’이다. 전문가들은 창업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이런 현상이 스몰브랜드로 표현되는 셈이다. 작은 브랜드 전문 컨설팅 회사 ‘스몰브랜더’의 최용경 공동대표는 “과거 스타트업이라는 단어가 벤처기업과 혼용되어 쓰이다가 이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된 것처럼, 앞으로 스몰브랜드도 용어로 자리 잡을 것”이라 전망했다.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패턴에 더해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 발전은 ‘스몰브랜드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이청수 사무관은 “산업혁명 이전이 소상공인 시대였다면 4차 산업혁명, 그러니까 디지털 혁명 이후 인터넷과 모바일의 발전이 개인화 생산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신애 스몰브랜더 공동대표도 다양한 디지털 도구에 주목했다. 김 대표는 “SNS 환경이 크리에이터를 등장시켰고, 디지털 마케팅 도구를 활용해 내가 브랜드가 돼 자신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무척 쉬워졌다”면서 “생산부터 고객 소통까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봤다. 이제는 ‘작은 브랜드 창업’이라는 키워드로 강의나 동아리도 생겨나는 추세다. ‘나=브랜드’라는 공식은 진정성으로 이어진다. 소비자들은 스몰브랜드의 진정성에 지갑을 연다. 김신애·최용경 대표는 베이비붐 세대가 창업 시장에서 ‘스몰브랜드’로 거듭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본다. 최 대표는 “‘강한소상공인’처럼 정부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중장년이 많고, 장년을 위한 지원이 마련되어 있다. 인생의 과업을 많이 지나온 중장년이 이 시장을 잘 활용한다면 오히려 젊은 친구들보다 더 유리할 것이라 본다. 지금까지는 젊은 세대가 스몰브랜드 시장을 주도했지만, 은퇴 후 자본과 시간이 있고 교육에 적극적인 베이비붐 세대에게 더 적합한 것이 스몰브랜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스몰브랜드 꿈꾼다면 성공한 스몰브랜드의 특징은 △창업자의 가치관을 따른다 △단순 판매에 집착하지 않는다 △브랜드 문화를 즐기게 한다 △팬덤이 확고하다 △정성적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창업가로서 스몰브랜드를 꿈꾼다면 다음 다섯 가지를 유념하자. 첫째, ‘자기다움’을 끈질기게 파고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와 같이 나에 대해 알아가야 한다. 창업자의 ‘나다움’이 브랜드의 방향성과 일치하거나 최소한 비슷한 결이어야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 스몰브랜드 핵심 가치인 ‘진정성’도 전달될 수 있다. 둘째, 이야기를 전한다. 창업자의 일상도 좋고,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도 좋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온라인 채널을 활용해 나와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보자. 실패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 변화하는 모습도 소비자에게는 메시지가 된다. 만약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게 어렵다면 페르소나(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를 설정하자. 브랜드를 나타내는 캐릭터를 만들어도 좋다. 초창기 캐릭터와 3년 뒤 캐릭터가 달라지는 과정조차 브랜드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셋째, 꾸준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매일’ 이야기를 전하라고 조언한다. 혹은 나만 볼 수 있는 공간에 기록이라도 해두어야 한다. 이 기록이 쌓여 브랜드 역사가 된다.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짬을 내어 나의 브랜딩 과정을 아카이빙하자. 중요한 건 ‘꾸준히’ 하는 것이다. 넷째, 팬과 소통한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를 꾸준히 하다 보면 나의 브랜드 성장을 응원하고 브랜드 가치에 공감하는 팬덤이 생긴다. 스몰브랜드에게 ‘팬’은 브랜드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갈 든든한 지원군으로 뗄 수 없는 존재다. 팬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은 브랜드의 ‘신뢰 자본’이 되어 지속 가능한 브랜드가 될 기반이 된다. 다섯째, 작게 시작한다. ‘적어도 누군가의 연봉만큼은 벌어야지’ 같은 기준보다 나만의 작은 기준을 세워 시작하자. ‘나는 하루에 딱 30개만 팔 거야’라고 규모를 정하는 것조차 스몰브랜드의 가치가 될 수 있다. 스몰브랜드를 꿈꾸는 중장년에게 김신애·최용경 스몰브랜더 공동대표는 위의 다섯 가지 외에 다음의 조언을 덧붙였다. “아마 ‘나 은퇴하고 창업할 거야’라고 말하면 10명 중 9명은 말릴 거예요. 스몰브랜드를 만들겠다 마음먹었다면, 주변 지인들의 말에는 잠시 귀를 닫고 업계 사람들 혹은 전문가들과 소통하길 바랍니다. 스몰브랜드 대표가 된다는 건 누구나 처음 해보는 일일 거예요. 브랜드를 만든다는 거창한 생각보다 그냥 배워간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하면 성공 확률도 높아질 겁니다.” ◇스몰브랜드를 위한 지원 사업 브랜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즉 나만의 독창성이다. 나와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기도 하다. 스몰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지원 사업을 소개한다. 네이버 프로젝트 꽃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중소 상공인과 창작자를 지원하는 프로그램. 온·오프라인 지원 사업 및 ‘네이버 SME 브랜드’ 등 성장 프로그램이 시기별로 진행된다. 프로그램 참여 공지는 네이버 공식 블로그 ‘NAVER DIARY’를 참고하자. 교육을 받고 싶다면 ‘네이버 비즈니스 스쿨’도 활용해볼 수 있다. 배민 아카데미 외식업에 초점을 맞춘 지원 사업이 필요하다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정기 교육과 1일 교육을 선택할 수 있고, 시기별 집중 교육도 진행된다. 온라인 영상 교육과 다른 사장님들의 사례도 볼 수 있으니 참고하자. 강한소상공인 성장지원사업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시행하는 지원 프로그램. 라이프스타일, 로컬 브랜드, 글로벌 세 분야 중 하나를 선택해 지원할 수 있다. 초기 창업자보다는 창업 후 유지 기간이 어느 정도 있는 경우에 활용하기 좋다. 초기 창업자라면 초기 창업 패키지 등의 사업을 이용해보자. ◇사례로 보는 스몰브랜드 대표적인 스몰브랜드 사례를 소개한다. 브랜드별 이야기와 가치관, 그들이 소비자와 소통하는 방법 등을 보며 나의 스몰브랜드를 상상해보자. 바다가 허락한 만큼, 동해형씨 동해형씨는 반려동물 수산물 간식 전문 몰이다. 반려동물 식품 중에서도 수산물에 집중한 사례로, 국내산 수산물을 원재료 그대로 쓴다는 특징을 강조한다. 체중 조절이 필요한 반려견이나 건강한 단백질 식품이 필요한 노령견 가족들이 동해형씨의 팬이 되었고, 이제는 해외 진출까지 준비하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동해형씨는 “3년의 기획과 1년의 준비기간, 6개월 이상의 정리로 브랜드가 탄생했다”면서 “‘작은 것에도 정성을 다해야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중용 23장’의 글귀를 믿는다”는 가치를 전한다. 청춘의 여신, 헤베더유스 헤베더유스는 가슴 사이즈가 B컵 이상인 여성을 위한 브래지어를 만드는 브랜드다. 회사에서 중요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중 꽉 끼는 속옷에 숨이 막혔던 경험을 계기로 창업을 결심했다. 이렇듯 ‘개인의 불편함’에서 창업 아이템이 나오기도 한다. 헤베더유스는 제품 출시 전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9개월간의 시장조사와 제품 개발로 첫 판매부터 6000만 원의 펀딩 매출을 달성했다. 이제는 한국 여성의 15%에 해당하는 “큰 컵 여성들을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게 해줄, 오래 그리고 자주 손길이 닿는” 속옷을 만드는 브랜드가 됐다. 제주 로컬 브랜드, 한림수직 한림수직은 1959년 아일랜드에서 온 신부가 설립한 제주 로컬 의류 브랜드다. 성이시돌 목장에서 자란 양의 양모를 채취해 뜨개질로 만든 니트인데, 품질이 너무 좋아 대대로 물려주는 니트로 유명하다. 요즘은 빈티지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될 정도. 중국산 양털이 등장하며 사라진 브랜드인데, 콘텐츠그룹 재주상회와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2021년부터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로 상품을 복원하고 ‘장인니팅스쿨’로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제주 여성의 자립을 도왔다는 한림수직만의 특별한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한림수직의 부활을 응원하고 있다. 행복을 파는 브랜드, 오롤리데이 문구류에서 시작해 NFT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오롤리데이는 고객을 ‘해피어’, 브랜드 캐릭터를 ‘못난이’라 부르며 ‘행복을 판다’는 세계관을 쌓은 브랜드다. 오롤리데이 대표가 개인 SNS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며 ‘롤리’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간 것에서 출발했다. ‘찐팬’들이 모이면서 오롤리데이의 ‘디자인 도용 사건’까지 함께 해결했다. 브랜드 커뮤니티 구축의 교과서라 불리는 오롤리데이는 “당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다정한 제품을 만든다”는 모토로 진심을 전하고 있다. 참고 도서 ‘작지만 큰 브랜드’(우승우 외 3인 저), ‘작은 브랜드를 위한 지침서: 스몰브랜드북’ (김시내·최용경 저)
- 2024-07-1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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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 명소 서오릉, 왕릉은 ‘주검의 처소’만은 아니다
- 살아서는 하늘에 맞먹을 추앙을 받고, 죽어서도 존엄한 예우를 받는 게 왕이다. 그들의 묘역 역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여느 묘와 크게 다른 규모와 격식을 구현해 왕릉에 권위를 부여했다.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집어넣기도 했다. 한 점 흙으로 돌아가는 ‘주검의 처소’일 뿐이지만 왕릉에 쏟아부은 정성과 의도가 이렇게 각별하다. 유네스코는 조선 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대부분 경기도에 밀집해 있다.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 나오는 조항, 즉 ‘능역은 도성(한양)에서 10리 이상, 100리 이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을 따른 데에서 비롯됐다.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은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구리시의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봄이 절정에 달한 5월 한낮의 유혹에 이끌려 나온 사람들일까? 뭐가 달라도 특별히 다른 게 왕릉이지만 사자들의 거처라는 점에서 을씨년스러운 적막감이 감돌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는데, 웬걸 뜻밖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는 능역 일대에 펼쳐지는 자연경관이 빼어나기 때문일 테다. 알고 보니 고양시의 산책 명소라 한다. 왕릉도 보고, 삼림욕 산책도 만끽하고, 즐거울 이유가 겹친다. 왕릉은 원래부터 조정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었으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연생태가 망가지지 않았다. 왕릉이 식생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셈이다. 서오릉엔 왕과 왕후의 능 5기, 그리고 원 2기(園)와 묘(墓) 1기가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이내 명릉(明陵)이 보인다. 조선 왕릉은 범례에 따라 통상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명릉도 마찬가지다. 홍살문으로 진입하자 저만치에 있는 제향 공간 정자각까지 박석을 깐 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높이가 다른 두 개의 길이 병행한다.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이 들어가는 향로(香路)이며, 오른쪽 길은 왕만 사용하던 어로(御路)다. 왕릉의 핵심인 능침 공간은 경사지 상부에 조영했다. 홍살문에서 올려다보면 작아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큼직한 봉분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봉분의 유려한 곡선미로 보자면 우아하기 그지없다. 능 둘레에 도열한 석마,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등 석물들엔 노련한 세공이 가세돼 품격이 완연하다. 명릉은 조선 19대 왕 숙종이 잠든 왕릉이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물리치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펼쳤다. 냉혹한 다혈질 기질을 타고난 한편 총명함과 결단성이 있어 장장 46년에 걸친 치세 기간 내내 강력한 왕권을 지속했다. 탕평책을 실시하는 등 나라의 질서와 제도를 혁신했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바꾸었다. 명릉엔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숙종의 곁에 함께 묻혀 있다. 정자각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쌍릉이 바로 숙종과 인현왕후가 묻힌 능이다. 왼쪽 뒤편에 거리를 벌려 따로 조성한 봉분은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쌍릉과 단릉이 공존하는 명릉의 양식은 조선 왕릉 가운데 상당히 특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현왕후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위되었다가 복위되는 등 자주 파란을 겪었다. 하지만 덕망이 높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인가. 숙종은 일찍이 인현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자신의 능 자리를 그 곁에 잡아두어 마침내 쌍릉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러운 건 인원왕후였으리라. 숙종은 그녀에게 늘 무관심했다. 그럼에도 인원왕후는 숙종과 함께 묻히고 싶어 했으며, 의붓아들인 영조가 뜻을 받아들여 곁방살이 형국이나마 숙종의 쌍릉 저만치에 소박한 능을 만들어줬다. 숙종의 능 근처엔 고양이 한 마리가 묻혔다. 숙종이 애지중지했던 고양이로 밤마다 끌어안고 잤다고 한다. 이 녀석은 숙종이 승하하자 곡기를 끊고 덩달아 죽어 왕이 떠난 길을 뒤따랐다고 하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장희빈의 초라한 묘 명릉에서 좀 더 들어가면 익릉(翼陵)이 나온다. 서오릉 가운데 가장 고지대에 자리한 능으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묻힌 곳이다. 인경왕후는 숙종보다 40년이나 앞서 세상을 떴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했다. 익릉의 봉분은 웅장하다. 석물도 명릉에 비해 크고 정교하다. 정자각은 다른 능에는 없는 익랑까지 갖추었다. 꽃무늬를 새겨 넣은 장명등과 망주석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래저래 화려한 구석이 엿보인다. 숙종이 명한 왕릉제도 간소화가 실행된 이후의 왕릉들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이다. 이제 경릉(敬陵)을 보자. 이는 세조의 아들로 20세에 요절한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그의 아내 소혜왕후의 능이다. 원래 능을 쓸 때는 정자각을 기준으로 왼쪽에 왕을, 오른쪽에 왕비를 안장한다. 왼쪽을 상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경릉에선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소혜왕후의 능을 두었다. 이건 신분의 위계에 따른 배치 방법이다. 대왕대비로서 승하한 소혜왕후가 신분상 의경세자보다 상위에 해당했던 것이다. 의경세자의 능역에 문석인만 있는 반면 소혜왕후의 구역엔 무석인까지 갖추어진 이유도 마찬가지. 이렇게 서오릉의 능마다 개성이 실려 있다. 영조의 비 정성왕후가 잠든 홍릉(紅綾)은 본디 영조도 함께 안장하기 위한 쌍릉으로 조성했으나 능 자리 하나가 빈 상태로 남아 이채롭다. 애초 계획과 달리 영조의 능을 구리의 동구릉에 마련하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런데 왕릉들이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도굴꾼들의 타깃이 되진 않았을까? 2006년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원(園)인 순창원(順昌園)에서 도굴꾼이 도굴을 시도했다. 중장비를 동원해 수직으로 지하 2.7m까지 파내려 간 도굴 갱이 발견됐다. 그러나 도굴엔 실패했다. 당시 도굴 실패 원인이 화제가 됐다. 순창원은 회격묘다. 즉 관이 들어간 구덩이 틈을 석회로 채워 다진 묘다. 회격은 고강도의 차단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중장비로도 묘실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회격묘는 유독 미라가 많이 발굴되는 묘형이기도 하다. 회격 벽이 외부 환경의 간섭을 완벽하게 배제해 묘실 내부를 거의 진공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발길은 장희빈이 잠든 대빈묘(大嬪墓)로 이어진다. 장희빈은 숙종의 여자였다. 중인의 한계를 딛고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존재다. 생시에나 사후에나 극과 극으로 평가가 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한편에선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다른 편에선 정쟁에 억울하게 희생된 제물로 보았다. 이런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대빈묘는 초라하다. 묘역 자체가 매우 으슥한 구석에 있다. 규모도 작고 석물도 별로 없다. 웬만큼 번듯한 사대부가의 묘보다도 옹색하다. 권력 투쟁의 도가니에서 으스러진 사람의 신후가 이렇게 스산하다. 청명한 건 서오릉 일대에 범람하는 숲이며, 숲 사이 오솔길이다. 왕릉도 좋고 왕릉에 서린 역사도 재미있지만, 숲길을 걷는 즐거움 또한 크다. 김용규 고양문화원 원장 호수공원 산책자들을 문화원으로 끌어들여 경기도 고양시는 경기 북부의 최대 도시로 1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근래 들어 급성장한 도시다. 내륙 교통의 동맥인 한강을 끼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고양을 둘러싼 삼국의 쟁탈전이 잦았다. 김용규 고양문화원 원장은 행주대첩을 고양 역사의 백미로 꼽는다. “행주대첩이야말로 고양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파상 공세를 펼친 왜군 3만여 명을 권율 장군이 총지휘한 관민의 힘으로 물리친 전투다. 성 주변의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벌였다. 현재 고양시에선 행주산성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2023년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고양시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5대 도시’에 선정했다. 고양시의 문화 파워는 어느 수준에 있다고 보나? “이미 문화도시로 부상했다. 공연 전문 예술센터인 고양아람누리의 활발한 운영상을 보라. 규모는 물론 내용에서도 전국 어느 문화공간에 뒤지지 않는다. 이는 고양시 문화현상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김 원장이 펼친 문화원의 중점 사업을 소개한다면? “2년 전 문화원장에 취임한 이래 줄곧 문화원 홍보에 주력했다. 문화원의 존재 자체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는 걸 알고 이를 시급히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문화원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산호수공원을 끼고 있어 이점이 많다. 공원 산책자들의 발길이 문화원 방문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게 목표다. 그에 따른 프로그램의 강화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관습에서 벗어난 프로그램을 가동할 경우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 원장직을 맡은 뒤 기존 20여 개 프로그램 중 절반을 폐쇄했다. 그리고 새로운 걸 채워 현재 30여 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주 3일에 걸친 야간 강좌도 신설했다. 주간엔 일에 매일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의 하나다.” 여느 문화원에는 없는 ‘문화아카데미 최고위 과정’도 운영한다지? “사회 각 분야의 유능한 인력을 문화원 활성화의 동력으로 삼기 위한 강좌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강좌와 체험 활동을 통해 역사 문화를 향유하는 한편 문화적 식견을 쌓게 된다. 나아가 지역의 문화 전령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원 회원 중에 청년층은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 있다면? “전통문화의 보존과 발굴 중심의 문화 사업에 창의적인 콘셉트를 융합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통혼례 프로그램을 가지고 청년층에 접근한다. 기대보다 반응이 좋아 매우 고무적이다.” 공직 출신인 김 원장은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는 최근 전문가들이 공저자로 참여한 향토사 관련 책 ‘고양의 행주마을 누정과 별서’를 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내용의 깊이와 가치로 돋보이는 책이다. 그는 향후 이 책을 근거로 과거 고양에 있었던 누정과 별서를 복원하는 일에 나설 계획이다.
- 2024-06-1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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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군주 이성계의 기백을 느껴지는 전주 경기전
-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햇살 좋은 봄날, 전주한옥마을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답다. 지난 한 해에 찾아온 관광객이 자그마치 1500만여 명이었다니 말 다했다. 한나절의 눈요기와 입요기만으로도 전주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는 이들이 많다. 한때 상혼에 치우쳤다는 핀잔도 들었다. 그러나 문화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이 늘어 균형이 잡혔다. 바야흐로 문화 요소를 결여한 관광지는 찬밥 신세로 추락하기 쉬운 시대다. 사실 전주한옥마을엔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달걀노른자처럼 박혀 있다. 겉은 상업의 성황으로 요란하지만, 속엔 역사 유산의 광량이 깃들어 찬연하다. 경기전(慶基殿)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한 공간이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1410년에 지었다. 천하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그린 어진은 단순한 추모의 수단이 아니었다. 임금 그 자체로 간주됐다. 어진이 있는 곳엔 임금이 머문 것과 맞먹는 수준의 위상이 부여됐다. 왕실의 영속을 기원하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경기전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우람한 나무들과 대밭이 있는 정원은 운동장처럼 널찍하다. 경기전의 핵심은 공간 중앙부에 조성된 정전(正殿) 구역이다. 홍살문으로 들어가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하자 본전인 정전에 닿는다. 경기전은 한마디로 왕실 사당이다. 태조의 넋을 기리는 제례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정전으로 이어지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혼령이 드나드는 문, 즉 신문(神門)이라 불렀다. 이 문들엔 기둥으로 분할한 세 개의 통로가 있다. 중앙에 있는 통로는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혼령이 출입하는 신도(神道)니까. 바깥쪽 두 통로는 인도(人道)로 쓰였다. 예교(禮敎)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시대의 종묘에 적용된 법식이 이렇게 엄격했다. 통로 끝엔 정전이 있고, 정전 한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감실 안엔 부용향을 담은 향 주머니를 넣어 냄새와 습기와 해충을 잡았다. 화재를 막아주는 벽사(辟邪) 용도로 설치한 두 가지 장치도 위트가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지붕 아래 붉은 풍판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거북 두 마리. 다른 하나는 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6개의 무쇠솥인데, 이건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 ‘드므’라 부른다. 지붕을 타고 내려온 화마(火魔)가 솥을 채운 물에 비친 자신의 살벌한 모습에 놀라 스스로 달아나게끔 설치한 구조물이라 하니 재미있다. 뭐니 뭐니 해도 관심 가는 건 태조 어진이다. 세조 때의 문신 신숙주가 쓴 ‘영모록’에 따르면 태조 어진은 무려 26점이나 됐다. 말을 탄 초상도 있었단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 경기전에 남은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은 원래부터 경기전에 있었던 원본이 오래되어 낡고 해지자 1872년에 원본 그대로 베껴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우뚝한 화가 8명이 합작해 그렸다. 이렇게 부활한 태조 어진의 진본은 현재 경기전 후원의 어진박물관에 소장됐고, 정전엔 복제본을 봉안했다. 망가진 원본은 항아리에 담아 정전 뒤편에 묻었다지. 조선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늘에 맞먹을 지존으로 섬김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을 세운 태조를 능가할 만한 공경의 대상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태조의 어진 봉안처만 해도 여러 곳이었다. 서울 문소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등에 각각 어진을 두었다. 그런데 오직 전주의 어진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전주를 ‘조선의 발원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주는 전주 이씨 이성계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조선의 뿌리가 전주에 박혀 있다는 얘기, 이거 빈말이 아니다. 어진에 드러나는 태조의 모습을 볼까. 그의 실제 키가 180cm에 달했다던가. 초상을 척 봐도 기골이 장대하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바위처럼 묵직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한 틀거지에 포스가 넘친다. 혁명 군주다운 도도한 기상을 테마로 삼아 초상을 그린 것 같다. 곤룡포와 용상엔 용틀임하는 금빛 용들을 연쇄적으로 집어넣어 군왕의 위엄을 돋우었다. 능란하게 휘저은 붓놀림의 자취도 볼 만하다. 색조를 달리한 배색으로 얼굴에 음영을 넣어 살짝 입체감을 살렸다. 오른쪽 눈썹 위에 묘사한 사마귀는 이 어진이 리얼리티에 충실한 그림임을 알게 한다. 풍남문에 걸렸던 순교자들의 머리 경기전 건너편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전동성당이 있다. 경기전 답사를 마친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전동성당으로 이어진다. 저만치서 바라보이는 돔 부위만으로도 아름다워 자력에 끌린 양 성당 정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성당과 마주하기에 이르면 이젠 심취하게 마련이다. 전동성당의 완벽한 건축미에 반해서. 성당의 고고한 내면성이 느껴져서. 건축가 김광현에 따르면 전동성당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 성당이나 독일 뒤렌에 있는 성 안나 성당보다 ‘훨씬 영성적’이다.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감히 영성까지 운운하기 어렵지만, 유려한 건축미에 서린 깊고 따뜻하고 순수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전동성당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배합해 쌓았다. 1908년에 착공, 23년에 걸친 공사로 완성했으니 100여 년 세월이 내려앉은 건물이다. 그러나 세련된 건축 메커니즘과 정교한 디자인이 빼어나 고색을 느끼긴 어렵다. 이 성당이 야기하는 미감은 정면 중앙에 높이 솟은 종탑부와 양쪽 계단 탑의 돔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성당 내부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궁륭형 천장의 곡선이 흘러내린 아래편 좌우에 펼쳐진 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머니의 체온처럼 따사롭다. 성당을 떠받친 기둥 행렬, 수평 또는 수직으로 펼쳐진 벽돌 벽들, 신비감과 안락감을 풍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도 빼어나다. 전동성당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순교의 피와 얼이 배어 있는 터에 세운 성소라는 데 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 전동성당 코앞엔 풍남문이 있다. 전주의 역사성을 웅변하는 성문으로 반월형 옹성(甕城)이다. 원래 전주성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지만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성은 고려 말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주도해 지었다. 그는 전주성에서 우거진 축성 솜씨로 숭례문(남대문)을 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동성당과 풍남문은 불행한 역사를 공유했다. 효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머리가 풍남문에 걸렸던 게 아닌가. 한편 순교 터에 전동성당을 지을 때엔 풍남문의 허물어진 성벽 돌들이 성당의 주춧돌로 쓰였다. 굳센 신앙은 세상의 잔인함에 패하지 않는 법. 순교자들의 영혼은 성벽 돌에 얹혀 마침내 전동성당을 이루었다. 성당 사방으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햇살이 쏟아진다. 천지가 유독 환하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 일찍부터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이 있었다 “전주시는 흔히 말하는 대로 ‘맛과 멋의 고장’이다. 고유한 음식 문화와 예술의 발달로 형성된 멋을 빼놓고 전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맛과 멋’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과거의 경제적 여유에 그 근원이 있다. 전주는 농산물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농업지대였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먹거리 풍부한 곡창지대였던 데에서 전주의 문화와 정서가 토착화됐다는 뜻이다. 전주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에 의해 ‘음식 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통으로 이어진 문화와 예술의 파워 역시 타 도시를 능가한다. 나 원장의 얘기는 전주 사람들의 ‘포용력’에 관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는 원광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전주 사람들은 외지인을 격의 없이 품는다. 예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풍토가 여실했다. 이는 전주만이 아니라 호남권의 보편적 경향이었다. 가령 고창읍성을 축조할 때 전라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탰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 거기에서 나온 포용력. 이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선 양반들의 지배 문화가 횡행했다. 호남권의 서민 문화는 어떠했다고 보나? “전라도에선 서민 문화가 발달했다. 예컨대 호남엔 농부들이 일하다가 모여 쉬는 모정(茅亭)이 매우 흔했다. 이는 사대부들이 즐긴 누각 문화가 발달했던 영남권과 다른 양상이다.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켜낸 서민 출신 의병이 유독 많은 곳도 호남이다. 일찍이 발동한 서민 문화가 민중의식의 싹을 틔웠고, 그게 동학혁명 같은 민권운동으로, 나아가 민주의식으로 발화했다. 전주 특유의 ‘포용력’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상은 이기적인 경쟁과 과욕이 만연해 삭막하다. 전주라고 예외일까? “현대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힘에 좌우되며 돌아간다. 전주엔 좌절감에 가까운 정치적 소외감이라는 게 있다. 넉넉한 전통적 정서와 자긍심이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문화의 힘, 문화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우리 문화원은 지역의 뿌리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쓸모 있는 책자들을 다수 발간했다. 전통문화를 현대적 매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콘텐츠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실로 많다. 한옥마을의 역사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면? “항일의식의 발현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된 배경을 알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엔 일본인이 대거 유입돼 집을 짓고 살았다. 전주가 통째 일본인 땅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전주의 뜻있는 부자들이 나서서 한옥 다수를 지으며 대응했다. 이렇듯 전주를 지키자는 민의의 힘으로 형성된 게 한옥마을이다.” 경기전 내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전주사고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모면하고 유일하게 실록을 보존한 사고다. 전주의 선비와 머슴들이 필사적으로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나 원장은 이 역시 전주의 빛나는 역사 대목으로 꼽았다.
- 2024-04-1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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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의 섬 무리, 고군산군도… 중국 사신도 감탄한 절경
- 한낮인데도 바다 위에 띄워진 고깃배는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멈춰 있다. 바위섬 저편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선을 고정한 채 바다를 향한 낚시꾼의 뒷모습이 한가롭다. 물때에 맞춰 바닷길이 열리면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서 당도하는 작은 섬의 기적을 날마다 마주한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그저 적요하기만 한 카페는 감성을 품었다. 섬이라는 음절이 전하는 서정성은 쓸쓸함과 평온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섬 안으로 찾아드는 자발적 고립이 주는 진정한 휴식, 더 볼 것 없다. 섬의 군락 고군산군도로 떠난다.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다섯 개의 섬이 내륙과 다리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는 새만금방조제를 관통하며 섬으로 향한다. 시원하게 뚫린 30km가 넘는 방조제 도로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길목마다 전망대와 쉼터가 마련돼 있고, 그중에 해넘이 휴게소는 신비로운 일출과 일몰을 보여주는 곳이다. 고군산군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고즈넉한 섬마을 야미도의 평온함도 스쳐 지나간다. 고군산군도에 닿기 전부터 가슴 확 뚫리는 풍광이 반기는 새만금방조제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다도해 절경을 한눈에, 신시도 전북 군산시 남서쪽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6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군산의 섬 무리’라는 뜻의 고군산군도는 그 옛날 중국 사신 서긍이 고려 방문기를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에서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천혜의 경관과 생태자원으로 고군산 8경으로 불리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신시도에 닿는다. 새만금방조제와 곧바로 연결된 고군산군도의 관문이며, 군도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섬이다. 섬을 둘러싼 199봉에서 월령봉과 대각산으로 이어지는 신시도 산행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코스라서 찾는 사람이 제법 많다. 계절이 무르익을 때면 고운 단풍이 달빛 그림자와 함께 바다에 비친다는 월영단풍은 고군산 8경에 속한다. 섬 속의 국립신시도자연휴양림은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가에 지어진 친환경 휴양림으로 매월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숙박과 상관없이 입장료만 내면 휴양림 주변 탐방이 가능해서 평소에도 산책이나 트레킹을 위한 방문객들이 찾아든다. 산책로를 걸으며 만나는 달맞이 화원이나 전망대를 지나면서 마주하는 숲과 탁 트인 바다는 복잡한 도시를 떠나온 이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내다보는 저 멀리 고군산대교의 주탑과 섬들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시적 풍광과 SNS 감성 품은 무녀도 신시도에서 곧바로 무녀도로 건너오면 따스한 섬마을 풍광이 맞아준다. 섬에 들면서 무녀도라는 지명이 혹시 김동리 소설 ‘무녀도’와 관련 있을까 생각했지만 섬 이름의 유래는 따로 있었다. 섬의 형태가 마치 장구와 술잔을 놓고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처럼 보여 무녀도라 불렸다고 한다. 무녀도에서는 단연 쥐똥섬이 볼거리다. 섬마을 앞바다 저편으로 몇 걸음도 안 된다. 물때에 따라 바닷길이 열리면 질펀한 갯벌 사이로 섬까지 걸어가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련하다. 쥐똥섬 해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똥섬 역시 독특하다. 약 900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무녀도의 똥섬은 시간이 만들어낸 지질구조를 보여준다. 똥섬을 옆에 두고 자리 잡은 펜션 아래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걸어가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무녀도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섬 앞에 시선을 끄는 노란 버스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이 스쿨버스를 개조한 것이다. 무녀 2구 마을버스라는 버스 카페는 서해 오션뷰가 끝내준다. 청량한 바다와 푸른 하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섬 풍광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이뿐 아니라 젊은 층에게 무녀도가 핫플로 소문난 데는 이국적인 버스 옆에 자리한 방탄소년단의 RM 벽화도 한몫한다. 오래된 바닷가 마을의 원시적 풍광과 함께하는 무녀도는 지금 SNS 감성이 풀풀 나는 매력 또한 품고 있다. 신선이 노닐던 섬에서 한나절, 선유도 무녀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선유도다. 예전부터 고군산군도의 섬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섬이다. 섬 북단의 봉우리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선유도다. 이름조차 신선이 놀던 섬이라는 선유도(仙遊島)는 군도의 중심 섬이다. 겨울 끝자락인데도 해변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선유 8경 중 하나로 고운 모래가 10리나 깔려 있어서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해변 너머로 망주봉이 듬직하다. 그 옛날 억울하게 유배된 충신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유래가 깃든,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3호인 망주봉이 물이 빠져나간 갯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름철엔 망주봉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폭포수가 되어 시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석양이 지는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 선유낙조(仙遊落照)는 선유 8경의 으뜸이다. 요즘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 위에서 즐기는 짚라인이나 전기 스쿠터와 자전거, 섬 투어를 위한 유람선, 도보 산책이나 갯벌 체험 등의 재미거리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주변에 옥돌해수욕장의 선유봉 등산길과 명품 데크길도 찾아볼 만하다.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장자도와 대장봉 이제 선유도 맞은편의 장자도를 가기 위해 장자대교 위를 달려간다. 장자도는 대장도를 가기 위한 길목인데 장자도의 호떡마을이 유명해서 오가는 여행자들의 손에 호떡 하나씩 들린 걸 쉽게 본다. 장자도에 딸린 대장도는 선유도나 무녀도에 비해 작은 섬이지만 오밀조밀한 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섬 깊숙이에서 맛보는 자발적 고립의 행복을 누려볼 만한 포인트다. 고군산군도에 들어섰다면 대장도의 대장봉을 빼놓을 수 없다. 오르는 코스는 두 군데 길이 있는데, 우측 장자할머니 바위 쪽 계단길이 수월한 편이다. 비밀의 정원처럼 좁은 숲속을 걷는 듯하다가 정자 쉼터에 앉아 잠깐씩 숨을 고르고 올라야 한다. 해발 140m 정도지만 절대 만만치 않다. 정자 쉼터 기둥에 쓰인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글귀를 보면서 잠시 쉬었다가 구불길과 무섭게 경사진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한다. 숲길 옆으로 바다를 향한 할머니바위는 아기를 업은 여자가 밥상을 든 모습이라고 한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간 남편이 급제하여 돌아오자 아내는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려 내왔건만 남편이 데려온 소실을 보게 되었고, 서운한 마음에 그대로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숨차게 가파른 길을 오르고 섬에 담긴 이야기를 마주한다. 아시아의 숨은 명소로 CNN에서도 소개했던 고군산군도의 대장봉이다. 이윽고 마주하는 잔잔한 서해의 아스라한 섬 무리들이 자아내는 기운을 선사받는다. 땀을 식히면서 일몰 속에 잠긴 신비로운 섬 무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더없는 행운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다도해의 평화로운 풍광에 차분하게 압도당하는 순간이다.
- 2024-03-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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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은 욕구가 없단 편견이 문제 “건강한 성생활 하세요”
- 성생활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권리가 있다지만, 노인은 예외다. 성생활은 둘째치고 연애도 하기 쉽지 않다. 우리 사회는 노인을 ‘무욕의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잘해드릴게”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박카스 아줌마 역할을 맡은 배우 윤여정의 대사다. 고령자 성매매의 대표적인 예가 ‘박카스 아줌마’다. 고령 남성이 많이 모여 있는 공원 등에서 박카스나 커피를 주며 성매매를 제안하는 고령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비롯해 KNN 다큐멘터리 ‘노인의 그늘’, 연극 ‘낙원상가’ 등이 이런 현상을 조명하기도 했다. 어째서 노인들은 숨어서 욕구를 해결해야만 하는 걸까. 심리학과 상담학을 전공한 권신란 나다움질문연구소 소장은 용인 성폭력상담소에서 성 상담에 관한 공부를 하던 중 노인의 성생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이에 ‘노인의 성’이라는 책을 내면서 노인에게도 욕구는 당연하며, 올바른 성 문화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를 만나 노인의 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 ‘남사스럽다’라지만 욕구는 있다 노인은 성에 대한 욕구가 정말 없을까? 2021년 대한임상노인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이범석 국립재활원장이 발표한 ‘노인의 건강한 성생활’에 따르면 노인들은 왕성한 성생활을 하고 있었다. 60~64세는 84.6%, 65~69세는 69.4%, 75~79세는 58.4%, 80~84세는 36.8%가 성생활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노인에게 성생활에 관해 물으면 열에 아홉은 “아유 뭘 남사스럽게 그런 걸…”이라 말한다. 사회는 노인을 무욕의 대상으로 보고 노인들 스스로도 성에 대해 말하길 부끄러워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욕구는 있다. 문제는 그들이 성에 대해 이야기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권신란 소장은 ‘아내가 나를 거부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남편들의 하소연을 종종 듣는다. 권 소장은 노인 세대의 성에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 성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나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편견과 폐쇄성이 성매매로 이어지고, 성 질환에 노출되는 등 여러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노인 성범죄가 늘어난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과거에는 성폭력 교육이 주로 이뤄졌어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그런 주제를 오히려 불편해하시더라고요. 그게 나중에는 성인지 감수성 교육으로 이어졌는데요. 불과 몇 년 전 강의에 나갔을 때 ‘성인지가 어느 잡지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노인에게 정말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에요. 아직도 피임 도구가 있는지 모르거나 자위 도구를 사용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노인의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잘못된 성 지식은 노인을 억압하는 기폭제가 된다. 자신은 이제 성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버리거나,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하거나, 성에 관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불결하게 여기거나, 강제 금욕으로 스스로를 제약하기도 한다. 노인의 성생활이 더욱 음지로 파고드는 이유다. 슬기로운 노후 성생활 권신란 소장은 성생활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는 성을 너무 단편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성에는 ‘섹스’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삶, 시대, 문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죠. 예를 들어 요즘 청소년들은 AI와도 섹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노인들은 이런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과거 우리는 성을 ‘생산’의 개념으로만 봤어요. 노인들은 그런 개념에 익숙한 세대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 역할조차 바뀌잖아요? 그러니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 ‘문화’ 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노년기에 성생활을 잘 이어가려면 무엇보다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삽입을 가정하면 노년기의 성관계는 남성의 발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나이 들수록 발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애무와 자극이 필요하다. 여성은 갱년기를 겪으면서 질 건조증, 성교 시 통증, 성 욕구 감소 등으로 성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남녀 모두 노년기에 성행위를 하는 데 불편한 지점이 생긴다는 것. 권 소장은 그럴수록 남성의 경우 남성 클리닉에 가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여성도 불편한 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성을 더 넓은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조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에는 ‘삽입’만 있는 게 아니다. 주고받는 대화, 뽀뽀 등의 스킨십도 성생활에 해당한다. 결국 성생활이란 ‘온기’를 나누는 행위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남녀 모두 신체 접촉만으로도 성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권신란 소장은 노인을 위한 성교육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요즘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 무척 잘 되어 있다. 학교로 찾아가는 성 문화 버스도 있고, 청소년성문화센터도 있다. 자궁 체험, 피임용품, 성인용품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고,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배운다. 성병 교육도 필수다. 하지만 노인들은 이런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어르신들은 윤활제가 있는지도 모르세요. 알아도 사용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그러니 자위 도구는 어떻겠어요. 어떤 자위 도구가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사용하면 몸 어딘가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성인용품점을 가본 노인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혼자 가기 부끄러워 부부가 함께 방문했다가, 외국어투성이인 기구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결국 콘돔만 사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대학교 성 문화 축제에서 나와 상대의 성기를 직접 만들어보고 콘돔을 사용해보는 행사를 했는데요. 편의점만 가도 콘돔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된 피임 도구임에도 사용법을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러니 어르신들은 어떻겠어요? 피임 도구나 성인용품뿐만이 아니에요. 월경을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월경대 사용법을 알려주듯 노인 완경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런 교육은 이뤄지지 않고 있거든요. 성과 관련된 교육 기회를 다양하게 마련해주면 어떨까 싶어요. 아마 어르신들은 ‘아이고 민망해라’ 하시겠지만, 막상 해보면 즐겁게 체험하고 ‘좋았다’는 피드백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청소년처럼 복지관, 노인병원, 경로당, 요양원 등 노인이 많은 곳에 찾아가는 성 문화 상담소나 성 문화 버스가 생긴다면 성에 대한 노인들의 이해도도 높아질 것이다. 또한 성병 교육도 필요하다. 보건복지부 ‘노인 성생활 실태조사’(2012)에 따르면 노인의 성병 감염 빈도는 36.9%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성병에 걸리더라도 대부분 이를 숨기거나 병원에 가지 않는다. 권 소장은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듯, 성병에 걸리면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파트너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권신란 소장은 더 많은 노인이 성에 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같은 세대의 노인이 멘토와 멘티 관계가 되어 고민을 들어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수원에 있는 한 복지관에서는 노인분이 성 상담을 해주고 계시더라고요. 복지관 노인분들이 동아리를 만들어서 돌아가며 상담을 해주신대요. 무척 인상적이었죠. 노인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많아져야 안전하고 건강한 노후 성생활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사회와의 관계를 놓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권 소장은 노인의 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했다. 먼저 노인 대상 성매매는 매년 증가하는 독거노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만큼, 이성을 만날 기회를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이다. 최근에는 노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실버 카페, 콜라텍, 효도 미팅, 하루 커플 여행, 커플 취미 교실 등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여가 생활을 즐겨야 한다. 여가 활동은 노년기의 생활 만족도와 삶의 질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그런 맥락에서 자원봉사나 일을 하는 것도 좋다. 자원봉사는 은퇴 후 삶에서 적극적인 사회참여 계기가 된다. 통계청의 ‘이혼통계자료’에 따르면 노년기 이혼 사유 1위는 경제력 상실이었다. 따라서 일자리를 통해 건강과 노후 경제를 함께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도 필요하다. 무료함과 외로움을 달래는 데 효과적이며, 성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 들어갈 에너지를 대화로 풀면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부부라면 성에 대한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대화가 부부 사이 성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사별이나 이혼 등으로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라면 황혼 재혼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노인들은 여전히 성에 관심이 많고 성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사실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요. 복지관 등에서는 노인 성 문화를 바꿔가고자 하는 시도가 꾸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드러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노인의 성을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는 선진국처럼, 우리 사회도 노인의 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 2024-03-2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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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중년의 성생활, 터놓고 말합시다!
-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는가? 혹시 알음알음 퍼진 부정확한 기준과 정보 탓에 서로를 질책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쪽만의 문제, 하나의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알던 섹스는 잊고 인생 2막, 3막을 위해 다시금 사랑의 도움닫기를 해보자. 섹스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은 예전에 비해 완화됐지만 아직 사람들은 ‘이 주제’를 스스럼없이 말하길 꺼린다. “에이,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나이 들어서 가족끼리 왜 그래? 주책이야”라며 서로를 등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섹스는 단순히 쾌락만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과 ‘관계’ 두 가지가 유기적으로 합쳐진 삶의 소중한 자원이다. 전문가들은 성적으로 친밀할수록 두 사람 사이가 건강하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자아 존중감 회복, 삶의 의욕 증가 등 정서적 효과를 누리는 건 덤이다. 성생활을 슬기롭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섹스=거시기하다’는 인식의 오류 우리는 부모의 사랑과 섹스로부터 태어났다. 2차 성징을 겪은 뒤 어른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섹스를 한다. 성은 요람부터 무덤까지 삶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자 인간의 근원인 셈이다. ‘거시기하다’며 민망하고 쑥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또한 ‘거시기’(성기)를 통한 삽입 성교만이 전부라 여기기도 하지만, 이는 섹스의 한 종류일 뿐이다. 애무, 오럴섹스, 키스, 포옹, 손잡기 등도 모두 섹스다. 건강한 섹스 경험의 부재 ‘나이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와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성행위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기부전이나 질 윤활액 분비 감소, 감각 둔화 등으로 한계를 느낄 때도 있지만, 의학 기술의 발달로 치료를 통해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과거의 정서와 경험이 현재와 미래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해 75세 노인이라도 청년 시절 행복한 섹스를 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향후 기대와 욕구가 커지고, 25세 청년이라도 관련된 트라우마나 혐오가 있다면 몸과 마음이 섹스를 거부하는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현대로 오면서 유튜브,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쾌락이 늘어난 까닭에 점점 섹스를 경험할 기회가 줄었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현재 한국은 성관계를 적게 하는 섹스리스를 넘어 아예 성관계를 하지 않는 섹스오프 상태에 봉착했다”며 “코로나 시대와 불경기를 지내면서 연애나 사랑이 필수라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이어진다면 개인뿐 아니라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풀리지 않는 매듭은 없다 ‘섹스에는 정년이 없다’는 말, 이제는 흔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러 원인으로 성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오랜 시간을 한 상대와, 같은 방식으로, 매번 만족할 만한 섹스를 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젊을 땐 좋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반복되는 패턴에 만족도가 떨어진 사람, 특정 이유로 사이가 소원해져 성생활까지 타격받은 사람, 사소한 습관이나 외모 결함 때문에 몸의 대화 자체가 단절된 사람 등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사실 좋은 섹스는 침대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함께 멋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좋아하는 꽃을 선물하고,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는 태도가 선행돼야 한다. 관계 시에도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섹스만이 쾌감을 주는 건 아니다. 섹스는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스한 온기, 떨리는 마음, 촉촉하고 매끄러운 느낌 등으로도 행복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원하는 횟수나 시간대, 자극받고 싶은 부위, 성적 취향 등이 있다면 솔직하게 요구해야 한다. 서로의 신체적·정신적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단계다. 유외숙 상담21 성건강연구소장은 “연애·결혼 초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데도 오랜 시간 불만이나 욕구를 참으며 한쪽 또는 둘 다 불만족스러운 섹스를 하는 사람이 많다”며 “좋으면 좋고,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모 아니면 도’라 여긴다”고 말했다. 여기서 관계의 주체는 언제나 나여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고 만족을 위해 열심이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대화와 소통으로 중간중간 점검하며 개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유 소장은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건강한 노후를 위해 욕구와 방식을 조율하며 서로 잘 싸워야 한다”며 “한 꺼풀, 두 꺼풀 덜어내다 보면 사람 관계의 본질은 같다”고 조언했다. 중년 이후의 행복한 성을 위해 알아야 할 8가지 ●부부 사이 성생활의 질은 서로의 친밀감이 좌우한다. 문제가 있을 때는 섹스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 방법을 개선하는 등 친밀감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성생활은 중년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규칙적인 섹스가 면역력 향상, 노화 방지, 통증 감소, 심장질환 예방, 자궁질환과 전립선질환 예방,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고 수명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중년 이후 성기능 장애 예방을 위해서는 운동이 중요하다. 운동은 남녀 모두의 성기능 장애를 예방할 수 있다. 남성의 걷기·달리기 등 유산소 운동은 발기부전 예방에, 여성의 케겔운동은 실금을 줄이고 성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발기부전 같은 남성 성기능 문제는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도록 하자. 중년 이후 발기부전은 당뇨, 심장질환, 고지혈증 등의 첫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어 성인병의 신호탄이다. 발기부전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거나 친구와 상의하지 말고 전문의와 상담하자. 먹는 약이나 주사제로 발기부전을 해결할 수 있고, 성인병 동반 여부도 확인 가능하다. ●중년 여성에게 나타나는 성교 시 통증은 해결할 수 있다. 중년이 되면 질 윤활액 분비가 감소해 성교통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때 윤활제를 사용하면 된다. 이후에도 성교통이 계속된다면 전문의의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충분한 애무를 할 때 만족도가 높아진다. 여성은 삽입 성교만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힘들다. 성행위 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애무해야 여성의 성적 만족이 높아진다. 가장 예민한 성감대는 질 속이 아니라 음핵(클리토리스)이다. 애무는 길게, 삽입은 늦게, 삽입 시기 결정은 여성에게 맡기기를 권한다. ●성적 호기심이 유발되도록 창조적인 변화를 시도하자. 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체위,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는 활력을 주기도 한다. 부부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멋진 장소에서 섹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등 판타지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다. ●용불용설(用不用說), 규칙적인 성생활 여부에 따라 성기능이 유지되거나 퇴화한다. 중년 이후에도 꾸준한 성생활을 통해 성기능이 향상되고, 성적 만족도 높아질 수 있다. 중년 이후 많은 부부가 젊을 때보다 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다. 출처 ‘2015 대한성학회 추계학술대회’, 정리 이범석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교수
- 2024-03-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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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법인 원, 일·가정 양립 법조문화상 수상
- 법무법인 원이 2024 일·가정양립 법조문화상을 수상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014년부터 법조계의 일과 가정의 양립 문화를 확산하고자 이에 기여한 법무법인을 발굴해 일·가정양립 법조문화상을 수여하고 있다. 법무법인 원은 남성 소속 변호사에게 12개월의 육아휴직 제도를 활용하도록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만장일치로 수상했다. 법무법인 원은 △출산휴가(배우자 출산휴가)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가족돌봄휴가 등의 법정제도는 물론 △시차제 근무제 △근로시간 유연제도(자녀의 보육기관 등원을 위해 오전 10시 이전까지 출근할 수 있도록 함) 등 다양한 복지제도를 활용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해왔다. 더불어 법무법인 원은 젠더 갈등과 성 평등 이슈와 관련한 교육, 심포지엄 등을 전개해왔다. 인사위원회와 인턴 프로그램 준비 위원회 등 사내 주요 위원회와 이사회를 꾸릴 때 성별 관련 없이 구성하고, 모든 변호사들의 의견을 동등하게 반영할 수 있게 했다. 현재 육아휴직 중인 김민후 법무법인(유한) 원 변호사(변호사시험 제5회)는 “육아가 생각 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고, 특히 임신과 출산을 거치는 여성 변호사들에게는 사회적으로 더 많은 배려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기원 대표 변호사는 “아직 법조계에는 남성 육아 휴직이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사회 분위기와 ESG 경영에 따라 점차 변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법무법인 원은 앞으로도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고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 2023-12-1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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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따라 흐른 선연한 역사,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검무
- 경남 진주시는 예로부터 인재 배출이 잦았던 고장이다. ‘영남 인물의 절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충신이 많았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이들의 비범한 행장이 이 고장에 잇따랐다. 그래 ‘충절의 고장’이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얼로 빛나는 진주의 각별한 역사성을 웅변하는 명소를 꼽자면? 단연 진주성이 아이콘이다. 임진왜란 때의 전사(戰史)와 의용의 서사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을 둘러보지 않고 진주를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내 강변에 있다. 성의 남벽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강물과 벼랑이 지닌 전략적 가치에 착안해 성을 구축했다. 본래 내성과 외성으로 짜인 이중구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은 스러지고 내성만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790m, 높이는 5~8m에 달한다. 삼국시대 때 토성(土城)으로 축조됐던 진주성이 석성(石城)으로 거듭난 건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따라서 축성의 변천사와 기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고 훤칠한 성내 공간 곳곳마다 잘 단장돼 생경한 기분을 자아낸다. 천년 고성이되 마치 신축한 것처럼 매우 미끈한 게 아닌가. 근래의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걸 알 만하다. 한때는 고즈넉한 폐허와 잔해 사이에 간신히 존재했겠지만 고칠 것 고치고, 다듬을 것 다듬고, 보탤 것 보태어 회생했다. 복원사업 이전의 성내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걸 다 철거해야 했다. 그러니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필연이었겠다. 작업자들은 진주성의 본연과 본질에 부합하는 복원을 완수하기 위해 실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리듬이 있다.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며 거대한 타원을 그리는 성곽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들이 초록을 뿜어 소풍과 산책을 즐길 만한 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다. 일쑤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다. 수성(守城)과 승전을 꾀하기 위한 갖가지 구조물이 즐비한 곳이다. 전투 지휘소로 쓰인 서장대와 북장대, 포를 쏘았던 포루, 전공을 새긴 사적비와 순절의 넋을 기리는 사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까지 성내에 있어 답사객들의 호감을 산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당시 장수는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 1592년 10월 김시민은 전라도와 이어지는 전략 요충이었던 진주를 삼키기 위해 쳐들어온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김시민이 거느린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3800여 명에 불과했다지. 중과부적 상황이었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시민의 명민한 지략이 작동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는 성 밖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왜군을 교란할 수 있는 교묘한 작전을 전개하게 했다. 성내의 부녀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야간엔 악공들의 피리 소리로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지략뿐인가, 김시민은 개혁적 성향의 무장이라서 휘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관행을 타파했으니 매사 솔선수범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 신식 병기 동원에도 신경을 썼다. 이래저래 승전은 애당초 떼어놓은 당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 막판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성내 백성들의 곡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던가. 비단 김시민을 애도하는 호곡뿐이었으랴. 대첩이 끝난 자리에선 죽은 자들을 끌어안은 산 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왔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즉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고 기록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사방 30리 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진주성은 일종의 성지(聖地)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선인들의 역사가 선연한 게 아닌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지옥의 묵시록을 술회하는 성이라는 점에서는 반전(反戰) 메타포가 응축된 곳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전쟁이란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시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슬픈 숙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극찬한 ‘진주검무’ 진주성 남쪽 기슭, 성곽에 인접한 곳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크고 당당하고 수려한 누각이다. 한때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정을 해제했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의 보수작업을 통해 얻었다. 진주성 아래로 굽이치는 남강과, 저 멀리 산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진주성 최고의 전망대다. 조선 선비들이 풍류와 사색을 즐겼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전투 지휘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촉석루 역시 전쟁이라는 부조리극이 낳은 상처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촉석루 아래 강변에선 진주성대첩 즈음 한 여인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 영원히 남을 충절의 화신이 됐다. 바로 논개다. 진주 관기(官妓)였던 그의 재능은 미색으로 향기를 뿜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음인가.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까지 겸비했나? 그는 기꺼이 한 몸 바쳐 한 시대의 참화에 빛을 흩뿌렸다. 촉석루 아래 강변엔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 ‘의암’(義庵)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느 날 촉석루에 유람을 왔다가 ‘일개 작은 여인이 왜적의 우두머리를 섬멸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로 시작되는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썼다. 논개의 거룩한 행장을 기리는 글이다. 다산이 진주에 와서 탄복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주에 전승돼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진주검무’를 보고 찬탄했던 것. 검무는 여성 무용수들이 무사 복장을 하고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촉석루에 앉아 이 춤을 감상한 다산은 참을 수 없는 흥에 겨웠나? 그는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검무를 추는 여인의 매력적인 자태와 춤사위의 삼엄한 격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명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이었던 다산은 음악과 춤에도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악기를 연구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다산이 진주검무를 시로 써서 극찬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대 예능보유자는 ‘진주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인’ 고(故) 김수악이다. 김수악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 목석도 들썩였단다. 춤으로 도가 튼 달인이었다. 진주검무의 맥은 오늘날 예능보유자 유영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예인다운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춤사위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일제강점기 때 기생 단체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진주의 자연지리 가운데 빼어나기론 단연 남강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굽이치는 남강의 폭은 넓고 물살은 유유해 아름답다. 예로부터 진주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생명의 젖줄이다. 진주의 보배에 해당하는 진주성이 남강가에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의 역사와 문화는 남강과 함께 흘러왔다. 그렇다면 진주의 문화답사 1번지는? 김길수 문화원장은 진주성과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를 꼽는다. “진주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 그러나 진주성을 찬찬하게 답사하는 이는 드물어 아쉽다. 대체로 촉석루와 논개 유적인 의암만 훑어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도는 온전한 답사 방식을 채택하면 좋겠다. 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과 남강변에 조성된 성 밖 산책로를 통해서도 역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다.” ‘의기 논개’ 역시 진주의 대표 캐릭터다. 논개의 행장이 지역 정서에 미친 영향엔 어떤 게 있을까? “일개 기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세계 역사상으로도 논개가 유일무이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걸 실천한 인물이 논개이자 논개 정신이다. 따라서 지역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3.1만세 운동 때 진주에선 기생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돼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 ‘진주검무’는 물론 가무악(歌舞樂)의 대가였던 고 김수악 선생의 예술은 현재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김수악 선생이 양성한 제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진주에서 교방예술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우리 문화원은 선생의 제자들을 문화학교 강사로 영입해 강의를 맡기고 있다. 향후 ‘김수악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전통 민속이 흔히 현대의 풍속에 밀려 퇴색하고 있다. 반면 진주에선 ‘진주 소싸움’의 명맥이 이어져 흥미롭다. “농업이 번성했던 과거부터 진주 사람들은 농한기에 소싸움을 즐겼다. 일설엔 진주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라 신라와 백제 편으로 나눠 소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소싸움 무대로 적격인 남강 백사장이 있어 명맥 유지가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주요 문화원 사업을 소개해달라. “외람된 얘기지만 진주문화원은 전국 문화원 중 으뜸이라 자부한다. 지역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식견과 애착을 토대로 인화단결을 꾀해온 결과라고 본다. 중점 사업은 진주의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다. 지속적으로 순절 의병들을 발굴, 연구해왔다.” 타지의 문화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을 추진한다지? 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순절 의병들을 찾아내고 조명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의 여러 문화원들과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어떻게든 의병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원은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하고 있다. 이건 앞으로 더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 2023-10-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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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찾은 지방소멸 해법, 목표는 ‘과밀’이 아닌 ‘적소’
- 2005년부터 법을 제정하여 저출산·고령화 대책을 실시한 지 18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2020년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초과하는 인구 데드크로스(Deadcross)를 막을 수 없었다.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것은 결국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령자를 위한 의료복지나 출생 촉진을 위한 좋은 육아 환경 마련은 아직 멀었다. 2023년부터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 초고령화에 대한 새로운 법들이 시행되고 있다. ‘인구감소지역지원특별법’은 인구 감소 지역 89곳을 지정하여 전국에 지역소멸대응기금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고향사랑기부금법’은 외지인의 기부를 유치하여 지역을 살리고자 한다. 수도권 인구가 2000만 명이고 비수도권에 3000만 명이 사는 이 나라에서 포화 상태의 수도권과 과소 상태의 비수도권 지역을 적절히 관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포화와 과소 상태라면 적절한 규모는 몇 명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가 연구하러 다니는 대부분의 지역은 인구 10만 명이 채 안 되는 곳이다. 대도시는 청년 비율이 30% 넘는 곳도 많지만 5%도 안 되는 지역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인구를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몇 명이 되면 살기 좋아질까요?”라고 물어보면 이내 함구하고 만다. 무의식적으로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포화 상태의 수도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에 이르러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수도권에 많은 기회와 자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많은 기회와 자원이 모두에게 합당하게 배분되어 다들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일본 소도시의 적소 개념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소(過疎)는 ① 너무 성김 ② 어떤 지역의 인구 등이 너무 적음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② 어떤 지역의 인구 등이 너무 적음에 더하여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치·경제·사회 문제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 ‘과소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적소(適疎)라는 말이 있다. 일본 홋카이도의 인구 1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 히가시카와(東川)에서 20년 동안 다섯 번 연임 정장(町長, 우리나라로 치면 면장 정도)을 한 마쓰오카 이치로(松岡市) 씨가 제안하여 마을의 기본 방침으로 정한 개념이다. 히가시카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번역된 ‘히가시카와 스타일’이라는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인구 1만 명이 안 되는 이 도시에 외국인이 500명이 넘고, 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일본 최초의 공립일본어학교 학생들이다. 연간 인구가 40명씩 증가하고, 그 증가세가 25년간 지속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영월군과 자매도시다. 홋카이도에서 제일 높은 다이세쓰산의 눈 녹은 물 덕택에 일본 유일의 수도세 무료 지역이다. 임산부에게 청소 지원과 점심 택배 서비스를 하고, 엄마·아빠도 이용할 수 있는 육아카페 쿠폰을 제공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새긴 의자를 선물하면서 ‘네가 이 지역을 떠나더라도 네 자리는 언제나 이 지역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너의 의자’ 사업을 진행한다. 교육 환경은 넉넉하기에 초등학교는 개방형 환경에서 수업을 진행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마을 전체가 평지여서 다니기도 편하고, 마을 한가운데 아웃도어 브랜드 몽벨이 위치해 다이세쓰산으로 가는 등산객들이 많이 들르는 인기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이 적소 개념을 도입하며 1985년부터 시작한 사업은 ‘사진 마을’이다. 사진기를 특산품으로 제작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진 찍기 좋은 경관 만들기, 사진 찍기 좋은 사람 만들기, 사진 찍기 좋은 물건 만들기가 핵심이다. 사진 찍기 좋은 예쁜 마을을 만들기 위해 이주자에게 지원금을 주는 게 아니라 이주자의 주거 조건을 엄격히 제한한다. 사진 찍기 좋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 주민이 항상 웃으며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사진 찍기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목공과 디자인에 공을 들여 수준 높은 목가공품이 넘쳐나는 마을이 되었다. 40년 역사를 지닌 ‘국제사진 페스티벌’에 참여한 중고생들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사진 찍기를 요청하면 주민들이 기꺼이 환대하는 놀라운 문화도 형성되어 있다. 1지자체 1특산품을 경쟁하는 시대에 과감하게 ‘문화’를 상품으로 내걸고 마을 전체를 여유롭고 살기 좋으면서 돈도 버는 마을로 만든 것이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여유다 사람, 문화, 자연이 넉넉하게 어우러진 적소 상태는 이를테면 ‘적절하게 성근 상태’다. 너무 빡빡하거나 너무 쓸쓸하지도 않으며 딱 살기 좋은, 여유 있고 안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도시든 시골이든 모두가 꿈꾸는 상태일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살기 좋은 지역은 몇 명이 사는 지역인가. 그 답은 ‘몇 명’이 아니다. 인구를 늘리고 줄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인구의 어떤 만족을 유도할 것인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의 터전에서 바라는 것은 적절한 여유와 그로 인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 2023-07-28 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