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의 일부를 옮겨 싣는다. 첫 번째 주제는 손이다.
1 내게 손은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다. 삶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기 때문이다. 손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인생이 느껴진다. 나이테와 같은 주름살과 결혼반지가 어우러진 친할머니의 손은 할아버지와의 사랑과 추억을 증명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반지를 끼고 다닌다. 그런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 언젠가 내 손에 새겨질 삶의 나이테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게 된다.
2 각얼음을 연상시키는 액세서리로 무장한 아버님의 손.
3 삼천포에서 미용실을 하는 어머님의 손. 어머님의 머리는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의 모든 색상으로 염색을 해보시고는 뻔한 색이 재미없어 핑크색으로 염색했다고 말했다.
4 성북동 새이용원 이덕훈 이발사의 손. 그는 19세부터 이발사인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이발사다. 누구보다 멋진 손에 염색약이 묻어 있다.
5눈에 띄는 지팡이를 지닌 아버님. 연락처를 ‘스핑크스 아버님’으로 저장해뒀다.
6 ‘디올 어머님’. 별칭은 처음 뵈었을 때 ‘디올’(Dior)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계신 데에서 착안했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 멋있는 분이다. 그의 당당한 모습이 내 눈에는 코코 샤넬(패션 브랜드 ‘메종 샤넬’의 설립자이자 디자이너)처럼 보인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70여 년간 서울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며 빠르게 도시화했다. 끊임없이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서울은 주택 부족에 시달렸다. 주택난 해결을 위해, 또 더 쾌적한 주거 환경 조성을 위해 도시의 모습과 집은 바뀌어 갔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생활 모습 역시 달라져 갔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용석)은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울에 지어졌던 다양한 집의 형태, 서울시민의 생활 변화를 들여다보는 전시 ‘서울살이와 집’을 마련했다. 오는 11월 4일(금)부터 내년 4월 2일(일)까지 서울생활사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2021년 서울생활사조사연구 ‘서울시민의 주생활’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1부 ‘서울, 서울사람, 서울집’, 2부 ‘서울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3부 ‘서울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 등의 주제로 구성됐다.
1부 ‘서울, 서울사람, 서울집’에서는 서울 시역의 확장, 서울로 집중되는 인구로 복잡해진 서울의 모습과 부족해진 집을 짓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 생활의 변화를 야기한 제도와 가구 및 가전의 등장을 연표와 정보 그림(인포그래픽)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2부 ‘서울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에서는 서울의 다양한 집들 중 대표적인 도시형 한옥, 재건주택, 2층 슬라브양옥, 아파트라는 4종류의 집을 소개했다. 각 집의 안과 밖의 모습,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서울시민의 삶을 영화와 미술작품, 실제 크기로 재현된 연출 공간으로 체험할 수 있게 구성했다.
2부에서 활용한 영화는 박종호 감독의 ‘골목 안 풍경’(1962)로, 성북동의 어느 도시형 한옥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암동 재건주택의 모습은 당시의 평면도를 바탕으로 실제 크기로 재현‧연출한 공간을 체험케 한다.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1961)이라는 영화를 통해 비슷한 후생주택 생활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이후 1970년대에 많이 지어졌던 2층 슬라브양옥을 소개하는 곳에서는 안민정 작가의 ‘우리 집 세부도’(2015)라는 작품을 통해 그 시절 셋방살이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
또한 전시는 1970년대 중후반에 준공된 13평의 잠실시영아파트가 실제 크기로 구현돼 당시 공간을 재현 및 연출했다. 당시 잠실시영아파트에 살았던 서울시민의 이야기를 인터뷰 영상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3부 ‘서울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에서는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집을 원하던 사람들이 점차 집 자체의 재화적 가치에 집중하게 된 모습들을 광고 키워드의 변화로 살펴본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집 안에서 일어나는 생활상의 변화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집의 모습까지 바꾸고 있다는 점을 설문조사의 결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1950년대 말 그리고 1970년대 말의 어느 평범한 서울사람의 집이 재현된 공간에서, 그때 그 시절 방의 크기와 집 안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며 “가족들과 함께 조부모, 부모가 살았던 옛 집을 회상하며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및 주말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정보는 서울생활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이틀 전이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아.” 수화기 너머의 퉁명스러운 한마디 믿고 나선 길. 곧 추워질 날씨를 생각해 홍삼 음료수를 샀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10분쯤 걸었을까. 낡은 간판 옆 느리게 돌아가는 삼색등과 빈 의자 네 개를 발견했다. 손님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국 최초 여성 이용사의 특급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 바로 성북동 새이용원이다.
구성진 트로트 가락, 엇박으로 어우러지는 가위 소리 대신 크게 틀어둔 TV 뉴스, 문 앞에 길게 늘어진 주렴 대신 칠이 떨어진 낡은 문. 이용원 내부는 상상했던 모습과 조금 달랐지만 세월이 그득 배어 있었다. 새이용원의 주인장, ‘명랑 이발사’ 이덕훈(87) 씨는 주 고객층 연령대에 한참 못 미치는 기자에게 앉아 계시던 자리를 권했다. “여자는 하체가 따뜻해야 해. 이리 와서 앉아.”
장녀, 아내, 엄마, 그리고 이용사
권유에 못 이겨 자리에 앉았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최근 전파를 탄 유명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이 씨가 이용사의 상징인 흰색 가운을 걸치고, 손님 목에 보자기와 두루마리 휴지를 두르는 동안 4평 남짓한 공간을 둘러봤다. 큼직한 거울 위 빛바랜 이용사 면허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발 준비를 마친 베테랑 이용사가 손님에게 싱겁게 물었다. “여기 처음 왔어요? 나 유명한 사람이야. 방송도 많이 탔어.” 이윽고 이발을 시작하는 대신 서랍에서 누렇게 바랜 사진을 꺼내 들었다. “이 양반이 우리 서방님. 얘들은 우리 아들들이야. 인물이 아주 좋지?” 잘 짜인 각본처럼 이야기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5남 2녀 중 장녀인 이 씨는 일제강점기 때 군부대 이발 담당관으로 차출됐던 아버지를 보며 이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면 한 명이라도 손을 보태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서 이발 기술을 배우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이발소 허드렛일과 집안일을 전부 도맡으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1958년 이용사 면허시험에 합격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이발사가 됐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김두한이 ‘성북동 아줌마’를 찾아 머리를 맡길 정도로 솜씨도 좋았다.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남편에 아들들, 시부모까지 먹여 살리느라 하루에 스무 시간을 일했다. 이발소 안의 여자를 원숭이 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몸이 고된 것보다 가족을 먼저 보낸 아픔이 더 컸다. 스무 해 전 먼저 가버린 남편이 아직도 그립고 애달프지만 그는 새로운 해가 뜨면 다시 이용원 거울 앞에 선다. 제 몸보다 아꼈던 남편,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보내며 무던히 살아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또다시 가위와 빗을 쥐었다. 한 달에 1cm, 열흘에 1mm 자라는 150만 개의 머리카락을 만진 지 60년 세월이다. 처음 보는 손님 가르마를 보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임을 파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진짜 예술가
지난해 여름엔 셋째 아들마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꽃을 좋아했던 아들은 어머니에게 형형색색 꽃 사진이 가득한 휴대폰을 남겼다. 평생을 거울 앞에서 마네킹처럼 일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찍은 아들의 꽃 사진. 그는 매일 꽃 사진 너머로 아들을 만난다. 수백 종류 꽃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무궁화다. “오늘 하루만 살아. 내일이 어떻게 될 줄 알아?” 매일 피고 진다는 무궁화는 휴무일인 화요일을 빼고 매일 손님을 맞았던 이용원을, 이용사 이덕훈 그 자체를 닮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이 줄었다. 아쉽긴 했으나 그는 불평하는 대신 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손님이 없을 땐 일기를 썼다. 아들들이 사준 18년 된 철제 드라이어와 25만 원짜리 사감 선생님 안경, 아버지가 물려준 100년 된 바리캉을 앞에 두고 펜을 잡았다. 어느 날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적었고, 어느 날은 죽은 남편과 아들들을 향한 그리움, 가난해 제대로 먹이지 못했던 딸에 대한 미안함을 토해냈다. 그렇게 이용원 거울 앞 서랍장 속에, 탁자 위에 먼지 묻은 삶의 추억이 겹겹이 쌓였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짜 예술가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럼 당신은 정말로 잃을 게 없다.” 빈 페이지 없이 빽빽한 공책 속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갈망하며 우직하게 나아가는 이, 잃을 것 없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글귀 속 예술가의 정의가 그와 겹쳐 보였다. 여든일곱 나이에 가위를 쥐고도 흐트러짐 없는 손아귀 힘, 손님들이 찾아오는 한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굳건함이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부쩍 짧아진 해가 기척 없이 저물었다. 비워뒀던 이용실 의자 위에 보자기를 덮고, 잘린 머리카락을 쓸어다가 버린다. 인터넷에 고지된 영업 마감 시간 오후 7시가 채 되기 전. “요즘은 해 지면 닫아. 어차피 손님도 안 오는데.” 분주히 움직이던 그가 다른 편 보자기를 들춰 자양강장 음료수와 두유, 과자를 가득 쥐여줬다. “사랑해. 조심해서 들어가.”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날의 삼색등이 꺼졌다.
한 사람의 생애에 필(feel)이 꽂혀 일생을 바칠 수 있을까? 그러는 사람의 삶은 정녕 아름답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올인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 만해 한용운 기념관 전보삼 관장이다. 그는 어떻게 한 사람의 삶에 그토록 매료된 걸까? 그 궁금함을 풀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가을이 오는 남한산성을 찾은 건 실로 오래만이다. 가까이 살면서도 와본 지 1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하기야 서울 살면서 남산에 다녀온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히려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 하면 필수 코스가 남산이다. 아마 그들이 나보다 더 자주 찾지 않나 싶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은 주로 산성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음식점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떠난다. 필자도 그럴 심산으로 남한산성을 찾았다가 만해 한용운 기념관 안내판을 보고 둘러보게 됐다. 그러다가 이 기념관이 관이 만든 게 아니라 한 민간인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재 욕구가 발동했다.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많았던 소년
전보삼 관장은 어린 시절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강릉 집 근처에 포교당이 있었는데 궁금한 게 있으면 그곳에 가서 뭐든 묻곤 했지요. 윤회, 삶과 죽음 이야기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스님들 사이에는 강릉 포교당에 가면 당돌한 중학생이 한 놈 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하네요.”
그는 중학교 때 이미 내용도 잘 모르는 ‘반야심경’을 줄줄 읽고 ‘팔만대장경’도 구매해서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생을 바꾼 책,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궁금한 것이 많았던 이 학생에게 어느 날 포교승이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던져줬는데, 이 시집이 전 관장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의미를 모르던 반야심경의 내용을 ‘님의 침묵’에 대입해보니 이해가 되었지요. ‘님은 갔습니다’라는 의미가 색즉시공(色卽是空) 아닌가요? 모든 물질적 형상들은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색즉시공이죠.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 아닙니까? 그때부터 ‘님의 침묵’과 만해에 필(feel)이 꽂혔지요.”
*공즉시색(空卽是色):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 현상의 하나하나가 그대로 실체라는 말.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만해의 시집을 읽으며 전 관장은 더 깊은 불교 공부를 했고 만해 한용운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만해에 관한 물건들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만해 한용운의 연구에 푹 빠지다
만해에게서 인생의 숭고한 삶의 가치를 깨달은 전 관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실천하리라 약속했다.
“첫째는 만해가 말년을 보냈던 성북동의 심우장을 찾는 일이고, 둘째는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는 만해의 묘소를 찾아보자 한 것이었지요. 마지막 다짐은 만해의 제자 강석주 스님을 찾아 생전의 만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이후 그는 삼청동 칠보사에 기거하는 강석주 스님을 찾아 만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해의 사상에 더욱 매료된다.
“강석주 스님이 기억하는 만해 스님은 ‘나라 사랑에 있어서 부처 같은 분’이었습니다. 또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고 독립운동사에서 만해의 업적은 아주 특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3·1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분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기도 했지요.”
전 관장은 1979년 12월, 만해 묘소를 찾아 주변을 정비하고 상석과 비석을 세워 묘비 제막식을 주도했다. 이뿐만 아니라 1981년 심우장에 기념관을 설립했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에게 한 세 가지 약속을 다 지켜냈다. 1980년 6월에는 ‘한용운 사상연구’를 펴냈고, ‘만해의 사상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1990년에는 성북동에서 남한산성으로 기념관을 옮겼다. 이때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를 팔아 남한산성 근처 땅을 샀고 1998년에는 사재를 털어 현재의 기념관을 재개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념관에는 어떤 것이 있나?
기념관이 소장한 자료 하나하나에는 전 관장의 손때가 묻어 있다. 소장품에는 ‘님의 침묵’ 초간본과 130여 종의 판본이 있고,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 시집도 있다. 이 밖에 만해 친필 유묵과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 학술논문, 연구자료 등 3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관련 자료 수집 비화
만해와 관련된 자료라면 어디든 달려가 자료를 수집한 전 관장은 ‘님의 침묵’ 초간본을 샀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78년 고서 경매장에 처음으로 ‘님의 침묵’ 초간본이 나왔어요. 그러나 이 책은 팔려고 내놓은 것이라기보다 경매장 흥행을 위한 상징적으로 나온 것이었어요. 아예 팔 생각이 없었으므로 시세보다 10배가 더 높은 가격을 붙여놓았어요. 그때 소장자를 알아놓고, 당시 교수 월급이 10만 원이었는데 1년을 모아 50만 원을 주고 구매했지요.”
사설 기념관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전 관장은 또 한 가지 비화를 들려줬다.
“소장품 중에 국가에서 만해 한용운에게 수여한 훈장이 있어요. 원래는 소장자의 집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거지요. 그래서 당시 총무처에 재발급을 의뢰했는데 훈장을 재발급한 사례가 없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 차례 기념관에 전시해 후세에 알릴 거라고 설득한 끝에 재심의가 처음 열렸고 결국 훈장 재발급을 받아냈지요. 훈장 재발급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일이랍니다.”
남한산성으로 기념관을 옮긴 동기
만해 기념관은 만해가 말년을 보낸 성북동 심우장에서 1981년 처음 문을 열었다. 그러다 1990년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당시 심우장은 문화운동을 하기에는 좋았지만, 공간이 좁고 외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남한산성이 떠올랐어요. 남한산성은 호국의 성지로 알려져 있고 찾는 사람도 많잖아요. 남한산성을 찾는 이들 중 10%만이라도 기념관에 들러 만해 스님을 알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몰입한 아름다운 삶
전보삼 관장은 만해라는 한 사상가의 삶에 매료되어 몰입한 사람이다. 사설 기념관을 운영하며 사비로 자료를 수집하고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후세에 알리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앞으로 남은 생의 계획을 묻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해 정신을 선양하고, 만해 정신과 철학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 정신과 사상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흰머리가 뒤덮인 전보삼 관장의 생애가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만해 기념관에서 열리는 행사
수시로 좋은 전시회 및 행사가 열린다. 10월 30일까지는 전길수 선생이 기증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전길수 선생은 1941년 경남 함양 출신으로 ㈜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평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40여 년 전부터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구룡산인 김용진, 긍석 김진만, 해강 김규진, 위당 이계호, 소하 김익효, 의재 허백련의 작품 등 기운 생동하는 사군자 작품 60여 점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체험 학습장도 운영
체험학습을 통해 만해의 사상과 민족 혼을 일깨우는 학습장이다.
● 만해의 시를 이용한 시화 족자, 시화 등, 시화 부채 만들기 외
● 탁본: 태극기, 만해 영정, 남한산성 고지도 외
● 어린이 활동지: 만해와 역사 여행 등
전보삼 관장 약력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 취득, 신구대학교 교수 정년퇴임.
경기도박물관장(2015~2017년), (사)한국박물관협회회장(2009~2015년) 역임.
현재 (사)한국문학관협회장(2016~).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백견이 불여일문’이다. LP 음반 속 옛 노래를 두 귀로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을 소개한다.
명동 ‘세시봉’, 충무로 ‘카네기’, 종로2가 화신백화점 3층의 ‘메트로’. 이름만 들어도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이곳은 과거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음악감상실이다. 음악을 향유할 방법이 많지 않았던 당시 청년들에게 음악감상실은 흥과 한을 표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어느덧 클릭 한 번만 하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0과 1로 가득한 오늘날에도 옛 감성을 재현한 공간들이 있다. LP 음반이 돌아가고 최신 가요 대신 올드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음악감상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아날로그를 고집한 이들 덕분에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해 있다.
백숙집 건물에 숨은 반전 매력 ‘리홀뮤직갤러리’
서울 성북동 누룽지 백숙집 건물. 벽에 붙은 LP 음반 표지를 따라가다 보면 희미하게 들려오는 재즈 선율이 이어서 길 안내를 한다. 소리의 근원지로 가 보니 양 벽을 빼곡하게 채운 LP 음반과 한가운데 놓인 1930~40년대 빈티지 스피커들이 그 위엄을 자랑한다. 위압감에 당황하기도 잠시, 고막을 가득 채우는 진공관 사운드에 홀려 착석한다.
리홀뮤직갤러리는 인쇄업체 경림코퍼레이션 리우식 대표가 2014년부터 운영해온 음악감상실로, 뮤지션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소망이 깃든 공간이다. 7만여 장이 넘는 LP 음반에, 진공관 스피커 등 음향 시스템 규모도 10억 원이 넘는다. 다루는 장르는 팝·재즈·클래식 세 가지다. 말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이곳의 입장료는 음료 포함 1만 원. 방문한 이들이 ‘만 원의 행복’으로 음악을 즐기다 갔으면 좋겠다는 리 대표의 바람이 담긴 값이다.
이곳의 매력은 신청곡을 받으면 그 음악을 잘 표현해주는 스피커로 들려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머라이어 캐리처럼 성량이 풍부한 가수의 노래는 ‘웨스턴 일렉트릭 15A혼’으로, 비트가 생명인 밴드 음악은 ‘알텍’으로 내보낸다. 재질이나 모양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한 곡을 듣더라도 그에 걸맞은 스피커로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는 알텍으로 들어야 해요. 마치 귀청소를 하는 기분이 들 거예요.”
음악 애호가들이 알음알음 모이는 곳인 만큼, 매달 첫째·셋째 주 화요일에는 올드팝 칼럼니스트 박길호 씨의 팝 강의가 진행된다. 주로 팝 가수의 일생과 철학을 돌아본다. 참여를 원할 경우 전화로 예약하면 된다. 수강료는 1회 2만 원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31길 9
영업시간 매일 12:00~21:30 월요일 휴무
빛바랜 기억 되살리는 ‘수리수리협동조합’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2층의 한 사무실. 투명한 외벽에 A4 용지 한 장당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수리수리협동조합’이라 적어 붙여놓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아래의 ‘추억을 고쳐드립니다’라는 팻말 속 글귀. 안으로 들어가자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승근 이사장이 직사각형 모양의 기계를 바쁘게 손보고 있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진공관 오디오라 했다.
2017년에 설립된 수리수리협동조합은 ‘수리수리 수리실’과 ‘수리수리 청음실’로 구성돼 있다. 수리실은 ‘수리수리 얍’이 연상되는 이름에 걸맞게 고장 난 옛 음향기기를 마법처럼 고친다. 온라인 홈페이지나 전화로 상담을 한 뒤 기기를 가져오면 이 이사장이 직접 수리한다. 연식이 오래된 기기일수록 잔병치레를 자주 하는지 매달 100여 건의 문의가 이어진다.
“빈티지 오디오를 가진 사람들은 나랑 연배가 비슷해요. 60~70대가 많이 찾죠.”
청음실은 수리실 바로 위층에 있다. 젊은 시절 음악감상실을 자주 다녔던 이 이사장이 자신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직접 제안한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인테리어에서부터 아날로그 감성이 진하게 풍긴다. 조용필과 강수지 앨범이 진열돼 있는 이곳에서는 국내 가요를 비롯해 추억의 음악을 무료로 들려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소장한 LP 음반을 가져와 턴테이블에 직접 올려보는 1일 DJ 체험(?)이 청음실만의 쏠쏠한 재미. 집에 턴테이블이 없어 LP 음반을 관상용으로 묵혀두고 있다면, 먼지만 가볍게 털어내고 세운상가로 데려가보자.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59 세운상가
영업시간 평일 10:00~18:0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DJ가 들려주는 클래식 퍼레이드 ‘황인용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지도 앱에 현 위치를 알려주는 파란색 동그라미 표시가 목적지와 가까워진다. 곧 대형 창고나 컨테이너를 연상케 하는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단단한 철문을 열자 바그너의 ‘교향곡 C장조’ 1악장이 내부를 가득 울린다. 벽 쪽 통유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바그너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춘다.
‘황인용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는 16년간 자리를 지킨 파주 헤이리마을의 터줏대감이다. 이곳의 주인은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1970~80년대에 라디오 DJ로 활약했던 황인용 전 아나운서다. 오랜 세월 청취자와 소통하며 음악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던 그는 2004년 자신만의 음악감상실을 차렸다.
카메라타를 라디오에 비유하면 클래식 채널이라 할 수 있다. 오직 클래식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황 전 아나운서가 직접 모은 2만여 장의 LP 음반도 대부분 클래식 앨범이다. 피아노의 부드러운 소리와 첼로의 웅장한 저음은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 등 1920년대 미국과 유럽 극장에서 사용하던 스피커들과 만나 한층 더 풍성해진다.
공간은 3층 규모로 높고 널찍하며 2인석부터 6인석까지 완비돼 있어 가족 단위의 손님이 많이 찾는다. 두 명이 방문한 경우에는 대부분 스피커를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 조용히 감상을 한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반 카페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연주회가 열린다. 연주가 끝나면 전문가의 곡 해석이 이어져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도 부담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카메라타는 이탈리아어로 ‘동호인 모임’을 뜻한다. 이름의 의미처럼 클래식 입문자 혹은 마니아들이 아지트로 삼기에 좋은 곳이다. 입장료는 1만 원. 차 한 잔과 머핀이 제공된다.
주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83
영업시간 평일 11:00~21:00 주말 및 공휴일 11:00~22:00
요즘 애들처럼 놀아볼까? ‘만평 바이닐 뮤직’
‘뉴트로’(New+Retro)가 유행하면서 젊은 세대들에서도 복고 콘셉트의 음악감상실이 인기다. 그중 ‘만평 바이닐 뮤직’은 2030세대의 집합소다. 이곳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간판이 작거나 없는 ‘요즘 감성’에 특화된 곳이기 때문.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목적지 근처에 가면 조용한 골목 에 음악소리가 새어나오는 건물이 보인다. 만평은 시티 팝을 틀어주는 몇 안 되는 바이닐 바다. 이곳을 다녀온 이는 “1980년대 버블경제 한가운데서 술 마시는 느낌이 난다”고 평한다. 이외에도 펑크, 디스코 등 비트 있는 음악을 주로 선보인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DJ의 공연이 열린다. 손님이 DJ에게 맥주를 건네고 선 채로 음악을 즐기는 등 동적인 분위기가 낯설 수 있지만,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절로 흥이 오를 것이다. 입장료는 3000원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27 2층
영업시간 매일 19:00~02:00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켜지면 공연장의 공기는 일순 긴장한다. 준비됐는가. 이제 모두 날아오를 시간이다. 가수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노래의 첫 소절을 몸 밖으로 밀어낼 때, 무대와 객석의 시간은 새로운 표정으로 흘러간다.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몰아(沒我)의 순간. 가수는 노래하는 자신을 잊고, 관객은 그 몰입에 취해 역시 자신을 잊는다. 시간은 황홀하게 타오르고, 순간은 확장된다. 이 순간은 일회적이고 영원히 불가역적이다. 삶은 찰나적으로 완성되고, 존재는 충만해진다. 화인(火印)과도 같은 그 강렬한 시간은 각자 개별적이고 절대적 삶의 무늬가 된다.
음악은 이곳의 언어이자 피안(彼岸)의 언어다. 우리를 실존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하는 예술 장르는 음악이 유일하다. 음악을 추억하는 것은 단순히 지난 시절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충만함으로 타오르던 내 삶의 가장 높고 거룩했던 한때를 되새기는 것이다. 삶은 덧없고 허망하지만, 음악이 빚어내는 빛나는 순간들이 있어 그 허망함을 잠시라도 잊는다. 음악은 삶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영혼의 재화다. 부와 명예와 지위를 얻은들, 삶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 또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렌즈다. 그 렌즈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재구성한다. 이 세상에는 각자의 음악으로 구축한 무수한 평행 우주가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곁에 있지만, 나의 세계로 절대 들어올 수 없다.
눈물겹도록 곤궁했던 젊은 시절, 나는 음악이 있어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 노래가 많았다. 그 뜨거움에 의지해 청춘의 한때를 걸어 나왔다. 그때 음악은 내게 종교적 힘을 준 경전이었다.
들국화 전인권의 샤우팅이 솟구쳐 오를 때, 나는 실재하는 감각으로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 아득하고 아찔한 목소리와 함께 내 청춘의 한낮도 작렬했다.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도도하게 울려 퍼질 때, 이념의 격정이 들끓던 광장과는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그곳은 존재의 고독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들국화는 도덕적 엄숙주의의 시대에, 개인적 욕망의 아름다움을 알려줬다.
김현식의 노래는 위험하고 불안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일탈과 자학을 삶의 양식으로 삼았다.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듯 절규했다. 이 날것의 샤우팅은 ‘분노와 슬픔’의 자식인 블루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지적 무늬가 있는 전인권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넋두리’는 그의 사실상 마지막 유작인 5집 수록곡이다. 이 곡에서 “갈 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이라며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비웃으며, 단말마적 비명처럼 노래를 토해냈다. 그는 삶과 노래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지금껏 나의 애국가다. 절묘한 리듬 기타 위로 장장 8분 동안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신중현의 기타와 함께 삶이 고동치고 세계가 출렁인다. “실바람이 불어오는” 이 땅과 “붉은 태양이 비추는” 저 바다를 주유하는 대서사가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 끝없이 다정해”라고 대단원에 이를 때, 다정(多情)이라는 단어에 연민의 물기가 고인다.
관계의 괴로움 때문에 우울한 날이 길어질 때마다, 나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었다.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 어떤 시원(始原)을 생각했다.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을 마주하면, 나는 다시 푸른 신생의 설렘을 얻어 살 만해질 것이라 믿었다.
김정호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사람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에겐 목숨 한 줌과 노래 한 소절을 기꺼이 맞바꿔버린 듯한 처절함이 있어, 그의 노래가 끝나면 삶의 한 시절이 닫히는 듯했다. 평생 고독과 허무를 자기 집으로 삼은 그는, 자신의 노래 ‘하얀 나비’처럼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났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는 1000억 원에 가까운 전 재산을 불교계에 통째로 시주한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 만도 못해.” 김 여사는 한때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이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삶의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의 노래 한 줄만 못해.”
지난 2013년 들국화 재결성 앨범을 녹음하던 중, 전인권이 화장실에 가 거울에 비친 초로의 자신과 마주쳤다. 그 순간의 감회를 주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녹음 부스 안에는 청년이 있었는데, 화장실 거울 안에 낯선 노인이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이었지만, 노래를 녹음하는 순간의 전인권은 여전히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다. 음악은 늙지 않는다. 음악은 시간의 물리성을 거슬러, 모든 순간을 처음처럼 갱신한다.
오늘밤 오래된 LP판의 먼지를 닦아내고, 삶의 턴테이블에 올려보자. 내 몸 안에 숨어 있던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사금파리처럼 다시 반짝일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이자 음악 레이블 ‘JNH뮤직’ 대표. 가수 정미조,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
넘어져 부서져도 눈 덮인 산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가며 설상 경사로를 질주했다. 수줍은 미소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간이 갈수록 반전에 반전을 더했다.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겨울 놀이에 인생을 던진 두 남자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도봉산에 있는 한국등산학교에서. 전영래(55)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세훈(51세) 씨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자주 보면서 살게 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하고 뭔가 풍기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한국등산학교 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정작 본업은 따로 있다. 임세훈 씨는 음향 엔지니어, 전영래 씨는 건설업자다. 겨울 놀이에 빠져 산다는 이 두 남자의 시작은 모두 산(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한 임세훈 씨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장교 부인들과 어울리셨는데 절에 자주 갔습니다. 저도 따라다녔어요. 대부분 절은 산에 있잖아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습니다. 기웃거리면서 ‘저게 뭐하는 것이냐’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알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선배들이 산에 간다면서 스키를 메고 가더라고요. 겨울 산행을 하려면 스키를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프스스키장에 가서 처음으로 스키를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적설량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중학교 때만 해도 산에 가면 보통 허리까지 눈이 왔어요. 눈을 그냥 등산화로 헤치고 밟아가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그걸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뭔가 편안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러셀로 오르면 4~6시간 걸려 올라가는 산을 스키로는 2시간이나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시간도 단축되고 체력 소모도 없어요. 그때부터 산악스키에 빠져든 거죠.”
스키를 계속 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있었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에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 경치를 보고 싶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등산과 스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유럽 스키의 벽을 깨고 겨울을 찾아다니다
임세훈 씨는 스키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빙벽에도 오른다.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특전사로 차출됐다. 군에서 패러글라이딩 팀에 있었고 스키도 좀 타봤다. 7년 넘게 부사관으로 있다가 1991년 3월에 전역했다.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나 스키장이었다. 스키장 패트롤(안전요원)로 들어가 일도 하고 원 없이 스키 슬로프를 질주했다.
“스키 시즌이 끝날 무렵 스키 강사와 패트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어요. 지금도 종종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데 강사와 패트롤 중 누가 더 스키를 잘 타냐는 거였어요. 그때 마침 자리에 한국스키협회 이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너희 시합해봐.’”
매력적인 경품도 걸렸다. 10명에게 스위스 스키장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스키장이 폐장할 때쯤 슬로프를 정리하고 스키대회처럼 기문을 설치하고 각각 10명씩 20명이 맞붙었다. 협회 이사장이 연수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10명에는 강사 4명과 패트롤 6명. 그중에는 임세훈 씨도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체르마트 스키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스키 좀 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연수 첫날 체르마트 스키장의 A급 패트롤과 최정상 슬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2급에서 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중 가장 늦게 내려온 사람과 20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저희 실력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슬로프 경사도가 낮아졌어요. 강사도 패트롤 A급에서 C급으로 내려갔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슬로프 근처에도 못 가고 평지에서 자세만 배웠습니다.”
8일간의 연수를 마친 뒤 임세훈 씨는 함께 갔던 협회 이사장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도 1000프랑(유로 가입 전 프랑스 화폐 단위)이 안 됐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방법도 알아냈다. 스위스 스키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요. 형편없더라고요. 제 실력이요. 한국스키협회 추천을 받아서 일단 스위스 국립스키학교에 등록했어요.”
입교 허락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영어도 안 되니 학교 측에서 걱정했다.
“한국어로 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사전을 스위스 현지에서 샀습니다. 스스로 교재를 번역해서라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어차피 내용의 80%는 전문용어이니까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강사들이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고 브랜드 협찬도 연결해주셨어요. 2년 공부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레벨3을 땄습니다. 개인 강습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학업을 마친 후 스키 전문 브랜드의 데몬스트레이터(최고 스키 지도자) 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키도 열심히 탔고, 동양인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월급 받으면서 세계의 유명 스키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겨울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스키도 타고 제가 하던 음향 일도 했습니다. 겨울만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스키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브랜드 홍보차 유럽의 한 스키장에서 모굴스키를 타다가 앞서 타던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고 피하려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존심 때문에 싫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스키와 등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재작년에는 남극에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 노는 날 탔죠.(웃음)”
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본토인 테라노바 만에 두 번째 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임세훈 씨는 이곳에서 연구하는 박사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으로 파견된 것. 크레바스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고 블리자드가 부는 극한 상황을 해결하는 등 더 원활하게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돌아왔다.
“사실상 백수입니다. 그래도 군에서 연금도 나오고요. 남극 안전요원으로 활동도 했고, 동호회 형식의 스키 교실, 등산학교 등에서 강연도 합니다. 봉사에 가깝지만 교통비 정도는 주십니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키와 등산은 생활이자 직업입니다.”
신장 투석하면서 해외로 스키 타러 다닌 전영래 씨
“매년 스키장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샀어요. 구입하고 나면 누구랑 갈까 생각해요.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요.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가야 하니까 함께 스키 탈 친구들 목록을 정리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키 시즌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악인이던 삼촌을 따라서 이 산 저 산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암벽등반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결국 교복을 입고 성인들 틈 사이에서 산행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산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성북동 살았는데 우이동에 선배가 하는 산장이 있었어요. 책가방 거기다 가져다 놓고 등반하고 자고 아침에 학교 가고 또 등반하고. 그러다 산악스키에 빠지게 됐어요. 형들이랑 있으면 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눈이 많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스키를 탄다고요. 그리고 스키를 타야 산을 오르내리는 게 쉽고 빠르다고 했어요. 1985년도에 스키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스키도 타야 했어요.”
지금처럼 스키장이 많을 때가 아니라 선배들이 차를 몰고 스키장에 갈 때 따라갔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선배들 밥 챙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그런데 정작 산악스키의 매력 포인트는 알고 있어도 산악스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라 정보도 풍부하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 외국에 나가서 배워오면 그게 정확한 정보라고 믿을 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 정도였다.
스키장 가려고 사표 낸 건설사 직원
“직장생활할 때는 퇴근과 동시에 스키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회사가 방배동 쪽이어서 용인 양지에 있는 스키장을 이용했죠.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4~5년 동안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쇼트트랙을 했어요. 이상화 선수를 배출한 은석초등학교의 빙상부원이었습니다. 성북동에서 목동, 방배동으로 출근했다가 양지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 피로를 느껴 사표 던지고 나왔습니다.(웃음)”
1997년 직장을 그만둔 그는 회사의 대표가 되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등반하고 스키장가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정말 원 없이 갔다. 4일, 5일 정도는 스키장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아침에 스케이트장, 저녁에 스키장. 몇 년 하다 보니까 슬로프를 타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산악스키처럼 좀 색다르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2003년에 강원도지사배 강원 산악스키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출전했습니다. 산악스키대회 장면을 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참가하려니 많이 떨렸습니다. 산악용 스키가 원래는 따로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엄홍길 선배에게 빌렸습니다. 스키장의 곤돌라가 돌기 전인 새벽 5시쯤에 대회를 시작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끝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더군요.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신나게 살던 전영래 씨의 인생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 고산에 다녀온 뒤로 신장이 망가졌다. 7년 동안을 자가 투석해야 했다. 성격상 집에서 쉴 수 없었던 전영래 씨는 투석에 필요한 장비와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착같이 스키를 탔다.
“제가 좀 외향적이에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몸이 안 좋아도 삿포로나 나가노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꽤 무거운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각자 짐에 나누어 넣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투석하고 열심히 스키 타고, 돌아와서 남들 한잔씩 할 때, 자기 전에도 투석하고 그랬어요.”
스키 타고 등반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신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럽의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2012년에 투석기를 꽂고 운전까지 해가면서 새벽에 스키장에 가고 있는데 일산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와 조직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있으니 수술받으려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후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는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더라고요. 바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갔죠. 투석할 때는 어디든 3시간 이내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니까 장시간 비행도 쉽지 않죠. 신장 이식하고 6개월 후에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몽블랑으로 날아갔습니다.”
매년 못 가면 한 번, 기본 두 번은 해외 스키장으로 나간다. 산 다니고 스키 타는 사람들의 건배사에 ‘백두산’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100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스키도 타고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겨울 스포츠 즐기는 Tip
1 시즌권은 8월부터 준비한다.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하기 싫으면 애플리케이션 알람 신청을 해놓으면 된다.
2 부상 없이 스키를 안전하게 오래 타고 싶으면 다운힐(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기술)은 최소한 정식 자격을 갖춘 곳에서 강습을 받아야 한다.
3 레벨에 맞는 강사에게 강습받기를 권한다.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지식을 가르치는 데몬스트레이터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들은 스키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키스쿨에서 최소한 3회 이상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4 시니어에게 산악스키를 권한다. 산릉선을 스키를 신고 돌면서 경치도 보고 운동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가, 스키로 내려오기 어려우면 짊어지고 내려와도 된다. 산악스키용 부츠는 등산화와 비슷해 신고 내려올 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임도 따라서 산행하듯이 스키를 신고 걸으면 된다. 크게 힘들지 않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블리자드 쌓인 눈이 강풍에 휘날려 일어나는 눈보라.
•러셀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길을 뚫는 방법.
요즘은 ‘둘레길 걷기’가 대세다.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 근처에서 산책하고, 둘레길 걷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이 좋다. 걷기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알맞은 거리와 시간은 10km 안팎의 3시간 정도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걷는다 해도 무작정 걷기만 하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역사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좋다.
성곽 따라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간다. 낙산 성곽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석양과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들어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샘도 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정업원(淨業院)도 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서 살았던 이화장(梨花莊)도 관람할 수 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동대문성곽공원→한양도성박물관→낙산공원→중앙광장→동숭동 어린이집 길→이화동 벽화마을→이화장(사전예약)
성북동 동네 한 바퀴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대원각을 기증해 만든 사찰이다. 길상사에는 특별한 것 3가지가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시비(詩碑), 법정 스님의 유품실인 진영각,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상이다. 최순우 옛집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최순우 옛집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위로 걸어가다 보면 덕수교회가 나온다.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 뒤편에 있으며 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별장은 마포에서 젓갈을 팔아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다. 마지막 코스인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지인이 마련해준 곳으로, 한용운의 유품과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길상사(마을버스 02번 이용)→최순우 옛집→이종석 별장→심우장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경복궁 안에는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민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고궁박물관이 나온다. 관람을 끝내고 경복궁을 돌아본 뒤,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청와대 정문 앞길로 나와 경복궁 담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이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일명 ‘체부동 먹자골목’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지난 가을에 도시여행 해설가과정 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에서 필자가 우리 조를 대표해서 해설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성북동에 대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터라, 성북동을 해설하기로 정하고 답사를 갔다.
평소에 아담하고 아름답다고 입소문난 길상사엘 갔다. 경내를 둘러보다가 ‘길상화 보살’의 사당과 공덕비 앞에서 그만, 넋을 잃고 답사온 목적도 잊은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만 꽂혀버린 것이다.
필자가 필이 꽂힌 것은 한편의 시가 적힌 ‘시비(詩碑)’였다. 시비에는 기생 진향이와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열정적인 뜨거운 사랑이나, 순애보적인 아름다운 사랑한번 변변히 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랑이야기만 들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푸욱 빠져 버리곤 한다.
필자가 푹 빠져버린 기생 진향이는 누구인가?
그는 1916년에 ‘김영한’이라는 이름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다.
김영한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16살에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했다. 진향이 21살때 25살의 백석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때 백석이 처음으로쓴 詩가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인데, 이 시에서의 나타샤는 백석이 사랑한 기생 진향이다. 25살 젊은 청년 백석의, 진향을 사랑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당나귀 타고 산곬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에 살쟈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37년, 백석이 겨울에 쓴 최초의 원문-
✻ 마가리: 오두막집 출출이: 뱁새 고조곤히: 소리없이, 고요히
아들이 기생과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다. 백석은 진향에게 만주로 가서 둘이 함께 살자고 했지만, 진향이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인하여 남과 북이 갈라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볼 수 없게 된다.
그 후, 진향은 37살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2년 뒤, 성북동 산골짜기에 땅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기생이란 옷을 벗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경영주 김영한’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법정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여 요정 대원각이 사찰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후,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기부할 당시의 대원각 재산은 싯가가 천억 원에 달했는데,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그 많은 재산을 모두 다 기부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이에 김영한은 "천 억은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백석의 생일엔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백석을 그리워했다.
1996년, 백석이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년 뒤 1999년 11월, 김영한은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떠나고 없지만,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詩碑가 세워졌다.
사랑의 꽃씨 한 알 가슴에 품고, 일생을 ‘그리움’으로 고이고이 키워낸 꽃 한 송이 길상화(법명).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던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숭고하게 승화시킨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가 기생 진향이에서 길상화 보살이 되기까지엔, 백석을 향한 그리움이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위하여 새로 개통한 북한산우이선 경전철을 탔다. 좌로 흔들, 우로 뒤뚱거리면서 무인 경전철은 잘도 달렸다. 사람이 만든 꼬마 전철은 운전원도 없이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도선사 입구 종점이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였다. 산행인파가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많았다. 능선을 따라서 지원센터를 거쳐 하루재에 이르렀다. 가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산장을 지나서 떠밀리듯 천천히 올랐다. 위문을 지나 정상까지는 밧줄을 붙잡고 바위를 오르는 본격적인 등반이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등산객이 뒤엉켜서 정체가 발생하곤 하였다. ‘우측보행’ 누군가 부르짖지만 이내 인파에 묻히고 말았다. 서다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정상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친구와 품앗이로 기념사진 한장 겨우 남겼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희부옇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다.맞은편의 깎아지른 듯 인수봉이 울긋불긋 단풍에 둘러싸여 있다. 암벽등반가들이 꽃술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1983년에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78.5㎢에 이른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정릉·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를 비롯하여 태고사·화계사·문수사·진관사 등 많은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비봉에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의 복사본이 있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북한산은 백운대(837m)·인수봉(810m)·만경대(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삼각산이라 불려졌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가는 길은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