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뤄주고, 남의 추함을 이뤄주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논어’ 안연편
필자가 오늘 소개할 세 사람은 바로 군자(君子)가 추구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자기를 살펴 고치고, 그동안 해온 업(業)을 배움과 덕으로 더욱 널리 펼치는 모습이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어느결에 새 마음이 헌 마음이 되었습니다. 다져 먹었던 결심과 각오는 흔들리고, 마음에 새겼던 약속은 또 다른 변명과 구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영웅호걸 찾기 힘든 시절, 업을 이어 승화시킴으로써 세상에 나누는 여장부(女丈夫) 세 사람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대설 내리는 날, 구둣방에서
혹독한 한파가 몇 날 며칠 계속되더니 드디어 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이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남편 등산화 수선을 맡기러 평소 눈여겨보던 답십리 사거리 구둣방을 찾은 것입니다. 하필이면 대설로 천지 분간도 안 되는 날을 잡았지 뭡니까. 교차로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저만치 백열등 알전구가 노란 불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휴, 다행이다. 속으로 안심하며 드르륵 가게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사장님?” 인사를 건넵니다.
이곳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구두 수선집입니다. 40년 가까이 해온 이 일의 진짜 주인은 남자 사장님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여자분이 가게에 종종 보이더니 아예 사장님 자리를 꿰찼네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조심스레 여쭤보았습니다.
“사장님이 바뀌셨나요? 남자 어르신은 이제 안 보이시네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대답을 듣지 못해 민망해진 필자는 더는 묻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습니다. 등산화 바닥이 많이 망가져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요.
세상 뜬 남편 대신 업을 이어 붙이며
“한 3년 됐어요.”
낡은 신발 바닥을 잘라내고, 덧대고, 기우고, 못질로 신발 몸체와 단단히 연결시키는 과정을 빨려들듯 지켜보느라 처음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 대꾸도 않는 제게 그녀는 다시, “칠십도 안 된 남편, 담낭암과 황달로 3년 전에 보냈어요. 그이 생전에 어깨너머 배운 것과 밖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걸로 닫았던 가게 문 다시 열었어요.”
왜 맨손으로 작업하시느냐 물으니 장갑을 끼면 감각이 무뎌져 정교함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손톱 밑이며 손바닥과 손등까지 시커멓게 변한 손이 마치 ‘뻬빠’(사포) 같습니다. 거친 자신의 몸을 문대어 운동화며 구두며 장화며 부드럽고 매끄럽게 하니까요.
신발 바닥 덧대는 여자
요즘엔 서방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 세상이 되어서인지 몰라도 남편 구두 반짝반짝 닦아 현관에 대령은커녕 벗어놓은 신발 걷어차거나 밟지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은 제 뒤에 앵클부츠 한 짝을 들고 온 초로의 여자분이 필자에게 요즘 젊은 것들 흉보며 한 말입니다.) 필자 역시 별다르지 않아서 먼지투성이 남편 신발을 꺼내놓자니 갑자기 부끄러워지더라고요. 한데 구둣방 여주인은 험하고 더러운 데며 온갖 곳을 돌아다녔을 등산화를 소중히 안고 구석구석 매만지고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헤매고 다녔는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왜 관리는 제때 안 했는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그맣고 여린 손으로 낡고 더러워진 신발을 귀한 물건인 양 정성스레 대하는 그녀 머리 뒤로 후광이 퍼지는 듯 마음이 짜르르해졌습니다. 아프고 상처 난 마음, 억울함과 분노로 막히고 뭉친 마음에 반창고 붙인다고 다니는 필자는 그날 비좁은 구둣방에서 숨고 싶어질 만큼 작아졌습니다.
숟가락 장단에 희로애락 담아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났다 지금’
나무 숟가락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유행가 따라 장단을 맞추며 춤추는 이복자 숟가락난타협회 대표. 실용음악 재즈피아노를 전공하고 음악치료 석사과정을 공부한 이 대표는 일평생 음악학원을 하며 생업을 이어오다, 환갑이 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습니다. 이 대표는 평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시도하지 못하거나, 배우는 과정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에 일상에서 흔히 쓰는 도구를 악기 삼아 연구하고 연습하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악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단순명료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모, 네모, 별, 화살표, 이렇게 딱 네 개 기호만으로 만든 그녀만의 악보는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별도 볼 수 있고, 세모, 네모 다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쉬운 악보와 도구로 풀어준 이 대표는 숟가락 난타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위기가 가져온 인생 반전
이 대표는 숟가락난타협회를 만들어 울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대면, 비대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강사 양성과 공연에 열중했습니다. 그 공로로 2021년 제40회 스승의 날 기념 ‘한국강사신문이 선정한 제1회 대한민국 명강사 12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숟가락 난타 강사이자 음악가로 활동하며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이 전국 방방곡곡 숟가락 난타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힐링·음악치료 분야에서 수상한 만큼 그 정성과 열정을 인정받은 셈이지요.
어쩌면 코로나19는 이 대표에게 인생 2막을 열어준 전화위복의 불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면 수업 중심이던 음악학원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아 모든 활동이 멈췄을 때 비대면 온라인 교육을 접하며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으니까요. 30년이 훌쩍 넘도록 운영해온 음악학원을 딸에게 물려준 이 대표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노후에 펼칠 로망으로 간직했던 꿈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음악 분야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악기와 음악을 쉽게 접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을 더 늦기 전에 펼치게 되었지요. 오랜 궁리 끝에 ‘세상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배워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숟가락 난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악기 가운데 관객 호응이 가장 좋은 점도 함께 즐기기 안성맞춤이고요.
마음 장단 맞추기는 참 어려워요
흥과 끼라면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민족은 악기가 있건 없건 가락과 장단에 맞춰 잘 놀 줄 압니다. 쿵짜락 쿵짝 삐약삐약. 왕년에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춤춰보셨습니까. 지역마다 독특한 장단이 있습니다. 장단 맞추기 쉬울까요? 즐겁고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해 숟가락 난타를 개발해 전국을 다니며 장단 맞추기를 가르쳐온 이 대표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간관계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라고 합니다. 어제 막역한 친구였다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적이 되어 자신을 공격해오는 경우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고 하네요. 평생 음악학원에서 십대 안팎 어린 교육생들만 상대하다 숟가락 들고 만나는 어른들은 영판 달랐으니까요. 스스로 마음 단련하는 법을 익히느라 고생도 했지만, 숟가락 두드리며 가슴속 진심이 상대에게 전해져서 서로 위안이 되는 따뜻함을 나누었으면 하는 게 이 대표의 바람입니다. 밥 먹던 숟가락이 이제는 신명과 즐거움을 먹고 그 행복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높이 말고 낮게, 예술을 나누는 천사
하프 소리는 사람이 듣기에 가장 좋은 음파를 낸다고 합니다. 서툰 연주도 신경을 긁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할까요. 초보자가 연주해도 아름답게 들린다는 게 하프가 지닌 강점이라네요.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그런 게 아닐까요. 하늘에서만 연주할 것 같은 고상하기 그지없는 하프를 지상으로 가져와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배우고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바로 안영숙 한국하프교육협회 회장입니다. 사실 회장보다 교수라는 호칭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안 회장은 한국에서 하프 연주자, 일명 하피스트 1세대로 불리는 유학생 1호입니다.
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하피스트
하프 대중화라는 목표에는 우리 국민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안 회장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프는 이동과 보관이 너무 불편할 뿐 아니라 실제 연주할 때도 불편을 넘어 고통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정말 까다롭고 비싼 악기입니다. 이런데도 그동안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걸 이상하다고 느낀 안 회장은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주변의 무관심과 싸늘한 시선을 뒤로하고 결국 목공학교를 5년이나 다니면서 사서 고생을 한 끝에 미니 하프 ‘줄리’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그녀의 노고는 속속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10일 제1회 줄리 하프 국제 콩쿠르 본선을 한국영상대학교에서 열어, 초등부에서 실버 부문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하며 하프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 12월 21일에는 ‘2022 한국 소비자 베스트 브랜드 대상’ 악기 개발 및 하프 교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직접 만든 소형 하프로 하프 대중화와 악기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안영숙 회장. 줄리 하프는 해외 시장에도 진출해 악기 수출뿐 아니라 교육센터를 통해 누구나 쉽게 하프에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저변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충남 공주시 단골 철물점에서 직접 고른 철사줄을 매어 하프를 손보던 안 회장은 가게에서 즉석 연주를 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연주했던 ‘문 리버’(Moon River)가 그녀의 손을 타고 계룡산까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오늘도 헌 구두 하나 꺼내며
옆 사람 표정과 눈빛에 상처 입고, 가족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폐부 깊이 찌르는 송곳이 되어 아플 때. 이런 날이면 필자는 신발장을 기웃거립니다. 뭐 고칠 것 없을까 공연히 이 신 저 신 꺼내놓습니다. 오늘은 아들 구두 손볼 차례입니다. 새 신 바닥 앞뒤로 미리 고무창을 덧대면 발바닥도 덜 아프고, 우툴두툴 고무 요철이 미끄럼도 막아주고, 신발 수명도 늘려준다고 하니 일석삼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둣방에 미리 오신 옆자리 손님은 자기 것과 딸내미 롱부츠까지 바닥 창을 덧대달라는 주문을 하네요. 구두처럼 우리 마음에도 다치기 전, 아프기 전 미리 반창고 하나씩 붙여보실까요.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강경 읍내에 들어서기 무섭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때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던 이름난 포구였고, 조선 말기에는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강경 장날이 있던 곳. 이제는 북적이던 그 자리에 그 시절의 낡은 건축물들이 세월을 지키고 빛바랜 표정의 골목 사이로 영화를 누리던 오래전의 시간들이 너울거리고 있다.
옥녀봉 아래 금강 물길 따라 흐른 세월
먼저 옥녀봉에 올라 강경의 풍경을 조망해보자. 강경 포구의 역사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좁다란 골목길을 오르면 나타나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봉우리. 당시의 통신 방법인 봉수대가 우뚝하다. 해조문 아래로 금강 줄기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파시가 2~3km 늘어섰고 고깃배가 빈틈없이 정박해 있었다는 포구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뿌옇고 조용하다.
옥녀봉에 올랐으니 비탈 낮은 절벽 위에 위치한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까지 들여다보고 내려와야 한다. 박범신 작가는 강경읍에서 익산으로 기차 타고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새벽밥 먹고 집을 나오면 저 아래 금강변 갈대밭에 들어가 하루에 책을 두 권씩 읽었다고 한다. 작가를 키워낸 옥녀봉 일대의 갈대밭과 강경은 여전히 옛 모습을 지닌 채 평온하다.
흐린 날, 읍내 길 걸어 근대 문화 속으로
강경 읍내는 느릿한 도보 여행으로 맞춤한 소읍이다. 골목을 오르고 그 거리를 구석구석 꼼꼼히 걸어서 다녀야 제맛이다. 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가면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님과 잠깐만 이야기해도 강경의 면면을 알기 쉽게 안내해주어 매우 유익하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등록문화재 제323호로, 1920년대 영향력 있던 조직체였지만 지금은 강경역사문화안내소 역할을 한다.
강경은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시대부터 200여 년간 무역의 허브였다. 서해와 금강의 넉넉한 물길을 따라 강경포구에 이르러 활발한 장마당이 펼쳐지던 100년 전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관공서, 은행, 교회 등이 들어서며 가히 강경의 전성기였다. 그중에서 도시의 중심 상권을 본정통이라 했던 그 거리에 남겨진 근대 문화를 찾아가 본다.
그 길 초입의 강경상업고등학교 교장 관사는 뾰족한 기와지붕의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문득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이 떠오르는 느닷없는 상상력이 발동되기도 한다. 이제는 폐가인 듯 너무 낡아서 수필처럼 맑고 순한 이야기 속의 풍경은 아니지만, 교장 관사를 둘러보는데 아사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케케묵은 옛 일본식 가옥이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강경의 볼거리와 근대 문화유산은 양손의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강경상고를 시작으로 1937년 준공된 등록문화재 제60호 중앙초등학교 강당과 스승의 날 발원지라고 하는 강경여중고가 그 길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다. 옛 사진에서나 보았던 듯한 1930년대 정도의 모습으로, 퇴색된 근대 문화의 흔적이 마치 릴레이식으로 이어진다.
강경읍 계백로에 위치한 붉은 건물의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강경의 번성했던 근대 문화를 상징한다. 지금은 강경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들어가 보면 복층처럼 낮은 위층까지 전시관으로 포함된다. 특히 당시 사용되었던 묵직한 은행 금고를 볼 수 있다. 건물 뒤편으로 새롭게 조성된 일제 강점기의 강경구락부는 마치 시대극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날씨조차 흐려서 은근히 옛 맛을 더한다.
강경의 근대 역사는 골목에도 켜켜이 묻어 있다. 걷다 보면 그 길 끄트머리 어느 모퉁이에 반듯하고 정갈한 자태의 2층 주택이 눈에 띈다. 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은 전통적인 한식 건축물이지만 1층과 2층 사이의 난간에 기와를 얹은 것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나이 많은 약방 건물이 동네 골목의 오래된 주택이나 낡은 적산가옥들과 잘 어우러진다.
고난을 감당해낸 선교의 성지, 강경
읍내 길을 걷다 보면 의외로 한국 초창기 선교 역사의 흔적을 자주 만나게 된다. 높은 건물은 별로 없고 예스러운 집들과 무수한 젓갈 가게 사이로 뾰족한 첨탑이 눈에 확 들어오는 강경성당, 배의 형상을 한 외관과 하얀 외벽에 붉은 지붕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도 가까이 있다.
한국에서 첫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기념비가 있는 구 강경 성결교회, 옥녀봉 아래 초가지붕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와 한옥의 강경 북옥감리교회 예배당, 100년이 넘는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는 강경 제일감리교회 등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답게 일제의 탄압 아래서 종교적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의 역사를 감당했던 증거를 곳곳에서 보여준다. 성지순례지로 강경이 손꼽히는 이유가 있다.
강경읍 외곽의 금강가에 자리 잡은 죽림서원은 대숲이 배경이다. 왼편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강학 장소인 임이정과 팔괘정이 나지막한 야산에 자연스럽다. 조선 시대 사설 교육기관인 죽림서원의 낮은 담장 돌계단에 서면 안이 훤히 보이고 대숲에서 세월의 바스락거림을 듣는다. 금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내려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좋다.
아름다운 미내다리 이야기
읍내를 조금 벗어나 강경천 제방길을 걸어보는 시간도 특별하다. 그 둑방길을 가다 보면 멀리서 둥그스름한 원형의 다리가 보인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년)에 석재만으로 만들어진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 시절 강경포구는 물길 따라 사통팔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느 해 큰 장마로 강경에 몰려든 상인들의 발이 묶였다고 한다. 비로 인해 그 길을 연결해주던 다리가 떠내려가고 오도 가도 못 할 지경. 강경포구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재물을 모아 다리를 만들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온다. 따뜻한 이야기와 어울리는 예술적 토목 건축술로 평가받는 다리다.
200년 전통의 곰삭은 감칠맛, 강경
강경을 입에 올리면 저절로 따라붙는 말이 젓갈이다. 잠깐만 둘러봐도 도처에 젓갈백화점과 젓갈상회 천지다. 강경 읍내에 위치한 젓갈 가게가 140여 곳이나 되고 전국 젓갈 유통의 60%를 차지한다고 하니 가히 강경만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주는 천하의 별미 젓갈 반찬.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과학적 숙성 방법으로 예전보다는 짠맛이 덜하고 고소하다. 간 김에 젓갈 한 병 사면서 잊었던 ‘덤’ 문화의 즐거움도 경험한다.
옛 영화를 간직한 골목골목마다 오래된 시간이 반기는 곳, 강경.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극의 장면 속을 걷는 기분이다. 덜 변하고 자취 없이 사라진 것들이 많지 않아서 그리움도 적을 것 같은 곳. 쇠락한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있는 옛 시간이 고스란한 지난 100년의 유장한 기록들. 강경젓갈만큼 곰삭힌 날들이 거기 있었다.
강경 근대 문화 거리와 젓갈 이야기
자동차 : 서울 기준 당일 여행. 경부고속도로 천안→천안논산 고속도로→논산시 강경읍 도착, 약 두 시간 소요
기차 : 서울역에서 강경역까지 무궁화호로 2시간 반 정도. 레트로 감성의 기차 여행이다.
주소 : 구 강경노동조합(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문의하면 근대 문화 여행 안내를 받을 수 있다. 041-746-5411
여행 코스 : 옥녀봉과 주변▷강경 읍내▷구 강경노동조합▷강경상업고등학교와 주변▷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구락부▷젓갈 가게▷강경성당과 성지순례▷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죽림서원▷미내다리
문장옥 수필가의 호는 효재(效在)다. 효재란 ‘누군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보자’라는 뜻이다. 자신은 아직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서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녀는 교사였다. 그러나 마흔여덟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교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그 아픔을 딛고 수필가로 새로운 인생을 연 그녀의 삶을 한 편의 담담한 수필을 읽듯 들어보았다.
문장옥 수필가가 마흔여덟 살에 교직을 내려놓게 된 것은 그즈음 두 아들이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가정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 아닐까 싶어 지난 삶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독립해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교직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내 인생의 후반기를 어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엄습했습니다.”
고민 끝에 시작한 것이 수필 쓰기였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작가라는 호칭을 갖고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내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설득한 다음부터는 수필가로서의 생활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2의 인생이 마침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몸짓으로 써내려가는 새로운 인생
수필가로서 문장옥은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첫 번째가 ‘행복정원에 들다’, 두 번째가 ‘내 안에 불꽃’이다. 그녀는 지난 8월에 낸 ‘내 안에 불꽃’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심 어리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에세이란 문학의 특징은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작가의 진솔한 삶이 그대로 녹아내려 인품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의 아픔과 회한, 그리고 부끄러운 모습까지 솔직히 드러내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자 했고, 작은 위안과 교훈이라도 함께 나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독자에게 죽음과 맞닿게 되더라도 삶의 열정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그 열정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의 이유도 보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잘것없는 작품일지 모르지만 제가 작가로 살아가도록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온몸으로 쓰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문 작가의 말처럼 ‘내 안에 불꽃’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본인의 암 수술 경험까지, 그녀의 삶에서 죽음은 잔인하게 왔다 사라졌다 다시금 나타나는 실제적 위협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을 보내면서, 저 자신이 네 번의 큰 수술을 하면서 삶의 옆에는 죽음이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웰다잉이란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 때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은 자연스레 인생에 대한 담담한 관조를 갖게 했다. 그럼에도 인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나이가 칠십이나 되었는데도 인생이란 단어를 논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요. 아직도 어린애 같은 천진함과 호기심이 남아 있어, 남편에게 가끔 핀잔을 듣곤 합니다. 저는 ‘이 나이에 뭘 한다고?’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무엇이든 도전해보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는 신세는 면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참다운 나
자신의 말처럼 문 작가는 지금의 삶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전으로서의 작가 인생은 생활적인 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자신의 서재에 이름을 붙였다. ‘진아당’으로 ‘참 내가 있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참다운 나’란 어떤 사람일까.
“자신에게 정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진실하고 참되며,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삶의 근원이자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요?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준 ‘서시’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처럼 저 역시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삶이 좋은 수필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날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도움이 되고, 작으나마 행복을 줄 수 있을 때, 소박하지만 감동 있는 삶이 될 때, 그것이 글이 되었을 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삶은 어떤 사람들의 삶에 남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가 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의 두 제자가 바로 그들이다.
“한 사람은 제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1학년 학생으로 만난 제자인데, 지금은 서울의 모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 20년 넘도록 스승의 날은 물론 가끔씩 저를 찾아와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떠는 친구 같은 제자예요. 또 한 사람은 제가 중등교사 시절에 만난 문제 학생이었는데, 이젠 어엿하고 반듯한 건축회사 중견 간부가 되었습니다. 헤어진 후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렵게 나를 찾아내 보은하는 고맙고도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랍니다. 정말 제 인생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알게 해준 귀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존재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으로 ‘자유로운 삶’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 엄격한 법칙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속박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주부로서 가족에게 봉사해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고 사랑을 품은 가운데 능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지만 누구보다 잉꼬부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해요. 가급적 서로 간섭을 줄이고, 한밤중 잠이 깨면 언제든지 일어나 독서와 글쓰기, 사색을 즐기며 살아가니,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처럼 그녀에게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상대다. 노후의 행복을 꼽을 때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남편을 떠올릴 정도였다.
“자녀들이 독립해 집을 떠난 지금은 남편과 한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동네 공원을 매일 저녁 한두 시간씩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매월 한 번씩 함께 여행을 갑니다. 젊은 시절에 누렸던 낭만적인 느낌은 약해지긴 했지만, 이젠 서로가 익숙한 처지라 같이하는 시간이 편안해요.”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 것
문 작가는 회갑이 된 기념으로 첫 번째 수필집 ‘행복정원에 들다’를 냈고, 칠순 기념으로 두 번째 수필집 ‘내 안에 불꽃’을 냈다.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쓰면 쓸수록 걷고 있는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은 여로임을 절감한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아쉬움이며 동시에 다시 펜을 잡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만약 세 번째 책을 낸다면,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도전하고, 독서와 글쓰기에도 게으르지 않음으로써 푸근한 감동으로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문장옥이라는 수필가 안에 숨길 수 없는 벅찬 감흥이 밀려 왔다. 그녀의 진솔한 민낯이 사랑스럽다.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가수 김호중이 방황하던 학창 시절 자신을 바로 잡아준 고등학교 선생님을 생각하며 불러 화제를 모았던 노래다. 그 사연처럼 누구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 교정을 떠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스승의 은혜는 가슴에 영원히 남는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사제 간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완득이 (Punch, 2011)
‘참된 스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제자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상처가 있는 학생을 응원으로 북돋아 주는 선생님. 이를테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같은 이를 두고 참된 스승이라 부른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의 담임을 맡은 동주는 그와 거리가 멀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제자들 앞에서 욕을 서슴지 않고, “안 될 애들은 지금부터 해도 안 된다”며 성적 관리도 손을 놓는다. 매사에 무관심한 그지만, 문제아 완득이 앞에서만큼은 이상한 오지랖을 부린다. 숨기고 싶은 가정사를 폭로하는가 하면, 집에 찾아와 귀찮게 한다. 그런 관심이 싫은 완득이는 “똥주 좀 죽여달라”고 기도까지 한다. 이상적인 사제 관계가 아님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동주의 거친 표현이 제자를 바로잡기 위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어서다. 이처럼 영화는 문제아와 타성에 젖은 교사, 평범하지 않은 사제 간의 교감을 다정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김윤석과 유아인 두 배우의 열연이 원작의 감동을 되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2. 땐뽀걸즈 (Dance sports Girls, 2016)
친구들이 공부와 취업 준비에 한창일 때, 춤바람이 난 소녀들이 있다. 그 중심에는 구수한 거제 사투리가 매력인 이규호 선생님이 있다. 실화 바탕의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는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댄스 스포츠 동아리 학생들이 이규호 선생님과 함께 대회를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대회 당일 무대를 앞두고 분주히 움직이는 제자들과 그런 아이들을 독려하는 이규호 선생님의 모습을 담으며 시작된다. “쌤이 볼 때 대상감은 아니고”라며 장난스러운 농담을 던지다가도 “입상 안 해도 괜찮다. 참가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도전 자체에 응원을 보내는 이규호 선생님의 특별한 제자 사랑은 러닝타임 내내 눈에 띈다. 화려한 댄스 스포츠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다. 그저 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연습 과정과 그 안에서 꽃피는 사제 간의 정을 잔잔하게 비춘다. 중간중간 화면에 잡히는 한적한 시골 풍경과 푸르른 녹음도 영화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는 반응. 여고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남는 작품이다.
3. 선생 김봉두 (Teacher Mr. Kim, 2003)
사제 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는 대개 스승이 인생의 길라잡이로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방황하는 제자의 멘토가 되어주는 내용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는 초등 교사 김봉두가 문제다. 교재 연구보다는 술을 좋아하고, 학부모들에게 촌지를 적극 권장하는 전형적인 불량 선생이다. 영화는 그런 그가 ‘돈 봉투 사건’으로 시골의 작은 학교에 좌천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전교생이 5명뿐인 엉성한 학교, 한글을 가르쳐달라는 할아버지 등 만만치 않은 시골 생활에 난관을 맞은 봉두의 모습은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한다. 견디다 못한 봉두는 학생들의 특기를 찾아 서울로 전학을 보내고 자신도 돌아가기 위해 ‘방과 후 특별과외’를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아이들과 가까워지며 저마다의 아픈 사연도 알아나간다. 빵빵 터뜨리던 초반과 달리 찡한 반전이 가슴을 울리는 영화 ‘선생 김봉두’는 차승원 표 코미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시골을 배경으로 한 정겨운 분위기와 더불어 등 자전거 탄 풍경의 ‘보물’, 양희은의 ‘내 어린 날의 학교’ 등 감성적인 OST가 향수를 자극한다.
20대가 되기 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 선생님과의 관계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영감과 동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덕양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폐교 위기 학교를 혁신학교의 대명사로 변화시킨 이준원(65) 교장을 만나 참스승으로서의 삶과 교육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지난해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무엇이 학교를 바꾸는가’는 공교육 혁신 모델 사례로 덕양중학교의 일대기를 다뤘다.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덕양중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폐교 요청을 받았던 학교다. 폐교 위기의 학교가 8년 만에 어떻게 공교육 혁신 모델로 우뚝 선 것일까? 그 변화의 열쇠는 이준원 교장이 쥐고 있었다. 그가 2020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8년의 세월 동안 덕양중학교에는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처음 그가 부임했을 때 덕양중학교는 어떤 상태였을까?
“제가 교장으로 왔을 때 덕양중학교는 매년 교육청으로부터 폐교 압박을 받을 만큼 다 쓰러져가는 학교였습니다. 교육장님이 오셔서 학생 수를 늘려야 한다고 당부하고 가셨죠. 제가 부임하던 해 인근 초등학교 6학년이 12명이었는데, 이마저도 확실치 않았어요. 4명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기에 실질적인 중학교 입학 인원이 8명이었죠. 당장 중3 아이들이 졸업하면 전교생이 100명 이하로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어요. 그래서 학생을 유치하려고 학군 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를 만나 저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설득했죠. 발품을 판 덕분에 그해 40명 정도 입학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덕양중학교였을까? 교장 공모제란 절차로 부임했는데, 굳이 폐교 위기인 학교의 교장이 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임 시절부터 교직을 마칠 때까지 어려운 학교만 골라 다녔어요. 겉으로만 봐서는 잘 모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요. 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아픈 친구들이 많았죠. 가정 형편이 어렵다거나 부모님이 이혼했다거나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교사로서 지도하고 보듬고 싶었어요. 좋은 학군에서 자라 학원에서 미리 선행학습을 한 덕분에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스스로 ‘그런 친구들에게 교사로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을 쉽사리 하지 못했거든요.”
실패한 교사의 고백
오랜 세월 교직에 있었던 그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학교는 학원이 아니죠. 지식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학교는 함께 어울려 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식의 양을 측정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답게 존중받고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손을 잡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둡고 깜깜한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 앞을 밝게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평교사 시절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40대 이전에는 실패한 교사였다”고 고백했다.
“사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가면을 쓰고 살았죠. 동료한테 인정받는 선생님, 잘 가르치는 선생님,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얼굴 표정과 내면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죠. 마음의 병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분노나 스트레스를 억누르기만 했어요. 어디 가서 내색도 잘 안 하고 그렇게 다녔는데, 일 년에 한 번씩 축적된 화가 폭발했어요. 그 화는 고스란히 학생과 아내에게 돌아갔어요. 이렇게 제가 불안정하다 보니 아내와 이혼 위기까지 갔고,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어요.”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마흔 살을 앞두고 큰 결심을 한다. 치유 상담을 받아보기로 한 것.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한 선택은 그의 앞길을 바꾸는 교두보가 됐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치유상담연구원으로 달려갔어요. 내면 치유를 통해 저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죠. 내면 치유란 것이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냥 다 같이 모여 각자의 상처를 꺼내놓으면서 서로를 보듬는 일이에요. 저 역시 이제껏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아픔과 분노, 슬픔을 모두 솔직하게 인정하고 털어내는 일을 그때 했어요. 그 이후론 제 삶이 변했어요.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학생들과의 관계도 개선되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갈등도 눈 녹듯이 사라졌죠. 그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는 거예요. 이후 삶의 방향이 이때 결정되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덕양중학교를 택하고, 그 학교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환대
그가 고백했듯이 한때 가면을 쓴 채 가식적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그는 내면 치유 이후 놀랍게 변했다. 그의 변화는 앞서 소개한 EBS 다큐멘터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졸업식 날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 위에 올라오는 학생들은 이준원 교장 앞에서 어김없이 눈물을 보였다. 정년 퇴임식에서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모두 울면서 그를 떠나보냈다. 그 울음의 원인은 모두 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모두의 속눈썹을 촉촉하게 했다. 그들은 왜 그리도 아쉬워했을까? 그들에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재임 시절 누군가를 만날 때 교장이란 지위를 앞세우지 않았어요. 학교 내의 직원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어요. 당연히 차별하지 않았고요. 모두 그 마음을 알아주셨던 것 같아요. 8년 동안 덕양중학교에 있었는데, 사실 4년쯤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죠. 가기로 해놓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데, 교장실에 학부모님들이 찾아오시더군요. 가끔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시곤 해서, 그날도 어김없이 재밌게 대화를 나눴죠. 그런데 끝에 다들 ‘다른 데 안 가시죠?’라고 말씀하시더군요.(웃음) 부족한 저를 붙잡아주시는 게 정말 감사했어요. 그때 운 좋게 중임이 가능해지면서 한 번 더 열심히 하게 됐죠.”
실제로 그는 학교 내 구성원에게 세심하게 다가갔다. 얼마나 세심한지 교무실에서 일하는 행정실무사의 생일도 챙길 정도였다. 특히 그는 매일 등교 시간에 교문으로 나가서 아이들을 맞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아침을 열었다. 8년 내내.
“아이들이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그 순간까지 모두 교육의 연장선이에요. 아이들은 환경과 사람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받죠. 제가 모두를 따뜻하게 대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에요. 제가 만약 배식하는 아주머니를 함부로 대하면, 아주머니도 배식하면서 아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모두를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대했어요.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이들과 하이파이브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죠.”
하지만 하이파이브만으로는 아이들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았을 터. 그만의 소통법이 궁금했다. 그는 “아이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과 환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먼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죠. 그들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경청했어요. 그 과정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려고 노력했고요.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그 친구에게 가장 큰 상처였더군요. 그 이후 어긋나기 시작했고, 소위 말하는 주먹 좀 쓰고 다니던 친구였어요. 할머니와 살았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죠. 영하 10℃ 날씨에도 롱 패딩을 못 사서 매일 얇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녔어요. 자존심은 세서 롱 패딩 입고 다니는 애들 보고 이불을 덮고 다닌다며 깔보더군요. 어느 추운 겨울날 교문 앞에서 그를 만나 ‘춥지?’ 하면서 핫팩을 주머니에 넣어줬어요. 날카로웠던 평소의 눈빛이 봄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교장 선생님은요?’ 하고 따뜻하게 묻더군요. 관심이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켜요.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진심으로 다가가기
그의 환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 교사와 학부모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고, 매주 목요일 ‘이슬비 사랑 학부모 교실’을 통해 학부모와 소통했다.
“혁신학교가 될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는 교사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어요. 일종의 집단지성이 만들어졌죠. 교사들의 단점 대신 장점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어요. 단점을 찍어서 고치려고 하면 잠깐 바뀌는 척만 할 뿐이에요. 진심으로 변화시키려면 그 사람의 장점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렇게 모두의 장점이 뭉쳐서 하나의 집단지성을 만들어내는 일을 교장을 하면서 많이 경험했어요. 학부모 모임에서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아픔에 대해 경청하려고 노력했어요. 가정은 또 다른 학교나 다름없어요.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아이의 표정이 아침부터 밝지 않거든요. 놀라운 건 모임을 통해 학부모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 서로 듣고 공감하는 시간만 가졌을 뿐인데, 이후 그 모임에 참가한 학부모의 아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어요.”
그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가정은 또 다른 학교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춘기 손주를 둔 시니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손주와 같이 사는 그에게 한번 물어봤다.
“잔소리 대신 전폭적으로 사랑하고 지지하되 깜짝 놀라게 반응하는 게 좋아요. 잘했을 때는 ‘진짜 잘했어!’라는 말과 함께 기쁜 표정으로 맞이해주면 좋아해요. 그들이 가진 본연의 감정을 직시하고 공감해주면 돼요. 아이들은 스스로 존중받을 때 말문을 열어요. 그래서 다짜고짜 다그치고 비난하는 것보다는 언어, 표정, 눈빛으로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해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게 해줄수록 아이들은 달라져요.”
끝으로 그가 생각하는 참스승의 모습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따뜻한 환대를 맛본 사람은 그것을 잊지 못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진심으로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줄 아는 어른이 되는 법이죠. 이는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면으로부터 큰 변화가 있어야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늘 아이들의 상처에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어요. 그것이 참스승의 길이라고 생각하면서요. Turn your scars into stars.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속담이에요. 상처를 희망의 별로 바꾸는 일.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서, 그것을 큰 밑거름으로 만들어주는 일. 참스승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앞으론 제가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순회강연을 할 예정이에요. 제 얘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의 별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폐교 위기의 학교를 정상화하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8년의 교장 생활은 보람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고충도 있었다. 용인에서 고양까지의 긴 출근 거리로 인해 8년 내내 주말부부를 감수해야 했다. 교육 현장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를 믿고 따라왔던 학생·학부모·교사들이 있었기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가 학교에 있었던 8년 사이 학생 수는 늘어났고, 학습 부진아를 찾아볼 수 없는 학교로 성장했다. 그가 연단에 서면 떠드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졸업식에서 이준원 교장을 보고 눈물 흘리던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 처음에는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를 만나고 나서 다큐멘터리의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됐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은 진심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진심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늘도 별처럼 빛나는 진심을 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강연을 하고 있을 그를 응원하며 마친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이따금 옛 생각에 잠기곤 한다.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자니 흘러간 추억이 떠오르면서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고 싶어진다. 그럴 땐 우울해 말고, 푹신한 이불 위에서 노트북 전원을 켜보자.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은 없어도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는 명작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번 주는 ‘클래식 이즈 더 베스트’(Classic is the best)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추억의 고전영화를 소개한다. 브라보 안방극장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사랑과 영혼 (Ghost, 1990)
#멜로 #감상적인 #배우자와_함께
세상을 떠난 연인이 나를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물러 있다면 어떨까? 로맨틱한 설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영화 ‘사랑과 영혼’은 개봉 당해 흥행수익 2위를 기록한 명작이다.
영화는 '몰리'(데미 무어)의 연인 '샘'(패트릭 스웨이지)이 괴한에게 살해를 당하며 시작된다. 샘은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져 시간 내 천국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승에 남는다. 그러던 중 괴한이 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지켜주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육신 없이 영혼만 남은 샘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고, 결국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해주는 ‘오다 매’(우피 골드버그)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죽은 연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몰리와 그녀를 지켜주려는 샘, 생사의 벽에 부딪힌 두 사람은 교감할 수 있을까.
적적한 밤, 진한 로맨스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면 ‘사랑과 영혼’을 추천한다. 도자기를 빚으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두 남녀의 모습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2.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 1989)
#드라마 #교육적인 #자녀와_함께
진정한 스승의 역할은 무엇일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는 명문 고등학교에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선생이 새로 부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키팅은 출세와 성공보다 삶의 의미와 문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자다. 그는 첫 수업부터 시인들의 시에 점수를 매기는 교과서를 찢어버리는 대신 학생들을 책상 위로 올라가게 해 색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준다. 키팅의 파격적인 수업에 자신도 몰랐던 인문학적 호기심을 발견한 학생들은 서클 ‘죽은 시인의 사회’를 결성해 매일 밤 시와 문학을 노래하며 낭만을 키워나가지만, 학교 측은 서클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키팅까지도 위기에 처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교육 방식에 대한 키팅과 학교의 입장차를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가르침 의미를 묻는다. 자식과 손주를 둔 입장이라면, 언제나 키팅처럼 행동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카르페디엠’, 현재를 살아야 하는 것. 한 번뿐인 인생, 삶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하고 싶은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 또한 어른의 몫 아닐까.
3. 백 투 더 퓨처 (Back To The Future, 1985)
#공상과학 #유쾌한 #온가족이_함께
눈앞에 타임머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이런 발칙하고 유쾌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영화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소심한 아버지와 쾌활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주인공 ‘마티’(마이클 J. 폭스)는 로큰롤을 즐겨 듣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던 마티는 괴짜 과학자 '에메트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가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50년대로 도착한 마티는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만나지만, 마티의 어머니는 제 아들인 줄도 모른 채 마티에게 첫눈에 반하고 아버지는 그녀를 향한 말 못 할 짝사랑을 이어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린 마티는 두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티의 아버지는 용기를 내기로 결심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때로는 작은 선택이 모든 것을 뒤바꾸기도 한다. 보다 멋진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하는 법. 과거를 통해 현재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주는 메시지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이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해 아쉬움이 크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온라인으로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선생님들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한다면 학생에겐 큰 힌트가 되지 않을까. 선생님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온라인에서라도 고마움을 전하려는 마음에 ‘스승의 날 문구’를 챙기는 제자들이 눈에 띈다.
지난해 5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유치원 및 초중고교와 대학 교원 32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사 28.2%는 스승의 날 가장 듣고 싶은 말로 ‘선생님 존경합니다’를 꼽았다.
이어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26.8%), ‘선생님이 계셔 행복해요’(26.8%), ‘선생님 사랑합니다’(12.3%)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외에도 ‘선생님의 수업 시간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관심 덕분에 하루하루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등의 스승의 날 문구가 관심 받고 있다.
줄광대 김대균(중요무형문화재 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53). 그가 줄타기를 배운 건 9세 때였다. 거의 평생을 줄 위에서 살아온 인생이다. 줄에 취하고 미쳐, 줄 위에서 울고 웃고, 뛰고 솟고, 날치고 판치고, 그렇게 살아온 외길 인생. 한 우물을 팠으니 이룬 바가 자명하다. 해서, 그는 굳이 낮추거나 은근히 감출 것 없이 내세운다. “내가 줄타기 수장이오!” 자신의 눈으로나 세상의 잣대로나, 줄타기에 관한 한 비길 자가 다시없다는 자부심의 표명이다. 무릇, 예로부터 재인(才人)이란, 제 안에서 들솟는 기와 신명에 추동된 흥겨운 도취로 세상의 파도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타고난 재능이 일러주는 대로 찾아간 길이 아니다. 취미 삼아 올라탔다가 끝내 들입다 내닫은 길도 아니다. 거미처럼 허공을 희롱하는 찬연한 기예에 홀려 입문한 길도 아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접어든 길이 평생 업이 됐다. 우연한 시발이었으나 우연만으로 다 설명될 수는 없다. ‘우연’이 바뀌어 필연이 됐으니, ‘필연’을 불러들인 임자는 오직 김대균 자신이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가는 인생은 있을 수 없는 법. 그는 필연과 사필귀정의 공리를 염두에 두고서 줄 하나에 삶의 전부를 걸어왔다는 게 아닌가. 들어볼까? 일찍이 아홉 살 그 어린 나이에 줄을 만난 내력부터.
“부친께서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일을 하셨다. 민속촌 전시가옥이라는 곳에서 일가가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민속촌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던 김영철 선생(작고, 줄타기 초대 인간문화재)께서 내 손을 잡아끌더니 줄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연히 접어든 줄타기 도제수업이 평생의 공부이자 직업으로 이어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김영철 선생은 왜 하필 당신에게 줄타기를 가르쳤을까?”
“그걸 잘 모르겠으나 진정 모를 일은 아닌 것이, 내겐 황소처럼 우직하게 뚜벅뚜벅 가는 근성 하나는 있다. 날마다 놀이판이 펼쳐지는 민속촌에서 그냥 뛰어놀던 철부지였을 뿐이지만 선생께선 뭔가 자질을 봤을지도 모르지.”
“쓸 만한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후계자라는 의식조차 없이 가르치시는 대로 반항 없이 받아들이며 훈련에 임했다. 열네 살 때의 어느 날, 짓뭉개진 내 엉덩이를 바라보며 스승께서 말했다. ‘야야, 내가 60년간 줄을 탔지만 너처럼 고지식한 놈은 처음 봤다!’(웃음) 줄 위에서 연습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까지고 터진다. 동아줄에 쓸리고 깨지고, 피 터진 볼기짝에 팬티가 들러붙어 피범벅 오방난전(‘나한전’의 방언)이 되더라고.”
“능란해지면 매혹되게 마련이다. 혹독한 수련을 통해 기량이 늘며 서서히 줄타기에 빠져들었나? 이게 내 길이구나, 그런 필연을 느낀 건 언제였지?”
“매력을 느끼긴 어려웠다. 스승의 가난, 외로움, 서러움, 그런 걸 가까이서 지켜봤으니까. 그런데 첫 공연을 해 내가 출연료라는 걸 받는 일이 생겼다. 아하, 이걸 하면 살림에보탬이 되겠구나, 그런 기대가 생기더라고. 우리 집안이 너무 가난해 아버지가 빚을 지며 살았지. 그걸 중3 때 출연료를 모아 갚아드렸다. 밥벌이 수단으로만 줄타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가물거리는 전승 민예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스무 살 지나서부터 찾아왔다.”
용렬한 잔꾀 한번 부리는 일 없이 스승을 섬기어 묵묵히 따랐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일취월장이 있었겠지. 줄은 통상 3m 허공에 걸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가 있다지만, 줄에서 허투루 실족하는 줄광대는 줄광대도 아니다. 약식 줄타기인 ‘도막줄’이 아니라 완판 공연을 할 경우엔 무릎 꿇고 걸어가기· 거미줄 내리기·뒤로 훌치기·앉아서 돌기·콩 심기·쌍홍잽이·난간치기 등 40가지의 난해한 기예를 줄줄이 펼쳐야만 한다. 하수에겐 작두날처럼 긴장이 될 외줄. 그러나 고수는 줄 위에서라야 신명이 뻗친다. 동으로 서로 풀을 눕히거나 일으키거나, 자유자재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줄을 가지고 논다. 혹은 치닫고 내닫고, 혹은 설치고 까불고, 혹은 떴다가 내려앉는다. 오두방정과 너스레로 표출되는 재담의 해학으로 관중을 사정없이 휘어잡아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 호흡의 리듬, 막대한 힘과 균형감각, 그리고 샘솟는 기지와 언어적 순발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줄이 내 생명줄이다”
김대균의 기량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부터. 그즈음 고향과도 같았던 민속촌과 결별한 건 자유롭고도 본격적인 줄판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그래 전국 곳곳의 문화 행사나 축제 현장을 돌며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 기량을 과시했다. 덩달아 기능도, 연행 구성 솜씨도 날로농익어 가는 곳마다 대중의 갈채가 쏟아졌더란다. 서른네 살 땐 마침내 줄타기 2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당시 언론들은 최연소 인간문화재 김대균에 관한 보도를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내딛었다. 특유의 뚝심을 발동,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던 것.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연희과에 입학, F학점을 수시로 받으면서도 공부에 열을 내 무사히 졸업했다. 안주하지 않는 정신이비치는 행장이다. 그제야 비로소줄 아래 세상을 쿵덕거리는 마음으로 또렷이 내려다봤던 모양이다. 가슴으로 차오르는 자부심과 희열에 행복했다는 게 아닌가.
“스승이 자주 홀대 당했듯이, 줄타기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도가 낮아 섭섭한 대접을 받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전통 연희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문화재를 대하는 눈빛들이 달라졌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변신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 그러자 새삼 절박한 사명감이 느껴지더라고.”
“줄광대의 울분과 욕망을 다룬 영화 ‘왕의 남자’를 계기로 줄타기에 대한 인식이 별안간 높아졌다지?”
“탄탄한 시나리오, 빼어난 영상미학으로 재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녹여낸 영화였다. 이 영화의 히트와 함께 줄타기 공연 환경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전국 각처에서 펼쳐지는 축제들도 비슷한 작용을 했다. 줄타기만큼 민속축제에 적격인 장르가 어디 있겠는가?”
“줄에 오를 땐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줄이 내 생명줄이다, 라는 생각을 매번 한다. 처자를 먹여 살릴 방편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죽을힘을 다해 완성도 높은 공연을 해야 한다는 다짐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그래서 무수히 거듭해온 공연이지만 늘 긴장돼 스트레스가 쌓인다. 공연이 없을 땐 하루 한 갑 정도 담배를 피우는데 줄 타는 날엔 세 갑씩 피운다.”
이미 피부처럼 몸에 붙은 기예를 실컷 즐기면 그만일 것 같지만, 줄타기란 원천적으로 아슬아슬한 곡예라 방심은 금기다. 긴장을 면제받을 길이 없다. 연희란 또한 홀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작업과 달라서, 행위자의 노출증과 관찰자의 관음증이 맞부딪쳐 교감과 만족을 야기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긴장감이 자글거릴 수밖에 없다. 매번 청심환을 먹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처럼 말이다. 한 발 삐끗해 낙상이라도 한다면 스스로를 모독한 죄의식에 겨워 남몰래 슬플 게다.
“관객은 가급적 많은 게 좋겠지? 북새통을 이룬 다중의 호응과 박수소리에 힘입어 신바람이 날 테니까.” “예전 어릴 적 공연에선 박수는커녕 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질리기도 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회의가 밀려올 정도로. 그러나 그건 다 지나간 일이다.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일에 귀신처럼 능한 게 줄광대다. 관객 수에 흔들릴 게 없다는 거. 그런데, 오늘 공연이 잘될지 말지는 현장에 도착 즉시 정확하게 가늠되더군. 공연장의 환경, 바람의 동향에 따라 공연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건 지역 정서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유난히 점잖은 사람들만 사는 지역에선 썰렁한 반응이 돌아오더라고.” “나무토막 같은 사람마저 요절복통하게 만드는 게 줄광대의 의무 아닌가?”
“재담이 관건이다. 줄 아래서 양념을 치는 어릿광대와 주고받는 재담에 폭소가 터지는 것이지. 작고한 발탈의 명인 이동안 선생을 아는가? 남사당패 출신의 위대한 재인이었던 그는 줄타기에도 능했다. 난 선생을 쫓아다니며 판줄 재담과 타령을 배웠다. 그러나 재담에 빼어나기는 쉽지 않다. 부단히 아이디어를 찾으며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평소 애용하는 짤막한 재담 한 토막을 소개한다면? 가급적 웃기는 걸로.”
“흠. 일테면 다음처럼 사설을 늘어놓는다. ‘어떤 사람이 그럽디다. 줄 하나 잘 타면 출세한다고. 그래서 아홉 살 때 줄에 올라 한평생 줄을 타고 있지만 별 볼일 없더라고! 매번 엉덩이나 깨지고 줄광대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하고 말여. 그래도 딱 하나 좋은 건 있더라고! 여러분들이줄 아래서 저를 올려다본다는 것말여! 얼쑤! 자 그럼, 넋두리 그만하고, 잘하면 살판이요, 잘못하면 죽을 판이로구나, 어디 한번 살판이나 놀아볼까?’ 이런 식으로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결례되는 얘기지만, 그 정도의 재담으로 폭소 유발이 가능한가? 아마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사하는 재담이 진국일 것 같다.”
“다분히 형식화된 게 전통 연희다. 과거의 틀을 보존해야 하는 당위에서 초래된 박제화 경향이 있다. 이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 그건 내가가장 진력하는 부분이지.”
줄광대 나이 서른이면 환갑
저 옛날의 광대들은 비록 천대받고 살았으나, 그 반동으로 숙성한 꿈과 갈망과 해학은 옹골찼다. 들려오는 얘기에 이런 게 있다. ‘백정은 썩은 기둥에서 나오는 노래기이고, 광대는 똥에서 나온 파리다. 노래기는 사람 눈에 띄면 밟혀 죽지만, 파리는 임금님 용안에도 앉을 수 있다.’ 광대의 숙명과 지향을 꿰뚫은 황금 언설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광대들의 기량과 배포와 정신의 대륙붕을 어지러이 급변하는 현대에서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김대균의 고민도 이 대목에 있는 것 같다.그는 해외 공연을 수십 차례 해왔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전통문화의 무한한 잠재력에 관한 자각이라지. 서양인들이 오히려 더 줄타기에 열광하더라는 것이다.
“즉각 즉각 반응이 오더라고. 그들이 워낙 공연문화에 익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한국의 줄타기에 서린 섬세한 예술성에 감동하는 것 같았다. 재담 없이도 통했다. 몸짓 언어만으로도 다 이해하는 분위기였으니.”
“가사, 발탈과 더불어 줄타기 종목이 ‘긴급보호무형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맥이 끊길 가능성은 없을까.”
“줄을 배우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나에겐 현재 겨우 다섯 명의 전수자가 있을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수자 등 10여 명이 있었으나 이탈했다.”
“왜지?”
“훈련이 너무 빡세거니와 긴 세월을 수련해야 수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다고들 하면서도, 갈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는 걸 알아 재주 용한 아이들까지 빠져나가더라. 원래 소년 명창이 대명창으로 성장하기 힘든 법이다. 심지어 내 아들놈도 전수 장학생으로 줄을 배우다 달아나 미국에서 회계학을 공부한다. 아들 인생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회계학이 뭐시여? 맘에 안 든다.(웃음)”
“이상하다. 당신의 몸이 비대해지고 있다. 불면 날아갈 듯 가벼워야 줄을 탈 수 있지 않나?”
“발목 골절로 근 1년 놀았더니 부풀었다. 사실 난 늙었을지도 모른다. 줄광대의 기량은 젊어 무르익는다. 이바닥에선 줄광대 나이 삼십 줄에접어들면 환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살을 빼고 다시 줄에 올라야만 한다. 불쏘시개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전수관 건립을 위한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욕이야 위험하지. 평생 줄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배운 거 하나는 ‘가운데 중(中)’ 의 지혜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시골집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휘영청, 밝은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혼마저앗아갈 듯 황홀한 저 달빛. 마당 연습장에 설치된 동아줄이 하얗게 반짝거린다. “보름달 아래의 줄타기는 어떤가?” 그리 건네자 돌아오는 답이 허무하다. “아이고, 이젠 늙은 것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맹문재 시인이 한평생 민족의 통일을 노래한 故 김규동 시인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서 안방을 둘러보다가 저는 잠시 흠칫했습니다. 선생님의 침대 머리맡에 낡은 증명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선생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든 살이 넘도록 어린 아들이 되어 밤마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7년 3월 초 즈음이지요. 어느 날 밤늦게까지 학교 연구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박스 하나가 택배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가 하며 박스에 적힌 주소와 성함을 보니 바로 우리 문단의 원로이신 김규동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이전에 한 번도 선생님을 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했습니다.
박스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박스 안에 김기림 시집 ‘바다와 나비’와 ‘태양의 풍속’을 비롯한 여러 권의 고서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도 한 통 눈에 띄어 저는 흥분한 채 읽어보았습니다.
맹 교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좋은 시와 평론 올해는 더 많이 쓰십시오.
서가에 있던 冊 몇 권 보내드립니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태양의 풍속(문고본),
맹 교수가 갖고 계십사 하고 보냅니다.
태양의 풍속은 원래 호화 양장본이 있었지만 이북에 두고 나왔습니다.
문고본이나마 보존하시옵소서.
함께 구간들이지만 바쉬랄르 2권(일역본), 샤르트르(문학이란),
리쳐즈의 불확실의 명상을 보냅니다. 학문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리쳐즈는 기림 선생이 특히 강조해서 말씀하던 비평가(과학적인)였습니다.
옛날 冊 선물로 드려서 어떨까 싶군요. 건필하시옵소서.
며칠 뒤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아주 따스한 미소로 맞아주시고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조곤조곤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모두 귀한 말씀들이어서 저는 가슴속에 새겼습니다. 그렇게 스승으로 모신 뒤 저는 이 지면에 다 담을 수 없는 선생님과의 추억들을 갖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영어 및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김기림 시인을 만나 시인의 꿈을 키웠지요. 경성고보를 졸업한 뒤 연변의대에 진학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망을 접을 수 없었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학부에 입학했지요.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문학을 강요함에 따라 문학의 자유를 위해 당시 남한에 거주하던 김기림 시인을 찾아 교복을 입은 채 월남했지요.
선생님께서는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강’ 등이 입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한국전쟁의 피란지인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해 모더니즘 시 운동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군사독재 상황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리고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55년 시집 ‘나비와 광장’을 간행한 뒤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내셨는데, 마지막 작품을 이 지상에 남기면서 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등불이 언제까지나 희미한 적 없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의 길 걸어왔지요
청춘은 알지 못할 위대한 길
두고두고 생명을 괴롭혀 왔습니다
생명은 너무 길었지요
시인이 왔습니다,
불운으로
그가 하늘과 구름 사이로 노래해 주었습니다
나는 시인을 따라 밤길을 걸었지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은 하나의 길
그 고독이 나에겐 그리운 종소리였습니다
시인이여
안녕
-‘인사 – 맹문재 씨에게’ 전문
선생님,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고바우’ 집에서 사모님과 함께 점심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시를 쓸게요.
함북 종성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는 나비는
지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로막힌 철조망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 맹문재, ‘광장의 나비’ 중
맹문재 시인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가 있고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등 여러 권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