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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이 밥 먹여주냐?”
팬심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맞는 말이다.
팬 활동이 밥을 먹여주거나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도움이 되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밥을 먹여주지 않아서’ 지치지 않고
오래가는 에너지를 갖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른다.
- ‘덕후가 브랜드에게’ 187p
팬(Fan).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다. 편은지 PD는 ‘연예인이 밥 먹여주냐’는 질타를 한 번쯤 들어봤을 이들의 극성스런 호기심을 수면 위로 올렸다. 예능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에 이은 신간 ‘덕후가 브랜드에게’는 수치로 설명하기 어려운 팬덤 경제를 파헤친다.
취향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시대. “특정 관심사에 깊이 빠져 사회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며 무시당하던 빠순이‧빠돌이들은 이제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로 존중받고, 강한 소비력으로 시장 트렌드를 주도한다. 관심 분야에 돈이나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관련 정보와 후기를 활발하게 공유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입문시킨다.
그러나 합리적인 기준을 벗어나면 불매 운동을 감행해 기업의 대형 프로젝트를 뒤집기도 한다. 팬들은 브랜드의 제품 개발과 홍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팬덤의 가치가 곧 기업의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수의 기업들은 소비자가 주력 제품의 팬이 되길 바라며, 직원 역시 단순한 직원을 넘어 팬으로 만들기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덕후가 브랜드에게’는 주변 산업이나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는 팬덤 문화를 생생한 사례와 함께 분석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팬심을 겨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담은 책이다. 가수 겸 방송인 은지원의 팬클럽 회장 출신이자,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덕질로 행복한 삶을 지속하는 ‘주접단’ 집중 조명 예능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을 제작한 PD로서 얻은 통찰력과 내공을 한데 풀어냈다. 장기적인 불경기와 취향의 다각화라는 어려움을 뚫고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픈 기획자나 경영인, ‘덕질’에 빠진 자녀·부모와의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가족이 참고할 만하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피곤하다
‘덕후가 브랜드에게’ 저자이자, 현재 KBS2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 메인 연출을 맡은 편은지 PD는 오래전부터 팬이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올 거라 짐작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언젠가 통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접이 풍년’ 편성 직전에는 ‘그냥 팬도 보기 싫은데, 나이 많은 팬들이 주접떠는 걸 왜 봐야 하나. 당장 중단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굽히지 않았다. 결국 2022년 선보인 신규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파일럿*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의 ‘극성팬’이었어요. 가족끼리 외식하러 가선 갈비 굽는 아빠 맞은편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오빠들이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한 적도 있죠. 아빠가 ‘벌써 저러면 커서 뭐가 되겠냐’고 혀를 끌끌 차셨으니, 완전 ‘불량 초딩’이었네요. 덕질에 진심이라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팬이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해요. 팬의 팬이랄까요?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책까지 출간하게 돼 너무 뿌듯합니다.”
편은지 PD는 ‘주접이 풍년’을 통해 가수 남진, 송가인, 임영웅, 박서진뿐 아니라 아이돌 그룹 신화, 하이라이트, 강사 김미경, 축구선수 손흥민 등 다양한 스타의 팬들을 마주했다. 각자 특성과 문화가 조금씩 다르나, 모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지녔다. 팬들은 ‘최애(가장 아끼는 대상)가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먹을 힘을 준다’고 말한다고.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이고도 합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스타와 팬의 관계는 특별해요. 송가인 팬클럽 ‘어게인’은 공연 전 서로 모여 응원법과 군무를 연습해요. 큰 가마솥에 족발을 삶거나 어묵탕을 끓여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가수를 홍보하고요. 누가 지시하거나 보상을 주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스타를 위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아버지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죠. 팬 카페 내 악성 댓글 관련 법적 조치, 운영진 자문을 하는 변호사 팬은 수임료를 전혀 받지 않는대요.”
빠르면 50대, 늦어도 60대에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달려왔던 모든 목표에 대한 결실을 본다.
자식들이 출가하고, 회사에서도 퇴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나의 모든 역할과 직급이 하루아침에 종료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성취감이 있어야 하지만 심리적인 공허함이 들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이럴 때 매주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축제의 장에 주인공으로 참여한다면 어떨까.
- ‘덕후가 브랜드에게’ 236p
으른(어른) 팬덤의 원동력
‘엄마는 왜 임영웅 편의점 알바했던 거 짠해하냐, 나도 했었잖아.’
‘나 3년 했잖아.’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였던 게시글의 제목과 내용이다. 억울한 자녀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전국의 어머니들은 아들을 외면(?)하면서 ‘우리 영웅이’에게 심취하게 된 걸까? 편은지 PD는 ‘스토리가 가진 힘’이 그 원천이라고 말한다.
임영웅은 포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세상의 영웅이 돼라’며 비범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사고로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는 긴 무명 시절로 경제 상황이 어려워져도 군고구마를 팔며 꿈을 이어왔다. 노래를 향한 열정과 부모님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무대로 풀어냈고, 이에 마음이 동한 팬들은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 내 모바일 투표에 참여해 임영웅이 최종 1위가 될 수 있게 도왔다.
“유통기한이 지난 시판 고추장은 큰 죄책감 없이 버릴 수 있지만, 대대손손 내려온 비법으로 외할머니가 직접 만든 고추장은 골마지가 껴도 아까워하죠. 겉 부분만 살짝 걷어내고 먹으면 맛은 변함이 없다고 느끼면서요. 감정과 정서를 서로 나눈 팬과 스타는 오죽할까요.”
사실 ‘엄마 팬’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남진, 나훈아 등의 오빠 부대가 있었고,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영웅시대’의 임영웅은 좀 더 특별하다. ‘그땐 그랬었지’ 추억하게 하는 과거의 스타와 달리, 당장이라도 20대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게 한단다.
“KBS2 ‘불후의 명곡’ 녹화장에서 MC 신동엽 씨가 객석을 찾은 어머니 팬들에게 자주 하는 농담이 있어요. ‘아들로서 좋아한다는 거 다 거짓말이죠? 지금 눈빛들이 아주 음흉해요. 전 딱 보면 압니다’라고요. 그러면 다들 자지러지듯 웃죠. 임영웅 씨도 마찬가지로 중장년 팬들을 순간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화법으로 친근함을 더하고, ‘젊게 살고 싶은 분은 저한테 오빠라고 하셔라’라며 너스레를 떠는 매력 덕이 아닐까요.”
‘팬덤=극성’ 공식은 틀렸다
팬들은 스타에게 애끓는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한다. 그러나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으며, 진정한 응원과 지지로 아티스트의 가치가 성장하길 바란다. ‘주접이 풍년’에서 가수 박서진과 그의 팬클럽 ‘닻별’을 녹화할 때 일이다. 팬들은 박서진이 어린 시절 상처로 상대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며 사진 찍기를 한사코 사양했다. 전국 각지에서 노란 단체복을 입고 달려왔으나 정작 현장에서는 가수가 불편해할까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채 그를 보낸 뒤 쓰레기를 줍고, 제작진에게 ‘우리 가수의 고생을 알아주고 주인공으로 불러줘 고맙다’며 간식까지 건넸다고. 이렇듯 팬들은 저마다 성향이 있어 ‘무조건 열광할 거야’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선 안 된다. 즉각적인 만족을 최우선 가치로 두지 않고, 고차원의 감성적인 배려를 일삼기도 해서다.
“스타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면서 팬들 또한 함께 성장하는 것 같아요. 노년 우울증을 겪는 어머니를 둔 한 스태프가 ‘우리 엄마도 덕질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처음엔 연예인 다 부질없다며 팬 활동에 부정적이었는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행복해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본인 어머니 또래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고요. 취미를 공유하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또래 집단과의 만남은 여생의 원동력이 돼요. 팬 카페 가입은 계기일 뿐이죠. 팬이라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제가 기획하는 콘텐츠로 팬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졌으면 해요.”
아직은 트로트계의 올챙이지만 언젠가는 ‘탑골스타’를 꿈꾸는 19년 차 가수 개청이. 어릴 적 본인의 청개구리 짓으로 화병에 걸려 돌아가신 엄마의 ‘노래로 세상에 행복을 전하거라’는 유언만큼은 꼭 지키기 위해 꿋꿋이 활동 중이다. 그는 과연 대한민국 모든 어르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개구리 개, 목청 청. 목청 좋은 개구리 개청이입니다!”
7월 6일 EBS 스페이스 공감 홀에서 탑골스타 개청이의 첫 팬미팅이 열렸다.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등장한 그는 화려한 노래 실력과 입담을 뽐냈다. 올 2월 발표한 앨범 ‘탑골스타 개청이’의 타이틀곡 ‘개청이가 왔어요’, 가수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 임영웅의 ‘보금자리’ 등 다양한 곡을 소화했고, 특별 손님 ‘딩동댕 유치원’의 뚝딱이와 합동 무대까지 선보였다.
Q&A ‘개청이가 궁금해’, 팬들과 함께하는 ‘청이 노래방’ 등 이벤트도 진행됐다. 개청이는 “비둘기 세 마리를 청중 삼아 길거리 공연을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팬미팅을 열게 되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사랑해주신 덕에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소감을 밝혔다.
EBS에 간택당한 무명 개구리
노래는 불효자였던 개청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효도다. 무명 생활이 길어져도 포기하지 않는다. 낮에는 노래교실 조교, 밤에는 라이브 카페 알바를 하며 꿈을 이어가던 그에게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찾아왔다. 스타성 높은 인물을 수소문하던 제작진의 눈에 띈 것.
성장기를 다큐멘터리로 담고 싶다는 제작진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 개청이는 이를 계기로 가수 활동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장소 불문 어디든 자신을 홍보할 기회가 있다면 쫓아가고, 일타강사의 노래 과외까지 참여한다. 그 덕분인지 트로트 대부 진성의 도움으로 생애 첫 행사 무대에 서고, EBS의 유명 인사 펭수와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탑골스타 개청이’는 EBS가 야심차게 준비한 개구리 캐릭터다. 제작을 담당하는 박진우 EBS PD는 “어릴 적 한 번쯤 들어봤을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로 시작하는 노래처럼, 노래하는 개구리는 대중이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만한 캐릭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다가 나중에 개과천선한다는 청개구리 우화도 착안했단다. 개청이의 외모는 한번 보더라도 잊기 어렵게, 눈에 띄도록 형성하고자 했다. 처음 보기에는 독특해도 자꾸 보면 정이 가고 입체적인 인상을 줄 수 있게끔 의도했다.
성격 역시 마냥 귀엽고 아이 같은 캐릭터들과 차이가 있다. 앞서 EBS가 배출해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순수한 눈망울의 캐릭터 펭수(10)와 달리 개청이(39)는 적절히 때 묻은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긴 무명 세월만큼 인생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때로는 간사해 보일 정도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며 밉지 않은 장난도 친다.
개청이가 가수 이미지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노래 제작에도 힘썼다. 개청이를 대표하는 노래 ‘개청이가 왔어요’는 가수 박현빈의 ‘샤방샤방’, 영탁의 ‘찐이야’를 작곡한 ‘알고보니 혼수상태’와 함께 만든 빠른 박자의 트로트다. 박 PD를 비롯한 제작진은 처음 가이드가 나오자마자 개청이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라는 반응이었다고.
어르신과 화합하는 청년
트로트 가수라는 정체성으로 예측할 수 있다시피 개청이는 중장년층을 주 타깃으로 한다. 개청이 제작진은 TV조선 ‘미스터트롯’이나 MBN ‘현역가왕’과 같은 트로트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50대 이상 시청자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았지만,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개청이가 탑골스타로 성장하면서 중장년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보며 지혜를 배우는 과정을 콘텐츠로 제작하게 된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시도해본 적 없던 일이라 ‘과연 중장년층이 캐릭터를 좋아해줄까?’ 하는 우려는 있었다.
걱정과 달리 실제 반응은 긍정적이다. 첫 촬영을 위해 노래교실을 방문한 날, 박 PD는 개청이의 노래를 듣던 어르신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19년째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개청이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카메라 앞으로 스스럼없이 들어와 함께 춤을 추거나, 개청이를 본 적 있다며 찾아와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도 생겼다.
박 PD는 “개청이가 가장 존경하는 가수 임영웅을 만나고 싶어 하고, 저 역시 그와 개청이가 만나 함께 무대에 서는 에피소드를 제작해보고 싶다”며 “더불어 트로트 가수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는 ‘미스터트롯3’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노인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편견과 선입견은?”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노인복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주름, 검버섯, 쾨쾨한 냄새…. 온갖 의견이 쏟아지는 가운데 누군가 “탑골공원”이라 답한다. 그곳에 가면 노인이 많아서란다. 언젠가부터 나이 듦의 수식어로 쓰이는 ‘탑골’. 다소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단어에 ‘스타’라는 말을 결합해 희망의 메시지를 부여하는 39세 청년 개구리의 귀추가 주목된다.
“초대박(예정) 가수, 개청이에요~”
팬미팅이 끝나자마자 가수 진성의 공연 ‘진성빅쇼’에 게스트로 출연하기 위해 바삐 발걸음을 움직인 개청이. 높아진 인기(?)에 피곤할 법도 한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을 위해 시간을 마련해 따뜻한 메시지를 전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Q.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A. 어버이날을 맞아 요양원을 방문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시설에 계신 분들께 직접 만든 밤양갱을 나눠드리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슬프게도 제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지금은 어버이날을 챙길 수 없는데요. 80대, 90대 어르신들을 뵈니 뭉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를 좋아해주시고 예뻐해주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추억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불러드렸어요.
Q. 개청이에게 트로트란 무엇인가요?
A. 제 인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트로트를 잘 부르기로 유명했고, (그런 저 때문에 어머니가 화병에 걸리시긴 했지만)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 아닐까요? 멘토인 가수 진성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트로트에는 희로애락,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Q. 트로트 외에 도전해보고픈 장르를 골라주세요.
A. 7080 노래를 즐겨 듣는데, 그중에서도 김광석 선배님 노래를 정말 좋아합니다. 팬미팅에서도 ‘그날들’을 불렀죠. 기회가 된다면 7080 노래를 더 많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Q. 중장년 팬들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아티스트에게 팬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장년분들은 고유의 흥이 많고, 표현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무대 앞으로 나와 거리낌 없이 같이 춤추고, 고생했다며 맛있는 음식도 많이 챙겨주세요. 자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Q.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A. 안녕하세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님들! 탑골스타를 꿈꾸는 목청 좋은 개구리 개청이입니다.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고자 무명 생활을 버티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유튜브 ‘탑골스타 개청이’ 구독하시고, 재미있는 영상과 좋은 노래 많이 들어주세요.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행사!
조 대위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 앉아 고뇌했다. 왼쪽 다리를 골반까지 잘라내는 수술을 앞둔 참이었다. 전선에서 적들과 싸워 입은 부상도 아니었다. 병명은 골육종. 의사는 극심한 통증을 막고, 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지 절단만이 답이라고 했다. 대위는 기도했다. 이 병만 낫게 해준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마침 응급환자 때문에 중단된 수술을 거부하고 여윈 몸을 일으켜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말로 지금도 남을 위해 살고 있다.
조인검 사단법인 행복을나누는사람들 상임이사는 투병 당시를 떠올리면 어머니 생각이 먼저 난다고 했다.
“건강하던 아들이 갑자기 그렇게 됐으니 심정이 어떻겠어요. 38kg까지 체중이 줄어든 아들을 업다시피 데리고 다니면서 안 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애쓰셨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떤 치료 방법이 맞았는지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죠. 한약은 물론이고 벌침도 맞고, 굿판까지 벌였죠. 그러다 어느 날 통증이 줄더니 의사들도 놀랄 정도로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어머니의 노력이 저를 살렸다고 봐요.”
건강을 되찾으면 남을 위해 살겠다는 약속을 그는 지켰다. 군에서 대위로 제대한 후 그는 다양한 사회복지기관을 경험했다. 물론 생활은 쉽지 않았다. 사회복지기관에서 받는 돈은 대위 월급의 1/3도 되지 않았다. 애써 병마를 이겨낸 아들이 다시 고생길로 들어서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다. 그렇게 돌봄이나 장기기증 등 다양한 기관을 거치다 그가 사회복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있을 때였다.
건강 되찾자 시작한 사회복지활동
“장애가 있는 친구들 중 가족이 없는 어린 친구, 사고로 혼자 된 아이들은 돌보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학교도 보내야 하고 식사도 챙겨야 하는데,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죠. 매일 새벽 애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고요. 그래서 아예 그런 아이들 몇 명을 집으로 불러다 데리고 살았어요. 대중교통 타는 법을 알려주고, 검정고시도 보게 하면서 젊은 혈기에 가족처럼 보살피려고 했죠. 그런데 아이들 입장에선 돌봐주는 사람 눈치 보느라 꾹 참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고 보상금이 나오니까 아이들이 다 나가버렸어요. 제 입장에선 상실감이 컸죠. 차라리 돈이라도 좀 받으면서, 아이들이 할 말은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결국 그 아이들은 큰 돈을 간수하지 못하고 다시 힘든 처지가 되더라고요.”
이후 그가 다시 시작한 일은 만성신부전 장애인들을 돕는 일이었다. 사회복지센터 로뎀나무 설립을 돕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단지 그들을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지역 어르신들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일을 함께 했다. 한 가지도 하기 어려운 봉사를 두 가지나 함께 한 것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제가 만성신부전 환자를 돕다 이후에는 백혈병 아이들을 돕는 일을 했는데, 지역에서 이런 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면 반응이 비슷해요. 혹시 병이 옮지는 않을까, 자신들에게 해가 되진 않을까 하며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이죠. 환자 가족이 상처받을 만한 말도 쉽게 내뱉어요. 그래서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단지 도움이 필요할 뿐이라고 진실을 알려줄 수 있도록 지역 주민들이 드나드는 장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식사도 드리고, 병원 가는 어르신이 있으면 환자들 갈 때 같이 태워드리며 가족처럼 지내기 시작했어요.”
백혈병 아이와 가족들은 더욱 도움이 절실했다. 일을 시작한 2007년 당시만 해도 백혈병을 앓는 아이들은 서울 인근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제대로 된 치료시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쪽잠을 자거나 근처에 쪽방을 얻어 생활하기 일쑤였다. 이를 본 조 이사가 지역 빈집을 찾아 이들을 위한 시설로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16가구를 대상으로 시작했고, 많을 때는 64가구까지 늘어났다. 아이들에겐 치료를 기다릴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하고, 부모들에게는 취업을 도와줬다. 이 활동은 2011년까지 계속됐다.
“시행착오도 많아요. 환자 가족이 지낼 집을 마련하고 의기양양한 마음에 ‘위기가정지원센터’라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죠. 그런데 형규라는 아이가 엄마한테 묻는 거예요. 우리도 ‘위기가정’이냐고요. 아차 싶었죠.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바로 떼어버렸습니다.(웃음) 또 하루는 방 한 칸에 도시가스 비용이 35만 원씩 나오길래 아이 부모에게 좀 줄여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감기 들면 바로 응급실 가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입이 방정이다 싶었죠.”
식사로만 건강 찾는 노인 많아
지금 ‘행복을나누는사람들’에서 하고 있는 푸드뱅크 사업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환자 지원을 통해 관계를 맺게 된 병원 같은 집단 급식시설에서 매일 보관하는 예비식을 받아, 환자 가족과 지역 어르신에게 지원하던 것이 점차 규모가 커졌다.
“김홍신 작가의 ‘겪어보면 안다’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밥을 퍼주다 보면 진짜 밥이 하늘이라는 걸 알게 돼요. 어르신들 배 곪다가 식사를 제대로 꾸준히 하시면, 병원도 덜 가고, 소일거리도 열심히 하시게 돼요. 그러면 옆에서 모시던 자녀는 자기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결국 가정이 제대로 돌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죠.”
환자 가족 지원사업은 멈추었지만, 푸드뱅크는 계속되고 있다. 규모도 훨씬 커졌다. 처음 15가구로 시작한 이 사업에 음식을 희망하는 등록 가구는 1400가구가 넘는다. 모두 다 지원할 수 없어 3개월 단위로 혜택 가정을 순환한다. 신청은 지역 노인복지관이나 행정복지센터 등을 통해 접수받는다. 유관기관과의 공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희는 기부처를 발굴하고 수령, 검수, 포장, 배분을 준비하는 역할이에요. 그러면 유관기관 자원봉사자들이 오셔서 담당 지역의 가정으로 음식을 전달해주세요. 이 과정에서 냉장고 속을 살피며 그분들이 식사는 잘하시는지, 도움이 더 필요하진 않은지, 건강은 어떠신지 확인할 수 있어요. 음식 하나로 기부에서 전달까지 커다란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셈이죠.”
인터뷰 중 오후 3시가 되자 사무실이 부산해졌다. 음식을 전달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지역 주민들로 모두 유관기관을 통해 봉사활동을 신청한 이들로 구성됐다. 차량도 자신의 차를 이용한다. 배달 과정에서 국물이 새거나 음식 냄새가 밸 수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게 정성을 빈자리 곳곳에 눌러 담고 서둘러 출발했다.
“푸드뱅크 신청을 유관기관을 통해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용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밥 달라’는 말은 하기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기관을 통해 신청을 받으면 복지 차원의 권리라고 생각하세요.”
‘사고’로 시작한 김치 사업
조인검 이사가 하는 일에는 김치 사업도 있다. 기부받아 배분하는 일이 아닌 어엿한 제조업이다.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되는 ‘복사골김치’다.
“저희가 푸드뱅크 사업을 하니까 지자체에서 연락이 왔어요. 지역 빈곤아동을 위한 급식 지원 사업을 대행해줄 수 없냐는 것이었죠. 끼니당 2500원씩 예산이 배정된 사업이었어요. 당연히 오케이했죠. 수천만 원을 투자해 조리시설을 갖췄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사업이 ‘아동급식카드’로 전환되어버렸어요. 아이들도 한식보다는 떡볶이 같은 분식을 선호하니까요. 시설을 처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지역 병원에서 그 소식을 듣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병원 급식에 필요한 나박김치를 공급해달라고. 나박김치는 환자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조 이사가 김치 생산에 주목한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일자리 창출. 지역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에 김치 제조만 한 사업은 없었다. 현재 복사골김치에 근무 중인 근로자는 총 22명. 그중 17명이 65세 노인이다. 노인들에게 이 직장은 보통의 노인일자리 사업과는 엄연히 다르다. 전원이 정년 없는 정규직이다. 임금 수준도 최저임금의 120% 정도로 적지 않다. 암 같은 큰 병을 앓아도 일할 수 있다면 언제든 복귀할 수 있는 일터다. 그래서 이곳에는 장기 근속자가 많다.
“저희도 염도 측정기 같은 장비를 쓰지만, 김치 담그는 것은 계절별로 원재료 특성이 다 달라서 ‘경험’이 반드시 필요해요. 말 그대로 내공이 필요한 셈이죠. 나이 먹으면 미각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제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이런 노력 덕분인지 복사골김치를 찾는 곳이 적지 않다. 공장에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을 적용해 지역 병원이나 지자체에도 납품 중이고, 2014년에는 인천아시안게임 참가 선수들이 식사 때마다 복사골김치를 맛보았다.
복사골김치는 일자리 창출 외에 사회공헌활동의 선순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조 이사는 이야기한다.
“푸드뱅크 사업에 필요한 임대료, 전기세, 차량 등은 모두 사회적 기업에서 나와요. 김치 팔아서 밥 퍼주는 셈이죠.(웃음) 물론 푸드뱅크를 통해 저희 김치가 직접 전달되기도 합니다. 이런 선순환 구조는 지역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해요. 앞으로는 고령화로 인력이 부족한 노인 요양시설에 요양보호사를 보조할 수 있는 인력을 보내는 일을 하고 싶어요. 지역 어르신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요. 발달장애인 일자리를 위해 유사한 사업을 진행 중인데, 수요가 많을 것으로 예상돼요. 노인들은 수입이 생겨 생활이 안정되고, 환자 보호자들은 전담할 수 있는 인력이 생기니 모두가 만족하는 구조입니다.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지역 주민 모두가 행복한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의 대한민국 테니스 열풍 뒤에는 이형택이 있다. 묵묵히 불모지를 개척해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운 인물이다. 올림픽 4회 출전, 아시안게임 2회 연속 금메달, 한국인 최초 ATP 투어 대회 우승, US오픈 16강 진출, 세계 랭킹 36위 등. 테니스 선수로 그가 이룬 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그는 현재 주니어 선수 감독으로 테니스와 함께하고 있다. 아홉 살 때 테니스를 시작하던 마음을 기억하며, 명맥을 이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테니스 열풍 뒤 고민
테니스 코트를 배경으로 화보 촬영한 소감이 어떠셨나요?
코트 색감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괜히 아이돌 된 기분도 들고, 좋았습니다. 하하. 요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지난해 12월 무릎 수술을 해서 재활 훈련을 하면서 주니어 선수 육성에 매진하고 있죠. 그런데 이렇게 테니스 외적으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어 기분도 환기되고 재밌었습니다.
요즘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상당한데 실감하시나요?
동호인, 그러니까 생활체육 쪽에서 테니스가 인기를 끌고 있죠. SNS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쁘고 멋진 옷을 입고 테니스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SNS에 사진을 게재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건강에 좋은 스포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시니어분들에게도 테니스 운동을 추천합니다. 전신 운동, 유산소 운동이 되고 테니스를 하면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체력이 안 따라준다거나 부상당할까 봐 너무 겁내지 마시고 한번 배워보세요.
이 인기는 앞으로도 이어질까요?
지금이 참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기를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저는 테니스라는 스포츠가 더욱 발전하려면 결국 엘리트 선수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포츠 업계에서는 테니스가 10년 전 골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얘기해요. 박세리 선수 이후 좋은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세계대회에서 이름을 알렸기에 발전할 수 있었죠. 지금 국내에서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이 100만 명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300만 명 이상으로 커지려면 정현, 권순우 같은 선수가 4~5명 정도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현, 권순우 선수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두 선수 모두 본인의 의지로 해외 경기에 도전했고 멋진 성적을 냈죠. 정현 선수는 그랜드슬램 4강을 달성했어요. 지금은 부상으로 인해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권순우 선수는 최근 메이저 대회(프랑스오픈)에서 승리하며 활약을 보여줬죠. 선배로서 두 선수 모두 몸 관리 잘하고, 부상 없이 투어 생활을 오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너무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제가 그러지 못했기에 선수 생활이 끝나고 좀 아쉽더라고요. 해외에 가서 맛집도 못 가보고 주변 관광도 못 즐기고 그랬죠.
빛나던 영광의 순간들
테니스 불모지에서 어떻게 선수가 되셨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강원도 횡성군 오천면에서 자랐어요. 어느 날 저희 초등학교로 발령받아 오신 선생님이 테니스부를 창단하신 거예요.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축구 테스트를 하셨어요. 축구를 잘하면 모든 스포츠를 잘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 선생님이 제 축구 실력을 좋게 봐주셔서 테니스부에 들어갔고, 그게 시작이 된 거죠. 그때는 정말 테니스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아홉 살짜리 아이였어요.
선수 생활 기록 중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많은 분들이 ‘타이브레이크의 기적’이라면서 2005년 국제남자챌린저테니스 경기를 얘기하시죠. 6대0에서 역전승을 거둔 스토리가 포인트 같아요. 당시 저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마음이 통했던 걸까요? 그리고 19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수상은 저에게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회사가 IMF로 많이 힘들었거든요. 제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선수 생활이 그때 끝났을 수도 있어요. 금메달을 따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시작했고 2000년 US 16강 진출도 가능했죠.
경기 때 특별한 징크스가 있었나요?
징크스는 아니지만 저는 식당에 가면 항상 앉았던 자리에 앉으려고 했어요. 경기하는 날이 아닐 때도요.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앉지 못하면 괜히 아쉬운 기분이 들곤 해요. 생각해보니 징크스가 하나 있었네요. 어머니께서 관람하러 오시는 날에는 한 번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오시지 말라고 했는데, 아마 서운하셨을 거예요. 그 징크스를 깨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끝날 때까지 깨지 못했죠.
테니스 경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건 결국 무엇일까요?
테니스는 매 순간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스포츠예요. 그렇기 때문에 멘털 관리가 중요하죠. 경기하면서 조급해지는 순간이 와도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덤덤해지려고 노력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 긴장하지 말자고 계속 저 자신과 대화를 하죠.
지금도 테니스 황제
선수 시절과 비교해 체력이 떨어진다고 느끼시나요?
아무래도 근력의 질이 많이 다르죠. 힘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평소에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하려 하고 러닝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죠. 테니스장에 있다고 운동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선수가 아니고 지도자잖아요. 여러 명의 학생을 신경 쓰느라 바쁘죠.
요즘에도 축구를 즐기시나요?
축구는 체력 훈련 삼아 하고 있어요. 전에는 축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뭉쳐야 찬다’(JTBC 예능)를 하면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고 기술을 익혔죠. 축구장을 뛰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또 요즘은 골프를 취미로 즐기고 있어요. 사실 골프 프로 투어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여러 여건상 안 되겠더라고요. 이제 무릎이 좋아지면 야구, 마라톤 등 새로운 운동에 도전해보려고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니까요.
유튜브 채널 ‘머드Lee-이형택TV’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머드Lee’는 제 별명이고, 한마디로 말하면 테니스를 주제로 하는 채널이에요. 정보영 선수와 대결을 펼치는 영상(조회 수 200만 회 돌파)이 가장 인기가 많아요. 시청자들이 제가 경기하는 영상을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테니스 치는 분들한테만 재밌는 영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다른 스포츠 즐기는 모습, 먹방, 일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다루려고 합니다.
테니스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테니스는 제게 동반자예요. 죽을 때까지 계속 같이 가야죠. 끝이라는 게 없는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고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제가 올림픽을 4회, 16년 동안 출전했어요. 그런데 메달이라는 성적을 내지 못해 아쉽다고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잘 견뎠다고 위로받을 수도 있겠죠. 지금 저는 주니어 선수 육성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후배들이 좋은 길로 가는 것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죠.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테니스에 대한 열정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테니스라는 스포츠 자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야 좋은 선수들도 많아지고 선순환 발전이 이뤄지는 거죠.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에는 ‘모던춘지’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싶어 문을 활짝 열어보니 라디오 1000여 대가 얼굴을 드러낸다. 나이도 국적도 달라 보이는 라디오가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라디오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없는데, 이곳 주인 김형호 기자는 “그냥 라디오가 좋아서 모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전시나 수익의 목적이 아니라 취미 수집의 결과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덕후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이 붐박스는 마돈나가 ‘Hung-Up’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공연에서 갖고 나온 모델이에요. 겉모습만 봐도 화려하죠.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와 성향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건 VE301이라는 굉장히 오래된 라디오입니다. 히틀러는 이 라디오를 국민에게 보급해 연설을 내보내는 등 선동하는 용도로 사용했죠.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담긴 LP판도 공수해와 놓았답니다. 어느 날 여길 방문한 독일 분이 보고는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김형호 기자는 모던춘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라디오에 대해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가장 오래된 라디오가 가장 비싸냐’는 식의 질문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다고 꼽았다. 그의 답은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비싼 게 아니다. 당시 어떤 가치를 구현했느냐가 중요하다”였다. 보통은 라디오의 외형이나 금액 등을 궁금해하지만, 그는 라디오 뒤에 숨은 스토리에 주목한다. 라디오가 가진 역사, 가치, 그리고 라디오 주인과 그의 사연. 그 모든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있다.
라디오를 수집한 지 약 15년. 김형호 기자도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라디오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부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으로 날씨를 확인했고, 어린 소년은 늦은 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라디오의 음색은 소년의 감수성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후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은 TV에 나오는 지역 방송국 기자가 됐다. 그러나 늘 마음속 한편에는 라디오가 자리한 터. 그리하여 라디오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라디오 안식처, 모던춘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필연인 순간들이 있다. 김형호 기자는 결혼할 때 아내로부터 TV 대신 티볼리 라디오를 혼수품으로 받았다. 라디오를 애지중지하며 매일 방송을 청취했던 그는 어느 날 1970년대 독일에서 나온 라디오 소리를 듣게 됐단다. 티볼리 라디오보다 30년 정도 일찍 만들어진 것인데, 놀랍게도 소리의 차이는 엄청났다고. 김 기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여기에 그의 지적 호기심이 더해지면서 라디오 수집과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김형호 기자의 집에 쌓이는 라디오도 늘어났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다행히 2017년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사 가면서 라디오 보관 공간이 생겼다. 단독주택인데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는 습기가 문제였다. 라디오가 상할까 봐 걱정하던 가운데, 김 기자는 대형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다. 라디오 전문 사이트에서 한꺼번에 내놓은 라디오 100대를 집에 데려온 것. 더 이상 라디오를 지하실에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즈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모던춘지가 지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죽음이라는 게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물건의 의미도 생각하게 됐죠. 장례 후 자식들이 어머니 집 정리를 했는데,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의 가치를 모르니 버릴 수밖에 없어 너무 죄송스럽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라디오에 대한 가치를 정립해놓지 않으면 이 물건들이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공간을 지었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기도 했죠. 모던춘지의 ‘춘지’는 어머님 성함이에요. 여기 있으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죠.”
2019년 모던춘지를 지을 당시 건축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었다. 그는 삼척 신혼집 아파트를 팔고 보험도 해지해 1억 원이 넘는 돈을 마련했다. 라디오 수집에 이어 창고 만들기까지, 취미활동으로 큰돈을 소비한 김형호 기자는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말에는 여기에서 노는 게 좋다. 이런 놀이터 같은 공간을 갖는 것이 어른의 로망 중 하나인데, 아내가 이해해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호주에 사는 친형과 라디오 수집을 같이 시작했어요. 사실 호주에는 여기보다 더 많은 라디오가 있답니다. 4년 전쯤 형과 라디오 수집을 위해 호주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라디오의 의미, 사연 등을 인터뷰한 것을 영상으로 남겨놓았어요. 그걸 편집해 만든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2월 13일 세계 라디오의 날에 여기에서 가졌죠. 라디오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를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종종 토론회, 전시회를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가서 라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을 형성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라디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리관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전극을 넣은 진공관 라디오다. 두 번째는 1954년 미국에서 발명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다. 반도체 부품이 쓰이면서 파손 위험이 줄어들었고, 오늘날 휴대용 라디오도 탄생했다. 그렇다면 라디오 역사계에 있어 혁명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 김형호 기자는 붐박스(Boombox) 탄생이라고 꼽았다. 붐박스는 트랜지스터에 속하며,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힙합과 브레이크댄스의 영향으로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다.
“저는 붐박스를 문화가 접목된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흑인들이 랩 배틀을 할 때 비트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휴대 가능한 붐박스가 큰 역할을 했죠.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청춘들한테 인기를 끌었어요. 그래서 붐박스는 중년들에게 향수의 물건인데,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죠. 저는 붐박스만 100개 넘게 모았어요. 전 세계적으로 붐박스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국내에서는 이렇게 모은 사람이 없어요. 붐박스를 계속 수집하고 연구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된 라디오 생존법
김형호 기자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볼 때, 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는 라디오가 소품으로 나와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2000년대에 나온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라디오는 변천사를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소품이 잘못 쓰여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김 기자는 “라디오 전문가로서 자문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도 가끔 비공식적으로 소품 자문 요청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 인물의 환경 등을 분석해 답을 찾는다. 작은 디테일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라디오가 오래된 물건 같지만 사실 역사가 100년이 채 안 된 물건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1980년대 이전의 라디오 스토리를 잘 모르죠. 저도 수집하면서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접했으니까요. 라디오 연구와 자문을 통해 시대별로 만들어진 라디오가 다르다는 점과, 그 안에서 읽어야 하는 코드는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라디오의 가치를 찾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집에 오래된 라디오가 있었는데, 저는 보자마자 그 라디오의 가치를 알아봤어요. 그게 지금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박물관 전시 주제와 맞는 라디오라고 생각해, 제가 중간에서 가치에 대해 보증을 섰죠.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이 어느 날 박물관에 전시되다니, 얼마나 놀랍고 뿌듯한 일인가요.”
현재는 ‘옛 물건’, ‘서민형 물건’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과거에는 라디오가 고급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1970년대만 해도 라디오 한 대 가격은 100만 원, 현재 가치로 보면 1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TV가 보편화되면서 라디오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요가 줄어들자 제조사에서도 예전만큼 좋은 부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라디오는 저품질화되고, 대중의 인식 또한 저하되고 말았다. 김형호 기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라디오에 손이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소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부품의 차이가 크죠. 쉽게 얘기하면 과거에는 스피커를 쇠와 자석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비싸다는 이유로 자석을 쓰지 않아요. 그래서 과거 라디오와 같은 단단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저는 소리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있죠.”
김형호 기자는 라디오 수리도 직접 한다. 회사의 필요에 따라 무선설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그 덕에 기초 지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수백 대의 라디오를 직접 고쳐보며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오래된 라디오의 전원이 켜지게 하고,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 방송이 스피커에서 나오게 한다. 블루투스 스피커 장치 연결로 휴대폰 음악 듣기도 가능하다. 세상의 변화는 때로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좋은 소리를 좇아 라디오를 모으고, 수명 다한 라디오를 살려내기까지 하는 김형호 기자. 그 낭만의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현재 사람들은 라디오를 방송으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물건으로서 다가가면 또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제가 만든 것처럼 오래된 라디오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활용할 수도 있죠. 오래된 라디오의 소리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방송 진행자가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일반 전자기기로 노래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오래됐다고 무조건 낡은 물건이 아닙니다. 숨을 불어넣어 주면 물건의 가치는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김광석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건모 ‘아름다운 이별’, 박진영 ‘너의 뒤에서’, 성시경 ‘내게 오는 길’, 신승훈 ‘I Believe’, 엄정화 ‘하늘만 허락한 사랑’, 임창정 ‘그때 또 다시’…. 1990~2000년대 부드러운 리듬으로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주던 김형석 작곡가. 특유의 감성은 어쩌면 여름 초입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피아노 선율을 곱씹으며 옛 추억에 잠겨 있노라면 귀를 시원하게 때리는 전자음악과는 또 다른 기분을 느끼게 될 테다.
김형석의 여름
‘작곡가의 여름’을 주제로 화보 촬영을 진행했는데 어땠나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 잘 어울릴 법한 의상들을 입어서인지 정말 휴가 온 기분이 드네요. 밖에는 비가 오고, 담장에 매달린 넝쿨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평온해지는 느낌이에요.
이 계절에 떠오르는 악상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 미디엄 템포 음악이 먼저 떠올라요.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지죠. 드라마 ‘눈이 부시게’ OST인 하림의 ‘소풍’처럼요. 하림이 묵직한 목소리로 ‘인생의 모든 게 아름다웠고 선물 같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에 또 웃자’고 노래해요. 담백하게 피아노로만 작업했는데, 훨씬 호흡이 섬세해진 것 같아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양한 악기와 화려한 효과음이 섞인 노래도 물론 좋지만, 여름만의 따스한 정취를 잘 담았다고 생각해요.
보통 휴가를 어떻게 보내나요?
가족들이 하와이에 있어서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요. 워낙 물을 좋아하는데, 바닷가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해도 충전이 돼요. 산은 오르기가 좀 힘들고.(웃음) 여행 가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최대한 새로운 장소에 집중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특정 경험과 기억을 녹여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편이라서요. 본격적으로 영감을 얻고자 하면 건반 하나 들고 혼자 떠나기도 합니다. 제주도 핀크스 포도호텔이라고,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만든 호텔을 종종 방문해요. 더 깊게 내 안으로 파고들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늘 건반과 함께네요. 촬영장에 도착해서 꺼낸 첫마디도 ‘와, 피아노가 있네?’였어요.
촬영장에 피아노가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가장 친숙한 악기거든요. 아버지가 음악 선생님,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이셨어요. 돌이켜보면 최고의 환경이네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자기 전까지 자연스럽게 피아노 소리를 들었죠. 데뷔할 즈음(1989년)에는 당시 활동하던 거의 모든 가수의 건반 세션을 맡았고요. 작곡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만들 때도 있지만, 중심은 피아노예요. 무작위로 치다가 테마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얻어요.
창작자이기 때문에 일과 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작곡 과정이 일이자 쉼이에요. 이 닦고 세수하고 잠자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요. 어떤 경우든 이걸 소리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습관처럼 고민해요. 반복되는 생활을 하더라도 날씨나 기분,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매번 다르니까. 오늘 촬영하고 인터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매 순간 나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겁니다. 명확한 공정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모든 요소가 다 얽혀 있죠. 쉽지는 않지만 게을리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가끔 스트레스를 받진 않나요?
오히려 작곡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에요. 배출구라고 해야 하나.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다가 안으로 곪는 것보다 나아요. 그렇게 생각해야 덜 힘들지 않을까요.
무한히 확대된 음악 세계
어느덧 작업한 노래가 1500곡가량 된다고 들었어요.
하하, 그렇게 됐어요. 최근엔 ‘사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옛날 발표했던 음악을 재구성해보고 있습니다. 의뢰를 받아 작업할 때는 근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노래가 아니라 가수를 돋보이게 할 노래를 만들어야 해요. 그가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스타일의 음악을 연구해야 하죠. 제 취향과 상관없이요. 하지만 사계 프로젝트는 예전부터 리메이크하고 싶었던 노래를 자유롭게 골랐어요. 첫 번째 트랙은 드라마 ‘상어’의 OST인 ‘천국과 지옥 사이’예요. 보아도 너무 잘 불러줬는데, 백지영의 슬픈 목소리를 만나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습니다. *매 분기별로 김형석 작곡가의 구보를 활용한 리메이크곡이나 신곡을 발매하는 프로젝트.
굵직한 이력을 가졌음에도 AI에 위기감을 느꼈다고요.
한 박람회의 주제가 공모전 심사에 참여해 최우수작을 뽑고 보니 그게 AI를 활용해 만든 곡이었어요. 상을 줘도 되나, 이제 난 뭐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이 됐어요. ‘도레미’를 배우지 않아도 명령어만 잘 설정할 줄 알면 그럴싸한 노래를 몇 분 만에 만들 수 있다니. 창작의 문턱이 확 낮아진 거죠. 미래학자가 아니라 섣불리 예단하긴 어렵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아이디어가 전부인 시대가 될 것 같아요. 예술보다는 예술가가 훨씬 주목받을 겁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는가, 삶의 결과물을 어떤 스토리로 대중에게 소구할 것인가가 중요하겠네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네요.
내면의 여러 소리를 더 예리하게 들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려면 내 경험에 의한 선입견이나 고집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흡수하고 연구해야 하고요. 나이 들수록 점점 그런 면모가 사라질까 봐 신경 쓰여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준이 굳어지게 될지도 모르죠. 예전과 달리 감성보다 이성이, 이상보다 현실이 앞서게 돼요.
나이 듦이 주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지 않을까요?
요즘 들어 삶은 유한하다는 걸 부쩍 체감해요. 여전히 뭔가를 잘 해내고자 하는 욕심은 있지만 좀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죠. 어릴 땐 나의 만족을 위해서만 일했다면 이제는 내 아이와 후배들, 그리고 대중을 위해 작업하려 합니다. 작업의 의미가 확대된 셈이에요.
끝나지 않을 성장
후배들을 보면 어떤가요?
다들 너무 잘해요. 오히려 배우는 부분도 많고요. 신선하고 감각적인 음악을 통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워요.
주목하는 아티스트는 누구인가요?
선우정아 노래에 푹 빠져 있어요. 크러쉬, 자이언티도 좋아해요. 보석 같은 존재죠. 요새 양카일과 작업도 해요. 색다른 시각을 접할 계기가 되더라고요. 계급장 떼고 음악이라는 공통 언어를 통해 서로를 이해시키고 이해하는 것. 그게 진짜 교류라고 생각해요. 가르치고 이끌어준다기보다 같은 업계에 몸담은 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감을 얻어요. 제 음악과 또 다른 음악이 융화되는 과정이죠.
김형석의 감성, 김형석의 음악을 어떻게 느꼈으면 하나요?
아무리 원망스럽고 미워도 지나고 보면 그런 감정이나 상황은 희미해지잖아요. 결국 추억으로 여기고 용서하게 되죠. 제 음악이 상흔을 어루만져주는 수단이자, 추억과 용서의 계기가 됐으면 해요.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감성을 끄집어내야 하는 직업을 가져서인지 꽤 예민한 편이에요. 겉으로는 부처님 미소를 짓고 있지만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때가 있어 미안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곡을 쓰다 가고 싶어요. 내가 일흔 살이 돼서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뭘까 고민하죠. 드라마, 영화, 광고, 뮤지컬 등 부지런히 활동하고 재능도 나누고. 그러면 여한이 없겠어요.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음악에 대한 관심, 애정, 집중. 한 분야에 오래 있다 보면 퇴색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고요. 사실 1500곡을 쓸 때마다 1500번의 슬럼프를 겪었어요. 그때마다 이론은 빠삭해지겠지만, 감각이 느는 건 아니에요. 경험이 곧 성장은 아니더라고요. 얼마 전 쓴 노래가 10년 전 노래보다 별로인 경우도 있어요.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던 건 저 세 가지예요. 그래서 꾸준히,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Summer Playlist - 김형석이 꼽은 여름 노래
김광석-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조한-날 봐요
박진영-영원히 둘이서
존박-굿데이
하림-소풍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하고 65세에 은퇴한 뒤 일본어 학교 교사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나가시마 에쓰코(永嶋悦子, 71세)씨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나가시마 씨는 일주일에 네 번 유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친다. 결혼 후 출산을 망설일 정도로 일이 너무 좋았던 나가시마 씨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2년간 금융업계 누빈 커리어우먼
나가시마 씨는 1975년 산와은행(三和銀行, 현 미쓰비시도쿄UFJ은행)에 입사했다. 산와은행에서 17년간 일하면서 긴자지점 지점장대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계열 회사인 에스에이서비스(エスエサービス, 현 미쓰비시UFJ웰스어드바이저스 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겨 6년 동안 재무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전근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금융업계라고 볼 수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산와종합연구소(三和総合研究所, 현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에서 19년 근무하고, 2017년 42년간 몸담았던 금융계를 퇴직했다. 나가시마 씨에게 과거 금융업계에서 일했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을 묻자 연구소에서의 일화를 꼽았다.
“산와종합연구소에서 일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기업의 경영 상담도 하고, 관공서에서 수탁받은 조사 업무도 했죠. 가끔 금융 세미나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리포트 작성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45세, 출산을 선택하다
나가시마 씨의 이력을 보면 선구적인 여성으로 정년퇴직까지 걸어온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 합병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상사와 부하로 만나 다른 기업 문화와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단다. 또 같은 수준의 보고서를 내도 여자라는 이유로 질책받는 상황도 있었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남녀고용기회균등법(1986년 시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출산 후에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나가시마 씨는 44세에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고, 45세에 첫 출산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일이 너무 좋았던 그녀는 출산할 때까지 직장을 쉬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와 사별 후 혼자 지내던 어머니가 나가시마 씨의 육아를 도왔기에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1986~1991년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였다. 당시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투자 과잉으로 주택과 주식 가격이 나날이 높아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가시마 씨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는데, 이후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큰 손해를 보았다.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도 1억 엔 이상의 대출이 남아 있었어요.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죠. 경제 파산이 얼마나 큰일인지 경험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옆에서 설득했죠. 이후 7년 동안 월급과 보너스를 모두 은행 대출 갚는 데 썼어요. 두 번의 전직으로 받은 퇴직금도 고스란히 대출 상환에 썼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다시 시작한 커리어, 일본어 교사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한 그녀는 어떻게 일본어 학교 교사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걸까. 나가시마 씨는 연구소에서 퇴직 직전 정부 수탁조사 업무를 하다가 ‘일본어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흥미를 느껴 퇴직 후 바로 자격 시험에 도전했다고 한다. 일본어 교사 자격증은 문화청에서 추천하는 420시간의 강좌를 수강하면 취득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 전국 일본어 교사는 4만 1755명에 이른다. 독립행정법인 일본학생지원기구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일본어 학교는 약 600개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6만 명에 이른다.
나가시마 씨는 퇴직 후 6개월 정도 일본어 학교에 다니며 일본어 교육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800명 정도의 외국인 유학생이 다니는 도쿄 기타구의 JCLI 일본어 학교에 취직했다. 나가시마 씨는 대학교나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유학생반을 담당하고 있다. 비상근 강사로 일주일에 네 번 근문한다. 주 2회는 오전 11시 5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본어 지도를 하고 주 2회는 대학원 진학 희망자를 대상으로 오전 8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개별 수업을 진행한다. 연구계획서 작성법, 면접 연습, 소논문 지도를 담당한다. 이후 오후 2시까지는 추가 개별 지도를 한다.
“제가 담당하는 반은 진학이 목표여서 대부분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아요. 초급반에는 네팔,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유학생이 많고요.”
과거에는 한국 유학생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베트남, 네팔 유학생이 많다고 한다.
“요즘 일본으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을 보면 얼마나 상냥하고 착한지 몰라요. 중산층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할 때 태어난 아이들이라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가시마 씨를 만나러 JCLI 일본어 학교를 방문한 날, 학교 측에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필자도 교단에 섰다. 나가시마 씨의 말처럼 중국 유학생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눈빛이 보였다. 특강 후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장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열정이 엿보이는 시간이었다.
퇴직 후 얻은 보람
나가시마 씨에게 퇴직 후 일본어 교사 커리어를 선택해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제가 열심히 지도한 학생이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 저를 찾아와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껴요. 금융기관에서 40년 이상 일했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일한 경험, 인생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미래가 유망한 젊은 유학생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그동안 가르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교사로서 무척 뿌듯한 일일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연구 테마를 같이 고민하고 방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최고로 즐거워요. 학생의 연구 테마를 보며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 순간도 아주 설레고 신나죠. 그렇게 힘을 합쳐 대학원에 합격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아요.”
학생들과 교류하며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나가시마 씨에게 교사는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긴 휴가가 있다는 점이다.
“3개월의 수업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의 쉬는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에는 국내나 해외로 가고 싶었던 여행을 떠나요. 저에게는 너무 큰 즐거움이에요.”
노년에 잡은 행복의 파랑새
“지난달 은행 직원들 모임이 있었어요. 30여 명이 모였는데 여자는 저 혼자뿐이에요. 다들 70대가 됐으니 지금 뭐하는지 물었더니 절반 정도는 회사의 사외이사나 감사 일을 하고 있대요. 어떤 기업에 감사 관련한 일이 생기면 과거 금융기관에서 알고 지낸 동료나 선후배에게 소개한다더군요. 일종의 네트워크인데, 여자인 저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가시마 씨가 말했다.
“저는 금융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재미있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정년까지 했던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워요. 이 일은 취미를 살리는 일과 같아요. 한 달 평균 10만~15만 엔 전후로 큰 수입은 아니지만, 연금 외에 충분한 용돈 벌이도 돼요. 일본어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도 얻을 수 있고, 전철 타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요.”
나가시마 씨처럼 4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하며 어느 정도 저축도 해두었고 퇴직금도 있으면서 연금도 매달 받는 경우라면, 무리하게 일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 노후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시마 씨는 특히 여성 시니어에게 일본어 교사를 추천했다.
“여성에게는 일본어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정년 후에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많지 않고요.”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나가시마 씨에게 앞으로의 꿈이 있는지 물었다.
“일본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이제는 세계의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혼자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자립한 여성이라면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자 “지금! 지금이에요!”라며 주저 없이 말하는 나가시마 씨. 활짝 웃던 그녀의 목소리가 취재를 마친 뒤에도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일본의 버블 경제라는 파도에 휩쓸려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온 그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노년기에 이르러 젊은 유학생들의 꿈을 함께 실현하는 교사라는 행복의 파랑새를 잡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 아닐까!
중년의 인간관계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낀 세대’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부장급 위치인 그들은 베이비붐 세대 상사와 MZ세대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일하고, 가정 내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부양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는 양쪽에 악영향을 끼치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패션·음악 등 취향을 드러내며 ‘나’를 표현하고자 했던 그들. 지금의 ‘낀 세대’는 1990년대 20·30대를 보낸 X세대(1965~1979년)다. 대한민국에 등장한 첫 개인주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려했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현재는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 진출하던 시기 IMF 직격탄을 맞은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조직에 순응했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기성세대가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구독자 19만 명의 유튜브 채널 ‘유세미의 직장수업’을 운영하는 유세미 작가는 “낀 세대라는 표현은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본전을 찾겠다는 ‘본전의식’이 강한 X세대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마지막 세대다. 기성세대와 생각이 비슷한 그들은 후배인 MZ세대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MZ세대는 관계에 있어 당연히 개인이 중요하다. 그런 그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바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서 “이러한 괴리감이 X세대를 번번이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안 그랬는데’라며 억울함을 표현해봤자 세대 차이만 확인하고 마음만 공허해질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X세대 마음의 짐
1974년생인 김재완 작가는 2021년 X세대 헌정 에세이 ‘나 아직 안 죽었다’를 펴냈다. 어른들의 말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 일했더니 어느덧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된 그는 지난 인생을 돌아본다. 어느 날 갑자기 팀장에서 좌천되면서 공황장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다시 일어섰고, 그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동년배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X세대를 대표하는 김재완 작가와 소통 전문가 유세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2024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중위 연령은 46.1세다. X세대는 사회·경제적으로나 중심부를 차지하는 허리 세대다. 김재완 작가는 X세대 마음의 짐 첫 번째로 ‘부모에게 가진 부채감’을 언급했다. “X세대는 부모 부양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책임감이 크며,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다”라는 그는 부채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완 작가의 어머니는 고향인 경북 상주에 홀로 거주한다. 김 작가는 효도하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집에 가면 피곤해져서 괜히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그는 “나도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몇 년 전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오히려 좋아졌다. 자주 못 찾아뵙는 대신 한 번 갔을 때 얘기를 더 나누려고 하고, 전화도 자주 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더 잘 통하더라”라면서 “표면적으로는 불효자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효자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대홍기획 데이터 인사이트 팀의 책 ‘세대 욕망’에서는 “X세대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있다면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관념을 형성한 것”이라면서 “X세대는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로망을 대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중심주의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은 부모에게 경제적이든 정서적이든 충분히 지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에게는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와 관련해 김재완 작가는 “우리는 자녀 교육과 관련해 오만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짚었다. 39세에 결혼해 딩크족이라는 그는 다소 조심스러워하면서, 사회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세상의 풍파로부터 애들을 막으려고 할 게 아니라,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을 전했다. 유세미 작가는 자녀와의 소통법에 대해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가 아니라,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에 대해 얘기해야 가족 관계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재완 작가는 회사에서는 ‘격차감’을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봤다. ‘라떼는 말야’(나 때는 말야)라면서 꼰대같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 김 작가는 “핵개인화 시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MZ세대 후배들과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면서 “책, 야구, 고양이 등 무엇이든 좋다. 그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파악하고 얘기를 나누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유세미 작가도 조언을 전했다. MZ세대는 과거와 달리 직장 상사를 명령과 통제하는 윗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코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유 작가는 “자신의 역할을 코치라고 정립하면, MZ세대를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훨씬 수월해진다. MZ세대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상사에게 마음을 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나에게 달린 솔루션
낀 세대가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김재완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라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전했다. 김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 번째는 군대 제대했을 때, 두 번째는 결혼했을 때, 세 번째는 43세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을 때다”라고 밝혔다. 당시 ‘글을 써보라’는 아내의 추천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역사 관련 글을 쓴 그는 딴지일보에 연재하게 됐고, 이후 책도 펴냈다. 그러면서 ‘작가’라는 부캐(부캐릭터)를 갖게 됐고,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본캐는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다 선택당했지만, 부캐는 내가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김재완 작가는 60대가 되기 전에 부캐를 만들 것을 추천했다. 사실 김 작가는 한 달 전 퇴사했다. 회사 생활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잘했지만, 더 늦기 전에 꿈을 펼쳐보고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올해까지는 여유롭게 글을 쓰며 부캐가 본캐가 될 수 있을지 알아볼 계획이다. 김 작가는 “앞으로는 70대, 80대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 이것저것 해보면서 찾아야 한다”면서 “내가 행복해야 가정에도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인간관계도 좋아진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취미활동 또는 봉사활동 등을 하다 보면 마음 맞는 친구가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유세미 작가는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관계 맺기에 매달리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작가는 “별 의미 없는 모임, 단톡방, 각종 경조사를 챙기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들을 더 귀하게 챙기고 돌봐야 한다”라면서 “나이 들수록 넓고 얕은 인맥보다는 좁고 깊은 인맥이 중년의 안정감과 만족감에 더 영향을 끼친다”고 인간관계 솔루션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중심이 ‘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유세미 작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관계의 스트레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신경 쓰면서부터 발생한다. 효도하는 자녀, 자랑스러운 부모, 일 잘하는 부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낀 세대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관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만약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고 스스로 판단된다면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작은 목표라도 세워보세요. 목표를 달성하면서 성취감을 느껴보는 거죠. 점점 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남에게 휘둘리면 재미없습니다. 휘둘리면 그게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죠. 그것을 피하려면 타인의 평가나 시선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일상의 방식을 고수하세요.”
유세미 작가의 상황별 꿀팁
회사 스트레스, 집에 가져가지 않기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혼자 삭히다 보니 화병이 생기죠. 그렇지만 스트레스를 집에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임원한테 매출 때문에 온갖 모욕적인 잔소리를 들은 김 부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는 저녁 먹는 와중에도,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속에 품어온 검은 봉지를 열어 회사 쓰레기를 봅니다. 임원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나한테 실망해서였을까? 아니면 나가라는 시그널인가? 별생각을 다 하죠. 그러나 그 시간에 임원은 뭘 하고 있을까요? 예능 프로그램을 신나게 웃고 떠들며 보다가 기분 좋게 잠들었을 겁니다. 김 부장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못 한 채 말이죠. 결론은 회사 쓰레기를 가슴에 품고 집에 와서 꺼내보고 또 꺼내본 김 부장만 손해라는 겁니다. 회사 쓰레기는 회사에 두고 오세요. 집에 와서 회사에서 있었던 부정적인 일이 생각나면 ‘아, 내가 또 회사 쓰레기를 가지고 왔구나’ 떠올리고 거기서 멈추는 마음 훈련을 해보세요. 한두 번으로 되지는 않지만 자꾸 연습하면 회사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게 됩니다. 회사와 집을 분리하는 연습이 스트레스를 막는 데 가장 좋습니다.
신뢰받는 ‘일잘러’식 말하기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직장에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상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직장 생활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말하세요. 누가 들어도 오해하지 않게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세요. 두괄식으로 표현하면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에게 보고할 때 ‘상무님, OO업체 미팅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3가지 정도로 묶어서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둘째, 애매하게 피드백하지 마세요. 핵심과 근거를 들어 명확하게 이야기하세요. 셋째, 시니컬한 말투는 버리세요. ‘그거 어차피 안 돼’, ‘하기는 하겠는데 되겠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누가 일하고 싶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개선할 수 있을까’,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복길이’ 이미지에 가둬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를 벗기 위해 김지영은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덧 데뷔 30년 차 배우가 됐는데, 이제는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연기학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으며, 삶을 관망하는 여유도 생겼다. 유명인과 일반 대중의 관계는 ‘인기’로 증명되는 터. 그는 “인기란 야속한 것 같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면서 양면성을 언급했다. 현재는 큰 인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들한테 인기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희귀병을 앓아 부모님 속을 썩였다고 생각하는 딸이기에 자식을 향한 애정이 더욱 특별하다.
‘전원일기’와 가족의 탄생
MBC ‘전원일기’와 복길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복길이 이미지 때문에 다른 역할을 못 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도 많이 보고, 사이코패스 악역, 유흥업계 인물 등 갖은 역할에 도전해봤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복길이로 인해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나이 들고 보니 배우로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마운 작품이죠. 그리고 좋은 선배님들과 호흡하면서 연기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전원일기’는 결국 저의 학교였다고 생각해요.
SBS ‘토마토’에서 악역 연기를 펼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가 전성기였을까요?
MBC에서 ‘그대 그리고 나’(1997년)로 신인상을 수상한 후라 자신감이 올라와 있었죠. 악역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겠단 생각에 출연했고, 촬영도 재밌게 했죠. 광고도 그때 제일 많이 찍었어요. 그렇다고 그때를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번 진심을 다해 연기해서 작품 할 때가 늘 전성기라고 느껴요.
남성진 씨와는 동료에서 남편이 된 케이스인데, 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전원일기’를 8년간 촬영하면서 정말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냈죠. 이후 남편의 고백으로 사귀었는데 연애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어요. 그중 5개월은 제가 중국에서 촬영했죠.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 없는데 바로 결혼하려니 조금 무섭고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우정과 사랑을 구분 못 한 것이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사람, 내 가족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면서 사이가 깊어졌고, 고마워하고 있어요.
부부간 소통은 어떻게 하세요?
저희 부부는 성격이 극과 극이라서 지금도 종종 싸워요. 남편이 화가 많고, 버럭하는 스타일이에요. 불 같은 성격이죠. 그래서 말다툼으로 번지는데, 다행히도 저희 둘 다 금세 잊어 버리곤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의견 차가 커도 남편한테 ‘고쳐줬으면 좋겠어’, ‘맞춰줘’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지만, 내용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요. 그래서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가 될 때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려고 해요. 특히 아이 문제로 대화할 때는 아이의 생각을 가장 먼저 수렴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죠.
얘기를 나눠보니 아드님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이가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제 꿈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네 삶이 너무 없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이 옆에 많이 있어 주려고 노력했어요. 평소에는 편지나 메모를 남겨서 마음을 표현했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죠. 그런데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와 놀아줄 시간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과거 방송에서 보니 아드님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던데요. 3대 배우 가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부모님, 조부모님한테 먹칠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더라고요. 그 부담감은 당연한 것 같아요. 저도 시부모님이 배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남편은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았죠. 우리 아이는 그 부담이 배로 커진 거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연기가 정말 하고 싶으면 해라. 너의 색깔을 찾으면 된다’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배우 김용림 씨와의 고부 관계가 특히 주목받는데요.
굉장히 순탄한 고부 관계라고 생각해요. 같은 분야에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세요. 제가 종갓집 며느리인데 촬영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낼 때도 있고, 촬영이 늦어져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갈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어머니께서 이해를 넘어 ‘얼마나 힘드니’라고 위로해주시죠. 그런데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섭섭했던 부분을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한 점을 얘기하기도 하죠.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이 20년 이나 되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어떠신지 알겠더라고요. 전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달려갑니다.(웃음)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부모님에게는 어떤 딸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희귀병으로 몸이 약했으니까 늘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었어요.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몸도 안 좋은 애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겠죠. 그런 마음을 아니까 창피하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어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느 순간, 너무 우리 애만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못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회가 남지 않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희귀병 투병으로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겠어요.
등에 혈관이 엉겨 붙는 혈종이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가족들이 저를 살려보겠다고 별걸 다 해봤는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유서를 써놓기도 했어요. 말로 전하지 못한 얘기들을 남겨놓기도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수술 후 완치돼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어진 삶이 감사하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찌 보면 배우 활동이 체력이 강해진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제 50대가 되었는데, 중년 배우의 삶은 어떤가요?
20대 때는 작품을 한 번에 2~3개씩 하면서 바쁘게 보냈어요. 결혼 후인 30대, 40대 때 삶도 안정되고, 연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됐죠. 5년 전쯤부터 선배로서 안주하고 싶지 않고, 변화와 발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죠. 선배님 또는 감독님이 부르면 예술 영화도 카메오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예술대학교 연기예술과 학과장을 맡은 지도 7년이 됐네요.
저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선배라고 생각해요. 먼저 연기한 사람으로서 습득한 기술을 알려주려고 하죠. 오히려 제가 열정을 수혈받고 있어요. 사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아이도 돌보면서, 학교 일도 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학생들과의 연계성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김지영에게 ‘관계’란 무엇일까요?
저는 소심하기도 하고, 관계에 예민한 편이에요. 지인들에게 마음 표현도 잘 못 했는데, 이제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가려고 해요.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죠. 그런데 중요한 건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좋은 관계도 성립되고, 많은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또 너무 애쓰지 않아야 재밌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Bravo Question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사한 마음 아닐까요. 저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마음을 간과하느냐, 신경 쓰고 있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한데, 그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렇게 힘이 큰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하나하나 쌓여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고, 제가 하고 싶은 일도 하나하나 이루어온 거죠.
‘뮤지컬계 여왕’이 오랜만에 귀환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삶을 다룬 뮤지컬 ‘마리 퀴리’로. ‘엘리자벳’, ‘명성황후’,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통해 공주ㆍ황후 역할 전문 배우로 장기 집권하고 있는 김소현(49). 마리 퀴리는 그동안 맡아온 캐릭터와 결이 조금 달라 보인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고, 피ㆍ땀ㆍ눈물 어린 노력으로 성공을 이룬 주체적인 캐릭터다. “마리 퀴리는 평생 라듐(방사성 원소)을 찾고자 노력했어요. 모두에게 그 라듐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그게 ‘뮤지컬’일 테고요.”
“공주 역할 전문 배우요? 하하. 다른 역할도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주목받은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요. ‘마리 퀴리’도 새롭죠. 사실 스케줄 때문에 출연을 몇 번 거절했어요.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고요. 그런데 연출진이 배우들 상견례 전날 밤 또 연락을 주신 거죠. 완전 변신할 수 있는 작품을 시도도 안 해보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김준수(가수ㆍ뮤지컬 배우) 소속사 대표님에게도 의견을 물어봤죠. 그랬더니 고민하지 말고 바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까스로 ‘마리 퀴리’를 하게 됐습니다.”
김소현은 2021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이후 작품 활동이 없었다. 임신과 출산 때보다 더 길었던 2년의 작품 공백기. 배우 생활이 끝날까 봐 불안했고, 복귀작에 대한 고민도 컸다. 그렇게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정된 복귀작이 바로 ‘마리 퀴리’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 퀴리’는 왜 새로운 도전이었을까. 먼저 김소현은 과학 용어가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져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유튜브에서 과학 관련 정보를 샅샅이 찾아보면서 대사가 입에 붙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또한 ‘명성황후’같이 강단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써보지 않았던 목소리와 연기 톤을 써야 했다. 이에 따른 어려움과 부담감이 있었던 것. 그런데 연기를 할수록 마리의 인간적인 지점을 찾게 되었고, 그 매력에 매료된 상태다.
“‘마리 퀴리’는 단순히 과학자 얘기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얘기예요. 나의 목표, 우정, 사랑 등 많은 것들이 뮤지컬 안에 녹아 있어요. 공연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관객들이 많은데, 저도 매번 울어요. 특히 친구 안느가 마리에게 마지막으로 ‘애썼어 마리, 참 충분한 삶이었어’라는 대사를 할 때 눈물 콧물 다 뺀답니다.(웃음) 연기를 할수록 라듐을 향한 마리의 집념과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인 면모를 닮고 싶어요.”
서울대 집안 엄친딸
“돌이켜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2001년 봄 김소현의 인생은 단 하루 만에 180도 바뀌었다. 당시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서울대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친한 선배의 추천으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 크리스틴 다에 역으로 오디션을 봤다. 사실 뮤지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며칠 뒤에는 이탈리아 유학을 위한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소현의 생각과 달리 ‘오페라의 유령’ 연출진은 그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당시 소프라노 발성을 할 줄 아는 배우가 필요했는데, 거짓말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소현은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했고 이후 2009년 재연, 그리고 ‘팬텀’까지 무려 20년간 크리스틴 역을 연기하게 된다. ‘김크리’(김소현+크리스틴), ‘한국의 크리스틴’ 등의 수식어가 그의 존재감을 입증해준다.
“‘오페라의 유령’은 저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작품이죠. 인생을 바꿔준 작품이기도 하고, 남편 손준호 씨를 만나기도 했으니까요. 만약 그날 오디션을 안 봤다면, 아마도 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때도 가족들은 물론 주변에서는 제가 ‘오페라의 유령’만 하고 본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늘 행복합니다. 한 역할을 계속 연기해도 지겹지가 않아요. 매번 그 역할을 사랑하면서 연기하기 때문이죠.”
혜성처럼 등장한 김소현은 뮤지컬 업계의 판도를 바꾸었다. 정통 성악으로 노래를 불러 뮤지컬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을 자아냈다. 여기에 가족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엘리트’ 꼬리표가 더욱 선명하게 따라붙었다. 김소현은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지만,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꼭 얘기가 나오니까 마치 내가 자랑하고 다니는 것같이 보일까봐 민망하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김소현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서울대 성악과 출신이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다. 특히 아버지 김성권 씨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장내과 명예교수다. ‘싱겁게 먹기 실천 연구회’ 설립자이기도 하다. 김소현은 종종 아버지와 TV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하며 서로의 행보를 응원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먹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집에 라면이 없었고, 과자도 잘 안 사주셨어요.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결혼하고 먹은 라면이 평생 먹은 것보다 많았어요.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제일 존경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삼남매를 키우셨는지 알게 됐고, 감사한 마음이 더 커졌어요. 제가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면, 남편이 섭섭하다고 할 정도예요.(웃음)”
같이 활동하는 유일무이 뮤지컬 부부
김소현은 남편 손준호를 ‘오페라의 유령’ 재연 때 만났다. 라울 역을 맡은 손준호는 극에서 크리스틴을 사랑하듯이 실제로 김소현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러나 김소현은 여덟 살 연하 후배의 구애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준호 씨는 데뷔작이었고, 제가 첫 상대역이었어요. 극중 캐릭터를 사랑하는 건데, 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다시 잘 생각해보라면서 마음을 거절했죠. 그런데도 계속 아니라고 하면서 다가오더라고요.”
두 사람은 결국 2011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뒤로도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명성황후’ 등의 작품에서 함께 연기하며 유일무이 뮤지컬 부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김소현은 “‘명성황후’의 고종과 명성황후처럼 작품에서 부부 연기를 할 때가 있다. 공감도 잘되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다”고 전했다.
“배우로서 준호 씨를 높이 사는 부분은 흔들림 없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점이에요. 그러니까 늘 노래나 연기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거죠. 준호 씨가 처음 데뷔하던 날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제가 첫 공연 첫 상대역이었는데 하나도 떨지 않고 잘하는 거예요. 또 그 단단함에서 오는 여유가 있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친구도 많답니다.”
부부가 같은 직업을 가진 것의 최대 장점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김소현은 아들 주안 군을 임신했을 때 남편에게 특히 고마움을 느꼈다. 배우로서 느끼는 불안함을 십분 이해한 손준호는 아내가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결혼을 하면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고…. 역할이 되게 많아지잖아요. 진짜 나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죠. 나의 시간과 일의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임신했을 때 경력 단절이 되어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준호 씨가 ‘내가 아이를 잘 키울 테니까 먼저 복귀해라’면서 배려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주안이를 낳고 1년도 안 돼서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때 태어난 아이, 주안 군은 SBS ‘오! 마이 베이비’에서 사랑스럽고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벌써 열한 살로 폭풍 성장했는데 혹시 부모를 따라 뮤지컬 배우를 꿈꾸지는 않을까. 김소현은 “주안이가 ‘절대 싫다’고 한다. 그리고 비행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더불어 “공부 잘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면 물론 좋겠지만, 예의 바르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엄마의 마음을 전했다.
22년 넘은 커튼콜의 감동
김소현은 매년 12월 4일 팬들과 함께 데뷔일을 기념한다. 크리스틴으로 무대에 오르던 첫날, 그 역사적인 날이다. 최근에 22주년을 맞았다. 시간이 쌓이면서 호평도 늘어갔고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2008년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로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명성황후’로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2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특별했던 날도 있지만, 김소현은 무대에 선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무대에서 특히 관객에게 인사하는 ‘커튼콜’ 때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사실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커튼콜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오페라의 유령’ 첫 공연 때 커튼콜을 처음 경험해봤는데, 너무 벅찬 감동을 느낀 거죠. 매번 커튼콜 때마다 감동이 새롭게 오는 것 같아요. 커튼콜은 관객분들의 답을 얻는 시간이잖아요. 꼭 환호성과 기립박수가 터지지 않더라도 관객분들과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마음이 전달된다고 느껴요.”
새해를 맞아 계획을 묻자 김소현은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 않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목표를 두면 너무 힘이 들어가고, 계획대로 잘 안 되면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에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소현은 ‘내일이 없을 정도로’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연습하기로 유명하다. 그렇게 변치 않는 노력을 기울이기에 커튼콜의 감동이 20년 넘게 지속됐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연기에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게 되게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분들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얻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특히 진심이 중요하죠. 진정성이 없으면 나는 그냥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노래하고 연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때는 스스로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일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습니다.”